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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8/09
    칠레의 새노래(Nueva Cancion Chilena) 운동: 궤적과 그 의미 | 이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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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새노래(Nueva Cancion Chilena) 운동: 궤적과 그 의미 | 이성형

출처 : http://latindream.new21.org/music/nuevacancion.htm

 

 

칠레의 새노래(Nueva Cancion Chilena) 운동: 궤적과 그 의미
 

 

이성형교수(서울대 국제지역원)

 

I. 서론
II. 칠레 새노래 운동의 특색
III. 칠레 새노래 운동의 역사적 궤적
IV. 세 그룹의 사례
1. 낄라빠윤(Quilapayun)
2. 인띠-이이마니(Inti-Illimani)
3. 야뿌(Illapu)
V. 결론

 

 

I. 서론

 

19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 시작된 새노래(nuevo cancion) 운동에서 칠레 사례만큼 돋보이는 예도 드물다. 물론 쿠바의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 운동이나 페루의 와이노(huayno) 붐, 그리고 브라질의 새로운 음악 운동이 모두 대륙의 새로운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칠레의 노래운동은 다른 무엇보다 1960년대의 격화되기 시작했던 사회적 갈등, '인민연합'(Unidad Popular, 1970-73)의 승리와 좌절, 망명과 재민주화 과정을 겪었던 정치사의 굴곡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도의 관심을 끈다. 이 글은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역사적 궤적을 정치사회학적 관심에서 살펴보고, 그 변화상을 현대 칠레의 사회사 속에서 조망해보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민족음악학이나 음악학적 논의는 가급적 삼가겠다. 이 분야에 별 지식이 없는 필자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논의에 큰 부담을 주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2장에서는 칠레 새노래운동의 몇 가지 특징을 음미하면서 다른 나라의 새노래운동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 살펴본다. 제3장에서는 칠레 새노래 운동의 발전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특징을 살펴본다. 제4장에서는 매우 많은 음악가들과 그룹을 양산한 새노래 운동의 복잡성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인민연합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활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세 그룹을 택해 그들의 음악 활동과 노래의 내용을 음미하도록 하겠다. 필자가 택한 세 그룹은 모두 칠레를 대표하는 최고의 그룹들로, 군정의 박해로 망명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그런 와중에서 그들의 음악은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스스로 변모해갔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거쳤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음악적 변모는 마치 인민연합을 구성한 좌익 세력들이 유럽 망명 시절을 거치면서, 유럽 사회민주주적 가치를 내면화한 점과도 매우 흡사하다. 제4장에서는 이러한 음악의 변전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II.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특색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민족적-민중적 것'(lo nacional-popular)을 표현하는 문화운동의 파고로 뒤늦게 개화한 것이지만, 중남미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큰 봉오리를 맺은 것이기도 하다. 중남미 제국이 독립을 쟁취한 뒤 혼란을 겪고 난 뒤 형성된 과두제 헤게모니(1870-1930) 아래 민족통합의 표현은 항상 유럽적 이데올로기로 민중을 배제하는 엘리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인디오는 말할 것도 없고, 민중 대부분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이념의 여파로 항상 他者로 그려졌다. 유럽이민이 장려되었고, 피부색을 좀 더 희게 만드려는 백화(blanqueo)가 일반대중의 정서로 자리잡았기에, 메스띠소나 인디오, 물라또와 흑인들은 민족통합의 범위에서 항상 배제되었다.

과두제의 헤게모니는 대체로 1910년 멕시코 혁명부터 1929년 공황에 이르는 기간을 통해 붕괴되었다. 공황과 그 여파로 등장한 민중주의 체제 아래 만들어진 새로운 '민족적-민중적' 담화는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새로운 문화운동을 촉발시켰다. 먼저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을 겪은 멕시코에서는 '혁명벽화' 운동이 일어났고, 메스띠소가 '우주적 인종'으로 그려졌다. 인디오들도 최소한 혁명벽화에서는 대접을 받았다. 또 혁명기에 유행한 "아델리따"(Adelita)나 "캐러빈 30-30 소총"(Con mi 30-30), "병사의 이별"(Adios de un soldado) 등과 같은 꼬리도나 북부 비야군의 활약을 그린 혁명 꼬리도들이 새롭게 탄생한 멕시코 국민의 정체성을 그렸고, 혁명 이후에도 많이 보급되었다. 또 혁명의 과실인 사회개혁과 반외세 투쟁을 담은 꼬리도(corrido)가 신문을 대신하여 1930-40년대에 농촌에 정치교육의 차원에서 보급되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유럽주의적 인종주의 관념을 문화적으로 극복하려는 트로피깔리스따들이 민중주의 체제 아래 새로운 지적 헤게모니를 행사했다. 질베르뚜 프레이리(Gilberto Freyre)는 <주인과 노예>란 책에서 '인종민주주의'(racial democracy)가 지배하는 브라질의 우수성을 그렸고, 빌라-로보스(Villa-Lobos)는 그것을 음악에다, 조르지 아마두(Jorge Amado)는 그것을 소설에다 그려 넣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론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민속음악을 복원하고 보급하는 신음악운동의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정도와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러한 정체성 찾기 운동은 중남미 전역을 휩쓸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 과두제 헤게모니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혁명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칠레에서는 다소 달랐다. 보수적 공화제가 안정화된 정치체제 덕분에 역설적으로 대륙 차원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 칠레에서는 거대한 사회적 변동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하려는 요구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시위가 조직되고, 조합이 정치화되는 경로를 걸었지만, 멕시코나 브라질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문화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반파시즘 인민전선' 정부(아기레 세르다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민중주의 문화운동은 칠레를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대신 이 과정에서 계급정당이 발달하여 민주적 선거로 권력을 교대하는 선거정치가 활성화되는 매우 독특한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칠레의 민족적 민중적 문화는 늦게 개화되지만 민중주의 정권을 경험한 다른 나라들보다 계급정치가 발달한 까닭으로 훨씬 급진적인 면모를 갖게되는 특징을 갖는다.

