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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다니는 윗층 아이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 실내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행동은 제지해야 할까? 그런 행동은 이웃에게 폐를 끼치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약해지는 요즘 세태에 남들이야 괴롭든 불쾌하든 내 아이는 자기하고 싶은 대로 키우겠다는 태도도 문제이지만, 아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윤리 기준 중심으로만 대하는 태도도 큰 문제이다.

 

물론 열 살쯤 먹은 애가 실내에서 쿵쾅 뛰어다니면 잔소리를 해야 한다. 아래층 이웃이 얼마나 괴롭겠냐며, 타인을 위해 너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다섯 살이라면? 애매하긴 한데 살살 타이르면 좋을 듯 싶다. 세 살이라면 집안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제지하기보다는 매트 깔아주는 대처가 바람직하다.

 

인간은 지구의 모든 생명 종 중에서 가장 큰 격차로, 성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불완전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어느 정도냐면 태어난 지 20년이 지나도 뇌가 다 자라지 못한다. 인간의 뇌는 파충류도 갖고 있는 감정뇌는 상당히 자란 채로 태어나지만 사회 생활을 위해 진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도의 사고와 성찰이 이루어지는 부위는 성인에 비해 작다. 윤리적 성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태어나서 서서히 가능해지는 뇌로 성장한다.

 

사회 윤리 의식을 버리고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기는 쉽지 않지만 모든 성인이 해봐야 하는 관찰이다. 이런 관찰을 여러 번, 상당히 긴 시간 해보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그 태도는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윤리 의식의 결여이다.

 

다섯 살 미만의 아이들은 모여 있어도 각자 논다. 각자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조정해서 하나의 규칙에 다수가 참여하는 놀이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회성이 취약하다. 사실은 사회성을 지닐 능력이 아직 없는 상태이다. 이런 아이들한테는 성인들이 갖는 윤리 의식이 자리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에게 성인들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학대가 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주로 부모와 상호작용하면서 윤리 의식을 기른다. 그런데 어떤 원리를 받아들인 다음에 이 원리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는다. 반복하는 경험으로 행동방식을 결정한다. 행동 원리는 타고난 자질에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어린 아이에게 타인을 배려하라는 말을 백 날 해봐야 자신의 원리로 삼지 못한다. 뛰면 엄마가, 아빠가 싫어하는구나라고 그냥 그렇게 입력될 뿐이다. 생존 자체를 부모에게 의지한 어린 아이는 부모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얌전해지거나, 부모에게 관심을 더 받으려고 더 뛰어다닌다. 어쨌든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이것이 윤리의식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행동의 제재는 타인을 배려하라는 윤리 의식이 아니라, 부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행동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변의 반응으로 행동 규범을 만든다. 그런데 그 행동 규범에 사회 윤리 의식이 덧붙여지는 시기는 꽤 훗날의 일이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를 대할 때, 특히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행동 방침을 심을 때 포기하는 무언가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집안에서 뛰지 말라는 가르침은 번잡한 식당에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가르침과는 아주 다르게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육아 방식이다. 왜냐하면 세 살 언저리의 아이라면 뛰어다니면서 몸을 만들기 때문이다. 근육뿐만 아니라 훗날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하는 신경계를 키우는, 반복적인 일상이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에서 아이가 뛰어다니면 아래층은 괴롭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생활 구조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장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아파트 10층에 사는 세 살 짜리 애한테 나가 놀라고 할 수 없다. 양육자가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놀 때마다 항상 놀이터에 함께 나갈 수 없다. 저렴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층간 소음에 무능하다. 흙마당 단층집에 자기집, 이웃집 아이들이 바글하다면, 뛰어다닐 수 있는 아이는 밖에서 뛰어다니게 내버려두면 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 특히 도시에서는 행운이다.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려면 건물의 구조가 층간 소음을 상당히 줄이고 자동차와 사람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파트 단지든 다세대 주택 단지든 공동체가 자리잡아야 한다. 서로 알고 지내고 돌봐주는 동네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집 안팎을 드나들며 자기들끼리 논다. 이러한 지향을 전제로 우리가 지녀야 할 윤리 규범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윗층에 아이들에게 이웃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라고 요구하는 태도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윤리 의식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산다. 대부분의 인간 생활은 개인이나 가정에 한정하기 어렵다. 육아를 온전히 부모, 주양육자에게만 책임지우는 분위기는 공동체주의에 반하는 개인주의에 기인한다. 자기에게 불편을 주는 주변의 행동을 일단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육아에서 부모, 주양육자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지만 주변 이웃도 육아의 수고를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층간 소음이나 공공장소에서 듣는 아이 울음 소리를 꽤 많이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윗집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음을 감당하기 힘들 수 있다. 참다가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동네 아이들이 즐겁고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환경도 갖추지 못했다. 성능 좋게 잘 만든 매트는 진동을 상당히 줄여주지만 한계는 있다. 건물 상태나 예민함에 따라서 괴로움도 다르다. 이런 현실에서는 결국 상호 협상이다. 뛰어다니는 윗집의 어린 아이들에게 이웃을 배려하는 윤리 의식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시간 대를 정해 보자. 그리고 윗집 부모에게 이 때는 감당하기 힘드니 신경 써 달라고. 당연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매트를 설치한다거나 늦은 시간에는 뛰어다니지 않게 여러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정의당 상무위원회 사태


