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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Day Coming-Yo La Tengo

"Big Day Coming" Let's be undecided, let's take our time And sooner or later, we will know our mind We'll be on the outside, we won't care Cause we're together, that's somewhere And there's a big day coming, about a mile away There's a big day coming, I can hardly wait Let's wake up the neighbors, let's turn up our amps And we know we're used to without a plan We can play a Stones song, sitting on a fence And it'll sound pretty good, til I forget how it ends And there's a big day coming, about a mile away There's a big day coming, I can hardly wait I woke up early, couldn't go back to sleep Cause I had been thinking of where it all would lead So I made you wake up, I said, "Let's take a walk, I wanna hold your hand, we don't have to talk" And there's a big day coming, about a mile away There's a big day coming, I can hardly wait I can hardly wait, I can hardly wait 그 날이 오고 있어 결정하지말자, 우리 시간을 갖자 그리고 조만간 우리는 우리 마음을 알게 될거야 우리는 바깥에 있을거고 우리는 신경쓰지 않을꺼야 왜냐면 우리는 함께 있을꺼니까, 어떤 곳에 그 날이 오고 있어, 멀지 않은 곳에 그 날이 오고 있어, 내가 기다리기 힘든 친구 일어나자고, 우리 엠프를 키자고 그리고 우리는 계획 없는 것에 익숙해지는 걸 알고 있어 우리는 강한 노래를 부를 수 있어, 울타리에 앉아 그리고 그건 꽤 좋을거야, 그게 어떻게 끝나는줄 잊을 때 까지 그 날이 오고 있어, 멀지 않은 곳에 그 날이 오고 있어, 내가 기다리기 힘든 나는 일찍 일어났지, 다시 잠들 수 없었어 왜냐면 이 모든게 어디로 이끌지 생각하고 있었거던 그래서 난 널 깨웠어, 내가 말했지, "좀 걷자고, 난 네 손을 잡고 싶어, 우린 꼭 말할 필요는 없어" 그 날이 오고 있어, 멀지 않은 곳에 그 날이 오고 있어, 내가 기다리기 힘든 내가 기다리기 힘든, 내가 기다리기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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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한겨레 2006-05-19 16:57]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맑스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자본>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자본 읽기>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자본>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초고>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1844년 초고>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맑스를 위하여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 백의 펴냄(1997) 아미엥에서의 주장 알튀세르 지음, 김동수 옮김, 솔 펴냄(1998) (알튀세르의 사상 전반에 접근하기에 좋은 책. 쉽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돌베개 펴냄(1994) (부인을 죽인 뒤 금치산자로서 유폐된 상태에서 씌어진 알튀세르의 자서전) ◇ Mjspinaza(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리뷰)=“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 익명=“프랑스 공산당에 속해 있었던 알튀세르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사태에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맑스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 전체를 비판의 도마 위해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논장=“이 책에 내포된 세적, 정치적 담화들은 시대의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 시기 새롭게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갖는 탁월한 인식론적 가치 때문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국사신론>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책속으로]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켜 “당에 들어왔던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정치적 행동주의나 적어도 순수한 행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지게 된 상상적 채무를 변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또한 우리 사회 역사의 한 특징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동류들 속에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자를 갖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대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들은 …언젠가는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 내지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킬 수밖에 없었다.”(<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22~23쪽)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신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층위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은 그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층위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규정적인 동시에 규정받고 있고, 자신이 추동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수준들과 다양한 층위들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순은 원리상 중층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116~17쪽) “인간사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호흡하는데 필수적인, 역사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나 공기인 것처럼 분비한다.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관만이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들을 상상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의해 대체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덕이건 예술이건 ‘세계의 표상’이건 간에 역사유물론에서는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278쪽)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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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마이인생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난 쌈마이, 삼류 인생으로 살고 있는 거라고 "당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게 하라." 누가 했던 말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키치, 다다이스트, 아나키스트가 되고 싶은 맘은 그렇게 ...스트가 되고 싶은 맘은 삼류로 사는 삶에 대한 도피 혹은 마스터베이션은 아닌지. 그런 혐의가 드러나는 것은 내겐 '진정성'이 요구하는 '치열함'이 없기 때문이다. 위선이요 비굴한 것 "만일 모든 것이 은혜라면 내가 무엇을 하든 나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 그렇지 않고 내게 은혜가 없다면 멸망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태만의 베개도 아니요, 지혜를 추구하지 않으려는 핑계도 아니다. 자크 엘룰의 존재의 이유 109쪽에 나오는 글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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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동안 게임에 미쳐 산 내 인생

