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대중음악계 지금은 예술이 아닌 ‘연예인’ 전성시대

대중음악계 지금은 예술이 아닌 ‘연예인’ 전성시대
대중음악 전성기는? 3인3색 방담
 
 
한겨레 김기태 기자
 
 
» 27면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세대마다, 취향마다 다를 수 있다. 지금의 40, 50대는 70년대 초 포크 음악의 시대를 기억할 것이고, 이른바 386 세대는 조용필과 들국화, 신촌블루스의 80년대를 떠올릴 것이다. 최근 나온 책 〈90년대를 빛낸 명반 50〉의 30대 초반 저자들은 90년대의 음악을 갈무리하며, 이례적으로 이 시기를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로 지목했다. 이 주제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세 명의 음악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만남은 지난 시기 대중음악에 대한 회고와 아울러, 현재의 대중음악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 광화문 대한성공회 교회 앞에서 만난 세 명의 대중음악 전문가. 왼쪽부터 서정민갑, 신현준, 신승렬.
 

신승렬=90년대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황금기로 꼽는 이유는 이때가 음악성으로도 훌륭했던 음악인이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던 거의 유일한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승환, 듀스, 공일오비, 넥스트, 서태지 등이 그런 예다. 70년대에는 산울림, 80년대에 들국화가 있지만, 이들은 단지 예외적인 경우다.

서정민갑=어떤 시기가 황금기라고 할 때에는 객관적이 근거가 없는 한,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만 얘기하는 것뿐이다. 그런 한계를 전제로 하고, 개인적인 취향만을 놓고 본다면 80년대가 가장 음악적인 전성기라고 본다. 그 기준은 음악성이다. 들국화, 부활, 시나위와 어떤 날, 시인과 촌장 등이 활동한 80년대가 음악적인 수준이 가장 높았다.

신현준=음악성도 중요하지만, 음악과 관련된 문화적 가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68년부터 75년 대마초 파동 이전의 음악에 주목한다. 당시 신중현의 음악이나 김민기, 한대수의 포크송은 이전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체계와 맞서 다른 문화를 만들었고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76년부터 96년이 넓게 보아 하나의 시기라고 본다. 이때는 지상파 티브이, 엘피와 테이프,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시대로 요약된다. 이후 96년 ‘에이치오티’와 ‘영턱스클럽’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고 지금까지 지속된다고 본다.

신승렬=90년대 초반과 후반의 대중음악이 많이 다르다는 데 동감한다. 우리가 주로 주목하는 시기는 90년대 초반이다. 92년 이후 사전심의가 실질적으로 철폐된 뒤 가요에 대한 상식이 바뀌었다. 그때 아티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전에 없었던 음악적 다양성을 추구했다. 당시에는 언더그라운드가 거의 없었는데, 오버그라운드에서 다양한 음악적인 취향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했다. 음악이 음악 이상의 다른 구실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태지는 심의와 싸웠고, 듀스 같은 아티스트도 기성세대의 암묵적인 규범과 싸웠다. 그들은 귀고리, 염색에다 힙합바지를 입고 티브이 나와서 반말을 하는 등 견고한 기존의 규범에 저항했다. 당시 젊은 세대는 절대 깨질 수 없을 것 같던 규범이 이들에 의해 깨지는 것을 보고 배웠다.

신현준=다시 생각해 보니 그 시기가 과도기였던 듯한데, 김영삼 정권 시기와 거의 맞물린다. 또 거품 경제의 시기였고, 민주화되었다고 사람들이 느낀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90년대 음악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놀자, 즐기자’였다. 당시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놀던 것 같던 젊은 애들이 티브이에 대거 출연했는데, 그건 나름대로 문화적 충격이 있다. 일본에서 나온 한 논문에서는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회비판하는 아이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승렬=당시 세대가 사회비판하는 대중음악인을 원했다고 생각한다. 유신체제 이후 군부정권 아래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저항해주기를 바랐는데, 그런 희망이 90년대 초반 대중음악인에게 투영되었던 것 같다.

서정민갑=90년대 초만 놓고 보자면 음악적인 경계를 허무는 데 두려움이 없었던 시기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90년대에는 메탈을 들으면서 발라드를 듣는 등 경계를 넘나드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신승렬=동의한다. 당시 젊은 세대는 구획 짓기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80년대에 ‘애들이나 듣던 노래’로 치부되던 나미의 ‘슬픈 인연’이나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90년대가 재발견했던 것도 그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신현준=주류 언론에서 젊은이들의 문화를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 적이 두 번 있다. 70년대 초의 청년문화론과 90년대 초 신세대 문화다. ‘청년문화’는 75년에는 대마초 파동을 계기로 허리가 꺾였다. 신세대 문화는 대형 통신사와 대형 기획사의 마케팅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부분은 좀더 생각할 문제다.

신승렬=90년대 중반 이후 주류 대중음악은 음악적으로 뛰어나지 않다. 훌륭한 가수들은 있지만 훌륭한 예술인은 없다. 90년대 서태지, 듀스, 이승환 등처럼 완벽하게 자신의 음악을 통제했던 예술인이 대중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아이엠에프 이후 변화된 사회 분위기라고 본다. 아이엠에프 이후에 경쟁이 생존을 위한 논리가 되면서 사람들은 음악과 문화의 소비를 경쟁을 위한 장애물로 인식했다. 음악을 주로 소비하는 10, 20대가 옛날에는 ‘바르게 살라’고 배웠는데, 이때부터 ‘이겨라’를 배운다. 이에 따라 젊은 세대가 원하는 음악인의 모습도 바뀐 것 같다. 90년대의 젊은 세대가 ‘저항하는 아이돌’을 원했다면, 이젠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을 기대한다. 기획사들도 그 수요에 맞춰가는 것 같다.

서정민갑=8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음악적인 진지함이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몇몇 댄스 가수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립싱크는 거의 없었고,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대중음악에 대해 서툴렀다. 90년대에는 산업과의 관계 속에서 음악적인 타협이 본격적으로 있었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 대중음악 시장은 대형 기획사의 독과점 시장이 되었다.

신현준=현재 대기업의 음악 산업 진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스케이나 씨제이, 케이티에서 대규모로 투자를 하고 있는데, 거대한 미디어 복합 기업이 되기 위한 수순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면 대기업이 투자를 해서 제도나 환경이 좋아진 부분이 있다고 들었다. 대중 음악계 안에서 대기업과 음악인들이 어떤 권력관계를 만들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서정민갑=정부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한류를 보고, 가수 ‘비’가 미국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대중음악이 소위 잘 나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2000년대의 대중음악이 활력을 찾기 위해서 ‘대중음악진흥위원회’와 같은 기구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리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참가자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서정민갑 대중음악 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신승렬 〈90년대를 빛낸 명반 50〉 저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혹시, 내가 들리나요?_서정민갑

혹시, 내가 들리나요?
 [공연리뷰] 노래모임 새벽 콘서트(동영상)
이메일보내기 서정민갑 _ 대중음악평론가
 
 
지난 4월 28, 29일 이틀동안 열린 '새벽' 콘서트 모습
▲ 지난 4월 28, 29일 이틀동안 열린 '새벽' 콘서트 모습

조금 일찍 공연장에 도착해서 콘서트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공연이 그저 노래모임 새벽만의 콘서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공연장 로비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 30대 초반 이하인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래모임 새벽이 활동을 중단하던 1993년에는 빛나는 청년이었을 사람들은 이제 머리가 빠지고 배가 나온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공연장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한켠에는 자신들을 닮은 아이들이 있었고 또 그들은 공연장 로비에서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환한 웃음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이날의 공연은 노래모임 새벽의 콘서트였으며 또한 노래모임 새벽과 함께 청춘을 투신했던 사람들의 13년만의 동창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노래모임 새벽의 공연을 찾은 이들에게 노래모임 새벽의 공연은 과거로의 초대이며 현재의 자신과 자신들의 세대에 대한 자기 응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노래모임 새벽은 이날 공연에서 그들이 함께 어깨를 걸고 불렀던 노래들안에 묻어두었던 수많은 사연들을 다시 끄집어 내지는 않았다. 앵콜곡까지 모두 스무곡 정도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노래모임 새벽은 지난날의 기억들을 끄집어 내기보다는 현재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한시간 반 가량의 콘서트에서 선보였던 것은 류형수와 이현관, 황란주, 송현주, 김현종, 성임숙 등 새벽의 멤버들이 만든 새 노래들이었다. 4곡의 옛노래들이 양념처럼 끼어들기도 했지만 그도 널리 알려진 노래는 아니었다. 윤선애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벗이여 해방이 온다>만이 앵콜곡으로 선보였을 뿐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노래모임 새벽이 단순히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거나 복기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080 콘서트처럼 추억의 감상으로 손쉽게 감동을 호출하지는 않겠다는 고집에서 허투루 삶을 살아오지 않은 이들의 자존심같은 것이 배어나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역시 세월을 속이기는 어려웠다. 음악활동을 떠난지 오래된 이들의 목소리는 음이 잘 맞지 않았고 오랜만에 무대에 선 이들은 13년전에 그러했듯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굳어 있었다. 음향에서 가끔 파울링이 생기기도 했고 조명은 밋밋했으며 특별한 흐름이 없이 노래만으로 이어져가는 공연은 콘서트라기보다는 오히려 창작발표회에 가까워 공연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열리는 공연임에도 지난 13년간의 여백에 대한 이야기들을 생략해버린 것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새벽 - 겨울 그 가지 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모임 새벽의 90분 콘서트는 그다지 실망스럽거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들이 자신의 현재를 가감없이 드러내보였으며 또한 공연에서 연주된 레파토리들이 그 진정성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던져 투쟁하며 혁명을 꿈꾸었던 날들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도 이들은 결코 멈춰있지 않았다. ‘흐르는 세월에 역류한 젊음의 피땀이 지나간 노을로 빛’난 지금 각각의 창작자들이 선보인 새 노래들은 모두 나름의 무게로 충분히 묵직했다. 새 노래들은 모두 일정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개별 창작자들의 성향을 가감없이 드러냄으로써 새벽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류형수가 선보인 곡들은 섬세하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단정함으로 새벽에 몸담았던 이들의 오늘을 설득력있게 대변해냈다. <가을>, <겨울 그 가지끝에서>, <내 이름을 불러봐> 같은 곡들에서 그는 흐르는 세월속에서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과거로부터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모습을 잘 표현해냈다.

다만 이날 공연에서 선보인 노래들 가운데 몇몇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 지나친 감상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들이 살아온 과거가 녹록치 않았음은 모르는바 아니지만 후일담을 뛰어넘어 노래모임 새벽이 가지고 있었던 고민들을 현재로 끌어온 노래들이 많지 않았음은 아쉬운 지점이었다. 새 노래들의 대부분이 김정환의 시를 빌리고 있었는데 여전히 일정한 관념성을 가진 김정환의 시 역시 새벽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현실과 능란하고 치열하게 조응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2006년의 노래모임 새벽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혹시, 내가 들리나요?’라고 정한 공연 제목에 값한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 민중들의 곁에서 이제는 생활인의 일상으로 돌아간 이들의 모습에서 386세대의 과거와 현재를 발견할 수 있었기에 앞으로도 이러한 창작발표회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계속 이어간다면 새벽만의 또다른 활동이 이어질 수 있지않을까 싶다.

새벽-떠나는 그대를 위하여

새벽의 멤버들은 앞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갈지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최근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노래를찾는사람들처럼 새벽이 활동을 계속한다면 그만큼 민중가요의 가능성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행여 뛰어난 작품이 나오지 않고 노래 실력이 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자신의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생애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것’이며 ‘영원 불멸한 생애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흔, 새벽 잔치는 시작했다_조은미·김호중

 
마흔, 새벽 잔치는 시작했다
13년 만에 공연하는 80년대 노래모임 <새벽> "이게 진짜 우리 이야기"
텍스트만보기   조은미·김호중(cool) 기자   
 
볼륨을 조금 높여보세요. 그룹 새벽의 '떠나는 그대를 위하여'가 흘러나옵니다. <편집자 주>
 
 
▲ 노래모임 <새벽>.
ⓒ 백암아트홀
 

valign=top ’불혹’에 재회한 <새벽>, 다시 입 맞추다! / 김호중 기자


"쟤만 없으면 돼." 노래를 부르다 말고 임정현씨가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남색 조끼를 입은 구자우씨였다. 신발은 등산화같았다.

임정현씨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산에서 딱 막걸리 한 잔 하고 내려온 거 같잖아." 다들 왁자지껄 웃었다. 구자우씨가 아무 말 없이 조끼를 벗었다. 노래가 다시 시작했다.

"아름다운 가을하늘 난 보고 싶었는데, 이제 난 구름되어 가을 하늘에 떠있네…."

무사히 한 곡이 끝났다. 구경하던 이들이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끝나자 임정현씨가 말했다. "너무 심각해." 다른 이도 말했다. "노래가 심각해."

조이한씨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임정현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우린 눈 마주치며 하고 그랬어." 그리고 둘이 '다정한 눈빛 교환'을 실연해 보였다. 다들 애들처럼 까르르 웃었다. 한쪽에선 그 틈을 빌어 기타를 뜯었다. 40대가 아니라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

노래 모임 <새벽>, 혹시 내가 들리나요?

1980년대 민중가요를 달구었던 노래모임 <새벽>이 돌아왔다. 13년 만이다. 김광석, 안치환, 윤선애가 다 노래모임 <새벽> 출신이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이들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새벽>은 1993년 해체했다. '러시아에 관한 명상'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각자 일터로 돌아가고 유학을 떠났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선언', '저 평등의 땅에', '그날이 오면'…. 그들이 부른 노래는 전설로 남았다. 다른 일터에서 시위 현장에서 누구나 불렀다. 그리고 또 잊혀졌다. <새벽>은 전설로만 남았다.

83·84·85학번이던 그들이 20대 때였다. 그들이 이제 훌쩍 마흔이 넘었다. 40대가 되어 다시 모였다. 오는 28일과 29일 백암아트홀에서다. '혹시 내가 들리나요? - 사랑, 노래 15'란 제목으로 노래모임 <새벽>이 다시 무대에 선다.

"반 정도는 음악을 계속 했어요. 반 정도는 회사를 다니고. 그런데 가끔 만나 술 먹다보면 손톱을 기르고 있는 거예요." 이 공연을 주동한 성악가 임정현씨가 말했다.

그가 이태리로 폴란드로 유학을 다녀온 뒤였다. 다들 사느라 바빴다. 애들도 하나 둘 씩 있었다. 성악가, 미술사가, 작곡가, 연극배우, 게임 프로그래머, 일반 회사원까지. 직업도 다양했다. 그 때 그 시절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불러 유명했던 윤선애씨는 입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우리 전통음악 정가를 공부하는 한편으로.

그런데 40대 아저씨들이 손톱을 길게 기른다는 게 가리키는 건 분명했다. 기타를 친다는 거였다. 이들은 기타를 피크로 치지 않았다. 손톱으로 쳤다. 그래서 예전에도 기타를 치기 위해 손톱을 길렀댔다.

임정현씨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 지금도 기타 치냐?" 물으니 "왜 안 쳐요? 기타를 쳤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죠. '야. 쟤들이 칼을 갈고 있었구나.'

회사원, 성악가, 프로그래머, 학원 강사... 그들은 계속 손톱을 길렀다

 
▲ "13년만에 뭉쳤다"... 공연 연습 중인 노래모임 <새벽>
ⓒ 오마이뉴스 김호중
 
그렇다고 공연까진 생각 못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알고 지내던 백암아트홀 송혁규 실장이 발단이었다.

어느 날 그가 임정현씨에게 말했다. "형, <새벽> 공연을 우리 극장에서 하고 싶은데, 형이 한 번 불러 모을 수 있나?" 생각해보니 재밌을 거 같았다. 임정현씨가 말했다. "어?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총대 매볼께."

임정현씨는 부랴부랴 <새벽> 멤버들을 만났다. 만나서 공연 이야길 했다. 같이 하자고 했다. 반은 반응했다. "재밌겠다" 그렇게 모였다. 백암아트홀이 기획했고 공연장을 내놨다.

그런데 무슨 노래를 부르지? 그렇다고 10여년 전에 부르던 곡을 회상하듯 부르긴 싫었다. 7080 콘서트 같은 걸 회고조로 하긴 싫었다. 신곡을 만들기로 했다. 지금 40대로 사는 감정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다들 40대가 된 <새벽>의 노래를 하자고 했다.

"넌 예전처럼 작곡해."
"넌 가사 쓰고."

서로 '납기일'을 정했다. 잘 될까? 걱정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납기일에 맞춰 시가 나왔다. 곡이 나왔다. 곡들도 이뻤다. 예전 <새벽>과 달랐다. 색깔도 여럿이었다. 재밌었다. 그렇게 만든 창작곡 12곡을 이번에 부르기로 했다. 6곡은 예전 곡 중에서도 골랐다.

무대 연출은 최근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를 만든 남선호 감독이 흔쾌히 맡았다. 술기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남선호 감독은 과거 연극집단 <한강>에서 일한 인연으로 알았다.

하지만 쉬운 건 아니었다. 13년만이었다. 임정현씨 표현에 따르면 "처음엔 이게 얼굴인지 발가락인지 몰랐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 모습이 됐다.

시간도 별로 없었다. 다들 일과 가정이 있었다. 애엄마, 애아빠였다. 평일엔 각자 연습했다. 낮엔 일하고, 밤마다 알아서 연습했다. 잠잘 시간을 쪼갰다. 주말이면 모두 모여 노래를 맞췄다. 서로 타박하고 웃고 떠들고 노래했다.

"자기도 모르게 우리더러 386이니 뭐니 규정하고, 성실히 산 우리를 도매급으로 넘기는 게 싫었어요." 무대에 서는 건 아니지만, 공연 외적인 것을 담당하는 구자혁씨는 말했다. "진짜 386 그 세대 이야길 하고 싶었어요. 그 세대로 열심히 산 이야길 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과거 '선언', '저 평등의 땅에'를 작곡했던 류형수씨는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도 여기까지 올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하다 말겠지 했죠. 그런데 다들 마음 속에 뭔가 있더라고요. 다들 숨기고 산 거구요."

게임회사 프로그래머로 산 세월이 얼만지 모르지만, 그는 다시 곡을 썼다. 기타도 잡았다. "스트레스가 많아요, 죽겠어요"라고 했지만, 그의 입가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엔 써있었다.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중.

네가 마흔이니? 웬일이니?

 
▲ <새벽>의 공연 포스터.
 
모처럼 삑사리도 안 났다. 다들 노래에 흠뻑 빠져서 불렀다. 서로 목소리를 맞추고 눈빛을 헤아렸다. 13년이란 시간은 사라지고 없었다.

"먼 훗날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하여, 우리 오늘 헤어짐의 눈물 보이지 않으리. 흐르는 세월에 역류한 젊음의 피땀이 지나간 계절의 노을로 빛날지라도/ 눈을 감고 격한 호흡을 고르며 떨군 고개를 들어 흐린 먹빛하늘 저편 먼 곳에 아직 남아있을 희망의 조각들 추억 떠오는 구름 한점이라도 노래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리라."

