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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다

한국, 기억속에서 지우고 싶다

 

살다보니 "잘 지내세요?"라는 그 평범한 질문마저도 아주 특별해지는 순간이 있다. 너무도 일상적인 인사에 망설임을 느낄 때, 삶은 다른 모습으로 옆에 서 있다. 필리핀에 오면 꼭 한번 만나고 싶었으면서도 과연 무엇을 말하고 물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혹여 우리의 방문조차 지난 상처를 헤집는 잔인한 행동이 될까 두려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못 만날 인연’이란 말로 주저하는 길동무를 설득시키고 함께 약속장소로 향하던 그 길은 왜 그리도 아득하던지.


“하이(Hi)” 긴 생머리에 환한 미소를 가진 여성이 내 길동무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동안 헤어진 친구들이 다시 만난 것처럼 3년 만에 사건 의뢰인과 소송을 도와주었던 이가 필리핀 땅에서 만났다.


길동무와 에미(가명. 28)가 처음 만난 건 지난 2002년 여름. 에미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중개인의 말을 믿고 예술흥행비자(E-6)를 발급받아 다른 필리핀 여성 10명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고단한 삶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성매매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확언과 가난을 탈출할 발판이 될 수 있을 임금보장을 약속받은 터라 클럽 무용수로 일하는 모욕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한국 땅에 도착해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뺏기고,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돼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는 방에 갇힌 다음은 이미 늦은 뒤였다. 동두천에서 그렇게 석달을 살았다. 브래지어와 짧은 미니스커트만 입혀져 손님 테이블에 앉혀지고 매일 할당량의 매상을 올려야만 했다. 이를 채우지 못하는 날엔 한없이 무대에 서 있는 벌을 받아야했다. 잠시 앉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의자가 날라 오거나 욕설과 뭇매가 쏟아졌다. 두 아이의 엄마라고 울부짖었지만 손님방에 들여보내져 윤락행위를 강요당했다. 학비를 마련할 욕심에 나이를 속여 한배를 탔던 16살의 필리핀 소녀 아마도 더러운 밤을 피해가진 못했다.


그렇게 한국은 잔인한 땅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런 정황이 필리핀 대사관에 알려져 구조되긴 했지만 억울함을 채 토해내기도 전에 윤락행위방지법 위반으로 강제추방됐다. 대사관과 길동무 등의 도움을 받아 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600만원의 피해보상 판결을 받아내긴 했지만 승소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월급은 고사하고 10원짜리 동전 하나 받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땅에서 호텔 밴드로 일하면서 에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을 제외하곤 한국은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공간이다.


이를 모르지 않기에 길동무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몇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지옥으로 보낸 이에게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는 법정의 현실 앞에서, 그렇게 착취된 돈이 다른 사람 명의로 둔갑돼 집행조차 불가능한 ‘법’ 앞에서, 길동무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고개를 숙였다.


이런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법이 바뀌고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피해 외국인 여성이 소송이 끝날 때까지 적절한 보호 속에서 국내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되었다. 하지만 피해여성이 직접 피해를 입증해야하거나 혹자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그림자처럼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현실을 정의롭게 바꾸지 못하는 법이, 재판은 서류가 아닌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서로에게 작은 위로나마 될 수 있었을까?


이주노동자란 이유로, 혹은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월평균 70만원(여성부 2004년 실태조사)의 임금을 주고 휴일도 없이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성매매를 강요하는 업주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개비’와 불안전한 신분을 볼모로 행해지는 성매매가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그래도 세상 좋아졌다’ 말할 수 있을까?


힘들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에 웃을 수 있다는 에미의 환송에 이별을 고했다. 재판당시에는 피해를 지켜볼 수밖에 없음에 마음이 무너졌는데, 지금은 에미의 딸들에게 대물림될 가난과 제2, 제3의 에미를 매일 만나면서도 달라질 줄 모르는 암담한 현실에 더 큰 방관자가 된 것 같다는 길동무의 씁쓸한 고백을 안고. 오늘도 발걸음이 무겁다.


<출처 경향신문. 필리핀 퀘존시티에서2005. 5. 13. by 봄날>

 

<현재 에미가 살고 있는 집>

 

 

<에미네 집 거실에 놓여져 있는 신랑 각시 인형.. 그렇게 행복하게 에미가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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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따따 2

내 친구 따따, 그 두 번째 이야기



“아, 따따 보고 싶다” 이건 불치병이다. 고작 1주일 다바오에서 떠나있었을 뿐인데, 말도 잘 안 통하고 게다가 나를 골려먹을 궁리만 하는 따따가 보고 싶다니. 그것도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번번이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날 올 적마다 따따가 생각나다니, 이건 분명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다.

말로 뱉어낸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전화를 걸어본다. ‘뚜~ 뚜’ 전화는 종일 통화중이거나 아무도 받는 이가 없다. 진작부터 주인장이 딸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갈 계획을 잡고 있었던 터라 허공에 울리는 전화벨 모양새에 주인장이 서울로 떠났음을 알아챈다. “살판이 났겠구만. 이제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다닐 수 있을까” 쩝하고 궁시렁 거려보지만 입가엔 묘한 웃음이 감돈다.

일주일을 예정했던 마닐라 행은 마닐라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수빅과 클락 방문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졸지에 2주일로 불어나버렸다. 3월 한국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들과 어울리면서 필리핀이 아닌 ‘한국’인 것처럼 살았던 1주일은 모두 끝나버렸다. 모처럼 맛보는 한국 음식에 넋이 나가 허리살 부는지 모르고 음식에 눈독을 들이던 날도, 역시 술은 ‘소주’가 최고라며 은근히 술자리를 탐했던 시간도, 영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데다 비슷한 일을 했던 이들을 만난 즐거움에 얘기가 잘 통한다며 끊었던 담배를 슬쩍 다시 집어 들었던 새벽도 안녕이다.

