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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12
    성별 통계(2)
    말걸기
  2. 2007/04/06
    켄 로치(10)
    말걸기
  3. 2007/02/01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말걸기
  4. 2006/10/27
    "파워게임에도 원칙은 있어야 된다"
    말걸기
  5. 2006/05/29
    서울 시청 앞 광장을 장악한 SKT(4)
    말걸기
  6. 2006/05/09
    <월간 레디앙> 기고 - 쓴소리
    말걸기

성별 통계

 

기사 <술과 담배에 비만까지 "아, 우울해">와 관련한 글.

 

 

공식적인(?) 첫 출근날, 인터뷰 두 개가 떨어져서 인터뷰 섭외를 하며 앞으로 레디앙이 어떤 방향으로 운영되었으면 한다는 의견서를 쓰던 중 제보가 날라왔다. 편집기자에게 제보한 '따끈따끈한' 정보였다.

 

성동주민병원은 몇 년 동안 민주노동당 중앙당 상근자들의 건강검진을 실시했는데, 2005년과 2006년 결과를 일반인들(상근자들은 '일반인'이 아니었다!)의 경우와 통계로 비교-분석하고 그에 대한 총평을 담을 문서를 받은 것이었다.

 

이 문서를 바탕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를 작성하라는 지시. 말걸기도 당 중앙에서 6년 가까이 일을 했지만 이 정도라니...

 

어쨌거나...

 

 

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고민이 된 점은 성별 통계였다. 이 문서는 흡연율, 고도 음주율, 비만 등을 성별로 분류하였다. 사실 전달에 중점을 두다 보니 말걸기가 작성한 기사도 그 분류에 충실하다. 흡연율, 고도 음주율 따위는 일반인의 경우는 남녀 비율이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상근자의 경우는 남녀 모두 높은데 여성의 경우는 워~얼등하다.

 

기사와 성동주민병원의 남녀 통계 비교는 이런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다. "당 여성 상근자들의 흡연율, 고도 음주율이 왜 이리 높을까?"라고 생각하게 하는 문제. 그러니까 담배나 술에 있어서 "여성은 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보.수.적. 시각을 담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말걸기야 기사에서 성동주민병원의 판단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에 치중했으니 핑계거리야 있다만 그래도 남녀 통계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잠깐 들었다.

 

기사를 직접 써 보니 이런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성별 통계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아 정부 정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를 진보진영에도 적용하면 성별 통계가 절실히 필요한 경우가 분명 있을 것이다. 건강 문제에도 성별 통계 분명 필요하긴 할텐데 유독 흡연과 음주에 대한 통계가 선명하게 부각된 점이 웬지 찜찜하긴 하다.

 

 

 

아, 그리고 제목과 부제, 그리고 기사 앞대가리를 데스크에서 싸그리 고쳤는데, 그러고 나니 기사가 확 달라졌다. 글쟁이는 다르다.

 

 

켄 로치

 

말걸기[켄 로치 영화를 빌릴 수 있을까...] 에 관련된 글.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썼다. 레디앙의 요구였다. [영화를 무기로 대처리즘에 맞선 좌파 감독]이라는 글인데 그 제목은 편집국장이 붙였다. 요전에 켄 로치의 영화를 보고자 했던 이유도 레디앙의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 때문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글을 썼을 때와는 달리 켄 로치에 대한 글은 별 '태클'을 받지 않았다. 말걸기 또한 미야자키가 과연 사회주의자이냐는 질문에 긍정할 수 있는 강한 확신이 없었으니 열나 태클 들어올만도 했다. 게다가 미야자키는 한국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감독이라 이 사람에 대한 글에 시비 걸 인간도 많다. 태클을 받았음에도 어떤 면에서는, 큰 의미에서는 미야자키는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켄 로치가 사회주의자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에서 다루는 건 문제가 없다. 게다가 한국 운동권들에게는 꽤나 '존경' 받는 인기 감독이라 그에 대한 정보를 적절히 정리하는 것은 환영받을만도 하다. 이 글 중 약간은 한국어 텍스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정보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태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켄 로치에 대한 '아무런 의심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냐에 대한 의심을 품는 일은 없을 터이지만, 원래 글이라는 게 노출되면, 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켄 로치라는 인물에 대한 태클도 있을 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아무도 켄 로치를 흉보지 않으니 그게 태클 못지 않은 불쾌감을 주었다.

