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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간디'에 관한 짧은 노트 | 장진범

'레닌과 간디'라는 짧은 발표문은 그동안 발리바르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요체를 단숨에 드러낸다. 바로 '대중운동'이 그것이다.

 

사실 대중운동은 고유한 '개념'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아마도 '대중'(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 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론들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와 관련해 언급된 스피노자의 경우, 이 문제와 직결된 그의 정서론은 아직까지 영어로도 적당한 책을 찾기 힘드니 제대로 된 접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경우, '비판적' 독해를 통해 재구성해야 하는데 프로이트 자체를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렇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면 시행착오를 거쳐서라도 어떻게든 도모해볼 수 있을 거다. '레닌과 간디'는 그런 점에서 무척 중요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불어로 읽었기 때문에...) 발리바르는 레닌과 간디를 시빌리테의 정치 안에서 구별되는 계기로 파악한다. 레닌의 경우 핵심은 대중운동에 힘입어 극단적 폭력을 정치(가 가능한)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집약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이다. 이는 간디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점이며 혹은 차라리 간디(의 정치)를 가능케 한 것은 레닌(의 정치)다. 하지만 레닌은 '내전'의 문제를 알맞게 다루지 못한다. 알다시피 레닌의 내전론은 'PT 독재'로서 '국가를 통한 국가의 소멸', 'PT(의) 독재'(곧 BG에 대한 독재)의 'PT(에 대한) 독재'로의 도착 이라는 난문에 부닥친다. 레닌에게서 이에 대한 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며 불리한 정세의 과잉결정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몇몇 천재적이지만 일시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국가 소멸의 조건의 생산'은 알맞게 사고되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내전' 혹은 차라리 '계급투쟁'의 문제를 군사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혁명적 폭력과 타협적 비폭력으로 양극화됐다.

 

간디가 입장하는 곳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자구대로 하자면 이는 '진리의 힘'이다) 는 민주주의의 봉기적 전통을 재전유한 것이고 때문에 말의 강한 의미에서 '혁명'에 관한 재정식화다. 문제가 '진리'인 한에서 간디는 어떠한 종류의 '타협'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공민적 불복종'은 아주 강력한 '비합법주의'를 띤다. 발리바르가 그의 작업을 네그리의 '구성권력'과 연결시키는 것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논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간디는 레닌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곧 '공세적 비폭력'의 '건설적 비폭력'로의 전환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후자를 생산하는 전자의 실천을 발명하기 위해 '아힘사'(a-himsa, 비-증오)를 도입한다. '적에 대한 개방'을 통해 스스로의 관점을 전환하는 '대화주의', 대중행동(곧 대항폭력)의 자기제한적 실천, (그리하여 '최종적 전투'라는 관념의 완전한 기각) 그러니까 '혁명 안의 혁명'. 이것이 바로 시빌리테의 간디적 계기다.

 

하지만 간디 역시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여기서부터는 불어 해석이 안 되서 자의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그가 폭력의 문제를 (레닌과 달리) 추상적 곧 종교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폭력을 악화시키는 객관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변혁할 수 있는 정세적 실천을 (아마도 레닌만큼은)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무능력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지도자에 대한 사랑' 으로 봉합했고 이같은 동일화가 도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대로 사고하고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닌과 간디의 대화가 역설하는 것은 폭력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는 것, 계급투쟁('내전')의 문제를 非군사적인 방식으로 곧 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자는 것, 그리고 대중운동 및 집단적 주체화에 고유한 '정서적 투여' 또는 '동일화 과정'의 문제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아마 레닌과 간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스피노자나 (개조된) 정신분석학이 거론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내 생각에 '사회운동'이라는 말보다 '대중운동'이라는 말이 더 알맞은 것 역시 이 문제('대중들')를 정면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은 대개 정치운동을 그 대쌍으로 하고 국가에의 포섭을 역사적 사회운동이 타락한 원인으로 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조야하다. 前레닌적이고 前간디적이다. 레닌과 간디에게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 한계는 위의 진단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난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다만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이 지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며 우리에게 정말 긴급한 것은 그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대중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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