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필봉산

시골 동네치고 뒷산이 없는 마을이 없다. 마을마다 뒷산이 하나씩은 있는 법인데, 우리 동네 뒷산은 필봉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내가 2년 다닌 초등학교 교가의 첫 구절이 “필봉산 정기아래~”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한번도 필봉산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는데, 이 필봉산 꼭대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마을에서 올려다 보면 꼭대기는 바위인데 소나무 한 그루가 유일하게 삐죽 솟아 있는 모양이다.

 

어릴 때 들은 전설이 하나 있다. 서양으로 치면 일종의 신화인 셈인데, 마을 처녀들이 봄에 산나물을 캐러 도시락을 싸고 보자기를 매고 필봉산으로 갔다고 한다. 즐겁게 산나물을 캐고 있는데,검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 피할 곳을 찾다 큰 바위 아래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동굴에는 예쁜 고양이 두 마리 놀고 있길래 가져온 점심을 먹으면서 나눠주고 안아주고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그때 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더란다. 마을 처녀들이 놀라 냅다 뛰어 산을 내려왔는데, 얼마나 정신 없이 내달렸는지 신발도 벗겨져 온데간데없고 도시락이고 산나물 보자기고 할 것 없이 모두 동굴에 두고 왔는지 없더란다. 

 

다음 날 마을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는데, 산에 나물 캐러 갔던 처녀들의 집 문간에 도시락과 나물 보자기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새끼들에게 먹이도 주고 귀여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이게 호랑이의 보은이라고 할 만한 그런 전설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친박, 친미, 친일, 친북

친박, 친미, 친일, 친북. 이 친(親)에 대 생각좀 해보자.
<친>은 '친하다'는 뜻이다. 친구가 뭔가? 친구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사귄 사람을 말한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인데 말이 통해 술 한 잔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고 바로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명박은 "친박"도 싫고 한자어 "친"보다 영어가 더 좋았는지 정책 모토를 "친기업", "친자본가"라는 말을 쓰지 않고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라고 불렀는데, 중앙일보는 이걸 "기업 친화적"이라고 해석했다. 기업 친화적이란 말은 모든 정책의 근본이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친박"은 "친미"나 "친일", "친북"과 좀 다르다. 친박은 박근혜와 친하다는 거지만 친일이나 친미, 친북은 누구와 친하다는 말일까? 아마 미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 북한 사람들과 친하다는 말이 아닌 건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 여기서 "친"은 도대체 친한 대상이 누구라는 말인가?

 

당연히 친미와 친일, 친북에서 친한 대상은 모두 미국의 지배자들, 일본의 지배자들, 북한의 지배자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국과 일본과 북한의 대, 내외 정책과 친하다는 말이다. 박사모가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저들에게 미국은 곧 부시였고 클린턴이었으며 오바마였고 이제는 트럼프다. 

 

이참에 친북단체나 북한과 친한 사람들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종북이든 친북이든 신념과 사상의 문젠데 누가 친북이든 종북이든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단지 이들이 친하다고 하는 그 대상이 북한 민중이 아니고 북한의 지배자들이고 그들의 대, 내외 정책이라면 한 번 스스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를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궁금해서 그렇다.

 

[책과 삶]본심 감춘 인민들의 ‘무대’ 북한을 고발한 그, 누구일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2172045015&code=960205#csidxc378fbcea43ae8b8704a0efd0a57b8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실과 실천 사이에서

<자본>을 10년 동안 읽지도 않았고 관련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계속 <자본>을 공부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주변에서 <자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별로, 아니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문제인데 오늘 그냥 끼적거려 보았다.

변화란 무엇인가? 운동은 변화를 표현한다. 운동과 변화는 같은 말이다. 유물론의 기본 명제는 모든 사물은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물질적 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과학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애를 썼던 이유는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결이 시대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맑스 역시 물질적 우주의 운동과 변화를 확립하고 이를 인간 사회의 역사와 경제적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초기 맑스의 헤겔 비판의 핵심은 세계의 유물론적 원리를 확립하려는 목적에 집중되어 있다.

맑스는 변증법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국 변증법을 주제로 쓴 글은 없다. 사실 맑스는 <자본>에서 운동과 변화의 원리로서 변증법을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굳이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맑스는 <자본> 1편 상품과 화폐에서 상품의 두 요소인 사용가치와 가치를 통해 노동의 이중성을 서술하고 이를 상품과 나란히 외적 실체로 외화되는 화폐를 연역하는데, 이 1편이 바로 내적 모순의 외적 모순으로의 전화라는 변증법적 원리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맑스는 <자본> 1판 서문에서 <자본>의 목적이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 내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기에서 맑스는 "궁극적인 최종목적(der letzte Endzweck)"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 '궁극적'이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다른 말로 <자본>의 목적은 운동과 변화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맑스는 2판 서문에서 물질의 운동과 변화를 헤겔의 "이념"을 비판하면서 변증법의 원리로 규정한다. 맑스는 "관념적인 것(Ideelle)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변역된 물질적인 것(Materielle)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맑스에게 운동과 변화는 물질적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근본적이다. 지금까지의 과학과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운동과 변화는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원리다. 변증법이란 이와 같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기술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든 물질적 우주의 차원에서든 운동과 변화가 하나의 원리라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변증법과 관련하여 잘못된 오해는 내적 모순을 이루는 단위를 "대립물의 통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립물(Gegenteil)의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인해 모순을 해소하고 외적 모순으로 이행한다는 것인데, 이는 맑스가 <자본>에서 쓰고 있는 “Gegenteil”을 해석하는 문제에서 발생한다.

맑스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처음 “Gegenteil”을 쓴다. 이 개념을 사용가치와 가치를 대립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맑스는 “등가형태를 고찰을 통해 드러나는 첫 번째 특징은 사용가치가 그 역(Gegenteils)인 가치의 현상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영어 번역은 모르겠으나 MEW 23권을 번역한 <이론과 실천>의 1995년 판에는 “사용가치가 그 대립물(Gegenteil)인 가치의 현상형태로 된다”고 번역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과 관련된 책들은 모두 변증법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적대적인 대립 구도도 파악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Gegenteil”을 대립으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가?

변증법을 설명하는 많은 책들에서 변증법은 양질전화, 부정의 부정, 대립물의 투쟁이라는 법칙으로 쓰고 있지만 이는 변증법을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적 모순은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립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두 요소의 자기 발전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가치와 사용가치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사용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호 의존적 관계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본과 노동은 적대적인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본과 노동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두 요소가 긴밀하게 의존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상품 생산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를 멸할 수 없다. 단지 어느 정도 힘의 우위를 통해 서로를 제약할 수 있을 뿐이다.

“Gegenteil”을 반대, 또는 역(逆)이 아니라 대립으로 번역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서술에서 갖는 맥락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동을 위해 이데올로기로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연구를 위해서도 실천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왜곡된 현실 인식은 왜곡된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되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