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새로움에 관한 생각을 나눠 볼까 합니다.
새로움, 새롭다는 게 뭘까, 도대체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뭐가 있는가 되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뭐가 새롭겠습니까? 노동하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세상, 삶의 수단으로서 노동이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노동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어떤 무엇인가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고 똑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어제와 같은 회사나 공장에서 어제와 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는 쳇바퀴 돌 듯 도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건 무슨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70년도 더 전에 철학자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약 사람들이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면 노동은 페스트처럼 기피하게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노동이 삶의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 되어버린 곳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상투성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그래서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이게 상투성에 지배당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위안이라도 받지 않으면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상투성이 우리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새로움, 새로움을 찾는 것은 이런 상투성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새롭다는 게 뭐겠습니까?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거고, 조금 전과 지금이 다르다는 거지요. 매순간 이질적이고 낯선 어떤 것이 출현하는 겁니다. 기존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것/상태로 되돌릴 수 없고 그래서 매 순간 나에게 충격을 주는 그런 거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방도, 식탁도 똑같이 어제의 것이지만 사실 방도, 이불도, 식탁도 어제의 것이 아닙니다.

새로움은 곧 운동과 변화를 의미합니다. 운동은 매 순간 새로운 어떤 것을 야기합니다. 변화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그래서 운동과 변화는 같은 말입니다. 운동과 변화 속에서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천 년의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거대한 산만한 바위도 말랑말랑한 젤리와 다름없는 법이지요. 운동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도 우리 삶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누군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맛있는 국밥이라도 한 그릇 먹었다면 그 사람도 변화고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도 변합니다. 배고파서 굶어 죽었다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그 사람은 죽었겠지만 그 사람이 속했던 세계는 변하겠지요. 운동과 변화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합니다.


제가 일이 좀 있어 니체 공부를 했는데, 이 사람은 이 세계를 주인과 노예에 빗대어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니체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권력은 기존 가치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노예가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확립된 가치는 우리에게 ‘예’와 ‘아니오’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예’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반면 ‘아니오’는 긍정적입니다. 여기서 기존의 가치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창조자들의 관점이 대립됩니다. 물론 새로운 가치도 곧 확립된 가치가 되어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새로움이란 지속적인 창조이기 때문에 확립된 가치들의 질서와 창조적 무질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이 새로움의 출현이기 때문이지요.
 

니체는 영원회귀를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하는데,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니체에 따르면 언제나 매 순간 새로운 어떤 것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든다고 합니다. 어제와 오늘은 다르지요. 내일도 오늘과 다를 겁니다. 이런 차이가 새로움을 긍정적인 가치로 만듭니다. 영원회귀는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우월하고 더 나은 어떤 것을 만든다고 합니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일상적인 상투성 속에서는 긍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어떤 것조차 기존의 것으로 환원되어 버리고 기존의 것에 의해 평가되고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새로움이란 기존의 어떤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겁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순간, 그렇지만 매 순간 우리에게 도래하는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움은 곧 운동과 변화를 의미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매 순간 우리를 감싸는 미래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10년 전, 또는 20년 전과 비교하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아동학대와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 생명의 가치라는 점에서 동물보호법에 대한 관심,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시민들에 대한 공동체의 배려의식까지 사실 많은 것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노동자들은 억압받고 있고 도시와 농촌이 공존이 아니라 종속적인 관계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바꿀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움을 매 순간 새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지요. 니체가 영원회귀를 끊임없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새로움의 원천이라고 말한 것처럼 운동과 변화는 우리를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우리 녹색당이 바로 새로움을 창조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2016년 9월 1일 오후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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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18:13 2016/09/03 18:13

<은하철도 999>에는 네 부류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크게는 인간과 기계인간의 대립이지만, 여기에는 철이처럼 기계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과 따듯한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기계인간이지만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기계인간, 인간성을 상실한 무자비한 기계인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계몸을 갖길 원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한 기계인간에게 지배당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기계인간이 되고 싶어 합니다. 기계인간은 최상층 지배계급이니 기계몸을 갖는 건 어쩌면 신분상승인 셈입니다. 기계인간이지만 인간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부류는 대부분 여성기계인간이고 이들은 인간을 동정하고 인간을 돕다 파괴되기도 합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남길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든 노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인 지구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지만 결국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요.