우리에 갇힌 새가 하늘로 비상을 시작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비행기의 차창너머로 탁 트인 바다와 끝없이 이어진 산맥,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다바오다” 나도 모르게 반가움과 안도가 흐른다. 없는 게 없는, 그래서 삶의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마닐라지만 서울과 닮았기에 ‘숨’이 막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따스한 햇살이 전해져 온다. 뜨겁긴 하지만 분명 마닐라의 햇살과는 다르다.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을 떠나 생면부지의 낯선 다바오 땅에 도착했을 때의 ‘평온’이 감돌면서 따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집안엔 잔치가 벌어졌다. 주인장 없는 틈을 타 따따가 그네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초대한 것. 도착할 것임을 알면서도 판을 벌였다는 것이 괘씸하긴 하지만 평생 못 누려보았을 ‘호사’임을 알기에 또 묘한 웃음이 스친다. ‘Oh, I miss you'라고 따따가 말한다. ‘진짜로’하며 얼굴을 찡그려보지만 금세 실토하고 만다. 나 역시 그리웠다고. 그렇게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하숙집 핼퍼와 하숙객의 관계를 넘어 ‘친구’가 됐다.

따따에게 배운 것들


고백하건대, 아마도 연민이었을 게다. 누구는 ‘연민’과 ‘책임’이 성립되는 관계는 불행한 것이라 거침없이 내뱉기도 하지만 따따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처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마음에서부터였을 게다. 하지만 두 달을 지내면서 그는 더 이상 ‘연민’의 대상만은 아니다. 교만한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다. 가난함이 삶이되었기 때문일 수도, 아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삶을 너무 오래 동안 살아서인지 몰라도 따따는 남은 음식은 물론 비닐봉투 심지어는 종이 한 장도 쉽사리 버리지 않는다. 때론 내가 콩나물을 씻는다며 떼어낸 머리 꼬대기를 모두 모아 음식을 만든다. ‘이건 버려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따따의 눈초리가 무섭다. 8년을 헬퍼로, 남의 집 살이로 아득바득 살았지만 따따의 통장에 든 돈은 고작 800페소(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6,000원). 두세 번인가 책을 산다며 따따와 장보기에 나서보았지만 따따의 주머니에서 10페소 이상 나오는 것을 본 적은 그네 딸에게 보내기 위한 속옷을 살 때뿐이었다. 한국에서 ‘짠순이’로 소문난 나도 그녀의 ‘씀씀이’를 따라잡기엔 너무 소비에 익숙해져 있다. 만들어 쓰기를 좋아한다 말하면서도 그에 투여되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싸다’는 이유로 ‘나중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물건을 사고 ‘필요없다’ 쉽게 버린다. 하지만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현실에서, 지구의 80%가 빈곤에 허덕이는 사회에서 이건 사치다. 그걸 따따는 내게 원망의 눈초리와 그의 삶으로 가르친다.

해되지 않는 생명은 미워하지 않아야한다는 것도 따따에게서 배운다. 유난히 곤충(?)이 싫었다. 지하 방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집안에 유난히 온갖 종류의 곤충들이 많았다. 바퀴벌레가 밥상에 출몰하는 것은 기본이고 송충이가 신발장에 붙어있거나 이불위에 귀뚜라미가 출몰했던 일들은 유년시절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공포 그 자체였다. 음식물의 작은 잔재라도 남은 곳엔 어김없이 개미떼가 행렬을 짓지만 따따는 개미를 죽이는 법이 없다. 다만 손으로 툭툭 치거나 ‘오’하며 까르르 웃을 뿐이다. 집안 곳곳을 기어다는 도마뱀도 따따에겐 그저 나를 놀려먹기에 좋을 존재일 뿐이다. 천정 위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는 작은 도마뱀에 소스라쳐 그를 불렀던 시간에도 따따는 ‘It's good(해충을 잡아먹는 존재라는 의미)’이라며 ‘푸하하하’ 웃는다. 절대 쫒거나 잡는 법이 없다. 따따가 잡는 곤충이라곤 바퀴벌레 정도.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큰 바퀴가 날라 들어올 때면 사정없이 슬리퍼를 집어 던지며 ‘Not good'을 연발한다. 그래서 해되지 않는 곤충은 죽이지 못한다. 매일 쉬도 때도 없이 작은 개미들이 얼굴에 몸에 올라타며 미끄럼을 타지만 이제는 툭툭 쳐낼 뿐이다. 언제가 읽은 책 제목이 기억난다. ‘지구를 살리는 풍뎅이’라는.(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책인데, 당시에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 다시 배운다. 책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삶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임을.

따따가 그리운 이유


하지만 무엇보다도 때론 되도 않는 똥배짱을 튕기는 따따를, 대책없이 게을러 가끔은 끼니조차 거르게 하는 따따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아닌 무관한 존재들을 향해서도 닫히지 않는, 그 사람 눈높이에 맞춘 그의 배려다. 향수병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 슬쩍 자리를 피해주는 배려를, ‘아픈 것 같아’라는 말에 서툴게 끓여 내주던 죽 내음을, 매운 것은 죽었다 깨도 못 먹으면서도 한국음식 먹고 싶을 거라며 김치를 담겠다며 고춧가루 양념의 간을 맞추던 날도, 농담처럼 내뱉은 말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닭을 튀겨주던 모습도,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이 흐른다. 동전 몇 푼을 얻으려 이집 저집은 전전하는 아이를 보면 주인장 몰래 만들어다 팔고 있는 아이스캔디의 수익을 내어주고, 자신의 접시에서 빵을 덜어주는 것도 따따다. 매번 종을 흔들며 온갖 잡일을 시키는 주인장이지만 내가 싫은 낯이라도 보일 때면 ‘no!’라고 말하는 것 역시 따따다.

‘연수’라는 명목으로 떠나오긴 했지만 마음 가는 데로 떠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여행이기에 짐 되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짐이라고 해봤자 갈아입을 옷 몇 벌에 책 몇권 든 가방하나가 전부. 여기에 ‘정’은 금물이었다. 그저 길 위에서 만난 ‘좋은 인연’정도로 스쳐가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벌써부터 따따가 그립다. 힘겨운 현실 앞에서도 웃음을 보내지 않는 그의 밝음이, 사람들의 발아래 선 듯하지만 가슴 안에 서있는 그가, 그래서 더욱 여행객의 가슴을 울리는 따따가 그립다. 나는 안다. 이곳에서 떠나면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이집 저집 핼퍼로 떠도는 인생이기에 편지 부칠 주소한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따따가 그립다. 이 그리움을 안고 다바오를 떠날 수 있을까?

