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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수요일~

어제도 잠을 계속 설쳤다. 저녁 8시쯤 책을 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때 깨고 나니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본방 가면 훨씬 깨끗하다고 하는데, 이 곳 직입소 신입방의 화장실에선 별로 씻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잡수통에 물을 받아 바케스로 떠서 쪼그려 앉은 다음 씻어야 각이 나올 것 같은데, 이제 36시간 째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방을 옮기기 전까지나 아니면 오늘 있다는 온수 목욕까진 좀 버텨볼 생각이다. 오늘 햄이 오기로 했는데 좀 멋있는, 멋있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말끔하게 나가고 싶지만, 머리도 여태 한번 안 감았다. 구속되는 날 발랐던 썬크림이 지금쯤은 제대로 지워졌을지 어쩔지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이 방엔 거울이 없어서 내 모습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으니 차라리 더 편하기도 하다. 6시 30분이 되면 교정국에서 만든 듯한 노래가 나오면서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낸다. 밤새 서리다가 일어났는데 천정에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고,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고, 비몽사몽이다. 그래도 또 하루가 지나갔단 생각이 오늘 하루를 견딜 힘을 준다. 이제 겨우 3일차인데 시간이 이렇게 느리다니, 역시 징역은 징역이지 싶다. 방을 옮기고, 출역을 시작하면 좀 더 시간이 금방 가겠지. 여유있게 일주일 정도는 밤에 계속 잠을 설치더라도 적응기간이겠거니 생각해야겠다. 천정이 높은 건 다행이다. 영국 집들이 좋았던 이유는 천정이 높아서 였는데, 여기서 이렇게 경험을 한다. 바깥의 아파트는 창마다 불투명한 창이 한 겹 더 우리 쪽으로 덧대어져 있어서 저기 과연 사람이 사는건가, 우리의 고립감을 달래주기 위해 합성된 배경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밤이 되어 보니 하나 둘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것을 보니 그제야 아 저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싶었다. 이제 갓 아침 7시 30분을 지난 시각, 감정이 너무 과잉된 것 같기도 하지만. 분명 세월이 지나 이 일기를 보며 웃음지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밖에서라면 이 시간에 깨어 일기를 쓰고 있는 건 상상도 못했을테니, 이 휴식의 시간을 잘 즐겨야겠다.

p.s.1. 라디오가 꺼지니 사동 안이 급 조용해진다. 좀 시끌할 때 우르르꽝을 할 걸.ㅋㅋ

p.s.2. 어젯밤 잠을 설치긴 했지만, 한 꿈에서는 내가 어느 교실에서 누군가를 공감하고 있었다. 마치 비폭력대화 강의에서처럼 말이다. 처음엔 여자 분이었고, 두 번째는 남자 분이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공감하는 말하기가 입에 붙어있었다. 외국어를 배우는 단계에서 어느 정도 단계가 오르면 꿈에서도 영어로 말하게 된다던데. 긍정적인 신호라고 믿고 싶다.

p.s.3. 철커덩, 쾅 하며 닫히는 철문에 벽지를 붙여놓으니 그나마 온기가 도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벽지 바른 벽보다 예쁜 색깔의 페인트 벽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발견이다.

 

오후 12:45 - 햄 접견

온수 목욕을 기다리는 시간. 아까 12시 좀 전에 햄이 다녀가다. 접견표에 적힌 햄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마침 같이 방을 쓰는 분도 접견신청이 와서 같이 접견실로 갔다. 접견실에 가면 좋은 이유는 접견실 너머로 환하게 비추는 햇살과 조금이나마 바깥 풍경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내가 접견을 가면 접견실 복도 창문에 불투명한 벽지가 대어져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불투명한 벽지 뒤로 펼쳐져 있을 조그만 정원과 벤치, 민원실 그리고 그 너머의 세상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

 

오후 1:40

1시에 목욕을 다녀왔다. 20분 정도의 온수샤워다. 이틀 참았다가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하루 한번씩 온수 샤워만 할 수 있어도 징역이 좀 더 살만할 텐데 싶어진다.

다녀와서는 팬티와 수건만 빨래를 했다. 윗도리 내의도 하고 싶었는데 빨아도 널만한 공간이 없다. 밖에서는 기본 이중 세안을 했는데 여기선 거품 안나는 "오이 비누"로 얼굴을 씻어도 이젠 감개무량이다. 아까 온수로 얼굴에 계속 마찰을 했더니 지금은 얼굴이 많이 땡긴다. 스킨 로션이 아쉬워진다. 샤워를 할 때는 공동으로 하고 하는 동안에는 바깥에서 직원이 유리창으로 지켜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인권 감수성으로 이곳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있는게 없다. 하지만 내 '보호'를 선택했기에 일주일 한번 온수 목욕만으로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이곳의 질서를 일단은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내 마음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ㅁㅅ의 말처럼 "스트레스 받아봐야 나만 암 걸릴테니."

아, 그래도 이렇게 고요한 시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이 곳이 감옥이라는 사실 - 두 팔을 쭉 못 뻗는 공간. 좁은 곳에서 내 마음도 덩달아 좁아지진 않기를. "수용자 준수사항" 35개 문장의 모든 종결 어미가 "아니된다"이다.

 

밤 10시 반.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어제 그제 계속 잠을 설쳤는데도, 오늘 밤 역시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선언하고 수감되기 전까지 너무 잠을 많이 자놔서 그런가보다. 이불을 펴고 누워서 눈을 감았는데 오늘 접견왔던 햄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작 12시간도 채 안 흘렀는데, 마치 며칠 전 일 같다. 사실 여기에 들어온 이후로 난 시간(+날짜)감각을 상실해버린 듯 하다. 나만의 적응방식일 수도 있다. 뭔가 더 몰입하여 시간을 죽일만한 대상이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햄 얼굴이 떠올라 나도 또 눈물이 난다.

<씨네21>을 보다가 <고백> 영화를 보니 또 햄 생각이 난다. 아까 시간 관념이 없어졌다고 말한 건 아마 바깥과의 기억을 모두 차단한 채 여기에 집중하려는 내 몸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지난 주 수요일, 햄과 <고백>을 보려다가 못 본 기억이 나서 또 아쉬움이 든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다가 올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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