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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006년, 새벽이 멈춘 곳
새벽 - 겨울 그 가지 끝에서 |
<사진, 영상 : 컬쳐뉴스>
0.
2人舞 - 러시아에 관한 명상 - 두 노동자 이야기
남자는 27세의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다. 여자는 24세. 중소기업 노조위원장. 이 둘은 서로 사랑하다가, 격렬하게 헤어졌다. 삶과 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로. 그중 어느 쪽이 더 큰 이유였는지에 대해서도 둘은 견해가 달랐다.
그 후 1991년 5월 정국에서 남한 공개운동권 대패, 소련의 정치권력 와해 및 남한 좌파 분해를 겪으면서, 둘은 그것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며 시들한 나날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게 2년이 지난 1992년 봄 어느 날, 둘은 각자 집회에 그냥 구경삼아 나간다. 대회는 역시 시들하게 끝나 거리가 텅 비워지고 차량들이 다시 소통되고 횡단보도로 사람들이 건너가기 시작하는데, 그 둘이 이 쪽 저 쪽 보도에 남아 눈이 마주친다.
이 작품은 그 뒤 50분간이다.
김정환, 『하나의 2人舞와 세 개의 1人舞』 중에서
1.
『노래모임새벽콘서트, 2006년 4월 28일-29일, 백암아트홀』 1993년 겨울 학전소극장에서 그들을 지켜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13년만이다. 공연 팜플렛을 펴서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난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랑 그것은」. 난 이 노래가 1993년 새벽의 마지막 공연 『러시아에 관한 명상』의 마지막 곡임을 직감했고, 악보를 펼쳐보면서 그 노래가 맞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공연장에 들어갔다.
넓게 펼쳐진 무대. 왼쪽으로는 건반악기들, 가운데는 기타들, 오른쪽에는 여러 타악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천장에서 내려온 낮게 설치된 세련된 조명이 이들을 비추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박수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몇 사람들은 낯이 익었다. <새벽> 그들이 맞았다. 마이크에 손이 가고, 기타 연주음이 들려왔다. 노랫소리가 들렸다. <새벽> 그들이 맞았다.
2.
1990년대 새로운 ‘창작’ 기법을 모색하던 시절 만들었던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떠나는 그대를 위하여」, 「거리」, 「아름다운 생애」, 「먼 훗날」, 「이별」, 그리고 「사랑 그것은」. 전체 선곡에서 고작 1/3 가량만이 예전에 만들어진 노래였고, 그나마 이 곡들도 관객들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이날 공연에서 <새벽>을 기억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과거의 흔적을 찾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노래는 딱 여기까지였다. 아, 앵콜곡으로 불린 노래 「벗이여 해방이 온다」도 있었다. 그래, 그날은 김세진·이재호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세련된 음색, 음향, 그리고 조명. 하지만 그들의 솜씨가 예전 그대로는 아니었다. 반주호흡이 안정되지도 않은데다 눈에 띠게 실수하기도 했다. 윤선애와 임정현을 제외한 가수들의 목소리에 긴장한 흔적이 역력했다. 13년 동안 떨어져 지낸 세월을 단번에 감출 수는 없었다. 음악활동을 이어온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프로그래머도 있었고, 배우도 있었고, 학원 강사도 있었고, 회사원도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만이라도 연습하면서 그들은 그 먼 시간을 줄이려 애썼을 터였다. 하지만 1993년 그들이 해산을 결심했을 때, 서로에게 남겨진 상처는 그리 간단히 치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노동조합 간부들과 이른바 ‘현장’ 활동가들은 <새벽>보다 <노동자노래단>을 더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의 노래를 지식인의 관념적 유희에 비유했다. <새벽>의 노래에는 <노동자노래단>의 「파업가」, 「단결투쟁가」에 비할 만큼 노동‘현장’에서 사랑 받는 ‘투쟁가’가 없었다. 「철의 기지」, 「다시 또 다시」, 「해방을 향한 진군」,「선언」 같은 노래들이 있었지만, ‘따라 부르기’가 쉬운 노래도 아니었고, 김호철의 직설적인 표현과 비교해도 시적 질감이 월등히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끝내 살리라」,「고백」,「민들레처럼」, 「꽃다지」처럼 대중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포장마차」, 「1노2김가」, 「진짜노동자 3」 같은 트롯트-대중가요풍의 일상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민중가요의 가장 유력한 유통경로였던) 대학생/노동조합 노래패들이 <새벽>의 대다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주실력, 노래실력이 필요했다는 점이었다.
