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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대도박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NATO] 냉전종식 후 체제개편, [한미동맹] 체제개편 후 냉전종식?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출처 :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6/03/28/200603280500002/200603280500002_1.html
(2006.04.01 통권 559 호 (p194 ~ 213)
한미연합사령관(미국 육군대장)이 갖고 있는 전시 작전통제권(OP CON·Operation Control, 이하 작통권)을 한국군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올해 안에 전시 작통권 환수를 위한 조치를 마무리짓겠다”고 밝혔다. 특히 윤 장관은 “올해 말까지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SPI)에서 전시 작통권을 환수하기 위한 로드맵을 만들겠다”고 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은 자력으로 자국을 지키는 독립국가이니 당연히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미국군에 맡겨놓고 있으니 ‘한국은 주권(主權)이 없는 나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해외 안보전문가들은 이를 꼬집어 “한국은 일본 이상으로 미국에 안보 무임승차를 해온 나라”라고 지적했다.
올해 한국 국방비는 230억달러(약 22조8000억원)인데, 이는 세계 10위쯤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세계 최고의 국방비 지출국은 연 4800억달러 이상을 쓰는 미국. 2위군(群)은 일본·영국·프랑스·독일·중국 등인데 연 300억∼800억달러를 국방비로 지출한다. 그리고 연 100억∼300억달러를 지출하는 3위 그룹에 한국·이스라엘·대만·인도·사우디아라비아·이탈리아·캐나다·러시아·터키·호주 등이 포진해 있다.
한국은 무역이나 국내총생산(GDP) 규모와 마찬가지로 국방비 지출에서도 세계적 강국인 것이다. 이 정도의 ‘군사 강국’이라면 전시 작통권을 환수해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누구보다도 자주(自主) 의지가 강했던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은 왜 작통권 환수를 추진하지 않았을까.
현재의 적대상태가 계속되는 한…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이 미군에 넘어간 계기는 6·25전쟁이다. 당시 8개 사단이던 한국군은 10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한군의 선제공격에 밀려 초전에 3개 사단(2, 5, 7사단)이 사실상 궤멸하고 최고사령부인 육군본부가 마비되는 위기에 빠졌다. 의병이라도 일으켜야 할 상황이되자 김홍일, 김석원 등 중국군과 일본군 출신의 노병들이 패잔병을 끌어모아 방어전을 펼치는 처지가 됐다.
이때 희망의 불씨를 지핀 것이 유엔이었다. 1950년 7월7일 유엔은 침략자인 북한군을 응징하기 위해 유엔기(旗)를 사용할 수 있는 다국적군 사령부(당시 표현은 ‘통합군 사령부’, Unified Command)를 결성하고, 미군이 이 사령부를 통제하도록 했다. 유엔 깃발을 사용하는 다국적군(이하 유엔군) 구성이 확정되자 ‘외교의 귀신’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군을 더 빨리 끌어들이기 위해 비상수단을 내놓았다.
미군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는 유엔군을 지휘할 부대로 도쿄에 본부를 둔 미 극동군 사령부(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지정했다. 7월14일 이 대통령은 ‘현재의 적대상태가 지속되는 한(during the period of the continuation of the present state of hostilities)’라는 단서를 달아 한국군에 대한 ‘모든 지휘권(all command authorities)’을 넘기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맥아더 원수에게 보냈다.
지금 한국에서는 ‘all command authorities’를 ‘모든 지휘권’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all command authorities’는 헌법상 대통령이 가지는 것으로 규정한 ‘통수권(統帥權)’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통수권은 영어로 ‘the prerogative(특권) of supreme(최고) command’로 표기하지만, 뒤에서 설명할 NCMA에서처럼 ‘command authorities’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헌법에서 규정한 권한을 외국에 이양할 때는 국민투표나 국회 표결을 통해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든 것이 다급했으므로 이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육군 지휘부는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36세일 정도로 젊었고 이 대통령은 만 75세의 고령이었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외교의 달인이고 영어를 워낙 잘했으므로 그 누구도 미국과 접촉하는 이 대통령에게 조언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이 편지를 잘못 썼다는 것은 오히려 미국측에서 확인해줬다. 무초 당시 주한 미대사는 그후 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대통령이 미국군에 이양한 것을 ‘작전통제권(Operation Command Authority)’으로 표현했다. 미국은 통수권은 이양 대상이 될 수 없고 작전통제권만 이양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통수권은 크게 인사와 예산·군수 같은 군사행정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군정(軍政)과 군사작전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군령(軍令)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작통권은 군령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6·25 전쟁 내내 미국군은 한국군에 대해 군령권은 물론이고 군정권까지 행사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군사원조’란 명목으로 예산을 지원한 것. 그러나 한국군에 대한 인사권만은 이 대통령이 행사했다.
이러한 밀월관계는 1951년 미국이 정전(停戰)협정을 추진하면서 깨졌다. 이 대통령은 미군측에 “정전을 추진하면 모든 지휘권을 환수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위협했다. 정전협정을 맺으면 양쪽은 반드시 포로교환에 들어간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한 주장이 엄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했다.
방위조약·군현대화와 맞바꾼 작통권
깜짝 놀란 미군은 이 대통령을 제거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에 대한 한국민의 지지가 굳건한 것을 알고 실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정전에 협조하면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한국군 20개 사단을 무장시켜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했는데, 이 대통령이 못 이기는 척 이를 수용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인 1953년 10월1일 미국은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양국 국회의 비준동의를 거쳐 1954년 11월18일 이 조약을 발효시켰다. 그와 동시에 미군은 한국군 20개 사단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키고, 60만 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예산과 물자를 원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례가 돼 그후 오랫동안 한국군은 총병력 60만에 육군 상비사단 20개 전력을 유지했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병력을 늘림으로써 총병력 69만, 상비사단 22개의 현행 체제가 만들어졌다.
방위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4년 11월7일 양국은 ‘유엔군(미국군)사령부가 한국 방위를 책임지는 동안 유엔군사령부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계속 갖는다’는 문구가 들어간 합의의사록을 교환함으로써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한국은 핵심적인 국가 주권인 작전권을 넘기는 대신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이 대통령의 ‘벼랑끝 전술’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현대화라는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반면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한국군 작통권을 양도받음으로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미국과 한국 중에서 거래를 잘한 쪽은 어디일까.
