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록시마 b

우주 2016/09/24 16:40

나는 인간이 지구를 떠나 태양계 너머로 나아가는 시대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천 년을 더 살면 인간이 은하계로 진출하는 모습를 볼 수 있을까? 천 년을 지금처럼 산다면 지옥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나는 지구를 벗어나 저 우주로 가고 싶다.

 

프록시마 b가 속해있는 센타우르스 자리 프록시마 별은 지구로부터(태양계로부터) 가장 가까운 별인데 4.2광년 떨어져 있다. 빛의 속도로 4.2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빛은 1초에 30만㎞를 움직이니 40조㎞에 해당하는 거리다. 가장 가깝다고는 하지만 현재 우주탐사선 기술로는 몇 만 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SF와 현실 사이의 벽은 높지만 가깝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항성간 우주탐사를 할 때 첫 번째 목적지로 가장 가까운 항성계를 선택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정일 수 있다. 그곳에 행성까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2016년 4월12일 실제로 그런 탐사 계획이 발표되었다. 러시아의 부호인 유리 밀너가 태양으로부터 4.37광년 떨어진 센타우르스 자리 알파별에 우주탐사선을 보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브레이크스루 스타샷’이라는 이름을 단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그는 우선 1억달러(약 1200억원)를 기부했다. 전체 예산은 50억~100억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프로젝트에는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부인인 앤 드루얀 같은 명사들이 참여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32053005&code=610101#csidx47b1270faaf6727afd7a9f4c2566e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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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4 16:40 2016/09/24 16:40

<이퀼리브리엄>을 다 본 학생이 정확하게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사회에서 개인들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는 모양이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서양 철학에서 근대 철학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인간은 이성적 존재고 이성적 존재는 자율성에 근거하는데, 자율성은 자유로운 존재, 즉 자유의 근거다. 자율성과 주체성은 같은 말이다. 칸트에게 이성적 존재가 곧 자유인이라는 전제는 칸트가 살던 계몽주의의 시대의 이념이기도 하다.

헤겔에게 자유는 칸트와 다르지 않지만 설정 방식이 좀 다르다. 헤겔에게 자유의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시민사회에서 개인들 사이를 규정하는 원리로 확대된다. 헤겔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 부자유하다고 말한다. 부자유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해야만 한다. 즉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립해야만 한다. 여기서 주체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겔에게 진정한 주체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헤겔이 소외를 주체성의 조건이라고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주체성의 실현이 관념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성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제기된다. 나와 세계의 일치, 곧 나와 세계의 통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헤겔 자유 개념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헤겔은 내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곧 나와 세계의 일치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지만 현실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시민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지점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사회에서 개인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나는 타자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지만(시민사회는 분업체계다) 나와 타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대립적이다. 내가 나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타자들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관계다. 그래서 헤겔은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즉 개인이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해관계와 타자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적대적인 시민사회에서 나와 타자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헤겔과 맑스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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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2 17:17 2016/09/22 17:17

주체성과 소외에 대한 물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서양 철학에서 주체성과 소외에 대한 물음은 세계와 나, 나와 세계의 근원적인 일치와 불일치에 대한 문제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주체라는 것은 헤겔의 말처럼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는 나와 세계 사이에 간격이 발생하고 내가 이 세계에서 주체로서 존립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소외는 나와 세계 사이의 어떤 불일치, 아직 일치에 도달하지 못한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세계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를 해소하는 것, 나와 세계의 통일, 즉 일치는 곧 소외의 극복이다. 헤겔에게는 이러한 소외의 극복, 또는 해소가 일치를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맑스 역시 나와 세계의 간극, 불일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소외는 필연적이다. 맑스가 공산주의를 과정으로서의 운동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소외의 극복이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에게 소외는 극복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상태이지 극복을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다.

최근 생각하는 거지만 맑스의 이 소외는 굉장히 중요하고 재미있는 주제인데, 나는 왜 맑스를 건너뛰었을까? 그때 계속 맑스를 붙들고 파고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아마 나는 그런 끈기와 인내를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일찍 자빠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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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17:00 2016/09/16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