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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럽헌법 논쟁'을 주목하여야 하는가? | 김덕민

 
 왜 '유럽헌법 논쟁'을 주목하여야 하는가?
 [주장]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끝'과 대안 찾기

2005년 09월 05일  김덕민 기자 E-mail이메일 보내기

지난 5월 29일과 6월 1일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민중들은 유럽연합 헌법 조약에 대한 비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각각 54.9%와 61.6%로 비준을 부결시켰다. 원래 유럽헌법은 가입국 모두의 만장일치로 비준되어야만 하므로 사실상 앞으로 유럽연합의 정치 통합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국내언론에서도 이 과정을 소개하였는데, 대체로 대안세계화(alterglobalization) 세력으로 대표되는 좌파세력과 극우세력들에 의한 구유럽으로 회귀, 프랑스 국익에 대한 침해 따른 반발 등으로 소개하였다.1)  이 관점은 프랑스의 유럽연합 지지자들과 같다. 이러한 과정은 이른바 주류적 시각으로 의사결정에 있어, 무지한 대중과 지식을 지닌 엘리트들을 구분하는 관점이며 현존하는 갈등에 대한 회피이고 미봉책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2) 과연 그들은 무엇을 반대하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논쟁에 주목하여야 하는가?3)

이 논쟁의 숨겨진 논점은 바로 '공산주의 이후'라는 쟁점이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이후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은 동쪽의 공산주의의 몰락이 바로 '새로운 통합 (자유) 유럽'의 초석이 되었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유럽통합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이라 부른다. 사실상 정치통합의 기초를 마련하는 유럽헌법조약은 경제통합의 다음 과정으로 유럽통합의 마지막 단계라 볼 수 있다. 최근에 유럽통합 과정이 자유(시장) 유럽(또는 신자유주의적)4) 유럽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유럽통합은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이 개시되기 이전부터 제기된 것으로 그 첫번째 단계는 1951년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CSC는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이탈리아의 6개국 사이의 [석탄/철강] 시장을 통합하는 것이었다.5) 1957년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구축하기 위한 이른바 '로마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것은 ECSC의 확장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 조약에서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유럽의회(European Assembly), 유럽재판소(the Court of Justice), 경제사회 위원회(Economic and Social Committee)가 탄생된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지역적 통합은 비슷한 수준의 발전정도를 가진 나라들 사이의 지역적 통합으로 더 거대한 시장이 주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과 특화(specialization)6) 를 가능케 한다. 1970년대 유럽은 통화협력을 집행시켰고, 1979년 유럽통화시스템(EMU)가 탄생하였으며, 유럽통화단위(ECU)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0년대와 80년대, 유럽공동체에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합류하였다. 이후 1987년 단일유럽의정서(Single European Act)이 체결되는데, 이는 완전한 "공동시장(Common market)"의 수립을 위한 것이었다.

이 단일유럽의정서에서 금융서비스의 자유와 지역 내의 자본의 자유로운 유통이라는 개념이 크게 확장된다. 즉 유럽통합의 과정이 80년대에 지속되고 있던 '신자유주의'와 통합되어 나타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7)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유럽통합은 1992년 마스트리히트(Maarstricht)에서 체결된 '유럽연합에 관한 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8)에서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른바 '수렴기준'(convergence criteria)라는 것인데, '하나의 시장', 그리고 '하나의 통화'라는 기치 아래 재정적자와 정부부채를 각각 GDP의 3%와 60%이내로 묶는 것이다.9) 이러한 것은 고소득 계층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재정부문 구조개혁(fiscal restructuring)과 국가역할을 축소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도구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유럽집행위원회의 광범위 경제정책 지침(Broad Economic Policy Guideline: BEPG)에 의해 재부과되는데, 그 핵심은 '화폐정책, 예산정책, 그리고 임금증가'는 항상 단기에서 기업과 소비자들 사이의 신뢰 강화의 요구와 가격 안정성[물가안정](price stability)과 양립하여야 한다는데 있다. 여기서 가격 안정성은 조세감면, 금융시장 자유화, 노동시장의 탈규제, 공적 부과방식 체계(public pay-as-you-go scheme)에서 사적 자본시장 적립 방식(privately funded capital-market scheme)의 연금체계 개혁으로 보충된다.10)

문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유럽의 경제전체적 퍼포먼스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추산한 것에 따르면, 유럽지역의 GDP 성장률은 1991-2001년에 연간 평균성장률 2.1%에서 2003년에는 0.4%까지 하락했다는 것이며, 투자성장률(국내총고정자본형성)은 2.0%에서 2002년에는 -2.6%까지 하락했다. SGP에 의해 부과되는 재정적자 범위 또한 지켜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회원국 정부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국제적 경쟁압력과 세계경제의 침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유럽통합을 대표하는 두 나라인 독일과 프랑스는 독일의 경우, 2003년 재정적자가 4.2%에 이르렀고 프랑스 또한 2003년 동일한 재정적자를 기록했다.11)

유럽헌법은 난항을 겪는가?

현재 유럽헌법조약은 왜 난항을 겪는가? 유럽헌법조약을 둘러싼 수많은 난해한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역시 정치의 진실은 '경제'에 있다. 계급적 편향이 분명한 신자유주의적 유럽통합은 유럽의 대중들에게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정책 결정에서 자신들이 배제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이슈이다.

유럽헌법조약이 내세우는 여러 권리들에 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유럽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적 유럽통합의 연장선상에 있다. 도미니크 플리옹에 따르면 유럽헌법조약은 이례적인(anomalie) 것인데 경제정책에 대한 조항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구공산권 국가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일이다.12)

앞서 이야기된 BEPG는 헌법조약의 Ⅲ-185에 재등장한다.13)  딘 베이커에 의하면 결국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헌법부결을 가지고 온 것은 유럽중앙은행의 신자유주의적 방식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은 가격안정성을 유지시키면서, '성장을 지속시키려면, 사회보장을 축소시키라'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유럽인은 자신들이 국가 내에서 이룩한 사회보장체계가 유럽헌법조약에 의해 훼손될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인식한 것이다.14) 또한 Ⅲ-184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수렴기준'에 대한 논의가 재등장하는데, 그것은 유럽집행위원회가 회원국의 예산상황과 정부부채를 감시한다. 여전히 유럽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역할 이상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유럽헌법조약은 이른바 '노동에 종사할 권리'(right to engage in work) 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948년 UN인권선언에서 규정한 '노동에 대한 권리'(right to work)보다 후퇴한 조항으로 사회적 권리가 '자유경쟁'에 종속되는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15) 

즉 Ⅱ-75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노동의 종사할 권리와 자유롭게 선택되거나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직업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Ⅱ-90에는 '모든 노동자는 부당한 해고(unjustified dismissal)에 대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헌법조약은 1948년 UN의 세계인권선언에 비하여 명확히 후퇴한 조항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3조 1항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모든 사람은 노동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자유로운 직업 선택(free choice of employment), 실업에 대해 보호받으며, 노동에 있어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16)

유럽헌법조약 반대의 의미

유럽헌법조약 반대는 우파들의 외국인 혐오증 등에서 비롯된 측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헌법조약에 대한 반대는 우선적으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한 대중적 거부로 보아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연원은 자유주의적 정치와 민족국가의 쇠퇴에 그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유럽연합이 약속하는 사회적 권리, 미국적 세계화로부터 유럽의 자율권 등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다.

결국 유럽헌법이 사회적 민족국가가 이루어놓은 권리조차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반대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구유럽으로의 회귀하려는 퇴행적 자세라 볼 수 없다. 초민족적 권리는 이미 민족적 권리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함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한 반대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갈등의 장이 펼쳐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유럽을 건설하는 과정이 바로 이 갈등의 장 속에서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갈등의 회피나 자유주의적 봉합은 오히려 진정한 민주적 정치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또한 그 무기력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과연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 유럽연합조약에 대한 반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준다. 그리고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갈등 그 자체에 있으며, 대안적 정치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봉합하는 데 있지 않다.

[각주]

* 이 칼럼은 유럽연합과 헌법조약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과의 토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유럽통합과 유럽헌법조약에 대한 세미나 과정에서 여러 조언을 해준 송종운, 박준우(이상 시민단체 활동가)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이 글이 가지고 있을 오류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필자에게만 있다.

