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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 이경분

베토벤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이 경 분

* 출처 : http://www.um-ak.co.kr/gong/nonmun/keonbun-beeth-nazi.htm
* 각주 및 편집본은 출처에서 확인


1. 베토벤 음악의 다양한 수용

베토벤과 그의 음악처럼 다양하게 해석되고 모순되게 수용된 경우도 드물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게 베토벤은 "음악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위대한 사제"였다면1), 1830년 7월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는 애국적 혁명가2)로 여겨졌다. 반면에 1871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군사적, 국수주의적인 독일 제국 수립기 동안에 베토벤의 음악은 "국가음악의 상징 그 자체"로3) 여겨졌다. 또 미국인들은 그를 "진정한 민주주의자"로4) 찬양한 반면에, 혁명이 일어난 소련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사회주의 혁명의 모범"5)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차 대전에 패한 독일의 국수주의자에게는 "베르사이유 조약도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성"이요, "독일민족의 지도자"6)로 받아들여졌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 때에도 베토벤의 <환희에의 송가>가 불려졌고, 동독이 무너진 후 통독을 축하하는 기념식 때에도 인류애를 노래하는 베토벤의 9번이 연주되었다.7)

모든 예술 작품은 그것이 탄생한 시대와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처럼 그의 작품은 (다른 음악작품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끈질기게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들으면 새삼 떠오르는 여러 가지 질문 중 하나이다.

고전음악의 절정으로서, 혹은 19세기 음악사의 진정한 시작으로서,8) 그리고 음악의 악성으로서 베토벤의 중요성에 어울리게 그의 음악은 수없이 분석되어왔으며, 수용에 관련된 질문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왔다.

베토벤의 작품이 가지는 생명력이 진정 미학적인 가치 때문만이 아님은 이미 여러 수용자들의 다양한 베토벤 상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읽어 낼 수 있다.

우선 음악학자 한신(Jacques Handschin)만 해도 "베토벤의 음악은 순수 음악적, 순수 미학적 관점으로는" 충분히 해석되지 않는다고 보았다.9) 이유는 베토벤 음악이 무언가 의미를 암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불가피하게 미학적으로 축소화 내지 단순화 또는 유치함"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음악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자 하는 "강한 내적 욕구는 상대적으로 구조의 빈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10) 에게브레히트(Hans Heinrich Eggebreht)는 베토벤의 음악에는 무언가 음악적 분석만으로 그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기 힘든 내용적인 것이 들어 있다는 한신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베토벤 음악의 수용에서 항상 입에 오르내리는 "고통-의지-극복"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관찰하였다.11) 그리고 베토벤의 전기에는 누가 썼든, 언제 썼든 상관없이 베토벤이 입은 "영적 상처"로 충만해 있으며, 베토벤이 스스로 편지나 메모에서 표현한 이런 말들과 개념들이 베토벤 수용에서 그대로 반영됨에 근거하여, 베토벤의 경우 "생애와 작품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며 서로 상호보완 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12) 다시 말해, 베토벤의 음악 해석에는 필연적으로 음악외적인 요소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프랑스 음악학자 부흐(Esteban Buch)의 책 『베토벤의 9번 La Neuvieme de Beethoven』13)은 이러한 전기적 범위를 벗어나, 9번 교향곡을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음악"의 맥락에서 연구한다.14) 낭만주의자의 베토벤 신화 만들기이래, 행해진 권력자들의 베토벤 오용과 그 수용맥락을 파헤쳐 베토벤 음악의 생명력은 오히려 서로 모순된 정치적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즉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문학적으로 또 음악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을 주는 요소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매우 모순적이고 대립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음악가, 학자, 비평가들이 베토벤 음악에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지만, 누구의 시도든 완전할 수 없다. 오히려 다양한 해석들과 접근이 베토벤 음악에 신비한 의미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듯하다.

베토벤 신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작품은 오히려 음악적으로 논란이 많은 9번 교향곡의 4악장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 하다. 바그너만 하더라도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9번 교향곡의 "가장 약한 부분"을 4악장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단순히 예술사적으로만 중요하다"라고 쓰고 있다.15) 칼 네프(Karl Nef) 도 4악장의 형식적인 부족함을 비판한다.16) 실제로 9번 교향곡(첫 세 악장과 4악장간)의 형식적, 구조적인 단절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9번 교향곡이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위의 다양한 수용이 보여주듯이- 다양한 측면의 "다양한 정보성" 때문이었다 할 수 있겠다. 여기에 <환희에의 송가>가 기여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베토벤이 쉴러의 텍스트를 자신의 음악에 맞게 편집하는 과정에서 가사가 애매하고 일반적인 내용으로 되어, 수용자들이 원하는 각각의 맥락에 어려움 없이 끼워 맞춰지기 때문으로 보인다.17)

그러나 현대적 음악언어로 씌어진 작품은 아무리 다양한 측면의 다양한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하더라도, 대체로 생명력이 약하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명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시공을 초월하며 발휘하는 생명력은 진정한 예술적 가치의 기준이라는 전제에 숨겨져 있는 함정은 없는가?

여기서 잠깐 베토벤의 생명력에는 그의 작품이 여러 가지 오용에 노출되어 있는 등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베토벤이 "오늘날 어떤 면에서 존 케이지(John Cage)보다 마르린 몬로(Marilyn Monroe)와 더 공통점이 많다"18)라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암시는 베토벤의 이미지가 세속화 내지 천박화되고 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작곡가에게는 "베토벤이 더 이상 예술적 체험을 위한 원천이 되지 못하고" 대중문화의 "죽은 초상화"19)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베토벤 신화를 만든 낭만주의 음악가들도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의 모범이었던 베토벤이 처음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오해되어 찬양되는 것에 실망하였다. 1870년 비인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베토벤의 후계자로 자처하던 음악가마저 참석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20) 여기에는 물론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베토벤을 기리는 행위가 이미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여실히 보여준다.21) 이 때, 바그너는 어느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베토벤을 기리는 유명한 글 "베토벤(Beethoven)"을 썼다. 글로써 베토벤을 기리게 된 동기로 그는 "어떤 행사도 그에게 품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22)이라 밝힌다.

또한 1927년 비인을 중심으로 한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역시 베토벤 음악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쇤베르크와 같은 음악가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치가들과 행정적인 대표인사들이었다. 이미 매우 보수화 되었던 리햐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곡가들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다.23) 이 당시 이미 베토벤은 음악적 엘리트들에게 회의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베토벤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사실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고에서는 별로 새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베토벤 음악의 미학적 가치를 연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노력에 비해 큰 소득이 없는 작품의 가치기준을 서술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음악이 수용된 현상들을 통해 베토벤 음악의 위대한 생명력 뒤에 숨어있는 수용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밝히고자 한다. 그의 9번 교향곡은 1824년 초연 되자마자 오늘날까지 "음악작품으로서 뿐 아니라, 정치성을 상징하는 매체로서도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24)로 손꼽히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이 때 2세기에 걸친 수용사를 모두 다루는 것은 지면상 불가능한 일이므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왜곡되고, 모순되게 수용된 독일 나치시기(1933-1945)에 국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나치의 음악문화정책에 대한 고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베토벤의 왜곡된 수용은 이들의 문화정책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치의 베토벤 숭배가 현대음악 배척 정책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또 현대음악이 오용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늘날 생산적인 베토벤 수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이러한 시도가 결과적으로는 음악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일반적으로 "예술 중에서 가장 정치와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음악이 실제로는 "사회구조나 지배자의 정치와 연결시키는 수많은 끈"25)들을 얼마나 잘 숨기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나치시기(1933-1945)의 베토벤 오용

