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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나오의 역사에 대하여

민다나오 역사에 대하여

(IID 자료 번역) 

 

1. 필리핀은, 약 7,100개의 섬(약 1,000여개의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음)이 있는데, 크게 루존, 비사야스, 민다나오, 3개의 그룹으로 나누볼 수 있음. 민다나오에는 1,600만명이 살고 있고, 필리핀에서 두번째로 큰 섬임. 필리핀 사람들은, 민다나오에 대하여 위험하면서 약속의 땅, 잘살면서도 부족한 것이 많은 땅, 빠른 발전과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가난 등, 상반되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정책은, 민다나오의 인구 구성을 바꾸어놓았다. 식민지 정책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땅을 잃었고, 식민지 정책은 많은 다른 부족들에 대하여 나쁜 편견을 심어 주었다. 또한 식민지 정책은, 모슬림들을 소외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 bangsamoro(아래 설명) 사람들은, 모슬림-크리스챤 분쟁이라고도 불리는, 독립을 위하여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참고로, 필리핀 모슬림을 무법자 또는 반역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모슬림들이 그 동안 식민주의 정책에 강력히 저항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필리핀의 역사는 크게, 식민통치 이전, 스페인 식민 통치, 미국 식민통치, 독립 이후로 나누어볼 수 있음. 따라서, 민다나오 역사에 이에 따라 살펴보기로 함.

 

2. 모로는, 이슬람을 믿는, 민다나오와 술루에 사는 사람들(13개 부족)을 의미한다. 모슬림 아랍 상인들이 10세기-12세기, 무역을 하면서, 이 곳에 이슬람을 퍼뜨렸다.

13개 부족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3개의 부족이 있는데, maguindanaons(cotabato 지역 중심), maranaws(lanao 지역 중심), tausug(sulu 지역 중심)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yakans, badjaw, sama, jama mapun, lawani, melebuganon,
sangil, kalagans, kalibugan, iranun이다.

 

모로라는 말은, 스페인 식민 통치 시기에 스페인이 필리핀 모슬림에게 붙여준 것임.

민다나오, 술루 모슬림들이 스페인의 개종정책에 강력이 저항했는데, 그들이 마치, 이베리아 반도를 7세기 동안 점령해온 무어인들을 연상시켜, 그들을 모어라고 부름(모어, 야만인, 피에 굶주린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함). 그 당시 필리핀 남부 모슬림들로서는 모로라는 단어가,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모역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로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음.

그러나, 점점, 그들 스스로가, 모로 또는 모로 사람(bangsa moro, bangsa는 people을 의미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 스스로를 모로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이 필리핀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제국주의에 강력히 저항한 역사를 가진 사람들임을 표현하고자 함.  

bangsamoro 이데올로기를 통해, 필리핀 남부 모슬림들의 통합과 자각을 강조하고자 함.

 

3. 스페인 식민통치(1571-1891)

 

스페인은, 루존과 비사야스를 지배하고, 개종정책에 성공하였음. 그러나 민다나오에서는 북동쪽과 잠보앙가에 발판을 구축하기는 했으나, 식민지 지배에 실패하고 말았음. 이 지역에는 모슬림(모로라고 불리우는)과 원주민들(lumad 라고 불리는, lumad는, 원주민을 의미하는 비사얀 방언인데, 약 20여년전부터, 모슬림도 아니고 크리스챤도 아닌, 원주민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음. 18개의 원주민 부족이 있음. 20세기 초, lumad는, 민다나오 24개의 province 중 17개를 차지했는데, 1980년 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민다나오와 술루 전체 인구의 6%만 차지하고 있음. 정부의 이주 정책이 그 원인임. Bukidnon만 보더라도, 전체 인구가 1948년 63,470명에서, 1960년 194,368명, 그리고 1970년에는 414,762명이었는데, 원주민의 인구는 64%, 33%, 14%로 점점 줄고 있음. 그들은 토지 소유와 관련하여, 공동체 소유 개념을 갖고 있음. 한 공동체가 일정 지역의 땅을 소유하면, 그 안에서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봄. 이들은 모로와 달리 자체적으로 무장 단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필리핀 정부를 향해 무장투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주거지로 들어왔을 때 이들은, 산이나 숲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모로와 NPA에서 이들을 자신들의 무장단체에 포함시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함. 이들 땅의 대부분은 이미 다국적 기업, 벌목회사, 재력가들이 소유하고 있음.)이 살고 있었음.

 

15세기 중반부터, 미국 식민 초기까지, 이슬람 부족들은, sultanates라고 알려진, 선진적인 정치, 사회 조직을 갖고 있었다. 영향력 있는 sultanates로는 magindanaw, buayan, sulu가 있었다. Sultanates는, 그들의 지도자 술탄의 능력 여하에 따라 지배영역의 범위가 좌우되었다. 이들은, 주로 부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민다나오가 무력충돌을 선호하는 근원이, 이와 같이 땅과 그곳 주민들을 포섭하려는 데에서부터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확실히, 스페인의 식민정책이 시작할 때, 민다나오 모슬림들은, 원칙적으로 무력으로 통해 저항해 왔다. 결국, 스페인은, 모로 사람들을 개종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sultanates의 기본이 되는 원거리 해상무역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을 고립시켰다. 여튼, 민다나오와 술루는, 루존이나 비사야스와 달리, 스페인 식민지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4. 미국의 식민 통치

 

미국-스페인 전쟁(1896-1998) 후, 1898년 파리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때 미국이 스페인에게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 전역(민다나오를 포함)을 받음. 스페인이 물러난 후 필리핀은 독립을 되찾는 듯 했으나, 바로 미국이 쳐들어왔음.

