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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한스 아이슬러의 수정12음계 음악 | 이경분

아놀드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한스 아이슬러의 수정12음계 음악

이 경 분

* 출처 : 민족음악 18호 http://web.donga.ac.kr/swcho/


1. 서 론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음악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 어렵다. 왜 그의 음악이 그리고 특히 12음계음악이 어려운지에 대해 아도르노(T.W.Adorno)외에도 많은 쇤베르크 제자들이 글을 써 왔다.
쇤베르크 음악의 난이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그 이유를 서술할 수 있겠으나 아주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음악이 무척 추상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쇤베르크의 제자 아이슬러는 스승이 “엄청난 상상력과 추상력의 소유자이라 여행의 기술에 대해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야기하므로 여행을 가더라도 스승에게 그곳의 관광엽서를 보내고 싶은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며 쇤베르크의 능력을 반농담조로 얘기한 적이 있다.
이러한 쇤베르크 음악의 추상성은 그의 기본적인 음악관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즉 그는 “음악에서의 정직함”(Redlichkeit in der Musik) 또는 책임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작곡과정 중 아무런 이유와 논리적 필연성없이 어떤 음들을 나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 번 표현된 “음악적 사고”(musikalischer Gedanke)는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반복을 통해 익숙한 것에서 기쁨을 찾고 확인하는 청중의 욕구를 배려하기 보다 음악의 진실성과 “예술가 자신의 내적 감정에만 충실”하였으므로 그의 음악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화려하나 내용이 없는 장식과 반복으로 무성하던 음악적 허식을 지양하고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본질적인 것만을 작곡하는 “음악의 경제성”을 강조하였다.
예술은 능력(Können)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 즉 당위성(Müssen)에서 출발한다고 한 그의 말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처럼 본질적인 것에 전념하는 음악관을 가진 쇤베르크가 12음계법을 발견하여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기반을 세우게 되었으며 음악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그는 19세기 말부터 자유무조음악 (Freitonalität)이 점차 진전됨에 따라 지난 250년간의 음악체계를 지배하던 조성체계(Tonalität)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기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체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음악적 진보 즉 “미래지향적 음악”을 대표하는 쇤베르크는 당시의 청중이나 비평가로부터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교수법과 가르침에 대한 정열로 훌륭한 음악가를 많이 배출해 내었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이고 철저한 음악관과 확실한 음악기술로 제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에 알반 베르크(Alban Berg)와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과 같은 수준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던 한스 아이슬러는 스승의 음악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이를 입밖에 낼 수 있었던 용기를 가졌었다.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비판할 수 있는 객관성과 또한 “누구를 위해 내가 음악을 쓰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아이슬러는 “사회참여음악”(Engagierte Musik)이라는 스승과는 또 다른 음악사적 불모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과 인접분야, 음악과 사회, 음악과 정치 등 음악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터놓은 아이슬러의 업적은 그가 살았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누구든지 음악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글에서는 우선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대해 알아보고 이 독보적인 스승의 음악적 권위에 나름대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독립적인 음악적 언어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한 아이슬러의 수정된 12음계 음악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어려운 예술음악을 - 수준의 손상없이 -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고자 한 아이슬러의 시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시사하는지 아울러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본 론