 

 

미야자키에 대한 글을 쓸 때 무척 괴로웠는데,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생태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의 한 꼭지로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책도 여러 권 읽고 작품들도 다시 보고 이미 소개된 정보의 원천을 찾아 번역해 가며 확인하고. 무엇보다 쪽팔리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란... 게다가 미야자키는 말걸기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감독 아닌가. 누를 끼쳐서는 아니되지.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쓸 때도 괴로웠는데, 우선 이 사람의 영화 이외의 정보는 한국어로 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지지리도 못하는 영어 실력으로 자료를 검토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피로에 휩싸인 이유는, 작품을 볼수록, 자료를 정리할수록 켄 로치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말걸기는 켄 로치가 싫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 섞인 감정이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글은 무척이나 건조하다.

 

 

켄 로치가 싫어진 이유를 밝히기 전에 그가 존경받을 만한 자격은 충분히 있다는 점도 밝힌다. 또한 그의 영화가 주는 의의도 퇴색되어서는 아니된다는 점도. 대처에 맞서, 그 검열의 칼날에 굴하지 않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넘친다. 게다가 꾸준히 실패한 혁명과 인민의 삶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그 일관성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는 여지 없이 '운동권'이다. 그래서 싫다. 그는 '영화는 필름일 뿐이다. 정당이나 논문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극영화에 언제나 논문의 일부분과 정당의 주장을 담았다. 그의 '운동권식 계몽주의'가 싫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이 연설장에서 외치고 싶은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는 배우들의 출신 계급을 무척이나 따진다. 극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좌파적 자유'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건 못가진 자들의 정당한 배짱이라는 식이다. 확고한 계급적 경계와 그로 인한 적대적 행위로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단순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농후하다. 그리고 꼭 혁명진영의 분열을 꼬집고 그 책임을 저 편에 떠넘긴다.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포용도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에서 거의 도달한 '미학적 경지'로 보아 그는 분명히 극영화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 강박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정신세계로 인하여 자신의 재능을 깎아먹고 있다.

 

 

더욱 그가 말걸기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 이 이유는 그의 책임이 아니다 - 한국 운동권들이 갖는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한 열광이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가 전해주는 진실은, 불편하지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운동권'이라는 '동질감'도 작용한 듯하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보면서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계급 적대 감수성'을 수혈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세상에 계급 적대가 없는 게 아니니 켄 로치의 영화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사회적 관계나 현상을 단순하게 보면 문제다. 당연히 하나의 영화가 복잡한 진실을 담기 어렵기 때문에 가장 보여주고자 하는 관계, 갈등을 부각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켄 로치의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추상이 심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해하기 딱이긴 하겠다만.

 

 

레닌에게서 유래했다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그 이론을 세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관념은 사기와 사기의 결과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과장하자면, 한국의 운동권들은 레닌주의의 덫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레닌주의의 위대함을 강변할 바보를 위해서 이 말은 해 두어야겠다. 레닌주의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일 뿐이니 마치 레닌주의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다고 받아들이지는 말지어다.

 

또 트로츠키주의자인 켄 로치에 대해 얘기하다가 웬 레닌은 꺼내나 싶은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한통속이었다. 물론 스탈린도. 큰 사상의 궤적으로보면 셋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정치적 행적이 달랐을 뿐이지.

 

 

말걸기의 시각은 이 바닥에서는 소수 의견일 터이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레닌에 대한 생각 따위는 제껴두고서라도 켄 로치의 정치적 감수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운동권들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은 좀 그렇다.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이글은 함께 밥 먹다가 청탁받은 글인데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 25번째로 레디앙에 실렸다.

 

■ 기사 :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보름이나 걸려서 쓴 글이다.

왜 이리 오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레디앙 편집국장 아찌한테 미안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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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사회주의자]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

 

 


만화 영화는 재미로 본다. 이런 재미도 있고 저런 재미도 있지만, 미국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주는 재미는 경쾌함과 발랄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누릴 수 있는 재미이다. 물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도 나름의 ‘교훈’이 있지만 미국의 상업 영화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속 보이는 감동’이기 쉽다.

 

디즈니의 만화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 본다면 놀랄 만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다. 그 장르가 다양해서 재미도 여러 가지인데, 사회와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극적 긴장감 또한 뒤지지 않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기술 문명의 위태로움, 인간 사회의 갈등, 인간과 자연의 긴장을 역동적이고도 재미있게 연출하기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그 철학적 깊이에 놀랄 만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재미로만 볼 수는 없게 한다.