1933년 나치정부의 초기시기에는 독일국민들의 대다수가 히틀러를 지원한 것이 아니었으며, 1차 대전에서의 패배감으로 인한 독일인의 심리적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독일의 루우 지역은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고, 엘사스-로트링겐과 단찌히를 잃어버려 자존심이 손상된 독일 국수주의자들에게는 와해된 전쟁 이전의 세계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가 아직 없는 공백의 상태였다. 이 때 독일인의 심리 상태를 정치적으로 잘 이용할 줄 알았던 히틀러는 스스로 민족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열등감과 복수의 감정이 뒤범벅된 보수주의자들에게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어주는 강한 독일제국과 민족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프로퍼갠더를 퍼뜨릴 때, 나치들은 국민들에게 말과 논리로 설득시키기 힘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음악의 능력을 이용했다.26) 이들은 회의와 의심을 믿음과 동의로 전환시키는데 음악이 탁월하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우월성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베토벤 음악은 분명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확신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거의 모든 크고 작은 나치기관의 오케스트라는 기회만 있으면, 행사와 음악이 서로 맞건 맞지 않건 간에 베토벤 곡을 연주하였다. 1934년 제국 당 대회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때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Egmont)이 연주되거나, 1937년 그의 생일축하연 때, 푸르트뱅글러(Furtwängler)의27)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니가 9번 교향곡을 연주하였다. 바이로이트에서의 바그너 음악극 연주개막식도 어김없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으로 시작되었다. (1933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하였다) 1934년 바이마르의 쉴러 탄생 175주년 탄생기념식에서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가 괴벨스(Goebbels)의 연설을 장식하며 베토벤 9번을 지휘하였다.28) 이러한 행사를 통해 베토벤에게 지도자 상을 부각시키고, 베토벤과 히틀러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흔하게 일어난다.29) 베토벤에의 지지는 히틀러에게로 쉽게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2차대전이 일어나자 "한 사람의 독일인인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영국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30)라고 독일인의 우쭐함을 더욱 부채질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31) 물론 이런 투의 표현은 히틀러에게서 처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슈만은 1838년 "베토벤과 같은 사람하나가 6명의 외국 천재와 맞먹는다"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32) 그 외에도 수많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베토벤의 천재성을 얘기해 왔으므로 베토벤을 통해 독일음악의 우월성과 독일 민족의 음악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은 독일인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치의 베토벤 찬양은 국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데 좋은 수단이 되었다. 특히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고 노래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음악적으로 우수한 독일 민족 공동체의 형성에 대한 환상을 줄 수 있는 모범적 작품이었다.

베토벤이 우선적으로 독일 내에서 독일인의 우월성을 보장하는 상징으로 이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반면에, 대외적으로는 나치들의 진정한 속셈을 잘 가리는 알리바이 구실을 했다. 1936년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경기가 개최되었을 때, 베토벤의 9번 합창 환희에의 송가를 6000명의 베를린 중 고등학생들을 동원하여 개막식에서 부르게 하였다.33) 웅장하고도 뛰어난 연출에 대한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당시의 국제올림픽위원회장은 개막식 행사에 탄복하여 독일 국민과 히틀러에게 감사를 전하기까지 했다. 유대인에 대한 테러로 세계로부터 빈축을 샀던 독일정부가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환희의 송가>의 메시지로 나치당이 폭력단체가 아니라 평화적인 정부라는 눈가림을 하였는데 이것이 좋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얼마가지 않아 (2년 후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작으로) 히틀러의 침략전쟁과 팽창정책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올림픽 행사처럼 국제적으로 히틀러 정부의 명예를 높이는데, 독일 오케스트라와 그 지휘자들의 공로가 컸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푸르크뱅글러, 멩겔베르크(W. Mengelberg), 크나퍼부쉬(Knappertsbusch), 뵘(Karl Böhm), 아벤트로트(Walter Abendroth), 그리고 1933년 이후 나치당원이 되어 급속도로 출세하게 되는 카라얀(Herbert von Karajan)34) 등은 나치의 외교 정치적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7년부터 다시 푸르트뱅글러의 지도하에 들어간 베를린 필하모니는 "독일민족의 음악적 영혼의 신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35) 것으로 까지 평가되었으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는 개인적으로 유대인 음악가나 아방가르드음악가를 보호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치 문화정책에 효과적으로 기여한 것은 틀림이 없다. 푸르트뱅글러의 뛰어난 역할은 괴벨스가 감동하여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할 정도였다. 1939년 11월 22일 "그는(푸르트뱅글러-역주) 외국에서 우리를 위해 위대한 업무를 수행했다"라고 괴벨스는 적고 있다. 또 1940년 1월 9일의 일기에는,

"푸르트뱅글러가 스위스와 헝가리 연주여행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를 아주 잘 이용할 수 있다. 요즘 그는 아주 말을 잘 듣는다. (...)그는 우리의 음악적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프라하로 갈려고 한다. 이것은 정말 긴요한 일이다"36)

라고 쓰고 있으며, 1940년 6월 20일에는 "그는 이제 진짜 쇼비니스트(광신적 애국주의자-역주)가 되었다"라고 괴벨스는 기뻐하고 있다.37) 망명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취리히나 파리 혹은 부다페스트에서 베토벤을 지휘하도록 히틀러에 의해 파견된 지휘자가 '나는 음악가일 뿐이며, 그래서 음악만을 할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흉칙한 거짓말을 하는 짓이다"38)라고 한 것은 이렇게 볼 때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나치의 외교관'으로 훌륭한 역할을 한 데는 "미적 향유를 주는 일종의 피난처로써 잠시 잔인함을 잊게 하는"39) 기능이 한 몫 했던 것 같다. 베토벤의 9번은 전체 나치시기를 통틀어 자주 연주되었으나, 특히 전쟁중인 1941년과 42년의 모든 심포니 레퍼토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는 통계는40)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하겠다. 이미 1927년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패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수주의자들에게 베토벤의 음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를 주는 음악"이었음을 앞에서도 보았다. 이제 반대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 인에게 베토벤은 "다른 누구보다도 인간의, 모든 인간의 가슴에 와 닿는 작곡가"였다.41)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 라디오에서 1943년 멩겔베르크의 지휘하에 베토벤 9번이 연주되었고, 아벤트로트는 라이프찌히 게반트오케스트라로 파리의 Palais de Chaillot에서 같은 곡을 지휘하였다.42)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나치의 베토벤이 독일인의 우월성과 정복자로서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었던 반면에, 프랑스의 레지스탕트에게도, 나치반대자들에게도 베토벤의 음악은 "자유의 이상이 표현된 것"이었다.43)

이미 오래 전부터 런던 BBC 라디오 방송의 주제 멜로디인 베토벤 5번 교향곡 서두의 "바바바밤" 모티브는 1941년 BBC 벨기에 방송이 빅토리-캠패인을 벌이면서 승리의 상징으로 암호화했다. 이 모티브의 리듬이 모르스 무전기로 "빅토리"를 칠 때 생기는 리듬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이를 저항운동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이 멜로디가 철자 V와 함께 저항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44)

아이러니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경우는 나치들의 수용소와 게토에서 비인간적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가스실에서조차 <환희에의 송가>를 불렀던 사실이다. 당시 10세로 살아남았던 한 소년이 그 후 이 멜로디의 기원과 의미를 알게 되자, 왜 하필 이 노래가 그 장소에서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하게 되며 회의를 그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가끔 나는 (...) 이것이 범죄와 대중학살에 대한 정신의 반항이요 저항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는 때로 이 노래에 회의를 가진다. 어쩌면 이 노래를 선택한 것에서 엄청난 신랄함과 악마적 태도가 표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량학살은 분명하다. 갈 때까지 간 극단적 악이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들에게 이 축제적인 가사와 음악을 부르게 한 것 역시 죄악이다"45)

