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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통신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파란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2000년 지나면서 인터넷으로 옮겨가면서 그래도 그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경영상 이유라고 하니 어쩔수 없으면서도 미련이 남는다. 파란 이전에 하이텔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할 때, 동호회 활동도 왕성했다. 많은 동호회들이 사라지거나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하이텔에서 부터 현재 파란에 까지 20년 동안 동호회를 함께 하던 이들이 지난 주말에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발기할 때 부터 함께 했던 농업과학동호회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는터라 많지않은 10명 조금 넘게 모였다. 그래도 경상남도, 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서울 각 지역에서 장마비를 맞으며 KTX를 타기도 하고, 먼길을 달려왔다. 멀리서 오는 이들을 생각하여 찻집에서 1차 모임을 하고, 식당에서 2차 저녁식사, 늦은밤 숙소에서 3차로 이어졌다. 그간 함께 했던 이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움이 가득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같은 시기에 활동하지 않은 이들은 얼굴을 처음 보는 경우도 있고, 20년 지기도 있다. 오는 걸음 빈손으로 오지 않고 6년근 인삼으로(뿌리 뿐만 아니라, 잎과 열매까지) 담은 인삼주, 친환경으로 기른 복숭아를 6년 동안 발효시킨 복숭아 효소도 함께 했다. 귀한 술이어서인지 다음날 상쾌한 기분이다.
예전에 잘 가던 인사동 다경향실에서 차모임을 하고, 근처의 지리산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눈다. 연령 층도 다양해서 청년에서 부터 80대 어른들 까지 다양하다. 처음 모임할 때에는 학생이어서 하이텔 요금 9,900원 내기도 힘들었다고 하는 이도 이제는 40 중년이 되고, 연세가 드신 어른들의 얼굴은 더 늙어 보이지 않고 그대로 인듯 보인다. 그간 많은 모임이 있었는데, 많은 회원들이 횡성가서 송어회를 실큰 먹을 수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송어회를 푸짐하게 내어주신 어른께 감사한 마음이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모임이었기에 20년 전, 초기부터 봄에는 '씨앗모임'이라고 하여 각자 보관하고 있는 씨앗을 나누는 모임을 이어왔다.
대학로에서 하이텔에서 주관해서 여러 동호회가 함께 한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피시통신에 연재한 글을 모야 책을 출판한 회원의 출판기념회에서 걸판지게 놀았던 기억도 있다. 초기에 공주에 가서 돼지 한마리를 잡아 배부르게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대기도 하였다. 그때 무슨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낮에 돼지 잡는 일만하고 고기는 먹지 못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아쉬움도 있었다. 가끔씩 번개라는 이름으로 잠실 종로 인사동 대학로 등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많다. 2000년 들어서면서 도시에 있는 사람이 농업모임에 가는데 어색한듯 해서 참석을 하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향수에 젖어 게시판을 들여다 보곤 하면서 소식을 들으면서 지내왔다.
잊을수 없는 일이 있다. 종로 ymca 뒷편에서 만나 밥과 술을 마시고, 귀한 술이라고 하면서 삼학소주(폐업한 사연이)를 한병씩 나누어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 혼자 있다가 빈 속에 그 술을 마시다가, 그만 쓰러졌다고 한다. 나중에 집에 들어온 어린 아들이 119를 불러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고 아내가 옆에 기다리고 있었다. 큰 일은 아니어서 병원에서 곧 나왔지만, 그후로 술이 땡기지 않았다. 그때 병원에서 술을 멀리하는 주사를 낳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사실여부를 모른다. 다들 순박한 사람들이다. 그러리라 보고 가입을 하고 함께 하였다. 요즘 인터넷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그때 피시통신의 동무들의 차이가 좀 있는듯 하다.
피시통신을 하며서 여러 동호회에나 게시판에서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인터넷에 와서도 카페를 만들어 느슨하게 모이는 경우가 있고, 같이 사업을 하기도 하고, 결혼을 한 여 커플도 있다. 인터넷을 하다보면 그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스치면서 간접적으로 각각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있다. 요즈음은 얼숲(facebook)에서 더 많이 알게된다. 지난 년말에 송년회에 오라고해서 가니, 하이텔에 있을 때는 청년들이었는데, 이제는 중년의 아저씨 부인들이 되어 커가는 아이들 이야기, 사업의 이야기가 주로 한다. 그때 이들은 한창 젊음 자체였기에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밤 새우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벌써 없졌지만, 자주가던 인사동의 한 식당은 출석을 표시하면서 100번 넘게 가기도 하였다.