"어. 틀렸잖아?" 다른 노래를 하다 말고 임정현씨가 말했다. "나 못해."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팔짱을 꼈다. 13년이란 시간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마음은 사라졌는데, 몸은 다른 소릴 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노래하던 조이한씨가 그를 살짝 흘겼다. "으이구. 예민을 떨어요." 다른 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간주 들어가는 거 틀리지 않았어?" 기타를 치던 류형수씨의 고개가 더 깊숙이 내려갔다. 다들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아구. 여덟 마디도 못 세냐?" 임정현씨가 툴툴 댔다. "다시. 다시." 기타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들은 그렇게 소리를 맞췄다. 굳은 손을 풀었다.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이 진지했다.

나이를 묻자 김묘진씨가 말했다. "마흔이요." 그 때였다. 조이한씨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야. 네가 마흔이니? 웬일이니?"

그러게 웬일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문의: 백암아트홀 02-559-1333
☞ 공연예매 바로가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친절한 금자씨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 장진범

어제 장농이랑 냉장고를 함께 옮긴 사람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예고편을 보고서 이 영화 정말 봐야겠다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오동진의 극찬도 한몫 했다. 게다가 정성일 팬카페 사람들의 논쟁도 나를 자극했다. 어쨌든 영화를 봤다(이건 얼마만이더라?).

 

흔히 그의 영화를 '복수 3부작'의 맥락에 위치짓곤 한다. 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복수'가 중요한 소재인 건 분명하다. 어디선가 박찬욱은 그렇게 말했다(혹은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복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이므로 흥미로운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나 역시 이런 관점에 점점 더 이끌리고 있다.

 

복수가 언제부터 금기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다만 결정적 일보를 내딛은 것은 헤겔이라 들었다. 이른바 '인정투쟁'(특히 예나시기의 헤겔이라고 한다) 이란 복수라는 사적 정념을 정치라는 공적 실천으로 '지양'해 낸 것이다. 복수 대신 '재판'이란 개념이 들어오는데 이때 재판의 목적은 공동체의 복구다. 물론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식이 아니라 그에게 '시민권' 핵심적으로 ('변호'라는 형태로) '발언권'을 줘 재판이 기존 공동체를 '반성'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도록 재판 자체가 전환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나오는 헤겔의 놀라운 명제: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처벌을 의지해야 한다.' 이는 재판의 反-복수적, 민주적 개조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재판 더 넓게 말해 국가를 통한 공적 '인정'이 오작동하면, 적대나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복수는 항상-다시 되돌아온다. 좀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많은(아마 지금까지 모든) 국가들은 복수를 은밀히 조장해 왔다. 적대와 갈등을 중재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한 정당성의 침식을 이들의 사적 해결인 복수, 거기에 동반되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예방적 대항폭력'이라는 경찰적 정당성으로 보충해 왔기 때문이다. 국가의 타락은 개인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국가의 더한 타락으로 이어진다. 폭력의 악순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윤리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금기시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실재하는 상황/행위를 극(특히 비극)의 형태로 체험케 함으로써 갈등과 '책임'(respons(e)iblity)을 숙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이 이른바 '(재)주체화'의 특권적 계기

로 인정받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반민주적 결국 경찰적 국가(시민을 준-범죄자로 취급하는) 의 토대를 아주 근원적인 지점에서 해체할 수 있는 행위가 예술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복수 3부작'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계급적대가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상대방을 원수로, 자신을 보복자로 상상할 때 이 세상 위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실천을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를 하려는 모든 사람들 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노동자들에게, '나 너 착한 거 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된다... 부르주아들에게,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기 전에 뭔가를 해라...

 

'올드보이'에서 그려지는 것은 다른 식의 지옥이다. 그것은 푸코적인 의미에서 '지배'의 상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행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분석들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는 이를 지배(domination)의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 한 개인 혹은 한 사회적 그룹이 권력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그것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가역성(reversibility)을 피하는 데에 이를 때 (…) 우리는 지배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대면한다. 이러한 상태 안에서 자유의 실천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만 존재하거나 극단적으로 한정되고 제한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푸코,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中

알다시피 이우진은 오대수의 운명을 완전히 장악하여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저 끔찍한 바퀴로부터 빠져나오는 대가로 스스로의 파괴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지배'를 실행한다. '私刑'을 집행하는 감옥에서부터 정신을 장악하는 최면술, (최면술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차라리 지배의 어떤 극단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물론 그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에 이르는 저 까마득한 권력의 비대칭성의 지옥. 홉스가 말한 '베헤모스'(내전/자연상태)와 '리바이어던'(극단적 사회상태)은 둘다 지옥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리는 지옥은 어떤 것인가? 내가 인상적이었던 점은 행위자들('보복자들')의 위치가 극히 자의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전편에서 서로를 죽이고자 했던 류와 동진은 이제 사이좋게 유괴를 기도한다. 오대수의 최면술사는 그에게 식탁에서 개처럼 강간당한다. 이우진은 유괴/살해당한 원모의 자리에 가 있고 이금자는 백선생처럼 입이 틀어막힌다. 그녀의 방은 오대수가 갇혔던 감옥이 되고 그녀의 딸과 양부모는 독가스에 취한다. 한편 '통일의 꽃' 임수경은 장기수를 가둔 감옥의 간수가 되어 있고 '혁명운동'에 사용하려 했을 '법-구경' 총은 사적 복수의 도구가 되고,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물론 폐교의 '私刑'이 있다. 그것은 백선생에게 가장 잔혹한 복수이자

(자신에 대한 死刑/私刑 논의를 무력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다니!) 이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찬욱이 설치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의 복수연작 안에서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역할을 논다. 가장 잔혹한 폭력이자 절대악의 확실한 '폐제'이면서 보복자 자체의 해체의 시작이다. 적어도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원하는 효과를 거뒀느냐다. 여기서 박찬욱은 블랙코미디 기법을 전면화하면서 그의 말대로 하자면 '우습다라는 기조로 가다가도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으로 주저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웃은 게 조금 미안하게도 되는 그런 상태' 를 도모한다. 내가 볼 때 이는 통찰력있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는 잔혹이 反-희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점, 또한 거기에 모종의 '향락'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희극 자체를 분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웃는 자신 안의 잔혹과 관객을 대면시키면서 어떤 섬뜩함과 불편함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박찬욱은 세간의 평가보다 훨씬 순진하거나 아니면 희대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관객들이, 금자씨와 달리, 정말로 즐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위의 사실 곧 이 변증법적 전환의 실패를 뻔히 알고 있고 스스로 이 실패를 즐기면서도 정반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도리는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보다 훨씬 더 잔혹할지 모른다는 것, 잔혹한 '부정의 부정'을 경유해 구원으로 가는 숭고한 '부정신학'이 극히 도착적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복수는 나의 것'이 더 윤리적인 것 같다. 자신은 없지만 이 점에선 정성일 선생과 좀 의견이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난 두 가지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금자와 제니라는 '모녀' 관계가 성립됐다는 점. 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실패했고 '올드보이'에서는 양자 간의 책임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구성된 '부녀'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의 결론이 다르게 난 것은 그녀의 딸이 딸로서 살아있었고 엄마의 얘기를 (미도와 달리) 다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의 '혀'였다. 우리에게 혀와 입은 무엇일까. 낭시 식으로 말하자면 '노출'(ex-posure)이란 무엇일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친절한 금자씨 2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앞서의 글에서 인용했듯 박찬욱은, 특히 '사형' 장면에 관한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구조주의 이후 우리가 배운 것은 저자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저자조차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의 물질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박찬욱 스스로의 진술 인용으로 대체한 이 장면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이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우선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적어도 나에게는) 이 장면의 시작이 전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를 접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가 얼마 진행된 이후부터 난 백선생이 틀림없이 연쇄살인범일 거라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진 사정과 관련될 것이다. 아마 백선생이 금자의 아이를 데리고 살인현장에 나타난 그 끔찍한 장면에서부터 이는 거의 목적론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사형 장면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원-장면'(primal scene)이 된다. (박찬욱이 이 영화가 '동화'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동화는 '옛날옛적에'('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고 현존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런 금기 없이 향락을 즐기는 난폭한 아버지를 '폐제'하고 아들 간의 공모를 통해 금기/법, 따라서 '사회'를 정초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이 유족들의 잔혹(또한 우스꽝스러움)을, 혹은 그 장면을 보고 웃는 스스로의 잔혹을 느끼길 바랬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효과가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잔혹이 향락(과 그것의 전염)을 동반한다는 점을 박찬욱이 정말 몰랐을까? 더구나 절대악을 폐제하는 게 문제라면, 그 잔혹에는 모종의 정당화가 부여되지 않는가?

 

모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말했을 때 그는 적어도 이렇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며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순환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관찰자' 금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자는 어떤 의미에서 외부자/관찰자인가? 가장 모범적인 '리바이어던'으로서가 아닐까? 백선생을 죽인 후 누설을 걱정하는 유족들 앞에서 금자가 던진 협박을 생각해 보라. 감독의 의도야 어땠던 간에 바로 그 말 때문에 금자의 '유령성'은 '초-자아'의 그것으로 사후결정된다.

그녀는 '악/향락의 민주화'를 행했고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에 기반해 사회상태를 만들었으며 너무나 친절하게도 이 사회상태의 보증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녀가 이미 죽은 백선생에게 쏘아대는 총알은 실제로는 유족들에게 던지는 경고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와 놀라울 정도로 대칭적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이금자는 유족에게 '금기'를 범하게 했고 양편 모두에서 그/녀들의 상대방은 '혀'가 잘린다. 하지만 오대수는 무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자기 스스로 혀를 잘라낸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때문에 오대수는 영웅이 되고 이우진은 파멸한다. 하지만 유족은 (금자의 유혹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혀를 자르는 것은 금자(禁者!)다. 유족은 가련하고 추한 존재가 되며(계좌번호는 압권이다!) 금자는 '이드'의 사악함과 '자아'의 나약함 모두에 절망하는 '초-자아적' 영웅이 된다. 여기서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이 떠오르는 것은 나 뿐일까...?

 

그러므로 이금자는 성공한 이우진이다. 이때 자식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지난 번 글에서는 금자와 제니의 관계에 관해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를 남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전혀 아니다. 금자는 오대수가 아니라 이우진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지만 미도는 안티고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니는 초-자아적 영웅을 정당화해 주는 존재다. 먼 옛날 '조상'께서 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뇌를 겪었는지 대대손손 전해주는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나레이터'다. (따라서 이는 '낯설게 하기'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장면의 '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유족들의 혀는 잘리었고 이 히/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혀는 금자의 딸만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자가 처음부터 '친절한 금자씨'였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폭력과 잔혹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문제가 될 때 특히 오대수처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때 박찬욱의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홉스적인 것이었다. '공각기동대' 같은, 외양적으로는 '포스트모던'한 영화가 결국 로크적인 해결책('의식')으로 회귀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번 영화에서 박찬욱의 실패는 그가 너무 친절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이 제일 맘에 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금자씨가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것 | 김윤은미

금자씨가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것
     
영화 <친절한 금자씨>

김윤은미 기자
2005-08-01 21:03:50


<기사를 보고 영화를 보면 재미가 덜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호기심을 사로잡더니, 개봉 후에도 수많은 평들이 쏟아지고 있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 이 영화는 대작에 기대하기 쉬운 기승전결로 꽉 짜인 플롯을 피하고 인물들의 소개장면과 에피소드 나열로 사건을 이어나간다. 블랙코미디적인 유머와 정확한 비유를 사용해 만든 장면과 에피소드가 이 영화가 갖춘 미덕인 듯싶다. 영화는 복수를 하는 금자씨와 그녀 주위인물들의 면면을 다면체처럼 잘게 부수어서 조합함으로써 상당한 여운을 남긴다.

관객의 몰입 방해하며 복수 정당화

<친절한 금자씨>의 전반부는 가볍고 경쾌하다. 어린이 유괴 및 살인사건으로 감옥에서 13년을 살아온 금자씨는 출옥 후 백선생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감옥에서 알게 된 여자동료들을 찾아간다. 방북으로 유명한 임수경씨의 조언을 얻었다고도 하는데, 감옥의 여성 인물들은 상당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남편과 동반으로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감옥에 들어온 여자,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상대 여자를 죽여서 고기를 먹어버렸다는 여자, 출옥 후 감옥에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 남자의 목을 들고 있는 여자 조각을 주문 제작하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여자 손님들이 좋아해”라고 말한다.

<올드보이>에 비해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면들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여성들이 독하게 마음을 먹고 합심해서 금자씨의 복수를 돕는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자칫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면면들임에도, 어이없을 정도로 진지한 나레이션과 빠른 전개, 코믹한 설정들이 영화에 깊이 몰입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특히 금자 역을 맡은 이영애의 하얗고 맑은 얼굴과 천사 같은 미소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각한 장면에서 느닷없이 등장해 상당히 큰 효과를 발휘한다. 금자씨의 얼굴에서 빛이 나오도록 하는 화면 처리나, 신장을 기증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들은 대로 웃으면서 욕을 지껄이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감옥에서 동료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마녀’라 불리는 여자에게 착한 얼굴로 밥을 먹이면서 락스를 뿌려대는 장면은 압권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만, 웃음의 말미에 씁쓸함을 집어넣는 블랙코미디를 운용하는 캐릭터. 금자씨의 캐릭터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원한 관객이라면 환영할 만한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출옥 후 착하게 살라고 말하는 목사가 내미는 두부를 “너나 잘하세요”하며 무표정하게 엎어버리는 장면이나, 연하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후 담배를 피우는 장면 등은 관습적인 이미지들을 패러디 해 웃음을 전달하면서도 그 자체로 멋지다.

영화에서 복수가 진행되는 후반부는 전반부의 경쾌함에서 돌변해 심각하게 진행된다. ‘여성’과 ‘복수극’의 조합에서 특별한 화학작용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만족할 듯싶다. 여성복수극은 자칫 여성이 복수 임무를 대행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 있는데 <친절한 금자씨>는 그렇지 않다.

복수의 대상 백선생의 캐릭터는 일반적인 ‘마초 아저씨’다. 어렵게 자신을 찾아온 금자씨에게 백선생은 목욕한 후 가슴 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문을 열어준다. 그는 밥을 먹다가 식탁에 부인을 눕히고 섹스를 한 후 다시 밥을 먹는 동물적인 인간이자,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요”하고 서슴없이 변명할 줄 아는 인간이다. 위악적이다 싶을 정도로 선명한 백선생의 면모는, 여성의 경험에서 종합되는 남성의 불쾌한 면모들이 조합된 듯하다.

복수의 윤리보단 현실의 부조리 드러내

‘복수 3부작’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표명, 영화 곳곳에서 ‘속죄’를 외치는 이영애의 대사 등으로 인해 복수의 윤리학 등 철학적인 수준에서 영화를 읽어내려는 시도들이 많다. 하지만 이 영화가 플롯 상에서 던지는 속죄에 대한 고민은 그다지 깊지 않다. 우선 금자씨는 매우 손쉽게 자신의 복수를 달성한다. ‘악인’ 백선생은 관객들에게 윤리적 고민을 던져주기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악하다. 금자씨의 정의감이나 백선생의 악함은 관객에게 고뇌를 던져주기보다는 순간적인 충격을 전달하는 장치에 가깝다.

백선생을 처벌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소설에서는 어린애를 유괴해서 돈을 뜯고 다녔던 악인 카세티를, 피해자의 부모와 친지들이 공동으로 살해한다. 카세티는 악인인 데다가 경찰에 넘겨도 처벌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카세티에게 복수한 이들은 교양 있고 선량한 시민들이자 버젓하게 사회적 위치를 갖춘 인물들이다. 이들의 복수는 소설 속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복수는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수위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백선생을 경찰에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법에 대한 환멸과 증오심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들의 복수는 정의감보다는 삶의 부조리함이 느껴지는 페이소스를 풍긴다. 억지로 돈을 벌어서 자식을 백선생의 영어학원에 보냈다며 한 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또 다른 여자가 조용하게 “그런 사연 없는 부모가 어디 있나”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그 예다.

감옥 속 여성 캐릭터들처럼, 사람들의 삶에서 관찰되는 현실의 부조리한 측면들이 이 복수의 면면에도 붙어있다. 그래서 복수가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후련하지 않다. 이들이 생각해 낸 것은 백선생의 돈을 빨리 나누어달라고 계좌를 적어주는 것인데, 그 순간 천사가 지나가는 듯 엄숙한 침묵이 흐른다. 마치 악에 대한 복수, 자식에 대한 사랑 같은 숭고함과, 복수에 대한 책임 회피 같은 비루함이 삶 속에 공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 www.ildaro.com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보수성에 대한 간단한 노트 | 최원

 
* 스포일러 있습니다.

백선생은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원-아버지(archaic father)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마지막에 이루어진 아이들(의 부모들)에 의한 백선생의 집단 처형이 국가에 의해 관리된 비-복수가 아니라 반대로 사적인 복수를 표현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명백히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들에 의한 원-아버지의 살해는 사회 혹은 공적인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영화 텍스트 상의 증거로 아이들의 부모들은 처형이 있기 전에 서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에 관한 계약(!)을 맺는데('사적 계약'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에 불과할 뿐이다), 그 계약의 '보증자'로 금자씨가 리바이어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들 아시죠? 누구라도 계약을 위반하면... 더 이상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대사는 약간 다를텐데 ..어쨌든...여기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후, 죽은 백선생을 땅 속에 묻는 장면에서 갑자기 금자가 빼들고 가서 백선생 시신의 머리 부분에 쏴댔던 총이 더 이상 죽이지 않는 총, 이미 살기가 없어진 총, (사적인) 복수의 의미를 박탈당한 복수, 이미 공적인 것이 되어 버린, 따라서 잔인할 것도 없는(물론 이는 분명히 '계약'이라는 내러티브가 가져다주는 환상일테지만, 어쨌든 이미 죽은 자를 쏘는 것이 무엇이 잔인하단 말인가? 여기서 이 영화는 완전한 멜로 드라마 혹은 신파가 된다) 행위의 상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금자씨는 마지막에 구경꾼 내지 관찰자가 되었으며, 유족들의 백선생 살인행위를 목격하면서 사적인 복수의 잔임함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했었는데, 이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면, 이는 잘 표현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감독 스스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박감독의 말은, 금자가 더 이상 살아있는 '개인'이 되지 못하고 "유령"(sic!)처럼 나타나게 된 것은 오히려 그녀가 공적인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 즉 복수를 조직하고, 복수를 도와주고, 복수를 행하려는 자들 사이의 사소한 갈등들을 해결해주고, 복수의 절차를 마련해주는, 국가가 되었음을 감독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지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일 (향유를 모두 독점하는) 포악한 원-아버지라는 이미지야말로, 진정으로 끔찍한 아버지(착한 아버지 혹은 차라리 "친절한" 아버지로서 스스로 향유하길 거부함으로써 자식들의 모든 향유의 가능성마저 앗아가 버리는)를 가리려는 '스크린'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포악한 원-아버지야말로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환상구성'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백선생은 이 영화에서 실제로 매우 환상적인 인물로 나타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겁'을 먹지 않는 완전한 비인간/악마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그의 환상으로서의 성격은 그가 제니와 금자 사이의 대화를 감정까지 실어서 리얼하게, 혹은 써리얼(surreal)하게 악마와 같은 솜씨로, 통역할 때 극단적으로 드러난다(관객은 이 장면에서 제니와 금자의 대화 내용 보다는 백선생의 악마성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어쨌든 이 영화가 보다 더 끔찍한 어떤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보다 더 "친절한" 어떤 것을 시야에서 가리기 위한 환상적인 내러티브(narrative)의 구성에 불과하다면, 이 영화에서 전에 없이 너래이터(narrator)(나중에 제니로 드러나게 되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등장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상징계에 속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이야기/(히)스토리의 구성, (제니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대대로 이어질 전설의 구성...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이 상상계를 그렸다고 한다면, '올드 보이'는 상징계로의 진입(법의 정초)을 그렸으며, '친절한 금자씨'는 상징계의 작동을 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되어 버렸다고, 즉 구성된 상징계를 정당화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전락시켰다고 본다.