<필리핀 다바오에서 2005년 5월 26일  출처: 사람사랑/ by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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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따따와 아베 1

내 친구 따따와 아베 1

 

 

“따따, 그건 안 된다니까” 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30분 째 타갈로그어(필리핀의 국어)와 영어, 그리고 바디 랭귀지까지 총 동원해 얘길 해보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다. 서점에 책을 같이 사러가기로 한 약속을 앞두고 따따는 내게 하숙집 주인장에게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얘기해달라고 말하고 있고,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따가 직접 주인장에게 가서 영어공부를 하기 위한 책을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따는 흔쾌히 ‘오케이’라고 말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한 지, 아님 자신의 생각이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일어설 기미가 없다. 결국 따따가 먼저 운을 떼고 내가 거들기로 한 선에서 얘기는 마무리 됐지만, 우리는 결국 그날 서점에 같이 가지 못했다.

 

어쩜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따따에게 하라고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따따는 필리핀에서 내가 거처하고 있는 하숙집에 고용된 핼퍼. 말이 좋아 가정 도우미지 우리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식모와 다름없다. 아니 더 아득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일요일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24시간이 모두 차압된 대기조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더 없이 친근한 관계처럼 보이다가도 주인장이 종이라도 흔들어 될 때면 어김없이 달려가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런 따따에게 휴일도 아닌 평일 오후에, 학습교재를 사기 위해 서점에 다녀오겠노라고 말하라고 했으니, 주인장의 힐난이 두렵고 월급 깎일 걱정부터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필리핀에서 만난 핼퍼


생면부지의 낯선 이국 땅에 도착해 마음이 산란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한달 째로 접어든 필리핀 생활은 이제 적응 단계를 넘어 이곳 사람들이 동네사람들처럼 보이고, 타갈로그어가 한국말처럼 들리는 환청에 빠져 살 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정붙이기 어려운 것은 필리핀에 짙게 드리운 가난과 가난의 그림자 같은 핼퍼(필리핀의 ‘가정 도우미’)의 존재다.


서울 떠나오기 전 ‘필리핀 핼퍼’에 대해 얼핏 들어보긴 했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타국 생활에서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 바로 이 핼퍼다. 우리네로 방 세칸짜리 집에 살 정도쯤이면 자가, 전세를 가리지 않고 한집 살이를 하는 핼퍼 한두 명쯤 두는 것은 여기선 매우 자연스럽다. 해서 그 거대한 수에 놀라고 상이한 문화는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핼퍼들의 고달픈 인생살이와 더없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핼퍼와의 관계에선 ‘주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웃기도 잘 웃고, 장난도 잘 치는 내 하숙집 핼퍼 따따는 전형적인 필리핀 농부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 꿈은 간호사가 되는 것. 여전히 따따는 그 꿈을 먹고 산다. 하지만 가난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따따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에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올해로 25살이 되었으니 벌써 8년 전이다. 틈이 날 때마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지만 대화는 꼬리를 잇지 못한다. 필리핀 교사의 1/10밖에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한달 월급의 절반을 학비로 덜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고작 8시간 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간을 모두 학교에 반납해야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는 일요일만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존재한다.) 매일 남자친구인 ‘준준’이 그립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돈 많은 새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단다. 오토바이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준준의 벌이로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따의 진담 섞인 농담 앞에서 ‘노’라며 단호하게 엑스자를 그린다. 하지만 말과 맘은 정반대로 향한다. 아무리 바지런히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라면, 3살짜리 딸을 언니에게 맡기고 남의 집 핼퍼 생활을 하고 있는 미혼모에게 눈먼 ‘행운’이라도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따의 사촌 집 앞에서. 해맑은 웃음을 가진 처자가 바로 따따>

 

 

전기도 들어 오지 않는 어둠속에서


따따의 고된 삶도 앞집 핼퍼인 아베에 비하면 복에 겨운 편이 되고 만다. 때로 따따는 잔꾀를 부리기도 하고, 똥배짱을 튕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베는 끼니조차 거르는 일이 다반사다. 집주인의 잦은 출장 때문이다. 물론 길나서는 집주인이 일정한 돈을 식비로 챙겨준다고는 하지만 하루 두 끼를 겨우 해결 할 수 있는 액수밖에 되지 않는다. 월급도 따따의 절반 수준이다. 슬쩍 방문해 본 아베의 집은 무섭기만 했다. 아베의 방엔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30도를 오르내리는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 냉장고 코드는 뽑혀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집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약간의 쌀과 아베가 저녁거리로 사온 생선 한 마리뿐. 4년 동안 한달에 절반이상을 배고픔과 어두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아베는 그만 둘 엄두는커녕 불평 한마디 뱉어내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아둔하다는 사람들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10년의 핼퍼 생활을 통해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문턱을 겨우 넘은 그에겐 돌아갈 곳도, 잠시라도 쉬어갈 안식처가 없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아무런 꿈도 없다고 말하는 그의 바램은 단지 7년 전 남편이 데리고 떠나버린 아이를 한번이라도 보는 것. 무표정함이 얼굴이 되어버린 아베의 나이는 이제 겨우 27살이다.

 

<모처럼의 외출에 아베는 한껏 멋을 냈다....>

 


가난은 이렇듯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비집고 찾아들고,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만든다.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고, ‘노예의 평화’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눈망울에 절망을 새겨 넣는다.


하지만 아직 핼퍼에 대해 고민하는 이 하나 만나지 못했다. 게으름과 짧은 영어실력이 그 연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계전선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16세미만의 아동 중 1/6이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회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보다 여행객들을 향해 돈을 구걸하거나 시장거리에서 전대를 찬 아이들을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는 사회에서 어쩌면 핼퍼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를 찾는 것은 이 나라를 뜰 때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할지조차 모를 암담한 현실 앞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친구가 되는 것뿐이다. 따따와 남자친구의 담장 데이트를 위해 보초를 서고, 아베와 같이 식사를 하기위해 주인장에게 어떤 핑계를 될까를 궁리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되는 타갈로그어와 영어, 그도 모자라 한국어와 바디 랭귀지를 총 동원해 수다를 떨고, 가끔 산책에 나설 때면 손을 맞잡는 것뿐이다. 풀이 잔뜩 죽은 따따의 얼굴 위로, 올 이 없음을 알면서도 집 앞 버섯바위에서 일어서 줄 모르는 아베의 기다림 위로, 오늘도 필리핀 다바오의 밤은 깊어간다. 헤아려지지 않는 핼퍼들의 고단한 삶을 밟고.