 


미야자키는 1941년에 도쿄 부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비행기 공장을 운영했다. 이 비행기 공장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행은 미야자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수직 상승과 하강이라는 미야자키만의 역동적 애니메이션은 기계와 등장인물의 비행으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그 비행기 공장에서 산업 사회의 계급적 차별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작품에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미야자키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길 원했다. 그래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미대에 진학하지는 않고 정치경제학부에서 일본산업론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에 일본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白蛇傳)(1958)>에 감동을 받고 애니메이터가 되고자 했다. 대학 시절 아동문학 연구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동서양의 많은 문학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과정이 없었음에도 미야자키는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었다. 스스로는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작화, 원화를 그릴 뿐 아니라 때로는 동화도 직접 수정한다. 애니메이터로 시작했으나 다양한 인문적 지식과 철학적 성찰이 연출 능력을 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청년 시절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던 미야자키는 대학에 다닐 무렵 일본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란 제목의 만화를 연재했는데, 그가 밝혔듯이 이 작품은 SF와 마르크시즘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의뢰를 받아 만들어진 이 만화는 ‘단결하면 큰 힘이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잔인한 강대국에 맞서는 소수민족의 항쟁을 그리고 있다. 그 그림을 변형해 만들어낸 것이〈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라고 한다. 무엇보다 ‘힘을 합친다’는 연대의식은 많은 작품에서 공동체 사회(마을)로 등장한다.

 

미야자키는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터로 일하게 된 도에이동화의 노동조합 서기로도 활동하였다. 노조활동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작업 공간에 대한 태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 이사오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며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했다. 1985년 그들은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었고, 1990년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과는 달리 스태프를 월급제로 고용하였다.

 

스태프를 작품마다 계약하는 방식이 아닌, 상시적으로 고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고용을 안정시킴으로써 작품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이는 스태프들을 한 자리에서 일하게 하여 관리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또한 이는 적지 않은 스태프들을 월급제로 고용할 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이런 ‘파격적’ 고용 방식을 두고 <공각기동대(1995)>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지브리를 소비에트의 크렘린에 비유했다. 그는 지브리의 조직화된 구조가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양질의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창조성을 저해한다며,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아직도 노조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오시이의 발언은, 지브리의 고용 방식이 작업 효율보다는 그 설립자들의 활동 궤적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시선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브리라는 제작사를 통해 미야자키는 다카하타 이사오와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는 사회주의 사상에 밝았는데 미야자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 성격은 다르다. 다카하타는 <반딧불의 무덤(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등 상당히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다. 미야자키가 기획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은 우화적이기 하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강해서 다카하타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다카하타의 작품이 미야자키의 작품보다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다카하다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1979)> 등 TV애니메이션들도 연출했다.

 


미야자키는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미래소년 코난(1978)>,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붉은 돼지(1992)>, <모노노케 히메(1997)> 등을 연출했다. 이 작품들은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의 위협과 어리석음, 파괴적인 전쟁과 독재 권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 인간과 자연의 갈등과 공존을,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경쾌하게 그리고 있다.

 

이와 달리 최고 정점에 오른 작품성을 보여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0)>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은, 한편으로는 미야자키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지만, 사회․정치적 문제 등과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에서는 벗어났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미래소년 코난>은 초강력 전자력 병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시킨 200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거신병’이라는 무기로 세계가 불타버린 먼 미래가 배경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이어진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도 기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전쟁과 파괴 기술 때문에 인간 사회가 위기에 처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그 파괴 기술을 독점하여 남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이들 작품들은 인간적 가치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술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야자키의 작품은 억압과 착취의 사회와 조화로운 공동체 사회를 대조하기도 한다. <미래소년의 코난>의 인더스트리아와 하이하바,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작인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도르메키아, 도르크와 바람계곡이 그러하다.

 

인더스트리아, 도르메티아, 도르크와 같은 도시와 국가는 <붉은 돼지>의 주인공이 스스로 사람이길 포기하고 차라리 돼지가 되어버린 이유를 제공한 전쟁과 파시즘 국가와 관련이 있다. 그것들은 악독한 계급 사회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나 국가를 폭력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이기도 하다.

 

이런 대군사 제국에 저항하는 사회는 다분히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하이하바와 바람계곡과 같이, 개인이 상품가치를 지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그리고 있다. 미야자키는 “일정한 공동체 속에서 일정한 일을 하고 있으면 능력차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회가 된다. 어지간한 게으름뱅이가 아닌 한에는, 마을이 굶주릴 때에는 함께 굶주리고 마을이 풍요로울 때에는 자신도 풍요로워지는” 사회상을 그리고자 했다.