5월 강경대열사투쟁의 패배,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대중성 확보에 실패한 <새벽>은 모든 것을 재평가해야 했다. 그들은 답보상태에 빠진 노래 ‘창작’법을 혁신하고자 했다. 두 차례에 걸친 『작은 음악회』는 이를 모색하기 위한 실험음악회였다. 하지만 당시는 ‘창작’법 혁신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포기하고 있었고, 또 ‘새로운 민중문화의 건설’이라는 문제의식도 포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민중문화의 건설’에 내재된 ‘대중문화 비판’이라는 문제의식도 대중문화와의 접합지점을 찾으려 애썼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무용지물이었다. 모든 것이 포기되었다. <새벽>의 마지막 공연 『러시아에 관한 명상』의 ‘실패’는 예정된 길이었다.
4.
이번에 12곡이 새롭게 발표되었다. 대중의 예술적 역량을 한 단계 높여야 함을 강조해 왔던 <새벽>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 ‘추억’에 호소해서 박수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당신은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가. <새벽>이라면 당연히….
하지만 이 곡들이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곡들이 1993년 당시 ‘창작’ 기준을 따랐다. 오늘 <새벽>이 노래의 재료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라곤 ‘1993년, 당시의 기억’과 ‘마흔의 삶’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상실’, ‘그리움’, ‘어루만짐’, 그리고 여기저기를 자주 빈번히 가로지르는 ‘사랑’. 한 단계 한 단계 내려갔다 한 단계 한 단계 다시 오르는 화성진행들(「가을」, 「겨울 그 가지 끝에서」, 「귀천」, 「불면증」)과 읊조림 (「사랑노래2」). 어떤 곡들은 일상적인 감정을 다루는데 있어서나 음악형식에 있어서 1993년 『작은 음악회』에 못 미쳤고(「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비밀이야기」,「기억 속에 가리워진 노래」,「내 이름을 불러봐」) 또 어떤 곡들은 연계 고리를 찾지 못한 채 비껴 있었다(「노래」,「꽃잎」).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을 결성했던 당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갈등적이면서도 폭발을 예비하는 것 같은 화성진행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3년, 그것은 정지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단된 <새벽>, ― 새로운 노래문화의 건설 ― 의 시간이기도 하다.
5.
어쩌면 이는 우리가 답보상태에 빠진 만큼의 시간일 지도 모른다. ‘선전선동’, ‘생활공동체’의 틀에 노래를 가두려는 시도를 비판하며 ‘새로운 노래문화의 건설’이라는 테제를 제기해온 노래운동집단은 사실상 <새벽>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많은 곡들과 15집에 이르는 앨범, 예술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벌인 논쟁들. 이 모든 기록은 오늘 <새벽>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오늘 <새벽>이 멈춘 곳’에 시선을 둘 것을 종용하고 있다.
2006년 『노래모임새벽콘서트』에서 「사랑 그것은」이 절정을 향해 치닫자 모든 조명들이 일제히 관객을 향해 비추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새벽>과 마주하고 있는 ‘당신’이야말로 이 노래의 주인공이라는 듯 말이다. 이 환상적인 조명 연출 덕에 무대의 배우들과 관객들은 시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연인처럼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다.
