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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 장진범

어제 장농이랑 냉장고를 함께 옮긴 사람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예고편을 보고서 이 영화 정말 봐야겠다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오동진의 극찬도 한몫 했다. 게다가 정성일 팬카페 사람들의 논쟁도 나를 자극했다. 어쨌든 영화를 봤다(이건 얼마만이더라?).

 

흔히 그의 영화를 '복수 3부작'의 맥락에 위치짓곤 한다. 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복수'가 중요한 소재인 건 분명하다. 어디선가 박찬욱은 그렇게 말했다(혹은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복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이므로 흥미로운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나 역시 이런 관점에 점점 더 이끌리고 있다.

 

복수가 언제부터 금기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다만 결정적 일보를 내딛은 것은 헤겔이라 들었다. 이른바 '인정투쟁'(특히 예나시기의 헤겔이라고 한다) 이란 복수라는 사적 정념을 정치라는 공적 실천으로 '지양'해 낸 것이다. 복수 대신 '재판'이란 개념이 들어오는데 이때 재판의 목적은 공동체의 복구다. 물론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식이 아니라 그에게 '시민권' 핵심적으로 ('변호'라는 형태로) '발언권'을 줘 재판이 기존 공동체를 '반성'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도록 재판 자체가 전환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나오는 헤겔의 놀라운 명제: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처벌을 의지해야 한다.' 이는 재판의 反-복수적, 민주적 개조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재판 더 넓게 말해 국가를 통한 공적 '인정'이 오작동하면, 적대나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복수는 항상-다시 되돌아온다. 좀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많은(아마 지금까지 모든) 국가들은 복수를 은밀히 조장해 왔다. 적대와 갈등을 중재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한 정당성의 침식을 이들의 사적 해결인 복수, 거기에 동반되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예방적 대항폭력'이라는 경찰적 정당성으로 보충해 왔기 때문이다. 국가의 타락은 개인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국가의 더한 타락으로 이어진다. 폭력의 악순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윤리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금기시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실재하는 상황/행위를 극(특히 비극)의 형태로 체험케 함으로써 갈등과 '책임'(respons(e)iblity)을 숙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이 이른바 '(재)주체화'의 특권적 계기

로 인정받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반민주적 결국 경찰적 국가(시민을 준-범죄자로 취급하는) 의 토대를 아주 근원적인 지점에서 해체할 수 있는 행위가 예술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복수 3부작'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계급적대가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상대방을 원수로, 자신을 보복자로 상상할 때 이 세상 위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실천을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를 하려는 모든 사람들 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노동자들에게, '나 너 착한 거 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된다... 부르주아들에게,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기 전에 뭔가를 해라...

 

'올드보이'에서 그려지는 것은 다른 식의 지옥이다. 그것은 푸코적인 의미에서 '지배'의 상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행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분석들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는 이를 지배(domination)의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 한 개인 혹은 한 사회적 그룹이 권력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그것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가역성(reversibility)을 피하는 데에 이를 때 (…) 우리는 지배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대면한다. 이러한 상태 안에서 자유의 실천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만 존재하거나 극단적으로 한정되고 제한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푸코,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中

알다시피 이우진은 오대수의 운명을 완전히 장악하여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저 끔찍한 바퀴로부터 빠져나오는 대가로 스스로의 파괴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지배'를 실행한다. '私刑'을 집행하는 감옥에서부터 정신을 장악하는 최면술, (최면술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차라리 지배의 어떤 극단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물론 그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에 이르는 저 까마득한 권력의 비대칭성의 지옥. 홉스가 말한 '베헤모스'(내전/자연상태)와 '리바이어던'(극단적 사회상태)은 둘다 지옥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리는 지옥은 어떤 것인가? 내가 인상적이었던 점은 행위자들('보복자들')의 위치가 극히 자의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전편에서 서로를 죽이고자 했던 류와 동진은 이제 사이좋게 유괴를 기도한다. 오대수의 최면술사는 그에게 식탁에서 개처럼 강간당한다. 이우진은 유괴/살해당한 원모의 자리에 가 있고 이금자는 백선생처럼 입이 틀어막힌다. 그녀의 방은 오대수가 갇혔던 감옥이 되고 그녀의 딸과 양부모는 독가스에 취한다. 한편 '통일의 꽃' 임수경은 장기수를 가둔 감옥의 간수가 되어 있고 '혁명운동'에 사용하려 했을 '법-구경' 총은 사적 복수의 도구가 되고,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물론 폐교의 '私刑'이 있다. 그것은 백선생에게 가장 잔혹한 복수이자