2005. 4. 8 필리핀의 다바오 시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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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해설] 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수탈의 역사와 독립 투쟁을 중심으로

 

                                             

 

1. 빼앗긴 웨스트 파푸아

1883년부터 네덜란드, 독일, 영국이 뉴기니아 섬을 두고 쟁탈전에 들어가는데, 네덜란드가 섬의 서쪽 지역을, 영국이 섬의 북동부를, 독일이 남동부를 차지하게 된다. 섬의 동쪽 지역은 1975년 '파푸아 뉴기니'로 독립 하지만, 섬의 서쪽 지역은 계속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다. 네덜란드는 1952년 유엔헌장 73조에 따라 파푸아인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탈식민지화 과정을 거쳐 독립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한다. 이에 대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동인도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한다는 헤이그 협약에 따라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헤이그 협약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에 이양할 동인도 중 웨스트 파푸아는 제외되었고,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구를 거절한다.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은 독립을 준비하며, 1961년 12월 1일 나라 이름을 '웨스트 파푸아'로, 나라의 상징인 국기를 '모닝 스타(morning star)'로 정하고 의회를 창설한다.

회색으로 표시된 인도네시아 영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 웨스트 파푸아. 동쪽으로 노랗게 표시된 지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파푸아 뉴기니.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군사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하려 했고, 미국이 적극 인도네시아를 지원한다. 미국은 1950년대 수마트라와 북 술라웨시(North Sulawesi)에서 발생한 지역봉기를 지지하여 인도네시아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인도네시아가 소련과 동유럽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자 인도네시아와의 관계회복을 원했던 것이다.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은 당시 네덜란드 외무장관에게, 인도네시아를 달래지 않으면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므로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하기 전 일정 기간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는 1962년 8월 15일 뉴욕협정을 체결한다(1962년 9월 21일 유엔 사무총장 비준). 그 내용은, 네덜란드가 그해 10월 1일 권력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에 이관하고,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인도네시아에 권력을 이관하며(1963년 5월 1일 이관), 6년 안에 자유롭고 공정한 방법으로 독립 또는 인도네시아 지배 여부에 대한 의사를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물어 보자는 것이다. 위 협정에는 웨스트 파푸아 성인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관이 웨스트 파푸아인의 80%-90%가 독립을 원한다고 보고하자, 미국은 유엔에게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안 모색을 요청한다. 유엔은 그 요청대로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선발한 1022명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한다. 인도네시아 군인은 이들에게 '우리는 (독립이 아니라) 인도네시아를 원한다(I WANT INDONESIA)'에 투표할 것을 강제하고, 이에 반대할 경우 헬리콥터에 태운 뒤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한다. 1969년 8월 2일 투표 결과 인도네시아 지배가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이와 같이 웨스트 파푸아는, 자신들의 자결권을 행사할 겨를도 없이 미국과 유엔의 각본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전 유엔사무부총장이었던 나라심한(C.U. Narasimhan)은 4년 전 "그 투표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 당시 유엔은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 누구도, 웨스트 파푸아인 100만명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2. 인도네시아 식민지 지배

1) 공동체, 문화 파괴

웨스트 파푸아는 240여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족마다 언어와 문화를 가진, 세계 문화적으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1963년 5월 1일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한 뒤 '개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면서, 인도네시아 문화를 침투시키고 인도네시아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강요했다. 인도네시아는 웨스트 파푸아의 역사, 문화, 종교 등이 기재된 책을 금지했고, 그들의 축제나 경제 관행들을 모두 금지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내 인구밀집 지역에 있는 주민들을 웨스트 파푸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고, 군인들은 웨스트 파푸아 고원 지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마을을 불태우거나, 원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숲으로 내쫓고 있다. 강제이주정책은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문화를 파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에 원주민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2) 인권침해

군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법 벌목, 상권보호, 보호야생동물 밀매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 그리하여 군대는 고의로 지역문제에 개입하고,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거나 폭력을 유발하는 등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현재 군경 병력은 1만 5천에서 2만명이나 된다). 또한 과도한 군경의 투입은 체계적이고도 구조적으로 인권침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평화적인 저항수단으로 독립의 상징인 모닝 스타(morning star) 국기를 게양하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탄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수한 사건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 군대는 1998년 비아크(biak) 섬에서 평화적으로 모닝 스타 국기를 게양하려는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8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고, 2004년 12월 1일 자야뿌라 외곽인 아베뿌라에서도 국기 게양식을 위해 모인 사람들 향해 발포하고 국기를 밟아 찢어버렸다.

2000년 12월 7일에는 신원불상자가 자야뿌라 경찰서에 공격을 하여 경찰 1명이 사망했는데, 인도네시아 경찰은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하는 고원 지역 출신 학생들의 기숙사를 급습하여 그들을 체포한 뒤 고문을 하여 2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2004년 10월 인도네시아 군대의 폭격을 피해 숲으로 피난간 주민들이, 식량과 추위를 막을 옷이 부족하여 53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점령한 1963년부터 지금까지 웨스트 파푸아인 10만명(전체 인구의 10%)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망사건에 책임이 있는 군인과 경찰들은 사실상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파푸아인들의 저항. 뒤에 보이는 국기가 모닝스타. [출처] www.westpapua.ca


한편, 웨스트 파푸아 독립을 위한 정치토론이나 모닝 스타 게양식 참여 등은 반란죄나 국가 모독죄에 해당한다. 앰네스티 미국지부가 2005년 2월 1일 발표한 성명서에 의하면, 1998년 후반부터 독립 운동을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인이 최소 72명이라고 한다.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의 인권침해는 매우 심각하다. 인도네시아 인구 정책에 따라, 여성들은 피임을 강제 당하고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성의 몸에서 피임기구를 빼줘야 하는 영구 피임의 경우, 의료진이 이를 제거할 줄 몰라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군경에 의한 강간 사건도 많이 발생한다. 학교에 난입한 군인들이 어린 소녀들을 끌고나가 강간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3) 자원수탈