17살때부터 포트리스->프리스타일>리니지>로한 까지 게임만하고 살았던 내인생... 게임할때는 밥먹을시간조차없을정도로 너무재밌고 중독성이심해서 3일까지 안잔적도있었다 물론 게임만하고산건 아니다. 여자도많이만났고 지금 지방전문대 휴학중이다 ( 올 F받았음^^) 그래도 나는 게임중독에빠져 친구들 전화를 안받게되고 여자친구와도 게임때문에 많이헤어졌다 여자친구와헤어져 많이힘들었지만 게임이 그녀를 잊게해줬다. 그러나 게임할?? 아무생각안나지만 게임안할때는 그녀가 너무생각난다. 헤어진지 2년이나됐는데도 지금은그녀밖에생각이안난다 (2년이면 아주옛날사람인데^^) 맨날게임만하고 살았기에 나는추억이별로없다. 게임할때는 재밌어서 잠자는시간 조차아까운데 결론은 남는건없다 초등학교??부터 전교꼴등만하고 책한권 읽어본적없는 나.....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든다 이렇게 게임폐인인생만 살았던나한테 아빠가 계속게임만해두 좋으니 소설책 (검은나비) 딱 이책만 읽어보라고해서 너무간절한 부탁이기에 다읽었는데 너무감동적이고 세상에 이런일도있구나.... 이런세상도있었구나....어떻게 말로표현할수가없다....책도 게임처럼 중독되는걸 알게됐다 24년동안 게임에미쳐서 살았던 내인생 책한권이 나를바꿔놓았다 시간나면 검은나비 <- 읽어보세요 당신의인생이 달라집니다. 네이버 뉴스 '이승엽 연봉 계약' 기사에 뜬금없이 올라온 댓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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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싶다

지난 시절을 그리워 하는 심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 일까? 사람은 언제 지난 시절의 소회에 빠지는 건가? 그것이 퇴행을 의미하는 것인가? 기억 속에서 굵직하게 부각되는 몇 몇 순간의 잔상과 그것을 지금 다시 떠올리는 순간의 나는 어떤 모습 이던가? 그 많은 기억 속을 관통하는 한가지 사실은 그 때 난 내 모든 것을 통해 그 시간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느낌이라는 것은 몰입이 말하는 외부 세계와의 의식적인 단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단거리 달리기에 비유될 수 있을 만한 것이겠다. 또한 그것은 길에 쓰러져 잠을 자며 꿈을 꾸고 있었던 것도 아니였다.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할 만한 외부의 영향 때문에 의식을 놓치고 말았던 상황은 아니였다는 말이다. 난 그 때 천천히 걷고 있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또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해야 할일을 의식할 수 있었다. 주어진 일들은 내 자신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들이었으며 그래서 난 여유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즐겁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었다. 뛰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그들은 줄 곧 뛰고 있는거다. 꿈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걷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목소리를 느끼며 몸짓을 보며 함께 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뛰지 않고, 잠자지 않고 천천히 걷는 것은 무엇을 바라는가에 달려 있다. 영웅이 될 수 없어 소시민되겠다며 나를 합리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욕망대로 살지 않겠다는 나를 위한 용기이다.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반성하며 자신을 세워가며 존재를 드러내고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나와 연결된 그 많은 관계의 끈들에 대해 생각해야겠다. 무엇을 묶고 끊고 이어가야 할지를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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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hes of the afternoon, Maya Deren,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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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m Chomsky - Newsh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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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일상적인 미술 수업 - <판타스틱 소녀 백서> 중에서

이 영화의 미덕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뒤틀리고 꼬여있어 그것들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에 있다. 마치 거리두기 효과처럼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감으로 인해 사는 것을 다시금 관조하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어께에 힘이 잔득 실린 뻑쩍지근한 예술영화들의 지엄함은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친절하고 똑똑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우스게 소리 곁들이며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조근조근 맥을 잃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 가는 이야기 전개와 인물들의 상황과 설정, 배우들의 연기 이런 것들이 이 영화를 아주 특별한 영화로 만들고 있다. (예술에 대한 기득권. 자신의 삶을 가꾸려는 의식,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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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mones-I just wanna have something to do

펑크의 미학 헛됨에 대한 교훈은 일종의 비관주의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이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이다. 그것을 믿지 말 것, 그것에대 사랑, 진리, 인격을 결부시키지 말 것, 이 모든 것에 매달리지 말 것! 존재의 이유, 자끄 엘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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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gwai / Glasgow Megasnake

오랫동안 멜번에서 지냈었다. 한국에 온지는 한달하고 보름이 훌쩍 지났다. 지금 멜번에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후회가 되는 가장 큰 한 가지는 Sonic Youth니 Super Furry Animals니 하는 그 많은 밴드들의 멜번공연을 개념없이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클럽 입구에서 혼자 서서 뻘쭘하게 공연을 기다리는 것도 늘 상 빠뜻했던 생활비도 또 짬낼 시간도 없었던 그 때였지만...... 지난 멜번에서의 마지막 겨울, 그래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모과이를 볼 수 있겠냐며 혼자 갔었던 그 공연에서 이들이 들려 주었던 음악과 또 그 분위기는 이 클립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묵직하면서도 매서웠다. 그 공연에서 오프닝으로 연주되었던 Punk Rock에 이었던 두번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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