 

전 개인적으로 <은하철도 999>는 성장하는 아이들의 정서에 해악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용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정서는 상당히 멜랑콜리하고 거의 죽음의 정서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회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네 부류 중에 꼭 누군가가 죽습니다. 이런 암울하고 부정적인 정서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무기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메텔과 함께 기계별에 온 철이는 메텔이 기계별의 지배자인 기계여왕의 딸이라는 것과 자신이 기계별을 유지하기 위한 부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계별은 진짜 모든 것이 기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메텔과 쌍둥이 자매는 여왕의 명령으로 철이와 같은 용감한 아이들을 유인 납치하여 기계별로 데리고 오는데, 이 아이들은 기계별을 유지하기 위한 훌륭한 부품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오늘과 같은 삶을 되풀이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고 그래서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거라는 생각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을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상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새로움은 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로 위안하려고 하지요.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런 상투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무기력인데, 이런 무기력을 깨는 유일한 길은 변화와 운동을 긍정하는 거지요. 운동은 매 순간 새로움의 출현이고 세계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은하철도 999>는 매회마다 은하계를 지배하고 있는 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그냥 체념하고 살아가라는 거지요. 물론 철이는 기계별을 탈출합니다만 철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은하철도 777을 타는 것밖에 없습니다. 철이가 기계별을 탈출하면서 막 역에 들어온 은하철도 777을 타려는데 메텔과 닮은 메텔의 쌍둥이 자매가 철이와 같은 소년을 데리고 내립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란은 듯 말입니다. (2016년 8월 29일 오후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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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18:11 2016/09/03 18:11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TV에서 일요일 오전 8시에 <은하철도 999>를 방영했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25분짜리 두 편을 연속으로 방영했는데, 전 집에 TV가 없어 몇 편 못보고 스무 살 나이가 되어서 어떤 일로 처음부터 다시 쭉 본 적이 있습니다.


신체의 기계화(기계인간)가 일반화되어 부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기계별로 가서 신체를 기계로 바꿉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계별로 가는 표를 사기 위해 은하철도역 주변에 슬럼가를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철이(일본명 데츠로) 역시 기계몸을 얻기 위해 은하철도역에 형성된 슬럼가로 가던 도중 기계백작의 인간사냥에 어머니를 잃고 도망가다 메텔에 의해 구조됩니다.

 

메텔은 철이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는데, 자신과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기계별로 가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철이는 공짜로 메텔과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어머니 몫까지 살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기계별로 향합니다. 이게 첫 회의 이야깁니다. 그런데 끝가지 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철이는 메텔에게 납치되어(꼬임에 빠져) 기계별로 가게 되는데, 메텔 자매(메텔은 쌍둥이 자매가 있습니다)는 이런 식으로 유소년 납치극을 벌여왔다는 게 마지막 회에 드러납니다.

 

철이와 메텔은 기계별로 가는 여정에서 많은 기착지를 거치게 됩니다. 이들이 들르는 기착지에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출현합니다. 그들이 이 둘을 맞이합니다. 철이는 이들과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끊임없이 '인간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 과정의 주요한 대립은 기계인간과 인간의 대립인데, 기계인간은 무한한 생명을 얻었지만 오히려 붉은 피가 나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기계인간은 쓸쓸하게 죽습니다. 기계 또한 인간처럼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영원성을 누리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이렇게 기착지를 거쳐 갈 때마다 철이는 정신적으로 성숙해갑니다. 작가인 마쓰모토 레이지의 말대로 우리들이 이미 겪었으며 누구나 겪는 소년 시절에 대한 일종의 우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은하철도 999>를 이대로 보면 애틋한 사연을 가진 여러 기계인간과 인간들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어떤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볼 때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노동하면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이와 메텔이 거쳐 가는 행성에는 인간과 기계인간이 등장하지만 아직 기계몸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이고 슬럼가에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이들은 대부분 지구인이지만 행성을 개척할 당시 이주했지만 다시는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이 고향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지구로 가는 표를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계인간들은 기계몸임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잔치를 벌이며 이들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인간을 종처럼 부리고 괴롭힙니다. 타락한 자본가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는 거지요.(2016년 8월 29일 오후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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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18:09 2016/09/03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