2.1.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쇤베르크가 1921년 12음 기법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작곡가들이 꼭 12음계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기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작곡을 시도했었다. 그 한 예를 들면, 러시아계 음악의 영향을 받았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에리히 이토 칸(Erich Itor Kahn 1900-1950)은 4음․5음․9음들의 집합을 12음기법의 형태로, 즉 전회형(Umkehrung)․역행형(Krebs)․역전회형(Krebsumkehrung) 등으로 사용하다가 12음기법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칸이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방송국에서 쇤베르크의 12음계 피아노곡을 초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연주를 들은 쇤베르크는 연주의 명료함과 작품 이해의 깊이에 최대의 찬사를 보냈었다.
그리고 마티아스 하우어(Mathias Hauer 1883-1959)는 쇤베르크보다 이삼년 먼저인 1919년에 12음 기법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가 이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은 템포변형(Agogik)이나 강약법을 사용하지 않아 긴장감이 없는 정체된 것이어서 음악계에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또 최근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에게 사사한 프리츠 하인리히 클라인(Fritz Heinrich Klein 1892-1977)이 1921년 “기계”(Die Maschine)라는 음악에서 12음을 사용해서 작곡했다 한다. 이 연구는 쇤베르크가 어쩌면 클라인에게서 무의식적으로나마 12음 기법의 아이디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운다.
일반적으로 쇤베르크를 이 기법의 창시자로 보는 이유는 비로소 그의 12음계 음악이 단순히 수학적인 차원을 넘어 미학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성숙도를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사적인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주장하여 음악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12음 기법을 “12개의 서로 연관된 음만을 사용한 작곡방법”(Methode der Komposition mit zwölf nur aufeinander bezogenen Tönen)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기본원칙에 대해 잠시 정리해 보자.
첫째, 12음 기본음렬 자체는 작곡을 위한 전제이지 작곡자체도 아니며 음악테마도 아닌 추상적인 것이다. 4가지 형태, 즉 원형(Original)․전회형․역행형․역전회형으로 명명되는 이 기본음렬은 음들간의 관계(Beziehung)를 조정하므로 12음이 어떤 방향으로(바로․거꾸로․반사형 등으로) 사용되던지 또 12가지 이조(Transposition)의 가능성 중 어떤 음높이에서(Tonstufe) 시작하던지 상관이 없다. 이 4가지 형태가 곧 하나의 음악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둘째,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중심음(tonales Zentrum)의 해체를 전제로 한다. 기존의 조성음악에서는 모든 음들이 중심음에 대해 기능적으로 종속되어 음들이 서로 다른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12음 기법에서는 중심음이 없으므로 모든 음들이 평등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셋째, 그러므로 12음계 음악에서 12음이 모두 소개되기 전에 어떤 한 특정음이 반복되는 것을 가능한 피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반복을 통해 한 특정음이 다른 음에 비해 더 큰 비중을 받게 되며 이렇게 “강조된 음은 기본음이나 중심음으로 암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조성체계의 화음은 기능적 역할에 충실하였으므로 불협화음은 해소 (Auflösung)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었다. 12음기법에서는 기능화음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불협화음은 해소되어야 할 필연성을 가지지 않게 되어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쇤베르크는 “불협화음의 해방”(Emanzipation der Dissonanzen)이라 칭하는데, 이미 그의 자유무조 시기의 음악에서도 불협화음은 해소되지 않고 사용되었었다. 이제 “바그너 식의 불협화음의 준비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식의 불협화음 해소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쇤베르크는 기술한다. 12음 기법은 이러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정당화한다. 그리고 장단조의 삼화음(Dreiklang)과 같은 협화음의 사용은 이전의 조성음악을 연상하게 하므로 이런 화음의 부분적인 사용마저 경고하였다.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발전시킨 첫 시기에는 이처럼 조성음악과 관련된 모든 음악적 요소를 지양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의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나폴레옹에의 송가”(Ode to Napoleon fuer Sprecher, Klavier und Streichquartett op.41)에서처럼 12음계 음악이 E♭장조 삼화음으로 끝나도록 작곡하기도 했음을 참고로 밝혀둔다.

