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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카술루탄 소식입니다(3, 4월 활동보고)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자가 카술루탄의 3, 4 활동 보고내용입니다.

 

인권영화제 행사로 필리핀과 버마 가수가 다녀갔습니다.

 

평택에도 함께 다녀왔는데,

 

군인들이 마을을 완전히 고립하는 것이나, 농민들의 땅을 군사목적으로 강제 징수하는 것이나, 전쟁과 국익 앞에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 필리핀이나 버마와 전혀 다를바 없다고 하면서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평택의 소식을 나누며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도 남겨주셨습니다.

그들의 짐을 덜어줄 있을까 해서 초청했는데, 오히려 짐을 드린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유대감을 확인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자가 카술루탄 3 활동 보고

 

1. buddahu 기념행사 평화행진

 

자가 카술루탄은  Buddhau 기념행사 평화행진에 실무 단체로 활동했습니다(관련해서는 2 보고서 참조).  행사에는 독일, 스위스, 미국에서 활동가를 포함하여 20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2. 감시활동

 

자가 카술루탄은, 마임붕, 마나마오, 파티쿨, 인다난 지역에서 IID(Iniative for International Dialogue) 단체와 미군 관련 인권감시 활동을 펼쳤습니다.

술루 사람들은 미군의 주둔으로 많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술루 사람들은, 미군의 공격과 인권침해에 대항해 처절하게 투쟁해왔습니다. 따라서, 만약 미군이 다시 과거와 같이 술루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공격한다면, 충돌이 발생할 것입니다.

 

3. 교육 활동

CBCS 발라이(Balay Rehabilitation) 10일간 진행한 심리교육 평화문화 워크샾에 참여했습니다. 5 지역 활동 가들이 참여했습니다. 

 

4. 자카 카술루탄은  방사모로 의회가 개최한 Bitahnag Camp 참여했습니다. 그곳에서 Jabidah 학살과 방사모로 투쟁 기념행사를 가졌다.

 

(참고자료 : Jabidah 학살에 대하여

자비다 학살은 1968년에 발생했는데, 본격적인 모로 무장 투쟁을 가지고 학살로 유명합니다.

외대에서 출판한 ‘필리핀’에서 설명한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바(sabah)’를 둘러싸고 말레이시아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던 필리핀 군부(마르코스) 사바에 비밀침투공작을 위해 사마르 출신 모로 군인 30명에게 군사작전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형제 무슬림 나라인 말레이지아를 공격할 없다며 저항하였지요. 이에 대해군부는 이들 전원을 마닐라 입구의 꼬레지도르 섬에서 명령불복종죄로 전격 처형하였습니다. 자비드 사건은 모로 사회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모로에 대해 필리핀 국가와 군대가 가하는 명백한 차별대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자가 카술루탄 4 활동 보고

 

1. 자가 카술루탄은, 인권단체 CBCS(Consortium of Bangsamoro Civil Society), 발라이(Balay Rehabilitaion, http://www.balayph.org) 함께, 국내난민 권리와 아동권에 관한 워크샾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워크샾은 CBCS 네트워크 회원단체를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술루섬에서 평화, 인권운동을 하는 자가 카술루탄은 CBCS 네트워크의 멤버이기도 합니다.

 

2. 두번째 주에는, 인다나시의 Bud Timahu에서 폭격과 군사공격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역을 방문 조사를 했습니다. 주민들의 협조로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사고로 9명이 사망했고(여성 4, 남성 5), 6명이 상해를 입었다. 자가 카술루탄은, 코코이 투라위(Cocoy Tulawie) 도움으로 긴급하게 형사고발을 했고, 증인과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3. 자가카술루탄 활동가 2명이 잠보앙가 시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활동가 전원은 술루 홀로에서 방사모로연대포럼 개최한 Charter Changes Issue 심포지엄에 참여했습니다.

 

4. 그리고 4 지역에서 인권감시 활동을 했습니다.

 

5. 미군이 5월에 군사 훈련을 위해 술루섬의 마임붕, 파나마오, 팡리마, 타힐, 파티쿨에 다시 들오올 것이라는 소문으로 주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6. 참고로, 재정 부족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많은 교육과 활동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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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카술루탄 소식입니다(3, 4월 활동보고)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자가 카술루탄의 3, 4 활동 보고내용입니다.

 

인권영화제 행사로 필리핀과 버마 가수가 다녀갔습니다.

 

평택에도 함께 다녀왔는데,

 

군인들이 마을을 완전히 고립하는 것이나, 농민들의 땅을 군사목적으로 강제 징수하는 것이나, 전쟁과 국익 앞에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 필리핀이나 버마와 전혀 다를바 없다고 하면서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평택의 소식을 나누며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도 남겨주셨습니다.

그들의 짐을 덜어줄 있을까 해서 초청했는데, 오히려 짐을 드린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유대감을 확인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자가 카술루탄 3 활동 보고

 

1. buddahu 기념행사 평화행진

 

자가 카술루탄은  Buddhau 기념행사 평화행진에 실무 단체로 활동했습니다(관련해서는 2 보고서 참조).  행사에는 독일, 스위스, 미국에서 활동가를 포함하여 20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2. 감시활동

 

자가 카술루탄은, 마임붕, 마나마오, 파티쿨, 인다난 지역에서 IID(Iniative for International Dialogue) 단체와 미군 관련 인권감시 활동을 펼쳤습니다.

술루 사람들은 미군의 주둔으로 많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술루 사람들은, 미군의 공격과 인권침해에 대항해 처절하게 투쟁해왔습니다. 따라서, 만약 미군이 다시 과거와 같이 술루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공격한다면, 충돌이 발생할 것입니다.

 

3. 교육 활동

CBCS 발라이(Balay Rehabilitation) 10일간 진행한 심리교육 평화문화 워크샾에 참여했습니다. 5 지역 활동 가들이 참여했습니다. 

 

4. 자카 카술루탄은  방사모로 의회가 개최한 Bitahnag Camp 참여했습니다. 그곳에서 Jabidah 학살과 방사모로 투쟁 기념행사를 가졌다.

