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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국민투표 전술 제안에 대한 의견_임필수

최근 민주노동당은 한미 FTA 저지를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문성현 대표, 심상정 의원 등이 주도해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9월 14일(목)에는 한미 FTA 범국본이 개최한 '한미FTA투쟁 전략회의'가 열려서 국민투표 제안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도 이 문제에 대한 토론과 입장 마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모아보았습니다.


이와 관련된 제 의견을 덧붙이면... 


1. 왜 최근 들어 국민투표 문제가 불거지고 있나?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투표’라는 제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한국 헌법에는 헌법개정 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조항과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정권에 들어서 또 하나 정치무대의 중앙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헌법재판소’죠. 이는 한국 정치를 양분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각자가 상대방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헤게모니를 도저히 인정하기 않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래서 양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기댈 수밖에 없고,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대해지면서 막강한 권력기관이 되고 있는 실정이죠.)


어쨌든, 국민투표란 제도를 처음 꺼내 든 자는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했죠. 당시에는 헌법이 규정한 것은 레퍼렌덤(특정 정책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이지 플레비사이트(영토의 변경·병합 또는 새로운 지배자가 그 권력의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표 등 어떤 항구적인 정치 상태를 창출하는 문제와 관련된 국민투표)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의 제안 자체가 위헌이라는 주장이 반대 측에서 강력히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재신임 선언은 ‘국민협박극’이자 ‘인민주의적 정치동원’을 위한 술책이라고 강력히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운동단체는 ‘재신임 철회’를 주장했고, 사회진보연대는 재신임 투표 제안이 철회되든 아니면 정치권에서 합의되어 진행되는 간에 ‘노무현정권 심판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쨌든 당시 논란은 헌법재판소에서 다수 의견으로 ‘대통령의 의사 피력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에 돌입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근거로 위헌소송을 각하하기로 결정하면서 결국 유야무야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무현정권에 대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 후 이라크파병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파병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하려고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도 국민행동 기획단에 참여했습니다만, 기획단은 국민투표 실시를 대표자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려고 했지만, 대표자회의에서 ‘국민투표를 하게 되면 파병찬성안이 더 높게 나올 우려가 있다’, ‘국민의 단 1%만 지지하더라도 운동 주체가 의지를 갖고 실천을 벌이면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상당히 높았고, 전반적인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하여 결국 국민투표 제안이 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파병 그 자체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불허한다”는 헌법 조항에 비추어 볼 때 위헌이므로 이 사실을 강조하며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파병문제에 대한 위헌소송도 제기되었는데 당시 헌법재판소는 "일반 시민에겐 원고자격이 없고 파병 결정은 통치자의 재량행위"라는 이유로 각하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 11월에 전국농민회총연맹이  2004년 11월에 ‘쌀 협상 중단과 국민투표 실시 촉구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면서 사회운동 단체 중에서는 (제가 알기로는)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당시 전농은 ‘민중투표’ 운동도 병행했는데 실제로 각 지역에서 쌀 협상에 대한 민중의 의지를 천명하자는 취지였죠. 그러나 실제 민중투표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에는 조직력이 취약했고,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민투표 제안은 우파 쪽에서도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이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수도이전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국가안위에 관한 가장 비중 있는 사안이며, 국민의 의견이 분열돼 있으므로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한나라당과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며 국민투표 실시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처럼 좌우에서 국민투표 제안이 나오는 것은 노무현정권의 근본적 취약성을 반영하는 것이겠죠. 노무현정권은 뚜렷한 이념과 정책노선, 지지 집단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모호한 이미지와 수사에 근거해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노무현정권이 추진하는 각각의 정책들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뚜렷이 검증된 것이 아닙니다. 주로는 집권세력이 정치게임 논리에 따라 즉흥적이거나 임기응변식으로 각종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책적 성과를 거두거나 지지와 응집력을 얻는 데 근본적 한계를 노정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노무현정권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들고 나온 것은 전형적인 인민주의 정치행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남미에서는 대통령이 뭔가 국면돌파가 필요할 때마다 국민투표를 들고 나오는 사례가 계속 늘고 있나 봅니다. 당연히 대통령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므로, 의제를 선정하고, 국가기구를 활용하고 언론과 미디어를 동원해서 막대한 물량공세를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당연히 집권세력이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겠죠. (물론 항상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콜롬비아에서는 2003년 15개 항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좌파세력이 보이코트 전술을 펼쳤고, 실제로 몇 개 항을 빼곤 필요 투표율 25%를 넘지 못해서 국민투표가 좌절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통령과 행정부에게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고, 사법부가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행사하는 권한이 강화되고 미디어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의회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은 인민주의 정치의 기본적 경향의 하나인 듯합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한나라당도 국민투표라는 인민주의 정치행태에 의존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2.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국민투표 제안은 인민주의를 넘어서는가?


국민투표 전술을 지지하는 입장은 대개 다음과 같은 근거에 기반한 듯합니다.

첫째, ‘국민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국민 스스로 결정한다’는 대의. 현재 국회로 넘어가면 지금까지 국회가 보인 행태로 볼 때 대충 제목만 보고 그냥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실이 명약관화한 현실에서 다른 대안이 필요하며, 결국 국민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 현재 FTA 반대투쟁이 교착국면에 들어선 게 사실이다.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반대투쟁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매개가 필요하다. (FTA 반대를 위한 민중총궐기란 구상은 다소 무매개적이다. 어떤 매개고리, 담론이 필요하다.)

