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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08
    12. 1.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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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0/31
    웨스트 파푸아 긴급 요청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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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8/16
    웨스트 파푸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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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8/16
    웨스트 파푸아 긴급 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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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6/23
    웨스트 파푸와 관련한 자료들을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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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6/23
    웨스트 파푸아 국제회의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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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6/23
    웨스트 파푸아의 위기(1995~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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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6/19
    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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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6/19
    미국은 웨스트 파푸아에 개입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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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6/19
    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경제적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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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기념하며!!

지난 1961. 12. 1 웨스트파푸아는 자체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와 국가, 국기를 정헀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완성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유엔, 제국주의 패권국가들의 공모하에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침략으로, 인도네시아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식민정책으로 약 10만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 안에 있음)

 

2004. 12. 1.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트리코라 광장에서 모닝스타(웨스트 파푸아 국기) 게양식을 가졌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반란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게양식에 참여한 두 명을 구속, 각 15년과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습니다. 단지 국기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말이죠.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웨스트 파푸아인들을 달래기 위해 만든 특별자치법에서 모닝스타게양을 허가했습니다.

 

올해는 많은 사람들이 차마 거리에 나오지 못하고, 교회에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해 모닝스타게양으로 15년을 선고받은 필립 까르마가, 현재 수감중인 교도소 옥상에서 모닝스타를 게양하였다고 합니다.

국가폭력이 결코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꺾울 수 없다는 것을, 인도네시아 정부가 하루 속히 인정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아래는 관련 기사입니다.

 

----------

 

Papua rebel leader flies flag in jail    joe collins 

  Dec 03, 2005 23:26 PST  

 

 

Papua rebel leader flies flag in jail

 

Jakarta Post.com December 04, 2005

Nethy Dharma Somba, The Jakarta Post/Jayapura

 

Although he spends his days and nights in a cramed prison cell, the spirit

to fight for Papua's independence still burns brightly in the heart of

convicted rebel, Filep Karma.

 

Disregarding the severe consequences, Filep proudly hoisted the Morning Star

flag on the prison's roof in Jayapura on Thursday as hundreds of Papua

independence supporters held street rallies to commemorate the independence

of Papua on Dec. 1.

 

The supporters themselves were prevented from displaying the outlawed flag

at Trikora field in town, as their attempts were successfully scuttled by

the Indonesian Police.

 

"I am being kept in jail, but it does not dampen my spirit to fight for

Papua's independence," Filep told The Jakarta Post. Filep, who was sentenced

to 15 years in prison earlier this year for committing state treason, said

he was willing to bear any consequences for his act.

 

He refused, however, to reveal who secreted the flag to him.

 

Filep climbed a building in the prison compound on Thursday afternoon and

waved the Morning Star from the roof while shouting "Papua Freedom!"

 

Chief of security at Abepura prison, Korneles Rumbairusi, said he had no

idea how Filep was able to climb the prison building and wave the flag, the

symbol of Papuan independence. He had no idea either as to how the flag was

smuggled into the prison.

 

Responding to the incident, chief of Jayapura police Adj. Sr. Comr. Paulus

Waterpauw said police were still investigating six security guards and a

woman convict who saw Filep waving the flag. "This stunt could very well get

him a fat sentence extension," Waterpauw asserted.

 

Filep was arrested last year for leading a ceremony commemorating Papua

independence on Dec. 1. He led a flag-hoisting ceremony in Trikora field in

Jayapura town, which ended with a clash between Papuan independence

supporters and Indonesian Police. Besides being jailed, Filep was also

discharged from his position as a civil servant with the Papua

administration.

Dec. 1 was declared Papuan independence day by separatists who proclaimed

the state of West Papua on Dec. 1, 1962.

            

 

 

--------------

 

Message from West Papua :

2 December 2005

 

"We only want Papua must be free"

 

This morning I stand near the road. Suddenly a lot of army from Java [came

by]. They just arrived by airplane.

 

All of Papua people think may be in Papua [there will be] a big war again.

Yesterday Philip Karma raise up Papua flag again in Jail.

 

All Papua make prayers only in chruch because many army not allow us to make

prayers in field.

Brother.... We don't want anything, we just want be free form Indonesia.

 

We also want to build up the peace in the world. We want to keep the world

safe all the time.

I respect you cos your members like to support us.

 

Please not stop to press Indonesia that they must get out from West Papua.

We only want Papua must be free.

 

Papua Merdeka!

 

Best Regard

[name removed]

  

Richard Samuelson

Free West Papua Campaign

Oxford, U.K.

 

E-Mail: samo-@aol.com

Tel: +44 (0)1865 241200

www.freewestpapu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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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 긴급 요청문입니다.

지난 1963 인도네시아에 의해 군사점령을 당한 이래 지난 50 동안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웨스트 파푸아 점령을 합법화한 지난 1968~69 Act of ‘Free’ Choice(국민투표법) 문제점을 지적하고 과정에서의 유엔의 역할(책임방기) 대한 검토를 요구하는 내용의 서한에 힘을 모아달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서한은 각국의 시민사회의 서명을 받아 유엔 사무총장 앞으로 전달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서한을 읽어보시면 듯하고요, 아래의 서한 취지와 내용에 동감하신다면 아래 주소에 접속한 서명하시고 참여의사를 밝히는 메일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www.petitiononline.com/unreview 

 

서한은 웨스트 파푸아의 해방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West Papua Action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West Papua Action

134 Phibsborough Road, Dublin 7, Ireland

http://westpapuaaction.org

+353 (0)1 860 3431

 

웨스트 파푸아와 관련한 국내 기사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인권하루소식>(아시아 민중현장의 목소리), 민변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2005. 5~6/7~8 ), 다산인권재단의 <사람>(2005. 8 ) 참고하시면 됩니다.

 

 

 

유엔 사무총장 귀하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우리마저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각국 의회, NGO들과 함께 활동하는 우리는 1968~69 웨스트 파푸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법(Act of ‘Free’ Choice) 제정 시행 과정에서 유엔이 역할과 활동에 대하여 재검토해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웨스트 파푸아는 지난 50 동안 인도네시아 군부에 의해 점령돼왔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점령 기간 동안 웨스트 파푸아인들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와 과오들을 계속하고 있다. 1963 인도네시아 강점이 시작된 이래 최소 100,000여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점령 과정에서 살해당했고, 체계적인 인권침해가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사법제도를 통하지 않은 살인과 강간, 고문, 불법적인 체포와 구금, 집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 그들 본연의 책무를 자유로이 추구하려는 비정부기구·인권단체와 국제 감시 기구 대중매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의 방해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69 독재자 수하르토는 1,022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을 선발하여, 인도네시아 합방에 찬성하는 투표를 강요했다. 그리고 공개적이고 만장일치로 그들이 바라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웨스트 파푸아의 인구가 800,000명이었는데, 투표에 참여한 수는 단지 1/10 불과했다.   

 

당시 투표 광대극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불법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불법적인 권력 양도 절차에 참여했던 이전 유엔직원 차크라바씨 나라시만(Chakravarthy Narasimhan) 당시 투표 과정이 속임수였다고 인정한 있다. 그는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당시 유엔 분위기는 가능한 빨리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무도 웨스트 파푸아 안에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당한 백만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모든 유권자들이 인도네시아의 지배에 대해 찬성할 있었겠는가? 민주주의에서 만장일치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라고 말한 있다.   

유엔은 1962 8 15 유엔 본부에서 인도네시아와 네델란드 사이에 체결된 뉴욕 협약 관련해 당시 투표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엔은 뉴욕 협약과 관련해 본연의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1969 7 영국 외교단의 대표는 당시 유엔 회원국의 대다수는 가능한 빠르고 문제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유엔 사무국 역시 단지 가급적 빠르고 유연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1962~69
사이에 3만여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살해되었으며, 투표 당시 웨스트 파푸아는 공포와 위협의 분위기가 만연했다. 게다가 당시 유엔 상임위원회의 대표 오리쯔 산쯔(Ortiz Sanz) 투표 관련해 작성한 보고서는 다음의 점을 언급하고 있다. “국민투표(an act of free choice) 인도네시아의 질서에 따라 진행됐다. 하지만 뉴욕협정은 투표는 국제적인 질서에 따라야 한다 규정하고 있다. 당시의 국제적인 질서가 무엇인지는 1960 유엔 총회결의안 1541(XV)에서 확인할 있다. 결의안에서는 국가간 영토의 통합에 대하여 사람들은 영토가 통합될 경우 그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공정하고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보통선거에 기초해 그들의 의사를 자유로이 표현할 있어야 한다 명시했다.

