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에티카> 원래 제목은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인데, 라틴어로 출판되었다는 것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깊은 위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당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유산계급의 귀족들이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든 헛소리에 불과한 말이든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깊은 위안을 받은 사람인데, 특히 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는 언제나 감탄하면서 읽는다. 3부에서 다루고 있는 정서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고 이로인해 발생하는 미움, 분노, 증오 등의 감정이 대상이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에서 쓴 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기쁨의 감정은 우리를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끌고 우리의 행위 능력을 증가시킨다. 반면에 슬픔은 우리의 행위 능력을 감소시키고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은 우리 신체에 적합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신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감정은 자신의 기원이 되는 관념으로 되돌아올 때, 기쁨은 사랑이 되고 슬픔은 증오가 된다.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에 의하여 명석 판명하게 지각될 수 있을 때 나는 이 원인을 타당한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원인 자체에 의하여 이해될 수 없을 때 나는 그 원인을 타당하지 않은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이건 3부에서 처음 등장하는 [정의] 1인데, 이와 관련하여 올리비에 푸리올이라는 사람은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예를 들고 있다. 물론 이 책이 프랑스에서 바깔로레아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이 사람의 글을 좀 느슨하게 옮기면 이렇다.

 

“적합한[타당한] 원인이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먼저 부적합한[타당하지 않은] 원인이 뭔지 보자. 부적합한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과를 이해할 수 없는 원인이다. 그것은 외부의 무언가가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예로 들어 보자.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향한다. 만일 누구의 노래처럼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 자신이 그 감정의 적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의존한다는 걸 말한다. 우리가 그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상, 사랑은 언제든 우리에게서 빠져 달아날 수 있는 대상에 달려 있다.우리가 어떤 돌멩이를 사랑하기는 쉽다. 그 돌을 내 주머니나 집에 보관할 수 있지만 여자나 남자는 사정이 다르다. 나에게 속하지 않는 나 밖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달렸다.(224쪽)”

 

이 부분은 마치 청년 맑스가 니 사랑이 되돌아 오는 사랑을  만들지 못한다면 니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이라고 한 말을 떠올린다. 나는 경철수고의 마지막 단락을 장식하고 있는 맑스의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정확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등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 너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되돌아 오는 사랑을 만들지 못할 때 그 대상을 증오한다. 말하자면 사랑과 증오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다른 감정이다. 스피노자는 그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내게서 발생하는 감정을 질투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자기가 증오하는 대상이 파괴되는 것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은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3부, 정리 20). 얼마나 시니컬한 표현인가?! 물론 스피노자는 한참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증오는 증오의 보복에 의하여 증대되고 반대로 사랑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다.”(3부, 정리 43)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3부, 정리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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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21 2019/05/26 21:21

차별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차별받는 것과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다. 특별대우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사람이 자신만을 특별히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차별받는 것과 달리 누군가를 차별하려고 하는 건 더 쉬운 것 같다. 선생은 똑똑하고 예쁜 학생들을 좋아한다. 조카가 둘이면 똑같이 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아무리 애쓰도 차별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주위에 동성애자가 한 둘은 있기 마련이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더 티가 나는 법이라 처음에는 다소 낯설고 어색한 것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동성애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 반응이 조금씩 다르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말에 혐오의 가시가 살짝 보이기도 하고 동성애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보인다. 편견이란 한쪽만 보는 것이고 선입견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재단하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완전히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편견과 선입견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별별시선]차별받지 않을 권리 ‘동성애’/ 경향신문, 2017. 5. 27.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을 다시 세우겠다고 천명한 이후에도, 군에서는 인간사냥이나 다름없는 동성애자에 대한 색출과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 짧은 글에서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동성애자의 인권을 옹호해보려 한다.