웨스트 파푸아에는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세계에서 구리, 금광으로 가장 큰 회사인 프리 포트(Freeport)는 인도네시아 군대의 도움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영국 회사인 브리티쉬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eum)은 2005년 3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웨스트 파푸아 북쪽에 있는 빈투니 베이(Bintuni Bay)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할 권리를 인가 받았다.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보존되어 있는 다우림 중 하나가 웨스트 파푸아에 있는데, 인도네시아 군부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벌목 회사들이 빠른 속도로 이 지역에서 벌목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이들 기업의 안전을 위하여 일부러 분쟁을 조장한 후 그 지역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3.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저항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계속되는 생존권 위협에 저항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왔으나, 인도네시아는 그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1960년대는 파푸아 독립운동(FPM, free papua movement)을 결성하고, 낡은 총과 창, 활, 화살, 도끼 등을 이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확고한 지배를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 이상으로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사전에 제거하였는데, 1963년부터 1969년 8월 이른바 국민투표가 있기 전까지 6년 동안 인도네시아 정부 때문에 사망한 웨스트 파푸아인이 약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약 2만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2000년 자야뿌라에 모여 의회를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과 대화를 시도하며 외부에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전파하기로 하였으나, 인도네시아 군대는 2001년 11월 의장인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웨스트 파푸아가 평화로운 땅이 되기를 소망하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들의 열망을 짓밟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당신들의 자유를 보태달라(Give your freedom to promote ours)"고.

파푸아 아이들의 미소가 위기에 처해 있다. [출처] www.westpapua.ca

 

<출처 인권하루소식 0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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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웨스트 파푸아에 개입말라

미국은 웨스트(서) 파푸아에 개입말라


[로스엔젤레스 민족통신=김영희편집위원/제1신] 웨스트 파푸아 행동 네트워크’(West Papua Action Network)는 24일 로스엔젤레스 주재 인도네시아영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정부는 웨스트 파프아 원주민들의 인권을 탄압하면서 미국대기업을 보호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군사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협조를 요청했다.

인도네시아영사관 앞에서. 왼쪽부터 죤 람비아크, 팻시 스파이어, 해롤드 그린(웨스트 파프아 행동 네트워크의 코디네이터)

호주의 북쪽인 남태평양에 위치했으며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섬나라인 웨스트 파푸아는 18세기부터 영국, 네델란드의 식민지를 거쳐 1969년에 인도네시아령이 됐다. 현재 인구는 약 2백5십만명으로 그중 1백여만명이 지난 30여년동안 인도네시아에서 건너 온 동양계 이주민이다. 원시와 현대가 함께 숨쉬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는 세계관광업계에서 서구문명에 아직 침식되지 않은 나체족 원주민들의 생활을 접할 수 있는 명소로도 꼽하며 그 풍부한 전통민속예술은 현대예술가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 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날 기자회견에는 전국을 순회강연중인 ‘웨스트 파푸아 국제인권회’의 의장이며 콜롬비아대학 인권학회의 방문연구원인 죤 람비아크씨와 2년전 웨스트 파푸아의 프리포트 맥모란(Freeport McMoRan) 그래스버그 금광근처에서 총격사건으로 남편을 여윈 미국인여교사 팻시 스파이어씨가 참석했다.

웨스트 파푸아는 세계에서 금 매장량 1위, 구리 매장량 3위이며 광산업체 프리포트 맥모란은 미국의 뉴 올리안즈에 본사를 두고 있는 미국의 대기업으로 인도네시아에 최대의 투자를 하고 있는 해외업체이다. 동사가 2002년 한해동안 번 수익은 총19억달라에 달한다.

한편, 아마존강 지역처럼 큰 강을 타고 열대림이 울창한 웨스트 파푸아는 동쪽에 있는 파푸아 뉴기니아와 함께 아시아의 폐라고 불릴만큼 중요한 생태계에 속하나 미국 대기업이 양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광산업은 수질오염등 심각한 환경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민족통신은 웨스트 파피아에서 미국으로 정치망명을 한 죤 람지아크씨, 팻시 스파이어씨와 기자회견장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민족; 웨스트 파피아를 잘 모르는 한국독자들을 위해 그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 달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강연하는 죤씨

죤; 웨스트 피피아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냉전시대부터 미국이 어떻게 간섭해 왔는가를 우선 알아야 한다. 냉전시대인 1960년대 초 미국 케네디대통령은 인도네시아가 중국,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네델란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웨스트 파푸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네델란드를 압박하여 1962년 ‘뉴욕 협정’(New York Agreement)을 채택하게 했다. 미국, 네델란드,인도네시아, 유엔등이 관여한 이 협정에 의해 네델란드가 물러가고 1969년 국민투표에 의해 웨스트 파푸아는 인도네시아령이 된다.
웨스트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한 그 중요한 투표에 참가한 국민은 겨우 1022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들조차 인도네시아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정한 친인도네시아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국민투표가 있기 2년 전인 1967년 미국과 인도네시아는 조약을 맺어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는 한편 미국은 웨스츠 파푸아에 광산업체 프리포트 맥모란의 지사를 설립하고 그 막대한 세금과 수익금의 상당부분을 인도네시아정부에 납부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운명은 국민투표가 있기 전 미국과 인도네시아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웨스트 파푸아에 개입을 말아야 한다.

민족; 웨스트 파피아주민들의 독립운동을 소개해 달라.

죤; 1962년 이후 우리는 계속 독립운동을 해 왔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인도네시아군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 왔다. 지난 43년동안 인도네시아군은 10여만명의 주민들을 살해했으며 그외 고문, 강간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나 이들은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인도네시아군에서도 악명이 높은 특수부대 ‘코파수스’(Kopassus)는 2001년 11월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테이스 엘루아이(Theys Eluay)까지 암살했다.

한때 우리는 무장투쟁을 벌였으나 근래에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동 티모르의 독립은 우리의 운동에 큰 자극제가 되고 있다.

민족; 미국은 어떻게 군사지원을 하고 있는가?