하지만 투표 관련된 보고서를 검토한 유엔총회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모순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미 2002 3 26, 문제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서면이 유엔사무총장에게 제출됐었다. 요약본은 아래의 홈페이지 주소(http://westpapuaaction.buz.org/unreview)에서 확인할 있으며, 자세한 배경은 Dr. John Saltford 유엔과 인도네시아의 웨스트 파푸아 강점, 1962~69‘에서 찾아 있을 것이다.

 

2004 해제된 미국 기밀문서와 Brad Simpson 의해 작성된 문서(http://www.gwu.edu/%7Ensarchiv/NSAEBB/NSAEBB128/index.htm) 사이의 공모 한층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자카르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1962 7 2 미국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95%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있으며 ‘Act of Free Choice’ 기만적인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UN팀의 비공식적인 견해다”.

2004 3, 인도네시아 호주 대사 삼바 시아기안(Sabam Siagian)역시 1969 실시된 ‘Act of Free Choice’ 적법한 민주주의 투표로 없다고 말했다.

2004 12 영국외교부 장관 역시 당시 투표에 참여했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 웨스트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에 통합되길 바란다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국회에서 시인한 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의 웨스트 파푸아 합방 과정이 뉴욕협약에 위반되고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한편,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비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68~69 웨스트 파푸아에서 실시된 Act of ‘Free’ Choice”에서의 유엔의 역할에 대해 재검토해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2005 10

(번역은 인권운동사랑방의 유해정님께서 해주셨습니다)

 

 

 

To: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To: Secretary General
United Nations
UN Plaza
New York NY 10017, USA

Appalled by the ongoing suffering of the people of West Papua, we join a growing list of international parliamentarians and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and call on you as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to initiate a review of the UN’s conduct in relation to the “Act of ‘Free’ Choice” in West Papua, 1968-69.

West Papua
has entered its fifth decade of occupation by the Indonesian military.

Crimes against humanity have been and continue to be perpetrated against the West Papuan people. An estimated minimum of 100,000
West Papuans have died since Indonesia
took over in 1963. There have been systematic violations of the human rights of West Papuans at the hands of the Indonesian regime, including extra-judicial killings, rape, torture, arbitrary arrest and detention, violations of the rights of freedom of assembly and freedom of speech, and denial of free access to NGOs, human rights groups, international observers and the media to freely carry out their work.

In 1969, instead of a proper independence referendum, 1,022
West Papuans were rounded up and forced to declare – unanimously and in public – their “wish” to integrate West Papua into the Republic of Indonesia
, then ruled by the brutal dictator Suharto. The population at the time was estimated at some 800,000 people, so a fraction of one percent of the people took part.

The Act has been widely dismissed as a farce, yet no action has been taken to redress the injustice to date.

Former United Nations Under-Secretary General Chakravarthy Narasimhan, who handled the takeover, has since admitted that the process was a “whitewash”:

“It was just a whitewash. The mood at the United Nations was to get rid of this problem as quickly as possible… Nobody gave a thought to the fact that there were a million people there who had their fundamental human rights trampled… How could anyone have seriously believed that all voters unanimously decided to join his [Suharto’s] regime?… Unanimity like that is unknown in democracies.”

The United Nations had certain responsibilities in relation to the Act, as specified in the New York Agreement, an international agreement signed at UN Headquarters by
Indonesia and the Netherlands on August 15, 1962
. However there is strong evidence that the UN failed to fulfill its obligations under the Agreement. A representative of the UK mission to the UN said in July 1969:

“Our strong impression is that the great majority of United Nations members want to see this question cleared out of the way with the minimum of fuss as soon as possible… the Secretariat, whose influence could be important, appear only too anxious to get shot of the problem as quickly and smoothly as possible.”

In the years 1962-69, an estimated 30,000
West Papuans
were killed and an atmosphere of fear and intimidation pervaded the country at the time of the Act.

Moreover, in the report of the Act by the then UN Secretary-General’s Representative Ortiz Sanz, it was stated that “an act of free choice has taken place… in accordance with Indonesian practice”. The New York Agreement referred to “in accordance with international practice”. Evidence of what was considered international practice at the time can be found in UN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541 (XV) of 1960. This Resolution states that the integration of one territory with another should result from the “freely expressed wishes of the Territory's peoples acting with full knowledge of the change in their status, their wishes having been expressed through informed and democratic processes impartially conducted and based on universal adult suffrage". This crucial discrepancy was not pointed out to the UN General Assembly, which voted to “take note” of the report of the Act.

Detailed substantiating documentation on the case for a review was presented to your office on
26 March 2002
.

An outline briefing is available at http://westpapuaaction.buz.org/unreview and more background detail is provided in “The United Nations and the Indonesian Takeover of West Papua, 1962-1969” by Dr. John Saltford.

De-classified
US documents released in 2004 and edited by Brad Simpson available at http://www.gwu.edu/%7Ensarchiv/NSAEBB/NSAEBB128/index.htm have further underlined the complicity. The US Embassy in Jakarta for example told the US State Department in a cable dated July 2, 1969
that “[private] political views of the UN team are… 95 per cent of the Irianese support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hat the Act of Free Choice is a mockery”.

Former Indonesian Ambassador to Australia Sabam Siagian said in March 2004 that the Act of Free Choice in 1969 was never viewed as a truly democratic exercise.

In December 2004 a British foreign office minister admitted in parliament that the handpicked representatives were coerced into declaring for inclusion in
Indonesia
.

Given the overwhelming evidence, and appalled by the ongoing suffering of the people of
West Papua, we therefore call on you as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to initiate a review of the UN’s conduct in relation to the “Act of ‘Free’ Choice” in West Papua, 1968-69.

Sincerely,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웨스트 파푸아 역사

웨스트 파푸아의 침략과정을 잘 분석했습니다.

번역을 해서 올려야 하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단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웨스트 파푸아와 관련하여 자료를 번역하고 같이 고민할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아....친구가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고 뭐라 하네요^^.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재정 지원을 부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거 같은데...시간을 부탁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네요...

웨스트 파푸아에서 만난 한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solidarity keeps us alive..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를 상징하는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15년형을 선고받아야 하고, freeport라는 다국적 광산 기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인도네시아 군부는 채광 지역 일대의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환경과 문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분위기는 숨쉬는 것 조차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조차 그들을 외면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정말 위대한 존재인거 같습니다. 인도네시아가 그들을 억압할 수록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 살아나고 있으며,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집회 현장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었다가,  경찰서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은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왜 운동을 하느냐고....'나는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고, 그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웨스트 파푸아에 함께 하실 분들은 저희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hkshlee72@naver.com으로 연락 주시거나, 이 블로그에 연락을 남겨주셔요.

 

저희는, 유해정, 이상희입니다.

 

--------------------

 

*The need for understanding Papua's history, grievances*

*Carmel Budiardjo*, London

It has been asserted in your columns this week (/Local Elections and
Papuan Politics/, July 11, 2005) that because the majority of West
Papuans participated in general elections in 2004, they were therefore
participating in an internal referendum. The writer also claims that
they participated in an external referendum, known as Pepera (the
so-called Act of Free Choice) which took place in 1969.

He did not dispute the fact that only one thousand Papuans participated
in Pepera but alleged that because the result was endorsed by the
United
Nations, the Indonesian government was justified in "relying on the
results of Pepera" for its claim that West Papua is a legitimate part
of
the Indonesian Republic.

In the first place, to liken general elections to a referendum shows
the
shallowness of this analysis. Elections are about choosing
representatives of different political parties which in today's
Indonesia consist of nearly fifty parties. Whereas a referendum is the
occasion for the electorate to choose between two or more options, and
opinions often cross party lines.

Whether or not people participate in elections relates not only to
making choices about party programs but may also be generated by fear
or
anxiety that by not participating, they could face accusations of
separatism or sedition.