 1. 이 과정에서 국민투표에 대한 찬성운동과 반대운동,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운동은 집권당인 인민운동 연합(UMP)과 사회당의 일부와 ‘피가로’과 ‘르 몽드’, ‘리베라시옹’ 등을 위시한 대다수의 언론들이었다. 반대의 편에는 극우파인 르펜의 국민전선(FN), 사회당의 다른 분파, 프랑스 공산당(PCF),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주도하는 ATTAC(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추진협의회)등이 있다. 그리고 이 헌법 조약을 둘러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지식인들(안토니오 네그리, 에티엔 발리바르, 다니엘 벤사이드 등) 사이의 논쟁 또한 주목할만한 하다. 이에 대해서는 『자율평론』, 13호를 참조.
 
2. 이러한 쟁점은 많은 논쟁에서 드러낸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논쟁에서 대중은 일종의 무지자 또는 자기이익 추구를 하는 인간으로 모형화 되어있다. 문제는 엘리트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가 감축될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엘리트/대중은 물론이고, 인종적 차이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3. 유럽헌법 논쟁에 대한 정치이념적 갈등과 쟁점에 대한 논의는 강국, 「유럽헌법조약 부결과 정치이념논쟁」, 『월간 사회운동』,7/8월호, 2005을 참조하라. 본 칼럼은 위 글의 관점에 거의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글의 대부분은 E. Balibar, “Sur la ‘constitution’ de l’Europe Crise et Virtualiés”, 2004.  http://www.passant-ordinaire.com/revue/49-635.asp. 에 기초하고 있다.

4. 여기서 신자유주의라 함은  80년대 초반부터 세계 경제에 부과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무역(국제무역의 자유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자유 시장의 형성, 뿐만 아니라 화폐(monetary)와 금융 메커니즘의 자유화를 뜻한다.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플리옹은 유럽연합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한 사례라 단언한다. G. Duménil and D. Plihon, “Liberalizing Trade and Finance, The Example of European Union”, ATTAC FRANCE, 2004. 신자유주의가 문제인 것은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유럽에 있어 1980년대 초반 ‘보수당 정권’에 의해 시행된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성장을 다시 달성하리라는 약속 하에서 그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현재 유럽은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으며, 이윤율과 이윤몫(profit share)의 상당한 회복에도 불구하고 투자율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J. Milios, “European Integration as a Vehicle of Neoliberal Hegemony”, Neo-liberalism: Critical Reader, Pluto Press, 2005.

5.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 1981년과 1986년에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1995년에는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이 가입하였다. 그 뒤 2004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키프로스, 몰타 등이 가입함으로써, 총 25개 회원국을 보유하게 되었다.
 
6. 이러한 점은 경제통합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유럽통합의 사례에서 볼 것처럼 이것은 자동적인 보호장치는 아니다. G. Duménil and D. Plihon, ibid, p.5, 참조.

7. G. Duménil and D. Plihon, ibid, pp.2-5, 참조.

8. 이 조약은 경제통합을 넘어 정치통합으로 나아갈 것을 그 목표로 한다. 더 이상 유럽경제공동체가 아니라 유럽 연합이며, 이러한 과정이 진행될수록 회원국간의 거시경제정책의 조정의 필요성, 교육, 사회보장, 연구개발(R&D), 환경에 관한 정책들의 조정이 결정적으로 된다. 이러한 과정의 산물이 우리가 쟁점으로 다루고 있는 유럽헌법조약이다.
 
9. 이외에 유럽통합에 있어 신자유주의적 관점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1996-97년에 제정된 안정성과 성장 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 SGP)이 있다. 물론 우리가 다루고 유럽헌법조약도 마찬가지이다. J. Milos, ibid, p.209, 참조.

10. J. Milos, ibid, p.210, 참조.

11.  J. Milos, ibid, pp. 210-11, 참조.

12. D. Plihon, Inscire dans le traité constitutionnel européen les régles économiques présente un reel danger, ATTAC FRANCE, 2005. http://www.france.attac.org/a4728, 참조.

13. D. Plihon, ibid, 참조. Ⅲ-185는 다음과 같다. 제1항 유럽중앙은행체계의 우선적 목적은 가격안정성[물가안정]을 유지하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에 대한 편견없이, 유럽중앙은행체계는 Ⅰ-3에 쓰여있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유럽]연합의 일반적인 경제정책을 지원할 것이다.[이하 생략] Ⅰ-3 제3항의 내용은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soial market economy)와 완전고용, 지속가능한 발전, 균형적 성장 등에 대한 내용이다. 역시 이 조항에서 볼 수 있듯이 성장과 발전은 가격안정성에 종속되어있다. 유럽헌법전문은 Eurlex, http://europa.eu.int/eur-lex/lex/en/index.htm 에서 볼 수 있다.

14. 딘 베이커, 「복지국가 외면한 유럽헌법」, 한겨례신문, 2005년 6월 23일,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6/001000000200506292011228.html,.

15. 이 부분은 프랑스어로는 ‘droit de travailler’로 되어있다. 인권선언은 ‘droit au travail’이다. 1948년 UN 인권선언 전문은 http://www.unhchr.ch/udhr/index.htm 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  J. Milos, ibid, p.214, 참조.

17. 반대 투표자의 35%가 반대의 주요 이유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들었다. 강국, ibid, 참조, I. Wallerstein, "The Ambiguous French 'No' to the European Constitution", Commentary No. 163, June 15, 2005, http://fbc.binghamton.edu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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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 류한수

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진보평론  제16호
류한수

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류한수∙영국 University of Essex 박사수료/ 역사학과