베토벤 음악 뿐 아니라 (현대음악을 제외한) 음악의 모순적인 사용은 나치 수용소(KZ)에 수감된 포로들에게도 대립적인 엇갈린 의견으로 나타난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폴랜드 유대인은 "KZ에서 음악과 노래가 포로들의 정신적 자기 방어에 기여했다"46)고 1977년 말하였던 반면, 다른 포로는 "KZ에서 음악의 역할은 마찰 없는 훈련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KZ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가끔 기분전환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47)으로 해석했다. 이들의 견해는 모두 다 각자의 입장에서 옳을 지 모른다. 스스로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폴랜드 유대인은 순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당시 많은 포로들이 느꼈던 것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1943년 드랑시에서 아우슈비츠로 수송된 성악가 파니아 페네론(Fania Fenelon)의 증언을 들어보자.

"파파파팜...여기는 런던이 아니다. 내가 기억으로 써 낸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첫 악장을 연습하는 우리(KZ-역주)의 오케스트라이다. 이 파파파팜이 내게 기쁨을 주었다.(...) 내게는 아주 드문 기쁨이다. 그녀(당시 KZ에서 동료 수용인들의 반장격인 카포 역할을 했던 로제 사중주 설립자의 딸인 알마 로제를 지칭함, 페네론이 적대시했음-역주)는 나의 악의적 기쁨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지배자인 SS(나치 엘리트 조직-역주) 요원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이 음악을 BBC의 한 지부인 "해방된 프랑스" 방송의 시그널 음악과 연결시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48)

물론 여기서 페네론의 경우는 베토벤 음악이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위로일 뿐 아니라, 상징적이나마 적들에게 저항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놀려주는 즐거움을 함께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페네론의 복잡한 심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또 5번 교향곡이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다른 포로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서의 음악행위도 결국은 나치의 정치적 목적 달성, 즉 수용소의 질서 유지와 대외적으로(예를 들면, 적십자 등의 단체가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포로들의 연주로) 휴매니즘적인 인상을 준다는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보고에서처럼 실제 유대인의 게토인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 수용된 많은 음악가들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옮겨지기 전에 일정한 기간동안 음악활동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제한적인 게토 속에서 이들이 각각 음악에서 정신적 위로를 받았음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포로들이 나치의 정치적 프로파갠더에 이용되고 있었고, 그 목표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아마도 쉽게 꿰뚫어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치음악정책의 성공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애매 모호함과 이중성으로 희생자들에게 자신들이 이용당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이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모순된 베토벤 음악의 수용 중에 논리적으로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경우는 나치들이 한편에서는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환희의 송가>를 연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과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집시들, 정신병자, 허약한 장애자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을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렇게 "모든 사람"의 개념에는 수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제외되고 있었음에도 나치들은 스스로 전혀 모순으로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오용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저항이나 비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최고의 악을 저지르는 무리들이 최고의 선과 휴매니즘를 상징하는 <9번 교향곡>을 자신의 편으로 믿고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음악이 모든 오용에 속수무책인 상태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나치들은 베토벤 음악만을 오용한 것이 아니라 재즈음악을 제외한 오락음악 및 민속음악, 행진곡 그리고 현대음악을 제외한 (그리고 유대인이 작곡하지 않은) 모든 예술 음악을 이용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대음악과 재즈음악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모든 음악이 정치적 오용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될 수 있다. 왜 나치들은 현대음악과 재즈음악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이 음악들은 어떤 보호장치를 가지고 있었는가? 본고에서는 나치들에게 "음악이 아니라 음악으로 위장한 국제적인 문화흑사병"49)으로 여겨진 재즈 음악에 대한 사항은 다음기회로 미루고, 현대음악에 국한하여 서술함을 밝히고자 한다.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 그리고 베토벤 오용의 더 큰 맥락을 보기 위해 나치의 음악정책을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볼 필요가 있겠다.



3. 나치의 음악정책

나치 문화부장관 괴벨스는 1933년 11월, "제국문화협회 창립"에서 "독일음악"은 한편으로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운명의 힘"임을 과시해야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 영역에서 투쟁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0) 괴벨스의 첫 번째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음악인들은 아리아인의 피 속에 이미 음악적 재능이 잠재해 있음을 밝혀내고, 위대한 음악대가는 독일인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이성이나 역사적인 변화보다는 운명적이며,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표현은 낭만적 음악관을 강조하는 나치의 진짜 속셈은 결국 매우 논리적이고 계산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음악이 나치의 정책을 관철시키는데 투쟁까지 불사하도록 유도할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음악이 결국 '독일 공동체'를 전쟁으로 이끄는 일에 기여하는 역할까지도 이미 암시되어 있다 하겠다.

이미 괴벨스의 연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치들은 음악을 "감정의 예술"51)로 선포한다. 이것은 나치들의 음악 정책 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이 감정의 예술이라는 주장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강조되는 강도와 그 결과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예를 초월한다.

독일인은 음악적으로 선택된 민족이며, 음악이 감정세계의 특별한 표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나치시기 전체를 통해 팽배한 것으로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다.52)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지도급 정치가들은 공개석상에서 자신이 음악에 매우 감동하는 청취자임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독일성을 과시하였다.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음악성을 의미하며, 이 음악성은 곧 독일인의 선천적인 특징이라는 논리였다.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나치 엘리트들의 음악청취는 공개석상에서 보여주기 위한 쇼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실제 히틀러와 괴벨스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히틀러는 "브람스보다 부르크너를 더 선호"53)하며, 바그너에 대한 그의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총리가 되기 전에도 히틀러는 매우 힘든 투쟁의 순간에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에서 자신의 정치적 투쟁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54)

음악을 듣는 행위는 히틀러와 나치들에게는 바로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이 때 주의해서 관찰해야 할 것은 이들이 강조하는 청취자세이다. 이들에게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청취자세는 배척되었고, 반면에 종교적인 신앙의 자세가 선호되었으며, 회의나 의심보다 믿음과 경건함이 강조되었다. 이성은 배제되고 잠재의식의 저 깊은 심연에 빠져 음악을 청취할 때의 체험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그것이 불협화음이든, 자유로운 리듬55)이든 상관없이) 배척되었다. 히틀러는 한 연설에서 음악가들에게 이성적이고 사고적인 것을 포기하라고 권하며 "우리 음악가에게 지적 이성보다 오히려 넘쳐나는 음악적 감흥이 영향을 미쳐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원칙적인 정책임을 알 수 있다.56)

1936년 히틀러는 아예 모든 예술의 비평 자체를 금지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57) 나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의견의 대립이나 논쟁이었으며, 불안함과 의심처럼 이들에게 위험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58)

이러한 상황을 꿰뚫어 본 망명 음악가 아이슬러는 나치들의 정책에 이로운 음악청취 태도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흠모와 존경, 믿음과 끝없는 향유 그리고 이성의 배제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판적이며 역사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 이것은 예술에서도 무상함이 있으며, 위대한 예술 작품도 사회적으로 변화된 조건에서는 그 가치가 줄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전자는 감동되고 열광하며 도취한 청취자를, 반면에 후자는 비판적인 청취자를 만들어 낸다.(비판적 태도는 재미를 배제하지 않는다). 전자는 파시즘에 유리한데, 이는 파시즘이 정치에서도 똑같이 흠모와 존경, 믿음을 (요구하며), 이성과 비판의 배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59)

