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향린.

향린을 지나 이제 또 다른 향린인 섬돌로 가게 된다. 향린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지나온 향린의 나날들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청년 때 부터 호기심이 많아 신문을 많아 봤다. 그때의 신문은 조선 동아일보였다. 그 신문들도 지금과는 다르게 볼 만했고 달리 다른 매체도 없었다. 기독교의 소식도 궁금해서 기독교 신문도 보았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크리스쳔신문을 여러해 본 듯하다. 그 후에도 호기심은 거치지않아 90년이 되면서부터 피시통신을 하게 되고, 지금으로 이어온다. 이런 과정들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이지게 되었으며, 지난 날의 이런저런 일들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70년대 후반 어느 때인가 기독교신문에서 향린교회라는데서 강연회인가?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향린교회를 찾아가  보았다. 지금보니 그때가 창립 25주년 행사의 일환일거라고 추정된다. 그후 결혼을 하기 전에 주일날  세명이 함께 있다 갑작스레 향린의 예배에 참석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80년대 어느 때부터  향린의 예배에 참석을 해 왔다. 그러나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여러해 동안 등록을 하지 않고 다니다가 87년 1월에 등록을 하였다. 어릴때 부터 기장은 신신학이고 이단이라고 듣고 자랐는데 말이다. 고향에서는 어릴때부터 세례준다고 할 때 피했는데, 그때 세례도 받았다.

 

등록을 하고도 교회에 손님 같이 혼자 다녔다. 교회 식당에 가서 밥도 먹지 않고 어떤 모임에도 참석을 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그럴수 있겠으나 그런 분위기 때문에 향린을 찾는 이들도 상당히 있다고 듣는다. 90년대 초반에 원주 연세대에서 열린 청년(조금 지났지만)수련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 이후로 홍근수 목사님께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석방운동을 펴고, 예닮교회가 갈라져 나가고 여러 일들이 생긴다. 90년대 중반 정도에 청년남신도회 회장(박훈)으로부터 악수를 받으며 서서히 교회 안으로 스며들게 된다. 청남에 참여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도 하라고 해서 했다. 집사 10년 근속 감사도 받았다. 이전부터 집사라는 이름을 떼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다가, 선각자가 있어 뒤따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안병무 선생님께서 설교중에 예배때 징을 울리면 어떻겠느냐?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면 통일헌법 같은 것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 하는 구체적인 물음이 있었다. 그후로 예배 중에 징울림이 시작되고, 30~40대 중심으로 교회 갱신선언과 통일헌법(안)도 준비하고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통일헌법은 많은 조명을 받으며 발표 되었고, 이제는 잊혀가고 있다. 교회갱선언을 발표하고, 다음으로 갱신실천 선언을 다시 발표하면서 교회의 민주적인 구조를 만들어 오고 있다. 예배 속에서 우리 정서인 민속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발굴하려고 했다. 그 하나로 예향을 창단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우리 정서인 민속적인 부분의 수용은 더 채워나가야 한다고 보여진다.

 

청남에서 함께하다가 순서에 따라(좀 뒤 늦게) 2000년에 회장을 맡았다. 90년대 후반부터 주민 한빛 향린이 세교회가 연대모임을 하다가 강남향린이 함께하고 교회청장년연대모임으로 가면서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를 이어받아 오늘의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피시통신으로 시작한 향린통신모임이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보통신선교위원회를 만들고 홈페이지도 개설하게 된다. 이를 활용하는 사람들 중에서 좀더 위쪽에 속한다고  위원장도 하라고 했다. 그로인해 그해는 세가지 일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조선 동아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된 사회에 대한 인식으로 사회적인 관심의 표현을 보고 사회부장을 맡으라고 해서 3년간 했다. 향린에서 사회에 대한 인식은 커다고 보이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함께 하는 것은 보기보다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청년의 심장을 가지고 교회를 찾은 이들도 나이를 먹어가게 되고, 새로운 동력이 없어 힘든 부분도 있었다. 그때 교회 정관을 만들고 새로 목회운영위원회가 생기면서 위원으로 참석을 하였다. 처음이라 정해진 틀이 없을때 이를 운영해 나가느라 위원장이었던 윤영수 집사가 애을 썼다. 두해 동안 쉬다가 또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한해더 사회부장을 했다. 최근에 드는 생각은 그때 한해 일을 더 맡은 것이 내 개인적인 계획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는것 같아 좀 후회스럽기도 하다.