 

(참고자료 : Jabidah 학살에 대하여

자비다 학살은 1968년에 발생했는데, 본격적인 모로 무장 투쟁을 가지고 학살로 유명합니다.

외대에서 출판한 ‘필리핀’에서 설명한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바(sabah)’를 둘러싸고 말레이시아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던 필리핀 군부(마르코스) 사바에 비밀침투공작을 위해 사마르 출신 모로 군인 30명에게 군사작전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형제 무슬림 나라인 말레이지아를 공격할 없다며 저항하였지요. 이에 대해군부는 이들 전원을 마닐라 입구의 꼬레지도르 섬에서 명령불복종죄로 전격 처형하였습니다. 자비드 사건은 모로 사회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모로에 대해 필리핀 국가와 군대가 가하는 명백한 차별대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자가 카술루탄 4 활동 보고

 

1. 자가 카술루탄은, 인권단체 CBCS(Consortium of Bangsamoro Civil Society), 발라이(Balay Rehabilitaion, http://www.balayph.org) 함께, 국내난민 권리와 아동권에 관한 워크샾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워크샾은 CBCS 네트워크 회원단체를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술루섬에서 평화, 인권운동을 하는 자가 카술루탄은 CBCS 네트워크의 멤버이기도 합니다.

 

2. 두번째 주에는, 인다나시의 Bud Timahu에서 폭격과 군사공격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역을 방문 조사를 했습니다. 주민들의 협조로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사고로 9명이 사망했고(여성 4, 남성 5), 6명이 상해를 입었다. 자가 카술루탄은, 코코이 투라위(Cocoy Tulawie) 도움으로 긴급하게 형사고발을 했고, 증인과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3. 자가카술루탄 활동가 2명이 잠보앙가 시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활동가 전원은 술루 홀로에서 방사모로연대포럼 개최한 Charter Changes Issue 심포지엄에 참여했습니다.

 

4. 그리고 4 지역에서 인권감시 활동을 했습니다.

 

5. 미군이 5월에 군사 훈련을 위해 술루섬의 마임붕, 파나마오, 팡리마, 타힐, 파티쿨에 다시 들오올 것이라는 소문으로 주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6. 참고로, 재정 부족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많은 교육과 활동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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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버마, 희망을 말하다

사진전 | 버마, 희망을 말하다.

 

2006년 5월 4일부터 21일까지
대안공간 스페이스 피스

 

전시기획 : 이상희, 유해정, 황지성
사진 : 김영란


 

태국 북부 메솟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검문소 6곳을 통과하고 나니 차는 좁은 산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강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이 작은 모에이(Moei)강을 경계로 땅은 태국과 버마로 나뉩니다. 차에서 내려 보트로 강을 건너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레퍼허 마을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 대나무로 지은 버마의 전통가옥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레퍼허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5년 전. 그들은 모두 지난 40여년 동안 버마 군부독재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의 피해자들입니다. 버마 군인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가족이 살해당하고, 개발과 점령이란 미명하에 강제노동과 강제이주를 당해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이지요.

 

 

레퍼허에서는 누구나 하루에 두 끼를 먹습니다. 손님에겐 계란 후라이가 특식으로 주어지지만 이 마을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추장격인 양념하나로 밥 한 공기를 헤치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때론 나뭇잎을 따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정과 연민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네 개떡은 어른 아이 모두에게 ‘별미’ 중 별미이지만, 합창대회 상품으로 탄 손바닥만 한 개떡을 누구랄 것도 없이 엄지손가락만큼 떼어 스무 명의 친구들과 나눠먹을 줄 아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재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노랫소리 하나에도 전멸 당할 수 있는 마을에서, 언제 버마군이 휘두르는 폭력의 희생자로 사라질지 모를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버마 정부의 소수민족 배제 정책에 순응하며 폭력에 비굴해지면 지금보단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고국을 버리고 태국으로 넘어가 난민캠프에서 살면 조금 갑갑해도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오나 맘 졸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들은 자유와 버마를 갈망합니다.

 

5년 동안 3번의 버마군 침입을 경험하면서 마을은 전소되고, 정글에서 몇 일간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면서도, 그들은 카렌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존엄성과 해방된 세상을 위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아이들 역시 그곳에서 평화를 노래합니다.

 

 

"군인이 될 거예요" 꿈이 뭐냐는 질문에 한 꼬맹이가 자랑스럽게 답합니다. 옆에 있는 친구의 꿈도 같습니다. 이제 열 살로 보이는 친구들입니다. 레퍼허 교장선생님 레인보우의 꿈도 군인이 되는 거였답니다. 집을 불태우고, 가족과 이웃을 때린 버마군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서였답니다. 하지만 총으로는, 죽임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습니다.

 

해서 그는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건설하고 학교의 지붕을 올렸습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마을이 조금씩 변하고 사람들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버마군의 폭력을 목격한 아이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복수를 위해 군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씩 절망에 빠진다고 합니다.

 

 

억지로 끌려간 아이가 더욱 많겠지만 서도 버마 정규군에만 18세 미만의 소년병이 5~8만 명에 이른답니다. 반군진영엔 어느 정도의 소년병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채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겠다며 군 막사를 기웃거리는 것은 여기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분쟁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많은 버마인들이 태국국경을 넘습니다. 5만 여명의 버마 난민들이 가로 2km, 세로 0.5km의 난민촌에서 살아갑니다. 사생활이 없을 만큼 비좁은 땅에서 이들은 벌써 스무 해를 넘게 살았습니다. 언제 다시 떠나야할지 몰라 챙긴 피난 꾸러미들은 아직 풀러지지 못했습니다. 태국 경찰의 허가 없인 난민촌에서는 단 한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난민촌 밖의 삶은 버마로의 추방이던지 아님 평생에 걸친 불법체류자 신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자라납니다. 긴 기다림 속에 길러온 물 한 동이의 목욕에 감사하고,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음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자신의 무게보다 무거운 대나무를 옮기면서 환하게 웃습니다.