2.2. 아이슬러의 수정 12음계 음악
쇤베르크는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항상 바하나 베토벤과 같은 고전의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한다. 늘 자신의 작품으로 학생들에게 수업을 했던 힌데미트(Paul Hindemith)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새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혼자 연구하거나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승과 토론을 하게되며 그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쇤베르크의 애제자였던 아이슬러는 피아노 소나타 2번(Klaviersonate Nr.2 op.6)을 12음기법으로 작곡하였는데 여기에서 쇤베르크의 영향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또 이 작품에서 아이슬러가 스승의 12음 기법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이미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6년 이러한 예술음악에 대한 회의로 스승과 결별하면서 12음기법과도 멀어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1920년대 젊은 음악가들은 기존의 낭만주의적 예술관과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를 거부하면서 음악의 사회화(Sozialisierung der Musik)를 부르짖었는데 아이슬러는 이러한 경향의 선두에 선 음악가에 속했다. 그러므로 예술의 대중화나 “음악의 민주화”(Demokratisierung der Musik)에 관심이 없던 스승을 떠나 자신의 독립적인 음악관과 이것에 부합하는 새로운 음악에 맞는 새 청중을 찾아 나섰다. 그가 찾아낸 새 청중은 바로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이 이해되기 힘들 뿐 아니라 필요도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슬러는 이 시기에 12음 기법을 사용하는 대신 주로 교회선법(Kirchentonarten)을 응용해 노동자들을 위한 음악 및 실용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의 나찌정당이 정권을 잡게 되자 유대인인 스승과 제자는 나찌의 원수로 낙인이 찍혀 독일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망명생활은 아이슬러에게 자신의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새로이 고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망명생활을 시작한지 이삼년이 지나자 그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12음계 음악을 다시 작곡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아이슬러로 하여금 이런 결정을 하도록 하였을까?
독일의 노동운동과 단절된 외국에서는 노동운동보다는 히틀러 정권의 붕괴를 위해 투쟁하는 일에 더 주력하게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에 국한하지 않고 망명한 지식인․문인․음악인을 막론하고 넓은 지반의 모든 저항세력을 모아야 했다. 그러므로 이제 아이슬러에게는 노동음악보다는 문화적 지식층에게도 호감을 줄 수 있는 정치성을 띤 예술음악을 작곡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었다. 이러한 “민중전선”(Volksfront)이라는 정치적 변화는 망명 전 바이마르시대(Weimarer Republik)에는 생각지도 못했을 변화를 그의 음악에 가져왔다.
우선 아이슬러는 나찌정부의 문화정책에서 자신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에 결정적인 중요한 관찰을 하게 된다. 즉 현대음악이 그 중 특히 쇤베르크의 음악이 나찌들에게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문화적 목적에 위험하기까지 한 것으로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쇤베르크의 음악이 나찌들의 수난에서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를 바로 허식과 거짓을 모르는 쇤베르크 음악의 진실성 때문이라고 아이슬러는 이해했다. 게다가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 난이도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그 생명력이 어차피 약해져 있었으므로 어떤 적극적인 노력없이는 스스로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우려도 컸던 것이다.
진실성이라는 장점을 살리고 어렵다는 단점을 교정한다면 쇤베르크의 음악을 대중을 위한 음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체제에 적합한 새로운 음악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아이슬러는 굳게 믿었다. 1936년 아이슬러는 이렇게 서술한다.
“12음 기법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고도로 복잡한 작곡법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기법으로 단순하면서도 대중에게도 유용한 음악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쇤베르크 음악의 내용을 그 기법과 분리시키고 표현(Expression)과 기술(Technik)을 따로 떼어놓는”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그가 작곡한 12음계 음악을 보면 어린이를 위한 노래와 피아노 곡 뿐만 아니라 칸타타․교향곡․가곡(Klavierlieder)․영화음악 등 다양한 쟝르에 다양한 수준의 곡들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주로 기악곡에만 선호되던 12음 기법을 성악곡에 집중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매우 주목할 일이다. “12음 기법은 기악곡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음악연주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미래가 있다. (...) 그리고 우선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은 이 기법으로 오늘날 현대 작곡가들이 자신의 특별한 과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음악이 형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진보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가 곧 새로운 성악스타일(Vokalstil)을 창출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1937년 아이슬러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망명생활을 하던 덴마크에 6개월이상 거주하면서 12음 기법으로 10여곡의 실내악 칸타타(Kammerkantate)와 “독일 교향곡”(Deutsche Sinfonie) 그리고 “레닌 레퀴엠”(Lenin Requiem) 등 집중적으로 성악곡을 작곡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12음계 성악스타일(zwölftönige Vokalstil)을 개발하려고 하는 아이슬러의 실험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가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음악의 진실성과 진보성을 정치적인 진보성과 접목시키고자는 그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아이슬러는 이러한 성악곡에서는 12음 기법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쇤베르크의 원칙과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쇤베르크의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협화음의 해방이 아이슬러에게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쇤베르크는 조성(Tonalitaet)을 협화음과 일치시켜 불협화음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데 비해 아이슬러는 조성과 협화음을 분리하였다. 즉 조성을 가지면서도 불협화음이 강한 음악이 가능하며, 반대로 협화음적으로 들리는 음악이 반드시 조성을 가져야 하는 필연성이 없다는 논리이다. 즉 기존의 조성은 회피하되 협화음의 사용을 제한하지 말자는 의도이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은 불협화음보다 협화음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중심음이 없다는 것 외에는 청중이 듣기에 조성음악과 큰 차이가 없는 듯한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 아이슬러는 12음 기본음렬을 전통적인 3화음의 구성이 가능하도록 배열한다. 즉 “도깨비칸타타”(Gottseibeiuns-Kantate)의 기본음렬은 다음과 같다.


