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9일과 6월 1일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민중들은 유럽연합 헌법 조약에 대한 비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각각 54.9%와 61.6%로 비준을 부결시켰다. 원래 유럽헌법은 가입국 모두의 만장일치로 비준되어야만 하므로 사실상 앞으로 유럽연합의 정치 통합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국내언론에서도 이 과정을 소개하였는데, 대체로 대안세계화(alterglobalization) 세력으로 대표되는 좌파세력과 극우세력들에 의한 구유럽으로 회귀, 프랑스 국익에 대한 침해 따른 반발 등으로 소개하였다.1) 이 관점은 프랑스의 유럽연합 지지자들과 같다. 이러한 과정은 이른바 주류적 시각으로 의사결정에 있어, 무지한 대중과 지식을 지닌 엘리트들을 구분하는 관점이며 현존하는 갈등에 대한 회피이고 미봉책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2) 과연 그들은 무엇을 반대하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논쟁에 주목하여야 하는가?3)
이 논쟁의 숨겨진 논점은 바로 '공산주의 이후'라는 쟁점이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이후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은 동쪽의 공산주의의 몰락이 바로 '새로운 통합 (자유) 유럽'의 초석이 되었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유럽통합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이라 부른다. 사실상 정치통합의 기초를 마련하는 유럽헌법조약은 경제통합의 다음 과정으로 유럽통합의 마지막 단계라 볼 수 있다. 최근에 유럽통합 과정이 자유(시장) 유럽(또는 신자유주의적)4) 유럽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유럽통합은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이 개시되기 이전부터 제기된 것으로 그 첫번째 단계는 1951년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CSC는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이탈리아의 6개국 사이의 [석탄/철강] 시장을 통합하는 것이었다.5) 1957년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구축하기 위한 이른바 '로마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것은 ECSC의 확장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 조약에서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유럽의회(European Assembly), 유럽재판소(the Court of Justice), 경제사회 위원회(Economic and Social Committee)가 탄생된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지역적 통합은 비슷한 수준의 발전정도를 가진 나라들 사이의 지역적 통합으로 더 거대한 시장이 주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과 특화(specialization)6) 를 가능케 한다. 1970년대 유럽은 통화협력을 집행시켰고, 1979년 유럽통화시스템(EMU)가 탄생하였으며, 유럽통화단위(ECU)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0년대와 80년대, 유럽공동체에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합류하였다. 이후 1987년 단일유럽의정서(Single European Act)이 체결되는데, 이는 완전한 "공동시장(Common market)"의 수립을 위한 것이었다.
이 단일유럽의정서에서 금융서비스의 자유와 지역 내의 자본의 자유로운 유통이라는 개념이 크게 확장된다. 즉 유럽통합의 과정이 80년대에 지속되고 있던 '신자유주의'와 통합되어 나타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7)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유럽통합은 1992년 마스트리히트(Maarstricht)에서 체결된 '유럽연합에 관한 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8)에서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른바 '수렴기준'(convergence criteria)라는 것인데, '하나의 시장', 그리고 '하나의 통화'라는 기치 아래 재정적자와 정부부채를 각각 GDP의 3%와 60%이내로 묶는 것이다.9) 이러한 것은 고소득 계층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재정부문 구조개혁(fiscal restructuring)과 국가역할을 축소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도구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유럽집행위원회의 광범위 경제정책 지침(Broad Economic Policy Guideline: BEPG)에 의해 재부과되는데, 그 핵심은 '화폐정책, 예산정책, 그리고 임금증가'는 항상 단기에서 기업과 소비자들 사이의 신뢰 강화의 요구와 가격 안정성[물가안정](price stability)과 양립하여야 한다는데 있다. 여기서 가격 안정성은 조세감면, 금융시장 자유화, 노동시장의 탈규제, 공적 부과방식 체계(public pay-as-you-go scheme)에서 사적 자본시장 적립 방식(privately funded capital-market scheme)의 연금체계 개혁으로 보충된다.10)
문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유럽의 경제전체적 퍼포먼스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추산한 것에 따르면, 유럽지역의 GDP 성장률은 1991-2001년에 연간 평균성장률 2.1%에서 2003년에는 0.4%까지 하락했다는 것이며, 투자성장률(국내총고정자본형성)은 2.0%에서 2002년에는 -2.6%까지 하락했다. SGP에 의해 부과되는 재정적자 범위 또한 지켜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회원국 정부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국제적 경쟁압력과 세계경제의 침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유럽통합을 대표하는 두 나라인 독일과 프랑스는 독일의 경우, 2003년 재정적자가 4.2%에 이르렀고 프랑스 또한 2003년 동일한 재정적자를 기록했다.11)
왜 유럽헌법은 난항을 겪는가?
