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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NPT 체제, 평화를 향한 사회운동의 도전이 필요하다

 

2006년10월16일, 참세상

 

 

1. 북한 핵실험의 의미 : 핵 위기의 새로운 순환

 

지난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둘러싼 긴장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1958년 재래식 전쟁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대량보복전략’ 아래 핵무기가 남한에 배치된 이후를 하나의 순환으로 하고, 1971년부터 시작된 남한과 북한의 핵 보유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남한에게는 핵우산을, 북한에게는 핵불사용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이 핵확산을 막으려던 시기를 두 번째 순환이라고 한다면, 2002년 미국의 북에 대한 핵선제공격 천명, 2005년 북의 핵보유 선언, 2006년 북의 핵실험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본격적인 핵경쟁의 도래는 이전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새로운 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핵 경쟁이 본격화된 데에는 미국의 책임이 가장 크며, 끊임없이 원인을 제공하였음은 명백하다. 미국은 1991년 전술핵무기 폐기를 선언하고는 연이어 한반도 비핵화선언(1992년)까지 이끌어내지만, 이는 핵확산을 줄이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정책은 폭격기를 이용한 전술핵무기와 전략핵무기를 통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94년 제네바 협정에서 미국이 약속한,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불사용은 그자체로 믿을 수 없는 모순적인 것이었는데, 제네바 협정 이후에도 미국은 남한에 대한, 한반도에서의 핵우산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무기가 국가 간 위계를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중핵이라고 할 때, 북한의 안정보장은 사실상 처음부터 거절당했던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외교정책이 ‘접촉’으로 바뀌건, 악의적인 ‘무시’로 바뀌었건 사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더구나 미국이 2차 핵태세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 NPR)에서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북한 등 핵비보유국에 대한 핵선제공격까지 천명한 상황이라면 이후 전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2. UN이 주도하는 핵확산 통제의 불가능성: NPT체제의 몰락

 

애당초 새로운 핵경쟁의 출현 위험은 이미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핵공학의 발달은 손쉽게 핵무기 제조기술로 전화될 수 있었고, 국가 간 체계의 불평등성이 핵무기로 공고화된 상황에서 지역강국으로의 도전을 꿈꾸는 국가에게는 핵무기 보유가 무엇보다도 관건이었기 때문이었다.

 

1969년 '직접적 위협을 받는 나라의 정부와 국민은 자기방어를 위한 군사력을 먼저 제공할 책임이 있다는'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된 이래 미국과 소련의 무기 공급/판매는 확대되고, 자신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국가의 생존전략이 확대되면서부터는 지역차원의 군사화와 더불어 핵보유 열망이 급격히 확대된다. 그리하여 미국과 소련 등 기존 핵보유국들은 핵확산을 제어하고자 평화적 목적의 핵기술을 보장하면서도 비핵국가들의 핵무기 보유 열망을 포기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UN의 권위아래 '국제적이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을 통해 핵확산을 금지하는 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 NPT)이  바로 그것이다. 핵보유국들의 핵독점으로 핵확산을 막는다는 것이 NPT체제를 통한 핵확산 방지의 요체다. 하지만 NPT체제는 핵보유국의 수직적 핵확산 ― 즉 핵무기의 질적 개량에는 UN이 아무런 제어를 할 수 없는, 오로지 핵비보유국에 한해서만 UN 산하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 IAEA)가 ‘포괄적인 안전조치’를 취할 수 있는 불평등한 조약(심지어는 의결에서조차 핵보유 5개국은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이었고, 핵보유국의 핵비보유국에 대한 소극적인 안전보장 ― 즉, 선제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것이어서 NPT체제는 처음부터 불안정한 것이었다.

 

NPT체제 하에서도 이스라엘, 인도·파키스탄, 이란·이라크, 남아공, 브라질, 한국·북한 등에서 핵보유 시도들은 계속 확대되었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이런 시도를 중단한 나라도 있었지만 핵비보유국의 핵보유 열망은 중단되지 않았다. 결국 ‘확산예방정책’이 한계에 이르자 클린턴 정부는 이를 ‘확산대응정책’으로 전환한다.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1994년 이른바 ‘1차 북핵위기’는 이런 강경한 분위기에서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1995년 25년의 시효를 가지고 있었던 NPT체제가 시효 만료될 처지에 이르게 되자 한반도에서 ‘1차 북핵위기’는 제네바합의를 통해 봉합되고, 비핵보유국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핵보유국들은 포괄핵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Test Ban Treaty : CTBT)에 합의를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지렛대 삼아 1995년에 열린 NPT 5차 평가회의는 NPT체제를 무기한 연장한다.

 

그러나 수직적 핵확산을 중단하기 위한 핵보유국들의 이행은 지지부진했다. 1999년 미국은 CTBT에 대한 국회비준을 거부하였고, 2002년에는 미사일방어망(Missile Defense : MD) 개발을 위해 탄도탄요격미사일(Anti-Ballistic Missile : ABM)협정을 파기하더니 2003년에는 소형핵무기의 연구개발을 금지해 온 '스프랫페이스' 조항마저 폐지하였다. 그리고는 2003년 미국은 UN결의 1441호에 의거해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였다. 물론 UN은 같은 해 5월 1483호 결의를 통해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승인한다.

 

이런 상황은 사실 이미 2002년 발표된 2차 핵태세보고서에서 천명된 것이었다.  미국은 이 보고서에서 “통상적인 무기로는 파괴할 수 없는 목표물의 파괴”, “대량살상무기를 이용한 공격에 의한 보복”, “기타 불시의 군사사태” 등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핵무기사용가능성을 크게 확장하였고, 중국·러시아·이라크·이란·북한·리비아·시리아에 대한 핵선제공격 가능성을 천명한 뒤, 정밀타격능력 강화, 정보수집능력 확대, 전천후·전지형 장거리 타격 수단 확보, 새로운 유도 타격무기 개발과 같은 핵군사력 개편방안들을 구체적으로 내놓았다. ‘상호확실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 ’전략보다 ‘핵전투(Nuclear Warfighting)’ 전략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인 것인데, 이는 미국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기”보다는 “실제로 사용가능한 무기”로서 핵무장을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있었던 NPT 6차 평가회의에서 미국은 일본 등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국가의 농축 및 재처리를 아예 불허하자고 주장하였다. NPT체제를 뒷받침해주는 ‘소극적 안전보장’도 휴지조각이 난 마당에 이제는 핵의 ‘평화적 이용’마저도 부정한 것이다. 핵비보유국들은 강력히 반발하면서 미국의 핵태세를 비난하였고, 이에 따라 NPT 6차 회의는 완전히 무산되었다. 바로 이어 2006년 이란의 핵보유 시도가 가시화되고, 북한은 핵실험을 실시한다. 핵확산이 본격적으로 개시되면서 새로운 핵경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 자신에 의해서건 새로운 핵보유국의 탄생에 의해서건 NPT체제는 이제 사실상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다했다. 핵보유국들은 NPT체제를 통해 핵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했고 또 여전히 그렇다고 주장할 테지만, 현실의 역사는 NPT체제가 핵보유국들에 의한 수직적 확산은 물론이거니와 핵보유국 확대라는 수평적 확산 역시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것의 궁극적 원인은 핵보유국들(특히 미국)의 핵독점 노력이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핵무기가 국가 간 불평등을 보증하는 이상 핵 독점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핵확산을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보유국의 핵독점에 의존하는 NPT체제는 핵확산을 막을 수 있는 국제기구로서 유효한 틀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동시에 UN 역시 핵확산을 중지할 수 있는 어떠한 유효한 힘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UN의 권위에 근거한 핵확산 방지 노력 역시 NPT체제의 실효성이 붕괴된 것과 동시에 유의미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3. 핵에 의한 핵의 억지는 왜 불가능한가!

 

다시 문제의 원점으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북의 핵실험은 동아시아에서의 핵확산 아니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완전한 비핵지대화를 향한 유효한 시도가 될 수 있는가? 단언하건데 결코 그럴 수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핵에 의한 핵의 억지는 가상적인 시나리오 일뿐 현실에서는 핵 균형은커녕 도리어 핵 경쟁을 더욱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떨어진 핵이 일본제국주의를 완전히 패망시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핵은 단 한 번의 사용으로도 국가의 존립을 심대하게 위협한다. 통상 규모야 어찌되었건 핵은 보유만 하면 핵보유국 사이에서 공포의 균형이 이뤄진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핵보유를 위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뿐 현실의 전개는 전혀 다르다. 새로운 차원에서 핵 경쟁과 군사 경쟁이 가속하기 때문이다.