가능한 증거로, '복수는 나의 것'은 아직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한 말하지 못하는 자의 이야기이고(벙어리인 주인공의 행위는 여기서 종종 순진하면서 동시에 음탕한 것으로 나타나고--어린아이를 자신의 배에 올리고 앉아 있던 장면이나 자신의 누이의 몸을 닦아주던 장면 등을 보라--, 게다가 그는 부분-대상인 콩팥을 그의 누이에게 선물하려고 하다가 누이를 죽이고 이후 콩팥을 '식인'하는 자로 나타난다), '올드 보이'는 자신의 '말'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자신의 혀를 자를 수 밖에 없었던 자(그런데 육체적 혀를 자름으로써 주인공은 진정으로 상징적인, 정신적인 혀를 얻게 될 것이다--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고 나서야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게 되듯이)의 이야기이고, 마지막으로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대항폭력(그 자체 범죄와 다를 바 없는)에 대한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자(금자는 '금지된 자'가 아니라 '금지하는 자'였던 것이다), 즉 '말'을 관리하는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남는 것은 제니의 '말', 친절한 금자씨에 의해 표백된(!) 흰 눈을 받아 먹는 제니의 '혀'일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KBC 부용산을 아십니까?

PD 연합회 회보 175호   발행일 1999-09-16


 

작성일 : 1999-09-16    

제작기 - KBC <부용산을 아십니까?>
‘부용산’에 배어있는 시대의 아픔김영문 광주방송(KBC) 보도제작국


남도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구전가요 ‘부용산’이 올해 봄 세상밖으로 드러나면서 이 노래에 대한 관심들이 커졌다. 그동안 ‘부용산’이라는 곡은 목포에서 만들어졌느니, 보성 벌교에서 만들어졌느니를 두고 두 지역간에 원산지(?)를 둘러싼 미묘한 갈등까지 빚어졌다. 그런가하면 이 노래의 탄생설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얘기가 나돌았다. 이 노래의 작사가가 수필가였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니, 소설가 박화성 선생이니, 시인이셨던 박기동 선생이니 하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부용산을 아십니까?>의 제작은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노래의 실체와 벌교와 목포 두 지역의 미묘한 경쟁관계까지 방영할 생각으로 시작됐다.이 노래의 작곡자가 한국전쟁 당시에 월북했고 월북 작곡자라는 이유 때문에 불려지는 것이 금지됐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우리의 아픈 상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소재라고 느꼈다. 취재가 시작되면서 의문은 한가지씩 벗겨졌다. 목포 항도여중 2회 졸업생인 송수 씨와 항도여중 초대 조희관 교장선생의 유가족들을 순천에서 찾아냈고 작사가인 박기동 시인이 고국을 등지고 호주 시드니에서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밝혀냈다. 빨치산 ‘남부군’ 소속이었던 이균동 노인은 본인이 산속에서 그 노래를 작곡했다는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서 노래를 배웠다고 비교적 정확하게 노래를 불러줬다. 취재가 어느정도 마무리될 무렵인 6월 7일 벌교를 행해 달리던 취재차량이 빗길에 전복되면서 탑승자 4명이 교통사고를 입었다. 필자는 그 이후 40일을 입원해야했다.“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한줄기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흡사 ‘가고파’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노랫말의 한 대목처럼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릴뻔 했던 사선을 넘기면서 프로그램은 제작됐다.취재를 통해 ‘부용산’은 시인이었던 박기동이 1947년 노랫말을 썼고 1948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인 것으로 드러났다.시는 벌교에서 곡은 목포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1948년 10월 목포 항도여중 예술제에서 1회 졸업생인 배금순이 최초로 불러 그야말로 목포시민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다. 마침 여순사건이 터지고 벌교와 보성사람들이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산속에 숨고 그들사이에서 이 노래는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한마디 말없이 쓰러져가는 동료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불리워졌다. 이 노래 발표이후 작곡가 안성현은 1949년 9월 학교에서 의원면직 되고 그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다만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발표됐던 그의 작품들은 아직까지 목포사람들에게 구전되고 있고 김소월 시에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던 ‘엄마야 누나야’가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당시 작업에서는 사상이나 이념이 전혀 없는 순수음악인으로서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가하면 작사가인 박기동은 이유없이 좌경시인으로 찍혀(?) 해외로 떠나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캐나다를 거쳐 지금은 호주에서 12평짜리 난민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언제 완성될지도 모를 작품집 발간에 힘쓰고 있다.좌경시인에 월북작곡가의 작품으로 ‘부용산’ 노래는 자연스럽게 금기시된 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50여 년이 흐른 후 노래는 해금됐다. 취재에 들어간지 3개월만인 9월 5일 지역사 제작 프로그램으로서는 드물게 일요일 저녁 7시에 방송이 되면서 시청자들의 반향은 컸다. 노래 한곡의 의미보다는 아직도 채 씻기지 않은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많은 이들의 공감의 소리였다.방송직후 그동안 아무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작곡가 안성현 선생의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의 부인이 생존해 광주에 살고 있으며 아직도 그때의 아픔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또한 벌교지역 초등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원로교사 박기동 선배님 고국 정착 청원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사연들을 중심으로 후속 프로그램 제작에 들어갔다.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과정일뿐 사람들에 의해 불리워 짐으로써 완성된다. 그러고 보면 ‘부용산’은 이미 51년 전에 완성된 작품이며 남도인의 한의 정서에 녹아흐르면서 전해져 온 것이다.최근에 작사가인 박기동 시인은 이 노래의 2절을 만들어 보내왔다.“그리움 강이되어 내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베토벤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 이경분

베토벤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이 경 분

* 출처 : http://www.um-ak.co.kr/gong/nonmun/keonbun-beeth-nazi.htm
* 각주 및 편집본은 출처에서 확인


1. 베토벤 음악의 다양한 수용

베토벤과 그의 음악처럼 다양하게 해석되고 모순되게 수용된 경우도 드물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게 베토벤은 "음악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위대한 사제"였다면1), 1830년 7월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는 애국적 혁명가2)로 여겨졌다. 반면에 1871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군사적, 국수주의적인 독일 제국 수립기 동안에 베토벤의 음악은 "국가음악의 상징 그 자체"로3) 여겨졌다. 또 미국인들은 그를 "진정한 민주주의자"로4) 찬양한 반면에, 혁명이 일어난 소련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사회주의 혁명의 모범"5)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차 대전에 패한 독일의 국수주의자에게는 "베르사이유 조약도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성"이요, "독일민족의 지도자"6)로 받아들여졌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 때에도 베토벤의 <환희에의 송가>가 불려졌고, 동독이 무너진 후 통독을 축하하는 기념식 때에도 인류애를 노래하는 베토벤의 9번이 연주되었다.7)

모든 예술 작품은 그것이 탄생한 시대와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처럼 그의 작품은 (다른 음악작품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끈질기게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들으면 새삼 떠오르는 여러 가지 질문 중 하나이다.

고전음악의 절정으로서, 혹은 19세기 음악사의 진정한 시작으로서,8) 그리고 음악의 악성으로서 베토벤의 중요성에 어울리게 그의 음악은 수없이 분석되어왔으며, 수용에 관련된 질문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왔다.

베토벤의 작품이 가지는 생명력이 진정 미학적인 가치 때문만이 아님은 이미 여러 수용자들의 다양한 베토벤 상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읽어 낼 수 있다.

우선 음악학자 한신(Jacques Handschin)만 해도 "베토벤의 음악은 순수 음악적, 순수 미학적 관점으로는" 충분히 해석되지 않는다고 보았다.9) 이유는 베토벤 음악이 무언가 의미를 암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불가피하게 미학적으로 축소화 내지 단순화 또는 유치함"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음악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자 하는 "강한 내적 욕구는 상대적으로 구조의 빈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10) 에게브레히트(Hans Heinrich Eggebreht)는 베토벤의 음악에는 무언가 음악적 분석만으로 그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기 힘든 내용적인 것이 들어 있다는 한신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베토벤 음악의 수용에서 항상 입에 오르내리는 "고통-의지-극복"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관찰하였다.11) 그리고 베토벤의 전기에는 누가 썼든, 언제 썼든 상관없이 베토벤이 입은 "영적 상처"로 충만해 있으며, 베토벤이 스스로 편지나 메모에서 표현한 이런 말들과 개념들이 베토벤 수용에서 그대로 반영됨에 근거하여, 베토벤의 경우 "생애와 작품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며 서로 상호보완 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12) 다시 말해, 베토벤의 음악 해석에는 필연적으로 음악외적인 요소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프랑스 음악학자 부흐(Esteban Buch)의 책 『베토벤의 9번 La Neuvieme de Beethoven』13)은 이러한 전기적 범위를 벗어나, 9번 교향곡을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음악"의 맥락에서 연구한다.14) 낭만주의자의 베토벤 신화 만들기이래, 행해진 권력자들의 베토벤 오용과 그 수용맥락을 파헤쳐 베토벤 음악의 생명력은 오히려 서로 모순된 정치적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즉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문학적으로 또 음악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을 주는 요소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매우 모순적이고 대립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음악가, 학자, 비평가들이 베토벤 음악에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지만, 누구의 시도든 완전할 수 없다. 오히려 다양한 해석들과 접근이 베토벤 음악에 신비한 의미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듯하다.

베토벤 신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작품은 오히려 음악적으로 논란이 많은 9번 교향곡의 4악장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 하다. 바그너만 하더라도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9번 교향곡의 "가장 약한 부분"을 4악장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단순히 예술사적으로만 중요하다"라고 쓰고 있다.15) 칼 네프(Karl Nef) 도 4악장의 형식적인 부족함을 비판한다.16) 실제로 9번 교향곡(첫 세 악장과 4악장간)의 형식적, 구조적인 단절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9번 교향곡이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위의 다양한 수용이 보여주듯이- 다양한 측면의 "다양한 정보성" 때문이었다 할 수 있겠다. 여기에 <환희에의 송가>가 기여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베토벤이 쉴러의 텍스트를 자신의 음악에 맞게 편집하는 과정에서 가사가 애매하고 일반적인 내용으로 되어, 수용자들이 원하는 각각의 맥락에 어려움 없이 끼워 맞춰지기 때문으로 보인다.17)

그러나 현대적 음악언어로 씌어진 작품은 아무리 다양한 측면의 다양한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하더라도, 대체로 생명력이 약하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명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시공을 초월하며 발휘하는 생명력은 진정한 예술적 가치의 기준이라는 전제에 숨겨져 있는 함정은 없는가?

여기서 잠깐 베토벤의 생명력에는 그의 작품이 여러 가지 오용에 노출되어 있는 등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베토벤이 "오늘날 어떤 면에서 존 케이지(John Cage)보다 마르린 몬로(Marilyn Monroe)와 더 공통점이 많다"18)라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암시는 베토벤의 이미지가 세속화 내지 천박화되고 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작곡가에게는 "베토벤이 더 이상 예술적 체험을 위한 원천이 되지 못하고" 대중문화의 "죽은 초상화"19)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베토벤 신화를 만든 낭만주의 음악가들도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의 모범이었던 베토벤이 처음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오해되어 찬양되는 것에 실망하였다. 1870년 비인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베토벤의 후계자로 자처하던 음악가마저 참석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20) 여기에는 물론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베토벤을 기리는 행위가 이미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여실히 보여준다.21) 이 때, 바그너는 어느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베토벤을 기리는 유명한 글 "베토벤(Beethoven)"을 썼다. 글로써 베토벤을 기리게 된 동기로 그는 "어떤 행사도 그에게 품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22)이라 밝힌다.

또한 1927년 비인을 중심으로 한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역시 베토벤 음악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쇤베르크와 같은 음악가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치가들과 행정적인 대표인사들이었다. 이미 매우 보수화 되었던 리햐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곡가들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다.23) 이 당시 이미 베토벤은 음악적 엘리트들에게 회의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베토벤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사실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고에서는 별로 새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베토벤 음악의 미학적 가치를 연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노력에 비해 큰 소득이 없는 작품의 가치기준을 서술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음악이 수용된 현상들을 통해 베토벤 음악의 위대한 생명력 뒤에 숨어있는 수용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밝히고자 한다. 그의 9번 교향곡은 1824년 초연 되자마자 오늘날까지 "음악작품으로서 뿐 아니라, 정치성을 상징하는 매체로서도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24)로 손꼽히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이 때 2세기에 걸친 수용사를 모두 다루는 것은 지면상 불가능한 일이므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왜곡되고, 모순되게 수용된 독일 나치시기(1933-1945)에 국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나치의 음악문화정책에 대한 고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베토벤의 왜곡된 수용은 이들의 문화정책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치의 베토벤 숭배가 현대음악 배척 정책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또 현대음악이 오용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늘날 생산적인 베토벤 수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이러한 시도가 결과적으로는 음악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일반적으로 "예술 중에서 가장 정치와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음악이 실제로는 "사회구조나 지배자의 정치와 연결시키는 수많은 끈"25)들을 얼마나 잘 숨기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나치시기(1933-1945)의 베토벤 오용

1933년 나치정부의 초기시기에는 독일국민들의 대다수가 히틀러를 지원한 것이 아니었으며, 1차 대전에서의 패배감으로 인한 독일인의 심리적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독일의 루우 지역은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고, 엘사스-로트링겐과 단찌히를 잃어버려 자존심이 손상된 독일 국수주의자들에게는 와해된 전쟁 이전의 세계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가 아직 없는 공백의 상태였다. 이 때 독일인의 심리 상태를 정치적으로 잘 이용할 줄 알았던 히틀러는 스스로 민족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열등감과 복수의 감정이 뒤범벅된 보수주의자들에게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어주는 강한 독일제국과 민족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프로퍼갠더를 퍼뜨릴 때, 나치들은 국민들에게 말과 논리로 설득시키기 힘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음악의 능력을 이용했다.26) 이들은 회의와 의심을 믿음과 동의로 전환시키는데 음악이 탁월하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우월성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베토벤 음악은 분명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확신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거의 모든 크고 작은 나치기관의 오케스트라는 기회만 있으면, 행사와 음악이 서로 맞건 맞지 않건 간에 베토벤 곡을 연주하였다. 1934년 제국 당 대회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때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Egmont)이 연주되거나, 1937년 그의 생일축하연 때, 푸르트뱅글러(Furtwängler)의27)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니가 9번 교향곡을 연주하였다. 바이로이트에서의 바그너 음악극 연주개막식도 어김없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으로 시작되었다. (1933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하였다) 1934년 바이마르의 쉴러 탄생 175주년 탄생기념식에서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가 괴벨스(Goebbels)의 연설을 장식하며 베토벤 9번을 지휘하였다.28) 이러한 행사를 통해 베토벤에게 지도자 상을 부각시키고, 베토벤과 히틀러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흔하게 일어난다.29) 베토벤에의 지지는 히틀러에게로 쉽게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2차대전이 일어나자 "한 사람의 독일인인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영국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30)라고 독일인의 우쭐함을 더욱 부채질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31) 물론 이런 투의 표현은 히틀러에게서 처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슈만은 1838년 "베토벤과 같은 사람하나가 6명의 외국 천재와 맞먹는다"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32) 그 외에도 수많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베토벤의 천재성을 얘기해 왔으므로 베토벤을 통해 독일음악의 우월성과 독일 민족의 음악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은 독일인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치의 베토벤 찬양은 국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데 좋은 수단이 되었다. 특히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고 노래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음악적으로 우수한 독일 민족 공동체의 형성에 대한 환상을 줄 수 있는 모범적 작품이었다.

베토벤이 우선적으로 독일 내에서 독일인의 우월성을 보장하는 상징으로 이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반면에, 대외적으로는 나치들의 진정한 속셈을 잘 가리는 알리바이 구실을 했다. 1936년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경기가 개최되었을 때, 베토벤의 9번 합창 환희에의 송가를 6000명의 베를린 중 고등학생들을 동원하여 개막식에서 부르게 하였다.33) 웅장하고도 뛰어난 연출에 대한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당시의 국제올림픽위원회장은 개막식 행사에 탄복하여 독일 국민과 히틀러에게 감사를 전하기까지 했다. 유대인에 대한 테러로 세계로부터 빈축을 샀던 독일정부가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환희의 송가>의 메시지로 나치당이 폭력단체가 아니라 평화적인 정부라는 눈가림을 하였는데 이것이 좋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얼마가지 않아 (2년 후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작으로) 히틀러의 침략전쟁과 팽창정책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올림픽 행사처럼 국제적으로 히틀러 정부의 명예를 높이는데, 독일 오케스트라와 그 지휘자들의 공로가 컸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푸르크뱅글러, 멩겔베르크(W. Mengelberg), 크나퍼부쉬(Knappertsbusch), 뵘(Karl Böhm), 아벤트로트(Walter Abendroth), 그리고 1933년 이후 나치당원이 되어 급속도로 출세하게 되는 카라얀(Herbert von Karajan)34) 등은 나치의 외교 정치적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7년부터 다시 푸르트뱅글러의 지도하에 들어간 베를린 필하모니는 "독일민족의 음악적 영혼의 신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35) 것으로 까지 평가되었으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는 개인적으로 유대인 음악가나 아방가르드음악가를 보호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치 문화정책에 효과적으로 기여한 것은 틀림이 없다. 푸르트뱅글러의 뛰어난 역할은 괴벨스가 감동하여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할 정도였다. 1939년 11월 22일 "그는(푸르트뱅글러-역주) 외국에서 우리를 위해 위대한 업무를 수행했다"라고 괴벨스는 적고 있다. 또 1940년 1월 9일의 일기에는,

"푸르트뱅글러가 스위스와 헝가리 연주여행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를 아주 잘 이용할 수 있다. 요즘 그는 아주 말을 잘 듣는다. (...)그는 우리의 음악적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프라하로 갈려고 한다. 이것은 정말 긴요한 일이다"36)

라고 쓰고 있으며, 1940년 6월 20일에는 "그는 이제 진짜 쇼비니스트(광신적 애국주의자-역주)가 되었다"라고 괴벨스는 기뻐하고 있다.37) 망명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취리히나 파리 혹은 부다페스트에서 베토벤을 지휘하도록 히틀러에 의해 파견된 지휘자가 '나는 음악가일 뿐이며, 그래서 음악만을 할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흉칙한 거짓말을 하는 짓이다"38)라고 한 것은 이렇게 볼 때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나치의 외교관'으로 훌륭한 역할을 한 데는 "미적 향유를 주는 일종의 피난처로써 잠시 잔인함을 잊게 하는"39) 기능이 한 몫 했던 것 같다. 베토벤의 9번은 전체 나치시기를 통틀어 자주 연주되었으나, 특히 전쟁중인 1941년과 42년의 모든 심포니 레퍼토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는 통계는40)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하겠다. 이미 1927년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패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수주의자들에게 베토벤의 음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를 주는 음악"이었음을 앞에서도 보았다. 이제 반대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 인에게 베토벤은 "다른 누구보다도 인간의, 모든 인간의 가슴에 와 닿는 작곡가"였다.41)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 라디오에서 1943년 멩겔베르크의 지휘하에 베토벤 9번이 연주되었고, 아벤트로트는 라이프찌히 게반트오케스트라로 파리의 Palais de Chaillot에서 같은 곡을 지휘하였다.42)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나치의 베토벤이 독일인의 우월성과 정복자로서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었던 반면에, 프랑스의 레지스탕트에게도, 나치반대자들에게도 베토벤의 음악은 "자유의 이상이 표현된 것"이었다.43)

이미 오래 전부터 런던 BBC 라디오 방송의 주제 멜로디인 베토벤 5번 교향곡 서두의 "바바바밤" 모티브는 1941년 BBC 벨기에 방송이 빅토리-캠패인을 벌이면서 승리의 상징으로 암호화했다. 이 모티브의 리듬이 모르스 무전기로 "빅토리"를 칠 때 생기는 리듬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이를 저항운동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이 멜로디가 철자 V와 함께 저항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44)

아이러니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경우는 나치들의 수용소와 게토에서 비인간적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가스실에서조차 <환희에의 송가>를 불렀던 사실이다. 당시 10세로 살아남았던 한 소년이 그 후 이 멜로디의 기원과 의미를 알게 되자, 왜 하필 이 노래가 그 장소에서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하게 되며 회의를 그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가끔 나는 (...) 이것이 범죄와 대중학살에 대한 정신의 반항이요 저항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는 때로 이 노래에 회의를 가진다. 어쩌면 이 노래를 선택한 것에서 엄청난 신랄함과 악마적 태도가 표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량학살은 분명하다. 갈 때까지 간 극단적 악이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들에게 이 축제적인 가사와 음악을 부르게 한 것 역시 죄악이다"45)

베토벤 음악 뿐 아니라 (현대음악을 제외한) 음악의 모순적인 사용은 나치 수용소(KZ)에 수감된 포로들에게도 대립적인 엇갈린 의견으로 나타난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폴랜드 유대인은 "KZ에서 음악과 노래가 포로들의 정신적 자기 방어에 기여했다"46)고 1977년 말하였던 반면, 다른 포로는 "KZ에서 음악의 역할은 마찰 없는 훈련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KZ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가끔 기분전환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47)으로 해석했다. 이들의 견해는 모두 다 각자의 입장에서 옳을 지 모른다. 스스로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폴랜드 유대인은 순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당시 많은 포로들이 느꼈던 것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1943년 드랑시에서 아우슈비츠로 수송된 성악가 파니아 페네론(Fania Fenelon)의 증언을 들어보자.