현재 유럽헌법조약은 왜 난항을 겪는가? 유럽헌법조약을 둘러싼 수많은 난해한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역시 정치의 진실은 '경제'에 있다. 계급적 편향이 분명한 신자유주의적 유럽통합은 유럽의 대중들에게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정책 결정에서 자신들이 배제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이슈이다.
유럽헌법조약이 내세우는 여러 권리들에 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유럽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적 유럽통합의 연장선상에 있다. 도미니크 플리옹에 따르면 유럽헌법조약은 이례적인(anomalie) 것인데 경제정책에 대한 조항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구공산권 국가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일이다.12)
앞서 이야기된 BEPG는 헌법조약의 Ⅲ-185에 재등장한다.13) 딘 베이커에 의하면 결국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헌법부결을 가지고 온 것은 유럽중앙은행의 신자유주의적 방식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은 가격안정성을 유지시키면서, '성장을 지속시키려면, 사회보장을 축소시키라'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유럽인은 자신들이 국가 내에서 이룩한 사회보장체계가 유럽헌법조약에 의해 훼손될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인식한 것이다.14) 또한 Ⅲ-184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수렴기준'에 대한 논의가 재등장하는데, 그것은 유럽집행위원회가 회원국의 예산상황과 정부부채를 감시한다. 여전히 유럽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역할 이상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유럽헌법조약은 이른바 '노동에 종사할 권리'(right to engage in work) 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948년 UN인권선언에서 규정한 '노동에 대한 권리'(right to work)보다 후퇴한 조항으로 사회적 권리가 '자유경쟁'에 종속되는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15)
즉 Ⅱ-75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노동의 종사할 권리와 자유롭게 선택되거나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직업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Ⅱ-90에는 '모든 노동자는 부당한 해고(unjustified dismissal)에 대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헌법조약은 1948년 UN의 세계인권선언에 비하여 명확히 후퇴한 조항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3조 1항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모든 사람은 노동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자유로운 직업 선택(free choice of employment), 실업에 대해 보호받으며, 노동에 있어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16)
유럽헌법조약 반대의 의미
유럽헌법조약 반대는 우파들의 외국인 혐오증 등에서 비롯된 측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헌법조약에 대한 반대는 우선적으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한 대중적 거부로 보아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연원은 자유주의적 정치와 민족국가의 쇠퇴에 그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유럽연합이 약속하는 사회적 권리, 미국적 세계화로부터 유럽의 자율권 등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다.
결국 유럽헌법이 사회적 민족국가가 이루어놓은 권리조차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반대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구유럽으로의 회귀하려는 퇴행적 자세라 볼 수 없다. 초민족적 권리는 이미 민족적 권리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함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한 반대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갈등의 장이 펼쳐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유럽을 건설하는 과정이 바로 이 갈등의 장 속에서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갈등의 회피나 자유주의적 봉합은 오히려 진정한 민주적 정치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또한 그 무기력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과연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 유럽연합조약에 대한 반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준다. 그리고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갈등 그 자체에 있으며, 대안적 정치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봉합하는 데 있지 않다.
[각주]
* 이 칼럼은 유럽연합과 헌법조약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과의 토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유럽통합과 유럽헌법조약에 대한 세미나 과정에서 여러 조언을 해준 송종운, 박준우(이상 시민단체 활동가)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이 글이 가지고 있을 오류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필자에게만 있다.
1. 이 과정에서 국민투표에 대한 찬성운동과 반대운동,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운동은 집권당인 인민운동 연합(UMP)과 사회당의 일부와 ‘피가로’과 ‘르 몽드’, ‘리베라시옹’ 등을 위시한 대다수의 언론들이었다. 반대의 편에는 극우파인 르펜의 국민전선(FN), 사회당의 다른 분파, 프랑스 공산당(PCF),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주도하는 ATTAC(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추진협의회)등이 있다. 그리고 이 헌법 조약을 둘러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지식인들(안토니오 네그리, 에티엔 발리바르, 다니엘 벤사이드 등) 사이의 논쟁 또한 주목할만한 하다. 이에 대해서는 『자율평론』, 13호를 참조. 2. 이러한 쟁점은 많은 논쟁에서 드러낸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논쟁에서 대중은 일종의 무지자 또는 자기이익 추구를 하는 인간으로 모형화 되어있다. 문제는 엘리트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가 감축될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엘리트/대중은 물론이고, 인종적 차이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3. 유럽헌법 논쟁에 대한 정치이념적 갈등과 쟁점에 대한 논의는 강국, 「유럽헌법조약 부결과 정치이념논쟁」, 『월간 사회운동』,7/8월호, 2005을 참조하라. 본 칼럼은 위 글의 관점에 거의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글의 대부분은 E. Balibar, “Sur la ‘constitution’ de l’Europe Crise et Virtualiés”, 2004. http://www.passant-ordinaire.com/revue/49-635.asp. 에 기초하고 있다.