 

핵보유국 사이에서는 1%의 전력 차이라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존립과 권위를 위협하기 때문에 핵을 보유한 나라들일수록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핵무기의 수직적 확산 ― 즉 양적 증대, 질적 개량을 하게 되는 계기다. 따라서 핵무장을 전제로 한 상황에서 군사적 평형상태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가능한 균형이라면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서로 모두 죽는다는 절멸(!)을 전제로 하는 균형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절멸을 전제로 상호 균형을 이룬 시점이 1960년대 말부터 진행된 미·소간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Ⅰ, Ⅱ)이다. 제2공격능력 ― 즉, 핵 공격을 받고도 핵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을 두어 ‘상호확증파괴(MAD)’를 가능하게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탄도탄요격미사일(ABM)체제제한협정'과 '공격형전략무기제한을위한잠정협정'이 제기된 것이다. 상호 절멸을 보증함으로서 핵전쟁을 도발할 수 없도록, 이를 위한 핵전력의 평형을 이루자는 것이 전략무기제한협정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공포의 균형만이 유일한 핵 균형에 이르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공포의 균형 속에서도 핵전쟁이 가능하다는 가설이 가능한데, 그것은 본격적인 핵전쟁으로까지 확대되면 상호절멸하게 되기 때문에 핵전쟁 당사자들이 이런 핵전쟁의 확대는 피하게 된다는, 그리하여 제한적인 핵전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970~80년대 핵전쟁이론의 중핵이었던 ‘제한핵전쟁’론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공포의 핵균형을 이룬다 할지라도 또 다시 핵 경쟁이 가속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를 위한 핵무기 ― 즉 전시(展示)용 핵무기는 사용 불가능한 핵무기이며 그야말로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이제 핵 경쟁은 “실제로 사용가능한 핵무기” 개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오늘날 핵무기 개발 경쟁이 적의 군사목표물을 파괴하는데 초점이 맞춰지고 규모도 소형화됨과 동시에,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국의 생존과 적국의 멸망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망 (MD) 개발이 핵심적인 목표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동시에 같은 논리 아래 재래식 전쟁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된다. 공포의 균형 아래에서는 핵전쟁보다는 재래식 전쟁 혹은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던 제3세계의 분쟁들과 같은 대리전쟁의 필요성이 더욱 확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정밀타격 능력, 신속 대응능력 같은 기동성들이 재래식 무기개발과정에 집중된다. 오늘날 전 세계를 모조리 파괴할 수 있을 만큼의 핵 군사력이 있음에도 재래식 무기 개발에 모든 군사강국들이 집중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핵에 의한 핵의 억지 ― 군사력의 억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논리에 기반을 둔 핵 경쟁이 경쟁 당사국들 간의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국 민중의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배제한다는 점이다. 핵개발을 시작한 이상 핵무기에 대한 대중의 통제는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일촉즉발이라는 이유에서건, 굳이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건, 핵무기를 둘러싼 기술을 공유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건 비밀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되고, 그만큼 통치자들은 전쟁에 대한 대중들의 의사보다는 군사주의적인 대응 논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대중의 민주주의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도 대중(핵전쟁에서 적성국의 대중과 자국 및 동맹국의 대중을 구별하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하다)을 상대로 하는 전쟁을 치룰 수 있는, 국가 엘리트들의 전쟁이 바로 핵전쟁이다. 전쟁에 대한 대중의 통제권이 완전히 상실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에 의한 핵의 억지’는 억지는커녕 현 상태의 유지도 불가능하게하며, 좀 더 정확히는 대중의 정치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후퇴이며, 절멸주의가 궁극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문명의 후퇴에 불과한 퇴행적인 논리일 뿐이다.

 

 


4. 북한 핵실험의 여파는 어디까지

 

지금 언론에서는 일본과 대만의 핵무장 가능성이 다방면으로 보도되고 있고, 곧 열릴 38차 한미안보연례협의회에서는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핵우산 정책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이 그야말로 현실의 일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이런 사태는 지난 7월에 있었던 북한의 미사일 발사 때부터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 발사 이후 곧바로 미국의 미사일방어(MD)국은 북한 미사일을 모형으로 하는 요격시험을 진행했다. MD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실체적 실험을 한 것이다. 미국이 지난 2002년 발표된 핵태세보고서에서 핵전력의 3지축을 과거 지상미사일, 비행기, 잠수함으로 정의되어 있던 것에서 운반수단, 미사일방어망, 개선된 핵무기제조기반으로 재정의했음을 상기하면 미사일방어국의 지난 실험은 동아시아에서의 핵확산 흐름에 대응하는 핵경쟁의 일환이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같은 맥락에서 보면 북핵 실험 이후 한국, 미국, 일본은 군사동맹 강화를 전제로 미국의 핵우산 정책을 더욱 구체화되고, 미사일방어망을 확고히 할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서건 북한의 핵실험을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는 없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의 핵확산은 분명 미국의 핵독점과 자신의 군사패권을 강화하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이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을 저지하려는 노력 중 일환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명확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에서 핵 경쟁이 어느 한쪽에 의해서든 쉽게 멈춰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확산대응정책’은 어떤 형태로든 더욱 강화될 것이고, 그 만큼 군사적 긴장감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더구나 이번 사태에도 미국은 북미관계의 ‘급진적인 개선’ 이라는 카드를 내밀 가능성이 거의 없다. 미국은 북미관계 개선으로 자신이 얻을 실익이 별로 없다고 보고 있고,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오로지 ‘대량살상무기’의 제거라는 차원에서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북외교노선이 ‘무시(ignore)’와 ‘접촉(engagement)’ 정도의 폭에서만 진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은 남아공이 그랬고 남한도 그랬으며 가깝게는 이라크가 그러했듯 이제껏 핵비보유국이 핵개발을 포기한 역사는 정권교체 (혹은 그에 준하는 위협) 말고는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려 들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 핵개발, 미사일 발사, 핵보유선언 그리고 핵실험이라는 일련의 군사주의적 대응으로 체제보장과 경제회복의 활로를 개척하겠다는 북한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고, 이리되면 북한은 이제까지 그랬듯 더 강력한 군사주의적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북한이 현재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선군정치’ 사상을 체계화하고, ‘강성대국론’을 제시한 마당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사실 핵보유국으로서 핵실험과 사용가능한 핵무기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미국은 어떻게든 사용가능한 핵무기의 실질적 존재를 부인할 것이며, 경제·해상봉쇄 형태에서부터 MD 개발에 이르기까지 핵무기 보유·생산·유지를 막거나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잠깐이나마 실익을 얻는다 해도 현재처럼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하는 한, 그리고 지금처럼 핵 대결을 고수하는 한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입증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5. 평화를 향한 사회운동의 도전

 

(더 많은 민주주의, 노동자의 연합을 모색하는 방식이 아니라) 북한이 제국주의의 군사주의적인 행태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체제를 보존하고 이를 답습하려 한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길에서 북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상당히 난망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공조’라는 말은 더욱 애매해질 수밖에 없는데, ‘민족 공조’라는 말을 소극적으로 이해하면, 이는 남한의 대북정책 현행 유지, 민간교류 현행 유지이고 이는 사실 지금까지 반복된 불안한 상황 즉, 현 상황유지 및 UN을 통한 핵확산 방지를 지속하자는 길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북미관계개선, 남북한 국가연합의 실시/ 6·15 공동선언 이행과 같은 조금 더 적극적인(?) 형태의 ‘민족공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서 이야기 했듯 미국은 한반도에서 ‘남북통일’은 물론이거니와 ‘북미관계의 급격한 개선’과도 같은 어떤 적극적인 변화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고, 이에 철저히 종속된 남한 정부가 (사회변혁을 거치지도 않은 채) 이를 개척해 나갈 리는 아예 만무하다. 심지어는 북한조차 급박한 체제위기 상황에서는 일정한 범위의 실용주의적 해법 말고는 제시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결국 적극적인 양상을 모색한다 할지라도 (운동 주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실상 소극적인 양상 즉 ‘현행 유지’로 수렴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민족 공조’라는 담론은 국가 간 체계의 불평등성이라는, 그로 인한 착취와 배제의 재생산이라는 현실을 제한적으로나마 환기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국가 간 위계가 어떻게 조정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우리가 직면하는 위협의 성격,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 상태가 어떻게 급변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를 전제하는 국가 간 공동지배 방식이 강화되고 있고, 핵보유국(특히 미국)의 핵독점 속에서 핵경쟁의 확대 심화라는, 절멸주의―핵무기주의 확산이라는 현실 말이다. 그리고 이 대열에 북한이 참여함으로써 핵무기주의의 새로운 순환을 열고 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운동이 국가주의적인 한계에서 현 상황에 대한 해법을 찾는다면 그것은 무망한 일이 될 것이다. 전혀 다른 길에서 운동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민족공조’ 수준에 갇혀 있는 운동을 뛰어 넘어, 사회운동들의 새로운 연대 ― 전쟁을 가속하고 재생산하는 ‘포스트 냉전체제’에 맞서고자하는 적극적인 평화운동과의 연대, 아니 더 나아가 동아사아에서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맞서려는 사회운동들의 새로운 연대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한 운동의 소통과 경험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현에 매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며 그 자체로 이미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에서 국제주의의 새로운 가능성,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국제주의의 새로운 출구를 열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자리에서 동아시아의 사회운동들의 연대를 통해 전면적인 비핵지대화운동을 향한 토론이 시작되어야 한다.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핵 대결의 근원적 힘을 제공하고 있는 전쟁블럭(한·미·일 동맹)을 해체하기 위한 운동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미국의 핵우산 정책과 MD 추진에 반대하는 운동, (동아시아 핵확산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 명백한) 북한에 대한 정치·군사적 제재에 반대하는 운동, 그리고 북한의 핵무장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이 운동을 출발하는데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운동과 평택미군기지 반대운동, PSI 참여에 반대하는 운동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진행해온 가장 중요한 운동이다.