죤; 인도네시아의 많은 군인들이 미국내에 있는 군사기관인 ‘국제군사교육훈련소’(International Military Education and Training: IMET)에서 직접 훈련을 받고 있다. 또 인도네시아군대는 미국에서 공급받은 무기로 우리를 죽이며 늘 탄압한다. (편집자 주: 미국이 냉전시대에 국내와 해외도처에 설립한 IMET는 9.11이후 “반테로”로 주요목적을 바꾸고 계속 운영되고 있다. International Military Education and Training을 웹상에서 검색으로 찾으면 수십개의 홈페이지가 나와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민족; (펫시 스파아어씨에게) 2년전 금광근처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강연하는 펫시씨

펫시; 남편, 직장동료들이랑 두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피크닉을 하고 돌아오는 중 복병의 총격을 받아 남편 릭을 비롯한 미국시민 2명, 인도네시아시민 1명이 살해당하고 미국시민 8명, 인도네시아시민 3명이 부상당했다. 나는 당시 등과 발에 총을 맞았다.

사건 발생 이후 조사가 진전되지 않아 나는 미 연방수사국에 여러번 진정하여 진척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인도네시아군대가 개입한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확실한 진상규명은 아직도 되지 않고 있다.

나와 남편은 프리모트 맥모란의 미국직원들 자녀들을 가리키는 학교에서 함께 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우리가 복병들에게 총을 맞아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민족; 앞으로 계속 사건의 진상을 캘 작정인가?

펫시; 그렇다. ‘누가’ 우리를 해쳤는지, ‘왜’ 우리를 해쳤는지 반드시 알고 싶다.

…………………………………………………………………………………………

[제2신] 죤 람비아크씨와 펫시 스파이어씨는 24일 저녁 임마누엘 연합감리교회에서 진보언론 KPFK방송국의 주최로 열린 강연회의 연사로 참석했다.

'아침별의 나라'로 불리우는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 옆에 종족학살과 식민점령을 끝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미국의 웨스트 파푸아개입에 관한 역사와 인권탄압의 진상’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죤씨는 일반 미국시민들이 오랜 식민지의 역사를 가진 웨스트 파푸아에 관심을 갖고 미국정계에 정의의 메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펫시씨는 워싱턴 디시를 찾아가 관계 국회위원들을 만나며 복병사건의 진상조사를 직접 촉구했다고 보고했다. 주체적인 시민정신을 갖고 행동하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 그는 백악관 관계 의원들에게 미국정부가 인도네시아군대를 부당하게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하여 인도네시아에 군사제재를 가하도록 성공했다고 말하며 지난 2년간의 상세한 경과보고를 했다.

이 날 강연회에서는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운동사를 그린 기록영화 ‘아침별의 나라’(Land of the Morning Star)가 상영되었다.

<출처 민족통신 0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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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경제적 착취

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경제적 착취

 

(출처: www. Eco-action.org/)

 

 

 

SHORT HISTORY OF WEST PAPUA

 

파푸아 섬에서 수천년 동안 말레이지아 부족들이 원예농업을 하면서 살아 왔다.

1511년, 스페인이 뉴기니아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자원을 수탈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등의 식민지 지배 프로젝트는 네덜란드가 소행한다. 선교와 함께, 근대화 및 개종을 위하여 유럽사람들이 섬에 침입했다. 인도네시아가 웨스트 파푸아에 침입하여 군사점령을 한 것은 1962년이다. 이 점령은, 냉전시기 인도네시아가 반공산주의 계열이 되기를 희망하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아래 이루어졌고, Freeport-McMoran과 같은 회사가 군사 경비 및 식민지배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함으로써, 추진되었다.

식민지화가 이루어지면서 저항은 계속됐고, 지금까지 OPM과 다른 독립투쟁 조직들의 투쟁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ENTER Freeport-McMoran

 

뉴올리언즈에 본부를 두고 있는 Freeport-McMoran Copper and Gold Inc.는 국제적인 광산회사로서, 파푸아인들을 착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Freeport는 1950년대부터 웨스트 파푸아에 관심을 가졌다. 이 회사는 1965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수하르토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광범위한 학살을 시작한지 한달만에 인도네시아와 협상한다.

 

Freeport는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은 뒤 수하르토 정권과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외국회사이다. 이 회사는, 웨스트 파푸안들이 광범위하게 무력항쟁을 전개하고, 인도네시아가 웨스트 파푸아를 적법하게 지배하기 이전부터 웨스트 파푸아 내의 채광과 관련하여 협상을 진행했다. Tembagapura에 위치한 Freeports Grasberg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을 가진 곳이자,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무장된 지역 중 하나이다.

 

The People and Resistance

 

웨스트 파푸아의 원주민들은 뉴기니아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종족이고,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른 말레이지안들과 관련이 있다. 세계 인구에서 얼마 차지하지는 않지만 세계언어의 20%가 웨스트 파푸아에 있다.

Freeport의 채광산업에 영향을 받는 부족이 고원지대에 있는 Amungme과 저지방에 사는 Kamoro이다. 인도네시아가 그들의 땅을 빼앗아 채광산업을 위하여 Freeport에게 무료로 제공하였다.

Freeport는 지방 인구 재정착 지휘권을 가지고, Kamoro, Amungme 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토지, 나무, 물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고원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이로 인해 거주지를 떠나 저지방으로 이주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저지방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웨스트 파푸안은 Freeport와 다른 식민지 개척자들에 대하여 저항하였다. 이는 광산과 그곳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 공격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1977년, OPM은 중요한 파이프 라인을 폭파시키고, 며칠간 탄광을 폐쇄하였으며, Freeport의 수백만 달러를 쓰레기처럼 내다 버렸다. 웨스트 파푸아의 무장 투쟁세력과 인도네시아 군인 사이에도 역시 수 많은 충돌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군대의 잔인무도한 진압과 Freeport의 보안군 때문에 대중 투쟁은 많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땅과 자치권을 보장받기 위하여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Freeport and the Military

 

ABRI로 알려진 인도네시아 군대는, 살인, 강간, 고문, 학살 등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동티모르, 아체, 웨스트 파푸아에서 발생한 수백만의 학살에 ABRI이 책임이 있다.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Freeport는 2001-2003 사이 ABRI에게 1천 6백만원 달러를 제공했고, 그 이전에도 또 다른 3억 5천만원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 돈은 군대의 식량, 주택, 연료, 인프라, 여행경비, 차량수리, 행정비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Freeport가 건설하고 있는 인프라에는 보안 지역과 군 기지가 포함되어 있다. Freeport 2003 SEC 보고서에 의하면, 군대에 지원한 비용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제공한 2,300여명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1996년말까지 Freeport 거류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이라고 한다.

