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과 소외에 대한 물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서양 철학에서 주체성과 소외에 대한 물음은 세계와 나, 나와 세계의 근원적인 일치와 불일치에 대한 문제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주체라는 것은 헤겔의 말처럼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는 나와 세계 사이에 간격이 발생하고 내가 이 세계에서 주체로서 존립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소외는 나와 세계 사이의 어떤 불일치, 아직 일치에 도달하지 못한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세계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를 해소하는 것, 나와 세계의 통일, 즉 일치는 곧 소외의 극복이다. 헤겔에게는 이러한 소외의 극복, 또는 해소가 일치를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맑스 역시 나와 세계의 간극, 불일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소외는 필연적이다. 맑스가 공산주의를 과정으로서의 운동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소외의 극복이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에게 소외는 극복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상태이지 극복을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다.

최근 생각하는 거지만 맑스의 이 소외는 굉장히 중요하고 재미있는 주제인데, 나는 왜 맑스를 건너뛰었을까? 그때 계속 맑스를 붙들고 파고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아마 나는 그런 끈기와 인내를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일찍 자빠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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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17:00 2016/09/16 17:00

2016년 2학기 강의 1

일상 2016/09/10 20:55
2016년 2학기 첫 강의. 강좌의 비공개 명칭은 SF영화와 철학이다. 이 강의는 8편의 SF영화와 4편의 SF애니메이션을 통해 “동일성과 타자성”이라는 큰 주제에서 개별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전 학기와 달리 강의를 좀 실험적으로 할 계획을 세웠다. 75분 강의 시간 중 30분은 영화보고 15분 선생이 강의하고 나머지 30분은 학생들이 돌아가며 소감이나 영화에서 토론할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강의는 단 15분, 얼마나 멋진 계획인가? 문제는 학생들이 강의 전에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하는데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화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강의 전에 미리 영화를 보고 오지 않는다. 전혀 없지는 않다. 10명 중 2명은 그래도 보고 온다. 학생들은 영화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런 강좌를 신청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강좌명에 영상/영화가 붙으면 왠지 좀 헐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헐렁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장치를 하나 설치했다. 기말시험은 강의와 관련해서 자신이 스스로 문제를 내고 문제에 답을 쓰는 것으로.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이게 바로 진정한 학습이 아니겠는가? 시험문제는 두 문제, 100점 만점에 문제 50점, 답 50점. 음.... 처음 해보는 실험이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실험은 실험.

강의에 대해 대충 소개하고 학생 한명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이건 상상력이 필요하다, 아침에 학생 방에서 눈을 떴을 때 학생은 깨달은 거야. 학생은 원래 지구인이 아니라 수십 년 전에 켄타우리 항성계의 어느 행성에서 지구를 관찰하는 임무를 띠고 많은 연구원들과 지구로 오는 도중 어떤 사고로 지구에 불시착했다. 고향 행성에 도움을 요청하고 다른 우주선이 올 때까지 DNA에 어떤 조작을 해서 기억을 봉인하고 지구인처럼 살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기억이 돌아 온 거지.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가서 엄마 아빠에게, 물론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로 기억을 봉인했어, 켄타우리 고향어로 막 이야기하는 거야. 드디어 기억이 돌아왔다고. 그런데 엄마 아빠는 못 알아 듣는 거야. 엄마가, 얘 어제 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오더니 맛이 갔나보다 이러는 거야. 그래서 학생은 우리말로 학생과 엄마 아빠가 다른 동료들과 켄타우리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야길 하니까, 아빠가 여보 재 좀 돌았나 보다. 어쩌지? 이러는 거야. 엄마 아빠는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안 돌아온 거지. 그럼 학생은 이제 어떻게 할거야?

나는 학생이 내가 예상하고 생각했던 말을 할 줄 알았고 그러길 기대했다.
학생 : (씩 웃더니) 그냥 살래요.
나: 엉? 뭐?
학생: 그냥 지구인으로 살래요.
나: .... 음..
다른 학생을 지목하며, 학생은 어떻게 할 거야? 그러자 그 학생은 이런다. “아마 지구보다 굉장히 과학이 발달했을 테니 그 기술을 떠올려 돈을 많이 벌 거 같애요.” 나는 또 다른 학생을 지목하고 똑 같이 물었다. 그 학생도 그냥 지구인으로 계속 살거란다. 또 다른 학생도 그냥 모른척 하고 지구인으로 살겠단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 봐 학생아 굉장히 중요한 임무를 띠고 먼 지구까지 왔으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임무를 수행해야지? 또 다른 학생 역시 그냥 지구인으로 평소처럼 지내겠다는 대답을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한국 교육의 본보기로군.”

사실 나는 학생들이 어떻게 할까 막 고민하고 엄마 아버지를 설득하고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쓰고 다른 동료들도 있을 테니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러길 기대했다. 내가 뭘 잘못 물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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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20:55 2016/09/10 20:55

다른 세계

일상 2016/09/10 20:51

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곳이 매번 일어나던 나의 집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어떨까? 물론 다른 곳은 다른 세계를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꿈을 꾼다. 나도 이런 꿈을 꾼다. 공상에 그칠 수도 있고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구나 여기가 아니라 저기 먼 곳으로 떠나길 꿈꾼다.

천상에서 노닐던 천사들이 어떻게 그만 지상으로 떨어졌다. 눈을 뜬 천사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갑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란 천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니 인간의 갑옷 속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은 천사가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 모든 걸 잊고 그냥 인간으로 살 것인가? 천상의 기술을 되살려 지상에서 비싼 값으로 팔아먹으면서 살 것인가?

플라톤은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천사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플라톤은 한때 어느 날 꿈에서 깼을 때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신의 발목을 보기도 했던 사람이다. 플라톤에게는 천상을 상기하고 되돌아가야한다는 것은 일종의 명령이다. 플라톤은 이런 우화를 반복하고 변주했다. 사실 플라톤이 쓴 모든 글은 이런 우화의 반복적인 변주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 곧 진리의 근원이라는 이 우화는 서양 문학과 연극, 영화의 마스터 플롯이다. 할리우드는 플라톤의 우화를 닳고 닳도록 써 먹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실증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잠시라도 이곳 지상이 아니라 저편 어딘가를 회고하듯 향수에 젖어 있길 바라는 모양이다. 이건 문학이나 영화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말처럼 그곳은 진리의 근원(철학)이자 우리가 돌아가야만 할 고향(역사)이기 때문이다.

영화 <인셉션>에는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 된 상황에 놓여 있는 불행한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자 이름은 “맬”인데 맬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꿈속으로 돌진한다. 만약 내가 꿈에서 한 여자와 아이를 낳고 수십 년간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서 보니 내가 현실의 내방에 누워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무엇을 하려고 할까? 나는 다시 꿈을 꾸려고 할 게 분명하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주는 별로 좋지 않지만 가끔 좋은 일도 생기는 그런 꿈.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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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20:51 2016/09/10 2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