"파파파팜...여기는 런던이 아니다. 내가 기억으로 써 낸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첫 악장을 연습하는 우리(KZ-역주)의 오케스트라이다. 이 파파파팜이 내게 기쁨을 주었다.(...) 내게는 아주 드문 기쁨이다. 그녀(당시 KZ에서 동료 수용인들의 반장격인 카포 역할을 했던 로제 사중주 설립자의 딸인 알마 로제를 지칭함, 페네론이 적대시했음-역주)는 나의 악의적 기쁨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지배자인 SS(나치 엘리트 조직-역주) 요원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이 음악을 BBC의 한 지부인 "해방된 프랑스" 방송의 시그널 음악과 연결시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48)

물론 여기서 페네론의 경우는 베토벤 음악이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위로일 뿐 아니라, 상징적이나마 적들에게 저항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놀려주는 즐거움을 함께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페네론의 복잡한 심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또 5번 교향곡이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다른 포로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서의 음악행위도 결국은 나치의 정치적 목적 달성, 즉 수용소의 질서 유지와 대외적으로(예를 들면, 적십자 등의 단체가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포로들의 연주로) 휴매니즘적인 인상을 준다는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보고에서처럼 실제 유대인의 게토인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 수용된 많은 음악가들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옮겨지기 전에 일정한 기간동안 음악활동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제한적인 게토 속에서 이들이 각각 음악에서 정신적 위로를 받았음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포로들이 나치의 정치적 프로파갠더에 이용되고 있었고, 그 목표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아마도 쉽게 꿰뚫어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치음악정책의 성공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애매 모호함과 이중성으로 희생자들에게 자신들이 이용당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이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모순된 베토벤 음악의 수용 중에 논리적으로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경우는 나치들이 한편에서는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환희의 송가>를 연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과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집시들, 정신병자, 허약한 장애자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을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렇게 "모든 사람"의 개념에는 수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제외되고 있었음에도 나치들은 스스로 전혀 모순으로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오용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저항이나 비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최고의 악을 저지르는 무리들이 최고의 선과 휴매니즘를 상징하는 <9번 교향곡>을 자신의 편으로 믿고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음악이 모든 오용에 속수무책인 상태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나치들은 베토벤 음악만을 오용한 것이 아니라 재즈음악을 제외한 오락음악 및 민속음악, 행진곡 그리고 현대음악을 제외한 (그리고 유대인이 작곡하지 않은) 모든 예술 음악을 이용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대음악과 재즈음악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모든 음악이 정치적 오용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될 수 있다. 왜 나치들은 현대음악과 재즈음악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이 음악들은 어떤 보호장치를 가지고 있었는가? 본고에서는 나치들에게 "음악이 아니라 음악으로 위장한 국제적인 문화흑사병"49)으로 여겨진 재즈 음악에 대한 사항은 다음기회로 미루고, 현대음악에 국한하여 서술함을 밝히고자 한다.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 그리고 베토벤 오용의 더 큰 맥락을 보기 위해 나치의 음악정책을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볼 필요가 있겠다.



3. 나치의 음악정책

나치 문화부장관 괴벨스는 1933년 11월, "제국문화협회 창립"에서 "독일음악"은 한편으로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운명의 힘"임을 과시해야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 영역에서 투쟁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0) 괴벨스의 첫 번째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음악인들은 아리아인의 피 속에 이미 음악적 재능이 잠재해 있음을 밝혀내고, 위대한 음악대가는 독일인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이성이나 역사적인 변화보다는 운명적이며,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표현은 낭만적 음악관을 강조하는 나치의 진짜 속셈은 결국 매우 논리적이고 계산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음악이 나치의 정책을 관철시키는데 투쟁까지 불사하도록 유도할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음악이 결국 '독일 공동체'를 전쟁으로 이끄는 일에 기여하는 역할까지도 이미 암시되어 있다 하겠다.

이미 괴벨스의 연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치들은 음악을 "감정의 예술"51)로 선포한다. 이것은 나치들의 음악 정책 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이 감정의 예술이라는 주장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강조되는 강도와 그 결과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예를 초월한다.

독일인은 음악적으로 선택된 민족이며, 음악이 감정세계의 특별한 표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나치시기 전체를 통해 팽배한 것으로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다.52)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지도급 정치가들은 공개석상에서 자신이 음악에 매우 감동하는 청취자임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독일성을 과시하였다.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음악성을 의미하며, 이 음악성은 곧 독일인의 선천적인 특징이라는 논리였다.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나치 엘리트들의 음악청취는 공개석상에서 보여주기 위한 쇼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실제 히틀러와 괴벨스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히틀러는 "브람스보다 부르크너를 더 선호"53)하며, 바그너에 대한 그의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총리가 되기 전에도 히틀러는 매우 힘든 투쟁의 순간에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에서 자신의 정치적 투쟁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54)

음악을 듣는 행위는 히틀러와 나치들에게는 바로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이 때 주의해서 관찰해야 할 것은 이들이 강조하는 청취자세이다. 이들에게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청취자세는 배척되었고, 반면에 종교적인 신앙의 자세가 선호되었으며, 회의나 의심보다 믿음과 경건함이 강조되었다. 이성은 배제되고 잠재의식의 저 깊은 심연에 빠져 음악을 청취할 때의 체험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그것이 불협화음이든, 자유로운 리듬55)이든 상관없이) 배척되었다. 히틀러는 한 연설에서 음악가들에게 이성적이고 사고적인 것을 포기하라고 권하며 "우리 음악가에게 지적 이성보다 오히려 넘쳐나는 음악적 감흥이 영향을 미쳐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원칙적인 정책임을 알 수 있다.56)

1936년 히틀러는 아예 모든 예술의 비평 자체를 금지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57) 나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의견의 대립이나 논쟁이었으며, 불안함과 의심처럼 이들에게 위험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58)

이러한 상황을 꿰뚫어 본 망명 음악가 아이슬러는 나치들의 정책에 이로운 음악청취 태도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흠모와 존경, 믿음과 끝없는 향유 그리고 이성의 배제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판적이며 역사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 이것은 예술에서도 무상함이 있으며, 위대한 예술 작품도 사회적으로 변화된 조건에서는 그 가치가 줄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전자는 감동되고 열광하며 도취한 청취자를, 반면에 후자는 비판적인 청취자를 만들어 낸다.(비판적 태도는 재미를 배제하지 않는다). 전자는 파시즘에 유리한데, 이는 파시즘이 정치에서도 똑같이 흠모와 존경, 믿음을 (요구하며), 이성과 비판의 배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59)

그러므로 "예술을 신적인 선물"로 즉흥적인 것으로 여기고, 인스프레이션에 의한 미학(Inspirationsästhetik)을 주장하던 한스 피츠너와 같은 작곡가는 "음악을 영혼의 선물"이라고 보는 히틀러의 음악관과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피츠너를 비롯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외곽으로 몰린 듯했던 호이스(Adolf Heuss), 쉴링스(Max von Schillings),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등 보수적 경향의 작곡가들은 (개인적 차원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치시대에 큰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음악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시켜 시공을 초월하는 낭만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음악의 감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려는 것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성을 배제하고 사고할 능력이 없는 인간들이야말로 나치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인간들을 만드는데 바로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60) 나치의 12년 지배동안 엄청난 모순들이 진행되었지만 독일 국민들이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나치의 이상적 독일 공동체에 대한 약속을 믿었던 것은 바로 개개인의 독립적 사고능력의 퇴보를 증명하는 것 아닌가 싶다. 베토벤의 오용에 대한 독일 국민의 무딤도 배타적인 감정만을 장려하는 음악정책의 결과로 보인다. 이런 바탕 위에 감정의 음악이 유대인에 대한 비이성적인 투쟁으로까지 고무되며, 결국 전쟁에 필요한 "광적 무지"61)로 발전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음악에 대한 배척 정책은 중요한 것이었다.

나치 음악정책의 열성적인 대표음악이론가인 발터 아벤트로트(Walter Abendroth)62)는 신음악을 "문화적 쓰레기"로 표현하면서 현대음악을 금지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신음악이 민족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 정신과 존재가 듣기 좋은 소리와 아름다움, 의미와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강하고 당당한 우리 민족 속에 살아있는 건강한 감각과 의지에 관계하는 모든 것을 잘 알면서도 경멸하고 우습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음악은 부패의 병원균이다."63)

이러한 파괴적 평가는 신음악이 강한 불협화음으로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진짜 이유는 나치들이 선전하는 소위 모든 성스럽고 경건하며 영원한 음악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목적 달성에 유리한 음악은 -아이슬러가 주장하듯- "소위 좋은 옛날을 반영"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좋은 분위기와 충직함, 그리고 하모니를 있는 듯하게 보여주는" '성스러운 음악'이어야 하는데, 현대음악은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붓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치들의 정책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고 예리하게 파악했던 아이슬러는 나치들의 현대음악에 대한 핍박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현대음악은 자본주의의 모든 추하고 혼란스런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에 나치들이 국민을 기만하는데 적당하지 않다. 다시 말해 현대음악이 우리 시대의 부패와 붕괴에 대해 너무 많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64)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현대 음악은 모순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깨우쳐주는 음악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나치들이 오용하지 못하고 배척한다는 말이다. 나치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현대음악 언어는 환상과 열광은커녕 오히려 마취에서 깨어나게 하는 고약한 것이었다. 현대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나치에게 전혀 유리하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이런 음악은 독일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음악으로 선포되었고, 독일음악인 베토벤의 음악은 현대음악을 막을 수 있는 방패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오늘날 독일 음악이 다시 음향놀이와 불협화음적 스포츠가 되지 않으며, 하모니의 매춘과 형식의 카오스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애쓸 것이다. 여기에 베토벤이 우리의 보루가 된다."65)

그러나 현대음악에 대한 배척 역시 나치들이 처음 시작한 일이 아니다.66) 쇤베르크가 청중과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신음악을 이해하려는 준비가 되어있는 제자들과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사적인 연주회"를 조직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신음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나치 지지자 외에도 다양했다. 쇤베르크 음악에 대한 파괴적 비평 때문에 그와 원수관계로까지 간 비인의 유명한 비평가 율리우스 콘골드(Julius Korngold)는 유대인으로 나치에게 쫓겨 미국으로 간 망명인이었다. 물론 훗날 두 사람은 같은 처지의 망명인으로 서로 화해를 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나치들은 베토벤의 음악에도 전혀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지 않으며67),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베토벤 상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였듯이, 현대음악에 대한 반감에서도 이미 팽배해 있는 대중의 감정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이용한 것이 나치 문화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보인다.

물론 나치들이 새로운 시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종 이론분야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엄격히 따지자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바그너가 1850년에 「음악에서의 유대주의 Judentum in der Musik」를 발표하였으며, '유대인과 비음악성'의 관련성에 대한 이론은 1933년 이전에도 이미 극보수주의자들에게 공공연하게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민족과 음악의 직접적인 관계를 증명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시도는 나치음악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용이하지 않았다. 이유는 베토벤이 일반적으로 아리아인, 즉 북구인의 전형과는 달리 파란 눈이 아니라, 고동색 눈이었으며, 머리카락도 금발이 아니라 검었으며, 건강미가 넘쳐흐르고 아름다워야 할 아리아인의 모범과는 달리, 키도 작고 못생긴데다 전혀 인종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도 술주정뱅이에다 아들을 포탈한 자로 순수한 아리아 피가 고귀한 인간과 '독일적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그들의 주장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이에 맞지 않는 사실에 근거하여 학자 발터 라우센베르거(Walter Rauschenberger)는 "겉으로 이렇게 북구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강한 북구적 정신을 가질 수 있는가?"68)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나치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독일 민족의 에로이카"로 규정지으려 했으므로 인종 이데올로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학자들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인종과 음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열성적 나치 음악학자 리하르트 아이헤나우어(Richard Eichenauer)도 "베토벤 가문이 종족적으로 많이 혼합되었다는 것은 베토벤과 그의 두 형제가 외향적으로 매우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에서 아주 설득력이 있다"69)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베토벤의 비게르만적 외형과 인종의 혼합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북구적인 예술가로 규정된다. 그 근거는 "북구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영웅적인 것, 작품의 영웅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토벤의 작품이 모든 영웅적 내용의 행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것은 바로 그가 "북구적"이기 때문이라는 빈약한 논리이다.70)

나치의 음악정책 중 가장 엉터리 같은 주장들이71) 바로 이 아리아 인종과 예술을 연결하는 데에서 가장 많이 양산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도 많은 모순이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끼워 맞추기 식으로 주장되기 때문이다. 음악가 중 문제가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슈베르트의 눈과 머리카락 색도 문제였고, 너무 유연한 얼굴 형태 역시 북구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성병의 결과로 정신이상이 되어 죽은 슈만도 강하고 건강한 게르만족의 이상에 맞지 않았으며 그 역시 순수 아리아인이 아니라 혼혈아였다.72)

다른 한편, "독일음악의 본질을 멜로디적인 것에 있다"는 괴벨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멜로디를 만드는데 무능력한 유대인"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에서 멜로디적인 것은 골치 아픈 사실이었다. <유대인과 음악 Jude und die Musik>의 저자 칼 블레싱어(Karl Blessinger)는 말러의 음악이 멜로디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유대인의 탄식 그 이상을 넘지 못한다"라고 자신감 없이 결론을 맺고 있다.73) 또한 나치들이 독일왈츠의 대부로 칭송하던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도 유대인의 피가 1/8 섞였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괴벨스는 이를 공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이유는 "전체 독일 문화적 소유가 점점 탕진되게 될" 판이기 때문이라고 괴벨스는 일기장에 적고 있다.74)

인종과 음악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나치 간부들은 1938넌 5월 뒤셀도르프의 제국음악대회에서 "인종과 음악"이라는 주제로 행사를 열었다. 행사의 일부로 "퇴폐적 음악(Entartete Musik)"의 전시회를 열고 적극적으로 현대음악과 유대인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 추하고 기형적인 음악(현대음악)을 만드는 자들이 유대인이라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이 두 그룹을 공산주의와 연결하여 더욱 적대적인 인상을 일으킬 수 있는 "음악 볼셰비키주의(Musikbolschewismus)"75)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적을 한 솥에 모두 부어넣으려 했다.

명단에 포함된 음악가의 일부 예를 들어 보면, 여기에는 쇤베르크를 비롯하여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 힌데미트(Paul Hindemith), 스트라빈스키(Igor Strawinski), 에른스트 토흐(Ernst Toch),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에른스트 크세넥(Ernst Krenek), 쿠르트 바일(Kurt Weill),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에리히 코른골드(Erich Korngold) 등의 작곡가 뿐 아니라 오토 크렘퍼러(Otto Klemperer), 아르투어 슈나벨(Arthur Schnabel), 칼 플레쉬(Carl Flesch)와 같은 유대계 연주가 및 파울 아브라함(Paul Abraham), 빅토 홀랜더(Victor Hollaender), 미샤 스포리안스키(Mischa Spoliansky), 장 길버트(Jean Gilbert)와 같은 가벼운 음악(특히 오페레테)의 대표자들(모두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다.

이 명단에 없는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은 자신의 이름이 전시회의 리스트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베를린의 외무부에 항의하며, 자신의 이름도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76) 이와 반대로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유대인도 아닌데 리스트에 들어 있음을 친구를 통해 항의하였는데,77) 바르톡과 대조를 이룬다. 스트라빈스키는 실제로 현대음악가중 나치 독일에서 자주 연주된 편에 속한다.78)

1937년 뮌헨에서 있었던 "퇴폐적 미술(Entartete Kunst)"에 비해 뒤셀도르프의 음악 전시회는 호응도가 약하였는데, 그 해 3월에 있었던 오스트리아 합병과 5월말에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대한 히틀러의 계획이 알려지면서 정치적인 사건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79) 다른 한편, 개인적 차원의 작품활동이 가능한 미술분야에 비해 음악활동은 -극장, 방송국,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위치는 나치당원이 자리잡고 있어- 어차피 국가적 통제가 이미 잘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공개적인 전시회의 필요성이 희박한 상태였다.80)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푸르트뱅글러는 행사를 추진하는 "행정인들이 예술가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행사 책임자인 찌글러(Hans Severus Ziegler)와 식스트(Paul Sixt)에게 유대인과 함께 일하는 "프란츠 레하(Franz Lehar, 아리아인 임-역주)를 잊어 버렸네"라고 놀리기도 했다.81)

그리고 행사 책임자 찌글러의 사적 목적이 이 전시회에 뒤범벅이 되기도 해서 물의를 빗었는데, 이는 "퇴폐적 음악인"의 명단에 프랑크푸르트 음대학장인 헤르만 로이터(Hermann Reutter)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82) 로이터는 나치당원에 속했고 횔더린(Friedrich Hölderin)의 텍스트에 부친 칸타타 "독일인의 노래(Gesang des Deutschen)"과 같은 국수주의적 내용의 음악을 작곡하였던 음악가로 전시회에 포함될 인물이 아니었다. 순전히 로이터에 대한 찌글러의 개인적인 증오 때문이었다.