 

만일 이후 동아시아에서 완전한 비핵지대화가 실현된다면 그것은 평화를 향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도전과 그에 따른 더 많은 민주주의, 그리고 핵무장의 완전한 해체로 인한 것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인 평화운동의 출현”이 시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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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회담과 노무현정권의 마지막 선택_배성인

한미정상회담과 노무현정권의 마지막 선택 
 
 [기고] 내용과 실익은 없고 가능성만 확인 
  

 

출처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37447
 
 배성인(편집위원)  / 2006년09월19일 9시07분  
 
 지난 9월 13일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미FTA 범국본이 뒷거래에 대한 우려와 경고의 메시지를 정부에게 전달한 바 있다. 한미FTA 체결의 걸림돌로 언급되는 쟁점들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타결될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다. 현재까지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확인할 길이 없기에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한미FTA 문제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함께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낸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 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국민이 걱정 많이 하고, 미국에서도 그런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제가 부시 대통령을 만나면 한동안 조용하다. 약효가 그리 길게 가지는 않지만…”. 9월 6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 순방길에 루마니아에서 동포 간담회를 열고 교민들에게 한 말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을 만나 한동안은 국내 정치 이슈를 잠재울 수 있는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한미FTA, 북한문제, 한미동맹 문제 등으로 인한 최근 한국사회의 혼란과 갈등 속에 이번 한미정상회담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 어느 때 보다 복잡했다. 솔직히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더불어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과 우려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결과는 예상했던 그대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크게 북한문제, 한미동맹,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한미FTA, 미국 비자문제 등이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이번 회담에서 주요한 현안은 북핵문제였고 이를 둘러싼 다양한 추론이 난무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한미 간 입장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애초부터 합의 도출이 어려워 보였다. 정상회담 수준에서 의제의 성격과 거리가 먼 전시작전통제권에 관한 대화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상회담은 새로운 내용 없이 상대방의 이견을 확인하면서 원칙적인 수준에서의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 합의라기보다는 봉합의 수준으로 해석된다. 즉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한미 간 의견 차이를 봉합하려는 수준의 원칙인 것이다. 말 몇 마디로 한미 갈등을 덮는 뛰어난 외교력을 보여주었다.


원조 친미세력과 신흥 친미세력간 애정싸움


일단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전작권 환수에 대하여 부시 대통령이 정치문제화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점이다. 이와 함께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 한반도에서 미국의 안보 공약을 확고히 견지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전작권 문제는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쟁점화 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이를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상정해 논의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전작권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며, 국내 정치적으로 노 대통령에게 한미FTA보다 훨씬 더 큰 선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한나라당은 방미단을 꾸려서 전작권 논의 중단을 미국 측에 요청할 예정이지만 그 실효성에 있어서는 의문이다. 당분간은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의 반발과 저항이 거세게 전개되면서 정치적 논란이 계속될 것이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 발언은 이에 반대하는 국내 보수세력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가 전작권 환수 목표연도가 확정되더라도 안보상황이 변화하면 목표연도를 순연할 수 있다는 단서를 두도록 미국 측에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작권을 둘러싼 국내의 논쟁은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이 논리적 일관성이나 당장의 성과보다는 참여정부를 흔들어서 하나로 결집하려는 전략적 구도 속에서 계속 흔드는 것 같다. 민주노동당의 표현처럼 원조 친미세력과 신흥 친미세력간 미국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흉측한 싸움인 것이다.


미국과 함께라면 이라크 파병쯤은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이라크 추가 파병 및 파병 재연장에 대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부분이 느껴진다. 노 대통령이 “이 땅에서 테러를 완전히 예방하고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부시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기울이는 노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그와 같은 미국의 노력에 대해 동참하고 지지의 입장을 전합니다.”라는 발언에서 ‘동참’을 주목하고 싶다. 이러한 발언이 외교적 수사 차원이길 바라지만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참’의 의미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과거의 사실로부터 현재까지의 진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추가 파병에 대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최근 정부가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중인 자이툰 부대원 모집공고를 낸 것이 그 의혹을 짙게 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는 결정된 것이 없지만 현실화된다면 다시 한번 한국 사회를 혼란과 갈등으로 점철시킬 것이다. 이라크 파병은 처음부터 미국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는 한미동맹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북한문제 해결의 대가성은 아니겠지만 지나치게 미국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북한인권 문제와 개성공단


노무현 정부가 공개하지 않았지만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9월 17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 따르면 레프코위츠 특사가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 중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 실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공개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무현 정부가 의도적이던 아니던 왜 이러한 내용을 은폐하려 했는지 강력하게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레프코위츠는 자신의 개성공단 방문을 위해 남한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며 “이번 방문에서 현지 근로자들과 만나 근로조건이나 생활 환경 등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아직도 개성공단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다. 최근 한미FTA에 대한 미국 재계 측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선임부회장이 미국 정부와 의회가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해 한미FTA의 적용을 받도록 허용할 경우 내년 초쯤 한미FTA 협상이 타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최근 한미 정상회담과 (미) 의회의 분위기를 감지해 본 결과 개성공단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제외하면 한미 FTA에 큰 걸림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미 의회도 미국의 7대 교역국인 한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과 공화당 간 정치적인 입장차만 성공적으로 절충되면 협상시한인 내년 2월 안에 타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프레시안 9월 17일 참조).


한미FTA 3차까지의 협상 과정에서 개성공단은 커다란 쟁점이었지만 미국은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측에게는 유효한 카드이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미FTA …


한미정상회담에서 전작권 문제와 함께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낸 것은 한미FTA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시간보다도 내용을 중시해 협상을 하지만 가급적 빨리 촉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원칙을 갖고 협상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양 정상은 특히 한미FTA가 양국 모두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양국관계를 한 차원 격상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면서 FTA 체결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말은 내용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결국 시간과 내용 모두를 잡겠다는 것이다.

또한 한미 양 정상은 세 차례의 한미FTA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돼온 것을 평가하고 협상을 더욱 가속화시켜 양국에 상호 이익이 되는 성공적인(?) FTA 타결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협력하기로 했다. 이제 한미FTA 체결에 대한 양 정상의 강력한 의지를 재확인한 만큼 협상 팀의 태도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협상 추진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의지가 한미FTA 저지 전선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변함없는 그릇된 신념과 판단이 한국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현재 노무현 정부의 셈법으로는 실익이 거의 없어 보이며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첫째, 미국이 대북제재를 현 수준으로 동결하면서 개성공단과 관계없이 한미FTA 체결을 강하게 요구할 경우 노 대통령의 “손해만 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간 협의 과정에서 이견이 도출돼 미국이 대북제재 강화를 선택한다면 노무현 정부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선 북미 양자대화 후 금융제재 해제 논의’를 북핵문제 해결 카드로 내세워(개성공단을 끼워 넣어) 한미FTA 체결을 요구할 경우 노 정권은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지만, 역시 손실이 크기 때문에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기 어렵게 된다. 물론 북한이 수용할 가능성이 적어 노무현 정부는 매우 바빠질 것이다. 셋째, 대북제재의 부분 해제와 한미FTA 체결 요구 카드가 남아있다. 여기서 변수는 개성공단 문제가 될 것이다. 미국이 개성공단을 인정하면 노무현 정권은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받을 것이다. 설령 미국이 개성공단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받을 가능성은 생각보다 많다. 북핵문제 해결을 통해서 북한도 살리고 남북관계도 복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카드도 노무현 정권에게는 실익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미국의 강경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어라