 


미야자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곰팡이로 뒤덮인 음침한 폐허를 지나는 한 여행자의 독백, “마을이 또 하나 죽었군.” 이 대사로 시작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950년대 발생한 미나마타병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미야자키는, 대표적인 ‘공해병’을 낳은 이 사건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 물질의 끔찍함을 목격함과 동시에, 강력한 복원력으로 그 오염 물질을 빨아들여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을 보았다.

 

미야자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하게 된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당대를 반영하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70년대에 등장한 환경론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인간과 자연의 긴장감을 많이 다루었다. 그렇다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평면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뚜렷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무기를 만들지만 그것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그러한 행위에 저항한다. 인간이 자원을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산업 기술 문명을 이룩했다는 것 자체가 자연과의 대립을 영원히 피할 수 없게 한다. 대립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웃집 토토로>는 전후에 사라져가는 일본의 숲을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식을 동화적이고도 신비롭게 그리고 있다.

 


미야자키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국경 분쟁은 과연 그 국가들의 사회주의가 진실한가를 의심하게 했다. 그래도 그는 1990년대 이전까지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결국 동구권의 몰락은 그에게도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돼지>를 제작한 후에는 “정치를 좌우로 가르지 않는다. 다만 물질문명에 비판적이라는 진보적 경향은 남아 있다”고 했다.

 

미야자키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 인간 사회의 이상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를 그렸을 뿐 그다지 실천적 활동을 보여 준 사회주의자는 아닐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의 어느 작품에서도 ‘흑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인종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다. 미야자키는 단지 ‘색감의 문제’라고 하지만 오히려 이 말이 ‘검은 피부색’은 아름답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그와 교감으로 평생 동료로 지내고 있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무덤>이 전쟁의 가해자인 일본을 마치 피해자인 양 그렸다며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배급을 위해 미국의 거대 미디어 재벌 디즈니사와 제휴를 맺은 점, 무엇보다 지브리의 설립자들은 상업적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이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과는 별개로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는 이들인가 의심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에는 이러한 주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평가 받기는 하지만- 미야자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 이상적 사회상이나 인간관계는 사회주의 철학에 가깝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바를 작품에 담았다. 오히려 미야자키는 현실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정당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아 자신의 꿈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미야자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은 그의 작품 속 주제의식보다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일지 모른다.

 

 

&quot;파워게임에도 원칙은 있어야 된다&quot;

 

* 인터뷰 기사를 썼다. 레디앙의 이모씨 전화 한 통 땜에. 후속 기사도 써야 한다. 인터뷰 때 적어 놓은 대화 내용을 풀어 놓는 게 쉬지 않더라. 앞 뒤 재구도 해야 하고... 한참 걸렸네...

 

* 물론, 제목은 데스크에서... 그리고 말걸기가 넘긴 원고는 이모씨가 조금 다듬고. 좀 나아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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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게임에도 원칙은 있어야 된다" 
[인터뷰] KBS 사장추천위원 사퇴한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 


한나라당은 지난 대선의 패인을 방송 장악 실패에서 찾고 있다는 분석이 언론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돌아다니던 얘기다. 대표적인 공영방송이자 영향력있는 공중파방송인 KBS의 사장 선임 문제가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조의 요구로 만들어진 사장추천위원회 위원이었던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이 최근 위원직을 사퇴했다. 이유는 "들러리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레디앙>은 그를 만나서 속 사정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KBS 이사회(이사장 김금수)는 지난 13일 사장 후보를 이사회에 추천하도록 KBS 사장추천위원회(이하 사추위)를 구성했다. 사추위의 사장 추천은 법으로 정해진 절차는 아니나 KBS 이사회는 KBS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지난 17일 첫 회의가 열렸으며 24일 두 번째 회의가 열리기 전날인 23일,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은 사추위원을 사퇴했다. 지금종 사무총장은 이사회와 노조가 협의하여 사추위원으로 위촉된 사람이다.

 

지금종 사무총장은 사퇴 배경을 묻는 인터뷰에서 “사퇴의 직접적인 배경은 이사회가 사추위로 하여금 사장 후보를 5배수로 추천하도록 한 데에 있다”며, 사장 후보 추천 방식이 사추위를 “들러리에 불과”하게 만든다고 했다.