머리말

이 글의 목적은 지난 세기, 즉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의 연대기를 조망해보는 데 있다. 너무도 진부한 표현이지만, 인류가 생긴 이래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20세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 세기 동안 200여 회에 이르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20세기의 전쟁과 이전의 전쟁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선 전투 기술의 측면에서 보자면, 오와 열을 갖춘 대형 간의 격돌이라는 전쟁의 성격이 옅어졌다. 개인 화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고 다른 무엇보다도 대포가 가장 중요한 살상 무기로 활용되면서 보조를 맞추며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는 전투 대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유사 이래 가장 뛰어난 돌파력을 자랑해 오던 기마 부대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도 전쟁에 총동원되어 무기의 살상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무연 화약, 탄창식 소총, 후장식 대포, 기관총, 가시철사가 20세기에 전쟁터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전투원의 사상 비율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과학 기술이 전쟁에 응용됨으로써 전투의 참상이 가중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전쟁이 바로 1905년의 러시아-일본 전쟁이다. 이 전쟁의 독특성은 단지 유럽 군대가 아시아 군대에게 패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러시아-일본 전쟁은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가 병으로 인한 사상자 수를 넘은 최초의 전쟁이었다. 과학 기술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무기, 즉 전투기, 폭격기, 탱크 등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전쟁에 응용된 과학 기술의 결과는 살상 효과의 극대화에 그치지 않았다.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자연의 근본 비밀을 풀어낸 물리학이 전쟁에 동원됨으로써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궁극적인 파괴 무기인 핵폭탄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전쟁에서 두드러지는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전쟁과 민간인의 관계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화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전쟁의 참상은 기본적으로 전선에 국한되었고 전투 행위의 직접적 피해가 후방에 미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군대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기구와 국민경제 전체가 동원되는 총력전(total war)에서는 비전투원, 즉 민간인도 합법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총력전에서 적에게 승리를 거두려면 적군뿐만 아니라 적국의 전쟁 수행 기구(war machine)도 무너뜨려야만 하기 때문에 전쟁 수행 노력(war effort)에 동원되는 민간인은 무기를 들지 않더라도 살상 대상이었다.
물론 20세기에 일어난 전쟁은 지역에 따라 전개 양상과 성격이 달랐고 빈도와 분포가 고르지 않았다.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는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았지만, 유라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만 1억에 가까운 전투원이 동원되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20세기 전쟁의 연대기를 유럽, 아시아, 사하라(Sahara) 이남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것이다. 다만 서남아시아는 전쟁과 전쟁에 준하는 무력 충돌이 워낙 잦은 권역이므로 따로 떼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는 열강의 군대가 장기간에 걸쳐 대결을 벌이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대체로 평온이 유지되었다. 1911-12년에 이탈리아가, 1912-13년에 발칸반도 국가들이 나날이 쇠퇴하는 투르크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 이외에는 전쟁이 없었다. 그러나 한 세기 동안의 평화는 1914년 산산이 부서졌다. 세계 패권국가로 발돋움하려는 독일과 기존의 패권 국가인 영국, 프랑스 사이에 조성된 긴장이 20세기에 들어서 고조되던 가운데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의 후원을 받는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충돌하면서 도화선에 불이 붙어 결국 1914년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1914년 6월 28일에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보스니아(Bosnia)의 사라예보(Sarajebo)에서 반(反) 오스트리아 비밀결사의 조직원인 세르비아 인 청년에게 암살되었다.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세르비아의 후견 국가인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곧바로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단기전을 예상한 각국 국민들의 환호성 속에 시작된 ‘대전쟁’(Great War), 즉 제1차 세계대전은 얼마 되지 않아 끝이 보이지 않는 대량 살육전으로 바뀌었다. 양면 전선을 피하려는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먼저 승리를 거둔 뒤에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 군을 제압한다는 슐리펜(Schlieffen)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제압하고 프랑스로 진격해서 파리에 접근했다. 8월말에 독일군이 타넨베르크(Tannenberg)에서 러시아의 대군을 격파해서 동부 전선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나, 9월초에 마른(Marne) 회전에서 영국-프랑스군이 독일군을 밀어냄으로써 독일의 속전속결 계획에 차질이 생겨 전쟁이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지리한 참호전의 양상을 띠었다.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1916년 2월부터 6월까지 베르됭(Verdun)에서 독일군이, 7월부터 11월까지 솜(Somme)에서 영국-프랑스군이 대공세를 펼쳤으나, 각기 극히 큰 피해만 입고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강화된 참호를 일렬횡대 대형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방어자 측이 절대 유리했으며, 공격자는 막대한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솜 전투에서 영국군의 인명 피해는 42만 명에 이르렀다. 전투 첫날에만 사상자가 6만 명(전사자 1만 9천 명)이 나왔지만, 전진한 거리는 몇 십 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제해권을 누린 연합국은 중구 열강을 해상 봉쇄했고, 이에 맞서 독일이 편 무제한 잠수함 공격 작전은 미국에게 참전의 빌미를 주었다. 1918년 여름에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서 편 독일의 대공세가 실패했고, 11월에 독일에서 혁명이 발생하면서 전쟁은 중구 열강의 패배로 끝이 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럽의 지도가 크게 바뀌었다. 패전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어 독립 국가가 여럿 탄생했다. 1917년에 전쟁의 중압을 이겨내지 못한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해체되고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볼셰비키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벌어진 내전은 1921년까지 지속되었다. 내전을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만든 것은 14개국의 간섭이었다. 세계 혁명의 전위를 자처한 볼셰비키와 볼셰비즘을 전염병으로 여긴 국내외의 반혁명 세력이 세계 육지의 1/6에서 충돌한 이 내전의 직간접적인 결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수백년간 영국의 통치에 반발하면서 독립을 염원해 왔던 에이레 인들이 대전의 와중인 1916년 4월 24일에 이른바 ‘부활절 봉기’를 일으켜 무력 항쟁을 계속했으며, 1921년 12월에 마침내 에이레 자치국이 탄생했다.
한편 승전국이 강화조약에서 전쟁 책임을 모조리 패배한 독일에게 돌리자, 독일인들은 베르사이유 강화를 “베르사이유의 명령”(Diktat)으로 여기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독일인 2백만 명이 헛되이 쓰러졌을 리가 없다. … 아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요구한다. 복수를!”이라는 히틀러(Hitler)의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되지 못했음이 잘 드러난다. 베르사이유 조약을 일컬어 “강화가 아니라 20년간의 휴전”이라고 한 프랑스 군 원수 포슈(Foch) 장군의 예언은 불행히도 들어맞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전쟁이 또다른 전쟁, 그것도 인명 피해에서 ‘대전쟁’을 다섯 배 능가하는 전쟁의 씨앗을 뿌렸다는 데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입헌주의, 법치, 의회 민주주의가 적어도 이상으로는 존중을 받았지만, 전후에는 그 원칙이 조소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탈리아에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고, 독일의 바이마르(Weimar) 공화국이 나치 손에 자연사했다. 유럽에 드리워진 전쟁의 먹구름은 에스파냐 내전에서 더욱 짙어졌다. 1936년에 인민 전선 정부가 에스파냐에 들어서자, 가톨릭교회, 대지주, 자본가의 불만을 등에 업고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마드리드(Madrid)를 공격하는 프랑코(Franco) 장군 휘하의 반군을 노동자 민병대와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이 막아내면서 공화국 합헌 정부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이 노골적으로 프랑코를 지원하는 데도 영국과 프랑스가 불간섭 정책을 표명하며 인민 전선 정부를 사실상 방치한 데다 인민전선 정부의 내분마저 일어남으로써, 반군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9년 3월말에 마드리드가 반군에게 항복하면서 내전은 프랑코 독재 정부의 수립으로 끝을 맺었다. 반군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양대 파시스트 국가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음으로써 유럽의 정세는 더욱 더 심하게 요동쳤다.
파시즘의 위협을 가장 절실히 느낀 소련이 영국과 프랑스에게 군사 동맹을 제의했지만, 두 나라가 ‘붉은 러시아’와 제휴하기에는 불신의 골이 너무 깊이 패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안위를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모든 것에 앞세우는 스탈린(Stalin)에게 히틀러가 다가갔고, 상극으로 여겨지던 소련과 독일이 1939년 8월 23일에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독일은 양면 전선의 위협을, 소련은 당분간이나마 서구의 전쟁에 말려들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일주일 뒤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폴란드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전격전(Bulitzkrieg)을 구사하면서 대군이었지만 구식인 폴란드 군을 격파한 독일군은 1940년 봄에 북구까지 수중에 넣었다. 전투 없이 대치만 하는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기묘한 전쟁’(Phoney war)은 독일군이 5월 중순에 마지노(Maginot) 선을 우회해서 기동전을 펴면서 끝이 났다. 전격전에 압도당한 프랑스는 항전을 포기하고 6월 18일에 백기를 들었다. 영국은 독일 공군의 영국 본토 공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살아남는 데 급급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유럽 대륙을 석권한 히틀러는 소련을 제압하는 것이 영국의 항전 의지를 꺾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39-40년 겨울에 벌어진 소련-핀란드 전쟁, 이른바 ꡐ겨울 전쟁ꡑ에서 붉은 군대는 추위를 이용하면서 분투를 벌이는 소규모 핀란드 군의 고정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허덕이다가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에서 붉은 군대의 취약성을 확인한 독일 지도부는 몇 주 안에 소련을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1941년 6월 22일에 불가침 조약을 깨면서 소련을 전면 기습 공격했다. 독일군은 혼란에 빠진 붉은 군대를 유린하며 9월에 레닌그라드(Leningrad)를 포위했고 11월초에는 모스크바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붉은 군대의 반격에 밀려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면서 애초에 단기전을 예상한 전쟁이 장기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바로 소련이었다. 독일군 사상자 및 포로 1천3백만 명 중 80%, 즉 1천만 명이 유럽의 동부 전선에서 나왔다.
레닌그라드는 900일 동안 적에게 봉쇄당한 상태에서 1백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끝끝내 버텨냈다. 1942년 여름에 시작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가 이듬해 2월초에 붉은 군대의 승리로 끝나자 독일군의 불패 신화가 깨지면서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1943년 7-8월에 쿠르스크(Kursk)에서 독일군이 자신의 주특기인 여름철 탱크전에서 패하면서 다시는 주도권을 되찾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전쟁의 대세가 이미 소련에게로 기운 1944년 6월에 영미군이 노르망디(Normandy)에 상륙해서 ‘제2전선’을 열었다. 독일군은 동서 양쪽에서 연합군에게 난타를 당하며 급속히 무너졌다. 환몽에서 깨어난 히틀러가 베를린(Berlin)의 제국 청사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1945년 4월 30일에 소련군이 국회 의사당 꼭대기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을 올리면서 적어도 천 년은 가리라던 독일 제3제국이 무너졌다.
1945년부터 유럽은 오랜 평화를 누렸다. 1991년까지 전쟁에 준하는 무력 충돌은 단 세 차례 일어났다. 종전 직후 그리스에서 정부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지만, 영국이 개입해서 공산주의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내전은 사망자 16만 명을 내고 1949년에 종결되었다. 1956년에 헝가리에서 반소 봉기의 불길이 치솟았으나, 1만 2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채 소련군에게 진압 당했다.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소봉기 역시 실패했다.
두 차례의 파멸적인 세계 대전을 겪은 유럽이 한동안 누리던 평화는 1990년대에 깨졌다. 원래부터 ‘유럽의 화약고’라는 말을 들어오던 발칸 반도의 민족 분규를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라는 틀 속에서 가까스로 봉합해온 티토(Tito)가 죽은 지 10년 뒤인 1990년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연방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연방 체제를 지키려는 세르비아 세력과 분리 독립을 원하는 민족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며, 유럽 연합(EU)와 미국에게 분리 독립권을 인정받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소수파인 세르비아 인들이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 인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이 주요 싸움터가 되었다. 각 세력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학 행위가 벌어졌고, 특히 코소보 자치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에게 ‘인종 청소’라고 할 만한 공격이 가해졌다. 전체적으로 수십만 명의 사망자와 2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했다.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도 몸살을 앓고 있다. 독소 전쟁의 와중에서 스탈린의 민족 강제 이주 정책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체치냐(Chechnia)는 분리 독립을 요구했고, 경제적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소수 민족에게 분리 독립을 인정해주는 사례가 러시아연방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러시아 정부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1994년에 러시아 군이 체치냐로 진격해서 수도 그로즈늬이(Groznyi)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체치냐 인들은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테러로 러시아를 괴롭히고 있다.