미군이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원조를 1976년까지 계속한 덕에 한국은 과도한 국방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18년간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안보 지원이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5·18 때 문제 제기
미군에 대한 일방적인 안보 의존은 1968년 1월21일 북한군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을 계기로 깨지게 된다. 박 대통령은 사건 직후 응징보복을 계획했으나 작통권을 가진 미군이 반대했다. 그런데 이틀 후 미 해군 정보함인 푸에블로함이 북한 해군에 납치되자 미군은 항공모함을 북한 해역에 파견하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방위산업 육성에 착수했다. 국민은 미국에 의존하지만은 않겠다는 박 정권의 자주국방 노선을 지지했는데, 이러한 자주 의식이 그후 학생운동 세력에 ‘이상하게 접목’되면서, ‘한국은 미국에 자발적으로 안보권을 넘긴 게 아니라 빼앗겼다’라는 반미 자주의식을 낳았다.
반미감정이 증폭되는 데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시절 여러 차례 발동된 계엄령과 위수령도 한몫을 했다. 그중에서도 분수령이 된 것은 박 대통령 사망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터져나온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시위 규모가 커지자 계엄군이 유혈 진압에 나섰는데 이것이 정치 문제로 비화했다.
문제를 제기한 측은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은 미군에 있으므로 미군의 동의가 없으면 한국군은 유혈 진압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유혈 진압의 책임은 미군에 있다”고 따졌다. 이에 미국측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자 “그렇다면 한국군은 작통권을 가진 미군의 동의를 받지 않고 움직인 것이니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 된다”고 공격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성공시킨 박정희 세력이 계엄령을 선포해 권력을 장악해가자, 매그루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은 “박정희를 따르는 군부 세력은 미군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혁명을 감행했다. 군사혁명에 가담한 세력은 원대복귀하라”는 반(反)혁명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전례가 있는 만큼 미군은 ‘계엄령이 내려졌더라도 미군은 한국군의 작전을 통제해야 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때 자주능력이 커진 한국군에서 ‘대(對)간첩작전 본부장에 불과한 합참의장을 명실상부한 군령권자로 만들고, 합참 통제하에 육해공군이 합동작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안팎에서 군령권 문제가 거론되자 한미 양국은 작통권을 평시(平時)와 전시(戰時)로 나눠 갖자고 합의했다. 이때 유엔사 기능은 1978년 11월7일 발족한 한미연합사가 맡고 있었다.
한미 양국은 1994년 12월1일부로 전시 작통권은 한미연합사령관(유엔군 사령관)이, 평시 작통권은 한국군 합참의장이 행사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계엄령이나 위수령발동 상황의 작전이나 대간첩 작전, NLL(북방한계선)과 MDL(군사분계선) 상에서 북한군과 벌이는 교전은 평시 작전으로 규정돼 한국군 합참의장이 통제하게 됐다.
작통권은 평시보다 전시에 의미가 있다. 전시가 되면 휴지가 되는 평시 작통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평시에는 주권국가이지만 유사시엔 종속국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인식에 따라 전시 작통권 환수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시 작통권 환수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전시 작통권 환수가 쉽지 않다는 것은 미군이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데프콘(DEFCON)’과 한미연합사의 ‘작전계획 5027’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데프콘Ⅲ까지는 ‘평시’
데프콘은 ‘Defense Readiness Condition’을 축약한 것으로 우리말로 옮기면 ‘방어준비태세’가 된다. 미국군은 데프콘을 다섯 단계로 나눠놓았다(데프콘을 평시에 발령되는 ‘진돗개’와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북한 공작원이 침투한 흔적이 발견되면 합참은 ‘진돗개’를 발령해 평시작전인 대간첩작전을 펼친다).
데프콘Ⅴ는 군사적 긴장이 전혀 없는 태평성대를 뜻하는데 지금의 미국이 이에 해당한다. 미군은 여간한 위협이 아니면 데프콘을 올리지 않는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난 직후에도 데프콘을 격상하지 않았다. 초대형 테러가 일어났지만 미국이 생각하는 가상 적국에서 미국을 공격하려는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프콘 Ⅳ는 국지적 긴장이 있어 군사적 경계가 요구되는 상태다. 군사적 경계란 지금의 한국군처럼 많은 병력을 철책 근무에 투입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데프콘Ⅲ는 중대하고 불리한 영향을 초래할 정도의 긴장상태가 전개되거나 군사개입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다. 데프콘Ⅱ는 가상 적국이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태세를 강화할 징후를 보이거나 긴장을 고조시킨 상태이고, 데프콘Ⅰ은 가상 적국이 전술적인 적대행위를 보이는 전쟁 임박 상태다.
정전협정 이후의 한반도 상황은 대부분 데프콘Ⅳ에 해당했다. 데프콘Ⅲ는 딱 한 번 발령됐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지휘하던 보니파스 미 육군 대위와 발레트 중위 가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찍혀 살해된 직후였다.
한미 양국군은 데프콘Ⅲ까지는 평시로 규정한다. 지금 데프콘Ⅲ가 발령되면 합참의장은 한국군 전 장병에 대해 휴가·외출 금지령을 내리고, 전원 즉각 출동할 태세를 갖추게 한다. 장병들은 사전에 작전지역으로 정해놓은 곳으로 이동하진 않지만, 전투화와 전투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자면서 출동에 대비한다.
주한미군과 한반도 전구(戰區, Theater, 통합사령관이 작통권을 행사하는 지역)로 옮겨오는 증원군에 대해서는 전·평시를 막론하고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작통권을 행사한다.
미군 통수권 가진 미 NCMA
데프콘은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서 강화된다. 데프콘Ⅲ가 되면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군은 몇몇 신속 배치군을 한반도로 이동시킬 수 있다. 8·18 도끼만행 직후엔 오키나와에 있던 해병대 3사단(지금의 제3해병대 원정군)과 전폭기 대대, 그리고 7함대 소속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함과 구축함인 레이저함·미드웨이함을 한국 해역으로 이동시켰다.