1993년 『러시아에 관한 명상』에서 「러시아에 관한 명상 4」가 절정을 향해 치닫자 무대 위의 모든 배우들은 서로들 다른 먼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새벽>은 ‘모두 각각’ 무언가를 응시했다. 그리고 관객들도 ‘모두 각각’ 무언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1993년과 2006년 50분간의 2人舞, 그 길고도 다른 시간.
- 월간 『사회운동』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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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조금 높여보세요. 그룹 새벽의 '떠나는 그대를 위하여'가 흘러나옵니다. <편집자 주> |
"쟤만 없으면 돼." 노래를 부르다 말고 임정현씨가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남색 조끼를 입은 구자우씨였다. 신발은 등산화같았다. 임정현씨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산에서 딱 막걸리 한 잔 하고 내려온 거 같잖아." 다들 왁자지껄 웃었다. 구자우씨가 아무 말 없이 조끼를 벗었다. 노래가 다시 시작했다. "아름다운 가을하늘 난 보고 싶었는데, 이제 난 구름되어 가을 하늘에 떠있네…." 무사히 한 곡이 끝났다. 구경하던 이들이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끝나자 임정현씨가 말했다. "너무 심각해." 다른 이도 말했다. "노래가 심각해." 조이한씨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임정현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우린 눈 마주치며 하고 그랬어." 그리고 둘이 '다정한 눈빛 교환'을 실연해 보였다. 다들 애들처럼 까르르 웃었다. 한쪽에선 그 틈을 빌어 기타를 뜯었다. 40대가 아니라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 노래 모임 <새벽>, 혹시 내가 들리나요? 1980년대 민중가요를 달구었던 노래모임 <새벽>이 돌아왔다. 13년 만이다. 김광석, 안치환, 윤선애가 다 노래모임 <새벽> 출신이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이들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새벽>은 1993년 해체했다. '러시아에 관한 명상'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각자 일터로 돌아가고 유학을 떠났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선언', '저 평등의 땅에', '그날이 오면'…. 그들이 부른 노래는 전설로 남았다. 다른 일터에서 시위 현장에서 누구나 불렀다. 그리고 또 잊혀졌다. <새벽>은 전설로만 남았다. 83·84·85학번이던 그들이 20대 때였다. 그들이 이제 훌쩍 마흔이 넘었다. 40대가 되어 다시 모였다. 오는 28일과 29일 백암아트홀에서다. '혹시 내가 들리나요? - 사랑, 노래 15'란 제목으로 노래모임 <새벽>이 다시 무대에 선다. "반 정도는 음악을 계속 했어요. 반 정도는 회사를 다니고. 그런데 가끔 만나 술 먹다보면 손톱을 기르고 있는 거예요." 이 공연을 주동한 성악가 임정현씨가 말했다. 그가 이태리로 폴란드로 유학을 다녀온 뒤였다. 다들 사느라 바빴다. 애들도 하나 둘 씩 있었다. 성악가, 미술사가, 작곡가, 연극배우, 게임 프로그래머, 일반 회사원까지. 직업도 다양했다. 그 때 그 시절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불러 유명했던 윤선애씨는 입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우리 전통음악 정가를 공부하는 한편으로. 그런데 40대 아저씨들이 손톱을 길게 기른다는 게 가리키는 건 분명했다. 기타를 친다는 거였다. 이들은 기타를 피크로 치지 않았다. 손톱으로 쳤다. 그래서 예전에도 기타를 치기 위해 손톱을 길렀댔다. 임정현씨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 지금도 기타 치냐?" 물으니 "왜 안 쳐요? 기타를 쳤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죠. '야. 쟤들이 칼을 갈고 있었구나.' 회사원, 성악가, 프로그래머, 학원 강사... 그들은 계속 손톱을 길렀다