아시아

20세기 전반기에 아시아 대륙은 일본 제국의 팽창에 연루된 전쟁으로 홍역을 치렀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힘을 겨루다가 1904년에 전쟁에 돌입해서, 랴오둥(僚東)과 한반도에서 러시아 육해군을 제압했다. 이듬해 러시아 제국은 발트해 함대를 극동으로 보내 전세를 뒤집으려 했지만, 오히려 쓰시마 부근에서 일본 해군에게 참패했다. 일본은 이처럼 유럽의 강국과 겨루어 승리를 거둔 다음에야 비로소 유럽 열강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으로 타격을 입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 일본은 중국 침략으로 활로를 뚫으려 했다. 일본 정부도 통제하기 힘든 세력으로 자라난 관동군(關東軍)이 1931년부터 만주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부터는 중국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일 전쟁의 와중에서 중국 민간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대표적인 예로 1937-38년 겨울에 난징(南京)으로 진격한 일본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는데, 3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의 중국 침탈은 중국 내전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일본군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국 대륙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이 일본군보다는 중국 공산당과 싸우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국부군(國府軍)의 대공세에 몰려 1934년 10월에 이른바 ‘대장정’(大長征)에 나선 홍군(紅軍)은 간신히 추격을 뿌리치고 한 해 뒤에 옌안(延安)에 도착해서 안전한 근거지를 마련했다. 1937년에 일본의 침공이 본격화되고 항일 여론이 들끓자 9월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일본군이 기세를 올리며 점령 지역을 넓혀갔지만, 광활한 중국 대륙은 일본이 한 입에 삼킬 수 있는 먹이가 아니었다. 일본은 도시라는 점, 그리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선을 통제했을 뿐 면을 장악하지는 못했고, 일본군의 기세도 차츰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고, 소련과의 국경 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몽골의 할하 강에서 1939년 5-9월에 일본군과 소련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는데, 기갑전에서 우위를 보인 쥬코프(Zhukov) 장군 예하의 소련군이 일본군을 쳐부쉈다. 이 전투를 러시아는 할힌골(Khalkhin-Gol) 전투, 일본은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결과, 일본은 시베리아 진출을 포기했다. 일본이 살 길은 중국 침탈을 포기하고 군사비를 줄여서 국내 투자를 늘리는 것이었으나, 팽창의 관성과 지도부의 경직된 사고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피해 의식이 겹치면서 영국 및 미국과 겨룬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 결단에 따라 일본 해군 기동 함대가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 기습을 감행했다.
진주만 기습이 성공을 거두어 일본 해군은 태평양에서 미국 해군에게 우위를 누리게 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전진해서 전쟁 개시 4개월 만에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지배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1942년 6월 초에 미드웨이(Midway) 해전에서 오히려 열세인 미국 해군에게 일격을 당해 주력 항공모함을 모두 잃는 손실을 입었고, 그 뒤로는 주도권을 되찾지 못하고 점령지 방어에 급급하게 되었다. 1945년에 접어들어 마리아나(Mariana) 군도와 유황도가 미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장거리 폭격기의 일본 본토 공습이 가능해졌다. 일본의 주요 도시가 미군 폭격기의 폭탄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가미가제는 일본의 패전이 멀지 않았음을 드러내주는 현상일 뿐이었다.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사흘 뒤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고 8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진격에 관동군이 무너지자, 2백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감수하며 버티던 일본 정부는 결국 15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일본군이 무장해제 되어 물러난 지 한 해 뒤 국민당과 공산당이 격돌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국부군은 농민의 지지를 받는 팔로군(八路軍)에게 크게 밀리기 시작했다. 대만에 배후 근거지를 만들던 국민당의 고압적 정책에 분노한 대만 본토인이 1947년 2월에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국민당의 무자비한 봉기 진압으로 대만 전역에 시체가 나뒹구는 참상이 벌어졌다. 1960년에 대만 당국은 이른바 ‘2.28 대란’의 사상자가 6,300명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1948년 4월에 양쯔(楊子) 강을 건넌 팔로군은 국민당 주력 부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장제스(蔣介石)가 1949년 12월에 미군 함정을 타고 대만으로 탈출함으로써 중국을 괴롭히며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내전의 막이 내렸다.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는 일본이 미국에게 완패한 뒤, 동아시아는 냉전의 주전투장이 되었다. 냉전이 최초로 열전(熱戰)으로 비화된 지역은 한반도였다. 1950년 6월에 북한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에서 북한 지도부의 무력 통일 노선이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미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전황은 급격히 바뀌어 12월에는 오히려 북한 정부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미군의 북진에 위기를 느낀 중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를 내걸고 개입함으로써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1951년부터 전쟁은 진지전이 되었다. 전선에서는 양측의 일진일퇴가 거듭되었고, 북한 전역은 미군의 폭격으로 2층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 페허가 되었다. 37개월간의 전쟁 기간에 남한군과 UN군의 사상자는 각각 32만 명, 16만 명이며, 북한 및 중국 측 사상자는 150만 명이었다. 폭격과 테러로 무수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극동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냉전은 주 전투장을 동남아시아로 옮겼다. 프랑스와 미국의 무력 개입 때문에 인도차이나 인들은 기나긴 전쟁의 터널을 지나야만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운동이 1930년대에 솟구치기 시작했다. 저항 지도자 호치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규군의 공격에 베트남이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는 양상이 8년간 계속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에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 침투해서 진지를 구축한 프랑스 공수 부대가 베트남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면서 매듭이 지어졌다. 식민 통치를 포기한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베트남과 휴전 협정을 맺었는데, 그 골자는 북위 17°선을 잠정 군사 경계선으로 정하고 2년 뒤에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국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것을 두려워한 미국은 친미 정치가 고딘디엠(Ngo Dinh Diem)을 내세워 베트남 남부에 단독 정부를 세우고 제네바 협정 준수를 거부했다. 베트남은 또다시 기나긴 전쟁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남베트남 정부군과 민족해방전선(NLF) 게릴라의 대결로 진행되던 전쟁은 1964년에 통킹(Tonking)만에서 북베트남군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미군이 북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만드는 북폭을 개시하면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의 전면 전쟁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기에 50만 명으로 불어난 미군이 한국군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와 더불어 작전을 벌였지만, 농민의 지지를 받는 민족해방전선 게릴라와 북베트남 정규군은 1968년의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이 1973년에 베트남에서 손을 떼고 1975년 4월에 사이공(Saigon)이 함락됨으로써 기나긴 전쟁이 종식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게릴라전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세기 전환기에 남아프리카에서 보어(Boer) 인들이 대영제국군을 상대로, 필리핀에서 농민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적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정규군에게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에스파냐 내전에서도 공화국 지지 세력은 반군 점령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구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특기할 만한 게릴라 부대는 발칸 반도와 피점령 소련에서만 찾아 볼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의 게릴라조차도 전쟁의 대세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베트남과 쿠바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게릴라가 훨씬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정규군과 맞서 싸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승리까지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미군 46,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베트남 측 사상자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베트남 전쟁의 결과는 인도차이나 전체에 변화를 몰고 왔다. 캄보디아에서 1970년에 쿠데타로 들어선 론놀(Lon Nol) 친미 정권이 크메르 루즈(Khmer Rouge)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내전과 미군의 폭격으로 캄보디아 인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5년에 크메르 루즈가 마침내 수도 프놈펜(Phnom Penh)을 점령하고 집권했지만, 과격한 사회 개조 정책을 강행한 폴 포트(Pol Pot) 치하에서 1백만 내지 3백만 명이 죽음을 당했다. 1978년 12월에 베트남군이 개입해서 프놈펜을 점령했고, 정글 게릴라로 전락한 크메르 루즈는 차츰 소멸의 길을 걸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무력간섭은 1979년에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베트남을 후원했다고 해도, 두 나라 사이에는 이념상의 동질성을 뛰어넘는 갈등 요소가 존재했다. 해묵은 민족 감정을 제쳐두고서라도 베트남이 소련에 밀착하고 화교를 억압하고 캄보디아에 무력 개입을 하자, 중국군 25만 명이 베트남을 ‘징벌’한다면서 2월 17일에 베트남 영토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에서는 밀리지만 전쟁 경험이 풍부한 베트남군이 효과적으로 맞받아치면서 중국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3월 3일에 중국 정부는 베트남을 ‘징벌’한다는 애초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면서 철수했고, 베트남도 교전 행위를 중단해서 중국-베트남 전쟁은 2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남긴 채 끝을 맺었다. 이 전쟁에서 두 나라는 매우 ‘절제’하면서 전투를 치렀다. 