증원군 파병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National Command and Military Authorities)’가 결정한다. 이 기구는 대통령과 부통령·국방장관·합참의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미군 통수권은 이 기구가 행사한다. 미국이 대통령 1인이 아니라 여러 명으로 구성된 기구에 통수권 행사를 맡긴 것은 통수권 행사에 따른 대통령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다.
국방 문제는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전문가다. 따라서 NCMA가 있으면 대통령은 자의적으로 통수권을 행사하지 않고 국방장관·합참의장과 상의해야 한다. 그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처럼 ‘모든 지휘권을 넘긴다’는 식의 실수를 피할 수 있게 되고, 통수권을 더욱 정교하게 행사할 수 있다.
NCMA가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정보다. 미군과 미 정보기관은 NCMA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교한 정보 수집 및 분석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정보감시태세’로 번역되는 ‘워치콘(WATCHCON·Watch Condition)’이다. 워치콘의 정도에 따라 데프콘이 변화할 정도로 워치콘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
워치콘 따라 데프콘도 변화
워치콘에도 다섯 단계가 있다. 워치콘Ⅴ는 일상적인 상황으로 징후 경보에 문제가 없는 상태. 워치콘Ⅳ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나 잠재적인 위협이 존재해 계속적인 감시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의 한반도 상황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워치콘Ⅲ는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초래될 우려가 있는 경우로, 적정(敵情) 감시를 위해 정보요원 근무를 현저히 강화한다. 정보요원들은 외출과 휴가가 금지되고 전원 정위치에서 근무하거나 대기한다.
워치콘Ⅱ는 현저한 위험이 일어날 징후가 보일 때 발령되는데, 이 경우 정보 전력과 요원이 증강된다. 워치콘Ⅰ은 적의 도발이 명백할 때 내려지는데, 한반도에서는 아직 발령된 적이 없다.
워치콘Ⅲ는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1992년 10월 발령됐다. 당시 북한은 총리급 회담을 비롯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하고 준(準)전시 상태를 선포해 한미연합사를 긴장시켰다. 워치콘Ⅱ는 1982년 2월 북한군이 IL-82 폭격기를 전진 배치하고 북한 전역에서 공군 훈련을 펼쳤을 때와 1996년 4월5일 북한군이 판문점에 무장병력을 투입했을 때, 그리고 1999년 6월 서해교전 때 발령됐다.
워치콘Ⅱ가 발령되면 데프콘Ⅲ가, 워치콘Ⅰ이 내려지면 데프콘Ⅱ가 발령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데프콘Ⅲ 상태에서 워치콘Ⅱ가 발령되면 미 NCMA는 한반도 전구로 증원군 파병을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전체 미국군 차원에서 ‘신속억제방안(FDO)’을 가동하거나, 태평양사령부 차원에서 신속배치군을 보내는 ‘전투력 증강(FMP)’ 계획이 가동된다.
한반도 위기시 발령되는 150여 개의 신속 억제방안 시나리오는 작전계획 5027에 들어 있다고 한다. 그중 핵심이 정찰·감시부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키는 것.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한국에 파견하는 U-2 고공정찰기 등을 대폭 늘리는 것이다.
U-2는 대공(對空) 미사일이 올라오기 힘든 7만3500피트(약 24.5km) 이상에서 비행할 수 있어 적 영공으로 들어가 정보를 수집한다(보통 전투기는 10~13km인 3만~4만피트 상공에서 비행한다. U-2는 1960년 5월1일 소련 영공에서 정찰하다 소련군이 쏜 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적이 딱 한 번 있다).
미군도 24대만 갖고 있다는 대표적인 신호정보 수집기 RC-135도 이동해올 수 있다. 신호정보란 각종 무선발생기에서 나오는 전파인데, RC-135는 공중에서 이를 포착해 해독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적진 침투가 가능한 장거리 무인 정찰기 ‘글로벌 호크’와 중거리 무인 정찰기 ‘프레데터’도 들어와 북한 영공에서 정보 수집에 들어간다.
주한 미 8군에는 ‘가드레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신호정보 수집기 RC-12H를 운영하는 501 정보여단이 배속돼 있는데, 워치콘Ⅱ가 발령되면 이 여단의 전력도 현저히 강화된다. 주한 미 2사단에 배속된 정보대대도 전력을 강화해 섀도-200 무인정찰기 등으로 북한군 동태를 감시한다.
이들 정보부대에 대한 통제는 CIA보다 세 배 많은 예산을 쓰는 NSA(국가안보국)의 한국 파견부대인 SUSLAK이 담당한다. SUSLAK에 대응하는 한국군 정보부대는 777부대인데, 두 부대는 ‘통신정보협정’을 맺고 있어 수집한 정보를 맞교환한다. 777부대는 전방 고지에 설치한 신호정보 수집 장비와 백두정찰기에서 얻은 정보를 SUSLAK에 제공한다.
한국군은 SUSLAK뿐 아니라 오산 기지에 있는 K-COIC(한국전투정보작전본부)와 CACC(연합분석통제본부)를 통해서도 미군이 획득해온 정보를 제공받는다. 한미 공군이 합동근무하는 이곳으로는 U-2기 등이 찍어온 사진정보와 신호정보가 들어온다.
한국은 공군 37전대가 RF-4C 정찰기와 신형 정찰장비인 EO/IR을 갖춘 KF-16을 띄워서 입수한 정보, 금강정찰기 등을 운용하는 정보사가 획득한 영상정보와 인간정보, 그리고 전방 군단에서 한국형 무인정찰기 ‘나이트 인트루더’로 입수한 정보를 미군에 제공한다.
한미 정보부대가 입수한 정보는 한국군 합참 정보본부에 취합돼 한국군 수뇌부의 판단자료로 활용된다. 한편 국가정보원은 이 자료에다 국정원이 운용하는 첩보위성 자료를 보태고 CIA와 교환한 자료를 더해 한국 대통령이 볼 판단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 NCMA는 한국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보고받는다. 태평양사령부와 동급인 미국의 전략사령부(USSTRATCOM)는 한반도 전구 밖인 중국과 러시아 해안 쪽으로도 U-2, RC-135, EP-3 등의 첩보기와 첩보함 잠수함 등을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기 때문이다. 이 사령부는 뛰어난 해상도를 자랑하는 초특급 첩보위성 KH-12와 라크로스 위성 등을 통해 영상정보와 신호정보도 수집한다.