이번 정상회담에서 그나마 성과가 있었다면 대북제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6자회담 재개 및 진전을 위해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포괄적이라는 모호한 표현에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긍정적인 조치와 대북 제재 강화 같은 부정적인 내용이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상호 모순적이다. 한미 쌍방 모두가 합의를 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일까? 또한 ‘포괄적’은 오히려 문제 해결 능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노무현 대통령도 언급했다시피 “새로운 북제재 언급할 단계가 아니다”고 했지만 이는 미국이 현재 추진하려고 하는 유엔 결의제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포괄적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미국의 대북제재를 인정하고 한미 간 이견을 감출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 강경일변도가 완화되었거나 특별한 정책적 변화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노 대통령이 향후 미국의 제재이행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보임으로써 스스로 족쇄를 채우게 되었다. 그럼에도 일단 시간벌기에는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새롭고 창의적인 방안이 모색되지 않는다면 북한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북한문제는 또 다시 원점으로, 아니 대북제재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또한 미국의 명분을 강화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면 그만이고 복귀를 거부해도 대북 강경책 강화의 명분을 제공해서 좋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시 행정부의 이번 결정은 노무현 정부의 눈물어린 노력보다는 부시 행정부를 둘러싼 환경적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북제재에 대해 미국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지만, 미국 내에서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 하락, 중간선거 문제, 핵무기 비확산 정책의 실패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란?이라크 등 중동문제로 인해 여력이 없어 보인다. 또한 지속적인 대북 금융제재로 인해 북측의 핵실험이 강행될 경우 쏟아지는 국제사회의 비난 등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북측에게 공을 넘기고 북의 선택에 따라서 책임소재를 확실하게 만드는 계기가 제공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는데 북한에게 공이 넘어간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접근방안’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것은 사전 조율과정에서 대북 금융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았거나 논의를 했는데 접점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후속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겠지만 진전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대북 금융제재 해제 없이는 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는 북한과 금융제재와 6자회담을 분리한 미국의 입장 간에 절충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구체화 과정에서 한미 간 이견이 도출될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며, 미국이 대북 금융제재를 풀고 나올 지도 미지수다. 북미 양자대화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양자대화 방안이 포함될 수도 있다.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지 모르지만 ‘선 금융제재 해제, 후 6자회담 복귀’라는 북한의 입장과 ‘선 6자회담 복귀, 후 금융제재 등 현안 논의’라는 미국 측 입장의 간극을 채울 수 있는 수준에서의 절충안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한미 양국이 ‘2+2협의’를 통해 접근방안을 모색했지만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2협의’는 9월 13일 한국 측의 반기문 장관, 송민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미국 측의 라이스 국무장관,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이 만나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방안을 최종 조율한 것으로 알려진 협의를 말한다. 이 협의에서는 동결된 북한 계좌를 불법 계좌와 합법 계좌로 분리하는 문제, 북미 양자대화 등의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논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협의에서 한미 양국은 “한미 정상은 협의 결과를 보고 받은 뒤 양국이 취할 공동 조치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국 정상이 합의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과 ‘2+2협의’에서 합의한 ‘공동 조치’는 동일한 내용인 것이다.


결국 가능한 모든 방안을 열어놓고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미간에 논의되고 있는 ‘포괄적 접근 방안’은 BDA 문제,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대북 경제원조, 북미 관계개선 등 개별적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포괄적으로 엮은 ‘패키지 안’을 통해 북한과 미국이 한 발짝 씩 양보하는 선에서 북한의 6자회담 참가를 이끌어 내자는 것이 골자다. 이들 방안 중 그 어느 것도 쉬운 것은 없으며, 이들 방안을 패키지 묶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따라서 포괄적 접근 방안은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새로운 방안이어야 할 것이다. 한미정상회담 직후 9월 16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미국이 다른 나라의 달러 위조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북한에 대해서만 금융제재를 강화한다”며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최근 포르투갈에서 세계 최대 규모인 750만 달러 위조사건이 발생했지만 미국이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9월 17일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쿠바 아바나 비동맹운동(NAM) 정상회의에서 “북한은 미국이 제재를 유지하는 한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이 북한 은행계좌 동결과 북한을 돕는 금융기관들에 대한 경고 등 잇단 대북 제재 조치들을 유지하면서 우리에게 무조건 회담장에 복귀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대북 금융제재 해제의 직접적인 조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조건 속에서 차선의 방법으로 불법 거래와 합법 거래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의심이 가는 계좌에 대해서 무조건 통제하는 현재의 조치를 불법 계좌와 합법 계좌로 분리하여 합법 거래 부분을 풀어주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합의 내용에 따라서 북측의 태도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노력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측의 적극적인 역할도 필요하다. 만약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한다면 북중정상회담을 통해서 현안 문제를 논의하면 될 것이고, 중국 방문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중국 측이 특사를 보내 설득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한중간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이번의 마지막 기회를 위기 돌파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인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대북지원을 재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서 하루 빨리 남북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특사파견, 남북정상회담 등 가용 가능한 자원을 총동원해서 위기를 돌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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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국민투표 전술 제안에 대한 의견_임필수

최근 민주노동당은 한미 FTA 저지를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문성현 대표, 심상정 의원 등이 주도해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9월 14일(목)에는 한미 FTA 범국본이 개최한 '한미FTA투쟁 전략회의'가 열려서 국민투표 제안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도 이 문제에 대한 토론과 입장 마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모아보았습니다.


이와 관련된 제 의견을 덧붙이면... 


1. 왜 최근 들어 국민투표 문제가 불거지고 있나?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투표’라는 제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한국 헌법에는 헌법개정 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조항과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정권에 들어서 또 하나 정치무대의 중앙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헌법재판소’죠. 이는 한국 정치를 양분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각자가 상대방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헤게모니를 도저히 인정하기 않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래서 양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기댈 수밖에 없고,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대해지면서 막강한 권력기관이 되고 있는 실정이죠.)


어쨌든, 국민투표란 제도를 처음 꺼내 든 자는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했죠. 당시에는 헌법이 규정한 것은 레퍼렌덤(특정 정책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이지 플레비사이트(영토의 변경·병합 또는 새로운 지배자가 그 권력의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표 등 어떤 항구적인 정치 상태를 창출하는 문제와 관련된 국민투표)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의 제안 자체가 위헌이라는 주장이 반대 측에서 강력히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재신임 선언은 ‘국민협박극’이자 ‘인민주의적 정치동원’을 위한 술책이라고 강력히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운동단체는 ‘재신임 철회’를 주장했고, 사회진보연대는 재신임 투표 제안이 철회되든 아니면 정치권에서 합의되어 진행되는 간에 ‘노무현정권 심판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쨌든 당시 논란은 헌법재판소에서 다수 의견으로 ‘대통령의 의사 피력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에 돌입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근거로 위헌소송을 각하하기로 결정하면서 결국 유야무야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무현정권에 대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 후 이라크파병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파병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하려고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도 국민행동 기획단에 참여했습니다만, 기획단은 국민투표 실시를 대표자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려고 했지만, 대표자회의에서 ‘국민투표를 하게 되면 파병찬성안이 더 높게 나올 우려가 있다’, ‘국민의 단 1%만 지지하더라도 운동 주체가 의지를 갖고 실천을 벌이면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상당히 높았고, 전반적인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하여 결국 국민투표 제안이 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파병 그 자체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불허한다”는 헌법 조항에 비추어 볼 때 위헌이므로 이 사실을 강조하며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파병문제에 대한 위헌소송도 제기되었는데 당시 헌법재판소는 "일반 시민에겐 원고자격이 없고 파병 결정은 통치자의 재량행위"라는 이유로 각하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 11월에 전국농민회총연맹이  2004년 11월에 ‘쌀 협상 중단과 국민투표 실시 촉구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면서 사회운동 단체 중에서는 (제가 알기로는)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당시 전농은 ‘민중투표’ 운동도 병행했는데 실제로 각 지역에서 쌀 협상에 대한 민중의 의지를 천명하자는 취지였죠. 그러나 실제 민중투표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에는 조직력이 취약했고,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민투표 제안은 우파 쪽에서도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이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수도이전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국가안위에 관한 가장 비중 있는 사안이며, 국민의 의견이 분열돼 있으므로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한나라당과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며 국민투표 실시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처럼 좌우에서 국민투표 제안이 나오는 것은 노무현정권의 근본적 취약성을 반영하는 것이겠죠. 노무현정권은 뚜렷한 이념과 정책노선, 지지 집단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모호한 이미지와 수사에 근거해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노무현정권이 추진하는 각각의 정책들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뚜렷이 검증된 것이 아닙니다. 주로는 집권세력이 정치게임 논리에 따라 즉흥적이거나 임기응변식으로 각종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책적 성과를 거두거나 지지와 응집력을 얻는 데 근본적 한계를 노정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노무현정권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들고 나온 것은 전형적인 인민주의 정치행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남미에서는 대통령이 뭔가 국면돌파가 필요할 때마다 국민투표를 들고 나오는 사례가 계속 늘고 있나 봅니다. 당연히 대통령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므로, 의제를 선정하고, 국가기구를 활용하고 언론과 미디어를 동원해서 막대한 물량공세를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당연히 집권세력이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겠죠. (물론 항상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콜롬비아에서는 2003년 15개 항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좌파세력이 보이코트 전술을 펼쳤고, 실제로 몇 개 항을 빼곤 필요 투표율 25%를 넘지 못해서 국민투표가 좌절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통령과 행정부에게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고, 사법부가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행사하는 권한이 강화되고 미디어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의회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은 인민주의 정치의 기본적 경향의 하나인 듯합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한나라당도 국민투표라는 인민주의 정치행태에 의존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2.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국민투표 제안은 인민주의를 넘어서는가?


국민투표 전술을 지지하는 입장은 대개 다음과 같은 근거에 기반한 듯합니다.

첫째, ‘국민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국민 스스로 결정한다’는 대의. 현재 국회로 넘어가면 지금까지 국회가 보인 행태로 볼 때 대충 제목만 보고 그냥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실이 명약관화한 현실에서 다른 대안이 필요하며, 결국 국민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 현재 FTA 반대투쟁이 교착국면에 들어선 게 사실이다.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반대투쟁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매개가 필요하다. (FTA 반대를 위한 민중총궐기란 구상은 다소 무매개적이다. 어떤 매개고리, 담론이 필요하다.)