그러므로 "예술을 신적인 선물"로 즉흥적인 것으로 여기고, 인스프레이션에 의한 미학(Inspirationsästhetik)을 주장하던 한스 피츠너와 같은 작곡가는 "음악을 영혼의 선물"이라고 보는 히틀러의 음악관과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피츠너를 비롯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외곽으로 몰린 듯했던 호이스(Adolf Heuss), 쉴링스(Max von Schillings),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등 보수적 경향의 작곡가들은 (개인적 차원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치시대에 큰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음악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시켜 시공을 초월하는 낭만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음악의 감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려는 것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성을 배제하고 사고할 능력이 없는 인간들이야말로 나치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인간들을 만드는데 바로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60) 나치의 12년 지배동안 엄청난 모순들이 진행되었지만 독일 국민들이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나치의 이상적 독일 공동체에 대한 약속을 믿었던 것은 바로 개개인의 독립적 사고능력의 퇴보를 증명하는 것 아닌가 싶다. 베토벤의 오용에 대한 독일 국민의 무딤도 배타적인 감정만을 장려하는 음악정책의 결과로 보인다. 이런 바탕 위에 감정의 음악이 유대인에 대한 비이성적인 투쟁으로까지 고무되며, 결국 전쟁에 필요한 "광적 무지"61)로 발전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음악에 대한 배척 정책은 중요한 것이었다.

나치 음악정책의 열성적인 대표음악이론가인 발터 아벤트로트(Walter Abendroth)62)는 신음악을 "문화적 쓰레기"로 표현하면서 현대음악을 금지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신음악이 민족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 정신과 존재가 듣기 좋은 소리와 아름다움, 의미와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강하고 당당한 우리 민족 속에 살아있는 건강한 감각과 의지에 관계하는 모든 것을 잘 알면서도 경멸하고 우습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음악은 부패의 병원균이다."63)

이러한 파괴적 평가는 신음악이 강한 불협화음으로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진짜 이유는 나치들이 선전하는 소위 모든 성스럽고 경건하며 영원한 음악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목적 달성에 유리한 음악은 -아이슬러가 주장하듯- "소위 좋은 옛날을 반영"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좋은 분위기와 충직함, 그리고 하모니를 있는 듯하게 보여주는" '성스러운 음악'이어야 하는데, 현대음악은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붓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치들의 정책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고 예리하게 파악했던 아이슬러는 나치들의 현대음악에 대한 핍박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현대음악은 자본주의의 모든 추하고 혼란스런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에 나치들이 국민을 기만하는데 적당하지 않다. 다시 말해 현대음악이 우리 시대의 부패와 붕괴에 대해 너무 많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64)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현대 음악은 모순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깨우쳐주는 음악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나치들이 오용하지 못하고 배척한다는 말이다. 나치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현대음악 언어는 환상과 열광은커녕 오히려 마취에서 깨어나게 하는 고약한 것이었다. 현대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나치에게 전혀 유리하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이런 음악은 독일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음악으로 선포되었고, 독일음악인 베토벤의 음악은 현대음악을 막을 수 있는 방패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오늘날 독일 음악이 다시 음향놀이와 불협화음적 스포츠가 되지 않으며, 하모니의 매춘과 형식의 카오스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애쓸 것이다. 여기에 베토벤이 우리의 보루가 된다."65)

그러나 현대음악에 대한 배척 역시 나치들이 처음 시작한 일이 아니다.66) 쇤베르크가 청중과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신음악을 이해하려는 준비가 되어있는 제자들과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사적인 연주회"를 조직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신음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나치 지지자 외에도 다양했다. 쇤베르크 음악에 대한 파괴적 비평 때문에 그와 원수관계로까지 간 비인의 유명한 비평가 율리우스 콘골드(Julius Korngold)는 유대인으로 나치에게 쫓겨 미국으로 간 망명인이었다. 물론 훗날 두 사람은 같은 처지의 망명인으로 서로 화해를 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나치들은 베토벤의 음악에도 전혀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지 않으며67),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베토벤 상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였듯이, 현대음악에 대한 반감에서도 이미 팽배해 있는 대중의 감정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이용한 것이 나치 문화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보인다.

물론 나치들이 새로운 시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종 이론분야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엄격히 따지자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바그너가 1850년에 「음악에서의 유대주의 Judentum in der Musik」를 발표하였으며, '유대인과 비음악성'의 관련성에 대한 이론은 1933년 이전에도 이미 극보수주의자들에게 공공연하게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민족과 음악의 직접적인 관계를 증명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시도는 나치음악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용이하지 않았다. 이유는 베토벤이 일반적으로 아리아인, 즉 북구인의 전형과는 달리 파란 눈이 아니라, 고동색 눈이었으며, 머리카락도 금발이 아니라 검었으며, 건강미가 넘쳐흐르고 아름다워야 할 아리아인의 모범과는 달리, 키도 작고 못생긴데다 전혀 인종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도 술주정뱅이에다 아들을 포탈한 자로 순수한 아리아 피가 고귀한 인간과 '독일적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그들의 주장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이에 맞지 않는 사실에 근거하여 학자 발터 라우센베르거(Walter Rauschenberger)는 "겉으로 이렇게 북구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강한 북구적 정신을 가질 수 있는가?"68)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나치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독일 민족의 에로이카"로 규정지으려 했으므로 인종 이데올로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학자들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인종과 음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열성적 나치 음악학자 리하르트 아이헤나우어(Richard Eichenauer)도 "베토벤 가문이 종족적으로 많이 혼합되었다는 것은 베토벤과 그의 두 형제가 외향적으로 매우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에서 아주 설득력이 있다"69)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베토벤의 비게르만적 외형과 인종의 혼합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북구적인 예술가로 규정된다. 그 근거는 "북구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영웅적인 것, 작품의 영웅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토벤의 작품이 모든 영웅적 내용의 행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것은 바로 그가 "북구적"이기 때문이라는 빈약한 논리이다.70)

나치의 음악정책 중 가장 엉터리 같은 주장들이71) 바로 이 아리아 인종과 예술을 연결하는 데에서 가장 많이 양산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도 많은 모순이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끼워 맞추기 식으로 주장되기 때문이다. 음악가 중 문제가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슈베르트의 눈과 머리카락 색도 문제였고, 너무 유연한 얼굴 형태 역시 북구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성병의 결과로 정신이상이 되어 죽은 슈만도 강하고 건강한 게르만족의 이상에 맞지 않았으며 그 역시 순수 아리아인이 아니라 혼혈아였다.72)

다른 한편, "독일음악의 본질을 멜로디적인 것에 있다"는 괴벨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멜로디를 만드는데 무능력한 유대인"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에서 멜로디적인 것은 골치 아픈 사실이었다. <유대인과 음악 Jude und die Musik>의 저자 칼 블레싱어(Karl Blessinger)는 말러의 음악이 멜로디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유대인의 탄식 그 이상을 넘지 못한다"라고 자신감 없이 결론을 맺고 있다.73) 또한 나치들이 독일왈츠의 대부로 칭송하던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도 유대인의 피가 1/8 섞였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괴벨스는 이를 공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이유는 "전체 독일 문화적 소유가 점점 탕진되게 될" 판이기 때문이라고 괴벨스는 일기장에 적고 있다.74)

인종과 음악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나치 간부들은 1938넌 5월 뒤셀도르프의 제국음악대회에서 "인종과 음악"이라는 주제로 행사를 열었다. 행사의 일부로 "퇴폐적 음악(Entartete Musik)"의 전시회를 열고 적극적으로 현대음악과 유대인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 추하고 기형적인 음악(현대음악)을 만드는 자들이 유대인이라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이 두 그룹을 공산주의와 연결하여 더욱 적대적인 인상을 일으킬 수 있는 "음악 볼셰비키주의(Musikbolschewismus)"75)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적을 한 솥에 모두 부어넣으려 했다.