 

▲ 문화연대 지금종 사무총장
 
 
지금종 사무총장은 “KBS 이사회가 사추위를 수용한 것은 민주주의의 진전다. 이사회는 이 흐름에 맞추어 사추위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역할을 제대로 부여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구성과 운영은 그렇지 못하다”며 사추위의 사장 후보 추천 방식뿐만이 아니라 운영 방식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사회를 구성하건 사추위를 구성하건 그 기구의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기준을 만드는 게 중요”하고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가 불거지는 이유는 누가 되었든 절차를 갖추지 못해 생기는 잡음”이라며 KBS 사장을 임명하는 과정이 정치권을 비롯한 이해당사자 제각각이 자신들의 이해만 따질 뿐 민주적 절차를 제대로 두려는 노력이 미진함을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 말걸기 : 사추위 위원을 사퇴해서 파장이 일고 있다. 사퇴 배경을 설명해 달라.

 

▷ 지금종 : 사퇴의 직접적인 배경은 이사회가 사추위로 하여금 사장 후보를 5배수로 추천하도록 한 데에 있다.

 

▶ 말걸기 : 사추위가 사장 후보로 5배수를 추천하도록 한 방침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지금종 : 나는 최대 3배수로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명의 사장 후보 중 1인은 제출 서류가 미비했다. 12명 중 5명을 추천하라는 것인데 12명 중 사장 자격을 갖춘 사람은 5명 내외일 것이다. 결국 사추위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형식적인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사회가 사추위를 만들어 놓고서도 사장을 결정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뜻이다.

 

▶ 말걸기 : 지난 17일 사추위 첫 회의에서 사장 후보를 몇 배수로 추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어떤 의견들이 있었나.

 

▷ 지금종 : 최대 3배수는 추천해야 해야 한다는 나의 의견에 KBS 노조 측 위원만 동의했다. 이사인 사추위원들은, 5배수 추천 방식은 이사회의 결정이라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명시적인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위원도 있었다.

 

17일 사추위 첫 회의에서 사장 후보 추천을 5배수로 한다는 후보추천 방식과 사추위 운영기준을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사회가 3배수 안을 수용하도록 재의를 요구하자고 했다. 사추위에서는 재의 요구 자체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사추위가 이사회에게 재의 요구를 결의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논란 끝에, 5배수 추천 방식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이사장에게 전달하고 이사회가 논의할 것을 요청하자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요청 후에 이사회 사무국에서 이사 각각에게 의사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사회가 재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해서 사퇴를 통보했다.

 

▶ 말걸기 :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5배수 추천을 방침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지금종 : 짐작컨대 5배수 추천을 고집하는 것은 자기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탈락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감이 없다. 뭐가 무서운가. 3배수에 포함될 수 없는 인사라면 사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장 후보를 이사회에서 그냥 결정하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만든다면 그에 맞는 조화가 있어야 한다. 이사회가 전략적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노조의 반발로 사추위를 구성했지만 더욱 옹색해졌다.

 

▶ 말걸기 : 사추위가 사장 후보를 5배수 추천하도록 한 것 이외에는 문제가 없는가.

 

▷ 지금종 : KBS 사장 임명 과정에서 사추위는 제도화된 것은 아니다. 이사회가 사장을 임명 제청하도록 되어 있다. KBS 이사회가 사추위를 수용한 것은 민주주의의 진전이다. 이사회는 이 흐름에 맞추어 사추위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역할을 제대로 부여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구성과 운영은 그렇지 못하다.

 

사추위원은 7명인데 이사가 4명이고, 외부 인사 3명 중 1인은 이사회 추천 몫이다. 이사회가 제청권이 있으면서 사추위에 위원으로 이사를 4명씩이나 둔 것은 문제이다. 위원장 선임, 사장 후보 추천 방식 등의 기준 등 이사회가 만든 사추위 운영 기준 전체도 상당히 비민주적이다. 이사 중 1인이 사추위원장을 하도록 정했다. 이는 사추위를 구성한 취지에 맞지 않다.

 

사추위가 형식적이지 않으려면 그 구성에서부터 운영, 사장 후보 추천 기준까지 달라져야 한다. 무엇보다 사추위원이 구성과 운영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면 이사회는 재의를 해야 한다.

 

▶ 말걸기 : 그렇다면 사추위는 어떻게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지금종 : 사추위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만들었지만 역할이 없다. 공영방송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의 의사를 반영하도록 만들려면, 이사회는 사추위에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민주주의이다. 이사회는 이를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다.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에 따라 사추위가 구성되고 운영되어야 하는데 이사회가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이면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있든 최소한의 민주주의는 보장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공영방송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가 KBS 사장을 임명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가 안착될 가능성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제제기를 하고 사퇴하는 것이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 말걸기 : 이사회가 정한 사장 후보 기준이 문제라고 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KBS의 사장이라면 어떤 자질을 필요로 하는가.