셋째, 현재 정부가 FTA를 극히 비공개적으로 진행하며, 국민들의 알 권리 자체를 침해한다. 심지어 협상이 타결되어도 3년 간 비공개하기로 되어있다. 국민투표를 실시하려면 정보 공개가 불가피하다. 나아가 정보 공개가 즉각 이뤄진다면 얼마나 큰 문제를 안고 있는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며, 당연히 FTA 협상에 대한 대중의 공분을 높일 수밖에 없다.

넷째,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대중적 토론을 활성화할 수 있다. 현재 대선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대중들이 정치토론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민투표는 정치적 공간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섯째,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보면, TV토론 등이 보장되므로 민주노동당이 FTA에 반대하는 운동의 ‘정치적 대표성’을 띠고 명쾌한 정치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이는 반대운동을 결집시키는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투표에 대해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근거는...

첫째, 한국의 국민투표제도는 국민발의제도와 결합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두 가지는 서로 질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우루과이는 물 사유화의 폐해가 너무나 심각해지면서, 25만명 이상의 국민발의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조항을 활용해서, 30만명 이상의 발의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결국 물은 보편적 권리라는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국민발의를 위해 대중적 운동을 펼치고, 대중이 스스로 운동에 참여하고, 대중의 요구가 직접적으로 국민투표안으로 반영되는 조건에 비해, 한국의 국민투표제도는 대통령만이 부의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어떤 왜곡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FTA 특위 의원단과 간담회에서 ‘국민투표 사안이 아니다’라고 밝혔고, 앞으로도 국민투표를 받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국민투표 요구가 매우 높아진다면, 과거 재신임 국민투표 당시 ‘여야가 구체적인 방식을 합의하면 진행할 수 있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정치권에서 논의해보라고 공을 넘긴 후 논의 진행 결과에 따라 지금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현재 한나라당은 작통권 국민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투표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 (물론 정치권 논란 그 자체가 허구적 논쟁으로 비화되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효과를 낳을 수도 있고, 또는 유야무야될 수도 있다.)  어쨌든 여기에는 대통령의 정치 책략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매우 다른 양상으로 국면이 전개될 수 있다. (그때에 이르러서는 국민투표 보이코트 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둘째, 어떤 (직접)민주주의 제도도 사회운동, 대중적-집단적 운동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작동할 수 없다. 현재 FTA 반대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진 후, 정부가 적극적으로 물량공세를 펼치면서 여론 분위기가 점차 역전되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중운동 계획이 입안되고 실행되지 않는다면, 이런 여론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도 없고, 국민투표는 인민주의의 정치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셋째, 현재 국민투표법은 대중운동을 가로막는 제도적 제약이 너무 많다. 운동원의 자격(정당자격이 없는 자, 예를 들어 공무원)이 제한적이고, 옥외집회 등이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미디어를 활용한 정당의 활동을 빼면, 대중운동-대중투쟁을 가로막는 독소조항이 너무 많다.

넷째, 민주노동당에게도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직접 대중을 만나고 대중을 운동에 결합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안을 던지고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투표에 동원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대중적 토대를 확장하려는 계획이 아니다. 이번 제안은 앞으로도 국민투표 제안으로 자주 반복될 수 있고, 이런 정치프로그램에 의존할수록 인민주의 정치행태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등등.... 


어제 열린 한미FTA 전략회의에서도 견해가 상당히 엇갈렸고, 주장도 팽팽히 맞섰습니다. 어제 회의에서는 의견이 종합되지 못했고, 민주노동당에서 “이렇게 반대 의견이 많을 줄 몰랐다. 당에서도 다시 토론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논의가 일단락되었지만, 쉽게 입장이 정리되진 않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작동도 사회운동을 전제로 하므로 따라서 대중운동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얘기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합니다. 또한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탄핵국면에서 국민발의, 국민소환의 필요성을 주장했는데요), 현행 국민투표제도의 문제점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 역시 분명한 듯합니다. 국민발의, 국민소환 등의 제도가 반드시 보완될 필요가 있고, 국민투표법 상 제약은 반드시 폐기되거나 투쟁을 통해 무효화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물론 국민발의 등은 헌법 개정 사항이 아닐까 싶어서, 쉽게 해결책이 나오긴 어려운 것도 분명한 현실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가 함께 인식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여러 위험성이 현실화될 우려도 더 커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일단 지금은 다소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고, 즉각적으로 찬반 입장을 밝히기보다는 참고하거나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도로 의견을 정리해보았습니다만... 사회진보연대에서 더 많은 의견교환이 필요할 듯합니다.


그런데 역시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런 제안이 현재의 FTA 반대투쟁의 교착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전술로 제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FTA 협상에 대한 폭로 국면에 이어 찬반양론이 벌어진 후 운동이 기대했던 것만큼 충분히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는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FTA 국민투표 전술 제안에 대한 토론은 현재 국면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떤 운동계획이 필수적인가를 논의하는 토론과 함께 진행되어야 할 듯합니다.....


자료로 첨부한 것은 지금까지 이 문제에 관해 나온 입장들입니다. 우려나 반대의 의견은 아직 글로 논리정연하게 정리될 것이 없어서 첨부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번 논란이 오히려 생산적 토론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목: 노대통령, 한미FTA는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출처: 대자보 2006/03/30 (http://www.jabo.co.kr)

저자: 우석훈 (경제학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제목: 자본의 공세에 정면돌파하는 정치적 고리로서 국민투표

출처: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11호 2006/05/02 (http://hb.jinbo.net)

저자: 황정규


제목: 민노당 "한미FTA 문제 국민투표로 결정하자" "국회FTA특위는 우리당-한나라당 연합방위군"

출처: 프레시안 2006년 9월 3일

저자: 윤태곤 기자

 FTA국민투표_의견모음.hwp(80.0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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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퇴진 논쟁을 하다보면...

정권퇴진 논쟁을 하다보면... 2006.09.01

 

정권퇴진 논쟁을 하다보면 종종 정권 퇴진이 만고불변의 당연한 이야기고 그래서 이를 틈만나면 슬로화하는 것이냐는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그러다 보면 '문민화 이후 정권 말기(대선 2년 전)만되면 시작'된다느니 같은 의문까지 제기되죠.
정권 퇴진이 주장으로보면 참 간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정권퇴진이 [지배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고양하고, 현 시기 투쟁의 방향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손쉽게 '또?' 하며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현 시기 투쟁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의 한복판에서는 더더욱 말이죠. '퇴진' 주장들을 일일이 찾아 길게 설명을 달아놓은 것은 '정권 말기만 되면 시작'된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회진보연대가 특정한 시기에 '퇴진' 주장을 외쳤던 것은 원칙의 단순 확인이 아니라 해당 시기 이데올로기와 논쟁 지형 속에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어서 입니다.
(참고로 노무현 탄핵으로 정세가 급변할 때 사회진보연대가 제기했던 주장은 '퇴진(/민중탄핵)'이 아니었습니다. "신자유주의 반대/ 노동권 쟁취", "파병철회", "국민발의, 국민소환" 등의 요구들을 전면적으로 제기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세력들의 '개혁적' 이미지가 거짓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폭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5월 4,5일 대추초등학교에 대한 국가권력의 광폭한 폭력이 확인된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폭력 없이 유지될 수 없는 노무현 정권에 파산선고를'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하종근 열사 투쟁에서 어떤 이들은 '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노무현 정권의 퇴진'을 주장한 것입니다. 하반기 전 민중의 총궐기를 주장하면서 어떤 이들은 '평택미군기지 저지투쟁과 한미FTA 투쟁이 결합되어야 한다' 며 구호와 슬로의 나열속에서 일점돌파식 집회를 제안한 반면 어떤 이들은 '노무현 정권 퇴진투쟁이 전선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논점이 되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회귀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에 대한 지지와 동요속에서, 제기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태를 인식해야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정치적 단락을 꾀할 수 있는가입니다. '각성'이라고 표현하든, '새로운 관념'의 형성이라고 표현하든 문제는 사태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의 정치적 단락을 전제하지 않고는 상황의 반전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논쟁이 이 차원에서 붙는다면(이는 아주 세련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현실 가능성, 집권가능성, 구체성 등등 과거 운동권 용어들이 총동원되어서 말이죠.) 저는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관성적으로 퇴진주장에 동의하는 운동세력들의 모험주의적 경향 역시 비판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사실 이 차원에서 보면 현재로서는 매우 부차적입니다.
회원5님께서 혼용하여 지적하고 있는 '퇴진'(주장)만 하면 되냐? 오로지(!) '퇴진' 주장으로 대중운동의 전면적인 혁신, 사회운동의 연대와 단결을 꾀할 수 있냐? 같은 질문은 상당히 다른 차원의 논점입니다. '퇴진'주장이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이는 현 상황에서 (대중의 투쟁 방향으로서, 토론 방향으로서) 긴급한(!) 문제일 뿐입니다. 자기 사안에만 매몰되어 있는 대중운동에게, 자신의 목표만 달성된다고 생각하는 대중운동(평택투쟁이건, FTA투쟁이건, 열사투쟁이건 현시기 모든 투쟁이 이런 경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에게 '노무현 퇴진' 주장이 덧칠해진다고 대중운동의 혁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출현과 연합이라는 과제가 저절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님이 지적한 대로 이와는 결이 다른 더 많은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여성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주장하는 여타의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고민이기도 하죠. 이런 주장이 일반화된 테제로 정리되어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현재는 진행중(!)임이 사실입니다.
현재 대중 이데올로기 지형에서는 노무현 정권의 실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성격은 또한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정하고, 이를 폭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폭력이 어떤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인과하는지를 밝혀내고 이를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노무현 퇴진' 주장은 바로 이 지점을 명확히 하는 정치적 방향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긴급하다고 생각하고요.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board&id=4129&pag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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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계 지금은 예술이 아닌 ‘연예인’ 전성시대