 

태국에는 ‘전쟁은 수천 번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아름답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니 누군가 답하더군요. 아이들이 꿈을 꾸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버마의 아이들이 지금 꿈꾸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공간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더불어 삶을 아는 아이들이기에 그들은 버마의 희망입니다.

 

 

 

* 이 전시는 제10회 인권영화제 돋움행사로 기획되었습니다.

 

문의 : 02-741-2406~7 (인권영화제), 전시장 (02-735-5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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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카술루탄과 함께 새해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롭게 무엇을 시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거 같습니다.

올 한해도 복 많이 받으시고, 복 많이 지으시고, 행복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난 한 해 자가 카술루탄을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정보가 미비한 상태에서도 선뜻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자가 카술루탄과필리핀 활동가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필리핀이나 술루 상황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봄에 한국에 들어가면, 좀 더 밀착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잠시 태국의 새해 풍경을 말씀드리면,

이곳은 화려한 불꽃 축제로 새해를 시작하더군요. 별빛으로도 충분히 밝은 밤하늘에, 온갖 불꽃들과 소원을 담을 등들이 하늘을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태국은, 공휴일이 일요일이면 그 다음날인 월요일에 쉬는 아~~주 훌륭한 제도가 있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공휴일이지요.

 

그럼, 이제부터 자가 카술루탄의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

자가카술루탄 11, 12 보고서

 

 

1. 평화의 인사

 

많은 어려움과 장벽들이 존재하지만,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기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목적과 인내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2. 활동 내용

 

(1) 사실 조사(fact finding)

 

2005. 11. 11[1]. 2005. 11. 22[i]. 인다난(Indanan) 시에서 건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는데, 이를 위한 사실확인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2)구호 사업

 

계속되는 군사공격과 폭격으로 아무 일도 없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는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자가 카술루탄을 비롯한 연대 단체가 긴급 구호 조치를 진행습니다.

인권단체 발라이(BALAY REHABILITATION CENTER) 지원으로, 식량, 의료 구호 사업을 진행했는데, 인다난 지역의 90% 이상 주민들이 혜택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가 카술루탄은, 무력충돌 군사작전 중단을 요구하는 카톨릭 단체 CATHOLIC RELIEF SERVICES 회의 참가했습니다.

 

(3)2005. 11. 24., 민다나오 평화 주간을 기념하여 진행된 평화 행진에 참여했습니다.

 

(4)마임붕(Maimbung), 파티쿨(Patikul), 인다난(Indanan), 파나마오(PanamaoP) 지역 등의 상황을 모니터 했습니다.

 

 

3. 기타

 

현재 단체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건의 무력충돌을 조사 하는 과정에서, 활동가들이 군인들에게 심문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약간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4. 멀리서 저희 단체를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지원이 저희에게 힘과 희망이 되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술루(Sulu) 홀로(Jolo)에서 자가카술루탄 드림.

 



[1] 지난 보고서에서 말씀 드림.



[i] 사건 : 강제 소개, 충돌, 폭격,

 

피해자 : 부안사 마을(BARANGAY BUANSA), 바토바토 마을(BRGY BATO-BATO), 카가이 마을(BRGY KAGAY) 주민들

 


가해자 : 필리핀 군대 해군 3 대대, 육군 53, 33 보병대

 

사건 발생일 : 2005. 11. 22.

 

발생장소 : 술루섬, 인다난(Indanan) 부안사(Buansa) 마을

 

 

원인 : 군사작전, 정찰 과정에서 발생

 

 

사건 발생 경위 :

 

지난 2005. 11. 22. 오후 4시경, 부안사(Buansa) 마을 시티오 신당(Sitio Sindang) 주민들과 피난민들이, 정찰대 소속으로 보이는 군인들이 바토바토 마을에서 살람 군부대로 걸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군인들은, 살람 군부대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일부 주민들은 정찰대 소속 군인들에게 불법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

 

MILF 산에서 내려와 정찰대와 교전했다.

 

 

새로운 교전이 발생하면서, 시티오 신당(SITIO SINDANG) 지역과 인근 마을, 그리고 11 초의 무력충돌로 피난 사람들이 대거 몰려든 부안사(BUANSA) 마을의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전을 피해 자신들의 집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갔다. 대부분 그들은 시티오 마이단(SITIO MAIDAN), 시티오 마하바(SITIO MAHABA), 부안사 마을 해변가로 피난을 갔다.

 

필리핀 군대는 MILF 상대로 전면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이틀 연속, 지상과 육상에서 폭격을 가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시설이 파괴되어, 많은 난민을 발생시켰다.

 

피난민에 의하면, 11. 24. 필리핀 군대 헬리콥터가 공중폭격을 가한 , 오전 10시경, 군인을 가득 태운 군용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4명의 미군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군용트럭은 잠시 바토바토 초등학교에 멈춘 다음 카가이 마을로 향했다고 한다.

 

자가 카술루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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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기념하며!!

지난 1961. 12. 1 웨스트파푸아는 자체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와 국가, 국기를 정헀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완성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유엔, 제국주의 패권국가들의 공모하에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침략으로, 인도네시아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식민정책으로 약 10만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 안에 있음)

 

2004. 12. 1.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트리코라 광장에서 모닝스타(웨스트 파푸아 국기) 게양식을 가졌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반란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게양식에 참여한 두 명을 구속, 각 15년과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습니다. 단지 국기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말이죠.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웨스트 파푸아인들을 달래기 위해 만든 특별자치법에서 모닝스타게양을 허가했습니다.

 

올해는 많은 사람들이 차마 거리에 나오지 못하고, 교회에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해 모닝스타게양으로 15년을 선고받은 필립 까르마가, 현재 수감중인 교도소 옥상에서 모닝스타를 게양하였다고 합니다.

국가폭력이 결코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꺾울 수 없다는 것을, 인도네시아 정부가 하루 속히 인정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아래는 관련 기사입니다.