Recent events in West Papua, such as the military operations underway
in
the Central Highlands district of Punjak Jaya, which forced thousands
of
villagers to take refuge in the forest, abandoning their homes and
gardens, suggest that fear of the authorities still plays a role in
people's decision about participating in political events.

Now that Indonesia has entered an important new political era in which
democratic rights are recognized as one of the basic rights of the
population, it is strange that someone who presumes to have the
expertise to hold forth about political affairs fails to recognize that
the Act of Free Choice conducted by the Indonesian authorities in the
Soeharto era was anything but democratic.

At the time of the Act, the population of Papua was estimated as being
a
little over 800,000, yet no one disputes the fact that only one
thousand
persons (to be precise, 1,022), not even one per cent of the
population,
participated in that Act.

The Act was conducted following the New York Agreement of 1962 which
was
concluded as the result of intervention from Washington which feared
that Indonesia, then under President Sukarno, was getting too close to
the Soviet bloc. The agreement was concluded between Indonesia and The
Netherlands, without Papuan participation or consultation.

As a result of Dutch insistence, it included a clause providing for an
Act within six years that should be held in accordance with
"international practice" This can surely only mean one thing, namely
the
principle of "one man, one vote".

The issue of West Papua was discussed in the House of Lords last
December. On that occasion, the Bishop of Oxford asked the British
government for its views about the Act of Free Choice which he had
described as being an occasion when a thousand representatives "were
coerced into declaring for inclusion in Indonesia".

Replying for the government, Baroness Symons said: "He is right to say
that there were 1,000 handpicked representatives and they were largely
coerced into declaring for inclusion in Indonesia". One can hardly
disregard the views of the British Government, stated in the country's
highest political forum.

As we know here in the UK, the British government is closely following
events in West Papua, not least because a major British company, BP,
has
decided to invest massively in the exploitation of West Papua's vast
reserves of natural gas. While seeking to promote this investment, the
government has not refrained from acknowledging that the way in which
the territory was incorporated into the Indonesian Republic was
seriously flawed.

West Papua has now been officially part of Indonesia for more than
thirty years, or even longer if you include the six years following the
Dutch withdrawal in 1963, yet the sense of grievance still runs deep.

When President Susilo Bambang Yudhoyono made a visit to West Papua last
December, shortly after his inauguration and after saying that the
resolution of the conflict in West Papua was "one of his top
priorities", the leaders of all the churches there decided to boycott
the visit. As far as we know, not even during the worst days of the
Soeharto era did such a thing ever happen.

No one should make the mistake of disregarding the views of the
churches
in West Papua which have always played a prominent role and have always
acted in the best interests of the largely Christian population.

There are many serious problems in West Papua, not least the confusion
created by the government's decision first to establish Special
Autonomy, and then to split the territory into three or perhaps even
into five provinces. Allegations are being made that money intended for
running the special autonomy administration is being used to cover the
cost of ongoing military operations.

There is also concern that the continuing influx of migrants from other
parts of Indonesia is turning the Papuans into a minority in their own
homeland. In some of the major cities such as Jayapura, this is already
true.

It may be true that events in West Papua are too infrequently reported
in Indonesia's national media which perhaps accounts for a great deal
of
misunderstanding about conditions there. We can only hope that this
will
be speedily remedied.

In particular, commentators should play closer attention to the events
in the 1960s which lie at the root of the grievances of the people of
West Papua.
/The writer is the founder of the Indonesia Human Rights Campaign, set
up in 1973./

--
Jan Lozano
Databank Staf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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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 긴급 호소문

웨스트 파푸아 긴급 호소문입니다.

(번역을 하지 못했는데....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FREE WEST PAPUA CAMPAIGN

URGENT ACTION ALERT

28th July 2005

 

 

 

Dear friends of West Papua,

 

The following report has just been sent to us by contacts in West Papua. The Indonesian army are torturing and intimidating innocent villagers in the Papuan highlands in a new campaign of brutality and intimidation.

 

Papuans are asking their supporters in the UK and around the world for help. Please follow the instructions at the end of this alert for ways in which you can help them. EVERY PHONE CALL, FAX OR LETTER MAKES A DIFFERENCE. Please do what you can.

 

Many thanks.

 

 

State-sponsored terrorism by the Indonesian army in Moragame village, West Papua.

Widespread torture of Papuan villagers is reported.
Please help now!



Tuesday 8 July 2005:  12 members of the TNI [Indonesian army] began intimidating and torturing innocent Papuan civilians in the little village of Moragame (Pyramid) in Assologoima District, near the town of Wamena .

Sunday 17 July: 10 members of the same units returned to Moragame. The TNI opened fire on the villagers with automatic rifles. The people ran to the jungle to save their lives and are now refugees.

Two Moragame villagers, Yiman Wenda and Abai Wenda, were shot by the army. They fled, wounded, into the jungle. Nobody knows if they are dead or alive.

The army also burnt homes and smashed down fences around the vegetable gardens.

Thursday 14 July: Petto Wenda was tortured by the TNI in the village of Pyramid. Soldiers first slashed his face with a razor and then cut his flesh all over his body with a knife. Finally the TNI poured petrol over his head and set fire to him. Petto Wenda's hair caught fire. He received serious burns to his head and is now in a critical condition. He is not expected to survive.

28 July 2005 The TNI is still occupying the Pyramid region. Military operations are still on going and hundreds of refugees are still hiding in the jungle, without proper food or shelter.

We are asking for urgent international help for the people of
West Papua. Without your attention it will be very dangerous for the people. Unless the army knows that the outside world is watching them, they will carry on with their brutality towards to the innocent people in Moragame.

 

WHAT YOU CAN DO


Please telephone:

Chief of police in Wamena: 00 + 62969 31072
Police Office in Wamena: 00 + 62969 31110
Bupati (Regent) of Wamena: 00 + 62969 31005


This report is direct from Wamena.  We will keep you updated.

Thank you for your support for the West Papuan people during this time of terror.


******************************************************
 
You can phone
Indonesia from UK for 15p per minute by first dialing 0905 306 0197, then the international number. West Papua is 9 hours ahead of GMT. However the phone will often be answered 24 hours so just ring when you can.

The most important thing is just to say the names of the villages and people a lot, even if they don't understand English, and make it clear you are phoning from abroad.

Some Indonesian phrases you can use (pronunciation guide in brackets):

Saya telepon tentang … (Sy-ar telepon tentang..) -
I am telephoning about ...

Hati hati (Harti harti) -
Be careful

Kami jaga lihat anda sekarang. (Karmee jargar leehat anda seykarang) -
We are watching you now

Saya dari Inggris. (Sy-yar dary Ingrees) -
I am from England

Kami adalah teman mereka. (Karmee ard-ar-lar tayman meraykar) -
We are their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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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와 관련한 자료들을 만나기

* 동영상을 올려보려고 했는데, 이쪽의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서 자료들을 구하실 수 있는 소스들을 그냥 올립니다. 이 자료는 에서 퍼온 것들 입니다. 참고하세요

 


Papua Merdeka (2002)
Explaning the 40 years of abuse and the struggle for freedom in West Papua.Available from FPCN (Real Player version here)

 

Point of Ignition (2003)
German language film (subtitled in English) showing West Papuan history and the murder of highlanders in Wamena 2003.
Available from FPCN (Real Player version here)

 

Freedom for West Papua (1999)
Compilation from a number of films with voice commentary by a Papuan activist introducing the struggle for freedom.
Available from SSP

 

Act of No Choice (Mark Worth)
Interviews and archive footage documenting the sham referendum the 'Act of Free Choice'.

 

Land of the Morning Star (Mark Worth)
Archive footage and recent interviews detailing the political history of West Papua from first contact to the present with particular focus on the Indonesian takeover.

 

Blood on the Cross
Film about the hostage taking in 1996 investigating allegations of Red Cross involvement in a massacre.

 

Rebels of the Forgotten World
Travels with the OPM filmed on a secret mission into the jungles of West Papua.