 

1. 뒤늦은 개화, 급진적 표현, 세계 속의 유랑

'칠레의 새노래'(nueva cancion chilena)가 "칠레인들이 하는 노래"(Becerra 1978: 97)라 한다면, 이 노래는 칠레인들의 삶의 궤적을 반영한다. 과두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문화적 비전으로서 새노래 운동은 1960년대 프레이 기민당(1964-70) 정부 시절부터 시작되었고, 인민연합 정부(1971-73) 시절에 이르러서는 상업적 음악과 견줄만큼 유행했다. 이 시기의 새노래 운동은 급진적 개혁을 꿈꾸며 집권한 아옌데 정부의 유토피아적 열망을 담고 있으며, 아울러 당시 유행했던 제3세계주의적, 반제국주의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인민연합의 천일간 유토피아가 쿠데타로 실패하자, 민중의 열망을 담은 이 노래들은 곧 군정의 금압으로 망명과 저항의 노래로 발전했으며, 민주화의 염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결과 칠레의 노래는 탄압 속에서 세계 유랑의 길을 거치면서 세계로 퍼졌고, 훨씬 풍요로운 음악성을 지닌 채 재민주화 국면에 칠레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칠레 국내의 새노래 운동도 다양한 방향으로 갈래를 뻗어가며 나름대로 발전했다. 칠레의 새노래 운동이 미친 파장은 그런 점에서 그 어떤 나라들의 노래운동 경험보다 컸으며, 아울러 원하지 않는 세계화의 길을 걸으면서 음악적으로도 훨씬 풍요롭게 발전했다.

 

2. 지리적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 음악운동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경계는 칠레 국경 안쪽이 아니다. 애초에 그것의 자양분은 비올레따 빠라나 마르고뜨의 노력에 의해 발굴된 칠레의 민속음악와 민중시(poesia popular)에서 취했지만, 안데스를 공유하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멜로디와 악기, 긴 국경선을 공유하는 아르헨티나의 음악, 멀리는 베네수엘라, 쿠바의 멜로디와 악기와도 대화하고 관계한다. 그런 점에서 칠레의 안데스 산맥이 칠레 음악의 경계는 아니다(Becerra 1978: 98). 다루는 주제도 칠레의 아름다운 자연, 사회투쟁, 공동체 보전의 욕구 뿐만 아니라 쿠바 나 라틴아메리카와의 연대, 나아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Anti-Vietnam)에까지 확대되며, 망명 이후에는 엠네스티 인터내셔날과 보조를 맞추며 국제인권 문제까지 노래한다("Mande Mandela"). 그러나 그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는 사람들은 칠레 사람들인 까닭에 칠레의 새노래인 것이다.

 

3. 안데스 전통음악의 현대화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초기 단계는 칠레의 농촌 지역에 채보한 민중시나 마뿌체 인디언 음악에서 출발했고, 이는 나중에 안데스 고원의 인디오 음악과 악기들이 유입되면서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거쳤다. 안데스 악기(께냐, 따르까, 삼뽀냐, 시꾸, 차랑고, 다양한 타악기 등)가 칠레 새노래 운동에서 차지한 의미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안데스 민속악기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정복했을 당시부터 악마의 소리를 내는 도구라고 취급되어 교회나 식민당국에서는 때마다 불태워 없앴다. 1614년 리마의 대주교는"악마의 장난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께나를 포함한 모든 인디오 악기들을 불태워버리라고 명했다. 언제나 지배자는 민중의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그러기에 이 '불태워진 기억'(la memoire brulee)(Galeano 1997: 2)을 복원하는 일은 그만큼 상징성을 얻게되는 것이다. 피노체트의 칠레도 민중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안데스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민주화 투쟁에서 안데스 악기와 그 연주는 이제 정치적 의미까지 띄게 되었다.

이 글에서 살펴볼 세 그룹 모두 안데스 악기를 새노래 운동에 접목시켜 독특한 음향효과를 내었고, 때때로 다른 지역의 악기와 결합하여 새로운 음악을 실험하였다는 점에서, 실험정신이 강한 인디헤니스따(indigenista) 음악가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들은 과두제가 강요한 민족주의 전통과 그 문화에서 벗어나는 길이 인데헤니스모와 결합한 민족적- 민중적 문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칠레에서 '전통의 인벤션'과 잡종화(hybridization)는 바로 이러한 이념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잊혀진 민중의 기억을 상징하는 칠레의 민속음악은 다양한 그룹의 작곡자와 연주자의 손을 거쳐 현대적 감각에 맞게끔 편곡 또는 작곡되기도 했고, 고급음악의 장르와 결합되는 실험을 거치기도 했다. 기악연주에서도 안데스의 악기는 중남미 여타 지역의 악기들과 함께 연주되어 독특한 음향효과를 연출하며, 때때로 전자 음향기기와 함께 연주되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들어도 매우 친숙한 소리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전통적 음악의 현대화를 통해 일구어낸 민족적-민중적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만 하다.

