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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전>버마, 희망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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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버마, 희망을 말하다

사진전 | 버마, 희망을 말하다.

 

2006년 5월 4일부터 21일까지
대안공간 스페이스 피스

 

전시기획 : 이상희, 유해정, 황지성
사진 : 김영란


 

태국 북부 메솟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검문소 6곳을 통과하고 나니 차는 좁은 산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강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이 작은 모에이(Moei)강을 경계로 땅은 태국과 버마로 나뉩니다. 차에서 내려 보트로 강을 건너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레퍼허 마을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 대나무로 지은 버마의 전통가옥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레퍼허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5년 전. 그들은 모두 지난 40여년 동안 버마 군부독재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의 피해자들입니다. 버마 군인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가족이 살해당하고, 개발과 점령이란 미명하에 강제노동과 강제이주를 당해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이지요.

 

 

레퍼허에서는 누구나 하루에 두 끼를 먹습니다. 손님에겐 계란 후라이가 특식으로 주어지지만 이 마을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추장격인 양념하나로 밥 한 공기를 헤치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때론 나뭇잎을 따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정과 연민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네 개떡은 어른 아이 모두에게 ‘별미’ 중 별미이지만, 합창대회 상품으로 탄 손바닥만 한 개떡을 누구랄 것도 없이 엄지손가락만큼 떼어 스무 명의 친구들과 나눠먹을 줄 아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재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노랫소리 하나에도 전멸 당할 수 있는 마을에서, 언제 버마군이 휘두르는 폭력의 희생자로 사라질지 모를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버마 정부의 소수민족 배제 정책에 순응하며 폭력에 비굴해지면 지금보단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고국을 버리고 태국으로 넘어가 난민캠프에서 살면 조금 갑갑해도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오나 맘 졸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들은 자유와 버마를 갈망합니다.

 

5년 동안 3번의 버마군 침입을 경험하면서 마을은 전소되고, 정글에서 몇 일간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면서도, 그들은 카렌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존엄성과 해방된 세상을 위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아이들 역시 그곳에서 평화를 노래합니다.

 

 

"군인이 될 거예요" 꿈이 뭐냐는 질문에 한 꼬맹이가 자랑스럽게 답합니다. 옆에 있는 친구의 꿈도 같습니다. 이제 열 살로 보이는 친구들입니다. 레퍼허 교장선생님 레인보우의 꿈도 군인이 되는 거였답니다. 집을 불태우고, 가족과 이웃을 때린 버마군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서였답니다. 하지만 총으로는, 죽임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습니다.

 

해서 그는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건설하고 학교의 지붕을 올렸습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마을이 조금씩 변하고 사람들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버마군의 폭력을 목격한 아이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복수를 위해 군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씩 절망에 빠진다고 합니다.

 

 

억지로 끌려간 아이가 더욱 많겠지만 서도 버마 정규군에만 18세 미만의 소년병이 5~8만 명에 이른답니다. 반군진영엔 어느 정도의 소년병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채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겠다며 군 막사를 기웃거리는 것은 여기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분쟁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많은 버마인들이 태국국경을 넘습니다. 5만 여명의 버마 난민들이 가로 2km, 세로 0.5km의 난민촌에서 살아갑니다. 사생활이 없을 만큼 비좁은 땅에서 이들은 벌써 스무 해를 넘게 살았습니다. 언제 다시 떠나야할지 몰라 챙긴 피난 꾸러미들은 아직 풀러지지 못했습니다. 태국 경찰의 허가 없인 난민촌에서는 단 한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난민촌 밖의 삶은 버마로의 추방이던지 아님 평생에 걸친 불법체류자 신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자라납니다. 긴 기다림 속에 길러온 물 한 동이의 목욕에 감사하고,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음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자신의 무게보다 무거운 대나무를 옮기면서 환하게 웃습니다.

 

태국에는 ‘전쟁은 수천 번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아름답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니 누군가 답하더군요. 아이들이 꿈을 꾸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버마의 아이들이 지금 꿈꾸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공간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더불어 삶을 아는 아이들이기에 그들은 버마의 희망입니다.

 

 

 

* 이 전시는 제10회 인권영화제 돋움행사로 기획되었습니다.