대중음악계 지금은 예술이 아닌 ‘연예인’ 전성시대
대중음악 전성기는? 3인3색 방담
 
 
한겨레 김기태 기자
 
 
» 27면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세대마다, 취향마다 다를 수 있다. 지금의 40, 50대는 70년대 초 포크 음악의 시대를 기억할 것이고, 이른바 386 세대는 조용필과 들국화, 신촌블루스의 80년대를 떠올릴 것이다. 최근 나온 책 〈90년대를 빛낸 명반 50〉의 30대 초반 저자들은 90년대의 음악을 갈무리하며, 이례적으로 이 시기를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로 지목했다. 이 주제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세 명의 음악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만남은 지난 시기 대중음악에 대한 회고와 아울러, 현재의 대중음악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 광화문 대한성공회 교회 앞에서 만난 세 명의 대중음악 전문가. 왼쪽부터 서정민갑, 신현준, 신승렬.
 

신승렬=90년대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황금기로 꼽는 이유는 이때가 음악성으로도 훌륭했던 음악인이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던 거의 유일한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승환, 듀스, 공일오비, 넥스트, 서태지 등이 그런 예다. 70년대에는 산울림, 80년대에 들국화가 있지만, 이들은 단지 예외적인 경우다.

서정민갑=어떤 시기가 황금기라고 할 때에는 객관적이 근거가 없는 한,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만 얘기하는 것뿐이다. 그런 한계를 전제로 하고, 개인적인 취향만을 놓고 본다면 80년대가 가장 음악적인 전성기라고 본다. 그 기준은 음악성이다. 들국화, 부활, 시나위와 어떤 날, 시인과 촌장 등이 활동한 80년대가 음악적인 수준이 가장 높았다.

신현준=음악성도 중요하지만, 음악과 관련된 문화적 가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68년부터 75년 대마초 파동 이전의 음악에 주목한다. 당시 신중현의 음악이나 김민기, 한대수의 포크송은 이전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체계와 맞서 다른 문화를 만들었고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76년부터 96년이 넓게 보아 하나의 시기라고 본다. 이때는 지상파 티브이, 엘피와 테이프,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시대로 요약된다. 이후 96년 ‘에이치오티’와 ‘영턱스클럽’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고 지금까지 지속된다고 본다.

신승렬=90년대 초반과 후반의 대중음악이 많이 다르다는 데 동감한다. 우리가 주로 주목하는 시기는 90년대 초반이다. 92년 이후 사전심의가 실질적으로 철폐된 뒤 가요에 대한 상식이 바뀌었다. 그때 아티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전에 없었던 음악적 다양성을 추구했다. 당시에는 언더그라운드가 거의 없었는데, 오버그라운드에서 다양한 음악적인 취향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했다. 음악이 음악 이상의 다른 구실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태지는 심의와 싸웠고, 듀스 같은 아티스트도 기성세대의 암묵적인 규범과 싸웠다. 그들은 귀고리, 염색에다 힙합바지를 입고 티브이 나와서 반말을 하는 등 견고한 기존의 규범에 저항했다. 당시 젊은 세대는 절대 깨질 수 없을 것 같던 규범이 이들에 의해 깨지는 것을 보고 배웠다.

신현준=다시 생각해 보니 그 시기가 과도기였던 듯한데, 김영삼 정권 시기와 거의 맞물린다. 또 거품 경제의 시기였고, 민주화되었다고 사람들이 느낀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90년대 음악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놀자, 즐기자’였다. 당시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놀던 것 같던 젊은 애들이 티브이에 대거 출연했는데, 그건 나름대로 문화적 충격이 있다. 일본에서 나온 한 논문에서는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회비판하는 아이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승렬=당시 세대가 사회비판하는 대중음악인을 원했다고 생각한다. 유신체제 이후 군부정권 아래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저항해주기를 바랐는데, 그런 희망이 90년대 초반 대중음악인에게 투영되었던 것 같다.

서정민갑=90년대 초만 놓고 보자면 음악적인 경계를 허무는 데 두려움이 없었던 시기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90년대에는 메탈을 들으면서 발라드를 듣는 등 경계를 넘나드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신승렬=동의한다. 당시 젊은 세대는 구획 짓기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80년대에 ‘애들이나 듣던 노래’로 치부되던 나미의 ‘슬픈 인연’이나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90년대가 재발견했던 것도 그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신현준=주류 언론에서 젊은이들의 문화를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 적이 두 번 있다. 70년대 초의 청년문화론과 90년대 초 신세대 문화다. ‘청년문화’는 75년에는 대마초 파동을 계기로 허리가 꺾였다. 신세대 문화는 대형 통신사와 대형 기획사의 마케팅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부분은 좀더 생각할 문제다.

신승렬=90년대 중반 이후 주류 대중음악은 음악적으로 뛰어나지 않다. 훌륭한 가수들은 있지만 훌륭한 예술인은 없다. 90년대 서태지, 듀스, 이승환 등처럼 완벽하게 자신의 음악을 통제했던 예술인이 대중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아이엠에프 이후 변화된 사회 분위기라고 본다. 아이엠에프 이후에 경쟁이 생존을 위한 논리가 되면서 사람들은 음악과 문화의 소비를 경쟁을 위한 장애물로 인식했다. 음악을 주로 소비하는 10, 20대가 옛날에는 ‘바르게 살라’고 배웠는데, 이때부터 ‘이겨라’를 배운다. 이에 따라 젊은 세대가 원하는 음악인의 모습도 바뀐 것 같다. 90년대의 젊은 세대가 ‘저항하는 아이돌’을 원했다면, 이젠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을 기대한다. 기획사들도 그 수요에 맞춰가는 것 같다.

서정민갑=8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음악적인 진지함이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몇몇 댄스 가수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립싱크는 거의 없었고,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대중음악에 대해 서툴렀다. 90년대에는 산업과의 관계 속에서 음악적인 타협이 본격적으로 있었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 대중음악 시장은 대형 기획사의 독과점 시장이 되었다.

신현준=현재 대기업의 음악 산업 진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스케이나 씨제이, 케이티에서 대규모로 투자를 하고 있는데, 거대한 미디어 복합 기업이 되기 위한 수순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면 대기업이 투자를 해서 제도나 환경이 좋아진 부분이 있다고 들었다. 대중 음악계 안에서 대기업과 음악인들이 어떤 권력관계를 만들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서정민갑=정부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한류를 보고, 가수 ‘비’가 미국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대중음악이 소위 잘 나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2000년대의 대중음악이 활력을 찾기 위해서 ‘대중음악진흥위원회’와 같은 기구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리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참가자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서정민갑 대중음악 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신승렬 〈90년대를 빛낸 명반 50〉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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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파괴적’ 금융원조_사타르 카셈

[세계의창] 미국의 ‘파괴적’ 금융원조 / 사타르 카셈 2006-09-11 오후 06:15:49
 
미국은 항상 전세계 사람들에게 미국이 많은 나라에 금융원조를 하는 ‘가장 관대한’ 국가라고 말한다. 통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도주의적 관대함인가, 아니면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인가?