2005년도 일이 생각난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 공공연맹 등과 함께 제작했던, 일명 ‘비정규직 포스터’. 카피가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인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김원정 씨가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전화 돌리던 기억이 난다. 포스터 배포를 못하게 하려고 당과 노조 여러 단위의 여성위원장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이 날의 일과 노동계 포스터에 대해서는 내가 10여 년 전에 글을 쓴 바 있다.


<노동계 뽀스떠(http://blog.jinbo.net/diary/66)>

 

1.


당시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포스터의 이미지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정의당 상무위원회 사태’(정의당 상무위가 주장하듯이 ‘문예위 논평 및 메갈리아 사태’가 아니다. 사고 친 건 상무위니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의 언어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태도가 남성 중심적 태도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여성 중심적 표현’이 무엇인지 이미지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여성 중심적 표현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왜 표현이 쉽게 남성 중심적으로 흐르게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여성 중심적 이미지와 언어를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다. 어렵다. 데보라 카메론의 <페미니즘과 언어 이론>(한국문화사, 1995)에서 인용한다.

 

“<비성차별적> 언어의 지지자들은 언어를 현실을 가능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상하기 위해서는, 남성적 단어를 중립적 단어로 환치함(chairman→chairperson 따위: 인용주)으로 해서,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자를 포함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관계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성차별적인 이상, 이 현실에 중립적인 단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어란, 이것은 성차별적, 저것은 중립적, 또 저것은 페미니스트적이니 하는 식으로 언어의 국제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최종적 판단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번역이 좀 웃기긴 한데, 어쨌든) 이미 언어도 성차별적으로 물들어 있다는 얘기다. 위의 책에서 계속 인용한다.

 

“남자의 단어가 힘, 지위, 자유, 독립을 함의하는데, 전에는 그것과 평행해서 쓰이던 여자의 단어는 지금은 열성, 의존성, 부정성, 성을 함의한다.
이를테면, bachelor(독신 남성)(자신가이며 독립해 있고 성적으로 자유로운)의 반어는 spinster(독신 여성)(추하고 성적 매력이 없고 좌절된)이다. (생략)
의미의 불평등의 그 밖의 예로서는, governor(힘센 통치자)와 governess(어린이의 일을 돌봐 주는 가난한 여자)라든지, master(유능한 힘센 남자)와 mistress(성적,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여자)나 tramp(부랑자)와 tramp(매춘부)가 있다.”