이 전시회를 둘러싼 잡음과 그 실패는 수많은 유대음악가와 독일음악을 망치는 낯선 것들을 모두 쫓아내었지만, 실제로는 나치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음악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러나 이미 독자적인 비평이 금지된 지 오래되어 비평다운 비평을 하지 못하는 각 도시의 신문과 방송매체는 이 행사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기 보다 공식적인 발표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이렇게 볼 때, 나치정권의 초기를 제외하고 나치의 음악정책은 큰 테두리를 제외하면 그리 일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종족과 음악의 분야나 전시회에서 보듯이, 적지 않은 모순과 일관성의 부족도 눈에 두드러진다. 다시 말하면 감정에 편중하는 음악정책과 현대음악 및 유대음악인을 배척한다는 전체적 윤곽은 변함이 없으나, 디테일과 실습에 있어 일사불란한 음악정책은 나치독일에서 기대하기 힘들다.83)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의 정책적인 술책과도 관계 있다.

히틀러는 음악과 관련된 자세한 지시에 있어서는 소극적이었고, 부하들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도록 오히려 유도했다. 그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와 문화정책에 관련된 엘리트 행정관리인, 로젠베르크(Rosenberg), 괴링(Göring), 쉬라하(Schirach) 등이 제국의 음악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열띤 경쟁을 하였다. 이들 중 끝까지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은 로젠베르크와 괴벨스84)이었는데 둘은 끊임없이 경쟁하는 관계였다. 뒤셀도르프의 전시회를 두고도 로젠베르크와 괴벨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히틀러는 문화간부들의 결정권에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함으로 모순과 잡음은 있으나, 뚜렷한 위계 질서체제에서 쉽게 일어나는 경직화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거리를 두고 볼 때 너무나도 황당한 모순들이 독일 국민에게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국민들을 엄청난 도취에 빠지게 하고, 이를 광기로 유도하였던 나치의 음악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해준다 하겠다. 나치들은 엄청나게 활발한 음악연주회와 행사들로 '독일 음악적 공동체'가 도래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끝없는 가상세계의 연출"85)을 시도하였다. 나치당과 그 산하 조직들의 정치 행사를 위한 음악 수요는 엄청난 것이었다. 고전의 위대한 음악가의 작품 외에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씌어진 무명, 유명작곡가의 작품이 무려 15000개에 이른다는 사실86)은 나치 독일이 얼마나 활발한 음악생활을 지원하였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확한 논리나 이성적 판단보다 격앙된 감정과 광신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의 성공에 음악학자들도 일조했다. 거의 대부분 보수적이고 국수적이던 음악학자들은 큰 어려움 없이 나치 이데올로기에 합의될 수 있었다. 학문적으로 진지하고 권위가 있었던 리스트 전문가 페터 라베(Peter Raabe)는 종족과 음악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지만, 1935년 이후 제국음악협회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소위 "퇴폐적 음악가"를 색출하는데 공헌하였다.87) 그 외에 나치 시기의 명망 있었던 연구가로 1940-45년 동안 직접적으로 제국의 프로파갠더 직원으로 일했던 한스 요하힘 모저(Hans Joahim Moser)와 "독일 음예술의 게르만 유산(Germanische Erbe in der deutschen Tonkunst)"을 집필하고 젊은 나이에 프라이부르크 음대의 학장으로 출세하는 요셉 뮐러-블라타우(Joseph Müller-Blattau), 그리고 "유대인 음악사전(Lexikon der Juden in der Musik)"을 저술한 열성적 나치였던 헤버트 게릭(Herbert Gerigk), "음악에서의 종족문제(Das Rassenproblem in der Musik)"를 집필한 프리드리히 불루메(Friedrich Blume) 등을 들 수 있다.



4. 끝맺으며

지금까지의 서술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려보자.

나치시기에 베토벤의 음악은 (다른 고전음악 및 바그너의 음악과 안톤 부르크너의 음악과 함께) 독일인의 우월감을 과시하고, 히틀러의 평화적인 외교관으로 뛰어난 역할을 수행하여, 독일 팽창주의 정책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가해자나 희생자에게 모두 위로를 주는 음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수용을 생각해 보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베토벤 음악을 비롯한 고전음악이 소위 '퇴폐적 음악'인 현대음악을 막는 방패역할도 이미 1920년대 바이마르시기의 국수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의 그로테스크한 베토벤 수용조차도 '나의 베토벤은 너희들의 베토벤과 다르다'라고 한 니체의 말처럼, 수용자의 측면에서만 볼 때 -나치 범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나치가 역사와 관련이 없는 일회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의 연속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처럼 베토벤의 모순적인 수용이 나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비일비재하였음에도 나치의 베토벤 수용이 이전의 시기와 다른 차이점은 수용자인 나치들이 행한 범죄의 무거움에 있다 하겠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계화된 인간 학대와 살인,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데 음악이 기여한 정도가 이전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나치의 음악정책이 여러 가지 부인할 수 없는 모순과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독일 사람은 모두 형제이다'라는 (타민족을 학대하는) 배타적인 독일 공동체를 형성하여 독일 국민을 전쟁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존의 것을 이용하여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 후,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인의 내면적 삶을 야만적으로 변질"88)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성공에는 라디오, 영화와 같은 새로운 매체가 차지했던 중요한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라디오는 히틀러의 연설도, 음악연주도 라이브로 방송하였으므로 당시 대부분의 독일가정에 보급되었던 라디오는 나치 선전정책의 직접적인 전달매체로써 없어서는 안될 충실한 도구였다. 음악이 미술보다 나치 정책에 더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라디오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베토벤 수용을 통해 바라본 나치의 음악정책에서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89)는 파시즘의 유미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스스로 화가로 자처하던 히틀러는 정치적 집회나 행사를 음악 및 예술의 힘을 빌어 '예술적'으로 연출하는 정치의 심미화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유대인 학살이나 전쟁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심미적 대상으로 환원"90)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는 특히 자신의 정적인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정치가로 일컬으면서도 스스로는 항상 "지도자 혹은 예술가"91)임을 자처하는데, 이것 역시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히틀러가 예술의 순수성과 낭만적 예술관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예술의 정치적 도구화를 추구하였다는 사실에서 순수한 음악관이 지니는 오용 가능성의 함정을 재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어차피 생명력이 약한 현대음악을 그냥 두지 않고 공개적으로 학대하는 나치의 태도에서 그들이 표면적 주장과는 달리 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깊이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음악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것으로, "인간의 말과 세상의 비참함을 피해 안식할 수 있는 우주적 언어"92)로만 여긴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일이다.

끝으로, 베토벤 음악의 끈질긴 생명력 뒤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베토벤이 유대인이었더라면, 나치시기에 이렇게 그의 음악이 오용될 수 있었을까 라는 반문으로 재확인해 볼 수 있다. 아마도 멘델스존이나 말러의 경우처럼 그의 음악도 연주되지 않았으며, 오용되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어쩌면 반유태주의자였던 바그너에서부터 베토벤의 수용 자체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음악을 비롯한 예술작품이 전적으로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요소의 영향하에 있음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다.

아우슈비츠의 범죄와 나치의 오용이후, 베토벤 신화의 어둡고 얼룩진 면은 수용사에서 무시해 버릴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토마스 만이 미국망명시기에 "파시즘에 대한 문학적 대결"93)로써 쓴 소설 『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us』에서 9번 교향곡이 실패한 휴매니즘의 상징으로써 회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94)

물론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9번 교향곡이 1960년대에 "유럽의 찬가"로 지정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 등으로 또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진정 살아있는 작품으로써 의미를 가지려면, 좀 다른 수용형태로 나타나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미하엘 길렌(Michael Gielen)이 프랑크푸르트 연주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3악장과 4악장 사이에 쇤베르크의 망명 작품 <바르샤바의 생존자 A Survivor from Warsaw>를 삽입하였던 시도95)는 오늘날 어떻게 베토벤을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하겠다. 유토피아적인 <환희에의 송가>는 쇤베르크의 작품이 고발하는 반인류적인 행위의 역사와 비교되어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과 시도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환희에의 송가>는 오늘날에도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민음사(서울) 1983.

백문임, '정치의 심미화': 파시즘 미학의 논리.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서울) 2001년.

이경분. 쇤베르크와 '독일음악', 『음악과 민족』 제21호, 민족음악학회(부산) 2001년 봄, 79-98쪽.

장성현. 파시즘과 니체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 만의 견해: 『파우스트 박사』를 중심으로, 『독일문학』통권 58집, 1995년 한국독어독문학회, 19-42쪽.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김철자 옮김, 학원사 (서울) 1985년.

Esteban Buch: Beethovens Neunte (원제 La Neuvieme de Beethoven. 독문번역: Silke Haas), Berlin, Muenchen 2000.

Albrecht Dümling/Peter Girth(Hg.): Entartete Musik. Dokumentation und Kommentar, Düsseldorf 1993.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Prozesse und Stationen vom Mittelalter bis zur Gegenwart, München 1990.

A. Eichhorn: Beethovens Neunte Symphonie, Kassel 1993.

Hanns Eisler: Musik und Musikpolitik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I (1924-1948), Leipzig 1985, 334-357쪽.

_____, Einiges über das Verhalten der Arbeitersänger und -musiker i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242-265쪽.

Joan Evans: "Die Rezeption der Musik Igor Strawinskys in Hitlerdeutschland", Archiv für Musikwissenschaft, 1998/2, 91-109.

Fania Fenelon: Das Mädchenorchester in Auschwitz, Frankfurt a. M. 1980.

Martin Geck: Von Beethoven bis Mahler. Die Musik des deutschen Idealismus, Stuttgart 1993.

Michael Gerhard Kaufmann: Orgel und Nationalsozialismus-Die ideologische Vereinnahmung des Instruments im "Dritten Reich", Kleinblittersdorf 1997.

Silke Hilger: Die Vergessenen Weisen des Winfried Zillig, Musica 1995/2, 78-84.

Thomas Mann: Warum ich nicht nach Deutschland zurürckgehe. Offener Brief an Walter Molo, Thomas Mann Gesammelte Werke in 12 Bd. Frankfurt a.M. 1960, Bd. 12. 953-962.

Adolf Sandberger: Das Erbe Beethovens und unsere Zeit, Neues Beethoven-Jahrbuch, Bd.3, Augsburg 1927.

Fragen an die deutsche Geschichte, Historische Ausstellung im Reichstagsgeäude in Berlin, 1981 Bonn.

Richard Wagner: Beethoven, Gesammelte Schriften und Dichtungen in 10 Bd. Leipzig 1907.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Eine Dokumentation, Hamburg 1966.



Abstract



Zur Musikpolitik des Dritten Reiches
anhand der Rezeption von Beethovens Sinfonien

Kyung-Boon Lee



Es gibt wenige Musikwerke, die eine so widersprüchliche Rezeption aufweisen wie Beethovens Musik: Die Romantiker im 19. Jahrhundert z. B. priesen Beethovens >Neunte< als "göttliche Tonkunst", den Komponisten als "Hohepriester". In den 20er Jahre des 20. Jahrhunderts war seine Musik "ein Vorbild für die sozialistische Revolution." Für die Amerikaner war Beethoven "ein echter Demokrat", während der deutsche konservative Wissenschaftler Adolf Sandberger den Komponisten "zur Festung, die kein Versailler Vertrag zu zerstören vermag", erklärte. Am heikelsten und widerspruchsvollsten zeigt sich die Rezeption während des Dritten Reichs: Während die Nazis die Beethovens Musik zu einem Leitfaden ihrer Musikpolitik machten, sahen die Nazigegner in ihr einen Ausdruck ihrer Freiheitsidee. Auch der jüdische Kinderchor in Auschwitz sang vor seiner Ermordung in der Gaskammer die "Ode an die Freude".

Anhand diesen widerspruchsvollen Rezeptionen Beethovens wird hier untersucht, was der Grund für die Langlebigkeit des Werks ist. Da es sich hier nur um einen Aufsatz handelt, wird der Zeitraum der Untersuchung auf das Dritten Reich beschränkt. So sind die Fragen untersucht, welche Absicht der Nazis hinter dem Missbrauch von Beethoven stand, welche Rolle seiner Musik für die Diffamierung der modernen Musik spielte und nicht zuletzt, inwieweit Musik und Politik zusammenhängen. Diese Fragen liegen nahe, da die Sinfonie seit der Uraufführung 1824 bis heute nicht nur als Musikwerk, sondern auch als "Medium politischer Symbolik" eine erstaunliche Karriere aufzuweisen hat.

Um dies zu veranschaulichen, wird zunächst genau untersucht, inwieweit die Musik Beethovens im Dritten Reich missbraucht wurde, welche Musiker und wie sie dazu beitrugen.

Aus dieser Untersuchung ergibt sich die Frage, was amoralishe Menschen wie die Nationalsozialisten dazu verleiten könne, die moralische Gültigkeit des ästhetischen Erlebens auch für sich zu beanspruchen, allgemeiner gesagt, inwieweit die Musik politisch missbraucht werden kann.

Da nicht alle Musik von den Nazis missbraucht wurde, d.h. da gerade die Neue Musik und die Jazzmusik verfemt waren, wird ihre Musikpolitik näher untersucht, wobei die Jazzmusik beiseite bleibt. Daraus wird deutlich, warum die moderne Musik ihrer Musikpolitik widersprach: Für die Zwecke des Volksbetrugs ist sie weniger geeignet, da sie die kapitalistische Zustände in all ihrer Verworrenheit und Hässslichkeit widerspiegelt und viel über die Fäulnis und Zersetzung unserer Zeit aussagt.

Trug die Musik Beethovens innenpolitisch zu Überlegenheitsgefühle der Deutschen im Dritten Reich bei, spielte sie als hervorragender Diplomt Hitlers im Ausland auch eine entscheidende politische Rolle, wie Thomas Mann zu Recht betonte: "Ein Kapellmeister, der, von Hitler entsandt, in Zürich, Paris oder Buddapest Beethoven dirigierte, machte sich einer obszönen Lüge schuldig - unter dem Vorwande, er sei ein Musiker und mache Musik, das sei alles."

Nach Ausschwitz ist der Humanitätsgedanke von Musik Beethovens, nicht zuletzt die 9., heute nicht ohne Bedenken zu rezipieren, denn die herrschende Kultur definiert, was menschlich ist, um zugleich von der Unmenschlichkeit abzulenken, unter der die in ihrem Schatten lebenden Opfer leiden. Wie man heute Beethoven produktiv weiterdenken kann, zeigt der Versuch von Michael Gielen in einem Frankfurter Konzert Ende der siebziger Jahre, der zwischen dritten und vierten Satz der Neunten Arnold Schönbergs >Überlebender aus Warschau< stellte.



주(원문에서는 각주)
1)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Bd. 26, Nr. 27, 1. Juli 1824, 441쪽.

2) Esteban Buch: Beethovens Neunte (원제 La Neuvieme de Beethoven. 독문번역: Silke Haas), Berlin, Muenchen 2000, 75-76쪽.

3) Esteban Buch: Beethovens Neunte, 192쪽.

4) New York Times, 26. 3. 1927, E. Buch: Beethovens Neunte, 227쪽 재인용.

5) Anatoli Lunatscharski, A. Eichhorn: Beethovens Neunte Symphonie, Kassel 1993, 319쪽 재인용.

6) Adolf Sandberger: Das Erbe Beethovens und unsere Zeit, Neues Beethoven-Jahrbuch, Bd.3, Augsburg 1927, 29쪽.

7) 어쩌면 남한과 북한이 통일될 때에도 베토벤의 음악이 연주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8)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München 1990, 563쪽 참고.

9) Jacques Handschin: Musikgeschichte im Überblick (1948),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0쪽 재인용.

10)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0-571쪽 참고.

11)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1-573쪽. 저자 에게브레히트는 이 세 개념이 매우 진부하고 낡아서 입밖에 내기조차 꺼리게 되지만, 베토벤 음악의 본질적 핵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12)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5쪽.

13 독일어 번역판 "Beethovens Neunte. Eine Biographie"(Silke Haas번역)을 참고했다.

14) 저자 Buch는 18세기에 탄생한 영국의 국가 <신이여 국왕을 구하소서 God Save the King>으로 시작하여 프랑스 국가 <마르세이유 Marseillaise> 및 하이든의 <황제찬가 Kaiserhymne>, 그리고 메테르니히와 관계 있는 베토벤의 칸타타 <찬란한 순간 Der glorreiche Augenblick>등의 국가음악이 9번 교향곡의 성공적인 정치적 수용을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15 Richard Wagner: Brief an Franz Liszt am 7. Juni 1855, Richard Wagners Saemtliche Briefe, Leipzig 1979, 204쪽.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적 주장을 위해 4악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상대화시키고 "음악적 신학(musikalische Theologie)"으로 추켜세웠다. E. Buch, Beethovens Neunte, 11쪽.

16) Karl Nef: Die neun Sinfonien Beethovens, Leipzig 1928, 301쪽. Martin Geck: Von Beethoven bis Mahler. Die Musik des deutschen Idealismus, Stuttgart 1993, 89쪽 재인용.

17) E. Buch: Beethovens Neunte, 96-128쪽 참고.

18) Andy Warhol: Beethoven, 1987, E. Buch: Beethovens Neunte, 17쪽 재인용.

19) E. Buch: Beethovens Neunte, 17-18쪽.

20) 100주년 탄생 기념행사의 주최측에서 새 독일 음악(Neudeutsche Musik)의 위대한 바그너와 리스트를 초청하여 9번 교향곡과 장엄미사를 지휘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m)과 요셉 요하힘(Joseph Joachim)도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 연주행사에 누가 초청되었는지 알고 나서는 모두 거절하여 아무도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브람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요하임과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와 적대관계에 있는 리스트와 바그너, 그리고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리스트와 바그너도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행사 주최인사에는 유명한 비평가 한스릭(Eduard Hanslick)도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류음악가들을 행사에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E. Buch: Beethovens Neunte, 195쪽 참고.

21) 리스트는 이에 대신하여 1870년 12월 17일 페스트(Pest)에서 베토벤 심포니 9번과 자신의 "베토벤을 위한 칸타타(Kantate für Beethoven)"를 지휘했다.

22) Richard Wagner: Beethoven, Gesammelte Schriften und Dichtungen in 10 Bd. Leipzig 1907, Bd. 9, 61쪽.이 글에서 바그너는 음악을 통해 독일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해야한다는 민족주의적 견해를 강조한다. "독일 무기가 프랑스문명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뚫고 들어갔지만, 갑자기 우리가 이 문명에 종속되어있다는 부끄러운 느낌"이 일어남을 서술하면서 파리의 유행에 빠지지 말기를 경고한다. 그는 독일인의 특수함을 표현하는 완전한 인간을 베토벤으로 들며, 베토벤에 감격하는 자는 노동하며 참을성이 강한 사람인 반면에, 롯시니, 벨리니, 도니체티에 매료되는 사람들은 방탕하고 게으른 부유한 자라는 도덕적인 편견을 퍼뜨렸다. 베토벤의 음악이 도덕적 가치로 전환되어 수용되는데 바그너도 기여한 것이다.

