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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30
    작은 것에 대한 12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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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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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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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 대한 12가지 생각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것을 쫓아 다니지만 큰 것은 발전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이미 다 되었거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중에 길을 잃기 쉽습니다. 반면에 작은 것들은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발전가능성이 큽니다.

[작은 것에 말걸기]  작은 것에 대한 12가지 생각

- 작은것이 아름답다 6월호

- 글. 황대권

 

작은 것은 경제적입니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성과를 얻었을 때 경제적이라고 말합니다. 공룡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대규모 투자로 최대한 이익을 내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지만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사실 그것은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외부로 떠넘기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일반 납세자의 부담으로 돌아가거나 자연 파괴로 이어집니다. 작은 것을 잘 운영할 때에라야 의미 있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이 경제적이라는 것은 모든 다른 분야에서도 발견됩니다. 예컨대 들판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작은 야생화의 아름다움은 많은 돈을 주고 산 화려한 장미꽃 다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친 환경에서 피어낸 여리지만 완벽한 꽃송이를 보면 아름다움을 넘어 자연에 대한 경외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작은 것은 민주적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자기 권리를 동등하게 행사할 때 민주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국가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형식에 그칠 뿐 자본과 권력을 쥔 소수가 마음대로 국가를 주무릅니다. 조직이 커지면 관료주의와 소수에 의한 배타적 지배를 거의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정치학에서는 ‘소수 지배의 철칙’이라 합니다. 이 것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을 되도록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그 종류가 무수히 많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전체 주민에 의한 직접민주주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작은 마을 단위에서나 가능합니다.

작은 것은 공동체적입니다
공동체는 모든 생명의 기본 단위입니다. 인간은 지난 수만 년동안 마을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백 년 동안 산업문명은 공동체를 철저히 해체하고 사람들을 뿌리 없는 유랑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가 서로 기대어 사는 공동체적 존재인데 현대인은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대신 다른 생명 공동체를 공격하여 그 생명력을 취하는 약탈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식민지 건설, 약소국 침략, 기업합병, 재벌의 문어발식 기업확장 따위가 그 사례입니다. 지구별에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려면 공동체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때때로 국가공동체니 무슨 기업공동체니 하는 말을 쓰는데 이는 공동체의 의미를 왜곡하는 언어 남용입니다. 공동체는 작습니다. 작아야지만 공동체 의미가 살아납니다. 한 인류학자 연구에 의하면 최적의 소그룹 공동체는 8~14명이, 마을공동체는 50~500명이 적당하다고 합니다. 직접민주주의는 인구 1000명이 넘어가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우며 500명 정도 규모에서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작은 것은 생태적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가 전 지구에서 벌어지면서입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지구별이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방식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작은 것은 설사 그 자신이 오염물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구 생태계가 충분히 정화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도 생태계는 다양한 작은 집단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을수록 건강합니다. 현대 농업의 특징인 대규모 단일 경작은 환경오염과 생물종 다양성 감소의 주된 원인입니다. 인공위성을 통해 보면 지금 지구별은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존의 모래사막이 계속 넓어지는 ‘황색사막화’는 물론이고, 단일경작에 의한 ‘녹색사막화’와 도시 확대에 의한 ‘회색사막화’도 심각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 아름다운 초록별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려면 ‘다양한 소규모생산-적정소비-폐기물 재활용’의 방식으로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 합니다.