<악보1>


쇤베르크는 “기존의 조성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화음”의 사용이 조성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청중들에게 “잘못된 기대감”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였으나 아이슬러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12음계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레닌 레퀴엠”에서는 조성음악(c-단조 행진곡)을 12음계 음악의 중간에 삽입하여 서로 전제조건이 상반되는 음악의 결합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둘째, 쇤베르크의 원칙에서는 12음 기본음렬이 모두 소개되기 전에 한 음이 반복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특정음이 반복된다.

<악보2> “망명칸타타”(Kantate im Exil) 첫부분




게다가 “한 동지의 죽음을 기리는 칸타타”(Kantate auf den Tod eines Genossen)에서는 12음 기본음렬 자체에 한 음이 반복되어 12음이 아닌 11음으로 되어 있다.

<악보3>“한 동지의 죽음을 기리는 칸타타”의 12음 기본음렬

d-f-c-as-g-h-es-fis-b-d-cis-a


여기에서 첫음 d가 10번째 음에서 반복됨에 따라 e음이 생략되었다. 그러므로 d음의 반복을 통해 9번째 음 b와 e가 형성하게 되는 증4도|감5도(Tritonus)를 피한 셈이 된다. 증4도를 피함으로 노릴 수 있는 음악적 효과는 칸타타의 가사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논문의 일관성을 위해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셋째, 쇤베르크의 12음 기본형(Grundgestalt)은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는 데 반해 아이슬러는 12음계 음악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쇤베르크의 경우 12음의 나열은 추상적인 음정의 구조를 의미한다. 간단한 예를 들면 h-f-g 라는 음의 나열은 증4도음과 장2도음을 표기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가능성을 쓴 것이다. 즉 여기에는 이 음정을 이조(Transposition)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슬러는 12음 기본형의 이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이조나 음의 생략(Tonauslassung) 또는 음의 도착(Permutation)을 사용할 경우도 유연한 멜로디의 구성을 위하거나 협화음적인 형성을 위해서이다.

<악보4> 수용소 칸타타(Zuchthauskantate)의 기본음렬(마디 84-90)
원형: d-h-g-e-fis-a-b-c-des-es-f-as
역행형: as-f-es-des-c-b-a-fis-e-g-h-d





그리고 또 12음 기본음렬을 곡의 테마와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12음계 음악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12음 기본음렬을 숨기려고 애쓰던 쇤베르크의 음악에서와는 달리 아이슬러의 12음 기본음렬은 곡의 서두에 스스로를 아주 잘 드러내므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악보5>“농부의 칸타타”(Bauernkantate) 첫 부분