23) E. Buch: Beethovens Neunte, 248쪽.

24) E. Buch: Beethovens Neunte, 7-11쪽 참고.

25 Hanns Eisler: Musik und Musikpolitik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I (1918-1948), Leipzig 1985, 334-357쪽.

26) Albrecht Dümling/Peter Girth(Hg.): Entartete Musik. Dokumentation und Kommentar, Düsseldorf 1993, 253쪽.

27) 푸르트뱅글러는 1934년 힌데미트를 둘러싸고 괴벨스 및 나치비평가의 비판을 받고 그해 12월에 자신의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으나(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Eine Dokumentation, Hamburg 1966, 378) 1937년부터는 다시 베를린 필하모니를 맡고 점차 나치정부의 정책에 지지자가 된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3쪽 참고)

28) 이 때 Völkische Beobachter는 20세기 독일 천재인 히틀러가 18세기 천재인 쉴러에게 머리 숙인다고 보도했다. E. Buch: Beethovens Neunte, 264쪽.

29) 1933년부터 나치당의 문화기관지로 변신한 음악잡지 Die Musik에서는 "독일음악의 민족화"라는 슬로건 하에 독일음악의 두 축을 베토벤과 바그너로 보며, 이 둘의 행복한 결합이 히틀러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아첨하기까지 했다. Willi Hille: Nationalisierung der deutschen Musik, Die Musik, XXVI/9, Juni 1933, 666쪽.

30) Heribert Schröder: Beethoven im Dritten Reich, H. Loos(Hg.), Beethoven und die Nachwelt. Materialien zur Wirkungsgeschichte, Bonn 1986, 221쪽. E. Buch: Beethovens Neunte, 260쪽 재인용.

31) 그러나 히틀러 자신은 베토벤보다 오히려 바그너에게 더 매료되어 있었다. 물론 1938년 베토벤 기념비 추진을 위해 개인적으로 후원한 사실도 있으나, 몇몇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그는 베토벤보다는 바그너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32)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444쪽.

33) E. Buch: Beethovens Neunte, 266쪽.

34) E. Buch: Beethovens Neunte, 268쪽. 1940년 카라얀이 신문에서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시한 일로 푸르트뱅글러와 언쟁이 있었다. 카라얀을 위대한 예술가로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푸르트뱅글러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참고.

35) E. Buch: Beethovens Neunte, 260쪽.

36)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37)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38) Thomas Mann: Warum ich nicht nach Deutschland zurürckgehe. Offener Brief an Walter Molo, Thomas Mann Gesammelte Werke in 12 Bd. Frankfurt a.M. 1960, Bd. 12, 958쪽.

39) E. Buch: Beethovens Neunte, 269쪽.

40) H. Schröder: Beethoven im Dritten Reich, 218쪽과 E. Buch: Beethovens Neunte, 264쪽.

41) E. Buch: Beethovens Neunte, 269쪽.

42) 음악이 다른 어떤 예술보다 더 정복자의 목적에 큰 기여를 했다는 레지스탕트 소설들의 주장이 소설적 상상력이상으로 설득을 가진다. E. Buch: Beethovens Neunte, 270쪽 참고.

43) E. Buch: Beethovens Neunte, 274쪽.

44) E. Buch: Beethovens Neunte, 274쪽.

45) Daniel K.: Singing the Ode "To Joy" in Auschwitz: A Ten-Year-Old's Story, The Beethoven Jouenal, Bd. 10/1, 1995, 4쪽. E. Buch: Beethovens Neunte, 278 과 279쪽 재인용.

46) E. Buch: Beethovens Neunte, 278-277쪽.

47) Simon Laks: Melodies d'Auschwitz, Paris 1991, 31과 131쪽, E. Buch: Beethovens Neunte, 277쪽 재인용.

48) Fania Fenelon: Das Mädchenorchester in Auschwitz, Frankfurt a. M. 1980, 111쪽. 저자는 이 책에서 알마 로제를 인정 없는 반장으로 포로의 편이 아니라 나치에게 아첨하는 인물로 서술하고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E. Buch: Beethovens Neunte, 276쪽.

49)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90쪽.

50)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253쪽.

51)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39쪽.

52)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도 "음악이 예술 중에서 가장 감각적 것이며, 음악은 이성보다 가슴과 감정에 더 호소한다"라고 강조했다.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39쪽. 음악과 독일성의 연관성도 니체 이후 토마스 만 등의 작가도 주장할 만큼 전혀 나치의 독자적인 의견도 아니다. 장성현. 파시즘과 니체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 만의 견해: 『파우스트 박사』를 중심으로, 『독일문학』통권 58집, 1995년 한국독어독문학회, 21쪽 참고.

53)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54)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39쪽.

55) 1940년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그의 저서 <이상의 형상화>에서 "전 무조적 음악운동은 독일 민족의 피와 영혼의 리듬에 거슬리는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56) Hitlers Rede auf den Kulturtagung des Parteitags Grossdeutschland, 1938,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28쪽 재인용.

57)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17쪽.

58)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46쪽.

59) Hanns Eisler: Einiges über das Verhalten der Arbeitersänger und -musiker i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I, 244-245쪽.

60)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없도록 강조할 것은 나치의 정책에 베토벤 음악만이 이용된 것이 아니라 -본고에서는 베토벤에 국한되어 서술되었지만- 마취효과를 일으키는 바그너의 음악과 신앙적 경건함을 주는 부르크너의 음악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61)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16쪽.

62) 아벤트로트는 1945년 이후 활동이 금지되기는커녕, 함부르크의 유명한 신문 <시대 Die Zeit>의 책임음악주간으로 전후 독일의 공적음악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63) Walter Abendroth: Kunstmusik und Volkstümlichkeit, Die Musik 1934, 413-414,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59쪽 재인용.

64) Hanns Eisler: Einiges über das Verhalten der Arbeitersänger und -musiker i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I, 256-257쪽.

65) Paul Zschorlich: Beethoven und wir. Völkischer Beobachter vom 16. 12. 1934,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27쪽 재인용.

66) 이경분. 쇤베르크와 '독일음악', 『음악과 민족』 제21호, 2001년 봄, 79-98쪽 참고.

67) 베토벤이 독일인의 우월 감정을 치켜세우는 역할을 한 것은 나치시기부터가 아니라 이미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전쟁 시기 독일민족주의자들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이 때, 나치들은 음악비평가 파울 베커(Paul Bekker)의 새로운 베토벤 해석이나 지휘자 오토 크렘퍼러(Otto Klemperer)의 혁명적인 해석은 자신들의 의도와 맞지 않으므로 배척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68) Walter Rauschenberger: Volk und Rasse (1934),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40쪽 재인용.

69) Richard Eichenauer: Musik und Rasse, München 1937, 227쪽,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40쪽 재인용.

70) Walter Rauschenberger: Volk und Rasse (1934),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41쪽.

71) 한스 찌글러는 3화음과 조성이 게르만적-독일적 음악의 본질이고 프롤레타리아의 무정부적인 무조음악이 이와 대조된다는 주장까지 한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192.

72)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444쪽.

73)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51쪽.

74)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61쪽.

75) 이 개념도 피츠너가 이미 1918년에 사용하고 있다.

76)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55쪽.

77)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6쪽.

78) Joan Evans: "Die Rezeption der Musik Igor Strawinskys in Hitlerdeutschland", Archiv für Musikwissenschaft, 1998/2, 91-109 참고.

79)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460쪽.

80) Fred K. Priesberg: Musik im NS-Staat, Entartete Musik, 197쪽 재인용. 프리스베르크는 이 전시회를 무리하게 성사시킨 나치 연극인 찌글러가 자신의 동성애적 비밀을 가리기 위해 과장될 정도로 열성적으로 충성을 보인 것으로 해석한다.

81)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54-255쪽.

82)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199쪽.

83) Michael Gerhard Kaufmann: Orgel und Nationalsozialismus - Die ideologische Vereinnahmung des Instruments im "Dritten Reich", Kleinblittersdorf 1997, 24쪽. 또 12음 음악을 배척하면서도 찔리히의 협화음적 12음 음악인 오페라 "희생(Das Opfer)"은 1937년 함부르크에서 초연되었으나, 비평가들은 비판은 커녕 오히려 칭찬하였다. 이 사실에서 나치 비평가들이 음악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Silke Hilger: Die Vergessenen Weisen des Winfried Zillig, Musica 1995/2, 78쪽 참고.

84) 그는 음악의 마약적 효과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감정과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면서도 심리분석학을 배척하였던 괴벨스 자신은 매우 뛰어난 광고심리학적 전문가였으며, 비밀스러운 유혹과 이름이 주는 마력의 방법, 그리고 어떻게 카리스마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등의 방법에 관통해 있었던 인물이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50쪽.

85) M. G. Kaufmann: Orgel und Nationalsozialismus, 23쪽.

86) M. G. Kaufmann: Orgel und Nationalsozialismus, 23쪽.

87) 제2차 전쟁이 시작되는 1939년 라베는 "독일음악의 운명에 음악가들 뿐 아니라, 모든 독일인이 관여한다. 이유는 바하와 베토벤, 부르크너의 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음악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쓴다.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23쪽.

88) Thomas Mann: Gesammelte Werke, Bd. 13, Frankfurt a. M. 1974, 624쪽.

89)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민음사 1983, 231쪽.

90) 백문임, '정치의 심미화': 파시즘 미학의 논리.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서울) 2001년, 67쪽.

91)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12쪽.

92) E. Buch: Beethovens Neunte, 12쪽.

93) 장성현. 파시즘과 니체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 만의 견해: 『파우스트 박사』를 중심으로, 38쪽.

94)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김철자 옮김, 학원사(서울)1985, 하권 263-268쪽 참고.

95) Martin Geck: Von Beethoven bis Mahler, 90쪽 참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놀드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한스 아이슬러의 수정12음계 음악 | 이경분

아놀드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한스 아이슬러의 수정12음계 음악

이 경 분

* 출처 : 민족음악 18호 http://web.donga.ac.kr/swcho/


1. 서 론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음악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 어렵다. 왜 그의 음악이 그리고 특히 12음계음악이 어려운지에 대해 아도르노(T.W.Adorno)외에도 많은 쇤베르크 제자들이 글을 써 왔다.
쇤베르크 음악의 난이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그 이유를 서술할 수 있겠으나 아주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음악이 무척 추상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쇤베르크의 제자 아이슬러는 스승이 “엄청난 상상력과 추상력의 소유자이라 여행의 기술에 대해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야기하므로 여행을 가더라도 스승에게 그곳의 관광엽서를 보내고 싶은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며 쇤베르크의 능력을 반농담조로 얘기한 적이 있다.
이러한 쇤베르크 음악의 추상성은 그의 기본적인 음악관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즉 그는 “음악에서의 정직함”(Redlichkeit in der Musik) 또는 책임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작곡과정 중 아무런 이유와 논리적 필연성없이 어떤 음들을 나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 번 표현된 “음악적 사고”(musikalischer Gedanke)는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반복을 통해 익숙한 것에서 기쁨을 찾고 확인하는 청중의 욕구를 배려하기 보다 음악의 진실성과 “예술가 자신의 내적 감정에만 충실”하였으므로 그의 음악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화려하나 내용이 없는 장식과 반복으로 무성하던 음악적 허식을 지양하고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본질적인 것만을 작곡하는 “음악의 경제성”을 강조하였다.
예술은 능력(Können)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 즉 당위성(Müssen)에서 출발한다고 한 그의 말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처럼 본질적인 것에 전념하는 음악관을 가진 쇤베르크가 12음계법을 발견하여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기반을 세우게 되었으며 음악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그는 19세기 말부터 자유무조음악 (Freitonalität)이 점차 진전됨에 따라 지난 250년간의 음악체계를 지배하던 조성체계(Tonalität)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기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체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음악적 진보 즉 “미래지향적 음악”을 대표하는 쇤베르크는 당시의 청중이나 비평가로부터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교수법과 가르침에 대한 정열로 훌륭한 음악가를 많이 배출해 내었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이고 철저한 음악관과 확실한 음악기술로 제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에 알반 베르크(Alban Berg)와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과 같은 수준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던 한스 아이슬러는 스승의 음악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이를 입밖에 낼 수 있었던 용기를 가졌었다.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비판할 수 있는 객관성과 또한 “누구를 위해 내가 음악을 쓰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아이슬러는 “사회참여음악”(Engagierte Musik)이라는 스승과는 또 다른 음악사적 불모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과 인접분야, 음악과 사회, 음악과 정치 등 음악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터놓은 아이슬러의 업적은 그가 살았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누구든지 음악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글에서는 우선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대해 알아보고 이 독보적인 스승의 음악적 권위에 나름대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독립적인 음악적 언어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한 아이슬러의 수정된 12음계 음악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어려운 예술음악을 - 수준의 손상없이 -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고자 한 아이슬러의 시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시사하는지 아울러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본 론

2.1.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쇤베르크가 1921년 12음 기법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작곡가들이 꼭 12음계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기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작곡을 시도했었다. 그 한 예를 들면, 러시아계 음악의 영향을 받았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에리히 이토 칸(Erich Itor Kahn 1900-1950)은 4음․5음․9음들의 집합을 12음기법의 형태로, 즉 전회형(Umkehrung)․역행형(Krebs)․역전회형(Krebsumkehrung) 등으로 사용하다가 12음기법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칸이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방송국에서 쇤베르크의 12음계 피아노곡을 초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연주를 들은 쇤베르크는 연주의 명료함과 작품 이해의 깊이에 최대의 찬사를 보냈었다.
그리고 마티아스 하우어(Mathias Hauer 1883-1959)는 쇤베르크보다 이삼년 먼저인 1919년에 12음 기법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가 이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은 템포변형(Agogik)이나 강약법을 사용하지 않아 긴장감이 없는 정체된 것이어서 음악계에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또 최근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에게 사사한 프리츠 하인리히 클라인(Fritz Heinrich Klein 1892-1977)이 1921년 “기계”(Die Maschine)라는 음악에서 12음을 사용해서 작곡했다 한다. 이 연구는 쇤베르크가 어쩌면 클라인에게서 무의식적으로나마 12음 기법의 아이디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운다.
일반적으로 쇤베르크를 이 기법의 창시자로 보는 이유는 비로소 그의 12음계 음악이 단순히 수학적인 차원을 넘어 미학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성숙도를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사적인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주장하여 음악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12음 기법을 “12개의 서로 연관된 음만을 사용한 작곡방법”(Methode der Komposition mit zwölf nur aufeinander bezogenen Tönen)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기본원칙에 대해 잠시 정리해 보자.
첫째, 12음 기본음렬 자체는 작곡을 위한 전제이지 작곡자체도 아니며 음악테마도 아닌 추상적인 것이다. 4가지 형태, 즉 원형(Original)․전회형․역행형․역전회형으로 명명되는 이 기본음렬은 음들간의 관계(Beziehung)를 조정하므로 12음이 어떤 방향으로(바로․거꾸로․반사형 등으로) 사용되던지 또 12가지 이조(Transposition)의 가능성 중 어떤 음높이에서(Tonstufe) 시작하던지 상관이 없다. 이 4가지 형태가 곧 하나의 음악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둘째,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중심음(tonales Zentrum)의 해체를 전제로 한다. 기존의 조성음악에서는 모든 음들이 중심음에 대해 기능적으로 종속되어 음들이 서로 다른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12음 기법에서는 중심음이 없으므로 모든 음들이 평등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셋째, 그러므로 12음계 음악에서 12음이 모두 소개되기 전에 어떤 한 특정음이 반복되는 것을 가능한 피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반복을 통해 한 특정음이 다른 음에 비해 더 큰 비중을 받게 되며 이렇게 “강조된 음은 기본음이나 중심음으로 암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조성체계의 화음은 기능적 역할에 충실하였으므로 불협화음은 해소 (Auflösung)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었다. 12음기법에서는 기능화음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불협화음은 해소되어야 할 필연성을 가지지 않게 되어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쇤베르크는 “불협화음의 해방”(Emanzipation der Dissonanzen)이라 칭하는데, 이미 그의 자유무조 시기의 음악에서도 불협화음은 해소되지 않고 사용되었었다. 이제 “바그너 식의 불협화음의 준비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식의 불협화음 해소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쇤베르크는 기술한다. 12음 기법은 이러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정당화한다. 그리고 장단조의 삼화음(Dreiklang)과 같은 협화음의 사용은 이전의 조성음악을 연상하게 하므로 이런 화음의 부분적인 사용마저 경고하였다.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발전시킨 첫 시기에는 이처럼 조성음악과 관련된 모든 음악적 요소를 지양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의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나폴레옹에의 송가”(Ode to Napoleon fuer Sprecher, Klavier und Streichquartett op.41)에서처럼 12음계 음악이 E♭장조 삼화음으로 끝나도록 작곡하기도 했음을 참고로 밝혀둔다.