명단에 포함된 음악가의 일부 예를 들어 보면, 여기에는 쇤베르크를 비롯하여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 힌데미트(Paul Hindemith), 스트라빈스키(Igor Strawinski), 에른스트 토흐(Ernst Toch),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에른스트 크세넥(Ernst Krenek), 쿠르트 바일(Kurt Weill),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에리히 코른골드(Erich Korngold) 등의 작곡가 뿐 아니라 오토 크렘퍼러(Otto Klemperer), 아르투어 슈나벨(Arthur Schnabel), 칼 플레쉬(Carl Flesch)와 같은 유대계 연주가 및 파울 아브라함(Paul Abraham), 빅토 홀랜더(Victor Hollaender), 미샤 스포리안스키(Mischa Spoliansky), 장 길버트(Jean Gilbert)와 같은 가벼운 음악(특히 오페레테)의 대표자들(모두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다.

이 명단에 없는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은 자신의 이름이 전시회의 리스트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베를린의 외무부에 항의하며, 자신의 이름도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76) 이와 반대로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유대인도 아닌데 리스트에 들어 있음을 친구를 통해 항의하였는데,77) 바르톡과 대조를 이룬다. 스트라빈스키는 실제로 현대음악가중 나치 독일에서 자주 연주된 편에 속한다.78)

1937년 뮌헨에서 있었던 "퇴폐적 미술(Entartete Kunst)"에 비해 뒤셀도르프의 음악 전시회는 호응도가 약하였는데, 그 해 3월에 있었던 오스트리아 합병과 5월말에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대한 히틀러의 계획이 알려지면서 정치적인 사건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79) 다른 한편, 개인적 차원의 작품활동이 가능한 미술분야에 비해 음악활동은 -극장, 방송국,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위치는 나치당원이 자리잡고 있어- 어차피 국가적 통제가 이미 잘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공개적인 전시회의 필요성이 희박한 상태였다.80)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푸르트뱅글러는 행사를 추진하는 "행정인들이 예술가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행사 책임자인 찌글러(Hans Severus Ziegler)와 식스트(Paul Sixt)에게 유대인과 함께 일하는 "프란츠 레하(Franz Lehar, 아리아인 임-역주)를 잊어 버렸네"라고 놀리기도 했다.81)

그리고 행사 책임자 찌글러의 사적 목적이 이 전시회에 뒤범벅이 되기도 해서 물의를 빗었는데, 이는 "퇴폐적 음악인"의 명단에 프랑크푸르트 음대학장인 헤르만 로이터(Hermann Reutter)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82) 로이터는 나치당원에 속했고 횔더린(Friedrich Hölderin)의 텍스트에 부친 칸타타 "독일인의 노래(Gesang des Deutschen)"과 같은 국수주의적 내용의 음악을 작곡하였던 음악가로 전시회에 포함될 인물이 아니었다. 순전히 로이터에 대한 찌글러의 개인적인 증오 때문이었다.

이 전시회를 둘러싼 잡음과 그 실패는 수많은 유대음악가와 독일음악을 망치는 낯선 것들을 모두 쫓아내었지만, 실제로는 나치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음악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러나 이미 독자적인 비평이 금지된 지 오래되어 비평다운 비평을 하지 못하는 각 도시의 신문과 방송매체는 이 행사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기 보다 공식적인 발표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이렇게 볼 때, 나치정권의 초기를 제외하고 나치의 음악정책은 큰 테두리를 제외하면 그리 일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종족과 음악의 분야나 전시회에서 보듯이, 적지 않은 모순과 일관성의 부족도 눈에 두드러진다. 다시 말하면 감정에 편중하는 음악정책과 현대음악 및 유대음악인을 배척한다는 전체적 윤곽은 변함이 없으나, 디테일과 실습에 있어 일사불란한 음악정책은 나치독일에서 기대하기 힘들다.83)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의 정책적인 술책과도 관계 있다.

히틀러는 음악과 관련된 자세한 지시에 있어서는 소극적이었고, 부하들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도록 오히려 유도했다. 그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와 문화정책에 관련된 엘리트 행정관리인, 로젠베르크(Rosenberg), 괴링(Göring), 쉬라하(Schirach) 등이 제국의 음악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열띤 경쟁을 하였다. 이들 중 끝까지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은 로젠베르크와 괴벨스84)이었는데 둘은 끊임없이 경쟁하는 관계였다. 뒤셀도르프의 전시회를 두고도 로젠베르크와 괴벨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히틀러는 문화간부들의 결정권에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함으로 모순과 잡음은 있으나, 뚜렷한 위계 질서체제에서 쉽게 일어나는 경직화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거리를 두고 볼 때 너무나도 황당한 모순들이 독일 국민에게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국민들을 엄청난 도취에 빠지게 하고, 이를 광기로 유도하였던 나치의 음악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해준다 하겠다. 나치들은 엄청나게 활발한 음악연주회와 행사들로 '독일 음악적 공동체'가 도래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끝없는 가상세계의 연출"85)을 시도하였다. 나치당과 그 산하 조직들의 정치 행사를 위한 음악 수요는 엄청난 것이었다. 고전의 위대한 음악가의 작품 외에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씌어진 무명, 유명작곡가의 작품이 무려 15000개에 이른다는 사실86)은 나치 독일이 얼마나 활발한 음악생활을 지원하였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확한 논리나 이성적 판단보다 격앙된 감정과 광신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의 성공에 음악학자들도 일조했다. 거의 대부분 보수적이고 국수적이던 음악학자들은 큰 어려움 없이 나치 이데올로기에 합의될 수 있었다. 학문적으로 진지하고 권위가 있었던 리스트 전문가 페터 라베(Peter Raabe)는 종족과 음악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지만, 1935년 이후 제국음악협회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소위 "퇴폐적 음악가"를 색출하는데 공헌하였다.87) 그 외에 나치 시기의 명망 있었던 연구가로 1940-45년 동안 직접적으로 제국의 프로파갠더 직원으로 일했던 한스 요하힘 모저(Hans Joahim Moser)와 "독일 음예술의 게르만 유산(Germanische Erbe in der deutschen Tonkunst)"을 집필하고 젊은 나이에 프라이부르크 음대의 학장으로 출세하는 요셉 뮐러-블라타우(Joseph Müller-Blattau), 그리고 "유대인 음악사전(Lexikon der Juden in der Musik)"을 저술한 열성적 나치였던 헤버트 게릭(Herbert Gerigk), "음악에서의 종족문제(Das Rassenproblem in der Musik)"를 집필한 프리드리히 불루메(Friedrich Blume) 등을 들 수 있다.



4. 끝맺으며

지금까지의 서술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려보자.

