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끝을 보았다. 어색함 없이 자유자재로 시점을 옮겨가면서도 기억의 퍼즐을 맞춰나가듯 자연스레 서술해가는, 뭔가 자기 목소리를 말할 듯 말 듯 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마르케스의 능력에 감탄을 하며 읽었다.

산 띠아고 나사르가 죽임을 당한 그 하룻밤의 사건을 두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이야기.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범행 자체가 아니라 '집단적 책임'이라는 문학 테마"였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일 것이라고 그렇게 두 형제가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만 그 마을 사람들은 살인을 방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간접적인 공범이 된다. 다들 각자의 판단과 핑계들이 있었지만 결국 돌아온 결과는 산띠아고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책을 놓고 나니 산띠아고 나사르를 살해하겠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졌는데도 살인이 제지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왜 이 질문에 자꾸 맘이 쓰이나 했더니, 결국 지금 사람들이 타인의 희생, 죽음을 묵과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편한 진실이 상기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용산에서 다섯 명의 목숨이 희생됐고, 검찰과 법원의 논리대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죄로 5, 6년씩 징역형이 떨어졌다. 문제의 원인이었던 뉴타운개발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이라는게 원래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종족이었던가 싶은 생각에 매우 서글퍼진다.

 

어제는 아프간에서 영국 군인이 다섯 명이 총격으로 한번에 숨졌다고 한다.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점령지인데도 한국정부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기어이 다시금 아프간으로 파병을 한다. 마치 산띠아고 나사르의 예고된 죽음을 알고서도 다들 방조를 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의 상황도 꼭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 예전엔 인도적 지원의 일환이라느니 비무장 군인이라느니 등의 언사가 동반되어 있었지만 이번엔 심지어 국방부 장관의 입에서 “불가피한 교전이 발생할 수”있다는 말이 나온다. 교전이 있다는 건 그게 한국 군인이건 탈레반이건 현지 민간인이건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도 파병을 한단다. 집단적으로 이성이 마비된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죽을 걸 알고도 보낼 수가 있을까. 누군가는 명백히 죽음의 위협에 놓일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예고된 죽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것이 아닌 이상 애써 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다.

 

살인은 발생했지만 책임지는 가해자는 없는. 모두의 책임은 아무의 책임이 아닌 것이 된다.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것 처럼 보이는) 윤리. 정말 없는 게 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