 

----------

 

Papua rebel leader flies flag in jail    joe collins 

  Dec 03, 2005 23:26 PST  

 

 

Papua rebel leader flies flag in jail

 

Jakarta Post.com December 04, 2005

Nethy Dharma Somba, The Jakarta Post/Jayapura

 

Although he spends his days and nights in a cramed prison cell, the spirit

to fight for Papua's independence still burns brightly in the heart of

convicted rebel, Filep Karma.

 

Disregarding the severe consequences, Filep proudly hoisted the Morning Star

flag on the prison's roof in Jayapura on Thursday as hundreds of Papua

independence supporters held street rallies to commemorate the independence

of Papua on Dec. 1.

 

The supporters themselves were prevented from displaying the outlawed flag

at Trikora field in town, as their attempts were successfully scuttled by

the Indonesian Police.

 

"I am being kept in jail, but it does not dampen my spirit to fight for

Papua's independence," Filep told The Jakarta Post. Filep, who was sentenced

to 15 years in prison earlier this year for committing state treason, said

he was willing to bear any consequences for his act.

 

He refused, however, to reveal who secreted the flag to him.

 

Filep climbed a building in the prison compound on Thursday afternoon and

waved the Morning Star from the roof while shouting "Papua Freedom!"

 

Chief of security at Abepura prison, Korneles Rumbairusi, said he had no

idea how Filep was able to climb the prison building and wave the flag, the

symbol of Papuan independence. He had no idea either as to how the flag was

smuggled into the prison.

 

Responding to the incident, chief of Jayapura police Adj. Sr. Comr. Paulus

Waterpauw said police were still investigating six security guards and a

woman convict who saw Filep waving the flag. "This stunt could very well get

him a fat sentence extension," Waterpauw asserted.

 

Filep was arrested last year for leading a ceremony commemorating Papua

independence on Dec. 1. He led a flag-hoisting ceremony in Trikora field in

Jayapura town, which ended with a clash between Papuan independence

supporters and Indonesian Police. Besides being jailed, Filep was also

discharged from his position as a civil servant with the Papua

administration.

Dec. 1 was declared Papuan independence day by separatists who proclaimed

the state of West Papua on Dec. 1, 1962.

            

 

 

--------------

 

Message from West Papua :

2 December 2005

 

"We only want Papua must be free"

 

This morning I stand near the road. Suddenly a lot of army from Java [came

by]. They just arrived by airplane.

 

All of Papua people think may be in Papua [there will be] a big war again.

Yesterday Philip Karma raise up Papua flag again in Jail.

 

All Papua make prayers only in chruch because many army not allow us to make

prayers in field.

Brother.... We don't want anything, we just want be free form Indonesia.

 

We also want to build up the peace in the world. We want to keep the world

safe all the time.

I respect you cos your members like to support us.

 

Please not stop to press Indonesia that they must get out from West Papua.

We only want Papua must be free.

 

Papua Merdeka!

 

Best Regard

[name removed]

  

Richard Samuelson

Free West Papua Campaign

Oxford, U.K.

 

E-Mail: samo-@aol.com

Tel: +44 (0)1865 241200

www.freewestpapu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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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카술루탄의 소식입니다.

자가 카술루탄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11. 11.부터 다시 술루에서 무장 충돌이 발생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가 카술루탄이 보낸 메일과 Mindanews에 실린 관련 기사를 정리해서 같이 보내드립니다.


 

(술루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집입니다).

 

 

1. 자가 카술루탄이 보낸 메일.

 

안녕하세요.

 

2005. 11. 11. 술루 섬의 Buansa Indanan에서 정부군과 MNLF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500여 가구가 집을 떠나 Buansa 초등학교에 임시 대피해 있습니다.

2005. 11. 12.에는 Panamao 시에서 다시 해군과 MNLF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840여명이 집을 떠나 Seit higad 구역에 임시 거주하고 있습니다.

자가 카술루탄은 11. 16. Indanan에 가서 정보를 취합하고 이들 난민의 상황을 조사하였습니다.

구호 사업을 마친 뒤 10월 보고서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을 매우 좋아하는 필리핀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술루 섬의 아이들은 낯선 이방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그들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습니다...)

 

2. 술루 상황 관련

 

자가 카술루탄으로부터 술루 상황에 대하여 직접 연락을 받으려고 시도해보았으나, 술루 자체의 통신 시설이 매우 열악한데다가, 팩스나 인터넷 사용도 쉬운 일이 아니라, 우선 민다뉴스 기사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자가 카술루탄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참고로, Mindanews는 필리핀의 민다나오 이슈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진보적인 신문입니다.

(사이트---)

 

(1)2005. 11. 14. 기사

 

필리군의 South Command 대변인 Col.Domingo Tutaan에 의하면, 아부사야프(Abu Sayyaf)  지지세력들이 11. 12. 해군 Battalion Landing Team-4의 기지에 폭탄 공격을 했고, 일요일 밤 10시 30분 경에 진행된 공격으로 해군 한 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아부사야프 지지자들이 Indana의 상황을 돌파하고자 해군에 폭탄 공격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군의 공격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South Command에 의하면, 11. 11. 정부군의 공격으로 아부사야프 리더 Gumbahali Jumdail, aka Doctor Abu Pula와 약 80여명의 부하들이 Indnana마을 근처 Tumatangis에서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한다.

 

Abu Pula는, 아부사야프 작전 참가, 21명의 외국인 납치 등 21건으로 현재 기소, 재판 진행 중이다.  

 

(2)2005. 11. 15. 기사(1)

 

MNLF(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는, 정부군이 술루에서 아부사야프 무장그룹과 교전했다는 정부의 발표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MNLF 중앙 사무총장 Ustadz Murshi Ibrahim은 민다뉴스와의 핸드폰 인터뷰에서, 정부군이 MNLF를 공격대상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했다고 이야기했다. 

군사작전 5일 째 Sulu Indana Kapok에 있는 아부사야프 무장 세력 캠프를 포위했다는 정부군의 발표가 있는 가운데,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되었다.