육해공군 정보부대와 CIA, NRO(국가정찰국) 등 15개 정보기관이 수집·분석한 정보는 DNI(국가정보국)에서 취합돼 NCMA에 보고된다. 이러니 미국 NCMA는 국정원과 777부대, 정보사령부 그리고 한국에 있는 미군 정보기관이 생산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해야 하는 한국 대통령보다 월등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한미연합사는 유사시 양국 대통령과 양국 합참의장의 통제를 받게 돼 있지만, 미국이 생산하는 정보의 양과 질은 한국을 월등히 앞서므로 한미연합사는 미국이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미국은 한반도 외부에서 독자적으로 입수한 정보는 NCMA에서 활용하고 난 다음에야 한국에 제공한다.
위기가 고조될수록 미국의 상황 주도권은 강화되는 것이다. 신속억제방안을 가동했는데도 북한군이 공격 징후를 강화하면 NCMA는 ‘전투력 증강(FMP)’ 계획을 가동한다. 이에 따라 제3해병대원정군과 7함대 등 태평양사령부 예하 부대가 한반도로 이동해온다. 최근 미 육군에 창설된 신속배치부대인 스트라이커 여단도 올 수 있다.
신속억제방안과 전투력 증강계획은 순차적으로 발령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면 동시에 발령될 수도 있다. 위기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한국에 들어오는 미국 정보 자산과 증원전력이 늘어나기 때문에 1994년 한국은 전시 작통권을 환수하지 못했던 것.
데프콘Ⅱ부터 戰時
데프콘Ⅱ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딱 한 번 발령됐다. 8·18 도끼만행 사건으로 데프콘Ⅲ 위기가 이어지던 1976년 8월21일, 유엔군사령부는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폴 번연 작전’을 감행하면서 데프콘Ⅱ를 발령했다.
지금 데프콘Ⅱ가 발령되면 한국 정부는 전시임을 선포하지 않지만, 한미 양국군은 전시체제로 들어간다. 한미연합사령관이 주한미군사령부에 배속된 작전부대와 한국군 전투부대를 통제한다. 데프콘Ⅱ가 발령되면 전 장병은 탄약을 지급받고 주둔지(내무반이 있는 부대)를 떠나 담당할 작전지역으로 이동한다. 야전군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각급 부대 중에서 최전방에 있는 것이 GP인데, 초전에 적군의 공격을 받아 점령될 가능성이 높은 GP 부대는 GP를 파괴하고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후퇴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폭격과 포격에도 견딜 수 있는 철옹성 구조를 갖춘 GP 부대는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GP에 잔류한다.
남방한계선을 지키는 GOP 대대들도 일부는 철수하고 일부는 철옹성 구조의 산악 진지에 들어간다. GP와 GOP에 잔류한 부대는 인민군이 진격하면 이들의 움직임을 감시해 보고하고 적 후방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방어에 어려움이 있는 GP와 GOP 부대를 철수하는 것은, ‘FEBA(전투지역 전단)’라고 하는 남방한계선 남쪽과 민통선 북쪽 사이의 공간을 전투무대로 삼기 위해서다. 북한군의 진격이 시작되면 한미 연합 포병은 텅 빈 FEBA 지역을 향해 집중적으로 사격한다. GP와 GOP 부대는 이미 철옹성 진지에 들어가 있으니 진격하는 북한군을 마음껏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군사분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이 시작됐다는 것은 곧 데프콘Ⅰ이 발령됐음을 뜻한다. 그러나 데프콘Ⅰ 발령 전에도 아군 포병은 북한군을 향해 사격할 수 있다. 북한군이 특정지역으로 대거 몰려들면, 그곳을 주공(主攻)이나 조공(助攻)의 출발지로 삼아 순식간에 FEBA를 돌파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북한군 집결을 저지하기 위해 사전 포격을 퍼붓는다.
이에 대해 북한군 포병이 포격으로 대응하면 데프콘Ⅱ 상황임에도 남북한은 사실상 전쟁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포격전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집결이 강화되면 한미연합사는 보다 더 강화된 방어전 준비에 들어간다.
서울 이북의 도로 곳곳에는 양쪽에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를 올려놓은 ‘대(對)전차 장애물’이 있다. 데프콘Ⅱ의 위기가 발생하면 아군은 북한군 기동부대가 일시적으로 장악할 것으로 예상되는 도로의 장애물을 허물어 길을 차단하고 도로 곳곳에 대전차 지뢰와 대인지뢰 등을 박아넣는다.
440만명으로 커지는 한미연합군
후방에서는 예비군 소집 동원령이 떨어진다. 군사분계선에 배치된 22개 상비사단은 평시엔 필요인원의 80~90%만 채우고 있다(간편(簡編) 체제)가, 동원령이 발령되면 갓 제대한 동원예비군이 들어와 100% ‘완편(完編)’ 사단이 된다. 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동원예비군은 16개 동원사단에 들어간다. 동원사단은 상비사단 뒤쪽으로 이동해 상비사단을 지원한다.
더 나이가 많은 일반 예비군은 후방을 지키는 9개 향토사단에 입소한다. 이런 식으로 입소하는 동원·일반 예비군 병력은 304만여 명. 한국군은 현역 69만명에 예비군을 더해 370만이 넘는 대병력을 가진 군대가 된다. 동원된 예비군은 현역과 함께 한미연합사의 통제를 받으며 D-데이 H-아워에 펼칠 작전을 반복하는 훈련에 들어간다.
데프콘Ⅱ가 발령되면 미군도 바빠진다. 데프콘Ⅱ에서 미군은 작전계획 5027에 따른 ‘시차별 부대전개제원(TPFDD)’을 가동한다. 이 계획은 전투장비는 배에 싣고, 전투병력은 항공기에 실어 한국으로 옮긴 다음, 둘을 결합해 전방지역으로 보내는 것이다. 미군은 이 제원을 숙달하기 위해 해마다 연합전시증원(RSOI) 연습을 하고 있다.