작은 것은 영성적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영적 차원이 있습니다. ‘존재’는 물질과 영의 통일체입니다. 사람만이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에는 개의 영이, 나무에는 나무의 영이, 산에는 산의 영이 있습니다. 심지어 돌멩이에도 영이 있습니다. 자연물의 영은 그 크기에 따라 영성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산의 영은 조그만 돌멩이의 영보다 더 크고 위대합니다. 그리고 종족에 따라 크기에 상관없이 특정 동식물의 영이 더 위대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조직이나 구조물은 그 크기가 클수록 영성이 빈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간의 삿된 욕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왕조시대의 거대한 석조물이나 현대의 대형 교회에 들어서면 위압감을 먼저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보다는 시골의 작은 성당이나 산중의 이름 없는 암자에서 깊은 영혼의 울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규모 집회에서 보다 작은 집단에서 더 쉽게 영적 공명이 일어납니다. 수만 명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붉은 악마의 응원함성은 일종의 집단적인 광기 혹은 카타르시스이지 거기에서 개인적으로 어떤 영적 고양 상태를 경험했다는 고백은 아직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작은 것은 민중적입니다
민중은 원래 작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그들은 숫자만 많을 뿐이지 그 숫자를 이용하여 크고 멋있는 것을 추구하는 간특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크고 좋고 멋진 것은 늘 소수의 힘 있는 자들의 몫이었습니다. 민초들은 그저 제 앞에 있는 ‘작고 못 생긴 것들’을 애지중지하며 스스로 만족할 뿐입니다. 인사동 길거리 난전에서 흔히 마주치는 어느 민초가 만들었음직한 작은 목각 인형이나 일그러진 막사발 같은 것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럽고 정이 갈 수가 없습니다. 민중은 애당초 크고 번듯한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교한 기계나 도구도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저 제 생긴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깎고 주물러서 만들어냅니다. 이 자연스러움 속에 탁월한 민중적 예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작은 것은 유연합니다
작은 것은 누구나 쉽게 계획하고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하다가 잘못 되더라도 금방 고칠 수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견고함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능히 변할 수 있는 유연함에 있습니다. 국토의 왼쪽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박아버린 새만금 사태는 큰 것이 한 번 잘못되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를 몸살이 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일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한데도 지금까지 들인 돈과 노력이 아깝다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간 큰 지도자들이 벌이는 일은 늘 그렇습니다. 오, 하느님! 작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안 되나요? 작은 것의 유연함을 아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안 되나요? ‘중단 없는 전진’을 외친 박 뭐시기 대통령, ‘하면 된다!’며 마구 밀어붙인 전 뭐시기, 보통사람의 위대한 업적을 위해 새만금 사업을 시작한 노 뭐시기… 아, 아, 알았습니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시려는 당신의 그 깊은 배려를.

작은 것은 친근합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우연히 공연포스터에서 평소 보고 싶었던 공연소식을 알게 되면 가슴이 뛸 것입니다. 그러나 공연장소가 ‘예술의 전당’인 것을 확인하면 설레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습니다. 가고 올 일이 아득해서입니다. 어째서 같은 도시 안에 있는 시설물이 이렇게 멀게만 느껴질까요? 너무 커서입니다. 너무 커서 도무지 정이 붙질 않습니다. 돌아다녀 보니 전국 주요 도시에 있는 문화예술회관들 사정이 비슷했습니다. 마치 도시들 간에 누가 크게 짓나 경쟁이라도 한 것 같고, 시민들은 아랑곳 않고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지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크고 화려한 것보다 작고 소담스런 것에 더 마음이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근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것을 두고 ‘인간척도’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몸의 크기와 비슷한 것에서 친근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 몸의 크기와 길이를 기준으로 척도를 만들었던 그 옛날이 그리워집니다.

작은 것은 자립적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가 빚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나라뿐 아니라 회사도 규모가 클수록 빚이 많습니다. 세상은 참 이상합니다. 그냥 제가 지니고 있는 것을 가지고 서로 돕고 살면 세상이 훨씬 부드러워질 텐데 빚을 얻어 몸집을 잔뜩 부풀려서는 저보다 작은이들을 괴롭히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해댑니다. 이런 일을 잘해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누구나 입만 열면 자립을 외치지만 이미 빚을 진 상태에서 자립을 달성하려면 자기 주변을 엄청나게 괴롭혀야 합니다. 작은 것은 빚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규모가 작다 보니 자립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경제학에는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야 자립이 가능하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립은 시장을 넘어선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 세상에서는 전표에 기록되지 않는 ‘비공식 부분’이 자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예컨대 가사노동, 품앗이, 공동 울력, 물물교환, 신용교환, 기증, 자원봉사, 호의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선의의 경제는 규모가 작기 때문에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단순합니다
불은 물로 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잡한 것은 단순하게 풀어야 합니다. 미리 겁을 먹고 복잡한 방법을 쓰면 더욱 얽힐 뿐입니다. 마치 실타래를 풀듯 전체를 관조하고 하나하나 단순하게 풀어가야 합니다. 모든 복잡함은 단순함에서 옵니다. 그러나 복잡함에 머물지 않고 늘 단순함의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생명력은 아주 단순한 구조 속에서 나옵니다. 복잡함은 생명력을 분산 고갈시킵니다. 우리의 영적 능력도 삶이 단순할수록 더욱 커집니다. 단순하게 사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작은 것은 소박합니다
작은 것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작은 것은 소박합니다. 소박한 밥상이란 말이 있습니다. 별로 가공하지 않은 투박한 음식으로 간소하게 차린 밥상을 뜻합니다. 흔히들 잔뜩 차려서 많이 먹어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오히려 체력이 떨어지고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소박하게 차린 밥상을 천천히 정성스럽게 먹으면 생명력이 배가됩니다. 과식은 양으로 먹지만 소식은 질=생명을 먹기 때문입니다. 소박한 인간관계도 그러합니다. 작은 두 마음이 만나서 생명력이 두 배로 됩니다.