2.2. 아이슬러의 수정 12음계 음악
쇤베르크는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항상 바하나 베토벤과 같은 고전의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한다. 늘 자신의 작품으로 학생들에게 수업을 했던 힌데미트(Paul Hindemith)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새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혼자 연구하거나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승과 토론을 하게되며 그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쇤베르크의 애제자였던 아이슬러는 피아노 소나타 2번(Klaviersonate Nr.2 op.6)을 12음기법으로 작곡하였는데 여기에서 쇤베르크의 영향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또 이 작품에서 아이슬러가 스승의 12음 기법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이미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6년 이러한 예술음악에 대한 회의로 스승과 결별하면서 12음기법과도 멀어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1920년대 젊은 음악가들은 기존의 낭만주의적 예술관과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를 거부하면서 음악의 사회화(Sozialisierung der Musik)를 부르짖었는데 아이슬러는 이러한 경향의 선두에 선 음악가에 속했다. 그러므로 예술의 대중화나 “음악의 민주화”(Demokratisierung der Musik)에 관심이 없던 스승을 떠나 자신의 독립적인 음악관과 이것에 부합하는 새로운 음악에 맞는 새 청중을 찾아 나섰다. 그가 찾아낸 새 청중은 바로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이 이해되기 힘들 뿐 아니라 필요도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슬러는 이 시기에 12음 기법을 사용하는 대신 주로 교회선법(Kirchentonarten)을 응용해 노동자들을 위한 음악 및 실용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의 나찌정당이 정권을 잡게 되자 유대인인 스승과 제자는 나찌의 원수로 낙인이 찍혀 독일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망명생활은 아이슬러에게 자신의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새로이 고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망명생활을 시작한지 이삼년이 지나자 그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12음계 음악을 다시 작곡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아이슬러로 하여금 이런 결정을 하도록 하였을까?
독일의 노동운동과 단절된 외국에서는 노동운동보다는 히틀러 정권의 붕괴를 위해 투쟁하는 일에 더 주력하게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에 국한하지 않고 망명한 지식인․문인․음악인을 막론하고 넓은 지반의 모든 저항세력을 모아야 했다. 그러므로 이제 아이슬러에게는 노동음악보다는 문화적 지식층에게도 호감을 줄 수 있는 정치성을 띤 예술음악을 작곡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었다. 이러한 “민중전선”(Volksfront)이라는 정치적 변화는 망명 전 바이마르시대(Weimarer Republik)에는 생각지도 못했을 변화를 그의 음악에 가져왔다.
우선 아이슬러는 나찌정부의 문화정책에서 자신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에 결정적인 중요한 관찰을 하게 된다. 즉 현대음악이 그 중 특히 쇤베르크의 음악이 나찌들에게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문화적 목적에 위험하기까지 한 것으로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쇤베르크의 음악이 나찌들의 수난에서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를 바로 허식과 거짓을 모르는 쇤베르크 음악의 진실성 때문이라고 아이슬러는 이해했다. 게다가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 난이도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그 생명력이 어차피 약해져 있었으므로 어떤 적극적인 노력없이는 스스로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우려도 컸던 것이다.
진실성이라는 장점을 살리고 어렵다는 단점을 교정한다면 쇤베르크의 음악을 대중을 위한 음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체제에 적합한 새로운 음악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아이슬러는 굳게 믿었다. 1936년 아이슬러는 이렇게 서술한다.
“12음 기법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고도로 복잡한 작곡법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기법으로 단순하면서도 대중에게도 유용한 음악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쇤베르크 음악의 내용을 그 기법과 분리시키고 표현(Expression)과 기술(Technik)을 따로 떼어놓는”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그가 작곡한 12음계 음악을 보면 어린이를 위한 노래와 피아노 곡 뿐만 아니라 칸타타․교향곡․가곡(Klavierlieder)․영화음악 등 다양한 쟝르에 다양한 수준의 곡들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주로 기악곡에만 선호되던 12음 기법을 성악곡에 집중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매우 주목할 일이다. “12음 기법은 기악곡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음악연주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미래가 있다. (...) 그리고 우선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은 이 기법으로 오늘날 현대 작곡가들이 자신의 특별한 과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음악이 형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진보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가 곧 새로운 성악스타일(Vokalstil)을 창출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1937년 아이슬러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망명생활을 하던 덴마크에 6개월이상 거주하면서 12음 기법으로 10여곡의 실내악 칸타타(Kammerkantate)와 “독일 교향곡”(Deutsche Sinfonie) 그리고 “레닌 레퀴엠”(Lenin Requiem) 등 집중적으로 성악곡을 작곡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12음계 성악스타일(zwölftönige Vokalstil)을 개발하려고 하는 아이슬러의 실험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가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음악의 진실성과 진보성을 정치적인 진보성과 접목시키고자는 그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아이슬러는 이러한 성악곡에서는 12음 기법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쇤베르크의 원칙과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쇤베르크의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협화음의 해방이 아이슬러에게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쇤베르크는 조성(Tonalitaet)을 협화음과 일치시켜 불협화음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데 비해 아이슬러는 조성과 협화음을 분리하였다. 즉 조성을 가지면서도 불협화음이 강한 음악이 가능하며, 반대로 협화음적으로 들리는 음악이 반드시 조성을 가져야 하는 필연성이 없다는 논리이다. 즉 기존의 조성은 회피하되 협화음의 사용을 제한하지 말자는 의도이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은 불협화음보다 협화음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중심음이 없다는 것 외에는 청중이 듣기에 조성음악과 큰 차이가 없는 듯한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 아이슬러는 12음 기본음렬을 전통적인 3화음의 구성이 가능하도록 배열한다. 즉 “도깨비칸타타”(Gottseibeiuns-Kantate)의 기본음렬은 다음과 같다.


<악보1>


쇤베르크는 “기존의 조성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화음”의 사용이 조성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청중들에게 “잘못된 기대감”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였으나 아이슬러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12음계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레닌 레퀴엠”에서는 조성음악(c-단조 행진곡)을 12음계 음악의 중간에 삽입하여 서로 전제조건이 상반되는 음악의 결합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둘째, 쇤베르크의 원칙에서는 12음 기본음렬이 모두 소개되기 전에 한 음이 반복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특정음이 반복된다.

<악보2> “망명칸타타”(Kantate im Exil) 첫부분




게다가 “한 동지의 죽음을 기리는 칸타타”(Kantate auf den Tod eines Genossen)에서는 12음 기본음렬 자체에 한 음이 반복되어 12음이 아닌 11음으로 되어 있다.

<악보3>“한 동지의 죽음을 기리는 칸타타”의 12음 기본음렬

d-f-c-as-g-h-es-fis-b-d-cis-a


여기에서 첫음 d가 10번째 음에서 반복됨에 따라 e음이 생략되었다. 그러므로 d음의 반복을 통해 9번째 음 b와 e가 형성하게 되는 증4도|감5도(Tritonus)를 피한 셈이 된다. 증4도를 피함으로 노릴 수 있는 음악적 효과는 칸타타의 가사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논문의 일관성을 위해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셋째, 쇤베르크의 12음 기본형(Grundgestalt)은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는 데 반해 아이슬러는 12음계 음악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쇤베르크의 경우 12음의 나열은 추상적인 음정의 구조를 의미한다. 간단한 예를 들면 h-f-g 라는 음의 나열은 증4도음과 장2도음을 표기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가능성을 쓴 것이다. 즉 여기에는 이 음정을 이조(Transposition)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슬러는 12음 기본형의 이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이조나 음의 생략(Tonauslassung) 또는 음의 도착(Permutation)을 사용할 경우도 유연한 멜로디의 구성을 위하거나 협화음적인 형성을 위해서이다.

<악보4> 수용소 칸타타(Zuchthauskantate)의 기본음렬(마디 84-90)
원형: d-h-g-e-fis-a-b-c-des-es-f-as
역행형: as-f-es-des-c-b-a-fis-e-g-h-d





그리고 또 12음 기본음렬을 곡의 테마와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12음계 음악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12음 기본음렬을 숨기려고 애쓰던 쇤베르크의 음악에서와는 달리 아이슬러의 12음 기본음렬은 곡의 서두에 스스로를 아주 잘 드러내므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악보5>“농부의 칸타타”(Bauernkantate) 첫 부분



아이슬러는 정치적인 내용의 가사를 담은 소박하며 말하는 듯한 멜로디로 청중에게 감정의 흥분이나 정화보다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성악곡을 개발하였다. 이와 같이 아이슬러는 이해되기 쉽고 구체적인 12음계 음악을 위해 물신적이거나 교조적인 태도없이 필요에 따라 수정하고 변형시켰다. 그에게는 12음 기법도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그 의미도 축소될 수 있으며 또 반대로 증대할 수 있는 변화를 내포한다. 이러한 실용적인 태도는 12음 기법을 음악재료의 최대로 발전한 형태로 보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된 “닫힌 체계”로 이해하는 아도르노의 음악철학적인 관점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1926년 스승을 떠난 아이슬러가 12음기법을 쓰지 않고 자유무조적으로 연가곡 “신문조각에서”(Zeitungsausschnitte op.11)를 작곡하였을 때 아도르노는 “음악이 쉽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음악재료가 현재 성취한 최고의 수준을 사용하지 않고 이미 지나온 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자신의 관점을 피력한 바 있다. 12음 기법에 대한 아도르노의 물신적인 태도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dialektischen Materialismus)을 변증법적 신비주의(dialektischen Mystizismus)로 착각”하였다고 아이슬러가 비판한 적이 있음을 참고로 언급한다.


3. 결 론

아이슬러의 수정 12음계 음악은 위에서 이미 자세히 서술한 것처럼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이 어떻게 탈 주관화 (Entsubjektivierung)되며 구체화될 수 있는 지, 또 이 기법의 사용으로 어떻게 정치적 내용을 포용할 수 있는 저항음악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런 실험을 통해 아이슬러가 쇤베르크의 음악사적 의미를 부인하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님을 밝혀둔다. 오히려 그는 쇤베르크가 서양의 “현대음악사에서 가장 가치있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당면한 목적에 바로 사용될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듯이 쇤베르크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라고 물리학에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시도는 스승이 “독일음악이 앞으로 100년동안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으로 예언했던 12음 기법을 나름대로 존속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이슬러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였는지 실패하였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가 있겠다. 1937년 겨울 프라하의 현대음악연주회(Vereinigung für zeitgenössische Musik, "Manes"가 개최함)에서 그의 실내악 칸타타 4곡이 연주되었는데 청중들로부터 대대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청중들이 대부분 독일 망명인이었고 나찌정부에 저항하는 체코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이러한 성공을 보편화하기는 힘들다. 또한 제2차 대전 후 동독에서는 쇤베르크와 12음계 음악에 대한 비판으로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이 거의 연주가 되지 못하였고, 서독에서는 아이슬러 음악의 정치성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하여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작품이 씌어진지 60년이라는 시간은 아직 성공의 여부를 판단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별로 승산이 없는 성공여부를 따지기 보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한 아이슬러의 예술적 자세를 요약해 보고 오늘 우리의 음악적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다.
첫째, 아이슬러는 음악을 역사적인 산물로 보았고, 아름다움의 개념도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로서 이를 작곡행위에 실천하였다. 즉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때마다 새로운 음악적 해결점을 찾고자 고심하였던 것이다. 20년대 후반에는 당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동음악에 전념했었고, 유럽에서의 망명시기에는 나찌정권의 패망을 위해 수정 12음계 음악이라는 예술의 힘으로 투쟁하였었다. 또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이 깊어 갈 즈음에는 12음기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거대한 문화산업이라는 배경과 음악적 환경이 유럽과는 판이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아이슬러의 음악적 변화는 한 번 옳다고 판단하고 찾아낸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회의해 보는 자기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동독에서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 1962년 7월에 아이슬러는 그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예술적 입장마저 번복하는 발언을 하였다.

“예술의 새로운 기능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예술은 원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아직도 낮은 수준의 형태인 재미, 즐거움 그리고 심심풀이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로써 나와 브레히트가 고수했던 입장을 회수하게 됨을 인정한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으려면 역사의 변증법을 통찰하여 지금까지 가졌던 우리의 모든 입장을 회의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로운 미래에 우리 스스로를 해체 (또는 용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러나 유익한 것이다.”

둘째, 그리고 이때 비판의 잣대는 음악내적인 것이라기 보다 음악외적인 것, 즉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외적 동기는 -새로운 12음계 성악스타일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처럼- 다시 음악 내적인 문제와 밀착되어 유기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작품은 예술가의 사회참여가 항상 작품의 질을 저하시킨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의를 제기한다.
셋째, 어려운 12음 기법으로도 쉽고 투명하게 작곡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행위에는 작곡가로서의 큰 용기가 필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능력없는 작곡가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제 예를 들자면, 아이슬러가 젊은 연주가들에게 12음 기법을 쉽게 소개하자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현악삼중주 “Präludium und Fuge über B-A-C-H”(op.46) 작품을 기법설명과 함께 출판한 적이 있었다. 프랑크 마르탱(Frank Martin)과 같은 작곡가는 12음 기법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다루는 것을 혹평하였었다. 아이슬러의 의도보다도 (예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음악내적인 “수준”(즉 남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 중요한 작곡가들에겐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 하자면 작곡가에게 더 많은 상상력과 능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음악적 상황은 아이슬러가 살았던 문화적 시기와 배경이 전혀 다르므로 우리의 음악적 문제와 과제 그리고 그 해결점도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스승의 음악을 독립적이며 주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새 길을 모색하는 아이슬러의 음악적 태도는 오늘날 “서구”라는 절대적 기준에 얽매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한다. 음악과 음악에 대한 이해도 서양인에게 전수받은 그대로 모방하고 실행하는 것을 음악적 최고의 가치나 미덕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뿌리깊이 잠재한 “식민지적” 음악풍토는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시켜왔던가! 물론 이런 문제들이 단순히 음악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회전반의 문제점과 얽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아이슬러가 가졌던 용기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기 비판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정신적으로 마비되어 있는 우리 음악계’에 활기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 고 문 헌

Theodor W. Adorno: Eisler. Zeitungsausschnitte. Für Gesang und Klavier, op.11. In: Gesammelte Schriften Bd. 18 (Musikalische Schriften V), Frankfurt a.M. 1984, S.524-527.
Theodor W. Adorno: Philosophie der neuen Musik. In: Gesammelte Schriften Bd. 12.
Theodor W. Adorno und Ernst Krenek: Briefwechsel. Frankfurt a. M. 1974.
Juan Allende-Blin: Eric Itor Kahn. Musik-Konzepte 85, München 1994.
Chriatian Baier: "Ich hätte noch soviel im Kopf". Zum Prioritätenstreit zwischen Schönberg, Hauer und Fritz Heinrich Klein. In: Neue Zeitschrift für Musik, 1999 Nr. 3, S. 34-39.
Alfred Baumgartner (Hg.): Propyläen Welt der Musik. Ein Lexikon in 5 Bänden, Berlin und Frankfurt a.M. 1989, Bd.2.
Albrecht Betz: Musik einer Zeit, die sich eben bildet. München 1976.
Carl Dahlhaus: Variationen für Orchester op.31. München 1968.
Albrecht Dümling: Hanns Eisler und Arnold Schönberg. In: Hanns Eisler der Zeitgenosse. Positionen-Perspektiven. hg.v. Günter Mayer, Leipzig 1997, S.30-40.
Hanns Eisler: Musik und Politik 1918-1948 (Schriften I), Leipzig 1985.
Hanns Eisler: Fragen Sie mehr über Brecht, Gespräche mit Hans Bunge. Leipzig 1975.
Hanns Eisler und Ernst Bloch: Avantgarde-Kunst und Volksfront.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97-405.
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1, S. 55-74.
Wassily Kandinsky: On the Spiritual in Art. ed. Hilla Rebay, New York 1946.
Christoph Keller: Das Klaviermusik Hanns Eislers. In: Melos 1992, S. 25-41.
Michael Mäkelmann: Schönberg und das Judentum. Der Komponist und sein religiöses, nationales und politisches Selbstverständnis nach 1921. Hamburg 1984.
Michael Menke: Expressionismus in der Musik, Arnold Schönbergs "Erwartung". In: 낭만음악 제8권 4호 1996년, 135-168쪽.
Nathan Notorwicz: Wir reden hier nicht von Napoleon. Wir reden von Ihnen! Gespräche mit Hanns Eisler und Gerhart Eisler. Berlin 1971.
Willi Reich: Arnold Schönberg oder Der konservative Revolutionär. München 1974.
Arnold Schönberg: Harmonielehre. Wien 1922.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In: Schönberg, Stil und Gedanke. Frankfurt a. M. 1995, S. 105-137.
김순란: 현대음악 작곡법 (번역: David Cope, "New Music Composition") 세광출판사 1994.
이건용: 소음을 내자. 낭만음악 제8권 3호 1996년, 2-5쪽.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1998년 제 16호, 253-277쪽.
최윤정: 쇤베르크와 표현주의의 위기 (번역: Alan Lessem, "Schoenberg and The Crisis of Expressionism"). 낭만음악 1996년 3호 (통권31호), 149-162쪽.

 

 

------------------------------------

 