 

문의 : 02-741-2406~7 (인권영화제), 전시장 (02-735-5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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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카술루탄 소식(2)입니다

안녕하세요.

자가 카술루탄에서 보내온 소식입니다. 이번에는 사진도 보내왔네요.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매월 25 20만원씩 자가 카술루탄에 지원할 있게 되었습니다.

자가 카술루탄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드립니다(jaga_kasulutan@yahoo.com). 함께 안부와 소식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자가 카술루탄 진상조사 결과

 

 

1. 진상조사 과정

 

자가 카술루탄은,  술루 다라얀 파티쿨(Darayan Patikul) 바랑가이[1] 시티오 키탑(Sitio Kitap)에서 발생한 Hatib Jah Hajabi(55) 그의 조카 Mujib Salam(22) 불법체포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자가 카술루탄은, 2005. 7. 3. 오전 9 30, 조사를 위해 파티쿨 바랑가이 대표와 함께 바랑가이로 갔다.

군인들은 바랑가이 입구에서 경계태세로 조사단을 검문 하였다. 그들은, 바랑가이 안으로 무엇인가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빙이 쌀이 들어있는 보자기를 메고 있었는데, 군인들은 보자기를 전부 풀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목적지인 시티오 키탑은, 산정상에 위치한 곳으로 돌과 진흙으로 뒤덮여 있다.

시티오 키탑 주민들은 마을 인근에 있는 5 집을 임시 피난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슬프고 침울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매우 화가 듯한 표정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147 가정이 집을 떠나, 피난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 되었다.

피난처로 사용되고 있는 집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5 가정이 거주하고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이불이나 베게 일상에 필요한 물품도 없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기가 무섭다고 이야기했다. 군인들이 아무런 설명이나 서류도 제시하지 않고 그들을 체포할까봐 두렵다는 것이다.

 

조사팀은, 피해자Hatib Jah Hajabi 집에 가서 그의 부인 Mrs.Jumma Hajabi 만났고, 피해자의 무덤에도 갔다. 조사팀은, 그녀에게 구제절차에 대하여 설명 해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경험과 그녀의 생각을 조사팀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조사팀은, 진술을 청취한 , 진술서를 받아 술루를 걱정하는 시민들의 모임 소속되어 있는 Ulka Ulama 변호사에게 전달하였다.

 

2. 피해자 Hatib Jah Hajabi 부인 Mrs.Jumma Hajabi(45) 증언

 

2005. 6. 21. 오전 11시경, 9대대 소속 군인 50여명이 순찰을 돌며 피해자 집을 지나고 있었다.

 

조카 Mujib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던 군인이 그에게 아부사야프(abusayyaf) 멤버냐고 물었다. 조카는 따갈로그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답변을 제대로 없었다. 그러자, 한명의 군인(Armalite) 총으로 그의 머리를 때렸다.

집안에 있던 남편이 밖으로 나가 조카를 때리던 군인을 말린 다음, 조카가 따갈로그어를 하지 못하니 자신에게 물으라고 했다.

군인들은, 남편과 조카를 데리고 바랑가이 밖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어쩔 없이 군인들을 따라갔는데, 한시간 총성이 들렸다. 친척들은 도움을 구하기 위해 다나그(Danag) 바랑가이로 달려갔는데, 가는 길에 흩어진 핏자국을 보았다.

 

친척들은, 오후 4시경, 다나그 바랑가이 대표의 도움으로 9대대에 갔다. 그런데, 그곳으로부터 1미터 떨어진 곳에서, Hatib Jah Hajabi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카는 실종되었다. 친척들은 Hatib Jah Hajabi 시체를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1주일 , 근처 바랑가이 강물에서 떠나니는 조카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1] 필리핀의 가장 작은 행정 구역을 일컫는 표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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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 카술루탄 후원하기.. 그리고

안녕하세요.

민다나오의 평화와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카자 카술루탄(빙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입니다.)과 민다나오의 평화정착을 위한 지원에 관심을 보여주시고, 여러모로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선, 메일로도 말씀드렸이, 계좌(농협  096-12-252023  예금주: 성지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매달 25일, 카자 카술루탄에 지원금이 보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는 인도네시아로 떠납니다. 그곳의 인터넷 환경이 그리 좋지 않다고 들어서 자주 연락을 드리고 나눌 수 있을지 걱정인데요,

다음에 마음을 나눌 때는 작은 한걸음이 딛어진 때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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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를 향한 한걸음 내딛기

한걸음 내딛으면서.