4. 여기서 신자유주의라 함은 80년대 초반부터 세계 경제에 부과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무역(국제무역의 자유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자유 시장의 형성, 뿐만 아니라 화폐(monetary)와 금융 메커니즘의 자유화를 뜻한다.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플리옹은 유럽연합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한 사례라 단언한다. G. Duménil and D. Plihon, “Liberalizing Trade and Finance, The Example of European Union”, ATTAC FRANCE, 2004. 신자유주의가 문제인 것은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유럽에 있어 1980년대 초반 ‘보수당 정권’에 의해 시행된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성장을 다시 달성하리라는 약속 하에서 그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현재 유럽은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으며, 이윤율과 이윤몫(profit share)의 상당한 회복에도 불구하고 투자율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J. Milios, “European Integration as a Vehicle of Neoliberal Hegemony”, Neo-liberalism: Critical Reader, Pluto Press, 2005.
5.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 1981년과 1986년에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1995년에는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이 가입하였다. 그 뒤 2004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키프로스, 몰타 등이 가입함으로써, 총 25개 회원국을 보유하게 되었다. 6. 이러한 점은 경제통합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유럽통합의 사례에서 볼 것처럼 이것은 자동적인 보호장치는 아니다. G. Duménil and D. Plihon, ibid, p.5, 참조.
7. G. Duménil and D. Plihon, ibid, pp.2-5, 참조.
8. 이 조약은 경제통합을 넘어 정치통합으로 나아갈 것을 그 목표로 한다. 더 이상 유럽경제공동체가 아니라 유럽 연합이며, 이러한 과정이 진행될수록 회원국간의 거시경제정책의 조정의 필요성, 교육, 사회보장, 연구개발(R&D), 환경에 관한 정책들의 조정이 결정적으로 된다. 이러한 과정의 산물이 우리가 쟁점으로 다루고 있는 유럽헌법조약이다. 9. 이외에 유럽통합에 있어 신자유주의적 관점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1996-97년에 제정된 안정성과 성장 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 SGP)이 있다. 물론 우리가 다루고 유럽헌법조약도 마찬가지이다. J. Milos, ibid, p.209, 참조.
10. J. Milos, ibid, p.210, 참조.
11. J. Milos, ibid, pp. 210-11, 참조.
12. D. Plihon, Inscire dans le traité constitutionnel européen les régles économiques présente un reel danger, ATTAC FRANCE, 2005. http://www.france.attac.org/a4728, 참조.
13. D. Plihon, ibid, 참조. Ⅲ-185는 다음과 같다. 제1항 유럽중앙은행체계의 우선적 목적은 가격안정성[물가안정]을 유지하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에 대한 편견없이, 유럽중앙은행체계는 Ⅰ-3에 쓰여있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유럽]연합의 일반적인 경제정책을 지원할 것이다.[이하 생략] Ⅰ-3 제3항의 내용은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soial market economy)와 완전고용, 지속가능한 발전, 균형적 성장 등에 대한 내용이다. 역시 이 조항에서 볼 수 있듯이 성장과 발전은 가격안정성에 종속되어있다. 유럽헌법전문은 Eurlex, http://europa.eu.int/eur-lex/lex/en/index.htm 에서 볼 수 있다.
14. 딘 베이커, 「복지국가 외면한 유럽헌법」, 한겨례신문, 2005년 6월 23일,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6/001000000200506292011228.html,.
15. 이 부분은 프랑스어로는 ‘droit de travailler’로 되어있다. 인권선언은 ‘droit au travail’이다. 1948년 UN 인권선언 전문은 http://www.unhchr.ch/udhr/index.htm 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 J. Milos, ibid, p.214, 참조.
17. 반대 투표자의 35%가 반대의 주요 이유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들었다. 강국, ibid, 참조, I. Wallerstein, "The Ambiguous French 'No' to the European Constitution", Commentary No. 163, June 15, 2005, http://fbc.binghamton.edu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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