 

언어의 의미 구조가 성차별적으로 공고하므로 몇몇 단어 바꾼다고 언어의 성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의 의미 구조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방법은 있다. 그래서 위의 저자는 사람을 총칭하는 모든 대명사는 she(그녀)로 바꾸어 책을 서술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가 누구지? 생뚱맞게 갑자기 여자가 등장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후에, ‘아차, 그냥 사람이지.’ 한다. 저자는 이러한 서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즉 모든 부정 혹은 총칭적 지시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나 이외에도 몇몇 언어학자들이 항시 이런 실천을 하고 있다. 이것을 기묘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건설적인 언어를 통해 적극적 차별을 실천하고 있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남자에게 he라 말하거나 쓰거나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여자인 나에게 she라 말하거나 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비남성 중심적 세계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인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처럼 건설적인 언어가 세계를 바꿀 것이라느니 하는 그런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가 she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해서, 지금보다 많은 여자들이 과학을 전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she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의 편견에 직면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식을 높일 수는 있을 것이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도만큼 현 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 위 책의 저자야 교양 없어 보이면 안 될 터이니 참으로 얌전한 방식으로 편견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의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교양 따위는 집어치운 불쾌한 언어를 사용하는 점과는 다르다. 메갈리아와 워마드도 단일대오는 아니겠지만, 그들은 왜 상쾌함을 짓밟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장 폭력적인 언어는 성과 관련된 상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친놈’과 ‘미친년’이 다른 의미이듯이, ‘씨발놈’과 ‘씨발년’은 완전히 다르다(내가 자대에 배치되어서 가장 먼저 들은 욕이 ‘씨발년’이었다, ‘씨발놈’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타부어는 남자의 신체보다 여자의 신체를 가리키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cunt(여자 성기)라는 말은 prick(남자 성기)보다도 강하기 타부시 되며, 타부로 되어 있는 유의어도 prick보다 많다. (생략)
여자 전체를 성의 먹이로 보는 ass(엉덩이), tail(꼬리), crumpet(둥근 빵), skirt(치마), flash(섬광)(이런 의미가 전이해서 성교나 성교의 대상으로서 여자를 가리킨다)와 같은 단어들은 있으나 이에 해당하는 남자의 단어는 없으며, slag(쓰레기)에서 전이해서 <몸가짐이 나쁜 여자>, tart(<과일이 곁들이 빵>에서 전이해서 <매춘부>), nympho(<님프>에서 전이해서 <여색정증>), pricktease(남성 성기를 조롱하는 의미로, 성교에 있어서 남자를 흥분시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끝까지 가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에 대한 모욕어)에 해당하는 남자의 단어도 없다.
아마도 이것은 남자에게만 관용한 이중 기준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성교가 이성 간에 행해진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는 성적 욕망이 없다고 여겨지므로, 여자가 욕망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내거나, 남자의 욕망에 응하지 못하면 비난당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들이 한국어에 없을 리 만무하고, 이 모욕적인 언어를 뒤집어보자는 의도가 메갈리아, 워마드의 언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언어로 지목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성적 주체에서 대상으로 바뀌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옆에서 듣는 사람도 기분 나쁠 만하다. 이렇게 기분 나쁜 표현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집단)이 채택할 수는 없겠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반대로 메갈리아의 언어를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를 규탄한다면? 그러니까 우리 언어에 깊이 각인된 성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어를 뒤집어서 남성을 향해 사용하는 것을 억압하는 것은 어떤가? 이는 우리 언어의 차별적 구조를 드러내는 행위를 막는 것이다. 우리 언어가 남성 중심적이므로, 그 남성 중심적 언어를 지키는 꼴이 된다.

 