아이슬러는 정치적인 내용의 가사를 담은 소박하며 말하는 듯한 멜로디로 청중에게 감정의 흥분이나 정화보다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성악곡을 개발하였다. 이와 같이 아이슬러는 이해되기 쉽고 구체적인 12음계 음악을 위해 물신적이거나 교조적인 태도없이 필요에 따라 수정하고 변형시켰다. 그에게는 12음 기법도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그 의미도 축소될 수 있으며 또 반대로 증대할 수 있는 변화를 내포한다. 이러한 실용적인 태도는 12음 기법을 음악재료의 최대로 발전한 형태로 보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된 “닫힌 체계”로 이해하는 아도르노의 음악철학적인 관점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1926년 스승을 떠난 아이슬러가 12음기법을 쓰지 않고 자유무조적으로 연가곡 “신문조각에서”(Zeitungsausschnitte op.11)를 작곡하였을 때 아도르노는 “음악이 쉽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음악재료가 현재 성취한 최고의 수준을 사용하지 않고 이미 지나온 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자신의 관점을 피력한 바 있다. 12음 기법에 대한 아도르노의 물신적인 태도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dialektischen Materialismus)을 변증법적 신비주의(dialektischen Mystizismus)로 착각”하였다고 아이슬러가 비판한 적이 있음을 참고로 언급한다.


3. 결 론

아이슬러의 수정 12음계 음악은 위에서 이미 자세히 서술한 것처럼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이 어떻게 탈 주관화 (Entsubjektivierung)되며 구체화될 수 있는 지, 또 이 기법의 사용으로 어떻게 정치적 내용을 포용할 수 있는 저항음악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런 실험을 통해 아이슬러가 쇤베르크의 음악사적 의미를 부인하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님을 밝혀둔다. 오히려 그는 쇤베르크가 서양의 “현대음악사에서 가장 가치있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당면한 목적에 바로 사용될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듯이 쇤베르크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라고 물리학에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시도는 스승이 “독일음악이 앞으로 100년동안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으로 예언했던 12음 기법을 나름대로 존속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이슬러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였는지 실패하였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가 있겠다. 1937년 겨울 프라하의 현대음악연주회(Vereinigung für zeitgenössische Musik, "Manes"가 개최함)에서 그의 실내악 칸타타 4곡이 연주되었는데 청중들로부터 대대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청중들이 대부분 독일 망명인이었고 나찌정부에 저항하는 체코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이러한 성공을 보편화하기는 힘들다. 또한 제2차 대전 후 동독에서는 쇤베르크와 12음계 음악에 대한 비판으로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이 거의 연주가 되지 못하였고, 서독에서는 아이슬러 음악의 정치성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하여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작품이 씌어진지 60년이라는 시간은 아직 성공의 여부를 판단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별로 승산이 없는 성공여부를 따지기 보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한 아이슬러의 예술적 자세를 요약해 보고 오늘 우리의 음악적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다.
첫째, 아이슬러는 음악을 역사적인 산물로 보았고, 아름다움의 개념도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로서 이를 작곡행위에 실천하였다. 즉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때마다 새로운 음악적 해결점을 찾고자 고심하였던 것이다. 20년대 후반에는 당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동음악에 전념했었고, 유럽에서의 망명시기에는 나찌정권의 패망을 위해 수정 12음계 음악이라는 예술의 힘으로 투쟁하였었다. 또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이 깊어 갈 즈음에는 12음기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거대한 문화산업이라는 배경과 음악적 환경이 유럽과는 판이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아이슬러의 음악적 변화는 한 번 옳다고 판단하고 찾아낸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회의해 보는 자기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동독에서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 1962년 7월에 아이슬러는 그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예술적 입장마저 번복하는 발언을 하였다.

“예술의 새로운 기능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예술은 원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아직도 낮은 수준의 형태인 재미, 즐거움 그리고 심심풀이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로써 나와 브레히트가 고수했던 입장을 회수하게 됨을 인정한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으려면 역사의 변증법을 통찰하여 지금까지 가졌던 우리의 모든 입장을 회의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로운 미래에 우리 스스로를 해체 (또는 용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러나 유익한 것이다.”