 

Ibrahim은 필리핀 정부군이 11. 11. 오후 4시 30분경, MNLF 의장 MG Khaed Ajibon의 거주지로부터 약 500미터 떨어져 있는 MNLF 무장세력의 근거지를 공격했다고 이야기했다.

 

탱크 한대, Simba, 트럭 한대가 파괴되었다. 정부 주장과는 달리 이번 전쟁은 필리핀 군대와 MNLF 무장 그룹과의 전쟁이다. 아부사야프 그룹에서는 단 한사람도 전쟁에 개입되지 않았다, 정부군은 11. 12. 정부군에 강력히 저항한 Talibang, Ligtang, Upper Pansul 등에서 MNLF 무장세력을 공격하였다고 이야기했다.

 

정부군의 South Command 대변인 Col.Domingo Tutaan은 11. 15. 민다뉴스에, 아부사야프에 대한 공격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11. 12. 53연대가 Sulu Indanan Kapok에 있는 아부사야프 무장 그룹의 주둔지를 공격했는데, 그 캠프에는 약 60여명의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15개의 벙커가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3)2005. 11. 15. 기사(2)

 

술루 지방정부는 이번 전쟁으로 발생한 피난민들 수백 가구를 구호하기 위하여 Provincial Disaster and Coordinating Council (PDCC)을 가동했다.

 

지방정부의 Loong은, 피난처와 난민 센터에 거주하고 있는 국내난민들에게 식량을 배분하고 있다고 전달했다.

 

470여가구가 교전지역인 Indanan을 떠났는데, 이 중 200가구는 Bato-Bato에 있는 쉼터에, 150가구는 Buanza에, 120여가구는 Andigi 난민센터에 있다.

 

(4)2005. 11. 24. 기사

 

시민단체 CCS(Conerned Citeinzens of Sulu)는, 정부-MNLF 전쟁에서 미군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의회에 이에 대한 조사를 촉구했다.

CCS의 의장이자, 민다나오 대학의 전 총장이던 Samsula Adju는, 민다뉴스(Minda News)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지난 11. 11. 술루 Indanan Buansa에서 발생한 전쟁에 30명의 미군이 전쟁을 지휘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이번 전쟁은 아부사야프 그룹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부 발표와는 달리, MNLF를 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원의원 Aquilino Pimentel은, CCS로부터 정식으로 조사 요청이 들어온다면, 술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민다나오 부대변인인 Gerry Salapuddin도, ‘Visiting Forces Agreement’ 하에서, 미군은 전쟁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잠보앙가에 주둔하고 있는 Public Affairs Officer of Joint Special Operations Task Force Philippines의 미군 Mark Zimmer는, 미군의 개입이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민다뉴스에 답변했다.

그는, ‘술루와 필리핀 남부 다른 지역에서 미군의 역할은 전혀 변경되지 않았다. 우리는, 필리핀 군대를 지원하고 훈련시키며,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군의 술루 주둔 근거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일반 조항에 근거하여….필리핀 정부가 요청했기 때문에 주둔하고 있다. 술루에는 2005. 9. 5. 도착했다. 시민-군사작전(civic-military operation)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미군 규모에 대해서는, 계절이나 임무에 따라 변경된다고 하면서, 정확한 규모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Adju는, 정부보고와는 달리 정부군이 Abu Sayyaf를 추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MNLF 지역을 공격한 것이라도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MNLF와 1996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MNLF는, 정부가 협정의 내용을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MNLF의 의장 미주아리(Misuari)는, 2002. 1. 수뢰 혐의로 구속되어 있는 상태이다.

Adju는, 11. 23. Indanan 지역에서 4대의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했는데, 그 중 2대는 OV-10 비행기이고, 나머지 2 대는 미군 비행기라는 것이 보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의회의 조사를 촉구했다. 한편 이에 대해 Zimmer는, ‘미군 비행기와 관련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작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Adju는, ‘한 농민이 길을 잃은 두 명의 병사를, Tagbak 마을에서 Timbangan으로 안내했는데, 이 지역 모두 Indanan에 있다. Tagbak은, MNLF의장의 캠프로부터 약 3킬로미터 떨어져있고, 술루로부터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군인들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소속은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11. 23. 기자회견에서 전 인권위원회 위원이자 Union of Muslims for Morality & Truth(UMMAT, 무슬림 지도자, 전문가 그룹)의 의장인 Nasser Marohomsalic 변호사는, 술루를 포함한 필리핀 전역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UMMAT는, ‘최근 술루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거부정, 부패와 관련하여 여론과 언론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한 아로요측의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미군의 이해관계도 부정할 수 없다. 술루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술루 바다는,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세 나라에 맞닿아 있는 Sulawesi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최근 세 나라는 제마 이슬라미아(Jemah Islamiah)를 선제공격하기 위하여 Coast Watch South라고 불리는 대테러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주둔은, 필리핀과 민다나오 주권에 불필요한 개입만 될 뿐이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이 단체는 2005. 11. 20. 이미 671가구의 피난민을 발생시킨 전쟁을 당장 중단하라고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2005. 2. 술루 전쟁으로 50,000명의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2003. 2. 피킷, 북부 코타바토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400,000명의 국내난민이 발생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필리핀 군부가 아부사야프, 제마 이슬라미아를 이유로 군사작전을 수행하나, 실제는 MNLF를 진압하고 전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술루의 시민들과 단체들, 그리고 인권단체들이 정전협정을 요구했으나 남부 사령관이 이를 거절하였다며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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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단체 자가카술루탄 활동소식(9월)

자가 카술루탄(Jaga kasulutan)

 

- 9 활동 소식 -

 

 

 

1. 들어가면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진보는 의식있는 시민들이 함께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희망을 잃어버린 방사모로(필리핀 무슬림)에게 힘을 있다는 꿈을 가지고, 주어진 과제를 효율적으로 진행하였다.

방사모로의 삶은 왜곡되어왔고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다. 우리는 방사모로의 삶을 차원 높이고, 폭력을 예방하며, 폭력피해자들이 회복될 있도록 활동하고 있다.