팔레스타인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곤 하는 미국의 실리적 금융원조 정책의 사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된 1994년 미국은 유럽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대한 금융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도움이 팔레스타인의 양보에 대한 대가임은 명백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특히 안보문제에서 이스라엘과 협력하기로 결정했고,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란 낙인이 찍힌 세력들과 싸우기로 했다. 미국과 그 동맹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의 요구를 따르고자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 한 달 단위로 돈을 주기로 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에 금융원조를 계속 제공하면서 자치정부의 경제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첫째,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경제를 압도적인 이스라엘 경제에 병합시키는 자유시장 정책을 강요했다. 둘째, 팔레스타인의 제품 생산을 중단시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봉급에 의존해 살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미국의 국제 경제정책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강요한 조건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팔레스타인에선 경제적 헤게모니를 세계은행이 아닌 이스라엘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미국은 금융원조를 통한 식민지화 구상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은 유럽 나라들과 함께,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동의하지 않고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스라엘에 양보했던 것들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면 자치정부에 대한 금융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하마스는 자신들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뜻을 배신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언제나 민주주의가 인간 진보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해 온 미국이 팔레스타인 선거 결과를 극도로 불쾌하게 여긴 것은 윤리적으로 놀라운 이분법이다. 중동의 모든 이들에게 미국이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 맞게 재단된 민주주의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윤리·도덕은 미국이 하마스 정부 붕괴를 희망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금융제재 상황에 몰아넣기로 결정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협력하면서 유럽과 꼭두각시 아랍정권들, 과거 팔레스타인 여당인 파타에 속한 일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팔레스타인에 지점을 둔 아랍은행들을 동원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공무원들은 7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땀이 아닌, 외국의 경제원조에 의존해 살았던 것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팔레스타인에서는 파업이 벌어지고, 공무원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하마스가 미국의 압박을 받는다는 것은 알지만, 배고픔을 해결할 대책은 내놔야 한다고 요구한다. 맞는 주장이지만 파산 상태인 정부가 그들에게 돈을 줄 가능성은 없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스라엘, 미국과 협력하는 반하마스 세력이 이 파업을 선동했다고 지적한다. 이들 세력의 바람대로 하마스 정부가 사라진다면 봉급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팔레스타인의 굴욕적인 대외 의존의 상징인 경제문제는 여전할 것이다.

 

미국의 ‘관대함’은 윤리적이지 않다. 아랍권에서 미국의 접근법은 전형적이며, 반드시 반작용을 일으킨다. 중동의 누구도 이유 없이 미국과 싸우려고 나서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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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폭력의 악순환_사타르 카셈

[세계의창] 미국의 ‘파괴적’ 금융원조 / 사타르 카셈   한겨레 | 2006.09.11 18:26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이 2주 넘게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일부러 다리와 발전소 등 기반시설을 파괴했고, 80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전기와 물이 끊긴 채 살아가고 있다. 집과 농장은 파괴됐다. 여성과 어린이까지 50여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숨졌고 300명 이상이 다쳤다. 가자지구 전체가 포위됐고, 인도적 원조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가자지구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뒤 팔레스타인에 남은 세 조각의 땅 가운데 하나다. 약 140만명이 살고 있는데, 주민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 집과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난민들이다. 이때부터 500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중동 곳곳의 난민촌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67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나라들에 압승을 거두고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땅 세 조각도 점령했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하며 권리회복 운동을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이들에게 ‘테러리스트’ 딱지를 붙였다.

 

몇 해 전부터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순교공격’으로 부르는 자살폭탄 공격을 시작했고, 사정거리 10㎞ 정도로 정확도가 떨어지는 원시적 로켓도 만들어냈다. 이스라엘은 이를 안보 위협으로 간주했다. 안보는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였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박해당하면서,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조국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조국을 건설할 땅으로 선택했다. 영국 등 서방은 우간다를 대체지로 제안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오니스트들의 선택을 따랐다. 유대인들은 안보와 평화를 얻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안보 위협에 민감하다. 이스라엘은 적이 공격능력을 갖추기 전에 적군을 파괴하라는 선제공격론을 실천해 왔고, 반드시 이스라엘 인구 밀집지역과 떨어진 적군의 땅에서 전쟁을 벌이라는 원칙도 고수했다.

 

첨단 군사장비를 동원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최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이스라엘 군 초소를 공격해 병사 3명을 죽이고 1명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병사를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8천명이 넘는 수감자들과 교환하기를 희망한다.

 

가자지구 공격에 나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는 있지만, 사로잡힌 병사도 석방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번 공격으로 자국 병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병사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작전도 매우 위험한 형편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병사의 생환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국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게 될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력에 굴복할 것인가? 지난 몇 해 동안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력에 여러차례 굴복했고, ‘배신자’로 몰릴 것을 알면서도 이스라엘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돼 있고 희생도 감수하려 하는 새 하마스 정부는 과거의 파타당 정부와는 다르다.

 

이스라엘이 병사를 구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팔레스타인 수감자와 병사를 교환하는 협상에 나설 것이다. 이스라엘이 병사가 갇힌 장소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면 병사의 운명은 끝이 날 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중공세를 계속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팔레스타인 장관과 의원들을 붙잡았고, 총리를 비롯해 하마스 정치 지도자 암살에 나설 가능성도 높다.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며,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사타르 카셈 팔레스타인 나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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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라빈스키 1965년 실황

"음악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할까? 음악은 인간의 1차적인 필요물에 속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음악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을 저버리는 일이다. 나는 음악이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힘을 굳게 믿고 있다." -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의 1965년 모스크바 음악원 그랜드 홀 연주 실황 

 

들어보시라. 저 일사분란함, 견고함, 그리고 맹렬함을

 

 

글링카;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
Overture to The Opera "Ruslan and Lyudmila"

 

Evgeni Mravinsky:Leningrad Philharmonic Symphony Orchestra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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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006년, 새벽이 멈춘 곳

 1993년, 2006년, 새벽이 멈춘 곳

 

 

 

새벽 - 겨울 그 가지 끝에서

<사진, 영상 : 컬쳐뉴스>

 

 

0.

 

2人舞 - 러시아에 관한 명상 - 두 노동자 이야기

 

남자는 27세의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다. 여자는 24세. 중소기업 노조위원장. 이 둘은 서로 사랑하다가, 격렬하게 헤어졌다. 삶과 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로. 그중 어느 쪽이 더 큰 이유였는지에 대해서도 둘은 견해가 달랐다.
그 후 1991년 5월 정국에서 남한 공개운동권 대패, 소련의 정치권력 와해 및 남한 좌파 분해를 겪으면서, 둘은 그것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며 시들한 나날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게 2년이 지난 1992년 봄 어느 날, 둘은 각자 집회에 그냥 구경삼아 나간다. 대회는 역시 시들하게 끝나 거리가 텅 비워지고 차량들이 다시 소통되고 횡단보도로 사람들이 건너가기 시작하는데, 그 둘이 이 쪽 저 쪽 보도에 남아 눈이 마주친다.
이 작품은 그 뒤 50분간이다.

 

김정환, 『하나의 2人舞와 세 개의 1人舞』 중에서

 


1.

 

『노래모임새벽콘서트, 2006년 4월 28일-29일, 백암아트홀』 1993년 겨울 학전소극장에서 그들을 지켜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13년만이다. 공연 팜플렛을 펴서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난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랑 그것은」. 난 이 노래가 1993년 새벽의 마지막 공연 『러시아에 관한 명상』의 마지막 곡임을 직감했고, 악보를 펼쳐보면서 그 노래가 맞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공연장에 들어갔다.
넓게 펼쳐진 무대. 왼쪽으로는 건반악기들, 가운데는 기타들, 오른쪽에는 여러 타악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천장에서 내려온 낮게 설치된 세련된 조명이 이들을 비추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박수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몇 사람들은 낯이 익었다. <새벽> 그들이 맞았다. 마이크에 손이 가고, 기타 연주음이 들려왔다. 노랫소리가 들렸다. <새벽> 그들이 맞았다.

 


2.

 

1990년대 새로운 ‘창작’ 기법을 모색하던 시절 만들었던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떠나는 그대를 위하여」, 「거리」, 「아름다운 생애」, 「먼 훗날」, 「이별」, 그리고 「사랑 그것은」. 전체 선곡에서 고작 1/3 가량만이 예전에 만들어진 노래였고, 그나마 이 곡들도 관객들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이날 공연에서 <새벽>을 기억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과거의 흔적을 찾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노래는 딱 여기까지였다. 아, 앵콜곡으로 불린 노래 「벗이여 해방이 온다」도 있었다. 그래, 그날은 김세진·이재호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세련된 음색, 음향, 그리고 조명. 하지만 그들의 솜씨가 예전 그대로는 아니었다. 반주호흡이 안정되지도 않은데다 눈에 띠게 실수하기도 했다. 윤선애와 임정현을 제외한 가수들의 목소리에 긴장한 흔적이 역력했다. 13년 동안 떨어져 지낸 세월을 단번에 감출 수는 없었다. 음악활동을 이어온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프로그래머도 있었고, 배우도 있었고, 학원 강사도 있었고, 회사원도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만이라도 연습하면서 그들은 그 먼 시간을 줄이려 애썼을 터였다. 하지만 1993년 그들이 해산을 결심했을 때, 서로에게 남겨진 상처는 그리 간단히 치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노동조합 간부들과 이른바 ‘현장’ 활동가들은 <새벽>보다 <노동자노래단>을 더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의 노래를 지식인의 관념적 유희에 비유했다. <새벽>의 노래에는 <노동자노래단>의 「파업가」, 「단결투쟁가」에 비할 만큼 노동‘현장’에서 사랑 받는 ‘투쟁가’가 없었다. 「철의 기지」, 「다시 또 다시」, 「해방을 향한 진군」,「선언」 같은 노래들이 있었지만, ‘따라 부르기’가 쉬운 노래도 아니었고, 김호철의 직설적인 표현과 비교해도 시적 질감이 월등히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끝내 살리라」,「고백」,「민들레처럼」, 「꽃다지」처럼 대중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포장마차」, 「1노2김가」, 「진짜노동자 3」 같은 트롯트-대중가요풍의 일상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민중가요의 가장 유력한 유통경로였던) 대학생/노동조합 노래패들이 <새벽>의 대다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주실력, 노래실력이 필요했다는 점이었다.
5월 강경대열사투쟁의 패배,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대중성 확보에 실패한 <새벽>은 모든 것을 재평가해야 했다. 그들은 답보상태에 빠진 노래 ‘창작’법을 혁신하고자 했다. 두 차례에 걸친 『작은 음악회』는 이를 모색하기 위한 실험음악회였다. 하지만 당시는 ‘창작’법 혁신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포기하고 있었고, 또 ‘새로운 민중문화의 건설’이라는 문제의식도 포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민중문화의 건설’에 내재된 ‘대중문화 비판’이라는 문제의식도 대중문화와의 접합지점을 찾으려 애썼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무용지물이었다. 모든 것이 포기되었다. <새벽>의 마지막 공연 『러시아에 관한 명상』의 ‘실패’는 예정된 길이었다.

