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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istice Day

초등학교 6학년때였던 것 같다.  현충일. 공휴일이라 자전거를 타고 동네 근처 어딘가를 놀러가다가 아침 10신가 11시 정각에 싸이렌이 온 동네에 크게 울리기 시작하자 자전거를 멈추고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었다. 반공교육의 끝자락에 걸쳐있는 세대이기도 했지만, 워낙에 학교 선생님의 말을 철썩처럼 믿고 따랐던 그 소년은 싸이렌이 울리자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하던 일을 중단하고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했던 것이다.

오늘 오전에 학원에서 바로 그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끔 하는 일이 있었다. 11월 11일은 이 동네 말remembrance day, 이런 날이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비비씨 뉴스에서 armistice day 라고
부르는 이 날에 대한 설명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았다.

"Armistice Day
is the anniversary of the symbolic end of World War I on 11 November 1918. It commemorates the armistice signed between the Allies and Germany at Rethondes, France, for the cessation of hostilities on the Western Front, which took effect at eleven o'clock in the morning — the "eleventh hour of the eleventh day of the eleventh month"."
-http://en.wikipedia.org/wiki/Armistice_Day

1차 대전의 종전 협약(the armistice)이 발효됐던 시점인 11월 11일 11시에 맞춰서 영국 전역에서(그리고 참전했던 모든 국가에서, 그러고 보니 독일에서도 같은 날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2분간의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런던 중심가에 있는 cenotaph에서 여왕과 베테랑 등등이 참여하는 가운데 식이 거행된다. cenotaph를 검색해봤더니 한국으로 치면 국립묘지쯤 되지 않을까 싶다. 트라팔가 스퀘어 가기 전에 whitehall street에 있다는데 담에 지나갈 일이 있으면 한번 가서 분위기가 어떤지 한번 봐바야겠다.

여기에 와서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집단적인 감성이나 움직임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집단주의의 냄새를 맡아본 것 같다. 11시에 다들 1층으로 내려와서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는 거다.  무슨 애국조회도 아니고.. 그 공지를 10시 반 쉬는 시간 시작할 때 받고 나서 11시까지 30분간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기 시작했다. 흥미로웠던 건 일본 친구의 반응이었는데, 왜 내려가서 그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쯤 대놓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거다. 나는 평소 성격대로 이 의식과 암묵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찬양이나 국가주의적인 발상과 같은 자뭇 진지한 주제들을 가지고 복잡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일본친구는 90년 전씩이나 된 일이 뭐가 지금 중요하냐면서 입을 뾰족 내밀었다. 일본엔 이런 날이 없냐고 물었더니 8월 15일에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떠올리며 전쟁의 참상을 상기하는 날이 있긴 한데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전 국가적으로 이렇게 특정 시간에 특정 행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날이라는 식의 뉘앙스로 말을 했다.

암튼 막상 11시가 되자 그냥 강의실에 남아있으려다가 얘네는 어떻게 '의식'을 치루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내려가봤는데 1층에 있는 티비를 틀어놓고 런던 cenotaph에서 벌어지고 있는 ceremony를 관람하며 침묵을 하고 있었다. 한국처럼 싸이렌이 있는건 아니었고, 그래도 심지어 이 시골에 있는 조그만 학원에서 모든 사람이 모여서 같은 시간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의식을 치루는게 나에겐 뭔가 찝찝하게만 느껴졌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역사란 것이 집단적 기억의 산물이기에 특정한 사건이 누구의 어떤 관점에 의해서 어떻게 선택되고 배제되느냐 하는 문제가 후대에게 남겨진 과제 중에 하나일텐데, 오늘 나에겐 영국의 현충일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하면서 자뭇 이 동네의 전쟁에 대한 기억의 방식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마도 습관처럼 매년 이 날 오전 11시에 2분간의 침묵을 갖는 여기 사람들은 이 의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너무 궁금했다. 궁금한만큼 급한대로 일단 학원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적어도 내가 오늘 만난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괜히 성질 급하게 물었다가 민감한 부분이라도 건드릴까봐 주눅이 들기도 했고.(뭣보다 이런 주제를 말할라치면 더욱더 버벅대는 영어가 주저함의 주된 이유중 하나). 사실 한국에서도 야구장 가면 애국가 부르는 것에 대해서 진지한 문제제기 이전에 단순한 의문이라도 던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여기도 그런게 아닐까 성급한 생각도 든다.  종전을 기념하며 죽은 사람들을 기린다는데 내가 너무 씨니컬하게 받아들인 걸까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서 더 여기서 얘기가 통할만한 사람과 이 날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기린다는 죽은 사람들 목록에 민간인은 없을거란 짐작이 들지만,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의심을 품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유심히 지켜본 비비씨 뉴스에서는 매시간 헤드라인에 이 날 벌어진 행사를 다루고 있고 한국으로 치면 재향군인회(?ㅋ) 쯤 되는 사람들 인터뷰도 나오고 그런다. "in honour of those who fought and died for freedom" "victory of the war" 일종의 국영(공영?)방송인 비비씨라 더 그런 거겠지만 이런 표현이 여러번 들린다. 오늘 런던에서 열린 행사에는 지금 살아 있는, 다들 이미 100세를 넘긴 '참전용사' 3명이 참가해서 더욱 뜻깊었다고들 말하는 것 같다. 문득 그들이 목표로 하고 싸웠다는 'freedom'은 어떤 의미였을까 혹은 지금 어떤 의미로 정의되는 걸까 궁금해진다.

혹시나 한국에서 국기경례맹세를 반대했던 것처럼 여기에도 이 전쟁기념(전쟁기념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내 자의적인 정의는 아닐까 계속 검열하게 된다)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정확히 매치하자면 한국에선 현충일 행사에 반대했던 공식적인 움직임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높으신 분들을 제외하곤 현충일은 그냥 휴일일뿐이니..아 집집마다 조기를 게양하긴 하는구나..  그냥 장님 코끼리 만지듯 훓었던 1차 대전의 역사도 문득 궁금해지고,, 이래 저래 머리를 많이 쓰는 하루다. ㅎ

도리야에즈,,,
오늘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4 파일을 여기 있는 다른 한국 학생한테 받았다. 호호호. 영어공부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봐야겠다.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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