 

 

2. 활동 내용

 

(1) 활동하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인내심과 헌신성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평화를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

 

(2) 우리는 CBCS(코타바토 지역에 위치한 방사모로 시민단체) 진행하는 18 미만 아동에 대한 무상 진료 치과진료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의 정보를 취합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유니세프가  CBCS 단체를 통해 아동 구호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국내 난민 아동상황을 모니터하였다.

 

3. 단체 상황

 

(1) 술루 상황을 정확하기 파악하기 위하여 전문가 그룹 구성을 준비하고 있다.

 

(2)시민들이 스스로 평화를 일궈내고 인권을 누리기 위하여 무엇보다 평화, 인권교육이 필요한데, 이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고민하고 있다.

 

4. 주요 현안에 대하여

 

술루 섬의 주요 현안은 다음같다.

 

우선, 술루 미군 주둔 문제이다. 술루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심지어 지역공무원들도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으나, 미군은 우리들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참고로, 미군은 1899. 5. 19. 필리핀을 침략했는데, 1946 술탄지역인 민다나오와 술루를 임의로 필리핀에 합병한 필리핀 정부에 양도하였다. 방사모로는, 사건을 민다나오, 술루 분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미군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길다)

 

둘째, 발생률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셋째, 가난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물가는 계속 상승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먹고 사는 조차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탄핵논의로 가난 문제는 심각해 지고 있다).

 

넷째,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학살 역시 계속 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술루 문제는 해결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심각해 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되리라 기대하며,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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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단체 자가 카술루탄 활동 소식(8월)

자가 카술루탄(Jaga kasulutan)

 

- 8 활동 소식 -

 

 

1. 활동 내용

 

 

(1)2005. 8. 첫째 주에 술루 Darayan Patikul에서 코타바토에 위치한 시민사회단체 CBCS 함께 구호 사업을 펼쳤고, 인권침해 상황을 조사하였다. 곳은, 군인들의 체포 위험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다.

조사가 진행된 , 비가 많이 왔고, 군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주민들의 협력으로 필요한 내용들을 충분히 조사할 있었다.

 

(2)Maimbung 여러 바랑가이에서 205. 8. 6. 선거 교육을 진행했다.

그리고, ARMM 선거일인 2005. 8. 8. 선거 모니터를 했다.

 

(3)술루  Bato-bato Indanan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정보를 입수하고, Pagtabangan Basulta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한 사건 평가 문제제기를 위한 연대회의등에 참여했다.

 

(4)2005. 8. 28. Tagabak Indanan 에서, 분쟁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의 바랑가이 대표들, 공무원, 무슬림 지도자 등을 조직하고, 분쟁해결에 관한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15명이 참여했다.

 

2. 단체 상황

 

의사결정과 기획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여러 교육 프로그램과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Pagtabangan Basulta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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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 긴급 요청문입니다.

지난 1963 인도네시아에 의해 군사점령을 당한 이래 지난 50 동안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웨스트 파푸아 점령을 합법화한 지난 1968~69 Act of ‘Free’ Choice(국민투표법) 문제점을 지적하고 과정에서의 유엔의 역할(책임방기) 대한 검토를 요구하는 내용의 서한에 힘을 모아달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서한은 각국의 시민사회의 서명을 받아 유엔 사무총장 앞으로 전달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서한을 읽어보시면 듯하고요, 아래의 서한 취지와 내용에 동감하신다면 아래 주소에 접속한 서명하시고 참여의사를 밝히는 메일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www.petitiononline.com/unreview 

 

서한은 웨스트 파푸아의 해방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West Papua Action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West Papua Action

134 Phibsborough Road, Dublin 7, Ireland

http://westpapuaaction.org

+353 (0)1 860 3431

 

웨스트 파푸아와 관련한 국내 기사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인권하루소식>(아시아 민중현장의 목소리), 민변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2005. 5~6/7~8 ), 다산인권재단의 <사람>(2005. 8 ) 참고하시면 됩니다.

 

 

 

유엔 사무총장 귀하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우리마저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각국 의회, NGO들과 함께 활동하는 우리는 1968~69 웨스트 파푸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법(Act of ‘Free’ Choice) 제정 시행 과정에서 유엔이 역할과 활동에 대하여 재검토해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웨스트 파푸아는 지난 50 동안 인도네시아 군부에 의해 점령돼왔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점령 기간 동안 웨스트 파푸아인들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와 과오들을 계속하고 있다. 1963 인도네시아 강점이 시작된 이래 최소 100,000여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점령 과정에서 살해당했고, 체계적인 인권침해가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사법제도를 통하지 않은 살인과 강간, 고문, 불법적인 체포와 구금, 집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 그들 본연의 책무를 자유로이 추구하려는 비정부기구·인권단체와 국제 감시 기구 대중매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의 방해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69 독재자 수하르토는 1,022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을 선발하여, 인도네시아 합방에 찬성하는 투표를 강요했다. 그리고 공개적이고 만장일치로 그들이 바라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웨스트 파푸아의 인구가 800,000명이었는데, 투표에 참여한 수는 단지 1/10 불과했다.   

 

당시 투표 광대극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불법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불법적인 권력 양도 절차에 참여했던 이전 유엔직원 차크라바씨 나라시만(Chakravarthy Narasimhan) 당시 투표 과정이 속임수였다고 인정한 있다. 그는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당시 유엔 분위기는 가능한 빨리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무도 웨스트 파푸아 안에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당한 백만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모든 유권자들이 인도네시아의 지배에 대해 찬성할 있었겠는가? 민주주의에서 만장일치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라고 말한 있다.   