 

4. 노래만은 아닌 새노래 운동

중남미 다른 나라의 새노래 운동은 누에바 뜨로바, 와이노 등에서 보듯이 대체로 깐또(canto)의 성격을 띠며, 텍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물론 민속악기나 기악합주가 부가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항상 깐또에 예속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반면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무엇보다 깐또이자, 동시에 기악곡의 특성이 강하다(Padilla 1985: 49). 이 글에서 살펴볼 낄라빠윤, 인띠-이이마니, 아뿌 그룹의 경우 음반곡의 1/3이 기악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뿌 그룹의 경우는 기악곡 모음집 음반도 볼 수 있다(De sueno y esperanza). 인띠나 야뿌와 같은 그룹은 거의 30여종이나 되는 다양한 안데스 악기에 더하여 여타 중남미 제국의 민속악기, 그리고 현대적 음향기기를 혼합하여 연주한다. 노래를 부르는 깐딴떼는 동시에 4-5 개의 악기를 능숙히 다루는 연주자이기도 하다.

언어나 시어만큼 기악연주가 중요한 새노래 운동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음악원이나 음악대학에서 전문적인 고급음악(musica culta) 훈련을 받은 인적 자원이 수혈되었고, 또 고급음악을 전공한 음악도들도 이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대표적 그룹이 Barroco Andino이다). 그 결과 노래나 기악곡 뿐만 아니라 민중 칸타타(cantata popular), 안데스 미사(misa andina) 등 매우 풍부한 양식들이 발전하였다.

칠레의 새노래 운동 그룹들은 민속음악과 악기를 바탕으로 항상 진지한 태도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기에, 사회적 격변과 더불어 격해지기 쉬운 정치음악이 팜플렛 음악으로 퇴락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고, 또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음악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칠레만큼 민중음악과 고급음악이 활발한 대화를 나눈 경우도 별로 없다. 이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빠블로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의 시를 노래로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전 음악(예컨대 바로크 음악에서 차이코프스키나 프로코피에프에 이르는 다양하다)이나 미사곡을 안데스 악기도 재해석한 음악을 들을 수도 있으며, 칠레 민중의 투쟁사를 칸타타 양식으로 서사화한 노래도 들을 수 있다.

 


III. 칠레 새노래 운동의 역사적 궤적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프레이 기민당 정권의 개혁 노력과 그 좌절에서 출발한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진보를 위한 동맹'이란 프로그램을 매개로 쿠바 혁명이후 달아오르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칠레 프레이 정권을 선택하여 새로운 개혁 모델로 삼았다. 이런 기회를 잡은 프레이 기민당 정부는 과거 보수당의 헤게모니 아래 양극화의 길을 걷던 정치지형에서 급진화되어가던 사회세력들을 '자유 속의 혁명'이란 슬로건 아래 포섭하고자 노력했다. 프레이 정부는 중도통합론의 입장에서 농지개혁과 '구리의 칠레화'란 제한된 사회개혁의 열망과 민족주의적 욕구를 표출하였지만, 당시 급진화의 길을 걷던 민중의 사회개혁 요구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아옌데 정부의 출범은 더욱 심화된 양극화 가운데 우익의 분열을 기회로 얻은 좌익연합의 승리였다.

비록 프레이 행정부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하지만, 칠레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레이 행정부가 취한 농지개혁은 실제로 농촌 사회에 큰 변화를 주었다. 농업노동자들의 조직화는 크게 진척되었고, 지주과두세력들에게도 일정한 타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급변하는 농촌의 상황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민속음악과 인디오 문화를 발굴하고 그것을 보전하려는 민속주의자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더구나 '구리의 칠레화'는 비록 보상후 국유화한다는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지만, 이제까지 아나꼰다와 케네코트와 같은 미국계 자본이 지배하던 칠레 구리산업을 자국이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당시 중도파 정치세력이 지닌 민족주의적 감정을 잘 보여주었다. 농지개혁과 구리산업의 칠레화는 바로 중간계급은 물론 하층계급의 정치적 열망까지 자극하였고, 보수과두제가 지배하는 칠레와는 '다른 칠레'(El otro Chile)를 건설하려는 욕구를 더욱 강렬하게 부추겼다. 새로운 노래운동이란 문화혁명은 이렇게 '자유 속의 혁명'이란 부드러운 단계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1. 신민속음악에서 사회비판적 음악으로: 초기

비올레따 빠라, 마르고뜨 로욜라는 이 시점에서 민속음악과 민중문화를 발굴하고 재현하여 이제까지 이 부분에 관심을 지니지 않았던 산띠아고의 중간계층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이 단계를 새노래 운동에서 '빠라의 단계'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단계는 '민속'의 새로운 발견 내지 '인벤션'이란 최초의 과정을 거치고, 노동자 대중들에게 사회변혁의 의지를 담은 투쟁적 비전이 과잉분출하는 단계로 이행하는 과도적 계기까지 포함한다.

1917년 치얀 부근의 산 까를로스에서 탄생한 빠라(1917-67)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동생과 여기저기 노래를 부르면서 의식을 해결해야 했던 빠라는 나중에 그의 재능을 범상하지 않음을 알게 된 큰 오빠 니까노르 빠라의 후원으로 본격적으로 음악적 삶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칠레 농촌을 다니면서 민중가요의 채집과 작곡에 힘을 쓰면서, 칠레 민중가요의 뿌리를 농민들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는 민속음악과 민중시가(poesia popular)에서 찾는다.