미군은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전을 통해 실전 상황에 맞는 시차별 부대전개제원을 다듬어왔다. 이 계획이 완전 가동되면 한반도 전구에 들어온 미군 규모는 69만명이 된다. 이로써 한미연합사령관은 도합 440만 대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된다.
공세이전→격멸→민사작전
이러한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진격하거나 노동미사일을 발사할 조짐을 보이면, 데프콘Ⅰ이 발령된다. 그 순간 한국 정부는 전시를 선포하며 정부 조직과 운영 체제를 전시 체제로 바꾸고, 합참의장을 계엄사령관으로 한 계엄령을 선포한다. 합참의장은 육군 2군사령부와 향토사단을 주축으로 남한지역을 대상으로 계엄 업무를 수행한다.
북한이 노동 미사일을 발사할 움직임을 보이면 한미연합 지상군은 ATACMS(에이타킴스) 미사일을, 미 해군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한미연합공군은 대규모 공격편대를 띄워 북한 전역을 초토화하는 ‘충격과 공포’ 작전을 감행한다. 미사일과 항공 폭격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이라, 이라크전에서 미국은 이를 ‘A(Air)-데이’ 작전이라고 했다.
A-데이 작전은 한미 연합정보부대가 북한 노동미사일의 움직임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능력은 미군 정보부대가 갖고 있으므로 A-데이 작전 개시 여부 또한 미군이 결정하게 된다. 북한군이 노동미사일을 쏘지 않고 지상군만으로 남진을 시작하면 A-데이 작전의 규모는 작아질 수 있다.
데프콘Ⅰ의 하이라이트는 북한군의 FEBA 지역 돌파를 저지하던 한미연합 지상군이 방어전을 중단하고 역습에 들어가는 ‘공세이전(攻勢移轉)’ 단계다. 공세이전은 1개 해병대 사단과 1개 비행단, 1개 지원여단으로 구성된 미국 제3해병대 원정군이 2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편성된 한국 해병대와 한팀을 이뤄 상륙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미연합해군의 지원을 받은 연합해병대가 평양에서 가까운 서해 남포 인근이나 상륙조건이 좋은 동해 원산 부근의 해안으로 돌격 상륙하는 순간, 한미연합 지상군도 대대적인 반격전에 돌입한다. 이른바 ‘G(Ground)-데이’ 작전이 시작되는 것인데 이때 최선봉에는 ‘맹호’ ‘불무리’ ‘화랑’ 등 한국군의 6개 기계화보병사단과 미 2사단이 선다.
7개 기동부대는 한미연합공군의 지원을 받아 순식간에 북한 깊숙한 지역까지 통로를 개척하는 ‘종심(縱深)작전’을 전개한다. 통로가 열리면 16개 보병사단이 쏟아져 들어가 ‘전과(戰果) 확대 작전’을 펼치고, 16개 동원사단이 따라 들어가 이들이 확보한 지역을 경계한다. 그 뒤로 보급부대가 들어와 보급선을 구축하면, 기동사단과 보병사단은 숨쉴 틈을 주지 않고 2차 공격에 들어간다.
2차 공격부터는 북한의 굴복을 요구하는 ‘격멸(擊滅)’ 단계에 해당한다. 격멸단계는 북한 정부가 항복하거나 한미연합군이 북한 전역을 차지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때 진격 속도를 늦추면 북한군의 저항이 커져 피해가 확대되므로 연합지상군은 보급선이 확보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진격한다.
격멸 단계가 끝나면 한미연합사는 북한 지역을 상대로 한 군정(軍政)에 들어간다(여기에서의 ‘군정’은 군령에 대비되는 군정과 다르다. 이 군정은 민사작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한미 양국은 한미연합군이 장악한 북한 지역에 대한 군정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마찰을 빚어왔다.
한국군이 민사사령관 담당
한국은 전쟁을 통해 획득하는 북한 땅을 ‘수복(收復)지구’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조문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한국은 “북한 땅은 원래 우리 영토인데 미수복지구로 있다가 수복되면 당연히 한국 정부가 이 지역에 대해 행정력(계엄)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국은 “전쟁을 통해 획득하는 땅은 점령지이므로 한미연합사가 군정을 펼치고 이어 그 지역 주민들에게 자치권을 줘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때 북한 주민들이 ‘우리는 한민족이다’라며 한국과 합치겠다고 하면 통일은 쉽게 이뤄진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이 합병을 거부한다면 한반도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처럼 대립하지 않되 별개 국가가 되는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한국은 “향후 전쟁을 치르며 통일을 이룬다면, 다시 한반도가 쪼개지는 상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에서 보듯이 전쟁에서 이긴 군대가 점령지에서 군정을 펼치고 이어 그곳 주민들에게 자치권을 주는 것이 국제적인 룰이다. 그리하여 나온 타협점이 ‘군정을 펼칠 연합민사(民事)사령부는 한국군 장성이 사령관을 맡고, 구성원도 대부분 한국군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비록 군정의 형태이긴 하지만 회복하는 북한 땅에 한국 행정력을 투입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놓았다.
데프콘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것은 미군의 협조 없이는 한반도 평화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위기가 고조돼 전쟁이 일어난다면 한국은 미국 증원군과 합세해 비교적 쉽게 북한군을 격파하고, 한미연합사의 군정을 거쳐 북한을 흡수통일할 수 있게 된다.
전시 작통권을 미국이 갖고 있기에 한국은 위기상황을 피할 수 있고, 불가피하게 위기가 고조되면 통일을 이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시 작통권을 갖고 있지 않아도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위기시나 전쟁시 증원군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국은 6·25전쟁 때처럼 작통권 이양을 전제로 증원군을 파병할 것이 분명하다.