필리핀 정부는, 모로와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하려고 하였으나, 스페인 식민지 정책으로 크리스챤들에 대해 불신을 쌓아온 모로들이  동맹을 거절함. 미국은 이와 같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새 정부를 세우고 민다나오를 정복함.

미국은 민다나오까지 포함한, 모든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 식민지 필리핀은, 토지 소유권과 관련한 법을 몇 개 통과시켰는데, 이 법들은 민다나오와 술루의 sultanates의 지배권을 침해하였다. 결국, 이 법들로 인해 모로와 원주민들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법들은 다음과 같다.

1) the Land Registration Act of 1902

이 법은, 토지 등록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우리 일제시대의, 토지조사제도와 같은 것..). 그런데, 토지등록제도는, 모로들의 관습법에 정면 반하는 것임. 그들의 관습법에는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라는 것이 없었음. 토지와 모든 창조물은 신의 것이고, 사람은 단지 수탁자, 또는 신의 창조물을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함. 식민통치 이전에는, 이와 같은 원칙이 작용했기에, 사용권만 있었고, 이러한 것을, 술탄이 관리하였음. 이러한 관습 때문에, 이 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토지 등록을 하지 않았음. 따라서, 토지등록을 한 일부 모로와 귀족들이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2) the Philippines Bill of 1902

이 법은, 공용토지의 처분과 개인 및 회사 소유권의 제한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이 법에 의하면, 회사는 1,604헥타르가 소유할 수 있는 반면, 개인은 16헥타르까지 소유할 수 있다.

 

3) the Pubilc Land Act of 1902
토지등록제도의 시행결과, 미등록된 토지는 자동으로 공용토지가 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공용토지를 국적에 상관없이 필리핀, 미국,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하였음. 이 법에 의해, 자작농장 시스템이 도입됨(?).

 

4) Policies establishing migrant colonies in Mindano.

1913년, 루존과 비사야스 지역에 토지가 없는 사람들을 민다나오로 이주하는 정책을 세움. 이 법이 그 정책을 구체화함.

 

이와 같은 제도들을 통해, 모로 지역에 들어온 기독교 정착자들은, 소위 선한 관계를 향상시킨다는 명목하에, 모로사회에 침투하여 생활함. 그러나, 식민당국의 목적은, 이를 통해 분리 정책을 펴려고 하였음. 우선, 이와 같은 제도들을 통해, 루존섬에 있는 반체제 세력들을 달래려고 하였다. 민다나오에 이주한 사람들 대다수는, 루존과 비사야스 지역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식민당국은, 이주민드에게는 16헥타르까지의 소유권을 인정했으면서, 토착민들에게는 10헥타르(그것도, 나중에는 8헥타르로 줄어듦)까지 소유권을 인정했다. 기독교 필리핀 군대가, 모로들의 저항을 억압했음은 말할나위도 없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토착민들과 이주자들이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5. 독립 이후

 

1946년, 필리핀은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독립한 필리핀은, 일부 모로를 포함한 지역 엘리트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모로들은, 크리스챤 필리핀들이 중심되는 국가 건설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국가 건설의 주도권은 크리스챤들이 잡았고, 모로들은 점점 그들의 고향에서 불법으로 땅을 점유하는 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많은 모로들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은, 또 다른 공포로 다가왔다. 1935년, Marnaw datus 그룹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립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훨씬 이전에도, 몇몇 술탄 들이, 술루의 독립을 요구하기도 했다.

 

국가 건설은, 다수의 가치관, 예를 들면, 기독교의 가치관에 기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체성는, 자생적인 정치 발전을 통한 가치관이 아니라, 기존 식민 정책의 혼합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수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통합이 필요한 국가건설에서, 소수의 가치관은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와 같은 사람들은 소외되고 만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들의 정치, 사회적 영역은 점점 좁아지게 된다.

그리하여, 필리핀 독립 후 새롭게 국가 건설이 진행될 대, 민다나오 내에는 긴장감과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 무력충돌의 원인은, 대부분 토지와 관련한 분쟁, 동물들에 대한 공격, 소유권을 침해하는 범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긴장은, 모로들이 개별적 군대를 조직함으로써 더 악화되었다. 민다나오의 부는, 총과 폭력배를 고용한 사람들에게 귀속되었고, 이주자들과 토착 엘리트들에게 귀속되었다.

 

그리고, 독립 후 정부는, 루존과 비사야스에 사는 무자력자들의 소요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역시 민다나오로의 이주 정책을 실시했다. 1960년대에는 매주 수천명이 이주했고, 이로 인해 땅과 관련한 분쟁이 악화되었고,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모로의 침략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고, 모로 지도자들에 대하여 화해공작을 시도했다. 그러나 모로들은, 기존의 정치 조직인 sultanate에서의 자치를 주장하며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토착민과 이주민들 사이의 개인 군대는 갈등을 강화시켰다. 비사야스 이주자 중 일로일로에서 온 이주민들이 코타바또에서 개인 군대 일라가(비사야스 말로 )라 창설였고, 이들의 모로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기 dnlkgud, 모로도 개인 군대를 창설하였다.

 

이주민들의 유입으로, 1960년에는 민다나오 전체인구 중에서 모슬림이 겨우 25% 밖에 되지 않았다(1900년 초에는 민다나오 전체 인구의 75%). 민다나오 대부분 경작지를, 농사를 짓는 이주민들과, 고무, 바나나, 파인애플 등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다. 민다나오가 정부 수입에 상당한 부분 기여하는데(이번 술루에서 만난 분에 의하면, 전체 세입의 60%가 민다나오에서 나오는 거라고), 그에 반해 인프라나 공공서비스 부분등에 대한 투자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모로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곧, 그들의 지도자는 더 이상 협상을 하지 않고, 반란 등을 개시할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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