 

08년 촛불 이후로 많은 이들이 향린을 찾았다. 그들이 이전에 내가 지나왔던 향린과는 달리 빠르게 스며들고 함께해 주어 지금은 그때의 분위기가 많아 달라 좋다. 이제 몇해가 지났으니 모든 이들이 주체로 나와서 지난 80년대 같이 생동력 넘치는 향린을 만들어 주리라 믿으며 그렇데 되어야겠다. 그러면서도 오랜동안 열심히 함게 했던 이들이 눈에 안 보이고, 열심일 듯한 이들이 얼마지 않아 얼굴을 볼 수 없게 됨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둘로 나누어지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많이 늘었다. 그러기에 모두가 뒤로 물러서 있지 말고 모두가 앞으로 나와서 손을 맞대어야 할 수 밖에 없겠다.

 

그간 FTA가 있었고, 촛불이 있었고, 2012년을 지나면서도 한국 사회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70~90대 까지 단순 명료했던 사회가 아주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이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찾고 가아갈 길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좌표를 찾지 못하고 지난날에 그대로 매몰되어 있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과 같은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 더욱더 사회는 참담하게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나도 있고, 우리 교회도 있다. 여기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몇 해전부터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혼란을 겪고 있고, 지금도 그 길을 찾아나가야 겠다고 마음을 잡아 본다.  새로운 교회에서 어떻게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 시간에 함께해야 할 동무들이다. 
 

강남 향린이 들꽃향린과 헤어질 때를 기억한다. 한신에서 가을연합예배를 드릴 그때, 들꽃으로 나누어질 25명이 정해졌다고 그들끼리 힘들어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다. 그때는 당사자가 아니어서 제대로 이해지 못했다. 어제 주일예배 후에 서로 손을 잡고, 앉으면서 인사를 하면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만 앞으로 잊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향린교회 앞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는 두 손으로 감쌀수 있을것 같았다. 이제는 두 팔을 에워싸야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굵은 거목이 되었다. 그 은행나무 참 불쌍하다. 높다란 건물 사이에서 뿌리 내릴 땅도 척박한데서 햇빛을 받을수 없어 햇빛을 받으려고 하늘 높이만 올라 키 큰 은행나무가 되었다.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봄 여름 가을까지 푸른 잎으로 있다가, 노란색으로 단장하여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갑자기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동안 열매도 맺지 못하다가 몇 년전 부터 얼마간의 열매도 맺는다. 그 열매도 떨어지지 못하고, 겨울에도 나무에 메달려 있다.
은행나무 뿌리 위에 쇠로 목이 메여져 있어 앞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생겼다. 봄이되면 그 쇠를 제거하든지 더 크게 해주면 좋겠다.

 

향린이 김제의 금평교회와 자매결연을 맺어 17년이 되어 오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김제가 완주로 바뀌고 금평교회도 들녘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나갔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김제까지 먼 곳으로 자매결연을 맺어 앞으로 어떻게 교류해 나갈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가까운데도 찾아보면 있을텐데. 그래도 처음부터 이제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그곳에 가서 농사일을 거들고 예배도 함께 드렸다.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이 농사일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매의 연을 맺었다고 하면 서로 오고가고 하면서 함께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들녘을 많이 들락거렸다. 몇번 빠지지 않았을 농활, 예배당 착공과 입당예배, 벽돌찍기, 햇발전소 완공 등 뻔질나게 다닌 기억과 그곳의 자매 교인들의 얼굴들이 아른 거린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요'