 

Bintang Kejora (1999)
West Papuan culture and the massacres of 1999.
Available from FPCN (Real Player version here)

West Papua: The Obliteration of a People (Carmel Budiardjo and Liem Soei Liong, Tapol, 1988)
Well researched book detailing the genocide of the Pauan people.
Available from Tapol

 

The United Nations and the Indonesian Takeover of West Papua (John Saltford, 2002)
Definitive text on the 'Act ofFree Choice' and the takeover of West Papua. PDF available here.

 

Poisoned Arrows (George Monbiot, 1989/2003)
An investigative journey to the heart of West Papua. Originally published in the 80's it has been republished in 2003 with a new introduction by the author.

 

The Open Cage : Ordeal of the Irian Jaya Hostages (Daniel Start, 1997)
The authors account of being taken hostage by the OPM in 1995

 

One No, Many Yeses (Paul Kingsnorth, 2003)
Accounts of the global resistance movement including a chapter entitled 'The Penis Gourd Revolution' about the West Papuan struggle.

 

Irian Jaya Under the Gun

The West New Guinea Debacle: Dutch Decolonisation and Indonesia 1945-1962

Just Leave Us Alone (Wiwa Wewo, 2002)
Originally written in Lani language by a Papuan tribesman explaining to his own people about the west, corporations, governments and plastic plants!
Available from SSP

 

Rumble in the Jungle (Do or Die, 1999)
An interview with a representative of the Free Papua Movement (OPM).
Available from SSP

 

West Papua in the Global Community (West Papua Action, Ireland, 1998/2003)
Concise background to theUN Campaign.
Available from West Papua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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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 국제회의 성명서

Satement by the fifth international solidarity meeting on West Papua, Manila

 

1 May 2005

 

 

For the first time in its six-year history the International Solidarity Campaign for West Papua faced intimidation at its meeting held in Manila over the weekend of 29 April-1 May 2005.  When the human-rights gatherings were held in Europe and in the Pacific, Indonesian authorities did not dare to attempt to sabotage the meetings. However, when the Meeting was scheduled to be held in Manila, the Indonesian Government tried to put a stop to it. Fortunately, despite direct appeals to the Manila Government for a ban the event went ahead and was a great success.

 

Philippines host for the meeting, Initiatives for International Dialogue said "We were disturbed that the Indonesian Government tried to get the meeting stopped, but we are pleased that the Philippines Government has hopefully learnt the lesson of East Timor, when they tried to stop a similar meeting at this venue from going ahead."

 

"It has been reported that the Indonesian authorities complained to th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Senate and also protested to the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urging that the meeting be banned. The Board of the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was also approached, but we are delighted that they were emphatic that the meeting should take place and allowed it to go ahead on their campus. Our organizers and delegates came under some annoying verbal harassment from pro-Jakarta elements but those problems pale into insignificance once we consider that West Papuan people cannot discuss any issues about their political aspirations without facing military repression."

 

"We will send a message to thank the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for its commitment to academic freedom, in the face of this unwarranted pressure." The meeting was attended by representatives from fifteen countries with especially strong representation from Asia.

 

Delegates decided to intensify the international campaign in support of the aspirations of the West Papuan people. They called for open and unfettered access to West Papua. Urgent priority will be given to the international campaign for an end to all military co-operation and all arms sales to Indonesia.

 

The Meeting called for the release of all West Papuan political prisoners wherever they are being held ­ in West Papua or in Indonesia.

 

Delegates called for stronger support for West Papuan  women's groups and for the implementation of national and international laws to protect West Papuan women against all forms of violence in the home and from Indonesian state forces.The meeting strongly condemned the decision by the Indonesian authorities to increase the number of Indonesian troops in West Papua, in particular the deployment of KOSTRAD (Strategic Reserve Force) troops there, bringing the planned total number of troops in West Papua to 50,000. It expressed warm support for calls by the West Papuan people for their homeland to become a LAND OF PEACE, in face of the decision by the

Indonesian authorities for the militarization of West Papua.

 

The Meeting expressed its thanks to Initiatives for International Dialogue for organising the Meeting.

 


 

Manila, Philippines, 1st of May 2005

Contact:
Mark Doris, West Papua Action
09284155297

 

Initiatives for International Dialogue
09209094104
09215040612
(6382) 2992574/75
(6382) 2992052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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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의 위기(1995~2002)

웨스트 파푸아 내의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아래 저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번역이 매우 거칩니다. 양해해 주셔요~~

 

 

 

Papuans at risk

some personal observations, 1995-2002

-At Ipenburg-

 

1. introduction

 

1995년부터 2002년까지 파푸아에 있는 evengical Christian church에서 신학을 강의하였다. 아래 내용은 그 기간 동안 내가 목격한 것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1962. 8. 15. 네덜란드, 미국, 인도네시아가, 단기간의 유엔 관리 이후 인도네시아게 네덜란드 뉴기니아를 이양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3 당사자가 웨스트 파푸안들과 전혀 상의도 없이 뉴욕에서 만나 합의한 것이다.

1962. 10. 1. 인도네시아 군대는 뉴기니아에 침입했고, 그 즉시 인도네시아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또는 반대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체포하고 죽이는 등으로 지배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이래, 군대는 웨스트 자바, Minahasa(permesta rising), south sulawesi(Islamic republic of makassar, moluccas(republik maluku selatan) 등 여러 지역에서 자바사람들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들을 진압해 온 경험이 있다.

그러한 진압들은 내부에서 일정 정도 지지를 받았다. 미국도 반공산주의 활동의 일환으로 그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아는 다른 지역들과 다르다. 우선, 웨스트 파푸아는 국제적으로 1950년부터 1962년까지 인도네시아와 전혀 별개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웨트프 파푸아에 상주해 있으며 그 특별한 지위를 강화하고 있다. 군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굉장한 사업상의 이익을 누리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는 군사 훈련 경험을 위해서 중요하고, 군인들의 진급을 위해서도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기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기란 상당히 어렵다.  

최근 1998년 수하르토 몰락 이후, 개혁 정책의 기치 아래, 인권침해를 감시할 수 있는 2개의 단체가 생겼다. Elsham Papua, Justice and Peace Secretariat of the Jayapura Diocese이다.

 

2. 킬링필드라고 표현할 정도로 웨스트 파푸아 상황은 심각한가?

 

웨스트 파푸안들의 사망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인도네시아 통계청은 웨스트 파푸안을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구별하지 않고 사망률을 잡고 있다. 또한, 정치 상황 때문에, 웨스트 파푸안만의 사망률율을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962년부터 그 지역은 군사 통제 지역이다(DOM or daerab operasi militer). 이는 민정과 상의하지 않고 군대가 그 지역의 안보를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1965년 군대는, 시민들의 일에 개입할 권한을 갖기 시작했다. 실제, 그들은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민간당국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민정 최고 지위는 군 장교나 이전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퇴역한 군 장교들은 군부의 지휘를 받고나 영향을 받고 있다. 

군대의 지위는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의 당과 유사하다.

 

더구나 외국 기자들은 거의 웨스트 파푸아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외국기자들이, 도시 밖의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찰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경찰과 군에게 보고를 해야만 한다. Paniai와 star mountains 같은 지역은 외국인 기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다. 웨스트 파푸아에서 일하는 국적이탈자는, 군정보기관의 조사가 끝난 뒤 허가를 받아야지만 일할 수 있다. 수하르토 시대에는 미디어가 전면 통제되었고, 조사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유력 중앙지는, 웨스트 파푸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웨스트 파푸아에 대하여 보도를 하였다. 일반적으로으로, 인도네시아 신문은 웨스트 파푸아에 대하여 거의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3. 5개의 사건

나와 부인은 2명의 10대 아이들과 함께 1995년말부터 2002. 3.까지 웨스트 파푸아에서 살았다.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었다. 몇 명의 파푸안 친구들과 동료들은 협박을 받았다. 1998년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약간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안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의료 부족, 정치적 폭력, 범죄, 가정폭력, 교통사고 등그러나 이것은 이슈가 되지 못한다. 만약 경찰이나 군대 폭력으로 사망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은 공안당국의 폭력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국민들을 명예훼손으로 조사하고 구속 기소하고 있다.