중국군은 베트남 영토 안으로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히 30킬로미터를 진격한 뒤 멈추었으며, 두 나라 모두 공군 투입을 극도로 자제해서 확전을 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인도 아대륙도 전화를 비껴가지 못했다. 1947년 8월 14일에 영국 정부가 종교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리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분쟁이 일어나 무려 1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국경 분쟁이 세 차례 일어났다. 카시미르(Kashmir) 지방에서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가 힌두계 지배층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자 파키스탄이 군대를 파견했고 힌두계 지배자가 인도에게 개입을 요청하면서 1948년에 1차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다. 휴전 조약이 맺어진 뒤로도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다가, 1965년에 결국 2차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나 양 측 사이에서 대규모 탱크전까지 벌어졌다. 3차인도-파키스탄 전쟁은 1971년에 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 분리 독립을 지원하는 인도를 응징하면서 벌어졌다. 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로 끝이 났고, 방글라데시라는 독립 국가가 태어났다. 한편 인도와 중국 사이에도 한 차례 전쟁이 있었다. 두 나라는 1959-62년에 일명 ‘히말라야 전쟁’이라고도 하는 국경 분쟁을 벌였는데, 사상자 11,000명이 나오는 교전 끝에 부탄(Bhutan)은 인도에게, 라다흐(Ladakh)는 중국에게 귀속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19세기 이래 제국주의 이해관계의 각축장이 된 서남아시아와 북 아프리카에는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는 무력 분쟁이 20세기 중후반까지 자주 일어났다. 이집트의 나세르(Nasser) 대통령이 1956년에 수에즈(Suez) 운하를 국유화한 뒤 이권을 지키기 위해 무력 개입한 영국-프랑스군에게 완패를 했으면서도 국제 여론의 힘을 빌어 결국은 침공군을 물리친 사건은 아랍 민족주의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은 아랍권의 민족주의가 다른 형태로 제국주의에게 거둔 또다른 승리였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알제리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해방전선(FLN)이 1954년에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FLN의 테러 전술과 프랑스인 알제리 정착민(Pieds noir)의 무자비한 대응이 맞부딪히면서 알제리 전역이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도가니에 빠졌다. 1957년부터 프랑스군이 사태에 직접 개입해서 프랑스 정규군 병력의 절반과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며 FLN를 공격했지만, 알제리 인의 저항과 독립 요구는 수그러들기는커녕 거세져만 갔다. 8년간의 전쟁 동안 프랑스 군 1만 2천 명이 사망했으며, 알제리 인 1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견디다 못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는 프랑스다라는 정책을 포기하고 알제리 인이 국민 투표로 독립 여부를 결정하도록 허락했으며, 1962년 7월에 알제리 인은 완전 독립을 선택했다.
중근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든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대영 제국의 모순에 찬 통치 정책의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영국이 아랍의 자치와 유태인 국가의 건설을 동시에 약속하면서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과 여러 주변국 사이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이 벌어졌다.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뒤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사이에서 벌어진 1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두어 독립을 확고히 했다. 1956년에는 이스라엘 군이 수에즈 운하 위기를 틈타 이집트를 공격해서 시나이(Sinai) 반도를 점령했다. 그 뒤 10여년 간 이어진 평화기에 양측은 최신식 무기를 구입하며 무장을 강화했다.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3차 중동 전쟁(1967.6.5-10)에서 이스라엘 군은 가자(Gaza) 지구, 요르단(Jordan) 강 서안 지대, 골란(Golan) 고원을 차지했다. 거듭되는 패배에 절치부심하던 아랍 국가들은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4차 중동 전쟁에서 보복을 꾀했다. 1973년 10월에 이집트가 남쪽에서,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이 북쪽에서 이스라엘을 밀어붙여 초반에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랍측은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이스라엘 측의 반격을 받아 밀렸다.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에서 나세르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사다트(Sadat)가 1970년대 후반부터 평화 노선을 걸으면서 대규모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남아시아에서 전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미국의 전폭적인 후원과 묵인 아래 UN의 결의를 무시하며 팔레스티나를 압박하는 이스라엘과 생존권 수호에 나선 팔레스티나 해방 전선(PLO)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1982년에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의 PLO 기지를 공격했다. 피를 피로 씻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1993년에 PLO와 이스라엘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어 팔레스티나 인에게 제한된 자율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의 진전은 지지부진하기만 한 형편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강압 통치에 맞선 팔레스티나 인의 인티파다(Intifada)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소련의 붕괴를 재촉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발에 부딪혀 위기에 몰린 아프가니스탄의 사회주의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군 10만 명이 1979년 12월에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주했다. 그러나 무자헤딘(Mujahedin) 전사들이 중심을 이루는 반군이 소련군에게 저항하면서 러시아-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었다. 무자헤딘은 미국의 무기 지원을 받아 강력한 저항군으로 자라나 정부와 소련군을 괴롭혔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 도로를 간신히 지키는 소련군과 험준한 산악을 근거지로 보급로를 노리는 무자헤딘 양자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 제압할 수 없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과 닮은꼴이 되어갔으며, 결국 소련군은 계속되는 인명 피해와 불어나는 전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1989년에 철수함으로써 소련의 간섭 전쟁은 끝이 났다. 수년 뒤 반군이 수도 카불(Kabul)를 점령했지만, 내부 분열이 일어나 내전이 계속되었다. 1996년에 이슬람 신정(神政)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탈레반(Taliban)이 무자헤딘 세력을 무너뜨리고 세력을 착실히 늘려 1999년에 국토의 90%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과 내전에서 1백만 명이 희생되었고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랍 국가 사이의 전쟁도 엄연히 존재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던 팔레비(Pahlevi) 황제 정권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주도한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이란이 혼란에 빠지자, 이란과 해묵은 국경 분쟁을 빚어왔던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호기라고 판단하고 1980년 9월 22일에 이란을 공격했다. 이슬람 세계의 왕정 국가들과 소련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다. 주로 소련에게서 얻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이라크 군이 조기에 승리를 거두리라고 예측되었지만, 성전(聖戰, Jihad)을 외치는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Khomeini)에게 분전을 촉구 받은 이란 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전쟁은 의외로 길어졌다. 혁명 이후 서방의 지원이 끊겨 과거의 전투력을 잃어버린 이란은 이라크의 세 배에 이르는 인구를 바탕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감내하면서 싸워 이라크 군의 소모를 촉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1982-83년에 이라크가, 1984년에는 이란이 대공세를 펼쳤지만, 양 쪽 다 큰 피해를 입고도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 뒤로 지상전은 소강상태를 맞이하면서, 혁명 전에 구비한 낡은 무기를 들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지하드’를 수행하는 이란 군과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이라크의 기계화 부대가 대결하는 양상이 지리하게 지속되었다. 혁명의 열정으로도 힘의 소진을 메울 수 없게 된 단계에 이른 이란이 UN의 휴전 중재안을 받아들이고 이라크도 호응함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은 1백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1988년 8월에 끝을 맺었다.
그러나 8년 만에 페르시아만에 모처럼 찾아온 평온은 야심가 사담 후세인이 다른 전쟁을 위해 이라크 군의 전력을 더 키우는 휴지기였을 뿐임이 곧 드러났다. 세계 4위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한 이라크 군이 1990년 8월에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해서 이라크의 한 주(州)로 합병했던 것이다. 영국의 보호령이었다가 1961년에 독립한 쿠웨이트를 상대로 이라크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영유권을 주장해온 바가 있다. 쿠웨이트에서 떠나라는 UN의 최후통첩을 이라크가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1991년 1월에 이라크에 공습을 개시했다. 2월 24일에 개시된 전면 지상전에서 다국적군은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에 있는 이라크 군을 공격했다. 100시간 만에 이라크 군이 궤멸한 뒤 걸프전은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10만 명에 가까운 이라크 군이 전사한 데 비해, 다국적군의 사망자 수는 500명 안팎이었다.
이라크의 부침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며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쿠르드(Kurd) 족의 운명과도 연결되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과 투르크는 쿠르드 족에게 독립 국가를 세울 권리를 인정하는 조항을 강화 조약안에 끼워 넣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비준은 받지 못했으며, 어느 나라도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1975년 이후로 쿠르디스탄 민족 해방군이 쿠르드 족의 독립 국가를 요구하며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이 게릴라 활동으로 여러 나라가 괴로움을 겪었고, 특히 이라크가 유난히 큰 피해를 입었다. 이라크는 쿠르드 족 민간인에게까지 화학 무기를 사용해서 쿠르드 족 게릴라와 싸웠다.