유엔은 1962 8 15 유엔 본부에서 인도네시아와 네델란드 사이에 체결된 뉴욕 협약 관련해 당시 투표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엔은 뉴욕 협약과 관련해 본연의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1969 7 영국 외교단의 대표는 당시 유엔 회원국의 대다수는 가능한 빠르고 문제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유엔 사무국 역시 단지 가급적 빠르고 유연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1962~69
사이에 3만여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살해되었으며, 투표 당시 웨스트 파푸아는 공포와 위협의 분위기가 만연했다. 게다가 당시 유엔 상임위원회의 대표 오리쯔 산쯔(Ortiz Sanz) 투표 관련해 작성한 보고서는 다음의 점을 언급하고 있다. “국민투표(an act of free choice) 인도네시아의 질서에 따라 진행됐다. 하지만 뉴욕협정은 투표는 국제적인 질서에 따라야 한다 규정하고 있다. 당시의 국제적인 질서가 무엇인지는 1960 유엔 총회결의안 1541(XV)에서 확인할 있다. 결의안에서는 국가간 영토의 통합에 대하여 사람들은 영토가 통합될 경우 그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공정하고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보통선거에 기초해 그들의 의사를 자유로이 표현할 있어야 한다 명시했다.

하지만 투표 관련된 보고서를 검토한 유엔총회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모순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이미 2002 3 26, 문제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서면이 유엔사무총장에게 제출됐었다. 요약본은 아래의 홈페이지 주소(http://westpapuaaction.buz.org/unreview)에서 확인할 있으며, 자세한 배경은 Dr. John Saltford 유엔과 인도네시아의 웨스트 파푸아 강점, 1962~69‘에서 찾아 있을 것이다.

 

2004 해제된 미국 기밀문서와 Brad Simpson 의해 작성된 문서(http://www.gwu.edu/%7Ensarchiv/NSAEBB/NSAEBB128/index.htm) 사이의 공모 한층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자카르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1962 7 2 미국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95%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있으며 ‘Act of Free Choice’ 기만적인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UN팀의 비공식적인 견해다”.

2004 3, 인도네시아 호주 대사 삼바 시아기안(Sabam Siagian)역시 1969 실시된 ‘Act of Free Choice’ 적법한 민주주의 투표로 없다고 말했다.

2004 12 영국외교부 장관 역시 당시 투표에 참여했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 웨스트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에 통합되길 바란다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국회에서 시인한 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의 웨스트 파푸아 합방 과정이 뉴욕협약에 위반되고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한편,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비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68~69 웨스트 파푸아에서 실시된 Act of ‘Free’ Choice”에서의 유엔의 역할에 대해 재검토해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2005 10

(번역은 인권운동사랑방의 유해정님께서 해주셨습니다)

 

 

 

To: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To: Secretary General
United Nations
UN Plaza
New York NY 10017, USA

Appalled by the ongoing suffering of the people of West Papua, we join a growing list of international parliamentarians and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and call on you as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to initiate a review of the UN’s conduct in relation to the “Act of ‘Free’ Choice” in West Papua, 1968-69.

West Papua
has entered its fifth decade of occupation by the Indonesian military.

Crimes against humanity have been and continue to be perpetrated against the West Papuan people. An estimated minimum of 100,000
West Papuans have died since Indonesia
took over in 1963. There have been systematic violations of the human rights of West Papuans at the hands of the Indonesian regime, including extra-judicial killings, rape, torture, arbitrary arrest and detention, violations of the rights of freedom of assembly and freedom of speech, and denial of free access to NGOs, human rights groups, international observers and the media to freely carry out their work.

In 1969, instead of a proper independence referendum, 1,022
West Papuans were rounded up and forced to declare – unanimously and in public – their “wish” to integrate West Papua into the Republic of Indonesia
, then ruled by the brutal dictator Suharto. The population at the time was estimated at some 800,000 people, so a fraction of one percent of the people took part.

The Act has been widely dismissed as a farce, yet no action has been taken to redress the injustice to date.

Former United Nations Under-Secretary General Chakravarthy Narasimhan, who handled the takeover, has since admitted that the process was a “whitewash”:

“It was just a whitewash. The mood at the United Nations was to get rid of this problem as quickly as possible… Nobody gave a thought to the fact that there were a million people there who had their fundamental human rights trampled… How could anyone have seriously believed that all voters unanimously decided to join his [Suharto’s] regime?… Unanimity like that is unknown in democracies.”

The United Nations had certain responsibilities in relation to the Act, as specified in the New York Agreement, an international agreement signed at UN Headquarters by
Indonesia and the Netherlands on August 15, 1962
. However there is strong evidence that the UN failed to fulfill its obligations under the Agreement. A representative of the UK mission to the UN said in July 1969:

“Our strong impression is that the great majority of United Nations members want to see this question cleared out of the way with the minimum of fuss as soon as possible… the Secretariat, whose influence could be important, appear only too anxious to get shot of the problem as quickly and smoothly as possible.”

In the years 1962-69, an estimated 30,000
West Papuans
were killed and an atmosphere of fear and intimidation pervaded the country at the time of the Act.

Moreover, in the report of the Act by the then UN Secretary-General’s Representative Ortiz Sanz, it was stated that “an act of free choice has taken place… in accordance with Indonesian practice”. The New York Agreement referred to “in accordance with international practice”. Evidence of what was considered international practice at the time can be found in UN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541 (XV) of 1960. This Resolution states that the integration of one territory with another should result from the “freely expressed wishes of the Territory's peoples acting with full knowledge of the change in their status, their wishes having been expressed through informed and democratic processes impartially conducted and based on universal adult suffrage". This crucial discrepancy was not pointed out to the UN General Assembly, which voted to “take note” of the report of the Act.

Detailed substantiating documentation on the case for a review was presented to your office on
26 March 2002
.

An outline briefing is available at http://westpapuaaction.buz.org/unreview and more background detail is provided in “The United Nations and the Indonesian Takeover of West Papua, 1962-1969” by Dr. John Saltford.

De-classified
US documents released in 2004 and edited by Brad Simpson available at http://www.gwu.edu/%7Ensarchiv/NSAEBB/NSAEBB128/index.htm have further underlined the complicity. The US Embassy in Jakarta for example told the US State Department in a cable dated July 2, 1969
that “[private] political views of the UN team are… 95 per cent of the Irianese support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hat the Act of Free Choice is a mockery”.

Former Indonesian Ambassador to Australia Sabam Siagian said in March 2004 that the Act of Free Choice in 1969 was never viewed as a truly democratic exercise.