 

5가지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a)UNCEN 대학의 학생이던 Steven Suripatty가 1998. 7. 4. 교내에서 자유 발언 시위를 하던 중 군인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군대는 사건 조사를 거부했다. 물론 무고한 구경꾼이자 우리 학교 교수의 딸이 군인이 쏜 총에 맞아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 군대는 무릎 수술과 관련하여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b) Fajar Timur 신학대학교의 강사인, Me in Paniai 출신 Obeth Badii가, 1998년 의문사를 당했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중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범인을 조사하는데 필요한 검시 등의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정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사실, 원래 살해 공격 목표는 Waena에서 Obeth의 집 옆에 사는, Kompas 기자 Octovianus Mote였을 가능성이 높다. Obeth는 이미 Octo에게, 이상한 사람이 옆집에서 왔다갔다는 하는 것을 보았다고 경고했다. Octo는 Obeth와 마찬가지로 Paniai 사람이고, 외모도 비슷했다. 3명의 증인이 있었으나, 한 명은 길에서 사고로 사망했고, 다른 한명은 라이트와 번호판이 없이 최고 속도로 달린 자동차에 치여 사망하였으며, 나머지는 도망가고 없다.

 

c)2000. 12. 밤, 경찰이 파푸안 내륙에서 온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기숙사를 급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생들은 해안에 사는 학생들보다 과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100여명의 학생들이 포위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미성년자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그 다음 날 석방되었는데, Cenderawasih Pos에 의하면, 체포된 여학생들이 경찰이 그들을 강간하지 않은 것을 감사해 했다고 한다. 경찰 폭력 피해 학생들을 치료한 병원의 원장은, 나에게 학생들이 입은 상처가 의미하는 공포를 표현했다. 큰 상처는, 경찰들이 고의로 상해를 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응급처치 없이 트럭에 실려 왔다. 부러진 어깨와 손발이 많았다. 병원장은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처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경찰들의 폭력 행위 일부는 스위스 nueu zurcher zeitung 신문사의 기자인 Oswald Iten가 증언하였다. 당시 그는 이민법 위반을 이유로 기소되어 자야퓨라에 있는 한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는, joni karunggu와 orry doronggi가 경찰서에서 경찰에게 맞아 죽을 때 현장에 있었다.

 

d) 2002. 2. 대낮에 2명의 경찰이 33살의 파푸안 목사 robert ongge를 abepura 시장 근처에 있는 중국인 친적 집에서 살해하였다. 파푸안 사람들은 이 죽음에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저항하였다. 그의 마을인 kampong harapan에서, 자야푸라와 sentani 길을 막았는데, 이 길은 공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경찰 수뇌부는 2명의 경찰이 어린 나이와 경험미숙으로 분별없이 행동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지방신문인 cenderawasih pos가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을 인터뷰하면서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희생자는 정치 활동과 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카르타에서 오랜 목사 일을 한 후 단지 중국인 아내와 2명의 자식과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kampong harapan에서 새로운 교회 일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e)UNCEN 대학을 졸업한 젊은 청년 Johan이, 그의 약혼녀와 함께 있던 저녁 살해당했다. 4명이, 약혼녀 앞에서 그를 단검으로 찔렀다. 단검은 몸에 박혀 있었고, 증거로 회수되었다. 회수된 단검은 군인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들은 그를 경찰로 보고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항구에서 경찰이 군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군인들은 경찰에게 보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군 지휘부는, 누구의 단검도 분실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조사는 끝났다. UNCEN 학생들은 수사와 재판의 의지가 없는 경찰에 분개했다. 그들은 자야뿌라와 Waena 길을 막으며 시위를 하였다.

 

5가지 사건의 피해자 중 그 누구도 정치 활동가로 알려진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항상 사건을 덮고, 범인을 보호하고자 했다.

 

d) 사건에서 경찰은, 인권침해가 아니라 군에 대하여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인도네시아 인권단체인 komnas-ham이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경찰 대변인은 그 단체가 편파적이고 선동적이라고 발표했다.

 

4. 다른 사건들

 

5가지 사건은 자야뿌라 근처에서 발생한 것이나, 이 외에도 경찰이나 군대가 시위자들을 상대로 한 인권침해 사건을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1998년 biak, 2000년 nabire, sorong, timika, manokwari 등이다.

최근에 발생했던 가장 심각한 사건은 2000. 10. wamena에서 122명의 희생자를 낳은 사건이다. 2000년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웨스트 파푸안들은 어쩔 수 없이, 종교와 문화의 상징인 모닝 스타 국기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와히드 대통령인 1999. 12.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경찰은 국기게양을 분리주의, 반역으로 보고 사형선고 등을 하고 있다.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웨스트 파푸안들을 살해하고 있다. 우리가 sentani에 살았을 때 우리는 거의 매년, 독점권을 지키려고 buginese 사람들이 sintani 시장에서 파푸아 사람들을 살해한 것을 보았다. 우리는 범인이 재판을 받았다는 소식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3명의 웨스트 파푸안들이 sentani의 jalan pos tujuh에서 buginese 모토 택시 드라이버를 살해하였을 때, 세명 모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살해는 바로 직전 시장에서 살해당한 파푸아 사람의 죽음을 보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과 군대는, 웨스트 파푸안들이 정의를 위해 시위를 하면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2000. 8. 웨스트 파푸안들이 sentani 시장에 불을 질렀는데, 이는 buginese 공동체가 선술집에서 살해당한 웨스트 파푸안 살인자를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배경, 상황

 

웨스트 파푸아에는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인권침해는 매우 광범위하여 자연재앙처럼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범인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경찰부터, 검사, 변호사, 판사까지 법률 시스템은 부패하였고 비효율적이다. 조사보도를 위한 표현의 자유가 없다. Ngo는 약하고, 정부와 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동티모르, 아체와 비교해 볼 때 웨스트 파푸안들은 말레이지아 외모와 비슷하여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곱슬거리는 머리, 검은 피부).

인종주의가 정치적 어려움의 문제를 가중시키는데, 자바 모슬림들은 곱슬거리는 머리와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흑인 기독교 웨스트 파푸안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은 열악하고, 인권침해문제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필요한 영어교육도 충분하지 않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제외하고는 외국 통신원이 없다. 외국 신문사들은 국내 통신원이나 경찰이나 군대의 앵무새인 antara와 같은 공식적인 뉴스 에이전시에 의존하다.

군사우월주의는, 수하르토 정권이 신법령을 공포하기 이전부터, 약 4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정치와 경제면에서 군인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경제적 이익을 부여받고 있다.

 

Zacharias sawor는 파푸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인도네시아 지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1962년 초창기 인도네시아 지배 과정을 서술하였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억압적인 식민지 권력으로부터 파푸아 사람들을 해방시켜준 것이 아니라, 점령군처럼 행동하였다. 군대는 정복의 권리로서 땅과 사람, 재산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정부와 교육에서 네덜란드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려고 노력했다. 교육과 시험은 즉각 네덜란드어에서 인도네시아 말로 바뀌었다. 선생과 공무원들은 토요일 오전 사무실에서 군사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네덜란드 시대의 모든 책은 인도네시아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곳이 뉴기니아의 문화, 자연환경에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교육, 무역, 공무 등을 교육받은 파푸안 사람들은 네덜란드어에 능숙하고 네덜란드 기준을 따랐는데, 이들은 친 네덜란드 사람들, 반 인도네시아 사람들로 의심받았다. 인도네시아 군대의 시각에서 이는 적을 의미한다.  

 

1962. 12. 인도네시아 군대가, 친인도네시아 그룹과 함께 jayapura의 kota raja에 있는 교사 훈련 칼리지, 공무원 학교, 농업칼리지, 기독교 학교 등의 기숙사를 공격하였다. 학생들은 구타 당했고, ifar gunung에 있는 군대 캠프로 끌려와 감금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안의 지도자급 그룹들을 투옥되거나 살해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싹을 잘로 놓으려고 했다. .

 

정보기관은 인도네시아 정부 전복 혐의자 또는 그와 연계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정책을 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0. 10. wamena에서, 웨스트 파푸아 독립 열망의 상징인 모닝 스타 플래그를 짓밟기 위해 과도한 폭력을 사용했다. 웨스트 파푸안들이 이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자, 경찰청장은 웨스트 파푸안들이 사람을 죽이고 불태우며 여자들과 아이들을 강간하는 동물들이라고 발표했다. 그 해 11월, 지방경찰청장은 NGO와 만나는 자리에서, 공공연히 파푸아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권침해를 정당화 하고 있다.