당시 산띠아고에서 유행하던 음악의 주류는 꾸에까(cueca) 아니면 또나다(tonada)였다. 라디오를 통해 미국 대중음악이 유행하면서 칠레국민의 음악적 정체성은 심하게 흔들렸다. 보수적 과두제 사회가 유행시킨 칠레 음악은 '우아소와 치나'((huasos y chinas)풍으로 부르는, 농촌 현실과 맞지 않는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묘사한 노래들이었다. 이들 노래는 농촌 축제나 국가독립기념 축제 때 불려지곤 했다. 칠레의 중간계급은 단조로운 과거 음악에서 탈피하여 빠라가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새로운 민속음악'(el 'neofolklore')에 흥분했다. 곧 신민속음악은 조용하면서도 공격적이지 않아 곧 중간계급이 열광적으로 수용한 문화적 상품이 되었고(Carrasco 1985: 35, 39), 마르고뜨 로욜라나 엑또르 빠베스/가브리엘라 삐사로 부부(주로 칠로에섬의 민속 발굴에 힘을 쏟음)의 노력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모두 '진정한 칠레'(Chile autentico)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중간계급이 수용한 민속음악은 점차 칠레 사회의 양극화된 정치 현실에서 새로운 사회비판의 정서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빠라의 후반기 음악 활동, 빅또르 하라, 빠트리시오 만, 롤란도 알라르꼰, 앙헬 빠라, 띠또 페르난데스 등의 노래 활동도 이 이행기적 단계에다 위치시킬 수 있다(이 이행기가 연대기적 시간으로는 인민연합 시대와 겹치나, 필자는 노래 정신과 내용을 기준으로 갈랐다). 이들의 노래 주제도 사회정의(Parra: "La carta," "Run run se fue pal' Norte" etc. Jara: "El derecho de vivir en paz," "Plegaria a un labrador," "Ni chicha ni limona"), 민족주의적 정서(Patricio Manns: "Arriba en la cordillera"), 역사적 투쟁, 라틴아메리카 연대(Rolando Alarcon: "Si somos americanos") 등 사회적 주제로 이동하였음을 볼 수 있다.

빠라는 농민의 삶, 칠레의 자연을 다룬 민속음악을 노래하다가, 점차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탄압을 비판하는 노래(La Carta)나, 중남미의 연대를 강조하는 노래(Los puelos americanos)를 부른다. 이 시점에서 연극감독이었던 빅또르 하라도 이러한 조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빠라보다 좀 더 늦게 음악을 시작했기에, 민속음악의 단계는 짧고 대신 사회비판과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노래하는 이행기적 단계가 긴 편이다. 이제 새노래 운동은 좀 더 강렬한 톤으로 사회비판,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음악의 인적 자원도, 표현 방식도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하라는 바로 이러한 과도기의 중심인물이었다.

이 과도기의 음악, 특히 빠라나 하라의 음악에서 보이는 카톨릭적 성향에서 우리는 종교와 정치, 음악과 정치가 아무런 파열음 없이 혼효되어 있는 중남미 사회의 특징도 읽을 수 있다. 기민당의 좌익세력이 당을 깨고(Izquierda Cristiano, MAPU) 인민연합 쪽으로 붙는 것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고, 사회비판과 종교는 노래 속에서도 그런대로 융화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새노래 운동은 아직 개화된 계급정치를 반영하기 보다는 휴머니즘 전통에서 출발하여 인간적 삶을 막는 사회적 속박에 대해 저항하는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다음 세대 음악가들에게 큰 귀감으로 남게 되고, 오랜 여행일정을 거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자리매김을 받게 된다. 이 단계의 음악은 아무리 제3세계 연대를 부르짖고, 인간적 사회적 구원을 갈망해도, 계급운동의 문화적 매개체로 보이기 보다는 하라의 노래 "노동자에 바치는 기도"("Plegaria a un labrador")에서 보듯이 인간적 삶을 열망하는 구도의 행위로 이해된다.

 

2. 인민연합의 단계: 절정기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대학가의 청년층은 쿠바혁명이후의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편성하여 사회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대안을 추구한다. 아울러 기민당의 개혁정치가 보수파와 좌익 모두에게 실망을 안겨 주면서 좌초하자,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좀 더 급진적인 변화의 프로그램으로 '사회주의 칠레'를 부르짖는 인민연합으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살펴볼 낄라빠윤, 인티 이이마니, 야뿌는 모두 좌익 정치단체와 관련있는 젊은이들이 만든 음악 그룹이다. 이들이 담당하는 누에바 깐시온은 이제 직접적으로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을 포괄하는 좌익 정치의 표현이자, "완전히 다른 칠레"(un Chile bien diferente)를 추구하는 노래운동이었다.

이 단계의 노래운동은 당시 고양된 사회 정치 운동의 파고에 맞추어 대단히 정치화되었다. 이제 가사는 반제국주의 투쟁(낄라빠윤 그룹의 음반 Anti-Vietnam)이나 사회변혁에의 의지가 분출하는 대담한 내용을 담았고, 리듬 역시 박동이 넘치며 현란한 색조를 띠었다. 서정적 깐또보다는 서사적 투쟁사를 그린 깐또가 가사 내용을 지배했고, 서사적 투쟁사의 가사에는 은유법보다는 직설법을 원용한 '지배/착취', '지배/종속'의 이분법이나 '주인/노예' 또는 '빠트론/뻬온' 등의 대항적 패러다임이 지배했다.

