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개인들의 삶을 생존의 문제로 내몰면 개인들은 원자화된 파편처럼 부서지고 고립된다. 가장 척박한 곳에서 악이 자라고, 부서지고 쪼개진 개인들의 삶에는 연대와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지식인은 지성을 생산하지만 대중은 지성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지성과 반지성을 구분하지 않거나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잘난 놈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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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3 2019/05/26 21:33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는 운동과 결부되지 않는 탈핵은 시간과 돈 낭비에 불과하다. 그냥 무의미한 짓거리일 뿐이다.
 
<환경운동연합>이나 <녹색당>, 그리고 “탈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단체들의 그 탈핵이 왜 공허한지 저 단체들과 녹색당은 모르는 듯하다. 
 
탈핵이 공허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왜 핵발전이 요구되는가? 핵마피아들 때문인가? 정치가들이 소위 원전 산업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가? 
 
핵마피아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핵산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윤이 되는 것은 모든 자본가들의 먹이감이 된다. 그래서 핵마피아 운운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성장의 논리, 성장이라는 요구를 벗어 던질 수 없다. 사실 이 요구는 시민들의 요구다. 시민들은 성장의 콩고물로 살아간다. 성장이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불황의 긴 터널이 바로 저성장, 또는 마이너스 성장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실업자 수가 증가하고 소비는 위축되며 삶의 질은 하락의 수준이 아니라 타락한다. 
 
그래도 소수의 자본가들과 부자들은 살아남는다. 저성장의 불황으로 고통받는 것은 다수의 시민들, 곧 노동자와 민중들이다. 그래서 성장은 시민적 요구가 된다.
 
성장이 불가피하고, 아니 성장이 필수적이라면, 에너지는 더 많이 더 많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요구된다. 성장률과 에너지 소비율은 비례한다. 이런 판국에 탈핵이 말이 되는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갈아엎지 않는 한 탈핵은 요원하다. 
 
뭐 유럽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웃기는 소리다. 한국은 서유럽이 아니다.
 
대체 에너지? 청정 에너지? 그런 게 있었던가? 풍력과 태양광으로 얻는 에너지는 청정한가? 산과 들과 연근해를 파헤치고 얻는 에너지는 과연 청정한가? 백보 양보해도 풍력과 태양광으로 일정한 규모의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본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녹색당과 환경운동연합 등 단체들이 내세우는 탈핵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저런 헛소리를 대단한 것처럼 내세우는 걸 보면 저들은 모른다. 저들 또한 자본과 권력의 한 축으로서 이 체제를 유지 강화 발전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 알면 저런 짓을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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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1 2019/05/26 21:31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아주 오랜 만에 재미있는 할리우드 활극 영화를 한 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헌터 킬러>라는 영화인데 이런 이야기다. 미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러시아 국방장관이 쿠데타로 러시아 대통령을 축출하고 전운이 고조되는 이 와중에 미국의 용감무쌍한 군인 아재들이 러시아 해군기지 한복판에서 러시아 대통령을 구출하고 국방장관을 제거한다는 정말 용감무쌍하게 허무맹랑은 이야기다. 상징이나 뭐 그럴 듯한 의미도 전혀 없다. 그냥 나처럼 맥주를 마시면서 머리를 비우고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다. 아직도 이런 영화를 만드는 할리우드를 보니 할리우드의 미래가 암울하다. 
여튼 그냥 시각적 볼거리 이외에 이 영화에서 내가 하나 깨달은 건 저 놈의 나라에는 (실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매파든 비둘기파든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참 흥미로운 일이다. 한국의 정치 조직이나 시민단체나 심지어 노동조합이나 어느 조직이든 대부분 자신의 조직이 결정한 사안에 대해 구성원이 무조건 충성하고 따른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참 훌륭한 사람들이고 찬탄할 수 있는 문화다. 물론 노선의 차이나 여타의 입장으로 한 조직 내에서 대립하는 그룹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속한 노조(한국비정규교수노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몇 달 만에 그간 수년 동안 유지해 왔던 강사법에 대한 관점을 위원장과 집행부 몇몇에 의해 뒤집어졌는데도 집행부 내에서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조합원의 지위 변경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을 대의원 대회 한 번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인다. 강사법과 관련된 대의원대회 사정을 들어보니 아주 극 소수의 대의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그냥 거수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결정한 사안에 대해 무조건 믿고 따르는 풍토.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조합원 토론조차 없이 이미 결정하고 몇 번의 엉성한 간담회로 밀어 붙인 집행부와 이에 대해 일언반구 반론이 없는 조합원들. 중앙 집행부가 결정하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분회의 집행부들을 보면 이 노조의 미래가 할리우드의 미래와 얼마나 다를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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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29 2019/05/26 2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