물론 메갈리아와 워마드에는 또 다른 소수자들을 비하하는 내용들이 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런데 메갈리아에서 시작한 미러링이 다른 소수자들을 모욕하는 내용을 포함한다고 해서, 메갈리아의 전략이 곧 다른 소수자를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용의 맥락이 있다. 어떤 맥락에서 메갈리아의 유저가 장애인을 심하게 비하했다면, 그리고 그 유저에게 환호하는 여럿이 있다면, 그들의 바로 그 행위를 비난하면 된다. 한편으로는, 소수자들의 경우보다 복잡할 수 있는데, 노인이나 역사적 인물들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는 행위가, 언뜻 생각이 드는 것처럼 아주 질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것이 전략적으로 계산된 행위가 아니고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배설 행위라 하더라도, 위대한 남성과 평생 여성을 폄하하며 살아온 늙은 남성을 조롱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실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채택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태도는 결국 메갈리아의 기본적인 언어 사용(남성을 향한)을 지켜주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여성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 더 많이 보여주게 된다. 확실히 데보가 케메론보다 과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정의당 상무위원회는 남성 중심적 언어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행위를 억압하고 있다. 정의당 상무위가 스스로 확인한 입장은 문예위 논평이 메갈리아의 언어를 지지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정의당 문예위는 메갈리아의 티셔츠를 구매한 한 성우의 노력이 게임에서 삭제됨을 비판했다. 그 성우는 메갈리아가 사용하는 SNS의 계정이 삭제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티셔츠를 산 것이다. 정의당 상무위는 메갈리아의 언어 전략이 사용될 수 없도록 열심히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2.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의 언어에 경기를 일으킬까? 그 역겹고 혐오스런 표현이 싫기는 하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정 역겹고 혐오스런 말과 행동은 전쟁광과 군국주의자, 신자유주의자와 재벌, 돈에 미친 자들과 별별 권력자들에게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는 짓들이 그토록 싫어서 분노하고 데모도 하고 농성도 하고 글도 쓰고 서명도 하지만, 경기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추정컨대, 작은 불의에 더 가혹한 것이 세상 이치라서 그런가 싶다. 전쟁의 언어는 핵실험과 사드 배치로 현실이 된다. 하지만 메갈리아가 떠들어봐야 한국 남자들이 벌레가 되지는 않는다. 메갈리아의 언어는 현실을 폭로하는 언어, 한편으로는 배설의 언어이지 현실을 바꾸는, 의지를 실현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 말고는 힘이 없는 언어이다. 작은 불의에 가혹하면 아주 쉽게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다른 추정은 메갈리아의 언어가 사람의 감정을 표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감정은 쉽게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마련이다. “나 상처받았어!” 진보정당의 윤리는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적인 힘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3.

 

정의당 문예위 논평에 항의하며 정의당을 탈당한 사람들은 정치적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메갈리아의 활동에 조력한 그 성우를 배제하는 조치가 게임업체로서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그 게임업체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논쟁적인 주제이므로 문예위 논평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다. 하지만 탈당하는 행위는 그 게임업체의 아이디를 삭제하는 것과 똑같다. 돈 냈으니 자기가 원하는 서비스를 다오. 자기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않으니 더 이상 돈 못내. 이들은 정당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정당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고민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공동체 경험이 일천한데다가 진보정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냥 징징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수 백 명이 넘는다는 것은 정의당이 당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정당임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문예위 논평이 문제가 있다면 박 터지게 싸워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내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조직원은 박 터지게 싸우려는 의지도 없고 조직에는 룰도 통로도 없다면 당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싸울 의지와 방법이 없다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문예위 논평을 내린 상무위를 비판한 사람들이 코너에 몰렸다. 상무위는 자기들이 젠더TF라고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당의 입장을 정해 놓았다. 젠더TF는 상무위의 입장을 사실상 합리화하는 논리 말고는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없다. 웃긴다. 이젠 ‘니들이 나가라!’인가?

 

 

부족함과 초라함

 

예전엔 몰랐는데, 언제부터인가 말걸기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한해 한해 지날 때마다 부족함을 더 많이 알게 된다.

오늘 문득 그 부족함 때문에 초라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족함 때문에 초라하게 살아야 할까?

사람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니  갖추고 있는 걸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런데 자기에 대한 마음은 쉽지 않다.

부족함보다는 초라함이 우울하고 불행하게 하고 있다.

 

 

오랜만에 홍아

 

2013년 마지막 날 석모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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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모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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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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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아의 춤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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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7.  몽산포 해수욕장에서

 

공연 중인 비극

 

역사는 훗날 이 시절을 어떻게 평가할까? 지난 20년 넘게 '비판적 지지'라 불렸던 부르조아에게 투항하는 노선이 수없이 많은 변종을 만들어냈음에도 역사는 이를 평가하지 않았다. 30년 세월도 평가하기엔 불가능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마땅한 평가가 좌절된 이 시절 동안 좌파들은 그들의 이념을 실험할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그들의 이념을 실험할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 이 또한 역사는 평가하지 않았다.