둘째, 그리고 이때 비판의 잣대는 음악내적인 것이라기 보다 음악외적인 것, 즉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외적 동기는 -새로운 12음계 성악스타일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처럼- 다시 음악 내적인 문제와 밀착되어 유기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작품은 예술가의 사회참여가 항상 작품의 질을 저하시킨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의를 제기한다.
셋째, 어려운 12음 기법으로도 쉽고 투명하게 작곡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행위에는 작곡가로서의 큰 용기가 필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능력없는 작곡가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제 예를 들자면, 아이슬러가 젊은 연주가들에게 12음 기법을 쉽게 소개하자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현악삼중주 “Präludium und Fuge über B-A-C-H”(op.46) 작품을 기법설명과 함께 출판한 적이 있었다. 프랑크 마르탱(Frank Martin)과 같은 작곡가는 12음 기법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다루는 것을 혹평하였었다. 아이슬러의 의도보다도 (예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음악내적인 “수준”(즉 남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 중요한 작곡가들에겐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 하자면 작곡가에게 더 많은 상상력과 능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음악적 상황은 아이슬러가 살았던 문화적 시기와 배경이 전혀 다르므로 우리의 음악적 문제와 과제 그리고 그 해결점도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스승의 음악을 독립적이며 주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새 길을 모색하는 아이슬러의 음악적 태도는 오늘날 “서구”라는 절대적 기준에 얽매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한다. 음악과 음악에 대한 이해도 서양인에게 전수받은 그대로 모방하고 실행하는 것을 음악적 최고의 가치나 미덕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뿌리깊이 잠재한 “식민지적” 음악풍토는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시켜왔던가! 물론 이런 문제들이 단순히 음악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회전반의 문제점과 얽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아이슬러가 가졌던 용기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기 비판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정신적으로 마비되어 있는 우리 음악계’에 활기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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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1, S. 55-74.
Wassily Kandinsky: On the Spiritual in Art. ed. Hilla Rebay, New York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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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 Notorwicz: Wir reden hier nicht von Napoleon. Wir reden von Ihnen! Gespräche mit Hanns Eisler und Gerhart Eisler. Berlin 1971.
Willi Reich: Arnold Schönberg oder Der konservative Revolutionär. Münche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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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란: 현대음악 작곡법 (번역: David Cope, "New Music Composition") 세광출판사 1994.
이건용: 소음을 내자. 낭만음악 제8권 3호 1996년, 2-5쪽.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1998년 제 16호, 253-277쪽.
최윤정: 쇤베르크와 표현주의의 위기 (번역: Alan Lessem, "Schoenberg and The Crisis of Expressionism"). 낭만음악 1996년 3호 (통권31호), 149-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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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lbrecht Betz: Musik einer Zeit, die sich eben bildet. Münschen 1976, S.32.
2) Nathan Notorwicz: Wir reden hier nicht von Napoleon. Wir reden von Ihnen! Gespräche mit Hanns Eisler und Gerhart Eisler. Berlin 1971, S. 28.
3)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In: Stil und Gedanke. Hg. v. Ivan Vojtech, Frankfurt a. M. 1995, S.112. 쇤베르크는 가령 15분간의 음악재료를 반복을 거듭해서 1시간 이상으로 부풀리는 행위를 사기라며 가차없이 비판했다.
4) Michael Menke: Expressionismus in der Musik, Arnold Schönbergs "Erwartung". In: 낭만음악 제8권 4호 1996년, 136쪽과 154쪽 참조.