피시통신사가 하이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크게는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이 있었다. 하이텔은 요금이 9,900원 정액제여서 부담이 없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나우누리도 정액제이지만 청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천리안은 이와는 달리 종량제여서 부담스러워 형편이 되는 직장인들이 많이 이용 했다. 하이텔은 채팅을 여러명이 하기도 하지만, 속도가 빨랐다. 천리안 채팅은 느려서 심심했다. 그 이외도 삼성의 유니텔, 선경의 넷스고, 엘지에서도 하는 서비스가 있다.(이름은 기억이 나자 않는다.) 또 진보를 표방하는 참세상, 기독교 통신, 개인이 하는 BBS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하이텔은 한경제신문에서 전산장비를 도입하면서 여유가 있어 KETEL이라는 이름으로 서비를 하다가, ko(r?)tel이란 이름을 잠깐 사용하였고, hitel, 그리고 paran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무료 운영을 하다가 하이텔(kortel)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유료화가 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하게된다. 20년 전 이때가 한국에서 첫번째 촛불집회였을 것이다. 286 컴퓨터로 어렵게 어렵게 1200모뎀에서 부터 시작해서 14,400 모뎀을 사용하면서는 희열을 느꼈고, addt1410, 1421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띠띠띠..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화면이 뜨는 화면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이틸에서는 컴퓨터 없이도 통신은 돕기 위해서 단말기도 나누어 주었다. 내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90년에 컴퓨터 학원을 하면서 피시통신에 열중하여 많은 소식을 듣으면서 지내왔다. 처음 가입할 때 비밀번호가 필요한줄 알고, 191*** 뭐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또 비밀번호가 필요하단다. 이렇게 잘 몰라 처음에 쓴 191어쩌고 하는 것이 아이디가 되어 버렸다. 숫자 아이디가 죄수번호 같다는 지적이 있어 그후 dolpari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여 오늘에 이른다.
얼마 전에 만들었던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이 있다. 그때 피시통신에서 죽은 조중필이 미군에게 억울하게 찔려 죽었고, 제대로 처벌하라는 글들로 시끄러웠다. JMS, 얼마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다는 신정모라, 초기에 하이텔에서 연재한 비서일기, 유명한 퇴마록, 천리안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무더기 구속, 불온 동호회 수사, 노조 CUG 억압... 등등 사건도 많다. 통신사들의 공개게시판에서 활발한 토론과 말들도 오고 갔다. 하이텔에 큰 마당인 plaza, 천리안의 나도 한마디 go word, 나우누리 게시판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글들을 쓰던 이들이 명망가로 활동하고, 정치도 하고 그런다. 그때와 같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이도 있으나, 반대편으로 가서 욕을 먹고 있기도 하다.
김영삼 대통령 때 청와대자유게시판을 열다가 망신당하고, 그들이 만들었던 자유게시파, 각종 학문 진보동호회의 활동을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어느정도 역활을 담당했다고 본다. 조중필 사건 같이 몇가지 사건은 뭍힐 뻔한 일들이 세상에서 다시 재평가 받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kbs, mbc가 장기간 파업을 했지만, 그때 했던 방송사들의 파업은 대단했다. mbc 손석희의 활약이 아주 컸다. 그때 아들을 낳고 민주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90년대 말에 게시판에 글 쓰기를 좋아하고, 사회에 대한 관심이 있던 이들이 통신자유모임을 만들었다. 통신 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말하고, 연대하여 그에 대한하며 사례들을 모아서 백서도 만들었다. 진보넷 대자보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2000년인가 총선연대가 만들어질 때 총선통신연대를 만들어 기자회견도 하고, 피시통신을 통해서 발걸음을 같이 하겠다고 했다. 그때 총선에서는 영향이 상당히 있었다고 본다. 그후 이어지는 총선연대는 힘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터넷이 성행하고 새로운 미디어로 인해, 한때 잘 나가는 피시통신들이 망하거나 사업 영역이 인터넷으로 옮겨 가면서 쇠퇴기를 걷는다. 인터넷으로 커뮤니티가 새롭게 변하면서 카페나 블로그 홈페이지로 분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터넷이 시작될 때 잘 나가던 야후가 오늘 이러고 있는 것 같이, 오늘의 네이버 다음도 앞으로 어찌될 지 모른다. 그 시대에는 그들의 역활이 있는듯.
추억이 스려있는 피시통신의 시대가 문을 닫는다니 어쩔수 없는 일. 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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