 

2011년 진보신당이 겪는 사건은 2008년 민주노동당과의 분당보다 더 큰 갈등과 상처를 낳고 있다. 이 지각 변동은 단층 몇 개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덩어리의 땅을 지하로 묻어버릴 것만 같다. 온갖 폐기물로 뒤덮인 오염된 땅덩이라면 몇 개라도 마그마 속으로 녹아버리면 좋으련만, 주저 앉을 땅은 푸른 새싹들이 가득한 산과 들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사건은 왜 시작되었을까?

 

소수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하는 것이 정당한 체제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부르조아의 편이다. 지금은 왕과 귀족의 시대가 아니니 당연히 부르조아의 편일 수밖에 없다. 주사파는 이념적으로 부르조아의 편이다. 그들의 조직은 부와 권력을 소수만이 제어한다. 거대 자본의 세련된(!) 수법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이 노조에서 노동권을 외치고 빈민촌에서 평등을 외칠 때도 그들은 그렇게 했다. 주체사상은 부와 권력의 독식을 합리화하는 이념이니 그들이 이 이념에 따른다면 당연히 현실에서도 저열한 부르조아의 수법을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그들의 이념에서만 나온 것일까?

 

한국에서는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던 좌익소아병자들이 진보신당에 만연하다. 그들도 과연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 중 일부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좌익소아병자들은 그런 이념을 책과 문서로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권력 독식에 온 정열을 바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념과는 다른 층위의 실천 지침이 있는 것 같다. 사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파악이 안 된다. 아마도 인간 본연의 권력을 향한 의지인지 모르겠다.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달콤하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환희인지 알 수 없다. 부르조아는 이 환희를 언제나 환영한다. 권력은 수백년 전부터 그들의 것이니까. 하지만 좌파의 사고는 이와 긴장감을 지녀야 한다. 잡았던 권력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좌익소아병자들은 그들의 머릿속 지향과 권력욕 사이에서 정체성을 상실해 무능한 천덕꾸러기들이 되었는지 모른다.

 

주사파는 상처에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념적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있는 일이 다르지 않다. 좌익소아병자들은 상처에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심리적 상처로 정신분열에 어울리는 이념분열을 앓고 있다.

 

현실을 장악한 이데올로기와 지향하는 이념이 갈등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언제나 성찰해야 하는 좌파들에게는 힘든 시절이다. 그들에게 과연 행복한 날이 올까도 의심스럽다. 이들이 불행한 건 역사가 불행해서이다. 이들이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길 바란다. 당장이야 이런 노선에 서 있고, 저런 노선에 서 있어도 그들의 머릿속에 뿌연 밑그림으로 남아 있는 실험 설계도는 가치 있는 것이다. 상처가 더 깊어지면 아직은 어설픈 그 그림도 지워버릴 것이다.

 

슬픈 좌파 옆에는 이상한 종교 집단도 아니고 정신나간 사람들도 아닌, 이 사회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권력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강력한 패거리가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 또 다시 결집하고 있다. 저 건너편이 아닌 바로 옆자리에서.

 

 

권력의 법칙 앞에서 평등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이념이었을지 모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든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든.

 

나는 왜

 

말걸기는 왜 재능도 없는 일을 하게 될까?

돈 버는 일마다 재능과는 거리가 멀다.

 

"하고 싶은 일=잘 하는 일=해야 하는 일"이라면 행복할 테고,

이 중 둘만 겹쳐도 괜찮을 텐데...

 

딱 하나, 그것도 "해야 하는 일"이 걸리면...

"그게 인생이지."가 된다.

 

맞아, 말걸기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야...

마약

 

고통에는 소리도 없이 찾아오는 병이 있는가 하면 찾아오자마자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도록 만드는, 겉만 요란한 병이 있다. 물론 심각하게 잘못될 수도 있긴 하지만 이 나라의 의료 서비스의 수준으로는 별일이 아니도록 만들 수 있는 그런 병이 찾아왔다.

 

지난 주에 죽을 듯 아파서 생전 처음으로 119 불렀다. 어찌나 아프던지 구급차 오기 전에 11층에서 뛰어내릴 뻔했다. 그 몇 일 전부터 통증이 있었다. 아주 잠깐씩 아프다 말아서 속이 불편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신경도 둔해졌는지 배가 아픈건지 어디가 아픈건지 분간도 못한 것이다.