어느 날 그가 임정현씨에게 말했다. "형, <새벽> 공연을 우리 극장에서 하고 싶은데, 형이 한 번 불러 모을 수 있나?" 생각해보니 재밌을 거 같았다. 임정현씨가 말했다. "어?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총대 매볼께." 임정현씨는 부랴부랴 <새벽> 멤버들을 만났다. 만나서 공연 이야길 했다. 같이 하자고 했다. 반은 반응했다. "재밌겠다" 그렇게 모였다. 백암아트홀이 기획했고 공연장을 내놨다. 그런데 무슨 노래를 부르지? 그렇다고 10여년 전에 부르던 곡을 회상하듯 부르긴 싫었다. 7080 콘서트 같은 걸 회고조로 하긴 싫었다. 신곡을 만들기로 했다. 지금 40대로 사는 감정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다들 40대가 된 <새벽>의 노래를 하자고 했다. "넌 예전처럼 작곡해." "넌 가사 쓰고." 서로 '납기일'을 정했다. 잘 될까? 걱정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납기일에 맞춰 시가 나왔다. 곡이 나왔다. 곡들도 이뻤다. 예전 <새벽>과 달랐다. 색깔도 여럿이었다. 재밌었다. 그렇게 만든 창작곡 12곡을 이번에 부르기로 했다. 6곡은 예전 곡 중에서도 골랐다. 무대 연출은 최근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를 만든 남선호 감독이 흔쾌히 맡았다. 술기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남선호 감독은 과거 연극집단 <한강>에서 일한 인연으로 알았다. 하지만 쉬운 건 아니었다. 13년만이었다. 임정현씨 표현에 따르면 "처음엔 이게 얼굴인지 발가락인지 몰랐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 모습이 됐다. 시간도 별로 없었다. 다들 일과 가정이 있었다. 애엄마, 애아빠였다. 평일엔 각자 연습했다. 낮엔 일하고, 밤마다 알아서 연습했다. 잠잘 시간을 쪼갰다. 주말이면 모두 모여 노래를 맞췄다. 서로 타박하고 웃고 떠들고 노래했다. "자기도 모르게 우리더러 386이니 뭐니 규정하고, 성실히 산 우리를 도매급으로 넘기는 게 싫었어요." 무대에 서는 건 아니지만, 공연 외적인 것을 담당하는 구자혁씨는 말했다. "진짜 386 그 세대 이야길 하고 싶었어요. 그 세대로 열심히 산 이야길 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과거 '선언', '저 평등의 땅에'를 작곡했던 류형수씨는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도 여기까지 올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하다 말겠지 했죠. 그런데 다들 마음 속에 뭔가 있더라고요. 다들 숨기고 산 거구요." 게임회사 프로그래머로 산 세월이 얼만지 모르지만, 그는 다시 곡을 썼다. 기타도 잡았다. "스트레스가 많아요, 죽겠어요"라고 했지만, 그의 입가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엔 써있었다.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중. 네가 마흔이니? 웬일이니?
"먼 훗날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하여, 우리 오늘 헤어짐의 눈물 보이지 않으리. 흐르는 세월에 역류한 젊음의 피땀이 지나간 계절의 노을로 빛날지라도/ 눈을 감고 격한 호흡을 고르며 떨군 고개를 들어 흐린 먹빛하늘 저편 먼 곳에 아직 남아있을 희망의 조각들 추억 떠오는 구름 한점이라도 노래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리라." "어. 틀렸잖아?" 다른 노래를 하다 말고 임정현씨가 말했다. "나 못해."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팔짱을 꼈다. 13년이란 시간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마음은 사라졌는데, 몸은 다른 소릴 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노래하던 조이한씨가 그를 살짝 흘겼다. "으이구. 예민을 떨어요." 다른 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간주 들어가는 거 틀리지 않았어?" 기타를 치던 류형수씨의 고개가 더 깊숙이 내려갔다. 다들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아구. 여덟 마디도 못 세냐?" 임정현씨가 툴툴 댔다. "다시. 다시." 기타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들은 그렇게 소리를 맞췄다. 굳은 손을 풀었다.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이 진지했다. 나이를 묻자 김묘진씨가 말했다. "마흔이요." 그 때였다. 조이한씨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야. 네가 마흔이니? 웬일이니?" 그러게 웬일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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