 

6. 경찰과 군대의 전략

 

인도네시아 공안당국은 전략차원에서 비사법적 살해를 비롯해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법에 저촉되는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웨스트 파푸아 지도자들을 살해함으로써, 처벌의 효과와 동시에 예방의 효과도 보고있다. 

군대는 갈등을 조성하기도 한다. 군대는 갈등을 조성한 후,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당하게 군사 행동을 개시하고 있다.

 

A)갈등 유발

 

살해가, 단순히 한 개인을 살해하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살해는 특정 그룹의 보복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이는 공안당국의 개입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폭력을 유발하는 전략은, 평화로운 국기 게양식을 막는 방법으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1999. 12. 와히드 대통령이 국기 게양식을 허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모닝 스타 게양을 국가 모독으로 보고 처벌하고 있다.

2000. 10. wamen에서 군대는 국기게양식에 모인 사람들이 군대의 명령에 따라 국기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발포하였다. 그리고 군대는 국기를 짓밟고, 그 위에 오줌을 누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군대는 그 지역의 병원들에게 부상자를 치료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시체 검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꺼번에 매장되었다.

 

b)분열 조장

 

군 정보기관은 파푸아-인도네시아의 갈등을, 이주민들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인이 유발한 사건 때문에, 이주자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웨스트 파푸안들의 정치적 열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설립된 웨스트 파푸아 의회지도자 Theys Eluay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청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살해범이 웨스트 파푸안 중의 한명이라고 발표했다. 살해 동기로는, Theys가 지역자치를 위한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에 자야뿌라에 있는 head of kopassus는, 사망 발생일 날 그와 같이 이동 중에 있던 한 사람이 자치 및 독립과 관련한 그의 지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총을 쏘았다고 발표했다.

 

2000. 12. 학생들 하숙집에 폭력이 발생했는데, 이것도 Balie과 Paniai 지방 출신의 과격한 학생들과 해안가 출신의 좀더 온건한 학생들을 분리하기 조장된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기자 Oswald Iten이 유치장에 있으면서 목격한 바에 의하면, 치명적인 사고가 몇 건 더 발생했다. 여튼 이 사건으로 1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체포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종교의 차이도 분열과 내부 갈등을 조장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I. S. Kijne 신학대학 교수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무슬림들에 의해 전소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종교간의 갈등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실제 Ambon과 North Moluccas 지역에 발생하고 있다.

 

Moluccan 지역 출신의 21살 여학생이 UNCEN 대학 출신의 학생에게 맞아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범인은 Baliem Valley 출신의 Dani 사람이었다. 충격과 슬픔으로 700여명의 학생들이 강의를 중단하고 일주일 내내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여학생의 시신은 학교 강당에 놓여져 있었다. 계속 추도가 진행되는 동안 괴한이 들어와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 한 여학생이 특정 강사를 모욕하며 소리질렀다. 장례식 때 지방경찰청장이 Dani 그룹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 누구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찰은 나중에 정신병 환자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기소되었거나 재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c)역량있는 지도자들 제거하기

몇 명의 지도자들이나 잠재적 지도자들이 제거되고 있다.

 

d)시민군

 

동티모르에서도 민병대가 제 몫을 다 했다. 민병대는 정규군보다 덜 훈련되었으나 훨씬 저렴하다. 군대의 통제아래 있지만 그들은 군대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

 

7. 파푸아 사람들의 사망률

 

우리는 in Yoka Pantai, a Papuan village on the shore of Lake Sentani.에 사는데, 1년에 평균 1000명당 28명이 사망하였다.

 

Izaak Samuel Kijne 신학대학에 700여명의 학생이 있고, 연령대가 20-30대인데, 2001년에 15명이 사망했다. 건강한 집단에서 21%가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 가정폭력, 경찰폭력, 살해, 자살, 결핵과 같은 질병, 말라리아, 폭력 등이다.

의료시설도 매우 미참하다.

 

8. 결론

 

웨스트 파푸아에서 상당히 많은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보고되지 않고 있다. 이는, 웨스트 파푸안이 인권침해와 침묵을 통한 면책에 길들여져 있고, 이를 자연재앙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이나 군대에 의한 인권침해를 보고하면, 증인이 위협받거나 살해당할 수 있기에 감히 보고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또한 외신 기자의 접근도 거의 불가능하다.

웨스트 파푸아에 시드시 모닝 헤럴드 외신 기자를 제외하고는 외국 통신원이 없다. 많은 기사들이 정부가 통제하는 Antra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지방 기자들은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조사에 기초한 보도가 거의 불가능하다. 웨스트 파푸아에 라디오 방송국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텔레비전도 하나 밖에 없다. 이 모두 정부가 통제한다. 더구나 인권침해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있다.

 

경찰과 군인들은 공공연히 웨스트 파푸안은 동물, 범인들, 돼지 들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범인들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인권침해가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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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해설] 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수탈의 역사와 독립 투쟁을 중심으로

 

                                             

 

1. 빼앗긴 웨스트 파푸아

1883년부터 네덜란드, 독일, 영국이 뉴기니아 섬을 두고 쟁탈전에 들어가는데, 네덜란드가 섬의 서쪽 지역을, 영국이 섬의 북동부를, 독일이 남동부를 차지하게 된다. 섬의 동쪽 지역은 1975년 '파푸아 뉴기니'로 독립 하지만, 섬의 서쪽 지역은 계속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다. 네덜란드는 1952년 유엔헌장 73조에 따라 파푸아인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탈식민지화 과정을 거쳐 독립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한다. 이에 대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동인도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한다는 헤이그 협약에 따라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헤이그 협약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에 이양할 동인도 중 웨스트 파푸아는 제외되었고,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구를 거절한다.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은 독립을 준비하며, 1961년 12월 1일 나라 이름을 '웨스트 파푸아'로, 나라의 상징인 국기를 '모닝 스타(morning star)'로 정하고 의회를 창설한다.

회색으로 표시된 인도네시아 영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 웨스트 파푸아. 동쪽으로 노랗게 표시된 지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파푸아 뉴기니.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군사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하려 했고, 미국이 적극 인도네시아를 지원한다. 미국은 1950년대 수마트라와 북 술라웨시(North Sulawesi)에서 발생한 지역봉기를 지지하여 인도네시아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인도네시아가 소련과 동유럽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자 인도네시아와의 관계회복을 원했던 것이다.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은 당시 네덜란드 외무장관에게, 인도네시아를 달래지 않으면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므로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하기 전 일정 기간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는 1962년 8월 15일 뉴욕협정을 체결한다(1962년 9월 21일 유엔 사무총장 비준). 그 내용은, 네덜란드가 그해 10월 1일 권력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에 이관하고,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인도네시아에 권력을 이관하며(1963년 5월 1일 이관), 6년 안에 자유롭고 공정한 방법으로 독립 또는 인도네시아 지배 여부에 대한 의사를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물어 보자는 것이다. 위 협정에는 웨스트 파푸아 성인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관이 웨스트 파푸아인의 80%-90%가 독립을 원한다고 보고하자, 미국은 유엔에게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안 모색을 요청한다. 유엔은 그 요청대로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선발한 1022명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한다. 인도네시아 군인은 이들에게 '우리는 (독립이 아니라) 인도네시아를 원한다(I WANT INDONESIA)'에 투표할 것을 강제하고, 이에 반대할 경우 헬리콥터에 태운 뒤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한다. 1969년 8월 2일 투표 결과 인도네시아 지배가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이와 같이 웨스트 파푸아는, 자신들의 자결권을 행사할 겨를도 없이 미국과 유엔의 각본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전 유엔사무부총장이었던 나라심한(C.U. Narasimhan)은 4년 전 "그 투표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 당시 유엔은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 누구도, 웨스트 파푸아인 100만명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2. 인도네시아 식민지 지배

