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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임경구 기자의 고언(苦言)

 <기자의 눈> X파일-연정 '음모론'의 고리, 정부여당이 끊어야
 
  2005-08-11 오후 3:04:41      
  
 
  대개의 경우 '음모론'의 등장은 파행의 전주곡이었다. 음모론의 공통된 뼈대는 여권이 야당을 죽이기 위해 무언가 일을 꾸몄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물론 정부여당은 '진정성'을 강조하며 부인한다.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가다가 푸닥거리인 양 한번쯤 대충돌이 발생한다. 그 뒤엔 죽도 밥도 안되고 앙금만 남긴 채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그 고질적인 수순을 우리는 지난해 '4대입법' 논란에서 봤다. 청와대와 여당은 '진정성'을 무기로 밀어붙였다.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 등이 보수세력을 죽이기 위한 기획의 산물이라며 '결사항전' 했다. 형식적 결과는 국회 파행이었고, 내용 상의 결과는 '누더기' 과거사법 탄생과 국보법 표류이었다.
 
  다시 등장한 불안한 징후 '음모론'
 
  지금의 정국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양대 쟁점인 안기부 X파일과 연정론 뒤에 음모론이 등장한 게 어쩐지 불안하다.
 
  X파일 '음모론'은 최초 한나라당에서 제기됐다. 왜 유독 특정 재벌과 특정 정치세력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내용만 나오느냐는 의심이었다. 국가정보원의 '국민의 정부시절 불법도청' 공개 이후엔 민주당발(發) 음모론이 가세했다. 'DJ 죽이기'를 위한 모종의 기획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사안의 성격상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연정론과도 맥이 얽혔다. 노 대통령이 X파일-불법도청 파문을 등에 업고 DJ와 결별해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추진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이 정계 개편을 위한 포석이라는 의구심을 받아온 터라 이런 시나리오는 그럴싸해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DJ를 버려서 우리가 얻을 게 뭐냐"는 여권의 정치공학적 반박 또한 일리가 있어 보인다.
 
  호사가들의 술안주용으로 제격인 이런 논쟁은 꼬인 정국의 실마리를 푸는 데는 하등 도움이 안된다. X파일 문제가 불법 도청 문제로, 음모론으로 계속 초점을 이동해가면서 거대권력 간의 유착이라는 본령에서는 한참 멀어졌다. 여기에 여권 내부에서조차 조율되지 않은 연정론은 가뜩이나 어수선한 정국에 '논쟁을 위한 논쟁거리'만 양산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선 9월 정기국회가 갈등 해소의 장이 아닌, 확산의 장이 될 공산이 크다. 특검법-특별법 줄다리기를 둘러싼 미시적 논쟁이 화두가 될 것이 뻔하고, 각 당의 '저격수'들은 장끼를 뽐내듯 근거 모를 폭로전을 수행할 것이다. 언론은 따라 가고 국민은 현혹되는 쳇바퀴도 예정된 수순이다.
 
  연정론, 이제는 접을 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우선은 X파일과 연정론이라는 양대 현안을 독립된 사안으로 제자리에 위치시켜 놓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게 하고 나서 두 사안을 얽어매고 있는 '음모론'을 야당이 거두면 일은 쉽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요구도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혹여 있을지 모를 '정치적 의도'를 모른 척 하라는 주문에 불과해 야당에겐 설득력이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상대가 믿어주지 않는데도 결백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더 큰 음모론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하기에 해결의 주체는 청와대와 여당이 맡는 게 옳다. 음모론이 배양되는 토양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결자해지의 의미에서 이미 수명을 다한 듯한 연정론을 여권이 스스로 폐기처분하는 결단이 하나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연정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청와대와 여당이 인식하고 있다면 비생산적인 논란을 매듭 지을 시점으로는 지금이 적기라는 얘기다. 더 큰 목적이라는 선거제도 개편은 자연스런 논의 절차를 따라가면 된다. 야당이 당장 테이블에 나오지 않는다고 삿대질을 해선 될 일도 안 된다.
 
  그럼에도 여권은 연정론을 포기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인다. 노 대통령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도청 정국과 연정 문제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무관하다"는 말보다는 향후에도 연정론을 지속적으로 거론하겠다는 뜻에 무게가 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날 국무위원들 앞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우리가 만든 사고의 틀과 가치관 등 너무 경직된 틀 내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크게 한번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를 창조적으로 해보자는 진실한 의미에서 제안한 것"이라고 연정 제안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같은 수석 당원의 '메시지'는 열린우리당에도 여파를 미쳤다. 문희상 의장은 9일 "(한나라당과의) 연정 가능성이 지금 당장은 없다"고 대연정 포기를 암시하면서도 이번에는 물꼬를 돌려 "대연정이 안되면 소연정은 가능하다. 이는 민주당, 민주노동당과는 가능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건 연정론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까지 비쳐졌다.
 
  하지만 이는 최근 유시민 상임중앙위원이 "소연정은 국회운영에는 다소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선거제도 개선을 통한 한국의 정치 발전에는 합당한 대안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노 대통령의 의중을 잘 읽기로 소문난 두 지도급 인사들의 말조차 엇갈릴 정도로 연정론이 종잡을 수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증거다. 청와대든 우리당이든 이쯤에서 논란의 악순환을 종결시켜야 할 필요성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정부여당, 집권의 책임을 잊지 말아야
 
  또 한가지. 불법도청 문제와 관련한 야당의 음모론에 꼬박꼬박 정면 대응하는 청와대와 여당의 자세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을 향해 "석고대죄해도 부족한 정당이 국정원 개혁을 가열차게 추진한 대통령을 향해서 음모를 제기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인가 생각할 때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의 울분 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을 두고 "민주당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김만수 대변인의 냉소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나.
 
  한나라당에선 국회 정보위 소집 문제를 두고 "청와대가 여당과 국정원에 대한 완벽한 통제 권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청와대 대변인이 언급할 성질이 아니었다"는 반발을 낳았고, 민주당에선 "민주당을 쪼개고 파괴하려는 기조에 대해서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차원의 저항을 한 것"이라는 불만이 즉각 튀어나왔다.
 
  물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기에 야당의 정략적 접근법도 혼란을 가중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과 야당의 책임을 동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 '아름다운 재단' 박원순 상임이사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여당은 접시를 깨고 야당은 독을 깼다고 하더라도 정부여당이 더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 권력을 잡고 있는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단체가 형식적 균형주의에 맞춰 독을 깬 사람도 꿀밤 한 대, 접시 깬 사람도 꿀밤 한 대 식이었다"고 불만을 토로한 데 대한 충고였다.
 
  최근 메가톤급 두 가지 사안을 마주하며 야당과 핑퐁게임 하듯 독설을 주고받는 청와대와 여당의 인식은 여전히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2년 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먼저 결단할 것 결단하고 정리할 것 정리해 정국의 가닥이 좀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그게 여권이 할 일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청와대와 여당이 애당초 음모론이 계속 생산되는 지금과 같은 모호한 상황을 즐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런 것이었다면 필자로선 "지금까지 잘못 말씀드렸다"고 사과하며 지금까지의 얘기를 다 취소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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