어느새 두달 전의 얘기가 돼버렸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도 하고, 그 만큼 고민의 절박함도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4월말,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웨스트 파푸아 국제미팅에 참석했었습니다. 그 회의를 지켜보면서 한국에서와는 다른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얘기라 치부할 수도 있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매일 마다 사람이 죽어가는 현실에서 그냥 눈 감고 다른 나라의 일로 치부하기에는 한국 사회가 해야할 일이 많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해서 자료를 뒤적이다 90년대 중반 동티모르 문제와 관련해 한국 사회가 했던 대응들을 생각해냈습니다.


길동무가 그러더군요. ‘웨스트 파푸아가 또 하나의 동티모르’인 것 같다고. 수세기에 걸친 수탈의 역사도 모자라 아직도 해방을 맛보지 못하고, 자민족이 매일 살해당하고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땅, 그것이 제가 처음으로 만난 웨스트 파푸아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연대를 가져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됐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사회는 참 자신의 밥그릇만 챙기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도 아울러 하게됩니다.

 

단순비교는 어렵겠지만, 예를들어 필리핀의 인권단체들은 필리핀 내의 인권문제에 대해 우리와 같은 ‘높은 수위’의 문제의식을 갖진 않는 것 같습니다. 어디를 가던, 심지어 쇼핑센터에서도 경찰들이 아무때나 몸과 가방수색을 하고, 대중교통수단은 성추행이나 성적불쾌감을 유발하기에 그지없는데도 이에 대한 저항이나 문제 의식이 인권단체에서도 매우 낮다던지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자신의 나라만이 아니라 ‘평화’와 ‘연대’의 개념을 실질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은, 그리고 제가 웨스트 파푸아 컨퍼런스에서 만난 아시아 지역 활동가들은 한국에 별로 기대하는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은 이들에겐 연대의 경험을 공유한 적 없는, 한국 내에서의 인권 및 시민사회진영은 매우 발달해있지만 다른 나라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한국 인권시민사회진영이 어떻게 연대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인권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것인데 그저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의 '인권'만이 중요하다고 사람이 죽어가는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그리고 웨스트 파푸아 문제에 힘을 보태야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해서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었으면 좋을지 고민을 함께 나눠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이곳에 저와 길동무는 작은 블로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꾸준히 작은 정보라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한다는 고민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되는 영어지만

