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택시 드라이버>와 옴니버스 영화인 <뉴욕 스토리>가 인상적이었다. 마틴 스콜세지는 <뉴욕 스토리>에서 첫 번째인 "인생수업"을 연출했다. 시니컬한 인물과 화려한 이미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모두 20대 중반에 본 영화들이니 20년도 더 지난 영화들에 대해 어떤 감흥을 되살리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두 영화 이후에도 몇 편을 더 봤는데, 이 두 영화와 비교해서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어제 우연히 <휴고>(2011)란 영화를 봤는데,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이전에 본 그 영화의 감독이 맞나 싶었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우스꽝스러운 인물들과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설정과 내러티브. 단지 조르주 멜리어스를  추모하기 위한 영화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시계와 테엽 장치와 로봇이라는 기계적 장치만 부각되고 멜리어스가 왜 그토록 괴로워 하는지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우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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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7 2019/05/26 21:37

나에게 어떤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어떤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건 무엇일까? 나에게 활력을 주고 나를 위안하고 나를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것들. 뭐 몇 가지가 있겠지만 영감을 얻고 어떤 좋은 느낌을 받기 위해 나는 온천탕에 간다

 

내가 자주 가는 온천장 금천탕은 1시 전후가 가장 좋다. 물도 좋고 사람들도 별로 없다. 금천탕은 시사저널이나 주간경향, 때로는 주간조선까지 주간지 기사를 오려 코팅해서 탕에 놓아 둔다. 매번 주간지를 찾아서 읽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 좋은 배려다.

 

따뜻한 탕에 들어가 기사 하나를 다 읽으면 나와서 쉬고 또 들어가서 읽고 다시 나오기를 서너 번 반복하면 1시간이 그냥 간다. 중국이 만들고 있는 남중국해의 인공섬이 미국의 심기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지, 금세기에 화성에 10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스페이스 X의 계획, 겨울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 비법, 화학주(소주)가 미치는 해악 등. 일주일에 두 번 가면 국제, 경제, 북핵, 문화, 건강, 심지어 육아까지 다 챙길 수 있다.

 

이렇게 자주 온천탕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그냥 쉬러 가는 것이다. 목욕탕에서 쉰다는 말이 좀 그렇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는 데는 온천이 제일이다. 이렇게 쉬면 좋은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몸도 마음도 편안하다. 온천이 나에게는 일종의 삶의 위안인 셈이다. 위안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며칠 전 우연히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을 또 보았는데, 이 영화는 나에게 좀 특이한 인연이 있는 영화다. 1996년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고 <부산매일신문>에 비평을 썼다. 당시 학부 학생이었던 내게 비평을 쓸 생각이 있느냐 물었던 사람은 시간강사였던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에는 내 이름이 이니라 이 선생님 이름으로 글이 실렸다. 이 분은 내게 신문사에서 학생은 안 되고 영화평론가만 된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지금은 폐간 되고 없는 신문사인데 망했다는 소리를 듣고 꼬시다고 생각했다.

 

여튼 그때 보고 그 사이 또 한 번 봤으니 며칠 전 본 게 세 번째인 모양이다. 지금 그 글을 찾을 수도 없고 그때 내가 어떤 글을 썼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체 나는 어떤 글을 쓴 것일까? 다시 이 영화의 비평을 쓴다면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뜨거운 탕에 들어갔다.

한 참을 생각하다 겨우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삶을 위안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도대체 어떤 삶일까?” 그래 하루하루가 구질구질하고 옷에 달라붙은 오래된 껌처럼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고 더 지저분하게 변색되는 그런 오물 같은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이런 일상을 감내할 이유가 있을까? <비밀과 거짓말>은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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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6 2019/05/26 21:36

상품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기준은 무엇일까?

 

학생들과 영화 <더 기버>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난데없이 불쑥 던진 질문은 아니고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어이 학생은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지목된 학생 몇몇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어 "사람은 태어나는 것일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당연히 대답은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은 태어난다. 멸종한 하와이안 나무달팽이조차 자웅동체임에도 수컷이 없이는 새끼를 밸 수 없다고 한다. 만들어지는 인간이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만들어진 인간은 인조인간이거나 복제인간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어떤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셈이다. 

 

<더 기버>의 도입부에 공동체의 세러머니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의 핵심인데, <더 기버> 공동체의 정체를 제시하는 시퀀스라고 할 수 있다. 세러머니 전날 주인공 조너스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Tomorrow  we'd be assigned our jobs, our purpose.”

 

<더 기버>의 공동체에서 학생들은 졸업을 하면 미리 결정된 직업을 각자에게 부여한다. 이미 그들의 목적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에서 아이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유전학자들의 가공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공동체에는 ‘출산모’라는 직업이 있다.

 

학생들은 그제야 상품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얼핏 이해한 듯하다. 이 공동체에서는 누구든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이런 대체를 ‘임무해제’(Release to Elsewhere)라고 부른다. 

 

다음 시간에는 학생들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에 대해 잠깐 언급할 건데, 당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일부 사람들이 내뱉은 ‘시체장사’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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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4 2019/05/26 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