아프리카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대부분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대륙 도처에서 원주민과 백인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영국은 나이지리아와 우간다에서, 프랑스는 코트지부아르와 마다가스카르에서, 독일은 나미비아와 탄자니아에서 흑인들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백인 군대와 흑인 간의 무력 충돌은 때로 흑인 부족이 절멸당하는 대량 학살로 끝이 났다. 일례로, 헤레로(Herero) 족의 저항에 부딪힌 독일 군대는 1910년대 중반에 나미비아에서 인종 말살을 자행해서 6만 명이 넘는 헤레로 족이 목숨을 빼앗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수행한 ‘유태인 절멸’(Holocaust)을 유럽인이 아프리카에서 자행한 인종 말살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스벤 린드크비스트, 김남섭 옮김, 「야만의 역사」, 한겨레 신문사, 2003.
1930년대 중반에 일어난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은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말에 에티오피아에서 이권을 차지하려다 에티오피아 군에게 참패를 당한 바 있는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에 다시 침략에 나섰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이탈리아 군 80만 명이 침공해 들어오자 에티오피아 정부는 국제 연맹에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를 응징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식민지 보유국이 대부분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이를 외면했다. 예상 밖으로 완강한 에티오피아의 저항에 화가 치민 이탈리아 군은 항공기로 독가스를 살포해서 많은 민간인을 살상했다. 1936년 5월에 이탈리아 군이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를 점령한 뒤로 조직적 저항은 사라졌지만, 산악 지대에서는 저항군이 계속 활동했다. 1937년에 이탈리아인 총독에게 가해진 테러의 앙갚음으로 이탈리아 군이 민간인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서 수천 명을 죽였고, 끝내는 3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 군은 12,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60만 명이 넘는 에티오피아 인이 목숨을 잃었다.
1950년대부터 아프리카 대륙은 독립 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독립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케냐의 최대 부족인 키쿠유(Kikuyu) 족은 백인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는다는 대의를 내걸고 마우마우(Mau Mau)단이라는 비밀결사체를 만들어 백인에게 테러를 가했다. 백인 1백여 명이 죽음을 당하자, 케냐의 영국 행정부가 철저한 탄압에 나서서 키쿠유 족 1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 2만 명을 수용소에 가두었다. 그러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1963년에 마침내 독립 국가 케냐가 태어났다. 키쿠유 족 출신으로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된 케냐타(Kenyatta)는 마우마우단의 일원이었다.
1960년대는 ‘아프리카 독립의 시대’로 17개 독립 국가가 태어났다. 그러나 독립의 환희는 잠시뿐이었고,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휘말려 들었다. 수단, 차드, 우간다, 나이지리아, 콩고, 앙골라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소말리아는 1988년 이래 지금까지도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내전이 발생하는 까닭은 첫째, 종족 간의 갈등, 둘째, 이 갈등을 부채질하는 외세의 개입, 셋째, 백인 식민 통치의 부정적 유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형식으로만 갖추어진 국민 국가의 틀 속에 말과 문화가 다른 부족들이 합쳐진 상태에서 어느 부족이 우위를 점하는가를 놓고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전형적인 사례가 나이지리아 내전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한 나이지리아에는 250개 부족이 섞여 살고 있는데,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면서 기독교를 믿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보(Ibo) 족이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최대 종족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하우사(Hausa) 족이 이보 족 위주의 정책에 반발하는 가운데, 정권이 쿠데타로 하우사 족에게로 넘어가고 이보 족 수천 명이 하우사 족에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위기감을 느낀 이보 족은 1967년에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비아프라(Biafra) 공화국을 세웠다. 하우사 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가 선전포고를 하고 비아프라로 진격함으로써 내전이 벌어졌다. 1970년에 비아프라 공화국이 패배함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와 1백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생기는 비극이 일어난 뒤였다.
부족 간 갈등이 무력 충돌로까지 비화되어 내전이 격화되는 데에는 외세의 개입이 큰 몫을 했다.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의 내전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는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이 포르투갈과 10년 동안 무장 투쟁을 벌인 끝에 1975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정부가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으나 경제 발전이 더뎌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1982년에 우파 게릴라 조직인 모잠비크 민족 저항 운동(RENAMO)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반군의 배후에는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1975년에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앙골라의 경우에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해방 인민 운동(MPLA),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해방 민족 전선(FNLA),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 정권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전면 독립 민족 동맹(UNITA) 3개정치 단체가 3파전을 벌이면서 나라가 내전의 나락에 빠져들어갔다. 벨기에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한 콩고에서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루뭄바(Lumumba), 부족주의적 지방분권제를 주장하는 카사부부(Kasavubu), 카탕가(Katanga) 지역의 분리 독립을 노리는 촘베(Tshombe)가 각각 소련, UN과 미국, 벨기에의 지원을 받으며 대립하다가 내전이 일어났다.
르완다 내전은 백인 통치의 유산이 결국은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킨 대표 사례이다. 르완다의 양대 종족인 후투(Hutu) 족과 투치(Tutsi) 족은 오랜 세월 동안 별다른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1916년부터 르완다를 다스리게 된 벨기에의 백인 통치자들이 외관이 백인에 더 가까운 투치 족을 우대해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0% 남짓한 투치 족이 관직을 독차지한 반면, 90%가 넘는 후투 족은 심한 차별 대우에 시달렸다. 그 결과 생겨난 종족 갈등은 무력 충돌과 대량 학살로까지 이어져서, 두 종족 간의 적대감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62년에 르완다가 독립 국가가 된 뒤에 후투 족 중심의 정부가 세워지고 산발적인 내전이 벌어졌다. 1994년에 후투 족 출신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반군이 쏜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후투 족의 군대와 민병대가 석 달 동안에 투치 족 5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반격에 나선 투치 족 군대가 수도 키갈리(Kigali)를 장악했고, 4백만 명이 넘는 후투 족이 보복을 피해 달아나서 난민이 되었다. 극심한 식량 부족과 전염병으로 난민 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라틴 아메리카