2003년 이라크전이 발발하자 쿠웨이트는 미군에 전진기지를 제공했다. 1991년 미국이 걸프전에 승리해 이라크가 장악한 쿠웨이트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이때 미국은 쿠웨이트와 다양한 협정을 맺음으로써 전시 작통권을 거머쥐었다. 이라크에 대한 군정이 끝나고 이라크 민간 정부가 출범하면, 미국은 한미연합사와 같은 연합사령부를 이라크에 만들고 전시 작통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
자주의식이 강한 일부 세력은 이러한 현실을 부인한다. 이들은 오히려 ‘미국이 북핵 위기를 핑계로 북한을 공격해 한반도를 전시로 몰아넣는 상황’을 염려한다. 이른바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론인데 이러한 염려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더욱 깊어졌다. 이들은 한반도가 미국에 의해 다시 전쟁상태로 가는 것을 막으려면 미국에 준 전시 작통권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戰時는 북한이 만든다
그러나 이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난해 발표된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미국은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는 문구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들은 “이 성명은 중국·러시아 등과 함께 합의해서 발표한 것인 만큼 미국이 쉽게 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안보 전문가들은 이런 지적에 동의한다. 이들은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거론한다. 방위조약은 서문과 제1항에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문제 해결을 강조하면서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과 평화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풀려는 노력이 상대의 공격으로 인해 무너졌을 때 양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먼저 한국이나 미국을 공격하지 않는 한 미국은 격멸 단계까지 치닫는 작계 5027을 가동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를 전시 상태로 만드는 것은 미국보다는 북한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군에 대한 전시 작통권을 가동케 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다.
따라서 전시 작통권 환수 문제는 한미간 불신의 골을 깊게 하기보다는 국가 자존심을 세우는 차원에서 추진돼야 한다.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유지한 상태에서 전시 작통권 환수를 추진하는 것인데, 이 일도 간단치 않아 보인다.
방위조약문은 ‘한국과 미국 중 어느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다른 쪽이 돕는다’는 동등의 원칙을 담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거의 일방적으로 한국을 돕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 이 시혜의 반대급부로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한국군 전시 작통권을 가져갔다. 따라서 전시 작통권 환수는 방위조약 자체의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방위조약을 유지하면서 전시 작통권을 가져올 방법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체제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NATO는 미국 등 19개 회원국이 참여한 동맹기구다. 따라서 회원국 중 어느 한 나라가 전쟁을 벌이면나머지 회원국들도 동맹국의 전쟁 상대국과 전쟁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좋은 예가 1982년 NATO의 핵심 회원국인 영국이 포클랜드 섬 영유권을 놓고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벌였을 때다.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할 때 미국 등 나머지 회원국은 아르헨티나와 싸우지 않았다. 이유는 NATO 차원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개별 국가 차원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NATO는 WTO(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 방위기구이므로 NATO군(軍)이 동원되려면 회원국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냉전이 종식된 1991년 WTO가 해체됐다. NATO군 총사령부로서는 가상적을 잃었으며 이로써 NATO군 총사령부도 설 자리를 잃게 됐다.
WTO 해체로 평시 조직화한 NATO군
캐나다는 과거 영연방의 일원이었고 미국과 가까워 NATO에 가입했는데, NATO는 유럽 위주로 움직였다. 이에 대해 캐나다는 불만을 토로해왔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맞물리면서 NATO군은 유럽동맹군사령부(ACE)와 대서양동맹군사령부(ACLANT) 체제로 나뉘게 됐다.
NATO가 유럽동맹군사령부와 대서양동맹군사령부를 출범시킨 것은 평시 체제를 갖추게 됐음을 뜻한다. 유럽대륙을 책임구역으로 하는 유럽동맹군사령부는 유럽 국가 출신 대장이 돌아가면서 사령관을 맡고, 대서양동맹군사령부에서만 미군 대장이 사령관을 맡음으로써 NATO는 유럽 위주로 움직인다는 시비도 벗어났다.
두 사령부 위에는 미군의 유럽사령부(USEUCOM) 사령관이 겸직하는 NATO군 총사령부가 있으나, 평시에 이 사령부는 나설 이유가 없다. 이는 1994년 12월 평시 작통권이 반환된 후의 한반도에 비교될 수 있다. 1994년 12월 이후 한반도에는 전시 작통권을 가진 한미연합사와 평시 작통권을 가진 한국 합참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적(敵)인 북한이 붕괴된다면, 한반도는 전시체제가 될 일이 없으므로 한국군 합참이 사실상 모든 한국군을 통제하게 된다. 이때 한미방위조약 정신에 어긋나는 갈등이 생기면 미국은 파병하지 않는다. 포클랜드 전쟁의 영국처럼 한국은 한국군 합참 중심으로 전쟁을 하게 된다. 북한이 무너지면 한국군이 사실상 모든 작통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NATO 회원국은 각국이 작통권을 갖고 있으나 NATO 전체 문제에 한해서는 NATO에 작통권을 위임한다. 그런데 NATO는 전시와 평시 체제를 나눠서 전시에는 총사령부가, 평시에는 유럽동맹군사령부와 대서양동맹군사령부가 작통권을 행사하는 2중 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WTO가 해체됨으로써 앞으로 상당기간 NATO가 전시 체제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으므로 유럽국가들은 유럽동맹군사령부 중심으로 유럽의 위기를 관리하게 됐다.
WTO의 붕괴로 평시 체제가 확고해짐에 따라 유럽은 미국이 갖고 있던 작통권을 유럽으로 가져온 셈이 되었다. NATO 회원국은 개별 국가 문제는 각국이 작통권을 가진 자국군으로 해결하고, 유럽에서 일어나는 위기는 유럽동맹군사령부에 일부 부대 작통권을 위임해 해결한다. 그리고 NATO 전체 회원국이 위기를 맞으면 뒷전으로 밀려난 NATO 총사령부를 등장시키고 작통권을 맡겨 대처한다.