작은 것은 발전가능성이 큽니다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것을 쫓아 다니지만 큰 것은 발전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이미 다 되었거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중에 길을 잃기 쉽습니다. 반면에 작은 것들은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발전가능성이 큽니다. 토종 씨앗 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토종 씨앗은 수확량도 신통치 않고 맛과 크기도 별로라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토종 씨앗은 신품종을 개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원천자원입니다. 가게에서 파는 개량종자는 이미 개발이 완료되어 더 이상의 육종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토종 씨앗은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은 원색인 삼원색을 가지고 무궁무진한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이미 만들어진 혼합색으로는 별다른 색깔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황대권 님은 영광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태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생명평화회의 모임에 함께하며 평화로운 삶과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하신다. ≪백척간두에 서서≫, ≪야생초 편지≫를 쓰신 님은 올해부터 <작아>편집위원으로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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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내년에는? 10년 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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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기록



부끄럽기보단 슬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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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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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심장

예전보다는 확실히 감흥의 진동폭이 작아졌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미묘한 심장 고동의 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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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의 평등

능력이나 체력의 차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리히텐베르그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곧 능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권리의 평등이 더욱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지혜와 힘이 불평등한데 거기다 권리마저 불평등하다면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받는 폭압은 더욱 커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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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도대체 어디로?

아니면 벌써 어디로?

가는 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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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는 공산주의자다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

by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TV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엄(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연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 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목수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연애자이다. 반면 목수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연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덜렁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연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written by J. Marc Schmidt (translated by Lee Duckjean)



스머프는 공산주의자였다!
by Dave Morgan

미친 소리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그것은 나를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당신이 공산주의자에 대해 품고 있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80년대에 주입된 거대하고 위험한 러시아에 관계된 편견을 잊고, 공산주의(共産主義)를 삶의 한 양식, 사회 질서, 경제관으로 생각해라. 당신의 머리 속에서 잠시동안 소련 국기에 새겨진 낫과 망치의 이미지를 치워 버린다면,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스머프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 스머프 마을에서 생산되는 식량들은 버섯 집에 비축되어 한 해 동안 모든 스머프들에게 평등하게 분배된다. "농부 스머프"는 결코 자신의 농산물을 다른 스머프에게 팔지 않는다. 스머프 마을에서 농산물은 한 스머프의 재산이나 판매물이 아닌 전 스머프들을 위한 식량인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스머프들이 맡고 있는 직업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목수 스머프와 화가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등등의 구분이 그것이다. 각각의 스머프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맡은 일이 있으며 다른 스머프의 일을 침범하려고 하지 않는다. 스머프 시리즈 중에는 스머프들이 서로의 일을 바꿔서 하다 결국 실패한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에 전념하라," 또는 다른 관점으로 보면 사회가 정해준 일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목수 스머프는 항상 목공을 하고, 화가 스머프는 항상 그림을 그린다. 모든 스머프들은 자신의 일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서 다소 과장을 하자면, 파파 스머프는 빨간 모자를 쓰고 다른 모든 스머프들은 -통일성을 강조하며- 똑같은 색의 옷과 모자를 입고 그들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당신도 아이처럼 그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머프가 공산주의자라는 가장 두드러진 논쟁은 교활한 가가멜의 존재로부터 시작된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가가멜이 원하는 것은 오직 스머프를 잡아서 그들을 물에 끓여 황금을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 가가멜의 주요 계획은
스머프를 잡아 끓는 물에 삶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머프 시리즈가 시작한지 몇 년 후 그는 불쌍한 스머프를 잡아먹고 싶다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는 스머프로 황금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스머프의 존재라든가 문화, 복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부유해지는 것과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 것을 원할 뿐이다. 가가멜은 자본가인 것이다. 스머프의 사악한 적대자는 궁극적으로 평화롭고 선한 작은 공산주의자인 스머프들의 사회를 위협하는 자본가인 것이다. 모든 것이 척척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전에 누구도 이러한 사실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특히 80년대의 냉전기에는- 이런 사실에 다소 놀랐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것에 대해 생각 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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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역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젼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제프 딕슨 - 우리 시대의 역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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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노신 -

얼마전 수련회 뒷풀이 술자리에서 들었던 한 선배운동가(**노조 위원장)이 제일 좋아하는 글귀라며 읖었던 대목. 간만에 덕담과 좋은 노래(하도 오랫만에 불러서 가사도 까먹는 챙피함도 가졌지만...)가 어울리는 술판. 진정한 음주가무를 실천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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