 

결국 응급실에서 통증의 정체는 탄로가 났고 의사의 처방 첫 마디는 황당했다. "일주일만 기다립시다." 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어쩌라구? 의사는 그런 표정을 기다렸다는듯이 능숙하게 대답했다. "진통제 센 걸로 처방해 드릴게요."

 

진통제는 세 종류였는데 그 중 하나는 Tridol이라는 약이었다. 약 설명에 '습관성'이란 말이 있다. 마약인가? 중증 통증에 사용하는 진통제이다. 뛰어내릴 뻔한 그 통증은 산통에 버금가는 수준이란다. 애 낳기 직전의 엄마들은 이런 고통을 몇 시간씩? 5분도 죽을 것 같던데... 어쨌든 그 정도니 이런 약 쓸 수밖에 없나 보다. 외국에서는 마약으로 분류하기도 한단다.

 

이 마약 아닌 마약은 통증에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아프긴 아픈데 아프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통증을 뚝 떨어뜨렸다. 그런데 문제는 진통제 3종 세트를 먹었더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머리가 안 돌아간다. 머엉한 상태가 지속된다. 이때 든 생각은,

 

"마약하는 얘들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모든 마약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멍한 상태가 즐겁다면 모를까 어찌 이런 걸 즐길 수가 있을까 싶었다.

 

이제 통증은 가라앉아서 진통제를 끊었다. 그랬더니 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Tridol 금단현상이다. 온 몸에 열이 나는 듯하다. 그런데 체온은 37.0도에 불과하다 응급실에 전화 걸었더니 37.2도까지는 정상체온이란다.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열풍이 쏟아지는데 머리도 어지럽고 장난이 아니다. 누워도 괴롭고 서 있어도 괴롭다. 이때 든 생각은,

 

"마약하는 얘들이 이해가 간다. 진통제 좀 남았는데 마저 먹을까?"

매몰비용

 

합리적 선택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또 다른 비용의 개념으로 매몰비용(sunk cost)이란 것이 있다. 매몰비용이란 일단 지출된 뒤에는 어떤 선택을 하든 다시 회수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비용을 뜻한다. 예를 들어 박샛별 씨가 음식점을 새로 열면서, 내부장식을 하고 개업광고 전단을 만드는 데 각각 5백만 원과 3백만 원의 경비를 지출했다고 하자. 이와 같은 성격의 경비는 한번 지출하면 그만이라서 박 씨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다시 회수할 수 없다. 이런 성격을 갖는 비용을 매몰비용이라고 부르는데, 가라앉아 묻혀 버리기 때문에 도로 찾을 수 없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일단 지출된 매몰비용은 철저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합리적 선택의 요령이다. 다시 말해 과거는 과거로 돌려야 하며, 그것이 미래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매몰비용의 성격을 갖는 비용을 지출해 놓고 미련을 버리지 못해 비합리적 선택에 이르는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다. 일단 지출된 다음에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회수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들인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뒤에 후회할 일을 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우리말에 “본전을 뽑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비합리적인 태도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싼 돈을 내고 음악회에 간 사람이 연주가 무척 시시하다고 느끼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시시한 연주를 참고 듣느니 집에 가서 비디오나 보는 것이 훨씬 더 낮다고 생각하면서도 본전을 뽑기 위해 계속 앉아 잇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참을성을 발휘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고 입장권을 사기 위해 지불한 돈을 되돌려 주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비싼 돈을 내고 입장권을 샀다 해도 그것은 이미 버려진 돈일 뿐이다. 그렇다면 연주가 무척 시시하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의 선택임이 분명하다.

 

- 이준구 <새열린경제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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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인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돈이 매몰비용은 아닐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기회비용을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4개월 동안 수강하면 얻을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해 보자. 자격증도 하나 딸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한 달 수강해 보니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 자격증이라는 게 4개월치 수강료와 공부하느라 든 시간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 돈과 시간이면 다른 걸 할 수도 있다. 이왕 한 달 공들였으니 3개월 마저 돈과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