 

▷ 지금종 : 우선, KBS 사장 후보 추천 기준으로 전문성, 리더십과 정치적 독립성, 경영능력, 공공성 등이 제시돼 있다. 공영방송인 KBS의 사장 기준으로는 부족하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 지역성에 대한 이해, 시청자 권리에 대한 이해 등도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시청자의 참여(퍼블릭 억세스)에 대한 이해, 성과 계층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적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KBS는 상업방송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공영방송으로서의 컨텐츠를 개발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능력과 무능력은 철학의 문제이다. 공영방송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철학을 갖추어야 한다. 방향을 제시하는 게 전문성이다. 공공적 가치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덕목이다. 좋은 프로그램을 재밌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 창의성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시청률 높이고 광고 많이 따오는 것은 상업 방송이 할 일이다.

 

그리고 추천 기준이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리더십, 경영능력, 정치적 독립성만 나열하면 이게 무슨 차이냐. 다양한 평가 기준과 함께 구체적인 지표를 만들어서 심사해야 한다고 사추위 회의에서 제기 했으나 이사회가 이미 결정한 사항이란 이유로 묵살되었다.

 

운영이나 사장 후보 추천 기준의 문제는 사추위 내에서 꾸준한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최대 3배수 추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퇴했다.

 

▶ 말걸기 : KBS 이사회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보인다. KBS 이사회의 문제점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지금종 : 근본적인 문제는 이사회 구성부터 정치적인 배경에 따라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방송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 시청자 주권이 반영될 수 있어야 하나, 불가능한 구성이다. 시청자, 노동자(방송종사자), 방송학계 등 다양한 주체의 의견이 반영되는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민주적이라 할 수 없다.

 

이사회는 대통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이 각각 3인을 추천하는데, 이들 안에서 담합한다. 정치적 힘의 역관계에 따라서만 KBS 사장이 임명되는 구조이다.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법도 바뀌어야 한다.

 

▶ 말걸기 : 사퇴하기까지 과정에서 노조 측이나 다른 누군가와 의논을 했는가.

 

▷ 지금종 : 사퇴는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물론 사추위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는 어느 누구와도 합리적인 의견 교환을 했을 것이다. 나는 시청자와 시민을 대변한다고 자임하고 이 입장을 견지하려는 사추위원이었다. 다른 이해당사들과 의논해서 거취문제를 결정할 것은 아니었다.

 

▶ 말걸기 : 공영방송 KBS가 거듭나기 위해 한 말씀 해 달라.

 

▷ 지금종 : 앞으로도 똑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이다. 파워게임으로 흐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직접민주제적 요소를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사회를 구성하건 사추위를 구성하건 그 기구의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기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가 불거지는 이유는 누가 되었든 절차를 갖추지 못해 생기는 잡음이다.


 
2006년 10월 26일 (목) 16:33:02 말걸기 / 객원기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3459

 

서울 시청 앞 광장을 장악한 SKT

 

아래는 [레디앙]에 올린 기사 원문이다. 토요일에 전화가 울리더니 이 기획위원이 청탁을 했다. 이 기획위원의 청탁이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다음 달 중순에 원고료도 준다기에 썼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레디앙] 편집진은 제목과 부제를 바꾸었다. 내 생각에는 잘 바꾸었다. 사실 난 글의 제목을 붙이는 걸 잘 못한다. 대충 붙여 놓으면 알아서 바꾸려니 생각해서 대충 지어놓긴 했다. 아래 링크는 [레디앙] 기사 링크.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 꼼꼼히 보질 않아서 제목-부제 말고 뭐가 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명박 시장, 시청 광장 팔아먹은 결과를 보세요

시민자율 광장 자본에 습격…SKT 콘소시엄 마케팅 공간 전락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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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청 앞 광장을 장악한 SKT
월드컵 마케팅은 시민 권리 무시해도 상관없나

 


지난 26일(금), 한국의 월드컵대표팀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가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졌다. 월드컵 개막을 2주 남기고 열린 평가전인 만큼 많은 시민들의 관심이 쏠린 경기였다. 이 날도 어김없이 서울 시청 앞 광장에는 한국팀을 응원하러 인파가 몰렸다. 그런데 응원을 위해 이 곳을 찾은 시민들은 언짢은 일을 당하거나 목격해야만 했다. 검정색 정장을 입은 경호업체 직원들의 간섭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응원하러 온 시민들에게 자리를 정해준다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걸 통제했다. 경호업체는 시민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했다. 23일 세네갈팀과의 평가전이 열린 날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방송사 스튜디오도 아닌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이처럼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걸 언짢은 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광장이란 시민들이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어야 하는 곳이다. 누가 나서서 들어와라 마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해서는 안 된다. 광장이란 원래 그런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 앞 광장이 마치 자기네 자리인 듯 나대는 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SKT 컨소시엄이다.