20세기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국제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907년에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사이에 국경 분쟁이 한 차례 있었으며, 1981년에 페루와 에쿠아도르의 국경 분쟁으로 200여 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외국의 중재를 거쳐 곧바로 종식되었다. 희비극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이른바 ‘축구 전쟁’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축구 진출권을 놓고 1969년에 치러진 축구 국가 대표팀 경기에서 격앙된 두 나라 국민감정이 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엘살바도르가 9월 14일에 온두라스에 폭격을 가하면서 시작된 축구 전쟁은 외국의 중재로 100시간 만에 종식되었다.
을 빼고 특기할 만한 국제전으로는 그란 챠코(Gran Chaco) 대평원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 벌어진 챠코 전쟁이다. 1928년부터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다가 1932년 4월에 볼리비아 군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두 나라 군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외국의 중재로 1935년 7월에 휴전 조약을 맺었다. 10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나온 이 전쟁은 20세기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 사이에 벌어진 유일한 대규모 전쟁이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가 20세기에 평화를 누렸다고 볼 수는 없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국제전이 드물었던 것은 이 지역의 나라들이 거의 예외 없이 내전에 시달려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일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내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과테말라, 우르과이, 도미니카, 엘살바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지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라틴 아메리카의 내전은 주로 미국의 후원 아래 정권을 유지하며 국민을 혹독하게 탄압하는 독재 정부와 이에 맞서는 좌익 게릴라 사이에 벌어지는 무력 충돌이었다.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다 미국이 양성한 정부군 부대에게 1967년에 잡혀 처형당한 체 게바라(Che Guevara)의 비극적 최후가 말해주듯, 라틴 아메리카의 반정부 게릴라의 투쟁은 험난했다. 멕시코에서는 최근까지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는 인디오를 중심으로 결성된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EZLN)이 1994년 1월에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했고, 정부군은 대지주와 대목장주에게 시달리는 농민의 지지를 받는 반군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에 내재한 모순은 중미의 작은 나라 니카라과의 독재, 내전, 혁명, 반혁명에서 잘 드러난다. 1910년부터 1933년 사이에 니카라과는 여러 정치 파벌이 얽힌 내전에 시달렸으며, 미국이 군대를 파견해 개입했다. 1927-34년에 산디노(Sandino) 장군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정부와 미국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다. 20세기 중반에 니카라과는 소모사(Somoza) 가문의 철권통치에 신음했고, 1960년대부터 반 소모사 운동이 거세지면서 내전에 들어갔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성장한 산디니스타 국민해방전선(FSLN)의 공세에 밀려 1979년에 결국 소모사정권이 무너졌다. 니카라과에서 좌익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은 반혁명 세력 후원에 나서 온두라스에서 양성한 게릴라를 니카라과에 침투시키는 등 저강도 전쟁에 나섰다. 이로써 니카라과에 다시 내전이 벌어져 수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생겼다.
이처럼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를 자국의 ‘뒷마당’으로 간주하면서 각 나라 정치를 배후 조종했지만, 때로는 노골적인 무력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카리브 해에 있는 인구 9만의 소국 그레나다(Grenada)에서 1983년 10월 18일에 급진 좌파 세력이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하자, 미국은 일주일 뒤 군대를 투입했다. 미군은 고전을 했지만 보름 만에 쿠데타 세력을 제압했다. 노골적인 무력 개입의 또다른 사례는 파나마 분쟁이다. 1914년에 완공된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인위적으로 세운 국가인 파나마는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원래는 친미 군인이었던 파나마의 실권자 노리에가(Noriega)는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의회에서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89년 12월에 미군은 5,000명이 채 안 되는 군대를 가진 파나마를 스텔스(Stealth)기까지 동원해서 맹공을 퍼부었으며, 이 때문에 파나마 시티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은 한 나라의 국가수반인 노리에가를 마약 밀매 등의 죄목으로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지방 재판소 법정에 세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조종과 무력 개입이 늘 성공했던 것만은 아니다. 1956년에 카스트로(Castro)가 체 게바라를 비롯한 동지 86명과 함께 쿠바로 숨어들어가 바티스타(Battista) 독재 정권과 게릴라전을 벌여서 3년 뒤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놀란 미국 정보기관은 혁명 정부를 뒤엎기 위해 쿠바 망명자 1,700명을 모아 훈련한 뒤, 케네디(Kennedy) 대통령의 인가를 받아 이들을 1962년 4월에 쿠바 남부 해안 만에 침투시켰다. 그러나 침공군은 쿠바 정부군과 민병들의 신속한 반격을 받아 히론(Giro’n)만에서 궤멸 당했다. 그 뒤로 미국은 경제 봉쇄를 통해서 카스트로 정권의 목을 조르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특기할 만한 국제전으로 1982년 4월에 일어난 포클랜드(Falklnad)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철권을 휘두르며 국가를 통치해오다가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극심한 물가 상승, 외채, 실업 사태에 봉착한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은 위기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영토 회복이라는 대의를 내걸고 영국 시민 23,000명이 사는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했다. 영국 보수당 정부는 자국의 해외 영토를 둘러싼 분쟁이 무력을 통해 해결되는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기동 함대를 파견해서 아르헨티나 육해군과 일전을 치렀다. 영국군은 열 척이 넘는 군함이 침몰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내 포클랜드 제도를 재점령해서 6월 15일에 아르헨티나 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양 측에서 1,0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다. 패전의 여파로 아르헨티나에서 군부 독재 종식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퇴진했다.


맺음말

20세기를 조망해 볼 때 두드러지는 점 하나는 무력 분쟁이나 전쟁이 주로 주변부나 반주변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앵글로색슨계 국가들은 자국 영토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크나큰 피해를 입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핵심 국가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이탈해 있던 소련이었다. 더욱이, 유럽인은 러시아, 에스파냐, 유고슬라비아에서만 내전의 고통을 겪었다. 반면 지난 세기에 주로 전쟁터가 되었던 지역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였다. 뒤늦게 20세기에 국민 국가 형성 과정을 밟은 비유럽 지역은 국제전과 더불어 수많은 내전을 겪어야만 했다. 주변부와 반주변부에서 일어난 국제전도 대개는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러하듯이 내전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났다. 또한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의 내전과 중근동의 국제전도 핵심 국가들의 지원이나 개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20세기 전쟁의 또한가지 특징은 전투원보다 비전투원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20세기에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줄잡아 1억5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물론 현대전에서 전투원의 사상 비율은 극도로 높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서 주 징집 대상이 된 남성 19-22세 연령 집단의 규모는 무려 35%가 넘게 감소되었으며, 4년간의 독소 전쟁에서 동원된 소련군인 3천4백5십만 명 중 놀랍게도 84%가 사상자나 전쟁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비전투원 인명 피해의 규모는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민간인 사망자 1천만 명은 전장에서 죽은 군인의 수 8백만 명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정도가 더 심해져서, 사망자 7-8천만 명중 군사 작전에 연루되어 죽은 이는 1/3이 채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민간인이거나 전쟁 포로였다. 양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는 1억 명인데, 놀랍게도 이 중 3/4이 비전투원이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아서, 1945년 이후에 전란으로 인한 사상자의 4/5가 민간인이었다. 2천4백만 명의 난민이 생겼으며, 전화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해서 삶의 근거지를 송두리째 잃은 사람도 1천8백만 명에 이른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투원보다 후방의 민간인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는 현상은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의 상당수가 내전이었다는 사실의 한 결과였다. 내전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테러와 기근과 질병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전쟁에서 민간인에게 닥친 비극은 주로 현대전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 이전의 국제전에서 군인들이 민간인을 공격하는 경우는 대개 약탈이나 극도의 흥분, 공포심에서 나오는 일시적이고 돌출적인 현상이었지만, 현대의 총력전에서는 적국의 민간인 공격이 정당한 전쟁 방식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국가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는 현대전에서 민간인은 ‘무기를 들지 않은 군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방의 민간인들도 20세기 들어서 의도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더군다나 장거리포와 장거리 폭격기는 전쟁에서 후방과 전선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총력전이 결합되면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쟁으로 전무후무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20세기에 기술의 산물인 항공기를 전쟁에 이용해서 적국 민간인을 체계적으로 대량 살상하는 전략 폭격을 구사한 미국과 영국의 전쟁 방식은 이 같은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함부르크(Hamburg)와 드레스덴(Dresden)에서 하룻밤새 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도쿄(東京)에서는 민간인 10만 명이 1945년 3월 9-10일 이틀 동안 B-29기 300대가 쏟아 부은 폭탄 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미군의 전략 폭격으로 독일 민간인 60만 명, 일본 민간인 9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미군은 독일 본토에 끊임없이 폭격을 가했지만 독일의 군수 생산은 꾸준히 상승했고, 독일 국민의 적개심이 고조되어 오히려 전쟁 수행 노력이 강화되는 역효과까지 발생했다.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는 전략 폭격의 비극적 귀결점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피어 오른 거대한 버섯구름이었다.
대량 파괴 무기의 무시무시한 살상 효과만이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포성이 들리지 않는 상황실에서 계기판을 보면서 무감각하게 대량 파괴 무기 발사 버튼을 누르는 군인이 나오는 최첨단 전쟁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가슴에 필사적으로 총검을 꽂고는 부들부들 떠는 군인이 나오는 재래전보다 더 훨씬 잔인한 전쟁일지도 모른다. 이성에 토대를 둔 과학의 발전이 극대화된 20세기에 오히려 인류는 같은 종 사이의 폭력을 통제하는 지혜 면에서 자연계의 동물보다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전쟁을 금기(taboo)로 만들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주장 Umberto Eco, “Reflections on War” in Five Moral Pieces (London: Vintage, 2002).
이 인류가 세 번째로 맞이한 새천년에 의미 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해본다.