 웨스턴 파푸아와 관련한 자료를 정기적으로 퍼날라 번역해볼 고민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인적, 물적 기반이 취약하다보니 이것이 잘 될 수 있을까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듭니다. 한국에 있는 인권시민사회진영에 웨스트 파푸와 문제와 관련해 연대할 것을 제안해 볼 계획이지만, 워낙 사안들이 많다보니 잘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지혜와 고민을 나눠주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한걸음 내딛는데 큰 용기가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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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글로 남을 설득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부터인가 글 쓰기가 두려워졌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능력 부재가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게 점점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계속 고민을 했는데, 그러한 개인의 고민으로 글을 포기하기에는 상황이 절박하고, 제가 필리핀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을 져버리는 거 같아, 용기를 내고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지난 3개월 간 다바오에 있는 IID(Initiative for Inernational Dialogue)에서 인턴활동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접한 사건은, 술루 섬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2005. 2. 1. 무장 군인들이 아침기도를 마친 가족에게 총을 겨누어, 부부와 5명의 아이들 중 한 아이를 살해한 사건이었죠. 다바오에서 비행기로 1시간 30분, 쾌속선으로 3시간 걸려서 간 술루는,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고립된 섬 그 자체였습니다. 더구나. 술루의 중심인 홀로(Jolo)에는 곳곳에 무장군인들이 깔려 있었고, 밤 10시에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습니다. 술루 섬을 방문한 것이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때였는데, 그 때까지도 그 지역 무장세력들과 필리핀 군대가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도 외부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려했었죠. 특히, 군대의 인권침해 등을 고발하거나 인권침해 사건 조사에 협조하면, 바로 신상에 불이익이 발생하기에, 외부 엔지오가 학살 사건 조사를 위해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엔지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때 만난 지역 활동가가 빙(Bing, Berkis A. Basaluddin)이었습니다. 학살 인근 지역에 같이 가서, 그들의 언어(Tausug)를 따갈로그어로 통역해 주고 그 지역 주민들의 상황을 저희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빙은, Jaga Kasulutan(그들의 언어인 Tausug으로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라는 단체에서 활동합니다. 그 단체는 술루에서 처음으로 생긴, 유일무이한 인권단체입니다. 술루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인권침해가 군인에 의한 것인데, 이를 고발하거나 인권침해 사건 조사에 협력하면, 실종되거나 갖가지 사고(폭격, 폭행 등)로 죽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술루 사건을 조사한 뒤 마닐라에서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하는데, 술루에서 대학 교수 3명만이 함께 했습니다. ‘왜 인권침해의 직접 당사자인 술루의 여성이나 어린이들이 오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함께 간 IID 활동가가, ‘그들이 로비를 하고 돌아간 뒤 어떠한 보복을 당할지 몰라 함께 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민다나오, 술루 섬에 사는 많은 모로들이 군인들로부터 인권침해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고 난 뒤 그들이 하는 일은, 가해자를 고소하거나 진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짐 싸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또 어떤 헤꼬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2002년 술루에 있는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이 인권침해를 감시하기 위해 연대 활동 조직을 만들어, 인권 침해 조사 및 인권교육 등의 활동을 하였고, 2005년 초 자가 카술루탄(Jaga Kasulutan)을 정식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무실도 없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컴퓨터도 없습니다. 필요한 자료집을 만들어야 할 때는 활동가 친구들의 사무실 컴퓨터를 빌려 사용하고, 주로 현장을 다니며 인권교육과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군대로부터 헤꼬지를 당하면 몇 년간 땀 흘려 일궈 놓은 밭을 포기하고 도망가야만 하는 사람들, 수십년 동안 계속된 억압에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인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인권침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말이죠. 현재로선, 술루에서 빙의 단체가 그런 일을 용기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이고, 지역 주민들도 이 단체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가 카술루탄’에 요구되는 일이 많고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활동을 확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지원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만원계’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한달에 만원씩만 지원해 주시면, 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술루 사람들에게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을 심어줄 것입니다. 빙 역시, 모로의 인권문제를 한국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한 달에 한번, 모로와 술루의 상황 및 단체 활동 소식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그걸 통해, 우리의 인권도 확대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힘드실텐데,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이전에 이런 메일을 받으면, 마음 한 켠에선 부담을 느꼈지만, 귀찮아서 그냥 지우고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몇 분만이라도 함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술루섬에서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 같이 고민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이루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로에 대하여 필리핀 민다나오 섬과 술루 섬에 있는 무슬림을 모로라고 부릅니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지배한 스페인이 끝까지 저항한 그들을 ‘야만인’이란 뜻의 ‘모로’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모로’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 섬을 이양받은 후, 민다나오 섬과 술루 섬을 강제로 필리핀의 한 영토로 편입하고, 루존섬과 비사얀에 있는 사람들을 민다나오와 술루섬으로 이주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전까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갖고 평화롭게 살던 모로는, 졸지에 미국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땅을 이주민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립 이후에는 크리스챤이 중심되어 필리핀 정부를 세우는데 그 과정에서 모로의 목소리는 완전히 배제되었고, 그들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로들은 이주자들에게 대부분의 땅을 빼앗겨 가난으로 내몰렸고, 전기나 수도 등의 기반 시설도 모로들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정부는 이 지역에 인프라 관련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잦은 내전과 교육 수준이 낮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교육수준이 필리핀에서 가장 낮고, 낮은 교육 수준으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난과 더불어 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군인들에 의해 자행되고 인권침해입니다. 필리핀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민다나오섬에 군대를 집중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테러범 색출, 무기 수색 등을 이유로 최소한의 형사절차도 거치지 않고 모로를 잡아 가두거나 그들의 집을 침입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모로 저항 세력(그들의 무장 여부를 불문하고)들을 무력공격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모로는, 미국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빼앗긴 자결권 행사를 주장하며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민다나오 독립부터, 연방제 실시 등의 다양한 논의 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5년 6월 1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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