이들에게 사회변혁은 노래에 담긴 열망의 차원이 아니라, 임박하고 가능한 현실세계의 과제였던 것이다. 쿠바혁명을 경험한 1960년대를 산 혁명적 낭만주의 세대에게 사회주의는 하나의 가능한 현실태였지, 미래의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운동은 당연히 정치적 선전의 무기로, 대중계몽과 각성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새노래는 "민중을 위한" 노래였지 "민중의" 노래는 아니었다.

대학개혁운동의 성과로 나타난 산띠아고 카톨릭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센터의 주최로 제1회 칠레 새노래 운동 페스티발이 열려(제1회 대상곡은 빅또르 하라의 "Plegaria a un labrador"), 새노래 운동은 널리 보급되었고, 나아가 수많은 음악도들이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3년 9월 쿠데타로 중단될 때까지 이 페스티발에서 수많은 젊은이들, 노동자들, 빈민들이 새노래 운동에 열광했다.

 

3. 군부독재와 재민주화 단계: 원숙기

군부독재가 출범하게 됨에 따라 새노래 운동은 된 서리를 맞게 된다. 이제 좌익단체와 관련된 음악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추방되거나(Quilapayun, Inti-Illimani), 강제수용소에서 구금상태(Angel Parra)로 있거나, 빅또르 하라처럼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군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새노래 운동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던 안데스 지방의 민속악기들을 이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 많은 음악 그룹들은 외국 망명의 길을 택해 자신의 음악을 표현하던가 아니면 침묵을 택해야 했다. 군정은 문화정책의 면에서도 근본을 정초하는 체제 변형(trasformismo fundacional)을 추구했다. 이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일시적으로 큰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변화된 조건에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첫째, 먼저 외국에 어쩔 수 없이 망명해야 했던 낄라빠윤이나 인티-이이마니를 통해 칠레의 새노래 운동이 세계 오대륙 민중들에게 전파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특히 칠레 반독재 운동을 지원했던 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에게 새노래 운동은 민주주의, 연대, 인권을 고양하는 매개체로 받아들여졌고, 이들의 음반은 유럽, 미국, 일본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 국내의 음악활동을 문제삼아 귀국을 거부당해 망명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야뿌 그룹도 세계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만큼 칠레 음악의 세계화에 큰 기여를 했다.

둘째, 독재정권의 민속 악기 금압령으로, 민속 악기의 사용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자, 교회와 같은 인권 보호처에서 미사를 볼 때 민속악기를 사용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생겨났다. 칠레 교회는 군정의 인권탄압에 줄곧 저항하면서 구속자나 반정부 인사들의 보호처가 되었기에, 여기서 기타와 안데스 악기로 교회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곧 바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상징적 의미를 띠었다. 이 부분에서 가장 기여를 한 그룹이바로 바로꼬 안디노이다.

바로꼬 안디노(Barroco Andino) 그룹은 군정이 수립된 이듬해에 하이메 소또가 주도하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안데스 악기로 결성된 기악연주로 유럽의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며, 이 연주에 정치적 의미를 가미시켰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나아가서 점차 공공장소에서 젊은이들에게 빠라와 하라의 사랑의 노래를, 정치적 반대가 고조될 무렵에는 정치적 가요를 불러 전파시켰다(Rodriguez 1986: 104). 안데스 악기, 사랑의 노래도 절망과 테러가 지배하는 분위기에서는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새노래 운동의 전통은 반독재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다시 설 수 있었다. 물론 망명간 그룹들의 새로운 노래도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새노래 부르기는 이제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새노래 운동의 텍스트는 군정의 검열과 억압을 피해야했기에, 단순하면서도 시적인 운율로 변했으며, 은유적인 기법이 가미되었다. 군정기를 '밤'이나 '겨울'로, 민주화를 '아침'을 기다리는 여정으로 묘사한 일상생활을 담은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텍스트보다는 악기의 효과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많이 원용된 것도 바로 군정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이스 알베르또 발디비아(Luis Alberto Valdivia)가 노래한 "겨울이 오면"(Cuando llega el invierno)의 가사는 이런 은유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Garcia 1990: 198).

 

Cuando llega el invierno/ tus manos buscan las mias.
Cuando llega el invierno/ se endurece la vida... ...
Quedese, companero,/ ya pasa el temporal,
cuando se aclare el cielo
volveremos a volar.

겨울이 오면/ 당신의 손은 내 손을 그립니다.
겨울이 오면/ 삶은 굳어져버리지요.
동지여, 가만 계셔요,/ 이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어요.
하늘이 밝아올 때/ 우리들은 다시 날거예요.

 

피노체트 독재정권 아래 암묵적인 저항의 메시지로, 민주화 투쟁의 은유적 표현으로 변신하는 세 번째 단계는, 현재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낭만적 유토피적 열망을 분출하지 않는다. 망명간 음악 그룹들도 모두 돌아왔고, 이들은 그동안 그리웠던 조국 산천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과 같은 인간적 주제에 탐닉한다. 안데스의 멜로디와 악기들은 여전히 이들 음악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꿈이 상실된 신자유주의의 소비사회 속에서 그래도 관조적 자세로나마 저항의 몸짓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제껏 그랬듯이 세태에 영합하는 것은 새노래 운동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성찰적 태도는 훨씬 진지해졌고, 바깥을 향한 토로(grito)보다는 내면을 진솔하게 바라보며(mirada) 어루만지는 그런 쪽으로 새노래를 계속 부른다. 빅또르 하라가 노래했다. "용감한 노래는 항상 새로운 노래"라고.

