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가 잠깐 언급했던 표창원 의원이 발의한 <동물보호법> 개정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기사에 실린 내용입니다.

 

<표창원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은 “현행 동물보호법에서 금지하는 동물학대 행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해 처벌의 실효성을 강화한 개정안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16일 밝혔다. 개정안은 ▷도구ㆍ열ㆍ전기ㆍ물 등에 의한 물리적 방법이나 약물 약품 등에 의한 화학적 방법으로 상해를 입히는 행위 ▷동물의 목을 조르거나 매다는 행위 ▷높은 곳에서 추락시키는 행위 ▷자동차나 원동기장치자전거 등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행위 ▷고통스러운 환경에 가두는 행위 등을 동물학대로 규정하고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같은 학대행위가 확인됐을 경우 누구든지 소유자로부터 동물을 긴급 격리하더라도 절도죄로 처벌받지 않도록 했다.>

 

전 녹색당에 입당하면서 길냥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주위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길냥이들에게 관심을 갖게되자마자 제 눈에 길냥이가 들어오더군요. 제가 있는 곳은 유독 냥이들이 많습니다. 아마 학교라 학생들이 안정적으로 먹이를 주고 해코지 하는 사람도 없고 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먹이를 줄 생각을 못했는데, 어떻게 인연이 되어 작년부터 집 근처 냥이들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음... 무신론자였던 제가 고양이로 인해 급유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양이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가능할까? 더구나 예쁘고 귀엽기까지 한데 말입니다. 전 고양이를 아주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세상에 고양이처럼 귀엽고 예쁜 동물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물이라는 게 사실 누가 "야 이거 선물이야" 이렇게 말하고 주지 않는 이상 이게 선물인지 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아 그게 선물이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점에서 진정한 선물은 늘 그런 식이지요. 마치 사랑하는/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서야 "아 이/그 사람은 나의 삶에 주어진 선물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이라는 게 조건 없이 주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순수한 선물" 이니 "조건 없는 용서"니 이런 말은 초월적 이념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냥 이데올로기라는 거지요. 사실 모든 선물은 어떤 조건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신이 인간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보낼 때 분명 어떤 조건을 내 걸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게 뭘까요?

 

만약 이 도시에, 한국의 도시는 특히 삭막합니다, 길거리에 고양이도 한 마리 없고 비둘기나 새도 없고 오직 사람들만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전 그냥 지옥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보낸 조건이 뭘까 더 궁금합니다.

 

또 긴 글이 되었네요. 여튼 부산에는 많은 길냥이들이 있고 이 길냥이를 어떤 사람들은 골치아픈 존재로 여기기도 합니다만 우리 사회에서 이제 서서히 길냥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지방자치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각 구청이 실행하고 있는 방안을 보면 단지 길냥이를 잡아서 중성화 수술하는 것에 그칩니다. 그것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산도 적고 담당 공무원의 인식 문제도 있고 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지역의 단체들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실제적으로> 만들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바랍니다.(2016년 8월 21일 오후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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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18:04 2016/09/03 18:04

[시론]히틀러가 정신질환자일 가능성도 생각해보자

박경신 | 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강남역 화장실 여성살인 사건을 두고 여성혐오 범죄인지 정신질환 범죄인지 또는 ‘묻지마 폭행’인지 논란이 뜨겁다고?

‘논란이 뜨겁다’고 보도하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이다. 일부 종편과 일베 말고 여성혐오 범죄임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런 논란과 무관하게 첫째, 무고하게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있고 둘째, 아동학대의 피해자들이 그렇듯이 신체적 약자인 여성은 항상 이유 없는 폭행 대상이 쉽게 될 수 있다는 상황에 통감하고 있다. 또 상당수 사람들은 한국의 성 차별적 상황에서 여성은 카르텔을 유지하려는 남성들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참고로 ‘세계여성포럼’이 2015년 발표한 ‘성(性) 격차’ 세계 랭킹에서 한국은 중국이나 캄보디아보다도 낮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번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여성차별철폐를 위해 더욱 단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논란이 있는 것처럼 보도하면서 극소수 여성혐오자(여혐자)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이다.

바로 작년 6월에 한 백인청년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시의 흑인교회에 들어가서 총기 난사를 했을 때 어느 누구도 그것이 증오범죄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모두가 미국사회에 인종차별·혐오의 문제가 있고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미친놈’이었기에 그런 차별적 이념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음에도 동의했다. 무슬림청년이었다면 ‘테러리즘’으로 규정되어 훨씬 더 많은 수사 자원이 투입되었을 거라는 비판이 있었을 뿐이다.