나치시기에 베토벤의 음악은 (다른 고전음악 및 바그너의 음악과 안톤 부르크너의 음악과 함께) 독일인의 우월감을 과시하고, 히틀러의 평화적인 외교관으로 뛰어난 역할을 수행하여, 독일 팽창주의 정책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가해자나 희생자에게 모두 위로를 주는 음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수용을 생각해 보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베토벤 음악을 비롯한 고전음악이 소위 '퇴폐적 음악'인 현대음악을 막는 방패역할도 이미 1920년대 바이마르시기의 국수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의 그로테스크한 베토벤 수용조차도 '나의 베토벤은 너희들의 베토벤과 다르다'라고 한 니체의 말처럼, 수용자의 측면에서만 볼 때 -나치 범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나치가 역사와 관련이 없는 일회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의 연속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처럼 베토벤의 모순적인 수용이 나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비일비재하였음에도 나치의 베토벤 수용이 이전의 시기와 다른 차이점은 수용자인 나치들이 행한 범죄의 무거움에 있다 하겠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계화된 인간 학대와 살인,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데 음악이 기여한 정도가 이전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나치의 음악정책이 여러 가지 부인할 수 없는 모순과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독일 사람은 모두 형제이다'라는 (타민족을 학대하는) 배타적인 독일 공동체를 형성하여 독일 국민을 전쟁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존의 것을 이용하여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 후,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인의 내면적 삶을 야만적으로 변질"88)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성공에는 라디오, 영화와 같은 새로운 매체가 차지했던 중요한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라디오는 히틀러의 연설도, 음악연주도 라이브로 방송하였으므로 당시 대부분의 독일가정에 보급되었던 라디오는 나치 선전정책의 직접적인 전달매체로써 없어서는 안될 충실한 도구였다. 음악이 미술보다 나치 정책에 더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라디오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베토벤 수용을 통해 바라본 나치의 음악정책에서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89)는 파시즘의 유미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스스로 화가로 자처하던 히틀러는 정치적 집회나 행사를 음악 및 예술의 힘을 빌어 '예술적'으로 연출하는 정치의 심미화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유대인 학살이나 전쟁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심미적 대상으로 환원"90)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는 특히 자신의 정적인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정치가로 일컬으면서도 스스로는 항상 "지도자 혹은 예술가"91)임을 자처하는데, 이것 역시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히틀러가 예술의 순수성과 낭만적 예술관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예술의 정치적 도구화를 추구하였다는 사실에서 순수한 음악관이 지니는 오용 가능성의 함정을 재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어차피 생명력이 약한 현대음악을 그냥 두지 않고 공개적으로 학대하는 나치의 태도에서 그들이 표면적 주장과는 달리 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깊이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음악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것으로, "인간의 말과 세상의 비참함을 피해 안식할 수 있는 우주적 언어"92)로만 여긴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일이다.

끝으로, 베토벤 음악의 끈질긴 생명력 뒤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베토벤이 유대인이었더라면, 나치시기에 이렇게 그의 음악이 오용될 수 있었을까 라는 반문으로 재확인해 볼 수 있다. 아마도 멘델스존이나 말러의 경우처럼 그의 음악도 연주되지 않았으며, 오용되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어쩌면 반유태주의자였던 바그너에서부터 베토벤의 수용 자체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음악을 비롯한 예술작품이 전적으로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요소의 영향하에 있음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다.

아우슈비츠의 범죄와 나치의 오용이후, 베토벤 신화의 어둡고 얼룩진 면은 수용사에서 무시해 버릴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토마스 만이 미국망명시기에 "파시즘에 대한 문학적 대결"93)로써 쓴 소설 『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us』에서 9번 교향곡이 실패한 휴매니즘의 상징으로써 회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94)

물론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9번 교향곡이 1960년대에 "유럽의 찬가"로 지정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 등으로 또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진정 살아있는 작품으로써 의미를 가지려면, 좀 다른 수용형태로 나타나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미하엘 길렌(Michael Gielen)이 프랑크푸르트 연주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3악장과 4악장 사이에 쇤베르크의 망명 작품 <바르샤바의 생존자 A Survivor from Warsaw>를 삽입하였던 시도95)는 오늘날 어떻게 베토벤을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하겠다. 유토피아적인 <환희에의 송가>는 쇤베르크의 작품이 고발하는 반인류적인 행위의 역사와 비교되어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과 시도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환희에의 송가>는 오늘날에도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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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Zur Musikpolitik des Dritten Reiches
anhand der Rezeption von Beethovens Sinfonien

Kyung-Boon Lee



Es gibt wenige Musikwerke, die eine so widersprüchliche Rezeption aufweisen wie Beethovens Musik: Die Romantiker im 19. Jahrhundert z. B. priesen Beethovens >Neunte< als "göttliche Tonkunst", den Komponisten als "Hohepriester". In den 20er Jahre des 20. Jahrhunderts war seine Musik "ein Vorbild für die sozialistische Revolution." Für die Amerikaner war Beethoven "ein echter Demokrat", während der deutsche konservative Wissenschaftler Adolf Sandberger den Komponisten "zur Festung, die kein Versailler Vertrag zu zerstören vermag", erklärte. Am heikelsten und widerspruchsvollsten zeigt sich die Rezeption während des Dritten Reichs: Während die Nazis die Beethovens Musik zu einem Leitfaden ihrer Musikpolitik machten, sahen die Nazigegner in ihr einen Ausdruck ihrer Freiheitsidee. Auch der jüdische Kinderchor in Auschwitz sang vor seiner Ermordung in der Gaskammer die "Ode an die Freude".

Anhand diesen widerspruchsvollen Rezeptionen Beethovens wird hier untersucht, was der Grund für die Langlebigkeit des Werks ist. Da es sich hier nur um einen Aufsatz handelt, wird der Zeitraum der Untersuchung auf das Dritten Reich beschränkt. So sind die Fragen untersucht, welche Absicht der Nazis hinter dem Missbrauch von Beethoven stand, welche Rolle seiner Musik für die Diffamierung der modernen Musik spielte und nicht zuletzt, inwieweit Musik und Politik zusammenhängen. Diese Fragen liegen nahe, da die Sinfonie seit der Uraufführung 1824 bis heute nicht nur als Musikwerk, sondern auch als "Medium politischer Symbolik" eine erstaunliche Karriere aufzuweisen hat.

Um dies zu veranschaulichen, wird zunächst genau untersucht, inwieweit die Musik Beethovens im Dritten Reich missbraucht wurde, welche Musiker und wie sie dazu beitrugen.

Aus dieser Untersuchung ergibt sich die Frage, was amoralishe Menschen wie die Nationalsozialisten dazu verleiten könne, die moralische Gültigkeit des ästhetischen Erlebens auch für sich zu beanspruchen, allgemeiner gesagt, inwieweit die Musik politisch missbraucht werden kann.

Da nicht alle Musik von den Nazis missbraucht wurde, d.h. da gerade die Neue Musik und die Jazzmusik verfemt waren, wird ihre Musikpolitik näher untersucht, wobei die Jazzmusik beiseite bleibt. Daraus wird deutlich, warum die moderne Musik ihrer Musikpolitik widersprach: Für die Zwecke des Volksbetrugs ist sie weniger geeignet, da sie die kapitalistische Zustände in all ihrer Verworrenheit und Hässslichkeit widerspiegelt und viel über die Fäulnis und Zersetzung unserer Zeit aussagt.

Trug die Musik Beethovens innenpolitisch zu Überlegenheitsgefühle der Deutschen im Dritten Reich bei, spielte sie als hervorragender Diplomt Hitlers im Ausland auch eine entscheidende politische Rolle, wie Thomas Mann zu Recht betonte: "Ein Kapellmeister, der, von Hitler entsandt, in Zürich, Paris oder Buddapest Beethoven dirigierte, machte sich einer obszönen Lüge schuldig - unter dem Vorwande, er sei ein Musiker und mache Musik, das sei alles."