   

 

IV. 세 그룹의 사례

 

1. 낄라빠윤 그룹

칠레 새노래 운동의 제2 세대에서 가장 정치화된 노래를 부른 그룹을 들라면 단연 낄라빠윤을 들 수 있다. 낄라빠윤(Quilapayun)은 마뿌체어로 "세 명의 털보"란 뜻이다. 이들은 모두 공청(Juventud Comunista) 출신의 대학생들로 196?년에 그룹을 결성했다. 철학교수인 에두아르도 까라스꼬가 예술감독을 맡아 많은 곡을 작곡했고,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음악활동을 지도한다. 검은 색의 와이셔츠, 바지, 뽄초(노동자 의상)를 입은 이 그룹은 당시 중간계급을 대상으로 음악을 연주하던 그룹들이 상용하던 솜브레로는 착용하지 않는 등 의상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검은 색조는 바로 저항과 침착함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들이 부르는 힘차고 강하나, 한없이 침착한 다성음악적 화음의 색감과도 통하는 것 같다.

이들도 인띠나 야뿌처럼 안데스 민속음악(와이노, 야라비 등)을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다른 그룹과 확연히 구별되는 차이점은 정치적 노래(cancion politica)를 많이 불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부른 정치적 노래의 내용은 주로 민중의 투쟁사를 담은 역사적 기억에 대한 것이 많기 때문에, 팜플렛/선전 음악으로서도 그 깊이를 잃지 않고 있다. 이들의 노래들이 과도하게 정치화되었다고 해도 그 생명이 짧지 않은 것은, 그것이 주로 집단의 역사적 기억을 회복하여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칠레'(Chile real y historico)를 그리는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 그룹의 활동을 주로 인민연합 시절에 부른 노래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낄라빠윤이 의도한 것은 우아소풍으로 부르는 목가적 농촌의 칠레나, 독립국경일 축제 때 부르는 아름다운 조국을 그린 '환상적 칠레'(Chile imaginario)를 벗어나, 그야말로 칠레 민중이 겪은 '역사적 칠레'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역사적 칠레는 바로 민중이 삶을 영위했던 칠레이고, 그것은 바로 민중의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제국주의와 보수적 과두세력에 대항한 민족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발마세다 대통령에 대한 노래("Cueca de Balmaceda"), 산타 마리아 데 이끼께 학살 사건을 기념하여 뻬소아가 작곡한 칠레 광부들의 저항가("Canto a la Pampa")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는 가진 자의 칠레가 만들어낸 공식 교과서에서 '타자'로 취급된 자들을 부활시키는 제의처럼 느껴진다. 1970년 이들은 인띠-이이마니 그룹에 속해 있던 루이스 아드비스가 작곡하여 헌정한 "칸타타 산따 마리아 데 이끼께"를 불러 새노래 운동의 발전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인디오 음악과 민속, 그리고 민중의 투쟁사가 결합된 이 새로운 민중 칸타타의 형식이야말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이 통기타 노래에 끝나지 않고,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추구하는 그야말로 새로운 노래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광산 노동자들의 고통을 노래한 17 세기 콜롬비아의 노래("A la mina no voy")나 빠트론의 착취와 뻬온의 고통을 그린 노래("Patron"), 외국인 지배를 거부하는 노래("Basta ya!" "Tio Caiman"), 그리고 구리산업의 국유화를 기념하는 노래("Nuestro cobre")도 역사에서 배제된 자들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여기서는 주로 착취-피착취-거부, 지배-종속-저항의 드라마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거 역사상에 대한 복원은 새로운 칠레를 그리는 밑그림이 된다. 이들은 민중의 노력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성벽"("La muralla")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계몽의 기획이 '개방적 민족주의'임을 알게 된다. 즉 나쁜 외세는 성문에서 막아내고, 좋은 것은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주의적 기획을 통해 새로운 칠레를 건설하고자 한다. 이러한 칠레를 건설하는데는 민중의 단합을 엮어내는 진군가가 필수적이다(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이들은 또 20세기 각국의 저항가요들을 중남미에 소개하는데 힘을 썼고(Las canciones de rebelde),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연대의식을 고양하는 노래도 다수 불렀다.

그러나 망명시기 동안에 과거 인민연합 시절의 음악활동을 반성하며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였다. 물론 피노체트 군정을 비판하는 노래("La batea")나 연대가 등을 다수 부르기도 했지만, 1980 년대 중반 이후로는 주로 칸타타 작업에 매달려 왔다. 칠레 작곡가 구스따보 베세라와 함께 작업한 America, 시몬 볼리바르를 주제로 작곡가 우레고 살라스와 작업한 칸타타,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주제로 작곡한 10분 짜리 곡, 나아가 우이도브로(Huidobro)의 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작업 등이 그것이다.

 

2. 인띠-이이마니 그룹

께추아어로 "이이마니山의 태양"이란 뜻을 지닌 이 그룹은, 1966년에 대학개혁 운동으로 큰 소요를 겪었던 국립기술대(Universidad Technica de Estado) 대학생들이 결성하여 1967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의 작업은 주로 민속음악의 재해석이나 사회비판 조의 노래 부르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나, 낄라빠윤 그룹보다는 덜 정치적이고, 보컬보다는 현란한 기악 편성이 특징적이다. 또 낄라빠윤이 다성적 화음에 골몰한다면 이들은 齊唱(unisono)이나 이중창의 화성을 선호한다. 전자가 강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면, 후자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Padilla 1985a: 48).