유엔사가 전시 작통권 행사
이러한 시스템을 한미동맹에 적용하면 전시 작통권 환수 문제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양자동맹이고, NATO 동맹은 다자동맹이라는 차이가 있다. 한미합의록에 따르면 한국군은 미군이 아니라 유엔군에 작통권을 위임했다. 그런데 1978년 한미연합사가 만들어져 유엔사를 겸하게 되면서 유엔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1994년 12월부터는 한미연합사(유엔사)도 전시에만 작통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인류 역사상 전시보다 평시가 훨씬 더 길게 유지됐다. 따라서 북한이 사라진다면 항시 평시체제가 되므로 한국군은 작통권을 100%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유럽과 달리 적이 남아 있다. 이런 가운데 전시 작통권을 환수하겠다니 이는 한미 간에 심각한 마찰을 초래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움직임과 관련해 신임 한미연합사령관 버웰 벨 대장은 미 상원 청문회에서 “유엔사에 대한 미국 외 15개 참전국의 소임을 늘리고, 유엔사가 유사시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여시킴으로써 유엔사를 진정한 다국적군 사령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벨 대장의 이 발언은 한반도 유사시(전시)를 대비한 사령부로 양자기구인 한미연합사 대신 16개국과 한국이 참여하는 유엔사를 활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한미연합사는 해체되거나 지금의 유엔사처럼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
6·25전쟁 때 한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유엔 회원국이다. 따라서 유엔사가 전시 작통권을 가지면 유엔사에 가입한 한국군도 전시 작통권을 가진 셈이 된다.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계책이지만 이 방법만이 방위조약을 손대지 않고 한국이 전시 작통권을 가져오는 방안이다. 한국도 참여하는 유엔사가 전시 작통권을 행사하고, 한국군 합참은 평시 작통권을 행사하는 체제가 구축된다면, 미국군 단독의 북한 공격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이렇게 되면 한국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살피면 유엔사는 미군 합참의 통제 아래 있으므로 전시 작통권은 여전히 미군이 쥐게 된다. 때문에 벨 대장은 한미연합사가 아닌 유엔사를 전면에 내세우겠다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도 NCMA 만들어야
어찌보면 한국은 전시 작통권을 줌으로써 미국군을 ‘용병’으로 고용해, 국가를 지키고 경제발전을 도모했으며 유사시 통일할 수 있는 방법도 마련한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북한군이 전면적인 도발을 하지 않는 한 한반도가 군사적 충돌에 의해 통일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남북한이 불가침조약을 맺고 경제교류를 활성화해 경제부터 통합하는 길을 걷는다면, 자유화의 맛을 본 북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 수 있다. 그로 인해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북한 주민들이 국민투표를 통해 한국에 합병되기를 원한다면 고대해온 평화통일이 이뤄질 수도 있다.
현재 한국은 대통령이 국군 통수권을 가진 상태에서 자문기구에 불과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안보 문제를 결정하는 불안정한 시스템을 택하고 있다. 안보 전문가들은 전시 작통권을 환수하려면 한국군 정보능력을 강화하고, 미국처럼 NCMA를 만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유럽은 냉전이 끝난 후 NATO를 개편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냉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한미군사동맹의 재편을 시도하고 있는 만큼 미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NCMA를 만들고 자주파가 아니라 동맹파가 노무현 정부를 끌고 나가게 해야 한미군사동맹 재편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견해다.
<별첨1> 정보능력이 곧 작전능력
백두·금강정찰기, 경보기 연계한 합동전술핵심체계 구축해야
한국군 핵심 정보전력인 백두정찰기
전시 작통권 환수를 전제로 할 경우 한국군이 무엇보다 시급히 강화해야 할 부문은 정보 분야다. 현대 군사에서 정보능력은 단순한 정보능력에 머물지 않는다. 정보는 작전과 동의어로 쓰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1차적 정보는 신호 정보 수집을 통해 이뤄진다. 신호 정보 수집은 적지(敵地)에서 나오는 모든 신호를 수집 분석하는 것이라 적이 어디에 숨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데 효과가 있다. 이를 위해 신호정보 포착이 용이한 전방 고지(高地)에 신호정보수집 장비를 배치한다.
그러나 앞쪽에 큰 산이 있으면 수상한 신호가 나오는 곳의 좌표를 찾기 힘들어진다. 이 문제는 비행기에 신호정보수집 장비를 실어서 해결하는데, 현재 한국군은 백두정찰기를 신호정찰기로 운용하고 있다. 신호정찰기는 높은 고도에서 이동하면서 신호를 수집하므로 사각(死角)이 적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정보가 곧 작전
미국군은 U-2 정찰기를 활용한다. 백두는 일반 비행기가 날아가는 고도로 비행하므로 적 영공엔 들어가지 못하나, U-2는 대공(對空) 미사일이 올라오기 힘든 고공으로 비행하므로 적 영공에 침투할 수 있어 보다 중요한 정보를 잡아낼 수 있다.
미국군이 운용하는 또 하나의 신호정찰기 RC-135는 초대형이다. RC-135의 최대 이륙중량이 136t. 이륙중량 12t인 백두보다(U-2는 18t) 10배 이상 무겁다 보니 RC-135는 백두에 싣지 못하는 온갖 장비를 다 실을 수 있다. RC-135는 적 영공으로 침투하진 못하나 수집과 분석을 할 수 있다.
차곡차곡 쌓인 신호 정보를 해독하면 적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호가 나오는 곳의 좌표는 영상정찰기 운용부대에 통보되는데, 영상정찰기는 이 좌표 지역을 동영상과 정지사진으로 촬영해 어느 것이 신호를 쏘는 시설인지 찾아낸다.
미국은 적 영공 침투가 가능한 U-2로 적진을 촬영한다. 그러나 한국은 백두와 동형인 금강정찰기를 운용하므로 적 영공에 들어가지 못한다. 요즘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구글에서도 정밀한 위성사진을 공개할 정도로 위성사진 분야가 발전했다. 미국은 군사용 첩보위성으로도 적 지역을 촬영하므로 한국보다 월등히 많은 정보를 확보한다.
군사용 첩보위성은 지구 궤도를 회전하며 적지를 촬영한다. 천문관측 기술이 발달했다면 적국은 이 위성의 회전 주기를 알아내 위성이 접근해올 땐 주요 시설을 은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어를 뚫기 위해 미국은 불시에 수상한 곳으로 U-2를 투입해 정밀 촬영을 한다.
사진 판독을 통해 확인된 정보는 작전부대에 제공되는데, 작전부대는 이를 유사시 파괴해야 할 표적으로 등록한다. 작전부대는 어느 무기로 이 표적을 파괴할 것인가도 결정한다. 이렇게 되면 유사시 작전부대는 동일 표적을 중복 사격하지 않고, 한 개 표적은 한 번 사격으로 날리는 초정밀 공격을 할 수 있다.