Nach Ausschwitz ist der Humanitätsgedanke von Musik Beethovens, nicht zuletzt die 9., heute nicht ohne Bedenken zu rezipieren, denn die herrschende Kultur definiert, was menschlich ist, um zugleich von der Unmenschlichkeit abzulenken, unter der die in ihrem Schatten lebenden Opfer leiden. Wie man heute Beethoven produktiv weiterdenken kann, zeigt der Versuch von Michael Gielen in einem Frankfurter Konzert Ende der siebziger Jahre, der zwischen dritten und vierten Satz der Neunten Arnold Schönbergs >Überlebender aus Warschau< stellte.



주(원문에서는 각주)
1)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Bd. 26, Nr. 27, 1. Juli 1824, 441쪽.

2) Esteban Buch: Beethovens Neunte (원제 La Neuvieme de Beethoven. 독문번역: Silke Haas), Berlin, Muenchen 2000, 75-76쪽.

3) Esteban Buch: Beethovens Neunte, 192쪽.

4) New York Times, 26. 3. 1927, E. Buch: Beethovens Neunte, 227쪽 재인용.

5) Anatoli Lunatscharski, A. Eichhorn: Beethovens Neunte Symphonie, Kassel 1993, 319쪽 재인용.

6) Adolf Sandberger: Das Erbe Beethovens und unsere Zeit, Neues Beethoven-Jahrbuch, Bd.3, Augsburg 1927, 29쪽.

7) 어쩌면 남한과 북한이 통일될 때에도 베토벤의 음악이 연주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8)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München 1990, 563쪽 참고.

9) Jacques Handschin: Musikgeschichte im Überblick (1948),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0쪽 재인용.

10)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0-571쪽 참고.

11)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1-573쪽. 저자 에게브레히트는 이 세 개념이 매우 진부하고 낡아서 입밖에 내기조차 꺼리게 되지만, 베토벤 음악의 본질적 핵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12) Hans H. Eggebrecht: Musik im Abendland, 575쪽.

13 독일어 번역판 "Beethovens Neunte. Eine Biographie"(Silke Haas번역)을 참고했다.

14) 저자 Buch는 18세기에 탄생한 영국의 국가 <신이여 국왕을 구하소서 God Save the King>으로 시작하여 프랑스 국가 <마르세이유 Marseillaise> 및 하이든의 <황제찬가 Kaiserhymne>, 그리고 메테르니히와 관계 있는 베토벤의 칸타타 <찬란한 순간 Der glorreiche Augenblick>등의 국가음악이 9번 교향곡의 성공적인 정치적 수용을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15 Richard Wagner: Brief an Franz Liszt am 7. Juni 1855, Richard Wagners Saemtliche Briefe, Leipzig 1979, 204쪽.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적 주장을 위해 4악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상대화시키고 "음악적 신학(musikalische Theologie)"으로 추켜세웠다. E. Buch, Beethovens Neunte, 11쪽.

16) Karl Nef: Die neun Sinfonien Beethovens, Leipzig 1928, 301쪽. Martin Geck: Von Beethoven bis Mahler. Die Musik des deutschen Idealismus, Stuttgart 1993, 89쪽 재인용.

17) E. Buch: Beethovens Neunte, 96-128쪽 참고.

18) Andy Warhol: Beethoven, 1987, E. Buch: Beethovens Neunte, 17쪽 재인용.

19) E. Buch: Beethovens Neunte, 17-18쪽.

20) 100주년 탄생 기념행사의 주최측에서 새 독일 음악(Neudeutsche Musik)의 위대한 바그너와 리스트를 초청하여 9번 교향곡과 장엄미사를 지휘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m)과 요셉 요하힘(Joseph Joachim)도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 연주행사에 누가 초청되었는지 알고 나서는 모두 거절하여 아무도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브람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요하임과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와 적대관계에 있는 리스트와 바그너, 그리고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리스트와 바그너도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행사 주최인사에는 유명한 비평가 한스릭(Eduard Hanslick)도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류음악가들을 행사에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E. Buch: Beethovens Neunte, 195쪽 참고.

21) 리스트는 이에 대신하여 1870년 12월 17일 페스트(Pest)에서 베토벤 심포니 9번과 자신의 "베토벤을 위한 칸타타(Kantate für Beethoven)"를 지휘했다.

22) Richard Wagner: Beethoven, Gesammelte Schriften und Dichtungen in 10 Bd. Leipzig 1907, Bd. 9, 61쪽.이 글에서 바그너는 음악을 통해 독일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해야한다는 민족주의적 견해를 강조한다. "독일 무기가 프랑스문명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뚫고 들어갔지만, 갑자기 우리가 이 문명에 종속되어있다는 부끄러운 느낌"이 일어남을 서술하면서 파리의 유행에 빠지지 말기를 경고한다. 그는 독일인의 특수함을 표현하는 완전한 인간을 베토벤으로 들며, 베토벤에 감격하는 자는 노동하며 참을성이 강한 사람인 반면에, 롯시니, 벨리니, 도니체티에 매료되는 사람들은 방탕하고 게으른 부유한 자라는 도덕적인 편견을 퍼뜨렸다. 베토벤의 음악이 도덕적 가치로 전환되어 수용되는데 바그너도 기여한 것이다.

23) E. Buch: Beethovens Neunte, 248쪽.

24) E. Buch: Beethovens Neunte, 7-11쪽 참고.

25 Hanns Eisler: Musik und Musikpolitik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I (1918-1948), Leipzig 1985, 334-357쪽.

26) Albrecht Dümling/Peter Girth(Hg.): Entartete Musik. Dokumentation und Kommentar, Düsseldorf 1993, 253쪽.

27) 푸르트뱅글러는 1934년 힌데미트를 둘러싸고 괴벨스 및 나치비평가의 비판을 받고 그해 12월에 자신의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으나(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Eine Dokumentation, Hamburg 1966, 378) 1937년부터는 다시 베를린 필하모니를 맡고 점차 나치정부의 정책에 지지자가 된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3쪽 참고)

28) 이 때 Völkische Beobachter는 20세기 독일 천재인 히틀러가 18세기 천재인 쉴러에게 머리 숙인다고 보도했다. E. Buch: Beethovens Neunte, 264쪽.

29) 1933년부터 나치당의 문화기관지로 변신한 음악잡지 Die Musik에서는 "독일음악의 민족화"라는 슬로건 하에 독일음악의 두 축을 베토벤과 바그너로 보며, 이 둘의 행복한 결합이 히틀러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아첨하기까지 했다. Willi Hille: Nationalisierung der deutschen Musik, Die Musik, XXVI/9, Juni 1933, 666쪽.

30) Heribert Schröder: Beethoven im Dritten Reich, H. Loos(Hg.), Beethoven und die Nachwelt. Materialien zur Wirkungsgeschichte, Bonn 1986, 221쪽. E. Buch: Beethovens Neunte, 260쪽 재인용.

31) 그러나 히틀러 자신은 베토벤보다 오히려 바그너에게 더 매료되어 있었다. 물론 1938년 베토벤 기념비 추진을 위해 개인적으로 후원한 사실도 있으나, 몇몇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그는 베토벤보다는 바그너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32)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444쪽.

33) E. Buch: Beethovens Neunte, 266쪽.

34) E. Buch: Beethovens Neunte, 268쪽. 1940년 카라얀이 신문에서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시한 일로 푸르트뱅글러와 언쟁이 있었다. 카라얀을 위대한 예술가로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푸르트뱅글러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참고.

35) E. Buch: Beethovens Neunte, 260쪽.

36)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37)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38) Thomas Mann: Warum ich nicht nach Deutschland zurürckgehe. Offener Brief an Walter Molo, Thomas Mann Gesammelte Werke in 12 Bd. Frankfurt a.M. 1960, Bd. 12, 958쪽.