 

한국의 월드컵팀 엔트리 확정 후 열린 두 번의 평가전 때 벌어진 서울 시청 앞 응원전은 SKT 컨소시엄(KBS, SBS,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이 참여)이 주최했다. 지난 2월 27일 이 컨소시엄은 월드컵 기간 동안 서울 시청 앞 광장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하루 당 521만 원에 서울시로부터 구매했다.

 

월드컵 응원의 상업성과 함께 시민의 재산인 광장을 기업이 독점하는 현실은 시민단체들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SKT 등 ‘월드컵 특수’를 노리는 기업들은 월드컵을 이익 추구의 계기로만 여길 뿐, 월드컵을 축제로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권리나 바람은 무시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공식 후원사의 자격을 얻지 못한 SK텔레콤은 붉은악마의 거리 응원을 후원하는 것으로 만회를 노렸다. 예상과 달리 거리 응원은 폭발적이었고 SK텔레콤은 기대 이상의 이득을 챙겼다. 2006년 SKT는 거리 응원의 후원자가 아닌 주관자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서울시로부터 서울 시청 앞 광장 독점 사용권을 따낸 것이다.

 

도를 넘는 SKT의 월드컵 마케팅에는 KTF와의 경쟁도 한 몫을 했다. KTF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공식 후원사였음에도 기대 이상의 거리 응원의 성공으로 마케팅에서 SKT에게 뒤졌다는 평가를 내린 듯하다. 올해 월드컵에도 공식 후원사가 된 KTF는, ‘월드컵’이라는 단어와 로고를 사용하길 바라는 붉은악마와 손잡고 공격적인 월드컵 마케팅을 추진하고 있다. SKT와 KTF의 경쟁은 광고, 로고송, 거리 응원 주최권, 독일 현지 응원 등 여러 면에서 충돌을 야기하고 있다. 양자의 갈등이 깊어지니 월드컵을 축제로 여기는 시민들은 외면 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2002년 시민들의 응원 축제는 2006년에는 기업의 광고 프로그램으로 변질해버렸다.

 

 

SKT 등의 이득을 보장해 준 것은 서울시 당국이다. 서울시는 시청 앞 광장 응원에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고, 게다가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행사까지 제공하려면 민간 컨소시엄이 거리 응원을 주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광장 독점 사용권을 입찰했다. 서울시는 SKT 컨소시엄에게 조례에 따른 광장 이용료뿐만 아니라 월드컵과는 상관없는 Hi-Seoul 축제에 30억 원을 기부 받았다. 지나친 상업주의라고 비난을 산 SKT 일각에서는 돈 쓸 데가 많은 서울시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입찰이라며 볼멘 소리를 냈다고 한다.

 

서울시는 한편으로 독점 사용권 입찰은 조례에 근거한다고 한다. <서울특별시서울광장의사용및관리에관한조례(이하 ‘광장조례’)>는 “시민의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 등을 위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 목적으로 지난 2004년 5월에 제정되었다. 여기서 “‘사용’이라 함은 서울광장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이용함으로써 불특정 다수 시민의 자유로운 광장 이용을 제한하는 행위”이다. 즉, 월드컵 기간 동안 광장 사용권을 SKT 컨소시엄에게 넘긴 지금, 시민들의 자율적인 거리 응원은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은 역사적인 공간이다. 1987년 민주 항쟁이 벌어진 곳이면서도 2002년에는 자발적인 응원 축제가 열린 곳이다. 시민들의 강한 에너지가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펼쳐진 공간이다. 그래서 광장에는 시민들 저마다의 욕구와 바람과 행동이 쏟아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서울시는 <광장조례>를 제정해서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광장 사용을 허용하거나 제한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라크 파병을 기념하는 보수단체들의 행사, 행정수도이전반대 궐기대회 등 이명박 서울시장의 정치적 성향에 부합하는 집회는 허용했으면서, 민주열사추모문화제는 불특정 일반시민을 위한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행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조례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팀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팀의 평가전이 열린 지난 26일 평등권 침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시민의 재산인 광장을 기업이 독점하게 된 이번 사건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직접적으로는 시민들의 권리가 제한된다. 시청 앞 광장은 시유지이다. 서울시는 이곳을 관리할 의무는 있지만 시당국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사용권을 양도할 권리는 없다. 시당국의 사유재산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서울시도 돈을 벌고 SKT 같은 기업도 이득을 챙기기 위해 시민들의 광장 사용 권리는 기업의 마케팅과 바뀌었다. 2006년 월드컵 시즌 동안 서울 시청 앞 광장은 시민 권리가 짓밟혀, 지난 20년 간 서울시민이 쌓아온 광장 문화를 한순간 먼 과거로 되돌려 버렸다.

