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10년 동안 읽지도 않았고 관련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계속 <자본>을 공부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주변에서 <자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별로, 아니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문제인데 오늘 그냥 끼적거려 보았다.

변화란 무엇인가? 운동은 변화를 표현한다. 운동과 변화는 같은 말이다. 유물론의 기본 명제는 모든 사물은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물질적 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과학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애를 썼던 이유는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결이 시대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맑스 역시 물질적 우주의 운동과 변화를 확립하고 이를 인간 사회의 역사와 경제적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초기 맑스의 헤겔 비판의 핵심은 세계의 유물론적 원리를 확립하려는 목적에 집중되어 있다.

맑스는 변증법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국 변증법을 주제로 쓴 글은 없다. 사실 맑스는 <자본>에서 운동과 변화의 원리로서 변증법을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굳이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맑스는 <자본> 1편 상품과 화폐에서 상품의 두 요소인 사용가치와 가치를 통해 노동의 이중성을 서술하고 이를 상품과 나란히 외적 실체로 외화되는 화폐를 연역하는데, 이 1편이 바로 내적 모순의 외적 모순으로의 전화라는 변증법적 원리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맑스는 <자본> 1판 서문에서 <자본>의 목적이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 내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기에서 맑스는 "궁극적인 최종목적(der letzte Endzweck)"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 '궁극적'이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다른 말로 <자본>의 목적은 운동과 변화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맑스는 2판 서문에서 물질의 운동과 변화를 헤겔의 "이념"을 비판하면서 변증법의 원리로 규정한다. 맑스는 "관념적인 것(Ideelle)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변역된 물질적인 것(Materielle)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맑스에게 운동과 변화는 물질적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근본적이다. 지금까지의 과학과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운동과 변화는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원리다. 변증법이란 이와 같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기술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든 물질적 우주의 차원에서든 운동과 변화가 하나의 원리라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변증법과 관련하여 잘못된 오해는 내적 모순을 이루는 단위를 "대립물의 통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립물(Gegenteil)의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인해 모순을 해소하고 외적 모순으로 이행한다는 것인데, 이는 맑스가 <자본>에서 쓰고 있는 “Gegenteil”을 해석하는 문제에서 발생한다.

맑스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처음 “Gegenteil”을 쓴다. 이 개념을 사용가치와 가치를 대립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맑스는 “등가형태를 고찰을 통해 드러나는 첫 번째 특징은 사용가치가 그 역(Gegenteils)인 가치의 현상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영어 번역은 모르겠으나 MEW 23권을 번역한 <이론과 실천>의 1995년 판에는 “사용가치가 그 대립물(Gegenteil)인 가치의 현상형태로 된다”고 번역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과 관련된 책들은 모두 변증법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적대적인 대립 구도도 파악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Gegenteil”을 대립으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가?

변증법을 설명하는 많은 책들에서 변증법은 양질전화, 부정의 부정, 대립물의 투쟁이라는 법칙으로 쓰고 있지만 이는 변증법을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적 모순은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립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두 요소의 자기 발전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가치와 사용가치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사용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호 의존적 관계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본과 노동은 적대적인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본과 노동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두 요소가 긴밀하게 의존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상품 생산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를 멸할 수 없다. 단지 어느 정도 힘의 우위를 통해 서로를 제약할 수 있을 뿐이다.

“Gegenteil”을 반대, 또는 역(逆)이 아니라 대립으로 번역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서술에서 갖는 맥락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동을 위해 이데올로기로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연구를 위해서도 실천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왜곡된 현실 인식은 왜곡된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되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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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4 17:03 2016/11/24 17:03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다."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에 등장하는 문장인데, 원래 문장은 이렇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을 존재의 유한성과 종교를 연결시킨다. 종교가 인간 오성의 표현이라는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은 유한한 존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외적 대상으로 실현한 것이라는 말과 같다. 맑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인간의 유적 본질에 대해 주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에게 내재하는 고유한 본질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현대 철학에서 관계는 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개념이다. 관계에 대한 물음은 판단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데, 관계의 판단은 어떤 판단이나 어떤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관계는 단지 하나의 항을 다른 항과 관련시킴으로써 성립된다. <A는 B다>와 같은 명제의 경우 B는 A의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A를 C와, 또는 D와 연결시키면 판단은 달라진다. <A는 B보다 크지만 C보다 작다>. 예를 들어 <하늘은 푸르다>는 명제에서 <하늘>과 <푸름>의 관계는 정오와 해질녁에 따라 다르다. 관계들은 한 사물의 속성이나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영희는 철수보다 크지만 영희는 갑수보다 작을 수 있다. 그러므로 관계는 관계하는 항들에 외적이다. 관계하는 항들이 변하면 관계도 변한다.

들뢰즈는 관계는 항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고, 그래서 관계는 일시적이고 이행적, 또는 과도적이라고 말한다. 들뢰즈가 관계를 관계하는 항들에 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관계의 문제가 변화와 연결되고, 말하자면 끊임없는 생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는 말은 인간은 관계를 통해 변화하고 그러한 변화가 전체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관계가 일시적이고 이행적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멈추지 않을 뿐더러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이렇게 관계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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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9 21:54 2016/10/09 21:54

이전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인류 생명의 기원이 외계라고 말하면서 지구는 외계의 지적 존재가 건설한 감옥이라고 말했다.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외계의 지적 존재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발생한 다양한 범죄에 대응하고 범죄자들을 영구히 추방하기 위해 행성을 발굴하였는데, 지구가 범죄자들의 감옥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심오한 윤리적 동기가 내재해 있다. 고도의 문명을 건설한 존재는 과학의 발달 수준에 상응하는 정신적 문화 수준 또한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공동체에 해를 끼친 범자자일지라고 윤리적 차원에서 이들을 좁은 감옥에 가두는 것을 용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생존이 가능한 행성에 격리 추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누군가가 그런 외계의 존재는 그 기원을 어디서 가지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물음은 동의반복에 불과하고 밑도 끝도 없는 순환논리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저 원시 상태의 생명체에서 수백만년 동안 진화해온 결과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이런 류의 생명 진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으면 창조론과 다른 어떤 논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지만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런데 이 분야를 직업으로 삼아 연구한다면 굉장히 골치가 아플 것 같다.

대기 중 산소 농도는 생명체의 진화와 대멸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한 이후 최소 11차례의 멸종이 발생했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5차례의 멸종을 대멸종(Mass extinction)이라고 한다. 대멸종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것은 약 2억4500만년 전에 일어났다. 고생대 페름기에서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걸친 대멸종으로 인해 당시 해양생물의 96% 이상이 멸종했다. 과학자들은 대멸종이 대규모 화산 폭발과 더불어 산소 농도가 낮아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072047005&code=610103#csidx8542ee4b698688fbbb7bfb4497589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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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8 15:11 2016/10/08 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