In December 2004 a British foreign office minister admitted in parliament that the handpicked representatives were coerced into declaring for inclusion in
Indonesia
.

Given the overwhelming evidence, and appalled by the ongoing suffering of the people of
West Papua, we therefore call on you as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to initiate a review of the UN’s conduct in relation to the “Act of ‘Free’ Choice” in West Papua, 1968-69.

Sincer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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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 역사

웨스트 파푸아의 침략과정을 잘 분석했습니다.

번역을 해서 올려야 하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단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웨스트 파푸아와 관련하여 자료를 번역하고 같이 고민할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아....친구가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고 뭐라 하네요^^.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재정 지원을 부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거 같은데...시간을 부탁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네요...

웨스트 파푸아에서 만난 한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solidarity keeps us alive..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를 상징하는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15년형을 선고받아야 하고, freeport라는 다국적 광산 기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인도네시아 군부는 채광 지역 일대의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환경과 문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분위기는 숨쉬는 것 조차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조차 그들을 외면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정말 위대한 존재인거 같습니다. 인도네시아가 그들을 억압할 수록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 살아나고 있으며,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집회 현장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었다가,  경찰서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은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왜 운동을 하느냐고....'나는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고, 그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웨스트 파푸아에 함께 하실 분들은 저희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hkshlee72@naver.com으로 연락 주시거나, 이 블로그에 연락을 남겨주셔요.

 

저희는, 유해정, 이상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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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ed for understanding Papua's history, grievances*

*Carmel Budiardjo*, London

It has been asserted in your columns this week (/Local Elections and
Papuan Politics/, July 11, 2005) that because the majority of West
Papuans participated in general elections in 2004, they were therefore
participating in an internal referendum. The writer also claims that
they participated in an external referendum, known as Pepera (the
so-called Act of Free Choice) which took place in 1969.

He did not dispute the fact that only one thousand Papuans participated
in Pepera but alleged that because the result was endorsed by the
United
Nations, the Indonesian government was justified in "relying on the
results of Pepera" for its claim that West Papua is a legitimate part
of
the Indonesian Republic.

In the first place, to liken general elections to a referendum shows
the
shallowness of this analysis. Elections are about choosing
representatives of different political parties which in today's
Indonesia consist of nearly fifty parties. Whereas a referendum is the
occasion for the electorate to choose between two or more options, and
opinions often cross party lines.

Whether or not people participate in elections relates not only to
making choices about party programs but may also be generated by fear
or
anxiety that by not participating, they could face accusations of
separatism or sedition.

Recent events in West Papua, such as the military operations underway
in
the Central Highlands district of Punjak Jaya, which forced thousands
of
villagers to take refuge in the forest, abandoning their homes and
gardens, suggest that fear of the authorities still plays a role in
people's decision about participating in political events.

Now that Indonesia has entered an important new political era in which
democratic rights are recognized as one of the basic rights of the
population, it is strange that someone who presumes to have the
expertise to hold forth about political affairs fails to recognize that
the Act of Free Choice conducted by the Indonesian authorities in the
Soeharto era was anything but democratic.

At the time of the Act, the population of Papua was estimated as being
a
little over 800,000, yet no one disputes the fact that only one
thousand
persons (to be precise, 1,022), not even one per cent of the
population,
participated in that Act.

The Act was conducted following the New York Agreement of 1962 which
was
concluded as the result of intervention from Washington which feared
that Indonesia, then under President Sukarno, was getting too close to
the Soviet bloc. The agreement was concluded between Indonesia and The
Netherlands, without Papuan participation or consultation.

As a result of Dutch insistence, it included a clause providing for an
Act within six years that should be held in accordance with
"international practice" This can surely only mean one thing, namely
the
principle of "one man, one vote".

The issue of West Papua was discussed in the House of Lords last
December. On that occasion, the Bishop of Oxford asked the British
government for its views about the Act of Free Choice which he had
described as being an occasion when a thousand representatives "were
coerced into declaring for inclusion in Indonesia".

Replying for the government, Baroness Symons said: "He is right to say
that there were 1,000 handpicked representatives and they were largely
coerced into declaring for inclusion in Indonesia". One can hardly
disregard the views of the British Government, stated in the country's
highest political forum.

As we know here in the UK, the British government is closely following
events in West Papua, not least because a major British company, BP,
has
decided to invest massively in the exploitation of West Papua's vast
reserves of natural gas. While seeking to promote this investment, the
government has not refrained from acknowledging that the way in which
the territory was incorporated into the Indonesian Republic was
seriously flawed.

West Papua has now been officially part of Indonesia for more than
thirty years, or even longer if you include the six years following the
Dutch withdrawal in 1963, yet the sense of grievance still runs deep.

When President Susilo Bambang Yudhoyono made a visit to West Papua last
December, shortly after his inauguration and after saying that the
resolution of the conflict in West Papua was "one of his top
priorities", the leaders of all the churches there decided to boycott
the visit. As far as we know, not even during the worst days of the
Soeharto era did such a thing ever happen.

No one should make the mistake of disregarding the views of the
churches
in West Papua which have always played a prominent role and have always
acted in the best interests of the largely Christian population.

There are many serious problems in West Papua, not least the confusion
created by the government's decision first to establish Special
Autonomy, and then to split the territory into three or perhaps even
into five provinces. Allegations are being made that money intended for
running the special autonomy administration is being used to cover the
cost of ongoing military operations.

There is also concern that the continuing influx of migrants from other
parts of Indonesia is turning the Papuans into a minority in their own
homeland. In some of the major cities such as Jayapura, this is already
true.

It may be true that events in West Papua are too infrequently reported
in Indonesia's national media which perhaps accounts for a great deal
of
misunderstanding about conditions there. We can only hope that this
will
be speedily remedied.

In particular, commentators should play closer attention to the events
in the 1960s which lie at the root of the grievances of the people of
West Papua.
/The writer is the founder of the Indonesia Human Rights Campaign, set
up in 1973./

--
Jan Lozano
Databank Staf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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