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대중음악계 지금은 예술이 아닌 ‘연예인’ 전성시대

대중음악계 지금은 예술이 아닌 ‘연예인’ 전성시대
대중음악 전성기는? 3인3색 방담
 
 
한겨레 김기태 기자
 
 
» 27면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세대마다, 취향마다 다를 수 있다. 지금의 40, 50대는 70년대 초 포크 음악의 시대를 기억할 것이고, 이른바 386 세대는 조용필과 들국화, 신촌블루스의 80년대를 떠올릴 것이다. 최근 나온 책 〈90년대를 빛낸 명반 50〉의 30대 초반 저자들은 90년대의 음악을 갈무리하며, 이례적으로 이 시기를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로 지목했다. 이 주제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세 명의 음악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만남은 지난 시기 대중음악에 대한 회고와 아울러, 현재의 대중음악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 광화문 대한성공회 교회 앞에서 만난 세 명의 대중음악 전문가. 왼쪽부터 서정민갑, 신현준, 신승렬.
 

신승렬=90년대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황금기로 꼽는 이유는 이때가 음악성으로도 훌륭했던 음악인이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던 거의 유일한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승환, 듀스, 공일오비, 넥스트, 서태지 등이 그런 예다. 70년대에는 산울림, 80년대에 들국화가 있지만, 이들은 단지 예외적인 경우다.

서정민갑=어떤 시기가 황금기라고 할 때에는 객관적이 근거가 없는 한,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만 얘기하는 것뿐이다. 그런 한계를 전제로 하고, 개인적인 취향만을 놓고 본다면 80년대가 가장 음악적인 전성기라고 본다. 그 기준은 음악성이다. 들국화, 부활, 시나위와 어떤 날, 시인과 촌장 등이 활동한 80년대가 음악적인 수준이 가장 높았다.

신현준=음악성도 중요하지만, 음악과 관련된 문화적 가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68년부터 75년 대마초 파동 이전의 음악에 주목한다. 당시 신중현의 음악이나 김민기, 한대수의 포크송은 이전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체계와 맞서 다른 문화를 만들었고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76년부터 96년이 넓게 보아 하나의 시기라고 본다. 이때는 지상파 티브이, 엘피와 테이프,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시대로 요약된다. 이후 96년 ‘에이치오티’와 ‘영턱스클럽’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고 지금까지 지속된다고 본다.

신승렬=90년대 초반과 후반의 대중음악이 많이 다르다는 데 동감한다. 우리가 주로 주목하는 시기는 90년대 초반이다. 92년 이후 사전심의가 실질적으로 철폐된 뒤 가요에 대한 상식이 바뀌었다. 그때 아티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전에 없었던 음악적 다양성을 추구했다. 당시에는 언더그라운드가 거의 없었는데, 오버그라운드에서 다양한 음악적인 취향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했다. 음악이 음악 이상의 다른 구실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태지는 심의와 싸웠고, 듀스 같은 아티스트도 기성세대의 암묵적인 규범과 싸웠다. 그들은 귀고리, 염색에다 힙합바지를 입고 티브이 나와서 반말을 하는 등 견고한 기존의 규범에 저항했다. 당시 젊은 세대는 절대 깨질 수 없을 것 같던 규범이 이들에 의해 깨지는 것을 보고 배웠다.

신현준=다시 생각해 보니 그 시기가 과도기였던 듯한데, 김영삼 정권 시기와 거의 맞물린다. 또 거품 경제의 시기였고, 민주화되었다고 사람들이 느낀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90년대 음악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놀자, 즐기자’였다. 당시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놀던 것 같던 젊은 애들이 티브이에 대거 출연했는데, 그건 나름대로 문화적 충격이 있다. 일본에서 나온 한 논문에서는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회비판하는 아이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승렬=당시 세대가 사회비판하는 대중음악인을 원했다고 생각한다. 유신체제 이후 군부정권 아래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저항해주기를 바랐는데, 그런 희망이 90년대 초반 대중음악인에게 투영되었던 것 같다.

서정민갑=90년대 초만 놓고 보자면 음악적인 경계를 허무는 데 두려움이 없었던 시기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90년대에는 메탈을 들으면서 발라드를 듣는 등 경계를 넘나드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신승렬=동의한다. 당시 젊은 세대는 구획 짓기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80년대에 ‘애들이나 듣던 노래’로 치부되던 나미의 ‘슬픈 인연’이나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90년대가 재발견했던 것도 그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신현준=주류 언론에서 젊은이들의 문화를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 적이 두 번 있다. 70년대 초의 청년문화론과 90년대 초 신세대 문화다. ‘청년문화’는 75년에는 대마초 파동을 계기로 허리가 꺾였다. 신세대 문화는 대형 통신사와 대형 기획사의 마케팅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부분은 좀더 생각할 문제다.

신승렬=90년대 중반 이후 주류 대중음악은 음악적으로 뛰어나지 않다. 훌륭한 가수들은 있지만 훌륭한 예술인은 없다. 90년대 서태지, 듀스, 이승환 등처럼 완벽하게 자신의 음악을 통제했던 예술인이 대중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아이엠에프 이후 변화된 사회 분위기라고 본다. 아이엠에프 이후에 경쟁이 생존을 위한 논리가 되면서 사람들은 음악과 문화의 소비를 경쟁을 위한 장애물로 인식했다. 음악을 주로 소비하는 10, 20대가 옛날에는 ‘바르게 살라’고 배웠는데, 이때부터 ‘이겨라’를 배운다. 이에 따라 젊은 세대가 원하는 음악인의 모습도 바뀐 것 같다. 90년대의 젊은 세대가 ‘저항하는 아이돌’을 원했다면, 이젠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을 기대한다. 기획사들도 그 수요에 맞춰가는 것 같다.

서정민갑=8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음악적인 진지함이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몇몇 댄스 가수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립싱크는 거의 없었고,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대중음악에 대해 서툴렀다. 90년대에는 산업과의 관계 속에서 음악적인 타협이 본격적으로 있었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 대중음악 시장은 대형 기획사의 독과점 시장이 되었다.

신현준=현재 대기업의 음악 산업 진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스케이나 씨제이, 케이티에서 대규모로 투자를 하고 있는데, 거대한 미디어 복합 기업이 되기 위한 수순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면 대기업이 투자를 해서 제도나 환경이 좋아진 부분이 있다고 들었다. 대중 음악계 안에서 대기업과 음악인들이 어떤 권력관계를 만들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서정민갑=정부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한류를 보고, 가수 ‘비’가 미국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대중음악이 소위 잘 나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2000년대의 대중음악이 활력을 찾기 위해서 ‘대중음악진흥위원회’와 같은 기구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리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참가자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서정민갑 대중음악 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신승렬 〈90년대를 빛낸 명반 50〉 저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