혐오는 두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당연히 두뇌에 문제가 생기면 혐오는 더 증폭될 수 있다. 이미 10년 넘게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을 통해 인종차별 및 혐오가 뇌의 특정 부분의 활성화와 관련이 있음이 밝혀진 바 있다. 뇌의 관련 부분에 문제가 생겼는데 차별이나 혐오적 성향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히틀러의 정신질환 가능성에 대해서 밤을 새우고 토론해도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가 인종혐오 범죄임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강남역 사건이 ‘묻지마’ 폭행임을 주장하는 분들이 여성혐오 범죄임을 배제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면 이를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번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만을 보면 여성 중에서 무작위로 상대를 선택한 묻지마 범죄임도 명백하다. 헌법의 평등원칙 내용은 자의적인 차별의 금지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혐오·차별과 자의적인 혐오·차별은 서로 반대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 사람을 혐오하는 것을 ‘자의적인 혐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어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의도적인 차별’이라고 생각하고 금기시해왔다. 이번 사건도 ‘묻지마’이기 때문에, 즉 피해여성을 공격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혐오범죄임이 명백한 것이다. 살인의 동기를 파보면 아무런 이유 없는 여성에 대한 혐오만 똘똘 뭉쳐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이 이 사건을 정신질환 범죄로 구분하면서 구태여 여성혐오 범죄가 아님을 강조하며 ‘논란’을 자초했다. 하지만 면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강간 또는 아동학대는 틀림없이 신체적 약자를 향한 혐오범죄이고 이 사건도 마찬가지이고 경찰로부터 더 인정받을 것도 없다. 2012년 10월 여성 12명을 연거푸 성폭행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성남 발바리 사건’의 범인 B씨(47)도 2005년 특수강간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었으나, 당시 정신병(심신미약)을 인정받아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났었다. 경찰 발표 때문에 싸우지 말고 그냥 대범하게 해석해주자. 강남역 사건에서도 ‘정신질환이니 무죄’라는 항변이 나올 수 있으니 수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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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4 20:44 2016/06/04 20:44

[책] 불가능의 예술

2016/05/29 15:5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72053005&code=960205

불가능의 예술 / 바츨라프 하벨 지음·이택광 옮김

Paul Wilson이라는 사람의 영역을 번역했을 텐데, 체코어 전공자가 번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과 삶]벨벳혁명 지도자 하벨이 토해 낸 ‘양심의 소리’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인민들은 봉기했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었다. 잠시 체제의 개혁이 진행되는 듯했으나 소비에트 탱크의 침공을 받으면서 자유의 꿈은 사라졌다. 소비에트는 ‘정상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금 전체주의를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반체제 작가로 낙인찍혀 요시찰 명단에 올랐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 금지됐고 오히려 나라 밖에서 주목받으며 공연됐다. 그러자 하벨은 극작을 뛰어넘는 정치적 저항에 뛰어든다. 인권 존중을 외치며 1977년 일어났던 ‘77헌장 운동’의 중심에는 하벨이 서 있었다. 물론 그는 투옥됐다. 하지만 저항 의지는 꺾이지 않았으니, 감옥에서 쓴 그의 글들은 지하 출판물의 형태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9년, 동유럽 공산체제가 무너지던 그 해에 프라하 광장에서 인민들의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자는 하벨이었다. 11월19일 프라하 광장에는 약 20만명의 시위대가 집결했고 이튿날에는 두 배가 넘는 인원이 모였다. 이 대대적 시위는 거의 12월 말까지 이어졌다. 당시 하벨이 보여준 카리스마의 뿌리는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지식인으로서의 양심, 아울러 그의 글에 언제나 담겨 있던 인도주의 정신이었다. 시위대는 하벨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따랐다. 결국 12월28일 당은 일당제 포기를 선언하면서 권력을 내려놨다. 약 40일간 이어진 무혈의 혁명은 그렇게 인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기에 이른바 ‘벨벳혁명’으로 불린다.

 

이 책은 벨벳혁명의 지도자 하벨, 탈공산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1993년 슬로바키아와 분리된 이후 체코의 첫 대통령으로 재신임된 그의 연설문집이다. 대통령 선출 이틀 뒤인 1990년 1월1일의 ‘신년사’부터 1996년 프라하 공연예술 아카데미에서 행한 연설까지 모두 35차례의 연설 원고를 실었다. 한마디로 요약해 그의 정치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육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연설문들은 다른 정치 지도자들처럼 참모들이 대신 써준 것이 아니라, 하벨 스스로 펜으로 꾹꾹 눌러 쓴 육필이다. 정치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물론이거니와 빼어난 문장에서도 그의 남다른 ‘깊이’를 느끼게 한다.

 

책에 수록된 글들은 자신의 생각을 치장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는 까닭에 쉽고 곡진하다. 때로는 ‘인간 하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글도 있다. 예컨대 그는 대통령이 된 지 6개월쯤 뒤에 한 연설에서 이렇게 털어놓는다. “마침내 (내가 대통령이 됐다는) 이 모든 일들이 현실감으로 다가오면서 제게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기분이 급격히 우울해졌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지탱했던 모든 생각과 목표, 기술, 희망, 결의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자신감을 잃고 맥이 빠진 것은 물론이고 상상력이 고갈됐다고 느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맡겨진 과업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한번도 제대로 숙고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감정의 심연 어딘가에 두려움이 놓여 있었습니다.”

 

물론 책의 핵심은 ‘실천도덕’으로 불리는 하벨의 정치철학이다. 그에게 정치란 ‘통치의 기술’이 아니라 ‘도덕의 실천’이었다. 그는 이 답답한 현실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역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책임감, 현존하는 것 위의 어떤 것에 대한 더욱 높은 책임감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란 권력의 기술이 아닙니다. 저에게 정치란 주어진 이데올로기나 이념도 아닙니다. 정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행위도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는 세계를 책임지고자 하는 개인의 도덕에 근거합니다.”

 

혹자는 그의 정치론을 예술가적 이상주의로 일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도덕적 정치철학을 끝까지 실천하며 살았던 하벨에게 정치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심원한 지점을 내다보지 않는 정치는 기득권 나눠먹기, 회유와 협박, 조작과 기만에 물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벨에게 정치란 도덕적 양심에 기반한 “불가능의 예술”이다. “양심은 인간 존재에 잠들어 있는 신이며, 우리는 이 신을 믿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달라야 합니다. 양심이 이성을 능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새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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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15:56 2016/05/29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