5) 아이슬러에 따르면 쇤베르크는 원칙적으로 그에게는 청중이 필요 없으나 텅 빈 연주장에서 연주하면 소리가 좋게 나지 않으므로 청중이 있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했다 한다.
6) Arnold Schönberg: Harmonielehre. Wien 1922, S. 325.
7) Arb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In: Stil und Gedanke, S.106.
8) Wassily Kandinsky: On the Spiritual in Art. ed. Hilla Rebay, New York 1946, p.36.
9) 쇤베르크의 처남이자 스승이었던 쩨믈린스키 (Alexander Zemlinsky)는 아이슬러를 “쇤베르크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독자적인 머리”를 가졌다고 했다. (Albrecht Dümling: Hanns Eisler und Arnold Schönberg. In: Hanns Eisler der Zeitgenosse, Leipzig 1997, S. 34. 또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1998년 제 16호, 254-255쪽 참고)
10) 프랑스혁명 이래 정치성을 띤 사회참여음악이 있긴 했으나 예술적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었다. 쇤베르크에게서 음악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철저한 훈련을 받고 이론가로서도 뛰어난 아이슬러가 비로소 사회참여음악을 예술적으로 무시 못하는 분야로 체계를 세웠다. 그러므로 음악을 현실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음악가라면 (헨쩨, 논노, 림, 괘벨스등) 누구든지 아이슬러를 연구하게 된다.
11) Juan Allende-Blin: Erich Itor Kahn. Musik-Konzepte Nr 85, München 1994, S. 88.
12) Alfred Baumgartner (Hg.): Propyläen Welt der Musik. Ein Lexikon in 5 Bänden, Bd.2, Berlin und Frankfurt a.M. 1989, S.603.
13) Christian Baier: "Ich hätte noch soviel im Kopf". Zum Prioritätenstreit zwischen Schönberg, Hauer und Fritz Heinrich Klein. In: Neue Zeitschrift für Musik 1999, Nr. 3, S. 34-39.
14) 쇤베르크 스스로 사심없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919년인가 1920년에 베르크가 내게 클라인이 작곡한 것을 가지고 왔다. 내 기억으로 그것이 >음악기계<라는 제목이었는데 12음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음악으로서 큰 인상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내 자신의 (음악적) 시도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그 당시 알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12음으로 작곡한 것을 보았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Christian Baier: "Ich hätte noch soviel im Kopf", S. 35)
15) 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1, S. 55 참조. 또 다른 이유로 1911년 저서 “화성학”(Harmonielehre)을 출판 한 이후 쇤베르크는 음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론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뛰어난 교수법으로 탁월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하우어와는 달리 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16) 쇤베르크는 12음기본형을 오히려 “음악적 사고”로 이해했다. (Carl Dahlhaus: Variationen für Orchester op. 31, München 1968, 6쪽 참조. 또 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 1, 57쪽 참조)
17) 김순란: 현대음악 작곡법 (번역: David Cope, "New Music Composition") 세광출판사 1994, 32쪽 참조.
18)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10.
19)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111.
20)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07.
21)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07.
22) Michael Mäkelmann: Schönberg und das Judentum. Der Komponist und sein religiöses, nationales und politisches Selbstverständnis nach 1921. Hamburg 1984, S.469
23) Christoph Keller: Das Klaviermusik Hanns Eislers. In: Melos 1992, 29쪽 참조. 이 작품은 변주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미 여기에서 아이슬러는 테마와 변주의 관계를 뚜렷하게 하기 위해 망명시기의 수정 12음계 음악에서처럼 이조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 
24)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제16호, 1998 부산, 254-255쪽 참조.
25) 이러한 진보적인 젊은 음악가로는 쿠르트 바일(Kurt Weill),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블라디미어 포겔(Vladimir Vogel), 에른스트 츄레넥(Ernst Krenek), 슈테판 볼페(Stephan Wolpe), 헤르만 세르현(Hermann Scherchen) 등을 들 수 있다.