이들은 안데스 악기를 대대적으로 사용하여 현란한 기악연주를 가미시킨 점에서 새노래 운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이러한 점은 야뿌 그룹에게서도 발전적으로 계승된다. 또 팜플렛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칠레 인민연합의 승리 이후 선거운동에 관여한 계기로 많은 정치음악을 녹음하기도 했다("Venceremos," "Cancion del poder popular," "Cueca de la CUT" 등). 그렇지만 이들의 음악적 재능은 정치음악이 아니라 대위법적 화성과 기악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새노래 운동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인띠는 1971년 Cantos de Autores Chilenos란 음반에서 독특한 자신 고유의 소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화성과 악기연주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들은 칠레의 어떤 그룹보다 먼저 악기와 리듬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데 노력했다. 이 부분은 칠레 새노래 운동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인데, 다른 대륙의 새노래 운동은 대체로 '리듬-댄스' 모델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칠레만큼 다양한 운율적, 리듬적 형태를 실험할 수 없었다. 반면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댄스 음악과 관련이 적었기에 새로운 운율과 리듬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키워갈 수 있었다(Padilla 1985a: 48).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룹의 음악감독이자 작곡가인 오라시오 살리나스의 역할이 컸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인띠-이이마니나 야뿌의 구성원들은 모두 여러 개의 악기를 잘 다루는 연주자들로 이들이 다루는 음악적 자원, 음색, 주제 모두 다양하다. 깐또와 음악이 등가적 지위를 지닌다는 원칙 아래 이 다양한 자원들은 수백가지로 수천가지로 배합되어 관중들을 현혹시킨다. 솔리스트의 서정적인 레시타티브가 어느 새 다성적 화음으로 바뀌다가, 연이어 유니슨으로 둔갑한다. 물론 현란한 악기음을 동반하면서.

이들은 최초의 음반이 성공하자, 이후 음악의 소재를 안데스 음악이나 칠레 민속음악의 틀을 넘어 중남미 대륙의 다양한 음악에로 눈을 돌렸다. 그런 점에서 일찌감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길을 걷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즐겨 연주하는 악기를 보면 베네수엘라의 꾸아트로, 안데스 지방의 플루트, 아르헨티나의 봄보 레구에로, 멕시코의 기따론, 콜롬비아의 띠쁠레, 고원 지방의 차랑고 등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망명 기간에 이들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노래 작업을 하는 동시에, 말러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고급음악과의 대화에서 유럽의 전위음악이나 록음악, 그리고 아프리카 음악 등과의 결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언제나 출발점과 종착역은 칠레였고, 중남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0년대 중반에 이들은 '민중적 실내악' 양식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는 전통적 실내악의 내용과 형식을 대중에게 보다 근접하는 방향으로 민주화하는 실험으로 자리매김할 만하다.

 

3. 야뿌 그룹

야뿌는 께추아어로 "번개불"이란 뜻이다. 번개불은 메소아메리카 인디오들이 태양과 달 다음으로 숭배하는 신이다. 야뿌 그룹은 1971년에 칠레 북부도시 안또파가스따에서 마르께스 형제들이 중심이 되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13세부터 20세 사이의 고등학생 내지 대학 초년생들로 결성된 이 그룹의 음악은 어떤 평론가가 평한 것처럼 "용암의 분출"(erupcion volcanica)처럼 자연스럽고, 수월하면서도, 힘차다(Padilla 1985b: 55). 1973년에 첫 음반을 낸 야뿌는 무엇보다. 북부 도시 안또파가스따 출신답게 당시 중부와 남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안데스 민속음악을 산띠아고로, 칠레 전역으로 전파하는데 최대의 공을 세웠다고 말할 있다. 이들은 산띠아고에서 안데스 음악을 '도시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연주하는 사람들과 달리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한 음악처럼 다룬다(Padilla 1985b: 54).

께냐, 삼뽀냐, 차랑고, 봄보 등 30여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이 그룹의 연주에서 우리는 인띠와 마찬가지로 현란한 악기연주와 음역을 넘나드는 노래 솜씨로 새노래 운동의 절정을 보는 듯하다. 이들이 연주하는 기악곡을 들으면 우리는 안데스 산중의 한 자락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De sueno y esperanza). 누가 듣더라도 야뿌의 음악은 낄라빠윤이나 인띠-이이마니보다 기악연주나, 화성적 기교 면에서 한 단계 위로 친다.

이들은 1973년 이후 좁아진 문화적 공간에서도 계속 열심히 노래를 불렀고 1975-77년에 새음반을 내면서 칠레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그룹으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각종 페스티발이나 텔레비젼, 라디오에 초대를 받아 음악활동을 확대해나가자 곧 군정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탄압을 받게 된다. 일체의 매체활동을 금지당한 후 야뿌는 노조, 학교, 노동자 거주지, 카톨릭 교회(연대사목회), 실종자 가족 모임, 인권단체 모임 등에서 노래를 부르며 군정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을 측면지원하였다. 야뿌의 음악은 이제 군정에 반대하는 사람을 모으는 은밀한 상징의 구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군정은 탄압도 보다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1978년 유럽 공연에서 호평을 받은 뒤 야뿌 그룹은 1980년에 다시 1년간 세계 공연을 다니나 1981년 군정이 귀국을 거부함으로써 타의로 망명객의 신분이 된다. 이들은 파리를 거쳐 멕시코에 정착하였는데 1988년 귀국할 때까지 7년간 해외에서 음악 활동을 하였다.