1) 공동체, 문화 파괴

웨스트 파푸아는 240여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족마다 언어와 문화를 가진, 세계 문화적으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1963년 5월 1일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한 뒤 '개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면서, 인도네시아 문화를 침투시키고 인도네시아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강요했다. 인도네시아는 웨스트 파푸아의 역사, 문화, 종교 등이 기재된 책을 금지했고, 그들의 축제나 경제 관행들을 모두 금지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내 인구밀집 지역에 있는 주민들을 웨스트 파푸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고, 군인들은 웨스트 파푸아 고원 지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마을을 불태우거나, 원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숲으로 내쫓고 있다. 강제이주정책은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문화를 파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에 원주민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2) 인권침해

군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법 벌목, 상권보호, 보호야생동물 밀매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 그리하여 군대는 고의로 지역문제에 개입하고,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거나 폭력을 유발하는 등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현재 군경 병력은 1만 5천에서 2만명이나 된다). 또한 과도한 군경의 투입은 체계적이고도 구조적으로 인권침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평화적인 저항수단으로 독립의 상징인 모닝 스타(morning star) 국기를 게양하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탄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수한 사건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 군대는 1998년 비아크(biak) 섬에서 평화적으로 모닝 스타 국기를 게양하려는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8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고, 2004년 12월 1일 자야뿌라 외곽인 아베뿌라에서도 국기 게양식을 위해 모인 사람들 향해 발포하고 국기를 밟아 찢어버렸다.

2000년 12월 7일에는 신원불상자가 자야뿌라 경찰서에 공격을 하여 경찰 1명이 사망했는데, 인도네시아 경찰은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하는 고원 지역 출신 학생들의 기숙사를 급습하여 그들을 체포한 뒤 고문을 하여 2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2004년 10월 인도네시아 군대의 폭격을 피해 숲으로 피난간 주민들이, 식량과 추위를 막을 옷이 부족하여 53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점령한 1963년부터 지금까지 웨스트 파푸아인 10만명(전체 인구의 10%)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망사건에 책임이 있는 군인과 경찰들은 사실상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파푸아인들의 저항. 뒤에 보이는 국기가 모닝스타. [출처] www.westpapua.ca


한편, 웨스트 파푸아 독립을 위한 정치토론이나 모닝 스타 게양식 참여 등은 반란죄나 국가 모독죄에 해당한다. 앰네스티 미국지부가 2005년 2월 1일 발표한 성명서에 의하면, 1998년 후반부터 독립 운동을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인이 최소 72명이라고 한다.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의 인권침해는 매우 심각하다. 인도네시아 인구 정책에 따라, 여성들은 피임을 강제 당하고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성의 몸에서 피임기구를 빼줘야 하는 영구 피임의 경우, 의료진이 이를 제거할 줄 몰라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군경에 의한 강간 사건도 많이 발생한다. 학교에 난입한 군인들이 어린 소녀들을 끌고나가 강간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3) 자원수탈

웨스트 파푸아에는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세계에서 구리, 금광으로 가장 큰 회사인 프리 포트(Freeport)는 인도네시아 군대의 도움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영국 회사인 브리티쉬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eum)은 2005년 3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웨스트 파푸아 북쪽에 있는 빈투니 베이(Bintuni Bay)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할 권리를 인가 받았다.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보존되어 있는 다우림 중 하나가 웨스트 파푸아에 있는데, 인도네시아 군부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벌목 회사들이 빠른 속도로 이 지역에서 벌목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이들 기업의 안전을 위하여 일부러 분쟁을 조장한 후 그 지역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3.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저항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계속되는 생존권 위협에 저항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왔으나, 인도네시아는 그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1960년대는 파푸아 독립운동(FPM, free papua movement)을 결성하고, 낡은 총과 창, 활, 화살, 도끼 등을 이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확고한 지배를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 이상으로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사전에 제거하였는데, 1963년부터 1969년 8월 이른바 국민투표가 있기 전까지 6년 동안 인도네시아 정부 때문에 사망한 웨스트 파푸아인이 약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약 2만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2000년 자야뿌라에 모여 의회를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과 대화를 시도하며 외부에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전파하기로 하였으나, 인도네시아 군대는 2001년 11월 의장인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웨스트 파푸아가 평화로운 땅이 되기를 소망하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들의 열망을 짓밟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당신들의 자유를 보태달라(Give your freedom to promote ours)"고.

파푸아 아이들의 미소가 위기에 처해 있다. [출처] www.westpapua.ca

 

<출처 인권하루소식 0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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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웨스트 파푸아에 개입말라

미국은 웨스트(서) 파푸아에 개입말라


[로스엔젤레스 민족통신=김영희편집위원/제1신] 웨스트 파푸아 행동 네트워크’(West Papua Action Network)는 24일 로스엔젤레스 주재 인도네시아영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정부는 웨스트 파프아 원주민들의 인권을 탄압하면서 미국대기업을 보호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군사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협조를 요청했다.

인도네시아영사관 앞에서. 왼쪽부터 죤 람비아크, 팻시 스파이어, 해롤드 그린(웨스트 파프아 행동 네트워크의 코디네이터)

호주의 북쪽인 남태평양에 위치했으며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섬나라인 웨스트 파푸아는 18세기부터 영국, 네델란드의 식민지를 거쳐 1969년에 인도네시아령이 됐다. 현재 인구는 약 2백5십만명으로 그중 1백여만명이 지난 30여년동안 인도네시아에서 건너 온 동양계 이주민이다. 원시와 현대가 함께 숨쉬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는 세계관광업계에서 서구문명에 아직 침식되지 않은 나체족 원주민들의 생활을 접할 수 있는 명소로도 꼽하며 그 풍부한 전통민속예술은 현대예술가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 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날 기자회견에는 전국을 순회강연중인 ‘웨스트 파푸아 국제인권회’의 의장이며 콜롬비아대학 인권학회의 방문연구원인 죤 람비아크씨와 2년전 웨스트 파푸아의 프리포트 맥모란(Freeport McMoRan) 그래스버그 금광근처에서 총격사건으로 남편을 여윈 미국인여교사 팻시 스파이어씨가 참석했다.

웨스트 파푸아는 세계에서 금 매장량 1위, 구리 매장량 3위이며 광산업체 프리포트 맥모란은 미국의 뉴 올리안즈에 본사를 두고 있는 미국의 대기업으로 인도네시아에 최대의 투자를 하고 있는 해외업체이다. 동사가 2002년 한해동안 번 수익은 총19억달라에 달한다.

한편, 아마존강 지역처럼 큰 강을 타고 열대림이 울창한 웨스트 파푸아는 동쪽에 있는 파푸아 뉴기니아와 함께 아시아의 폐라고 불릴만큼 중요한 생태계에 속하나 미국 대기업이 양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광산업은 수질오염등 심각한 환경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민족통신은 웨스트 파피아에서 미국으로 정치망명을 한 죤 람지아크씨, 팻시 스파이어씨와 기자회견장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민족; 웨스트 파피아를 잘 모르는 한국독자들을 위해 그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 달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강연하는 죤씨

죤; 웨스트 피피아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냉전시대부터 미국이 어떻게 간섭해 왔는가를 우선 알아야 한다. 냉전시대인 1960년대 초 미국 케네디대통령은 인도네시아가 중국,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네델란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웨스트 파푸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네델란드를 압박하여 1962년 ‘뉴욕 협정’(New York Agreement)을 채택하게 했다. 미국, 네델란드,인도네시아, 유엔등이 관여한 이 협정에 의해 네델란드가 물러가고 1969년 국민투표에 의해 웨스트 파푸아는 인도네시아령이 된다.
웨스트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한 그 중요한 투표에 참가한 국민은 겨우 1022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들조차 인도네시아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정한 친인도네시아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국민투표가 있기 2년 전인 1967년 미국과 인도네시아는 조약을 맺어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는 한편 미국은 웨스츠 파푸아에 광산업체 프리포트 맥모란의 지사를 설립하고 그 막대한 세금과 수익금의 상당부분을 인도네시아정부에 납부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운명은 국민투표가 있기 전 미국과 인도네시아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웨스트 파푸아에 개입을 말아야 한다.

민족; 웨스트 파피아주민들의 독립운동을 소개해 달라.