데이터 링크 시스템
미국군은 신호정찰기, 영상정찰기, 그리고 공중조기경보통제기를 유기적으로 엮어놓았다. A-데이 작전이 끝나고 육군과 해병대가 움직이는 G-데이 작전이 시작되면 적 지상군과 공군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동한다. 이때부터 아군이 찾아야 할 것은 고정 표적이 아니라 이동하는 적 지상군이다.
적 지상군도 바보가 아니므로 탐지가 어려운 야간에 기동한다. 그러나 각 부대를 통제해야 하므로 무선을 쏠 수밖에 없는데 그 좌표를 야간 정찰에 나선 신호정찰기가 포착해 데이터 링크 시스템을 통해 영상정찰기에 알려준다. 그 순간 영상정찰기가 좌표 점을 촬영해 이동 중인 적군의 규모 등을 확인하다.
그리고 데이터 링크 시스템을 통해 경보기에 알려주면 경보기 또한 데이터 링크 시스템을 통해 초계비행 중인 전투기나 육군의 ATACMS, 해군의 토마호크 미사일 부대에 통보해 바로 공격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발견과 동시에 격파한다는 ‘Sensor-to-Shooter’ 개념이다.
미 공군은 L-16이라고 하는 데이터 링크 시스템을 깔아놓았고 해군은 L-12를, 육군은 GCCS 시스템을 설치했다. 이 시스템은 호환성이 있어, 미국 육·해·공군의 모든 작전부대는 타군이 발견해준 표적도 날려버릴 수 있다.
미국군은 이 시스템을 군사용 통신위성에도 연결해놓았으므로, 전세계를 무대로 ‘Sensor-to-Shooter’ 개념의 작전을 펼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바탕으로 중동에서 발견한 표적에 대한 공격 여부를 워싱턴DC에서 판단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통신망은 막대한 정보 유통을 전제로 하므로 대형 컴퓨터를 필요로 한다. 컴퓨터는 새로 수집한 첩보를 과거에 축적해놓은 첩보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순식간에 판단한다. 아군 지휘부는 이 통신망과 컴퓨터를 통해 적진을 감시·정찰하는 정찰기와 경보기 전투기를 통제하고 지휘한다.
이로써 지휘(Command) 통제(Control), 통신(Communications), 컴퓨터(Computers)가 정보(Intelligence), 감시(Surveillance), 정찰(Reconnaissance)과 한몸이 돼 움직이는 체제가 구축되는데, 각각의 머리글자를 따서 C4ISR 체제라고 한다. 이 체제 때문에 정보=작전이 된다.
과거 한국군은 C4ISR를 ‘지휘·통제·통신… 정찰’로 전부 풀어서 번역했으나, 최근에는 ‘합동전술핵심체계’로 옮긴다. 합동전술핵심체계란 말 속에 정보=작전 개념을 집어넣은 것이다. C4ISR은 건물을 짓듯이 종합적으로 설계돼야 한다. 그러나 건물 같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추상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라, ‘합동전술핵심체계 종합 아키텍처(architecture, 건축)’ 또는 ‘합동전술핵심체계 종합구조’로 표현한다.
합동전술핵심체계 구축은 군정권을 갖고 있는 각군 본부가 해야 할 핵심 사업이 되고 있다. 이 사업은 정보화사업으로 통칭되는데, 정보화사업은 인사와 군수·전력 증강 같은 전통적인 군정 업무를 제치고 각군 본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업무가 되고 있다.
이처럼 정보 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한국군의 인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백두와 금강은 한국군이 갖고 있는 최고의 정보 자산인데, 백두·금강이 형편없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미국은 적진 침투가 가능한 U-2 정찰기 자체는 물론이고 그 제작 기술을 어떤 동맹국에도 제공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중견 강국도 백두·금강과 유사한 정찰기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이 노력해야 할 분야는 백두와 금강 그리고 향후 도입할 경보기 사이에 데이터 링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해군과 육군이 구축하는 데이터 링크는 물론이고 미군 시스템과도 연결해놓아야 ‘정보=작전’ 체제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한국군에 이를 추진할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점. 777부대와 정보사 등 한국군 정보부대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전문가는 많아도 데이터 링크로 엮는 분야의 전문가는 부족하다고 한다. 현재 한국군은 백두·금강정찰기를 각 4대씩 보유하고 있다. 이 정찰기는 6시간씩 비행할 수 있으므로 이론상 24시간 두 정찰기를 활용할 수 있다(4x6=24). 그러나 이는 허구다. 비행시간에는 정보 수집을 못하는 이착륙 시간이 포함돼 있는데 이를 빼면 실제 비행시간은 5시간 정도로 줄어든다.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정찰기를 훈련기로 빼내는 경우가 있고, 정비를 위해 비행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한 대로는 한반도 전역을 정찰할 수 없어 두 대를 띄울 때도 있다. 따라서 한반도 상공에는 백두와 금강이 떠 있지 않은 때가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최소 각 8대는 있어야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보부대 통합운영 필요
777부대와 정보사는 백두와 금강정찰기에 탑재하는 장비를 운용하고, 공군은 항공기를 책임진다. 이렇게 3개 부대가 나눠맡다 보니 가끔 파열음이 일어난다. 지난해 금강정찰기 한 대가 착륙 중 랜딩기어가 부러지며 동체 착륙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렇게 되면 공군은 같은 사고를 막기 위해 사고원인을 알 때까지 동일 항공기에 대해서는 이륙을 금지하는 ‘그라운드’ 명령을 내린다.
그라운드 기간이 길어지면 777과 정보사는 마음이 급해진다. 그러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공군은 섣불리 이륙을 허가할 수 없어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제한돼 있는 한국군의 정보자산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면 세 부대를 통합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러나 일심동체가 되지 않는 물리적 혼합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작전부대는 유사시에 활약하지만 정보부대는 전·평시를 막론하고 활동한다. 또 정보=작전이므로 정보자산 확충은 곧바로 작전 능력 증강으로 이어진다. 한국군은 현재 69만인 병력을 2020년까지 50만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고 그와 동시에 전시 작통권 환수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때 정보력을 증강하지 않는다면 한국군은 무장해제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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