39) E. Buch: Beethovens Neunte, 269쪽.

40) H. Schröder: Beethoven im Dritten Reich, 218쪽과 E. Buch: Beethovens Neunte, 264쪽.

41) E. Buch: Beethovens Neunte, 269쪽.

42) 음악이 다른 어떤 예술보다 더 정복자의 목적에 큰 기여를 했다는 레지스탕트 소설들의 주장이 소설적 상상력이상으로 설득을 가진다. E. Buch: Beethovens Neunte, 270쪽 참고.

43) E. Buch: Beethovens Neunte, 274쪽.

44) E. Buch: Beethovens Neunte, 274쪽.

45) Daniel K.: Singing the Ode "To Joy" in Auschwitz: A Ten-Year-Old's Story, The Beethoven Jouenal, Bd. 10/1, 1995, 4쪽. E. Buch: Beethovens Neunte, 278 과 279쪽 재인용.

46) E. Buch: Beethovens Neunte, 278-277쪽.

47) Simon Laks: Melodies d'Auschwitz, Paris 1991, 31과 131쪽, E. Buch: Beethovens Neunte, 277쪽 재인용.

48) Fania Fenelon: Das Mädchenorchester in Auschwitz, Frankfurt a. M. 1980, 111쪽. 저자는 이 책에서 알마 로제를 인정 없는 반장으로 포로의 편이 아니라 나치에게 아첨하는 인물로 서술하고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E. Buch: Beethovens Neunte, 276쪽.

49)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90쪽.

50)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253쪽.

51)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39쪽.

52)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도 "음악이 예술 중에서 가장 감각적 것이며, 음악은 이성보다 가슴과 감정에 더 호소한다"라고 강조했다.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39쪽. 음악과 독일성의 연관성도 니체 이후 토마스 만 등의 작가도 주장할 만큼 전혀 나치의 독자적인 의견도 아니다. 장성현. 파시즘과 니체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 만의 견해: 『파우스트 박사』를 중심으로, 『독일문학』통권 58집, 1995년 한국독어독문학회, 21쪽 참고.

53)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225쪽.

54)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39쪽.

55) 1940년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그의 저서 <이상의 형상화>에서 "전 무조적 음악운동은 독일 민족의 피와 영혼의 리듬에 거슬리는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56) Hitlers Rede auf den Kulturtagung des Parteitags Grossdeutschland, 1938,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28쪽 재인용.

57)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17쪽.

58)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46쪽.

59) Hanns Eisler: Einiges über das Verhalten der Arbeitersänger und -musiker i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I, 244-245쪽.

60)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없도록 강조할 것은 나치의 정책에 베토벤 음악만이 이용된 것이 아니라 -본고에서는 베토벤에 국한되어 서술되었지만- 마취효과를 일으키는 바그너의 음악과 신앙적 경건함을 주는 부르크너의 음악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61) Albrecht Dümling/Peter Girth: Entartete Musik, 16쪽.

62) 아벤트로트는 1945년 이후 활동이 금지되기는커녕, 함부르크의 유명한 신문 <시대 Die Zeit>의 책임음악주간으로 전후 독일의 공적음악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63) Walter Abendroth: Kunstmusik und Volkstümlichkeit, Die Musik 1934, 413-414,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59쪽 재인용.

64) Hanns Eisler: Einiges über das Verhalten der Arbeitersänger und -musiker in Deutschland, Musik und Politik I, 256-257쪽.

65) Paul Zschorlich: Beethoven und wir. Völkischer Beobachter vom 16. 12. 1934,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27쪽 재인용.

66) 이경분. 쇤베르크와 '독일음악', 『음악과 민족』 제21호, 2001년 봄, 79-98쪽 참고.

67) 베토벤이 독일인의 우월 감정을 치켜세우는 역할을 한 것은 나치시기부터가 아니라 이미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전쟁 시기 독일민족주의자들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이 때, 나치들은 음악비평가 파울 베커(Paul Bekker)의 새로운 베토벤 해석이나 지휘자 오토 크렘퍼러(Otto Klemperer)의 혁명적인 해석은 자신들의 의도와 맞지 않으므로 배척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68) Walter Rauschenberger: Volk und Rasse (1934),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40쪽 재인용.

69) Richard Eichenauer: Musik und Rasse, München 1937, 227쪽,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40쪽 재인용.

70) Walter Rauschenberger: Volk und Rasse (1934),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241쪽.

71) 한스 찌글러는 3화음과 조성이 게르만적-독일적 음악의 본질이고 프롤레타리아의 무정부적인 무조음악이 이와 대조된다는 주장까지 한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192.

72)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444쪽.

73)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51쪽.

74)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61쪽.

75) 이 개념도 피츠너가 이미 1918년에 사용하고 있다.

76)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55쪽.

77)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26쪽.

78) Joan Evans: "Die Rezeption der Musik Igor Strawinskys in Hitlerdeutschland", Archiv für Musikwissenschaft, 1998/2, 91-109 참고.

79)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460쪽.

80) Fred K. Priesberg: Musik im NS-Staat, Entartete Musik, 197쪽 재인용. 프리스베르크는 이 전시회를 무리하게 성사시킨 나치 연극인 찌글러가 자신의 동성애적 비밀을 가리기 위해 과장될 정도로 열성적으로 충성을 보인 것으로 해석한다.

81)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254-255쪽.

82)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199쪽.

83) Michael Gerhard Kaufmann: Orgel und Nationalsozialismus - Die ideologische Vereinnahmung des Instruments im "Dritten Reich", Kleinblittersdorf 1997, 24쪽. 또 12음 음악을 배척하면서도 찔리히의 협화음적 12음 음악인 오페라 "희생(Das Opfer)"은 1937년 함부르크에서 초연되었으나, 비평가들은 비판은 커녕 오히려 칭찬하였다. 이 사실에서 나치 비평가들이 음악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Silke Hilger: Die Vergessenen Weisen des Winfried Zillig, Musica 1995/2, 78쪽 참고.

84) 그는 음악의 마약적 효과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감정과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면서도 심리분석학을 배척하였던 괴벨스 자신은 매우 뛰어난 광고심리학적 전문가였으며, 비밀스러운 유혹과 이름이 주는 마력의 방법, 그리고 어떻게 카리스마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등의 방법에 관통해 있었던 인물이다.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50쪽.

85) M. G. Kaufmann: Orgel und Nationalsozialismus, 23쪽.

86) M. G. Kaufmann: Orgel und Nationalsozialismus, 23쪽.

87) 제2차 전쟁이 시작되는 1939년 라베는 "독일음악의 운명에 음악가들 뿐 아니라, 모든 독일인이 관여한다. 이유는 바하와 베토벤, 부르크너의 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음악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쓴다. J. Wulf: Musik im Dritten Reich, 323쪽.

88) Thomas Mann: Gesammelte Werke, Bd. 13, Frankfurt a. M. 1974, 624쪽.

89)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민음사 1983, 231쪽.

90) 백문임, '정치의 심미화': 파시즘 미학의 논리.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서울) 2001년, 67쪽.

91) A. Dümling/P. Girth: Entartete Musik, 12쪽.

92) E. Buch: Beethovens Neunte, 12쪽.

93) 장성현. 파시즘과 니체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 만의 견해: 『파우스트 박사』를 중심으로, 38쪽.

94)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김철자 옮김, 학원사(서울)1985, 하권 263-268쪽 참고.

95) Martin Geck: Von Beethoven bis Mahler, 90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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