 


4.

 

이번에 12곡이 새롭게 발표되었다. 대중의 예술적 역량을 한 단계 높여야 함을 강조해 왔던 <새벽>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 ‘추억’에 호소해서 박수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당신은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가. <새벽>이라면 당연히….
하지만 이 곡들이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곡들이 1993년 당시 ‘창작’ 기준을 따랐다. 오늘 <새벽>이 노래의 재료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라곤 ‘1993년, 당시의 기억’과 ‘마흔의 삶’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상실’, ‘그리움’, ‘어루만짐’, 그리고 여기저기를 자주 빈번히 가로지르는 ‘사랑’. 한 단계 한 단계 내려갔다 한 단계 한 단계 다시 오르는 화성진행들(「가을」, 「겨울 그 가지 끝에서」, 「귀천」, 「불면증」)과 읊조림 (「사랑노래2」). 어떤 곡들은 일상적인 감정을 다루는데 있어서나 음악형식에 있어서 1993년 『작은 음악회』에 못 미쳤고(「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비밀이야기」,「기억 속에 가리워진 노래」,「내 이름을 불러봐」) 또 어떤 곡들은 연계 고리를 찾지 못한 채 비껴 있었다(「노래」,「꽃잎」).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을 결성했던 당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갈등적이면서도 폭발을 예비하는 것 같은 화성진행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3년, 그것은 정지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단된 <새벽>, ― 새로운 노래문화의 건설 ― 의 시간이기도 하다.

 


5.

 

어쩌면 이는 우리가 답보상태에 빠진 만큼의 시간일 지도 모른다. ‘선전선동’, ‘생활공동체’의 틀에 노래를 가두려는 시도를 비판하며 ‘새로운 노래문화의 건설’이라는 테제를 제기해온 노래운동집단은 사실상 <새벽>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많은 곡들과 15집에 이르는 앨범, 예술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벌인 논쟁들. 이 모든 기록은 오늘 <새벽>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오늘 <새벽>이 멈춘 곳’에 시선을 둘 것을 종용하고 있다.

 

 

2006년 『노래모임새벽콘서트』에서 「사랑 그것은」이 절정을 향해 치닫자 모든 조명들이 일제히 관객을 향해 비추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새벽>과 마주하고 있는 ‘당신’이야말로 이 노래의 주인공이라는 듯 말이다. 이 환상적인 조명 연출 덕에 무대의 배우들과 관객들은 시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연인처럼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다.


1993년 『러시아에 관한 명상』에서 「러시아에 관한 명상 4」가 절정을 향해 치닫자 무대 위의 모든 배우들은 서로들 다른 먼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새벽>은 ‘모두 각각’ 무언가를 응시했다. 그리고 관객들도 ‘모두 각각’ 무언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1993년과 2006년 50분간의 2人舞, 그 길고도 다른 시간.

 

 

 

 

- 월간 『사회운동』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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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들리나요?_서정민갑

혹시, 내가 들리나요?
 [공연리뷰] 노래모임 새벽 콘서트(동영상)
이메일보내기 서정민갑 _ 대중음악평론가
 
 
지난 4월 28, 29일 이틀동안 열린 '새벽' 콘서트 모습
▲ 지난 4월 28, 29일 이틀동안 열린 '새벽' 콘서트 모습

조금 일찍 공연장에 도착해서 콘서트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공연이 그저 노래모임 새벽만의 콘서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공연장 로비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 30대 초반 이하인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래모임 새벽이 활동을 중단하던 1993년에는 빛나는 청년이었을 사람들은 이제 머리가 빠지고 배가 나온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공연장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한켠에는 자신들을 닮은 아이들이 있었고 또 그들은 공연장 로비에서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환한 웃음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이날의 공연은 노래모임 새벽의 콘서트였으며 또한 노래모임 새벽과 함께 청춘을 투신했던 사람들의 13년만의 동창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노래모임 새벽의 공연을 찾은 이들에게 노래모임 새벽의 공연은 과거로의 초대이며 현재의 자신과 자신들의 세대에 대한 자기 응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노래모임 새벽은 이날 공연에서 그들이 함께 어깨를 걸고 불렀던 노래들안에 묻어두었던 수많은 사연들을 다시 끄집어 내지는 않았다. 앵콜곡까지 모두 스무곡 정도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노래모임 새벽은 지난날의 기억들을 끄집어 내기보다는 현재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한시간 반 가량의 콘서트에서 선보였던 것은 류형수와 이현관, 황란주, 송현주, 김현종, 성임숙 등 새벽의 멤버들이 만든 새 노래들이었다. 4곡의 옛노래들이 양념처럼 끼어들기도 했지만 그도 널리 알려진 노래는 아니었다. 윤선애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벗이여 해방이 온다>만이 앵콜곡으로 선보였을 뿐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노래모임 새벽이 단순히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거나 복기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080 콘서트처럼 추억의 감상으로 손쉽게 감동을 호출하지는 않겠다는 고집에서 허투루 삶을 살아오지 않은 이들의 자존심같은 것이 배어나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역시 세월을 속이기는 어려웠다. 음악활동을 떠난지 오래된 이들의 목소리는 음이 잘 맞지 않았고 오랜만에 무대에 선 이들은 13년전에 그러했듯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굳어 있었다. 음향에서 가끔 파울링이 생기기도 했고 조명은 밋밋했으며 특별한 흐름이 없이 노래만으로 이어져가는 공연은 콘서트라기보다는 오히려 창작발표회에 가까워 공연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열리는 공연임에도 지난 13년간의 여백에 대한 이야기들을 생략해버린 것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새벽 - 겨울 그 가지 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모임 새벽의 90분 콘서트는 그다지 실망스럽거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들이 자신의 현재를 가감없이 드러내보였으며 또한 공연에서 연주된 레파토리들이 그 진정성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던져 투쟁하며 혁명을 꿈꾸었던 날들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도 이들은 결코 멈춰있지 않았다. ‘흐르는 세월에 역류한 젊음의 피땀이 지나간 노을로 빛’난 지금 각각의 창작자들이 선보인 새 노래들은 모두 나름의 무게로 충분히 묵직했다. 새 노래들은 모두 일정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개별 창작자들의 성향을 가감없이 드러냄으로써 새벽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류형수가 선보인 곡들은 섬세하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단정함으로 새벽에 몸담았던 이들의 오늘을 설득력있게 대변해냈다. <가을>, <겨울 그 가지끝에서>, <내 이름을 불러봐> 같은 곡들에서 그는 흐르는 세월속에서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과거로부터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모습을 잘 표현해냈다.

다만 이날 공연에서 선보인 노래들 가운데 몇몇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 지나친 감상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들이 살아온 과거가 녹록치 않았음은 모르는바 아니지만 후일담을 뛰어넘어 노래모임 새벽이 가지고 있었던 고민들을 현재로 끌어온 노래들이 많지 않았음은 아쉬운 지점이었다. 새 노래들의 대부분이 김정환의 시를 빌리고 있었는데 여전히 일정한 관념성을 가진 김정환의 시 역시 새벽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현실과 능란하고 치열하게 조응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2006년의 노래모임 새벽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혹시, 내가 들리나요?’라고 정한 공연 제목에 값한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 민중들의 곁에서 이제는 생활인의 일상으로 돌아간 이들의 모습에서 386세대의 과거와 현재를 발견할 수 있었기에 앞으로도 이러한 창작발표회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계속 이어간다면 새벽만의 또다른 활동이 이어질 수 있지않을까 싶다.

새벽-떠나는 그대를 위하여

새벽의 멤버들은 앞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갈지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최근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노래를찾는사람들처럼 새벽이 활동을 계속한다면 그만큼 민중가요의 가능성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행여 뛰어난 작품이 나오지 않고 노래 실력이 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자신의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생애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것’이며 ‘영원 불멸한 생애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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