<참고 문헌>


김행복, 황원식, 강창구(엮음), <20세기 지구촌 전쟁> (서울: 병학사, 1996)
리처드 오버리(류한수 옮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서울: 지식의 풍경, 203)
에릭 홉스봄(이용우 옮김),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총 2권 (서울: 까치, 1997)
George Forty, Land Warfare: The Encyclopedia of Twentieth Century Conflict (London: Arms and Armour, 1997)
Martin Gilbert, Challenge to Civilization: A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1952-1999 (London: HarperCollins, 1999)
J. A. S. Grenville, The Collins History of the World in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HarperCollins, 1994)
John Keegan, The First World War (London: Hutchinson, 1998)
Daivd Mitchell, The Spanish Civil War (London: Granada Publishing, 1982)
Clive Ponting, Progress and Barbarism: The World in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Chatto & Windu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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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 | 최원

비극의 의의는 어떤 혁명적 시도들의 실패의 장렬함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세대들이 유사한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전 실패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에의 보증을 이후 시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증가시킬 것을 촉구하는 데 있지도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비극의 의의는 혁명을 원하는 그 모든 동일자의 법칙(혹은 확신)은 예기치 못한 타자의 법칙(혹은 확신)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항상-아직 '유한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비극의 의의는 혁명적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빠져들 그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자가, 혁명의 주체가, 여전히 타자를 향해, 심지어 자신의 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내는 운동을 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비극을 실패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끝내 도래하여 그 모든 실패들을 '보상(redeem)'해줄 성공에의 촉구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결단론적인 비극 이해일 뿐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공유했던 이 위험한 코드를 반복하지 말 것.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정세'일 뿐이라는 점, 우리는 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세로서의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다수의 곤란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볼 것. 그리고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할 수 없는 다수의 목표들이 문제인만큼, 혁명은 여전히 어떤 '정치'가 가능해야할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 만일 혁명이라는 정세가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정세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것. 혁명 속에서 무엇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혁명 속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사고할 것.

"우리에겐 반역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인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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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간디'에 관한 짧은 노트 | 장진범

'레닌과 간디'라는 짧은 발표문은 그동안 발리바르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요체를 단숨에 드러낸다. 바로 '대중운동'이 그것이다.

 

사실 대중운동은 고유한 '개념'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아마도 '대중'(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 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론들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와 관련해 언급된 스피노자의 경우, 이 문제와 직결된 그의 정서론은 아직까지 영어로도 적당한 책을 찾기 힘드니 제대로 된 접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경우, '비판적' 독해를 통해 재구성해야 하는데 프로이트 자체를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렇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면 시행착오를 거쳐서라도 어떻게든 도모해볼 수 있을 거다. '레닌과 간디'는 그런 점에서 무척 중요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불어로 읽었기 때문에...) 발리바르는 레닌과 간디를 시빌리테의 정치 안에서 구별되는 계기로 파악한다. 레닌의 경우 핵심은 대중운동에 힘입어 극단적 폭력을 정치(가 가능한)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집약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이다. 이는 간디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점이며 혹은 차라리 간디(의 정치)를 가능케 한 것은 레닌(의 정치)다. 하지만 레닌은 '내전'의 문제를 알맞게 다루지 못한다. 알다시피 레닌의 내전론은 'PT 독재'로서 '국가를 통한 국가의 소멸', 'PT(의) 독재'(곧 BG에 대한 독재)의 'PT(에 대한) 독재'로의 도착 이라는 난문에 부닥친다. 레닌에게서 이에 대한 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며 불리한 정세의 과잉결정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몇몇 천재적이지만 일시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국가 소멸의 조건의 생산'은 알맞게 사고되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내전' 혹은 차라리 '계급투쟁'의 문제를 군사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혁명적 폭력과 타협적 비폭력으로 양극화됐다.

 

간디가 입장하는 곳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자구대로 하자면 이는 '진리의 힘'이다) 는 민주주의의 봉기적 전통을 재전유한 것이고 때문에 말의 강한 의미에서 '혁명'에 관한 재정식화다. 문제가 '진리'인 한에서 간디는 어떠한 종류의 '타협'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공민적 불복종'은 아주 강력한 '비합법주의'를 띤다. 발리바르가 그의 작업을 네그리의 '구성권력'과 연결시키는 것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논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간디는 레닌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곧 '공세적 비폭력'의 '건설적 비폭력'로의 전환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후자를 생산하는 전자의 실천을 발명하기 위해 '아힘사'(a-himsa, 비-증오)를 도입한다. '적에 대한 개방'을 통해 스스로의 관점을 전환하는 '대화주의', 대중행동(곧 대항폭력)의 자기제한적 실천, (그리하여 '최종적 전투'라는 관념의 완전한 기각) 그러니까 '혁명 안의 혁명'. 이것이 바로 시빌리테의 간디적 계기다.

 

하지만 간디 역시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여기서부터는 불어 해석이 안 되서 자의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그가 폭력의 문제를 (레닌과 달리) 추상적 곧 종교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폭력을 악화시키는 객관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변혁할 수 있는 정세적 실천을 (아마도 레닌만큼은)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무능력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지도자에 대한 사랑' 으로 봉합했고 이같은 동일화가 도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대로 사고하고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닌과 간디의 대화가 역설하는 것은 폭력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는 것, 계급투쟁('내전')의 문제를 非군사적인 방식으로 곧 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자는 것, 그리고 대중운동 및 집단적 주체화에 고유한 '정서적 투여' 또는 '동일화 과정'의 문제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아마 레닌과 간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스피노자나 (개조된) 정신분석학이 거론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내 생각에 '사회운동'이라는 말보다 '대중운동'이라는 말이 더 알맞은 것 역시 이 문제('대중들')를 정면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은 대개 정치운동을 그 대쌍으로 하고 국가에의 포섭을 역사적 사회운동이 타락한 원인으로 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조야하다. 前레닌적이고 前간디적이다. 레닌과 간디에게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 한계는 위의 진단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난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다만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이 지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며 우리에게 정말 긴급한 것은 그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대중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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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야만 | 진태원 (2003.11.21)

문화비평: 한국사회의 야만

 

2003년 11월 21일   진태원 서울대 이메일 보내기

올해 있었던 여섯 명 노동자의 죽음, 또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함께 목숨을 끊은 일가족들, 또 수능성적을 비관해 투신한 학생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자살한 두 명의 이주노동자.

이 모든 이들의 죽음은 말의 고전적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간결하게 잘 제시해 주고 있다. “자살 가능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끊임없이 비극의 자료가 되어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 3막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있어!” 

반면 차마 죽을 용기가 없어, 또는 일종의 본능으로 하루하루 목숨의 끈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시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그저 있음’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들이다. 지하철 구내 바닥에 깔린 몇 장의 신문지에 얹혀서, 또는 손 시린 쪽방의 바닥에서 차가운 사물성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힘겹게 ‘자기’를 유지해가는 이들에게 삶이란, 무의미한 고통의 나날이리라.

비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과, 사물과 ‘자기’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풍경의 상태로 견뎌가고 있는 이들 중 과연 누가 더 딱한가 따지는 건 그야말로 야만적인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하고 야만적인 건 “노동자들이 분신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한국의 현 대통령의 발언이다. 노무현 정권은 거듭 자신들 정권의 기반은 도덕성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들에게 이 말은 그들의 政敵들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자,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신뢰의 호소일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입에서 노동자들의 분신, 죽음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발언이 나온다는 건 자못 충격적이다. 그는 비극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한가하게 비극을 반추하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너무 어려운 걸까.  

하지만 어쩌면 그의 두 가지 발언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헤겔이 칸트의 도덕의 추상성을 비판한 이래, 도덕과 윤리는 동의어가 아니라 오히려 동음이의에 가깝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개개인의 도덕적 품성이 아무리 뛰어나고 도덕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해도, 그것이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려에서 유리돼 있는 이상, 또는 사회적 관계의 추상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한, 도덕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이 자신들 개개인의 도덕적 결백성(이것이 사실인지는 의심스럽지만)을 주장하고 또 이를 스스로 확신하는 한, 자신들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만큼 더 비도덕적이고 사익에 골몰한 사람들로 보이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자살에서 목적 달성을 위한 고도의 계산된 수단을 보고, 국익을 위해 파병을 결심하고 인간사냥과 다름없는 이주노동자들 추방에 골몰하는 야만적인 모습이 나오는 건 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극우 꼴통’이라고 조롱하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당수 장-마리 르펜은 자신의 노선을 아주 놀랄 만큼 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나는 내 딸들을 내 조카딸들보다 더 사랑하고, 내 조카딸들은 내 사촌들보다, 내 사촌들은 내 이웃들보다 더 사랑한다. 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프랑스인들을 더 사랑하며, 누구도 내가 달리 말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르펜의 이 명제에서 한국의 현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리게 되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한국 사회는 야만사회인가. 이 질문은 뜬금없는 것도, 과장된 수사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한낱 수단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타인의 생명 및 안전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에서 이는 매우 절박한 정치적?윤리적 질문이다.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지속적인 야만의 퇴치 없이 가능할 수 없다는 건 근대 정치의 핵심 원리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임을 자부할 수 있으려면 도덕과 국익으로 포장된 야만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야만이냐 시민문명이냐, 이것이 문제다.   

진태원 / 서울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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