(자신에 대한 死刑/私刑 논의를 무력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다니!) 이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찬욱이 설치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의 복수연작 안에서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역할을 논다. 가장 잔혹한 폭력이자 절대악의 확실한 '폐제'이면서 보복자 자체의 해체의 시작이다. 적어도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원하는 효과를 거뒀느냐다. 여기서 박찬욱은 블랙코미디 기법을 전면화하면서 그의 말대로 하자면 '우습다라는 기조로 가다가도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으로 주저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웃은 게 조금 미안하게도 되는 그런 상태' 를 도모한다. 내가 볼 때 이는 통찰력있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는 잔혹이 反-희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점, 또한 거기에 모종의 '향락'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희극 자체를 분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웃는 자신 안의 잔혹과 관객을 대면시키면서 어떤 섬뜩함과 불편함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박찬욱은 세간의 평가보다 훨씬 순진하거나 아니면 희대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관객들이, 금자씨와 달리, 정말로 즐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위의 사실 곧 이 변증법적 전환의 실패를 뻔히 알고 있고 스스로 이 실패를 즐기면서도 정반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도리는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보다 훨씬 더 잔혹할지 모른다는 것, 잔혹한 '부정의 부정'을 경유해 구원으로 가는 숭고한 '부정신학'이 극히 도착적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복수는 나의 것'이 더 윤리적인 것 같다. 자신은 없지만 이 점에선 정성일 선생과 좀 의견이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난 두 가지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금자와 제니라는 '모녀' 관계가 성립됐다는 점. 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실패했고 '올드보이'에서는 양자 간의 책임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구성된 '부녀'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의 결론이 다르게 난 것은 그녀의 딸이 딸로서 살아있었고 엄마의 얘기를 (미도와 달리) 다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의 '혀'였다. 우리에게 혀와 입은 무엇일까. 낭시 식으로 말하자면 '노출'(ex-posure)이란 무엇일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친절한 금자씨 2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앞서의 글에서 인용했듯 박찬욱은, 특히 '사형' 장면에 관한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구조주의 이후 우리가 배운 것은 저자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저자조차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의 물질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박찬욱 스스로의 진술 인용으로 대체한 이 장면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이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우선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적어도 나에게는) 이 장면의 시작이 전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를 접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가 얼마 진행된 이후부터 난 백선생이 틀림없이 연쇄살인범일 거라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진 사정과 관련될 것이다. 아마 백선생이 금자의 아이를 데리고 살인현장에 나타난 그 끔찍한 장면에서부터 이는 거의 목적론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사형 장면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원-장면'(primal scene)이 된다. (박찬욱이 이 영화가 '동화'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동화는 '옛날옛적에'('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고 현존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런 금기 없이 향락을 즐기는 난폭한 아버지를 '폐제'하고 아들 간의 공모를 통해 금기/법, 따라서 '사회'를 정초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이 유족들의 잔혹(또한 우스꽝스러움)을, 혹은 그 장면을 보고 웃는 스스로의 잔혹을 느끼길 바랬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효과가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잔혹이 향락(과 그것의 전염)을 동반한다는 점을 박찬욱이 정말 몰랐을까? 더구나 절대악을 폐제하는 게 문제라면, 그 잔혹에는 모종의 정당화가 부여되지 않는가?

 

모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말했을 때 그는 적어도 이렇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며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순환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관찰자' 금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자는 어떤 의미에서 외부자/관찰자인가? 가장 모범적인 '리바이어던'으로서가 아닐까? 백선생을 죽인 후 누설을 걱정하는 유족들 앞에서 금자가 던진 협박을 생각해 보라. 감독의 의도야 어땠던 간에 바로 그 말 때문에 금자의 '유령성'은 '초-자아'의 그것으로 사후결정된다.

그녀는 '악/향락의 민주화'를 행했고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에 기반해 사회상태를 만들었으며 너무나 친절하게도 이 사회상태의 보증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녀가 이미 죽은 백선생에게 쏘아대는 총알은 실제로는 유족들에게 던지는 경고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와 놀라울 정도로 대칭적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이금자는 유족에게 '금기'를 범하게 했고 양편 모두에서 그/녀들의 상대방은 '혀'가 잘린다. 하지만 오대수는 무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자기 스스로 혀를 잘라낸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때문에 오대수는 영웅이 되고 이우진은 파멸한다. 하지만 유족은 (금자의 유혹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혀를 자르는 것은 금자(禁者!)다. 유족은 가련하고 추한 존재가 되며(계좌번호는 압권이다!) 금자는 '이드'의 사악함과 '자아'의 나약함 모두에 절망하는 '초-자아적' 영웅이 된다. 여기서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이 떠오르는 것은 나 뿐일까...?

 

그러므로 이금자는 성공한 이우진이다. 이때 자식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지난 번 글에서는 금자와 제니의 관계에 관해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를 남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전혀 아니다. 금자는 오대수가 아니라 이우진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지만 미도는 안티고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니는 초-자아적 영웅을 정당화해 주는 존재다. 먼 옛날 '조상'께서 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뇌를 겪었는지 대대손손 전해주는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나레이터'다. (따라서 이는 '낯설게 하기'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장면의 '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유족들의 혀는 잘리었고 이 히/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혀는 금자의 딸만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자가 처음부터 '친절한 금자씨'였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폭력과 잔혹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문제가 될 때 특히 오대수처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때 박찬욱의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홉스적인 것이었다. '공각기동대' 같은, 외양적으로는 '포스트모던'한 영화가 결국 로크적인 해결책('의식')으로 회귀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번 영화에서 박찬욱의 실패는 그가 너무 친절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이 제일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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