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보수성에 대한 간단한 노트 | 최원

 
* 스포일러 있습니다.

백선생은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원-아버지(archaic father)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마지막에 이루어진 아이들(의 부모들)에 의한 백선생의 집단 처형이 국가에 의해 관리된 비-복수가 아니라 반대로 사적인 복수를 표현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명백히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들에 의한 원-아버지의 살해는 사회 혹은 공적인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영화 텍스트 상의 증거로 아이들의 부모들은 처형이 있기 전에 서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에 관한 계약(!)을 맺는데('사적 계약'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에 불과할 뿐이다), 그 계약의 '보증자'로 금자씨가 리바이어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들 아시죠? 누구라도 계약을 위반하면... 더 이상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대사는 약간 다를텐데 ..어쨌든...여기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후, 죽은 백선생을 땅 속에 묻는 장면에서 갑자기 금자가 빼들고 가서 백선생 시신의 머리 부분에 쏴댔던 총이 더 이상 죽이지 않는 총, 이미 살기가 없어진 총, (사적인) 복수의 의미를 박탈당한 복수, 이미 공적인 것이 되어 버린, 따라서 잔인할 것도 없는(물론 이는 분명히 '계약'이라는 내러티브가 가져다주는 환상일테지만, 어쨌든 이미 죽은 자를 쏘는 것이 무엇이 잔인하단 말인가? 여기서 이 영화는 완전한 멜로 드라마 혹은 신파가 된다) 행위의 상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금자씨는 마지막에 구경꾼 내지 관찰자가 되었으며, 유족들의 백선생 살인행위를 목격하면서 사적인 복수의 잔임함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했었는데, 이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면, 이는 잘 표현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감독 스스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박감독의 말은, 금자가 더 이상 살아있는 '개인'이 되지 못하고 "유령"(sic!)처럼 나타나게 된 것은 오히려 그녀가 공적인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 즉 복수를 조직하고, 복수를 도와주고, 복수를 행하려는 자들 사이의 사소한 갈등들을 해결해주고, 복수의 절차를 마련해주는, 국가가 되었음을 감독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지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일 (향유를 모두 독점하는) 포악한 원-아버지라는 이미지야말로, 진정으로 끔찍한 아버지(착한 아버지 혹은 차라리 "친절한" 아버지로서 스스로 향유하길 거부함으로써 자식들의 모든 향유의 가능성마저 앗아가 버리는)를 가리려는 '스크린'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포악한 원-아버지야말로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환상구성'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백선생은 이 영화에서 실제로 매우 환상적인 인물로 나타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겁'을 먹지 않는 완전한 비인간/악마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그의 환상으로서의 성격은 그가 제니와 금자 사이의 대화를 감정까지 실어서 리얼하게, 혹은 써리얼(surreal)하게 악마와 같은 솜씨로, 통역할 때 극단적으로 드러난다(관객은 이 장면에서 제니와 금자의 대화 내용 보다는 백선생의 악마성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어쨌든 이 영화가 보다 더 끔찍한 어떤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보다 더 "친절한" 어떤 것을 시야에서 가리기 위한 환상적인 내러티브(narrative)의 구성에 불과하다면, 이 영화에서 전에 없이 너래이터(narrator)(나중에 제니로 드러나게 되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등장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상징계에 속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이야기/(히)스토리의 구성, (제니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대대로 이어질 전설의 구성...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이 상상계를 그렸다고 한다면, '올드 보이'는 상징계로의 진입(법의 정초)을 그렸으며, '친절한 금자씨'는 상징계의 작동을 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되어 버렸다고, 즉 구성된 상징계를 정당화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전락시켰다고 본다.

가능한 증거로, '복수는 나의 것'은 아직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한 말하지 못하는 자의 이야기이고(벙어리인 주인공의 행위는 여기서 종종 순진하면서 동시에 음탕한 것으로 나타나고--어린아이를 자신의 배에 올리고 앉아 있던 장면이나 자신의 누이의 몸을 닦아주던 장면 등을 보라--, 게다가 그는 부분-대상인 콩팥을 그의 누이에게 선물하려고 하다가 누이를 죽이고 이후 콩팥을 '식인'하는 자로 나타난다), '올드 보이'는 자신의 '말'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자신의 혀를 자를 수 밖에 없었던 자(그런데 육체적 혀를 자름으로써 주인공은 진정으로 상징적인, 정신적인 혀를 얻게 될 것이다--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고 나서야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게 되듯이)의 이야기이고, 마지막으로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대항폭력(그 자체 범죄와 다를 바 없는)에 대한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자(금자는 '금지된 자'가 아니라 '금지하는 자'였던 것이다), 즉 '말'을 관리하는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남는 것은 제니의 '말', 친절한 금자씨에 의해 표백된(!) 흰 눈을 받아 먹는 제니의 '혀'일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