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0/01/01

아침 해는 보지 못했다. 일어나보니 열두시가 넘어 있었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잤다. 지금도 속이 메슥거린다.

 

다들 나이 서른을 기점으로 얘기들을 하는데 난 생각해보니 올해가 벌써 나이 서른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란 자각이 번쩍 들었다. 어느 구치소로 갈까 하는 찌질한 고민들은 좀 그만하고 출소해서 내 서른을 힘차게 맞이할 수 있게 생산적인 고민들을 하며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지긋지긋한 대학 공부를 마치기 위해 그 추운 날 힘들게 학교를 찾아갔는데 행정실 직원과 주민등록번호를 두고 또 실랑이가 벌어졌다. 재입학 신청서를 쓰는 양식에 왜 굳이 주민등록번호 기재란이 있는지 모르겠다. 학번만으로 본인식별이 되지 않느냐고 나는 말했고, 돌아온 대답은 그렇다면 이 신청 서류를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행정실 직원에 마침 거기를 지나던 학과 조교까지 달라 붙어서 한 십분간 주민등록번호를 두고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내 주장을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얘기 할 때마다 내 안에서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맥박 소리와 달아오르는 그 어떤 뜨거운 느낌이 있다.

 

"이런 거로 따질거면 본부 학사과로 가서 따지세요"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본인 식별을 하죠"

"학생이 주민등록번호를 안 쓰면 나중에 상부에서 뭐라고 해서 저희가 피곤해진다구요"

"본인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저희 입장도 좀 이해를 해주셔야죠"

 

개인정보를 수집하려면 그에 합당한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행정직원들은 직접적인 답변을 하는 게 아니라 자꾸 다른 답변들을 했다.  나는 이런 일로 성 내고 싶지도 않고 내 안의 평온함이 흔들리는 것도 싫은데 행정직원들은 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먼저 흥분한 사람이 지는 건데, 이 직원들이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그럼 저희는 이 서류 지금 받을 수 없고 어디 딴데 가서 알아보고 오세요"라고 할 때마다 너무 난감했다. 맘 같아선 딴데 가서 알아보라는 그 말부터 더 따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이 사람들이 서류를 안 받아줄 것 같아서 계속 눈치를 봐가면서 얘기를 해야했다.

 

공무원 개인들과 싸우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론 동시에 또 그 공무원 개인들의 책임을 물어야만 하는 일종의 딜레마란 생각이 들었다. 서경식 선생님이 어느 글에서 원호를 쓰는 문제로 일본 대학 행정 직원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언급한 것처럼, 공무원들은 어느 순간 "시스템이 원래 이래서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거나 "저도 상부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라 제 소관이 아닌 일입니다"라는 식의 말을 한다. 이런 공무원들을 볼 때마다 난 늘 나치에 부역했던 공무원들이 자기들은 명령에만 충실히 따랐을 뿐 개인적인 책임은 없다고 변명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그들한테 공격적이었던 것인가 하는 후회도 없진 않다. 좀 더 능글맞게 얘기했어야 하려나. 비폭력대화 배운 걸 응용해서 그들을 인간적을 좀 공감해주면서 대화를 할 걸 나도 좀 흥분을 많이 하긴 했구나 이런 식의 후회들. 공무원들과 싸우고 나면 엄마가 나에게 늘 하는 말이 떠오른다. 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뭐 그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냐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상식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특이하다'는 낙인을 정말 너무 쉽게 붙이는 것 같다.

 

재입학 서류를 받아줄 수 있네 마네 논쟁을 하는 동안 직원 한 명이 전산에 내 학번을 입력한 듯 했고 모니터론 내 정보가 쭈욱 떴나보다. 그 순간 그 직원이 그냥 알았다고, 주민번호 안 써도 되니깐 그냥 내고 가라고 얘기를 했다. 내 학번을 쳐서 내 주민번호를 확인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엄청난 수치심이 올라왔다. 내가 돌아간 후에 그들은 모니터에 뜬 내 정보들-주민번호부터 사진, 주소, 가족정보, 학점 등등-을 보면서 뒷담화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들. 이럴 때마다 지금과 다른 과거의 내가 저질렀던, 국가와 제도에 너무나 순응적이고 협조적이던 내가 했던 일들이 너무 후회스럽고 또 내가 싫어진다. 열 손가락 지문날인을 하던 날부터 내 인생은 이미 국가란 매트릭스 안에 완전히 포섭됐구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국가와 행정제도에 이미 넘겨져버린 내 정보들을 없앨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다 지워버리고만 싶다.

 

뉴스에선 신년이라면서 올해는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해맞이 장소에서는 사람들이 플래시몹을 하면서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50%에 육박한다고 한다. 자꾸만 <매트릭스>의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우리는 정말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서 자신이 '자율적인 주체'라고 착각을 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우울한 생각이 찾아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