죤; 1962년 이후 우리는 계속 독립운동을 해 왔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인도네시아군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 왔다. 지난 43년동안 인도네시아군은 10여만명의 주민들을 살해했으며 그외 고문, 강간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나 이들은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인도네시아군에서도 악명이 높은 특수부대 ‘코파수스’(Kopassus)는 2001년 11월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테이스 엘루아이(Theys Eluay)까지 암살했다.

한때 우리는 무장투쟁을 벌였으나 근래에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동 티모르의 독립은 우리의 운동에 큰 자극제가 되고 있다.

민족; 미국은 어떻게 군사지원을 하고 있는가?

죤; 인도네시아의 많은 군인들이 미국내에 있는 군사기관인 ‘국제군사교육훈련소’(International Military Education and Training: IMET)에서 직접 훈련을 받고 있다. 또 인도네시아군대는 미국에서 공급받은 무기로 우리를 죽이며 늘 탄압한다. (편집자 주: 미국이 냉전시대에 국내와 해외도처에 설립한 IMET는 9.11이후 “반테로”로 주요목적을 바꾸고 계속 운영되고 있다. International Military Education and Training을 웹상에서 검색으로 찾으면 수십개의 홈페이지가 나와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민족; (펫시 스파아어씨에게) 2년전 금광근처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강연하는 펫시씨

펫시; 남편, 직장동료들이랑 두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피크닉을 하고 돌아오는 중 복병의 총격을 받아 남편 릭을 비롯한 미국시민 2명, 인도네시아시민 1명이 살해당하고 미국시민 8명, 인도네시아시민 3명이 부상당했다. 나는 당시 등과 발에 총을 맞았다.

사건 발생 이후 조사가 진전되지 않아 나는 미 연방수사국에 여러번 진정하여 진척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인도네시아군대가 개입한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확실한 진상규명은 아직도 되지 않고 있다.

나와 남편은 프리모트 맥모란의 미국직원들 자녀들을 가리키는 학교에서 함께 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우리가 복병들에게 총을 맞아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민족; 앞으로 계속 사건의 진상을 캘 작정인가?

펫시; 그렇다. ‘누가’ 우리를 해쳤는지, ‘왜’ 우리를 해쳤는지 반드시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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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신] 죤 람비아크씨와 펫시 스파이어씨는 24일 저녁 임마누엘 연합감리교회에서 진보언론 KPFK방송국의 주최로 열린 강연회의 연사로 참석했다.

'아침별의 나라'로 불리우는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 옆에 종족학살과 식민점령을 끝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미국의 웨스트 파푸아개입에 관한 역사와 인권탄압의 진상’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죤씨는 일반 미국시민들이 오랜 식민지의 역사를 가진 웨스트 파푸아에 관심을 갖고 미국정계에 정의의 메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펫시씨는 워싱턴 디시를 찾아가 관계 국회위원들을 만나며 복병사건의 진상조사를 직접 촉구했다고 보고했다. 주체적인 시민정신을 갖고 행동하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 그는 백악관 관계 의원들에게 미국정부가 인도네시아군대를 부당하게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하여 인도네시아에 군사제재를 가하도록 성공했다고 말하며 지난 2년간의 상세한 경과보고를 했다.

이 날 강연회에서는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운동사를 그린 기록영화 ‘아침별의 나라’(Land of the Morning Star)가 상영되었다.

<출처 민족통신 0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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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경제적 착취

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경제적 착취

 

(출처: www. Eco-action.org/)

 

 

 

SHORT HISTORY OF WEST PAPUA

 

파푸아 섬에서 수천년 동안 말레이지아 부족들이 원예농업을 하면서 살아 왔다.

1511년, 스페인이 뉴기니아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자원을 수탈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등의 식민지 지배 프로젝트는 네덜란드가 소행한다. 선교와 함께, 근대화 및 개종을 위하여 유럽사람들이 섬에 침입했다. 인도네시아가 웨스트 파푸아에 침입하여 군사점령을 한 것은 1962년이다. 이 점령은, 냉전시기 인도네시아가 반공산주의 계열이 되기를 희망하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아래 이루어졌고, Freeport-McMoran과 같은 회사가 군사 경비 및 식민지배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함으로써, 추진되었다.

식민지화가 이루어지면서 저항은 계속됐고, 지금까지 OPM과 다른 독립투쟁 조직들의 투쟁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ENTER Freeport-McMoran

 

뉴올리언즈에 본부를 두고 있는 Freeport-McMoran Copper and Gold Inc.는 국제적인 광산회사로서, 파푸아인들을 착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Freeport는 1950년대부터 웨스트 파푸아에 관심을 가졌다. 이 회사는 1965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수하르토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광범위한 학살을 시작한지 한달만에 인도네시아와 협상한다.

 

Freeport는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은 뒤 수하르토 정권과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외국회사이다. 이 회사는, 웨스트 파푸안들이 광범위하게 무력항쟁을 전개하고, 인도네시아가 웨스트 파푸아를 적법하게 지배하기 이전부터 웨스트 파푸아 내의 채광과 관련하여 협상을 진행했다. Tembagapura에 위치한 Freeports Grasberg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을 가진 곳이자,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무장된 지역 중 하나이다.

 

The People and Resistance

 

웨스트 파푸아의 원주민들은 뉴기니아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종족이고,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른 말레이지안들과 관련이 있다. 세계 인구에서 얼마 차지하지는 않지만 세계언어의 20%가 웨스트 파푸아에 있다.

Freeport의 채광산업에 영향을 받는 부족이 고원지대에 있는 Amungme과 저지방에 사는 Kamoro이다. 인도네시아가 그들의 땅을 빼앗아 채광산업을 위하여 Freeport에게 무료로 제공하였다.

Freeport는 지방 인구 재정착 지휘권을 가지고, Kamoro, Amungme 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토지, 나무, 물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고원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이로 인해 거주지를 떠나 저지방으로 이주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저지방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웨스트 파푸안은 Freeport와 다른 식민지 개척자들에 대하여 저항하였다. 이는 광산과 그곳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 공격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1977년, OPM은 중요한 파이프 라인을 폭파시키고, 며칠간 탄광을 폐쇄하였으며, Freeport의 수백만 달러를 쓰레기처럼 내다 버렸다. 웨스트 파푸아의 무장 투쟁세력과 인도네시아 군인 사이에도 역시 수 많은 충돌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군대의 잔인무도한 진압과 Freeport의 보안군 때문에 대중 투쟁은 많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땅과 자치권을 보장받기 위하여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Freeport and the Military

 

ABRI로 알려진 인도네시아 군대는, 살인, 강간, 고문, 학살 등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동티모르, 아체, 웨스트 파푸아에서 발생한 수백만의 학살에 ABRI이 책임이 있다.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Freeport는 2001-2003 사이 ABRI에게 1천 6백만원 달러를 제공했고, 그 이전에도 또 다른 3억 5천만원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 돈은 군대의 식량, 주택, 연료, 인프라, 여행경비, 차량수리, 행정비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Freeport가 건설하고 있는 인프라에는 보안 지역과 군 기지가 포함되어 있다. Freeport 2003 SEC 보고서에 의하면, 군대에 지원한 비용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제공한 2,300여명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1996년말까지 Freeport 거류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이라고 한다.

 

Freeport에서 발생한 인도네시아 군대의 첫 살해 사건은 1972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든 마을이 살해당해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집을 떠나 도망가야만 했다. 고문과 강간의 사건도 수 없이 많다. 모든 저항에 대하여 과도한 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 군대는 매춘, 술판매, 불법 벌목, 강취 계획에 깊숙히 관련되어 있다.

 

Freeport and ecology

 

웨스트 파푸파의 생태계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생물종을 가진 곳 중의 하나이고, 모든 동식물 종류의 7%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Freeport의 채광산업은 이러한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 자연환경은 Amungme과 Kamoro 부족이 신성시 여기고 생명을 보존해 가는 곳이다. Freeport는 이 지역의 강에 수백만톤의 광물쓰레기를 버리고, 금속으로 강물을 오염시키며, 넓은 저지대의 강물을 죽고 황폐한 지역으로 바꾸고 있다. 강은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Amungme 부족이 신성시 여기는 호수를 포함하여 주변 지역에 독성 폐기물을 수천피트 쌓아두고 있다. 이로 인해 식용수가 오염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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