 

먼저 ‘동성애를 차별하지는 않지만 너무 강한 발언 방식 때문에 없던 반감이 생기려 하는’ 분들을 위한 설득을 해보겠다. 동성애는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이거나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다. 동성애는 인류의 역사, 혹은 생명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자연스러운 행위 중 하나다. 동성애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쾌락만을 좇는 변태성욕자가 아니고, 그저 호감을 느끼고, 섹스를 하고, 사랑을 하는 대상이 동성인 평범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는 그 어떤 의학적 소견에서도 질병이 아니고, 전염되지도 않는다. 에이즈는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한 병이 아니라 동물에게서 유래한 바이러스이며,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들로부터 에이즈가 전염될 개연성도 매우 낮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꺼려진다면 약간 이야기가 어려워지지만, 근본주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에서 동성애를 탄압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경전의 구절들은 다분히 취사선택적인 것이다. 그 경전들에 따르면 당신은 현대사회에서 현대 문물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종교 공동체에 헌납하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면 당신도 안 지키는 그 규율들을 애먼 사람들에게 들이대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냥 그들이 알아서 사랑하도록 놔두기만 하면 된다. 동성애자들의 입대를 공식적으로 허용한 나라에서 그것 때문에 전투력이 하락했다는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동성애자들이 가족을 꾸릴 권리를 보장하는 것 역시 추가 비용은커녕 행정적 문제들에서의 편의성이 증가할 뿐이다. 동성 부부가 합법화된다고 해서 출산율이 떨어지거나 이성 부부가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동성애자들이 좀 더 당당하게 자신들을 드러낼 것이라는 변화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로 바뀔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정도는 부족할까? 그럼 읍소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이 생각지도 못할 가공할 만한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며, 그 존재 자체를 사회로부터 부정당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꽃이 핀 공원을 거니는 일이, 그들에게는 목숨을 건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감금, 교정치료, 폭력이 이들의 일상에 도사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교정강간이나 살해에 이른다. 동성애자들의 높은 자살률은 동성애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되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현상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당신이 아는 그 누구일 수도 있다. 당신이 평생 동안 만나왔던 가족, 친구, 동료 중에는 분명히 동성애자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결혼을 한 이성애자이고,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 당신 때문에 세상에 나왔고, 당신에게 기쁨과 사랑과 삶의 이유를 주었던 그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가? 

 

 

이마저도 안 통한다면 남은 것은 경고다. 무슨 짓을 하든 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사랑할 것이고 언젠가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당신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그러한 것처럼 어리석음의 전당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리라. 혹여 이들이 패배한다면 그때는 더 큰 문제다. 이들을 휩쓸어간 그 광기가 당신의 어떤 정체성을 못마땅해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민주주의적 공존은 어려운 게 아니다. 인권은 지켜주고 사생활은 신경 끄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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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19 2019/05/26 21:19

"에이젠슈테인은 변증법에 온전히 영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 유기체를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인 개념으로 만들었다."(운동-이미지,  tr. 74)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를 이렇게 평가한다. <변증법에 온전히 영화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방법이 변증법적 방법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물론 여기서 <변증법>은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변증법의 세 가지 법칙을 말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체계화된 엥겔스의 변증법은  째 양질전화의 법칙 , 둘째 대립물의 통일, 셋째 부정의 부정 법칙이다. 에이센슈테인 이 중에서 양질전화의 법칙과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의 원리를 자신의 몽타주 이론에 도입했다. 
에이젠슈테인은 독립적인 쇼트들의 충돌이 이념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했는데, 개별 쇼트들의 연결은 양적 축척을 통해 질적 비약을 발생시킨다. 쇼트들의 충돌은 어떤 이행을 나타낸다. 몽타주는 이러한 양적 단위에서 질적 단위로의 이행을 표현한다. 몽타주의 이념은 곧 질적 비약을 통해 발생하는 어떤 이질적인 것의 출현을 의미한다. 
몽타주를  통해 표현되는  이념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연결되는 쇼트들로 환원될 수 없는, 각각의 독립적인 쇼트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연결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는 쇼트들을 잠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개별적인 쇼트들의 연결은 이러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킨다. 그래서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를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은 쇼트들의 연결을 통해 발생하는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수직과 수평, 바다와 육지, 하나와 다수 등  대립의 몽타주와 견인의 몽타주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의 이행과 새로운 질의 돌연한 출현"이라는 양질전화의 법칙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의 돌연한 출현"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행을 통해 발생하는 새로운 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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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17 2019/05/26 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