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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장, 착한 자본가에 대한 환상

 상품의 순환에는 두가지 패턴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M[화폐] - C[상품] - M'[화폐]이고, 또 다른 하나는 C[상품] - M'[화폐] - C'[상품] 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이윤을 위한 생산>이고 후자는 <필요를 위한 생산>인 셈이다. 자본을 <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 정의할 때 이윤을 위한 생산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이다. 자본은 그 자체로서 운동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물리에서와 같이 사회에서도 자가동력에 대해 기대할 수 없으므로 자본은 필연적으로 (자본가라는) 인격을 입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자본가는 자본의 화신(인격체)에 다름아니다.


 그럼에도 생산수단을 갖지 못함으로해서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상 자본주의 단계의) 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이러한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할 수 밖에 없는대 - 필연적으로 자신의 생물학적-사회적 존재를 임금노동을 통해 영위할 수 밖에 없는대 - 이들이 <착한> 자본가, <선한> 자본가라는 환상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인식은 노동자 자신에게 재앙인대 그 이유는 이러하다.

 자신의 존재양식과는 무관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누구에게 긍정적일 것일 것인가는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생산양식에서 차지하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일테면 노예제도에서 노예신분인 자가 노예주인에게 공정함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고, 주인이 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일은 어째서인가? 자신들에게 지독히도 유해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의 임금노동자로서 처한 현실상황을 무시하고 <초월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사회의 지배적인 계급인 자본가가 사회를 대표하는 계급임을 애써 부정하며, 지배적인 계급의 존재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자신을 시민(부르주아 또는 자본가)으로 인식하며, 그 기반 위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었지만 자본가의 이익일 뿐인 것이겠지만 - 운운한다.

 

 



 그들은 현실에 있어서의 유무형의 결핍(빈곤)을 몸소 체감하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자신들의 결핍의 원인들에 대해 합리화이고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즉 "노동자들 자신의 결핍을 치유하기에는 아직 사회가 <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헌대 노동자가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다 소비할 수도 없는 넘치는 상품들은 대체 어찌된 일인가?
 현 대의 <공황>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결핍 - 일테면 흉작으로 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과잉생산>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자본의 과잉, 상품의 과잉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소비와 생산의 불균형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재앙) 공황은 반드시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스스로 증명하는 상황에 대해 그와는 들어맞을 수 없는 왜곡된 인식에 이르는 것은 어째서인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보고 느끼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를 해치는 이상하고 기괴한 입장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것은 또한 대체 어쩐 일인가.
 이러한 인식들은 무지의 소산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세뇌 - 지배적 계급인 자본가계급에 의해 세뇌(교육)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눈치챌 여유가 없다. 노동자들은 산더미같이 쌓인 ODER[명령]를 처리해대느냐고 너무나 바쁘다. 일터에서의 요구, 사장으로부터의 주어지는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터 이후 삶(현실)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들, 자본가들이 선전해대는 상품을 소비하라는 요구, 드라마를 소비하며 세뇌되는 것, 영화, 신문에서 쏟아지는 요구, 이러한 요구들은 사실 노동자들의 의식을 폭넓게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어질러놓은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라는 요구도 또한 한 트럭이나 쏟아부어진다. 어찌됐든 자신을 <시민>으로 규정짓는 한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의무 - 시민의 의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들은 사실 실제적으로 파들어가면 황당한 것이랄 수 밖에 없다. 사회운영에 대한 운영권을 갖지 못한 지위에 있는 자가 어떻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하며 의무도 동시에 질 수 있는가. 해답은 너무나 귀가 아프게 우리에게 인이 박혀있다. "국민"이기 때문이고 "시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무엇을 사고하고 무엇을 인식하고자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희망하는가..에 대해 도달하게 된다. 결국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노동자들은 칸트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물음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오류를 교정하는 것은 노동자 각자에게 시급한 현실적 문제이다. 누구나 자신이 서식하고 있는 사회환경에 대한 바른 이해로부터 복잡한 현실을 해결해내야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대안을 기존의 <타자로부터 주어진 것들>로서는 찾지 못함으로 이제 바야흐로 사회 정반대편에 있는 것 - 과학적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에서 자신들이 고대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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