홍근수 목사님께서 오셔서 예배 마지막에 축도하기 전에 파송사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빠지지 않고 하셨다. 그 말에 울림이 커서 자유인으로 살라고 한 말씀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자유인으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자유'라는 말이 쉽지 않고, 그렇게 살기 쉽지 않아 계속 엉거주춤하면서 지나고 있다.
그렇게 자유인으로 살라가라고 당부하시던 목사님께서 지금 건강이 위중하시다. 향린을 스스로 떠나시고 조금씩 건강이 안 좋아지더니, 이제는 살 한점 없이 병원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 주의 길을 올곧게 가려고 열심인 종에게 이런 아픔을 주심은 무엇인가 한다.
 

향린을 처음 시작한 분 중에 안병무 선생이 계셨다. 안병무 선생님과 신학자들이 함께 한국에서 민중신학을 여시고 세계화까지 이루어 나갔다. 향린에서 그분의 민중신학을 공부하는게 좋겠다는 홍영진 장로의 제안으로 안병무읽기 모임을 했다. 주일 예배 전에 9시반에 모여서 한시간 반 정도 공부하는 모임을 하였는데, 10년에 넘어서고 있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그 분의 저서를 한권도 빼 놓지 않고 읽게되고, 그후에는 다른분의 책도 읽고 이제는 안병무와 나의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듣고 있다.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참석을 한 것은 아니지만, 10여 년 같이 했다. 이렇게 길게 지금까지 이어온 것은 피경원 선생의 끈기와 그의 신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폭이 넓음이 커다란 역활을 했다. 어느 누가 그랬다. '이 공부를 하면서 병주고 약주고 한다'과. 그렇겠다. 향린을 찾아오는 이들이 대체적으로 기존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 오다가 이곳에 와서, 또 안병무의 책을 읽으면서 회의를 가지다가 스스로 답을 찾게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향린에서도 분가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지 오래 되었다. 들꽃향린의 분가를 지켜 보면서 부터가 아닐까 한다. 분가라는 말이 40대 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나온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후 분가 연구니 실천이니 하면서 끈을 놓지 않고 계속 되었지만, 제대로 추진이 되지 못하고 말과 문건으로만 돌고 돌았다. 그러던 중 60주년 앞두고 지난해 부터 당회가 나서고 부목사가 나서면서 빠른 진행이 되었다. 마침 재정까지 뒷받침이 되어 순조롭게 진행 됨에 대해 감사 함이다. 초기에는 분가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다가, 진행이 잘 되지 않음에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후에도 자신있게 표현을 하지 않기는 했지만, 나누어지면 그래도 새롭고 작은 곳에 함께 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소극적인 이유는 개인적인 것에도 연유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생활이 지금과 같이 이어질지 다른 삶을 살게 될지 모르기에 쉽게 함께 하겠다고 나서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향린이 60년이 되고, 나도 이곳에서 40여 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으니 있으니 이제 새로움이 필요하기도 하겠다. 오래되면 정체되게 되고, 새로움을 받아 들이기 쉽지 않게 된다. 변화되고 있는 사회를 스스로 읽고 있는가? 에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해 오고 있는 중이고, 향린에서도 필요할 수 있겠다라고 보고 있다. 불교에서 1,000일 결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사업이고 1,000일 단위로 사업을 하다가, 그때가 지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 일을 중단할 수도 있고, 재정이나 인력도 다시 필요에 의해 시작된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아쉬움으로 남는 점도 많다. 다정하고 재미있는 사람이 못되어 제대로 마음을 나누지도 못하고 뜨거운 친교가 부족했다. 어쩌면 고집스럽고 표현의 부족으로 다른이에게 불편하게 하고, 언짢게 한 기억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돌아가는 발걸음에서, 또 다음날(얼마동안) 후회를 하고 미안해 하였지만 지나간 일이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 보지만 그렇게 쉬운일도 아닌듯 하다. 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형편상 교회에 별 보탬이 되지도 못하였고, 동료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지낸 점도 빚진 마음을 간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