 

또 하나, 이번 SKT 컨소시엄의 광장 독점 사건을 그대로 둔다면 한국의 축제 문화는 더욱 타락할 것이다. 축제는 즐기는 행사이다. 월드컵 응원 열풍은 2002년도부터 많은 논란을 빚고 있지만 어쨌든 즐기고자 하는 시민들의 축제임에는 분명하다. 즐긴다는 것은 스스로의 만족으로 위해 참여하는 것이다. 구경꾼일 뿐이라도 축제의 공간을 공유하며 참여한다. 축제의 규모가 커지면 많은 돈이 들기 마련이고 장사치들도 꼬일 수밖에 없지만 장사치들이 축제를 주관하는 순간 그 축제는 마케팅 프로그램으로 전락한다.

 

2002년 시청 앞 광장의 거리 응원과 2006년 그곳의 거리 응원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시민들의 축제이냐 축제를 가장한 기업의 마케팅 프로그램이냐이다. 마케팅은 이윤을 예측하고 인위적으로 연출을 할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 참여자의 자율성이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지난 26일 시청 앞 광장에서 SKT가 물건을 차곡차곡 챙기듯 자리를 지정하며 응원 온 시민들에게 간섭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서울시의 사용권 판매는 앞으로 타자치단체의 귀감이 될 지도 모른다. 앞으로 온동네 광장과 공터마다 열릴 응원 축제는 기업들이 차린 자리에서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민들의 권리가 쉽게 무시되는 사회엔 안녕은 없다. 그리고 시민들이 스스로 즐기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월드컵 마케팅을 위해 광장을 장악한 SKT는 물러나야 할 것이고, 이들에게 자리를 내 준 서울시는 책임져야 한다.

 

<월간 레디앙> 기고 - 쓴소리

 

인터넷 신문 <레디앙>은 주주와 후원회원에게 <월간 레디앙>을 제공한단다. 창간 한 달이 넘어 첫 호를 발행할 모양이다. 나에게 '쓴소리'를 부탁했다. 쓰고 나서 다시 보니... 참 '쓴소리'답다. 에휴~. 난 왜 쓰는 글이 다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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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의 기사 하나하나는 다른 인터넷 신문의 기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기사의 질은 언론사의 생명이기는 하지만 후발 주자로서 이것에만 승부를 걸 수는 없다. <레디앙>은 ‘열정과 진보 그리고 유혹의 미디어’라는 타이틀로 출발하였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상적인 흐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 창간한지 한 달 남짓인 신문에 이걸 요구하는 게 무리라면, 자기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모양새가 맥이 없다고 하겠다. 결국 기획이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기색이 명쾌하지 않으니 좋은 기사들로 채워졌다 하더라도 산란(散亂)하는 듯하다. 혹은 빈곳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다른 말로 신뢰감일 수 있다.


나는 진보언론사의 기획은 의제를 발굴․형성하기 위한 모색이라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전하는 소식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나쁠 게 없지만 자칫 ‘정치계’ 소식의 ‘진보버전’으로 고착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결과적으로는 진보정당의 주장과 활동을 전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주장과 활동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사전에 면밀히 보도하지 않는다면 ‘사건소식지’, 그것도 진보정당의 소식지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평택 대추리의 투쟁 보도는 군 투입 이후 민주노동당의 반응에 집중되어 있다. 진보언론이라면 이같은 한국사회의 처절할 단면에 대해서는, 문제의 발생과 전개, 이해당사자들의 행동 분석을 그 갈등의 시간만큼 기사들로 쌓아놓을 수 있어야 한다. 보수언론이 외면하는 또는 왜곡하는 작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사후 보도에 앞서 사전 기획이 빛나는 <레디앙>을 바란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이 자신의 역사를 읽게 될 때 <레디앙>의 유혹은 강렬해질 것이다.


<월간 레디앙>의 원고인 이 글은 원고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 청탁을 받은 글이다. 이런 일을 당하니. 괜한 비약일지는 모르겠으나, 기획만큼이나 운영의 불안함이 느껴진다. 푼돈 주주인 주제라 약간은 민망한 마음으로 ‘쓴소리’를 끄적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