 

Freeport에서 발생한 인도네시아 군대의 첫 살해 사건은 1972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든 마을이 살해당해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집을 떠나 도망가야만 했다. 고문과 강간의 사건도 수 없이 많다. 모든 저항에 대하여 과도한 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 군대는 매춘, 술판매, 불법 벌목, 강취 계획에 깊숙히 관련되어 있다.

 

Freeport and ecology

 

웨스트 파푸파의 생태계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생물종을 가진 곳 중의 하나이고, 모든 동식물 종류의 7%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Freeport의 채광산업은 이러한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 자연환경은 Amungme과 Kamoro 부족이 신성시 여기고 생명을 보존해 가는 곳이다. Freeport는 이 지역의 강에 수백만톤의 광물쓰레기를 버리고, 금속으로 강물을 오염시키며, 넓은 저지대의 강물을 죽고 황폐한 지역으로 바꾸고 있다. 강은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Amungme 부족이 신성시 여기는 호수를 포함하여 주변 지역에 독성 폐기물을 수천피트 쌓아두고 있다. 이로 인해 식용수가 오염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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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동 속에서 잊혀진 웨스트 파푸아

혼동 속에서 잊혀진 웨스트 파푸아

(출처: www.westpapua.ca/)

 

 

인도네시아는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들의 자결권에 대한 요구를 짓밟기 위해 군사적 방법을 동원하고 원주민들의 기본권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1963년 침입 이래 약 10만명의 웨스트 파푸안(전체 인구의 약 15%)이 인도네시아 군대 등 무장세력에 의해 살해 당했습니다.

 

웨스트 파푸안을 구하기 위하여, 웨스트 파푸아 지도자들이 웨스트 파푸아를 평화 지역으로 선포하고, 군경에게 총칼을 내리고 평화로운 협상을 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당국은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동티모르에서 했던 것처럼 그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평화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존중하도록 국제적인 압력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배반의 역사

 

1945 웨스트 파푸아를 제외한 네덜란드 동인도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됨.

1961 네덜란드 정부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선언함.

1963 인도네시아 군대가 웨스트 파푸아에 침입하여, 인도네시아의 영토임을 선포함.

1969 유엔이 웨스트 파푸아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주관함. 약 1000여명의 대표가 무장 군인 앞에서 투표할 것을 강요당함. 그들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지배에 표를 던지지 않으면 총살 당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함.

2001 지배의 억압의 30년 뒤, 웨스트 파푸아에 자치권이 인정되는데, 이에 의하면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권과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할 자유가 확대됨.

2003/4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치권 부여에 따른 권리 양도 계획을 취소하고,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한 채, 인도네시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죽이기 위해 새로운 군사 작전에 돌입하였음.

 

 

Theys Hiyo Eluay 살해

 

2001년, 웨스트 파푸아 의회의 의장인 Theys Hiyo Eluay가 인도네시아의 엘리트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를 살해한 군인들은 겨우 2년 징역형만 선고받았고, 군간부들은 그들을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다. 재판 진행 기간 중, 그를 살해한 군인들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고 인정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세계은행과 CIDA의 지원아래 진행된 인도네시아인 이주 정책을 통해 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통치권을 정당화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주자들은 웨스트 파푸아 원주민들의 땅을 가지게 되었으나, 웨스트 파푸아 원주민들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웨스트 파푸안들은 이주자들의 거주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인도네시아 군대는 크리스챤 웨스트 파푸안들을 내쫓고 무슬림 이주자들이 그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민병대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인권침해와 불법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는 정기적으로 고문과 비사법적 살인을 저지르고 있으며, 그들의 땅을 보호하고 자결권을 표현하는 웨스트 파푸안에 대하여 불법구금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고 있다.

-인도네시 보안군이 인권활동가들과 공동체 지도자들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있다.

-인권침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스트 파푸안에 대한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딱 한차례 재판이 진행되었다.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웨스트 파푸안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있다. 그리고 적절한 의료 서비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고, HIV 감염률이 증가하고 있다.

 

 

환경 재앙

 

웨스트 파푸아는 천연가스, 석유, 메니랄, 다우림 등을 포함하여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환경 파괴를 동반하는 산업의 외국계열 회사들이 내는 세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파괴를 당하고 있는 웨스트 파푸안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직접적으로 불법 벌목에 연결되어 있고, 채광산업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아시아에서 가장 불법 벌목이 성행하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벌복과 채광산업은, 전통적으로 땅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의 문화와 생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은 원주민들, 외국 회사, 인도네시아 보안군 사이의 격전지로 변하고 있습니다.

 

Freeports Grasberg Gold Mine

Freeport McMoran(of the USA)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금, 구리 채광 회사이다. 이 회사는, Amungme 원주민의 땅에서 채광산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일 US 1 백만 달러를 벌고 있는데, 이 중 0.01%도 지방 정부에 환원되지 않고 있다.

-Freeport는 광산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달 US 5백만 달러는 인도네시아 군대에 보낸다. 이 군대는 2002년 미국인 2명과 인도네시아인 1명을 살해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

-광물쓰레기를 바다와 강물에 버려, 전통적인 어업을 파괴하고, 식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Freeport는 버몬트 주 크기만큼의 광산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 대부분 채광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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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quot;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겐 독립&quot;

[인터뷰]

"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겐 독립"

도나(웨스타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 활동가)
도나-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는 웨스트 파푸아 활동가. 안전을 위해 얼굴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제5차 국제회의가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두명의 웨스트 파푸아 활동가들이 참석해 웨스트 파푸아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그 가운데 한 명인 도나를 인터뷰했다.

도나는 파란색이 좋다고 했다. 그 색이 자신에겐 '희망'을 상징한다며.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는 도나는 그저 자신을 평범한 '웨스트 파푸아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라고 소개했다.