야뿌 그룹 역시 유럽과 멕시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음악적 지평을 크게 넓혔다. 이들은 안데스 음악의 틀에서 벗어나 아프로페루아노(afroperuano) 음악, 베네수엘라 음악, 영국의 팝 음악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표현의 자원을 다양화하였다(Padilla 1985: 55). 그러나 그들 고유의 음색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야뿌의 노래들은 위 세대와는 달리 내성적 성찰의 성격이 강하다. 직선적 비판보다는 은유적 비판이 주를 이루고, 역사적 기억의 방식도 개인사를 원용하여 보다 은유적으로, 그러나 상황을 더욱 주관적으로 해석하게끔 유도한다. 이들이 주로 활동한 시대가 군정 시대여서 비판의 언어와 문법이 선택적일 수밖에 없었던 데 기인하기도 하지만(Parque la Bandera 귀국공연 음반), 그만큼 역사나 현실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무르익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Vuelvo amor...vuelvo vida). 귀국을 기념하는 노래 "Vuelvo para vivir"에서 이들은 다음과 같이 군정 기간에 일어난 일에 대한 망각을 거부하고 '기억의 소중함'를 노래한다. 아울러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소비사회에서 모든 과거를 잊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변절을 비판하고 '배제된 자들'의 현실을 돌볼 것을 따끔하게 충고한다("Ya quisieran por olvido").

Dicen que todo ha cambiado/ lo dicen con pretencion
dudan que la solucion/ sea cambiarlo todo
asi buscan acomodo/ para su future incierto
los que en el pasado, cierto/ jugaron con nuestra suerte
no saldran por inocente/ el dia del juicio justo.
Cuando se el tormento.
 

Yo creo que es un insulto/ creer que el viejo modelo
remendado con buen hilo/ pueda resultar correcto
lo digo por el hambriento/ y tambien por el cesante
por los que han andado errante/ por los desaparecidos
que estan condenados digo/ los remgimenes de muerte.


Tengamos ojos abiertos/ muy atentos los sentidos
ya quisieran por olvido/ enganar nuestros intentos
come aquellos intelectos/ de origen bien conocido
que con un costal de olvido/ predican resignamiento
hay que triste pensamiento/ si al pobre deja de lado.
 

Dicen que todo ha cambiado...J


그들은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하지. 그것도 우쭐대면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의심하지.
그래서 불확신 미래를 위해 타협을 추구하지.
확실히, 과거에 우리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은
정의로운 심판의 날에 죄가 없다 하지 못하리.


낡은 모델을 좋은 천으로 짜깁기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고 믿는 것은 나에겐 모욕이예요.
배고픈 사람, 그리고 실업자,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 그리고 비난당했던 실종자들은
그것을 모욕이라고 말하지. 죽음의 체제였다 말하지.


눈을 똑바로 뜹시다. 방향을 잘 주시하면서
그들은 이미 망각하고 싶어하지. 우리들의 바램을 속이면서
잘 알려진 가문 출신의 지식인들처럼.
이들은 망각하는 늑골로 체념을 설교하지.
그 얼마나 슬픈 생각일까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한다면.

 

이들이 사용하는 음악의 텍스트는 네루다나 로께 달똔에서부터 칠레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 내용은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휴머니티를 구가한다. 다루는 주제도 자유, 사랑, 평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이며,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비판한다. 이들의 노래는, 거대한 용암처럼 흘러 내리는 네루다의 서사시처럼 웅장하지는 않으나, 그 서사시의 한 자락 한 자락을 연상케한다. 그러면서도 이 시대 칠레와 중남미에 사는 사람들의 환희, 비애, 탄식을 노래하며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V. 결론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다른 중남미 제국과 달리 민족적-민중적 의지가 뒤늦게 개화된 하나의 문화혁명으로 출발하여, 혁명적 열정과 결합하여 뜨겁게 타오르다, 이제 온전한 내성적, 성찰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비판적 정치시학으로 출발한 이 문화운동은 다른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민속의 인벤션'이란 인디헤니스따 단계를 거쳤지만, 과도하게 정치화되면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비판문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칠레의 경우 1930년대 이래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민중주의 운동이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럽형의 계급주의 정치가 발달했기에, 인민연합과 같은 선거정치를 통한 사회주의 실험도 있었고, 민중음악 운동도 그 파고의 절정과 파국의 격변을 겪었다. 새노래 운동이 격렬했던 정치의 흐름을 반영했다는 점은 멕시코의 혁명 꼬리도보다 과격한 노래 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 이외에도 칠레 새노래 운동이 다른 나라의 음악운동과 달리 끈질긴 생명력과 세계성을 획득한 이유는 안데스 산맥을 끼고 다양한 음악적 전통을 흡수한 점, 그리고 망명을 통해 세계의 시간대와 동시대에 호흡하면서, 폭넓은 잡종화(hybridization)를 경험한 점, 그리고 대중음악/고급음악의 구분을 넘어서 다양한 양식들을 실험한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현단계 새노래 운동은 원래 쿠데타 이전의 Nueva Cancion 운동과는 달리 Nuevo Canto 운동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나 이 음악 운동은 박물관의 박제나 인류학적 주제로 다루는 민속이 되기보다는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새롭게 변신하여 우리앞에 생경하지 않은 노래말과 음악으로 나타나 그 시대에 알맞은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용감한 노래"로서 "새로운 노래"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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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lapayun, 1964-72. Quilapayun, 20 grandes exitos, EMI Odeon Chil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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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 Adelante! Ale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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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AA., 1995. La nueva cancion chilena, Alerce.

VV.AA. 1997. Por siempre Che!, Ale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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