셋째, 현재 정부가 FTA를 극히 비공개적으로 진행하며, 국민들의 알 권리 자체를 침해한다. 심지어 협상이 타결되어도 3년 간 비공개하기로 되어있다. 국민투표를 실시하려면 정보 공개가 불가피하다. 나아가 정보 공개가 즉각 이뤄진다면 얼마나 큰 문제를 안고 있는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며, 당연히 FTA 협상에 대한 대중의 공분을 높일 수밖에 없다.

넷째,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대중적 토론을 활성화할 수 있다. 현재 대선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대중들이 정치토론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민투표는 정치적 공간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섯째,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보면, TV토론 등이 보장되므로 민주노동당이 FTA에 반대하는 운동의 ‘정치적 대표성’을 띠고 명쾌한 정치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이는 반대운동을 결집시키는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투표에 대해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근거는...

첫째, 한국의 국민투표제도는 국민발의제도와 결합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두 가지는 서로 질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우루과이는 물 사유화의 폐해가 너무나 심각해지면서, 25만명 이상의 국민발의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조항을 활용해서, 30만명 이상의 발의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결국 물은 보편적 권리라는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국민발의를 위해 대중적 운동을 펼치고, 대중이 스스로 운동에 참여하고, 대중의 요구가 직접적으로 국민투표안으로 반영되는 조건에 비해, 한국의 국민투표제도는 대통령만이 부의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어떤 왜곡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FTA 특위 의원단과 간담회에서 ‘국민투표 사안이 아니다’라고 밝혔고, 앞으로도 국민투표를 받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국민투표 요구가 매우 높아진다면, 과거 재신임 국민투표 당시 ‘여야가 구체적인 방식을 합의하면 진행할 수 있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정치권에서 논의해보라고 공을 넘긴 후 논의 진행 결과에 따라 지금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현재 한나라당은 작통권 국민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투표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 (물론 정치권 논란 그 자체가 허구적 논쟁으로 비화되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효과를 낳을 수도 있고, 또는 유야무야될 수도 있다.)  어쨌든 여기에는 대통령의 정치 책략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매우 다른 양상으로 국면이 전개될 수 있다. (그때에 이르러서는 국민투표 보이코트 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둘째, 어떤 (직접)민주주의 제도도 사회운동, 대중적-집단적 운동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작동할 수 없다. 현재 FTA 반대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진 후, 정부가 적극적으로 물량공세를 펼치면서 여론 분위기가 점차 역전되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중운동 계획이 입안되고 실행되지 않는다면, 이런 여론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도 없고, 국민투표는 인민주의의 정치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셋째, 현재 국민투표법은 대중운동을 가로막는 제도적 제약이 너무 많다. 운동원의 자격(정당자격이 없는 자, 예를 들어 공무원)이 제한적이고, 옥외집회 등이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미디어를 활용한 정당의 활동을 빼면, 대중운동-대중투쟁을 가로막는 독소조항이 너무 많다.

넷째, 민주노동당에게도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직접 대중을 만나고 대중을 운동에 결합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안을 던지고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투표에 동원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대중적 토대를 확장하려는 계획이 아니다. 이번 제안은 앞으로도 국민투표 제안으로 자주 반복될 수 있고, 이런 정치프로그램에 의존할수록 인민주의 정치행태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등등.... 


어제 열린 한미FTA 전략회의에서도 견해가 상당히 엇갈렸고, 주장도 팽팽히 맞섰습니다. 어제 회의에서는 의견이 종합되지 못했고, 민주노동당에서 “이렇게 반대 의견이 많을 줄 몰랐다. 당에서도 다시 토론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논의가 일단락되었지만, 쉽게 입장이 정리되진 않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작동도 사회운동을 전제로 하므로 따라서 대중운동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얘기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합니다. 또한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탄핵국면에서 국민발의, 국민소환의 필요성을 주장했는데요), 현행 국민투표제도의 문제점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 역시 분명한 듯합니다. 국민발의, 국민소환 등의 제도가 반드시 보완될 필요가 있고, 국민투표법 상 제약은 반드시 폐기되거나 투쟁을 통해 무효화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물론 국민발의 등은 헌법 개정 사항이 아닐까 싶어서, 쉽게 해결책이 나오긴 어려운 것도 분명한 현실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가 함께 인식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여러 위험성이 현실화될 우려도 더 커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일단 지금은 다소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고, 즉각적으로 찬반 입장을 밝히기보다는 참고하거나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도로 의견을 정리해보았습니다만... 사회진보연대에서 더 많은 의견교환이 필요할 듯합니다.


그런데 역시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런 제안이 현재의 FTA 반대투쟁의 교착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전술로 제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FTA 협상에 대한 폭로 국면에 이어 찬반양론이 벌어진 후 운동이 기대했던 것만큼 충분히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는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FTA 국민투표 전술 제안에 대한 토론은 현재 국면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떤 운동계획이 필수적인가를 논의하는 토론과 함께 진행되어야 할 듯합니다.....


자료로 첨부한 것은 지금까지 이 문제에 관해 나온 입장들입니다. 우려나 반대의 의견은 아직 글로 논리정연하게 정리될 것이 없어서 첨부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번 논란이 오히려 생산적 토론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목: 노대통령, 한미FTA는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출처: 대자보 2006/03/30 (http://www.jabo.co.kr)

저자: 우석훈 (경제학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제목: 자본의 공세에 정면돌파하는 정치적 고리로서 국민투표

출처: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11호 2006/05/02 (http://hb.jinbo.net)

저자: 황정규


제목: 민노당 "한미FTA 문제 국민투표로 결정하자" "국회FTA특위는 우리당-한나라당 연합방위군"

출처: 프레시안 2006년 9월 3일

저자: 윤태곤 기자

 FTA국민투표_의견모음.hwp(80.0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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