26) “연대가”(Solidaritätslied), “붉은 결혼식”(Der rote Wedding), “비밀스런 행진”(Der heimliche Aufmarsch) 등은 아이슬러의 대표적인 정치적 노동가에 속하며 라디오음악 “시대의 속도”(Tempo der Zeit)와 무대음악 “베를린의 상인”(Der Kaufmann von Berlin: Walter Mehring작품임)이나 “조치”(Die Massnahme: Brecht작품임), 그리고 영화음악 “무인국”(Niemandsland: Victor Trivas감독), “쿨레 밤페”(Kuhle Wampe: Slatan Dudow감독)” 등이 실용음악의 예에 속한다. 
27) 쇤베르크는 1933년 미국 보스턴으로 망명한다. 아이슬러는 1933년부터 1937년말까지 유럽에서 문화 기획자로 예술적 행위를 하다 1938년 초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28) 민중전선운동은 이전의 “통일전선”(Einheitsfront) 운동을 수정한 것인데 1935년부터 독일 망명인들 뿐 아니라 프랑스정부나 외국지식인으로부터 호응을 받기 시작하였다. 아이슬러와 달리 브레히트는 민중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29) Hanns Eisler: Musik und Musikpolitik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48-350.
30) Hanns Eisler und Ernst Bloch: Avantgarde-Kunst und Volksfront.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98.
31) 아이슬러는 쇤베르크가 자본주의 음악의 대표로 비판되어 전혀 수용되지 않던 동독에서도 쇤베르크 음악중 조성체계로 작곡된 곡들은 노동자들을 위해 항상 연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땅에 평화를(Friede auf Erden), 구레의 노래(Gurrelieder), d단조 현악사중주(Streichquartett d-moll), 올림바단조 현악사중주, 콜 니드러(Kol Nidre),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Toccata und Fuge für Orgel d-moll), 실내악 E장조(Kammermusik E-Dur)등을 이에 속하는 곡들로 칭했다.
32) Hanns Eisler: Vorbemerkung des Autors.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78.
33)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273쪽.
34) Hanns Eisler: Die Konsonanzbehandlung in der Zwölftontechnik.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389쪽.
35) 이경분: 한스아이슬러와 영화음악, 257-258쪽 참조.
36) 이 시기에 아이슬러의 “레닌 레퀴엠“과 브레히트의 서술 ”제스츄어 음악에 대하여 (Über gestische Musik)"이 서로 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에 관해서 다음 논문 참조 바람. (Kyung-Boon Lee: Gestische Musik bei Brecht. In: The Brecht-Yearbook, Nr. 24, Madison|USA 1999, S. 209-226)
37) 알반 베르크도 협화음적 12음 기본음렬을 “바이올린협주곡 (Violinkonzert)"에서 시도하였다.
38)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11.
39) 아도르노에 따르면 베르크도 쇤베르크처럼 12음 기법의 사용을 가능한 한 쉽게 알아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12음 기법의 사용이 드러나면 날수록 12음계 음악의 질은 좋지 않다. 마치 풀칠한 냄새가 나듯이.” 라고 베르크는 자주 얘기했다 한다. (Theodor W. Adorno und  Ernst Krenek: Briefwechsel. Frankfurt a. M. 1974, 53쪽)
40) Theodor W. Adorno: Philosophie der neuen Musik, Gesammelte Schriften Bd.12, 67-69쪽.
41) Theodor W. Adorno: Eisler. Zeitungsausschnitte. Für Gesang und Klavier, op.11. In: Theodor W. Adorno, Gesammelte Schriften 18 (Musikalische Schriften V), Frankfurt a.M. 1984, 527쪽.
42) Hanns Eisler: Zur Krise der bürgerlichen Musik (1932).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188.
43)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S. 273.
44)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S. 273.
45) Willi Reich: Arnold Schönberg oder Der konservative Revolutionär. München 1974, S. 139.
46) Ernst Bloch: Eislers "Kantaten" in Prag. In: Wer war Hanns Eisler? Auffassungen aus sechs Jahrzehnten, hg. von Manfred Grabs, Berlin 1983, S. 102.
47) Hanns Eisler: Fragen Sie mehr über Brecht. S, 238-239.
48) 칼 달하우스가 이러한 의견을 주장하는 대표적 음악학자이다. Carl Dahlhaus: Thesen über engagierte Musik. In: Otto Kolleritsch (Hg.), Musik zwischen Engagement und Kunst. Studien zur Wertforschung, H.3, Graz 1972, S. 7-19 참고.
49) Hanns Eisler: Die Konsonanzbehandlung in der Zwölftontechnik.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89-390.
50) 여기서 식민지적이란  서구음악을 모방하기에 급급하여 그 한계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비판없이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51) 이건용: 소음을 내자. 낭만음악 제8권 3호 1996년, 2-5쪽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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