◎ 당신이 하는 일과 당신의 조직을 설명해달라

나는 웨스트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Association for the Empowerment of Papuan Women and Children)의 활동가다. 우리는 여성과 아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일하며 특히 독립을 위해 일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여성의 실태에 대해 조사하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웨스트 파푸아인으로서의 '자기결정권'을 갖기 위한 교육의 시행을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내 나라가 독립될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피해갈 수만은 없다.

◎ 지금 웨스트 파푸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성과 아이들이며, 그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고 자신의 권리를 갖는 것이다. 또한 자기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파푸아인이 계속해서 사라져가고 있다(파푸아인의 인구증가율은 0.3∼1.5%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에 의한 학살과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인해 파푸아인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만약 여성과 아이들을 계속 잃는다면 우리는 다시 그것들을 찾을 수 없다.

◎ 당신에게 있어서 독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립을 한다고 해도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여성과 아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자유롭게 모든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면, 좋은 건강을 가질 수 있고, 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이 내겐 독립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여성과 아동의 문제도 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웨스트 파푸아 문제와 관련해 한국사회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가?

이미 발제 때도 언급했다. 제발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데 사용해달라고. 파푸아의 상황과 문제에 대해 고민해라. 그리고 한국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해라.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한국 사회만이 안다.

 

<출처 인권하루소식 0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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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사용해달라&quot;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사용해달라"

인도네시아의 또 하나의 식민지, 웨스트 파푸아의 외침
"내용만큼이나 그녀의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청중 중 한명이 도나(Donna, 웨스타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의 활동가)에게 발제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 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저기서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영어를 잘못해서 혹시라도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는 도나의 떨리는 목소리 위로 2005년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과 여성들의 삶의 흔적이 드리워졌다.

회의가 열리고 있는 장면. 왼쪽에 걸려있는 것이 웨스트 파푸아의 기 ‘모닝 스타’다.


참혹한 땅 웨스트 파푸아, 인도네시아 자국 군에 살인과 협박 면허 부여

우리에겐 그저 파푸아 뉴기니(PAPUA NEW GUINEA) 정도로 알려져 있는, 지도에서조차 그 국명을 잃어버리고 인도네시아 령으로 표기된 웨스트 파푸아는 19세기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거쳐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땅이다. 웨스트 파푸아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 40년에 걸친 독립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5번째 국제회의가 2005년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 대학교(Universty of Phillippines, UP대학)에서 열렸다. 아시아와 태평양 인근 국가 등 과거 식민상태를 경험했거나 이 국가들의 독립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는 15개국(동티모르, 아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영국, 아이슬란드 등)에서 40여명의 인권 활동가들이 참석한 이 국제회의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필리핀 정부와 필리핀 대학교 등에 압력을 가해오면서 4일 내내 팽팽한 긴장과 보안 속에서 치러졌다.

국제회의는 15개국에서 4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국제 연대는 작은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정' 속에서 시작됐다. 웨스트 파푸아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필리핀으로 날아온 베니(Benny)는 "인도네시아는 대규모의 이주정책과 발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웨스트 파푸아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으며 웨스트 파푸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책들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인도네시아 군과 경찰은 파푸아인에 대한 살인과 협박, 납치 면허를 가진 것처럼 활개를 치고 있다"고 웨스트 파푸아의 상황을 설명했다. 도나는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과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소개했다. 도나는 "보건의료와 법, 경제적, 사회적인 면 등 모든 일상에서 위기가 발생하며 최근 몇 년 사이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매해 1600여명 이상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의료서비스가 부족해 죽어가고 있으며, 아이들은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또한 일상적인 강간과 납치 등의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며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했다.


논쟁보다는 '실천'에 무게 둔 국제회의

두개의 기조발제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곧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몇 시간에 걸쳐 쏟아져 나왔다. 장시간에 걸친 회의였음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는 진중함 속에서 참석자들은 논쟁보다는 구체적 실천을, 거대한 계획보다는 가능하고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논의했다. 이것은 동티모로의 독립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동티모르를 위한 아시아태평양 연대회의(Asia-Pacific Conference for East Timor, APCET)'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그들이 터득한 '운동의 지혜'였다. 또한 현재 식민지 상태 혹은 수탈을 겪고 있는 민중이나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왔던 활동을 토양으로 한 '고민'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진지했다. 참석자들은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제안했다.


3일간의 회의를 통해 참석자들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인근 국가들의 인권침해에 종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아시아태평양연대회의(Asia Pacific Solidarity of Coalition, APSOC) 결성을 결의했다. 또한 '웨스트 파푸아를 위한 국제연대 준비위원회(Steering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Solidarity Meeting on West Papua)'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캠페인의 시작을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과 현재 웨스트 파푸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를 근절하는 것이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참석자들은 웨스트 파푸아를 점령하고 살해와 고문, 강간 등 참혹한 인권침해를 일삼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의 전원 철수를 주장했다. 또한 웨스트 파푸아의 정치적 수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국가와 집에서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원과 국제적 법률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참석자들의 목소리다. 참석자들은 12월 1일을 '웨스트 파푸아 국제연대의 날'로 정하고 앞으로 인도네시아의 인권침해 사례와 증거 수집, 교육자료 편찬, 이슬람사회와 국제사회에 대한 로비 및 연대 활동 등을 강화해나갈 것이다.


결연한 고백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63년 인도네시아의 점령이래 인구의 10%가 살해되고 매일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다시금 인지하고 참석자들은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금 핍박받는 땅, 웨스트 파푸아로 돌아가야 하는 베니와 도나에 대한 걱정은 참석자들 모두에게 묵직한 무게였다. 이미 자카르타 공항에서 인도네시아 공안경찰이 혐의를 찾기 위한 시도를 하고 베니가 조만간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다행히 베니와 도나는 아직까지는 건재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웨스트 파푸아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그런 나를 바꾸었고, 나는 이번 회의를 통해 매우 큰 힘을 받았습니다. 회의 결정에 따라 나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세계의 무관심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수탈의 역사를 살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는 말한다.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데 사용해달라(Please use your freedom to promote ours)"고. 또한 한국 사회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답한다. "그것은 오직 당신(한국민중)만이 알며, 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하라고(Only you know. Please now do what you can do)"

 

<출처 인권하루소식 0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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