1) Albrecht Betz: Musik einer Zeit, die sich eben bildet. Münschen 1976, S.32.
2) Nathan Notorwicz: Wir reden hier nicht von Napoleon. Wir reden von Ihnen! Gespräche mit Hanns Eisler und Gerhart Eisler. Berlin 1971, S. 28.
3)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In: Stil und Gedanke. Hg. v. Ivan Vojtech, Frankfurt a. M. 1995, S.112. 쇤베르크는 가령 15분간의 음악재료를 반복을 거듭해서 1시간 이상으로 부풀리는 행위를 사기라며 가차없이 비판했다.
4) Michael Menke: Expressionismus in der Musik, Arnold Schönbergs "Erwartung". In: 낭만음악 제8권 4호 1996년, 136쪽과 154쪽 참조.
5) 아이슬러에 따르면 쇤베르크는 원칙적으로 그에게는 청중이 필요 없으나 텅 빈 연주장에서 연주하면 소리가 좋게 나지 않으므로 청중이 있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했다 한다.
6) Arnold Schönberg: Harmonielehre. Wien 1922, S. 325.
7) Arb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In: Stil und Gedanke, S.106.
8) Wassily Kandinsky: On the Spiritual in Art. ed. Hilla Rebay, New York 1946, p.36.
9) 쇤베르크의 처남이자 스승이었던 쩨믈린스키 (Alexander Zemlinsky)는 아이슬러를 “쇤베르크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독자적인 머리”를 가졌다고 했다. (Albrecht Dümling: Hanns Eisler und Arnold Schönberg. In: Hanns Eisler der Zeitgenosse, Leipzig 1997, S. 34. 또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1998년 제 16호, 254-255쪽 참고)
10) 프랑스혁명 이래 정치성을 띤 사회참여음악이 있긴 했으나 예술적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었다. 쇤베르크에게서 음악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철저한 훈련을 받고 이론가로서도 뛰어난 아이슬러가 비로소 사회참여음악을 예술적으로 무시 못하는 분야로 체계를 세웠다. 그러므로 음악을 현실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음악가라면 (헨쩨, 논노, 림, 괘벨스등) 누구든지 아이슬러를 연구하게 된다.
11) Juan Allende-Blin: Erich Itor Kahn. Musik-Konzepte Nr 85, München 1994, S. 88.
12) Alfred Baumgartner (Hg.): Propyläen Welt der Musik. Ein Lexikon in 5 Bänden, Bd.2, Berlin und Frankfurt a.M. 1989, S.603.
13) Christian Baier: "Ich hätte noch soviel im Kopf". Zum Prioritätenstreit zwischen Schönberg, Hauer und Fritz Heinrich Klein. In: Neue Zeitschrift für Musik 1999, Nr. 3, S. 34-39.
14) 쇤베르크 스스로 사심없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919년인가 1920년에 베르크가 내게 클라인이 작곡한 것을 가지고 왔다. 내 기억으로 그것이 >음악기계<라는 제목이었는데 12음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음악으로서 큰 인상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내 자신의 (음악적) 시도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그 당시 알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12음으로 작곡한 것을 보았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Christian Baier: "Ich hätte noch soviel im Kopf", S. 35)
15) 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1, S. 55 참조. 또 다른 이유로 1911년 저서 “화성학”(Harmonielehre)을 출판 한 이후 쇤베르크는 음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론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뛰어난 교수법으로 탁월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하우어와는 달리 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16) 쇤베르크는 12음기본형을 오히려 “음악적 사고”로 이해했다. (Carl Dahlhaus: Variationen für Orchester op. 31, München 1968, 6쪽 참조. 또 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 1, 57쪽 참조)
17) 김순란: 현대음악 작곡법 (번역: David Cope, "New Music Composition") 세광출판사 1994, 32쪽 참조.
18)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10.
19)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111.
20)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07.
21)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07.
22) Michael Mäkelmann: Schönberg und das Judentum. Der Komponist und sein religiöses, nationales und politisches Selbstverständnis nach 1921. Hamburg 1984, S.469
23) Christoph Keller: Das Klaviermusik Hanns Eislers. In: Melos 1992, 29쪽 참조. 이 작품은 변주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미 여기에서 아이슬러는 테마와 변주의 관계를 뚜렷하게 하기 위해 망명시기의 수정 12음계 음악에서처럼 이조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 
24)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제16호, 1998 부산, 254-255쪽 참조.
25) 이러한 진보적인 젊은 음악가로는 쿠르트 바일(Kurt Weill),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블라디미어 포겔(Vladimir Vogel), 에른스트 츄레넥(Ernst Krenek), 슈테판 볼페(Stephan Wolpe), 헤르만 세르현(Hermann Scherchen) 등을 들 수 있다.
26) “연대가”(Solidaritätslied), “붉은 결혼식”(Der rote Wedding), “비밀스런 행진”(Der heimliche Aufmarsch) 등은 아이슬러의 대표적인 정치적 노동가에 속하며 라디오음악 “시대의 속도”(Tempo der Zeit)와 무대음악 “베를린의 상인”(Der Kaufmann von Berlin: Walter Mehring작품임)이나 “조치”(Die Massnahme: Brecht작품임), 그리고 영화음악 “무인국”(Niemandsland: Victor Trivas감독), “쿨레 밤페”(Kuhle Wampe: Slatan Dudow감독)” 등이 실용음악의 예에 속한다. 
27) 쇤베르크는 1933년 미국 보스턴으로 망명한다. 아이슬러는 1933년부터 1937년말까지 유럽에서 문화 기획자로 예술적 행위를 하다 1938년 초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28) 민중전선운동은 이전의 “통일전선”(Einheitsfront) 운동을 수정한 것인데 1935년부터 독일 망명인들 뿐 아니라 프랑스정부나 외국지식인으로부터 호응을 받기 시작하였다. 아이슬러와 달리 브레히트는 민중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29) Hanns Eisler: Musik und Musikpolitik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48-350.
30) Hanns Eisler und Ernst Bloch: Avantgarde-Kunst und Volksfront.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98.
31) 아이슬러는 쇤베르크가 자본주의 음악의 대표로 비판되어 전혀 수용되지 않던 동독에서도 쇤베르크 음악중 조성체계로 작곡된 곡들은 노동자들을 위해 항상 연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땅에 평화를(Friede auf Erden), 구레의 노래(Gurrelieder), d단조 현악사중주(Streichquartett d-moll), 올림바단조 현악사중주, 콜 니드러(Kol Nidre),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Toccata und Fuge für Orgel d-moll), 실내악 E장조(Kammermusik E-Dur)등을 이에 속하는 곡들로 칭했다.
32) Hanns Eisler: Vorbemerkung des Autors.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78.
33)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273쪽.
34) Hanns Eisler: Die Konsonanzbehandlung in der Zwölftontechnik.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389쪽.
35) 이경분: 한스아이슬러와 영화음악, 257-258쪽 참조.
36) 이 시기에 아이슬러의 “레닌 레퀴엠“과 브레히트의 서술 ”제스츄어 음악에 대하여 (Über gestische Musik)"이 서로 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에 관해서 다음 논문 참조 바람. (Kyung-Boon Lee: Gestische Musik bei Brecht. In: The Brecht-Yearbook, Nr. 24, Madison|USA 1999, S. 209-226)
37) 알반 베르크도 협화음적 12음 기본음렬을 “바이올린협주곡 (Violinkonzert)"에서 시도하였다.
38)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11.
39) 아도르노에 따르면 베르크도 쇤베르크처럼 12음 기법의 사용을 가능한 한 쉽게 알아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12음 기법의 사용이 드러나면 날수록 12음계 음악의 질은 좋지 않다. 마치 풀칠한 냄새가 나듯이.” 라고 베르크는 자주 얘기했다 한다. (Theodor W. Adorno und  Ernst Krenek: Briefwechsel. Frankfurt a. M. 1974, 53쪽)
40) Theodor W. Adorno: Philosophie der neuen Musik, Gesammelte Schriften Bd.12, 67-69쪽.
41) Theodor W. Adorno: Eisler. Zeitungsausschnitte. Für Gesang und Klavier, op.11. In: Theodor W. Adorno, Gesammelte Schriften 18 (Musikalische Schriften V), Frankfurt a.M. 1984, 527쪽.
42) Hanns Eisler: Zur Krise der bürgerlichen Musik (1932).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188.
43)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S. 273.
44)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S. 273.
45) Willi Reich: Arnold Schönberg oder Der konservative Revolutionär. München 1974, S. 139.
46) Ernst Bloch: Eislers "Kantaten" in Prag. In: Wer war Hanns Eisler? Auffassungen aus sechs Jahrzehnten, hg. von Manfred Grabs, Berlin 1983, S. 102.
47) Hanns Eisler: Fragen Sie mehr über Brecht. S, 238-239.
48) 칼 달하우스가 이러한 의견을 주장하는 대표적 음악학자이다. Carl Dahlhaus: Thesen über engagierte Musik. In: Otto Kolleritsch (Hg.), Musik zwischen Engagement und Kunst. Studien zur Wertforschung, H.3, Graz 1972, S. 7-19 참고.
49) Hanns Eisler: Die Konsonanzbehandlung in der Zwölftontechnik.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89-390.
50) 여기서 식민지적이란  서구음악을 모방하기에 급급하여 그 한계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비판없이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51) 이건용: 소음을 내자. 낭만음악 제8권 3호 1996년, 2-5쪽참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레코딩 연주노트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레코딩 연주노트

글 : 존 엘리어트 가디너
번역 : 전상헌


[역주]
아래에 소개해드릴 글은 1994년에 발매된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레코딩에 대한 가디너 자신의 해설을 번역한 것입니다. 기존에 이 해설을 번역한 것을 국내 라이센스 전집과 [객석] 94년 9월호에서 볼 수 있었지만, 이 두 번역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둘 중 하나는 명백한 표절입니다. 그리고 번역을 하면서 빠뜨린 부분들이 너무나 많고, 결정적으로 아예 잘못 번역된 곳도 몇 군데 있습니다.

예컨대, "Sempre l'istesso tempo"라는 지시는 제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 나오는 "행진곡 풍으로"(Alla Marcia) 도막의 템포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단서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번역문에는 빠져 있습니다. 또한, 서양에서는 베토벤의 제 5번 교향곡을 '운명'이라고 부르는 예가 사실상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take Destiny'라는 말을 '운명 교향곡을 연주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예는 몇가지 더 있는데, 이런 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새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번역을 다시 하면서 기존의 번역을 참고한 경우도 있어서,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되도록이면 제 방식으로 표현할려고 노력했습니다.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에는 최신의 연구 성과들이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가디너는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들 몇가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가디너의 음반이 아니더라도 베토벤의 교향곡을 감상하시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시기를 부탁 드리면서 글을 소개합니다.


-------------------------------------------------------


우리는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음악 혁명의 궁극적인 표상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때 그의 교향곡들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이것들은 19세기 중반의 폭발적인 발전, 특히 베를리오즈와 슈만의 선구적인 교향적 작품들을 예견하기도 하며, 동시에 과거를 되돌아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또 한편으로는 케루비니나 고세크, 메윌과 같은 프랑스 혁명기 작곡가들이 없었다면,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지 못했으리라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들, 특히 제 2번을 보면 여기에는 모차르트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지막 악장의 두번째 마디에 나오는 갑작스러운 옥타브 자리바꿈을 보라. 이것은 모차르트의 [하프너] 교향곡의 시작부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와 같은 느낌은 [영웅]에서 훨씬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선율, 리듬, 그리고 심지어는 화성의 모습까지도 모차르트에게서 직접 가져온 것이 대단히 많다. 주요 주제가 모차르트의 제 39번 교향곡의 첫부분에서 빌려온 것일 뿐만 아니라, 첫악장(280-83마디)에서 A-C-E-F로 화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들어내는 괴로울 정도로 날카로운 불협화음처럼, 전형적으로 베토벤 풍이라고 생각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여러분은 "이것이야말로 전적으로 베토벤 고유의 창작임이 분명하다. 그 어떤 누구도 이렇게 해내지 못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차르트의 같은 E-flat장조 교향곡 K.543의 도입부를 보면, 거의 동일한 화음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지만(19마디), 여기서는 모차르트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베토벤의 [영웅]에서와 같은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없을 따름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결정적인 단서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이 오케스트라 음향에 대하여 가졌던 개념―듣는 이를 즉각 사로잡고, 심지어는 기묘하기까지 한―과, 교향곡 형태에 대하여 가졌던 개념이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이 그만의 것인 것이다. 베토벤이 다른 작곡가들이 썼던 것을 가져다 쓰고, 그들의 리듬형, 그들의 모티프와 화성을 출발점으로 삼았어도, 이 재료들을 다루는 베토벤의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가령 베토벤은 조각조각 나눈 멜로디를, 목관악기들을 사용하여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거의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그 전의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재치와 거의 만화경과도 같은 성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연주자들 뿐만 아니라 듣는 이들에게도 베토벤의 요구는 매정하기 짝이 없다. 연주자가 실수하기 쉽다는 가능성이라든가 테크닉의 어려움 따위는 베토벤에게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들일지라도 이것이 베토벤에게서는, 테크닉적으로 아주 골치 아프고 연주자를 극도로 지치게 할 곡에서조차도, 베토벤의 음악 안에 있는 엄청난 에너지와 휴머니티에 의하여 아주 깊은 음악적 내용을 갖게 된다. 또한, 그 속에는 숭고한 정서까지 담겨있어서 음악가들과 해석자들로 하여금 테크닉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음악의 혼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베토벤의 교향곡들, 특히 제 7번이 가지고 있는 흥분과 힘을 재현해내는 데에 있어서 기량이 뛰어난 근대 교향악단만한 악단은 없다. 그러나 당대의 악기를 쓰게 될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명료함을 얻게 된다는 이점이 있다. 각각의 악기에는 '고유의 무게'(specific gravity)가 실리게 되어 베토벤이 짜놓은 옷감을 이루는 씨줄과 날줄들 한 가닥 한 가닥이 모두 동시에,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리듬의 윤곽을 아주 날카롭고 선명하게 그려내고, 부점리듬을 2박자로 망가뜨리지 않고 연주할 때 더욱 그렇다. 제 1악장의 제시부에서 우리는 자기 음역의 가장 높은 곳에서 노니는 호른을 들을 수가 있고, 팀파니가 전곡의 리듬에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오케스트라 전체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목관과 금관, 그리고 필사적으로 활을 움직이는 현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멋지고도 다채로운 음의 빛깔이 펼쳐진다.

나는 베토벤을 연주할 때 당대의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가 그의 교향곡에서 '더 많은 것'을 듣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천재성 안에 내재한 혁명적 측면을 부각시켜 준다고 믿는다. 반면에, 후대의 악기들은 19세기에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음악을 무디게 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훨씬 후기의 음악적 표현양식에 적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대 악기로 유창한 테크닉과 풍부한 음량을 얻는 대신에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베토벤 시대의 악기들은, 악기들마다 아주 독특한 소리와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토벤이 했던 사고의 맥락을 근대의 악기들보다 더 쉽게,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전달해 준다(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풍부함을 잃는 대신에, 그만큼 투명성과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베토벤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다룬 악기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케틀-드럼(kettle-drum)일 것이다. 베토벤 시대의 케틀-드럼은 오늘날 대부분의 근대 교향악단에서 쓰이는 플라스틱 가죽을 씌운 보통의 페달 팀파니와는 아주 달랐다. 크기도 더 작고 소가죽을 씌워서 아주 다른 종류의 소리(sonority)를 뿜어내며, 다소 '낭랑한' 소리를 가지고 있는 근대의 팀파니보다 더 다양한 억양과 색깔을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베토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 9번 교향곡에서 팀파니를 독주 악기처럼 취급하여 사실상 작품의 모티프까지 포함하도록 했다는 점은 놀라운 것이다. 스케르초 악장에서 "ritmo di tre battute"(1마디를 1박으로 하여 3박자로)라는 지시어로 시작하는 부분에 경이적인 패시지가 있다. 여기서는 어느 정도 멘델스존을 연상시키는 e단조의 아홉 마디가 목관에 의해 연주되고, 그 뒤에 이어지는 a단조의 아홉 마디에서는 딸림 7화음으로 끝날 때까지 모두 '여리게'(piano) 연주되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강하게'(forte) 옥타브로 도약한다. 이때 F장조로 끼어든 팀파니에 의해 목관 파트는 갑작스럽게 d단조로 바뀌게 된다. 즉, 베토벤은 여기서 팀파니를 전조(modulation)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인데, 이것은 그 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또한, 이 패시지에서 베토벤이 자필원고의 팀파니 음표 위에 실제로 기입했던 것이 악센트(accent)가 아니라 '점점 여리게'(diminuendo)였다는 사실은 매혹적인 것이다. 그 효과는 경이적이다. 이것은 단순히 음량을 줄여 센 소리에서 여린 소리로 옮겨갔다는 말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작품 전체의 원근법적인 구도 속에서 소리를 후퇴시켰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마치 음원이 실제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들리게 되는데, 이는 음악적 담화에 엄청나게 극적인 묘미를 더해준다.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는 조너선 델 마(Jonathan Del Mar)나 클라이브 브라운(Clive Brown)과 같은 학자들이 최근의 연구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이 명작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준 것이었다. 연주자들이 가장 유명한 이 교향곡들을 연주할 때 흔히 사용하는 텍스트가, 자필악보에 나타나 있는 베토벤의 최초 의도와도 일치하지 않고, 베토벤이 손수 수정한 초판본에서 알 수 있는 그의 궁극적인 의도와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은 거의 믿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레코딩에서 이 점을 바로 잡으려 했다.

이제 베토벤 교향곡 해석가들에게 있어서 템포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베토벤의 대화록이나 동시대인들이 남긴 글들을 보면, 베토벤은 당시의 연주가들이 자신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맬첼(Maelzel)의 메트로놈 발명을 환영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부정확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베토벤이 생각했던 빠르기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잔향이 많은 홀에서 연주하기에는(정상적으로 말해서) 너무 빨랐다. 베토벤이 요구했던 것에 비해 너무 큰 악단이 연주를 하면 빠르기가 느려졌는데, 이것이 그의 고민거리였다는 증거가 있다. 베토벤은 60명 정도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 나오는 가늘고 경제적인 소리를 선호했는데, 이 레코딩에서 우리도 이 정도의 규모로 연주했다. 또한,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에 이르는 길이 음악가들에게 힘겹고 고달픈 길이기를 '원했다'. 연주가들을 한계의 영역으로까지 밀고 가는 것은 그가 추구했던 미학적 목적의 일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예로, 엄청난 에너지와 넘치는 환상,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광채를 가지고 있는 제 8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살펴보자. 여기서 셋잇단 8분음표들을 빠른 속도로 아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은, 근대 악기로 연주하든지 아니면 당대의 악기로 연주하든지 간에 모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당대의 악기를 사용할 경우에는 악기들 간의 충돌이 없어지고, 근대 교향악단에서는 나타나기 쉬운 소리(sonority)의 체증이 사라진다는 커다란 이점이 있다. 셋잇단음 리듬들 하나하나의 아티큘레이션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패시지는 연주가 가능한 한계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로 베토벤이 추구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경우에 베토벤이 지시한 빠르기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것은 연주자로서의 책임을 게을리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메트로놈 지시를 과거의 해석가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만병통치약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음악적 표현의 부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제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Alla Marcia'(행진곡 풍으로) 악절을 보자. 이 부분은 두가지 요인 때문에 그동안 잘못 해석되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베토벤이 조카 카를에게 이 부분의 템포를 받아적게 했을 때 잘못 옮겨졌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하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메트로놈 빠르기였던 것이 아니라, 빠르기를 재는 시간의 '단위'가 잘못된 것이었다. 베토벤은 "6/8박자, 84"라고 말했지만, 카를은 이것을 "한마디에 점 4분음표로 두 박"이라고 해석했던 듯하다. 그러나 베토벤이 의도했던 것은, '한마디 전체'(즉, 점 2분음표 한개)를 1분에 84의 빠르기로 연주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해석은 'Allegro energico' 악절과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 여기서 합창이 다시 들어올 때("Seid umschlungen Millionen..." 악절 이후)도 역시 84의 빠르기로 지시되어 있다. (베토벤은 여기에 "Sempre l'istesso tempo"(항상 이전과 같은 속도로)라고 지시해 놓았지만 이 지시는 보통 무시된다.) 이것은 또한 그 당시의 프랑스 군대 행진곡의 표준적인 빠르기와도 일치한다

무엇보다도 제 9번의 'Alla Marcia' 악절에서는, 18세기 후반에 터키 양식의 음악에서 자주 쓰이던 낯선 타악기들을 동반한, 난폭한 터키 군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글루크의 오페라 "메카의 순례자"(1764)에 처음 나타나며, 그 다음에는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유괴"(1782)에, 그리고 베토벤의 초기 음악 몇편에서도 들을 수 있다. 베토벤은 이 악기들을 사용하여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연상하게끔 했는데, 그 효과는 놀랄 만큼 새로운 것이었다. 여기서 테너는 도시의 저편, 그리고 세계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흥분되는 소식을 전하러 오는 전령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푸가토가 이어지는데, 이 푸가토의 막대한 에너지는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도 "대 푸가"(op.133)나 "장엄미사"(op.123)에서 "Dona Nobis"의 마지막 악절만이 이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제각기 모두 하나의 작은 드라마들이며, 한편 한편이 모두 철학적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이 메세지는 정치적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가령 제 5번 교향곡에서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전면에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 작곡자는 프랑스 혁명의 주제와 행진곡, 그리고 심지어는 음악의 서브텍스트를 이루는 시까지 빌려 쓰고 있다.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케루비니의 "팡테옹 찬가"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제 1악장이다. 이 찬가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Sur votre cercueil heroique,
Nous jurons tous le fer en main,
De mourir pour la Republique
Et pour les droits du genre humain.

당신의 영웅적인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손에 칼을 들고 맹세하노라
공화국을 위해서
인권을 위해서 목숨을 걸겠노라

여기서 "Nous jurons tous .... le fer en main"의 대담한 리듬은 교향곡 전체의 주요 모티프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는 어느 정도는 파리 음악원 연주단(Societe des Concerts du Consevatoire)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이 연주 단체는 1828년에 하베네크(Habeneck)가 설립한 파리 음악원(Paris Conservatoire)의 명예 연주자들과 교수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였다. 이 오케스트라는 몇가지 것들을 성취해냈는데, 우선 베토벤을 사실상 이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연주하였다. 이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아주 치밀하게 연주했는데, 이것은 베토벤 생전의 다른 연주 단체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이들은 처음으로 통일된 보잉(bowing)을 도입하였고, 악보를 아주 정확하게 재현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프랑스식으로 해석하여 음악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미래의 음악 세계를 제시해주었다. 이들의 연주를 들었던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가들이 받았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의 오케스트라,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는 바로 베토벤의 '혁명성'과 '낭만성'을 재현하기 위해서 1989년에(아직은 이 이름이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베토벤의 "장엄미사" op.123의 레코딩과 함께 탄생했다.

지휘자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raison d'etre)에 대하여 생각할 때 베토벤의 아홉개의 교향곡 전곡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핵심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과 친해지고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지휘자에게 매력적인 도전이다. 베토벤의 음악의 진가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정말로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래서 음악을 위해 기꺼이 단두대 위에 목을 올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헌신적인 음악가들과 함께 레코딩하게 되었다는 것은, 탐험을 위한 공동 항해에 참여한 한 구성원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 모험을 앞두고 느끼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불굴의 사나이, 그의 위대한 창조물,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에 그가 놓아둔 엄청난 기술적, 음악적 역경들 앞에서 느끼게 될 경외심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베토벤 전문가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가 여러해 전에 했던 말이 내게 중요하게 다가온다(약간은 아이러니이다). "지휘자에게 있어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음악을 작곡한 이후로 악기도 달라졌고, 연주회장도 그때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다. 베토벤을 근대화해서는 안된다."

아멘,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