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논문을 쓰는가? 이 문제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나 자신과 말이다. 대학에서 그나마 비정규교수로 남아있기 위해서,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2년에 한 편이라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좀 슬프다.

전국 대학에 비정규교수가 10만여명 된다고 한다. 10만 명이 2년에 한 편씩 논문을 쓰고 학회지에 투고한다고 생각하면 1년에 5만편의 논문이 '생산'된다. 비정규교수가 논문을 쓰는 이유는 나와 비슷하거나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구성과는 업적이고 업적을 많이 쌓아야 여러가지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논문을 쓴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건 나의 불행이자 우리 공동체의 불행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묻는다. 논문을 이렇게 생산하면서까지 대학에 비정규교수로 남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전임교수들은 왜 논문을 쓰는가? 전국대학에 전임교수의 수 또한 8만 여명에 달할텐데, 전임교원과 비정규교수의 논문편수를 합하면 1년에 거의 1만여 편에 이를 텐데 이 논문들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전임교수들이 논문을 쓰는 이유는 세세하기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승급 심사를 위해, 이런 저런 명목으로 연구비를 받기 위해서 일거다. 결국 이런 노문을 연구업적물이라고 부른다. 업적인 셈이다. 무엇을 위해?

그러면 이 논문들은 누가 읽는가? 나는 일주일에 제법 여러편의 논문을 읽는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나의 논문과 관련한 주제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나는 순수한 학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논문을 찾아 읽지 않는다. 일전에 동료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논문을 4 사람 정도는 꼭 읽는다고 한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논문 심사위원 2~3명과 자신의 아내, 그리고 나라고 말한다. 물론 나는 박선생님의 논문은 꼭 읽는다. 왜 읽느냐고? 우선 관련 강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나의 학위 논문과 관련해서 읽는다.

 
[세상읽기]정신노동의 위기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인공 지능이 과연 인간을 압도할 위협이 될 것인가는 많은 논쟁이 있는 문제이다.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이들은 그 위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며, 인공 지능의 발전에 대해 명확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명도나 경륜에 있어서나 이에 못지않은 많은 이들은 이러한 걱정은 기우일 뿐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나는 비관론 쪽에 더욱 끌린다.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내가 인공 지능에 대해 무얼 알아서가 아니다. 인공 지능과 경합을 벌이게 될 인간의 정신노동이 갈수록 왜소해지고 쇠퇴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AP통신의 기사가 있었다. 애플사의 당기순이익 발표가 있은 직후 이를 분석한 기사였는데,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 기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 기사의 작성 과정이었다.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 작성 프로그램은 애플사의 보고서를 놓고 이와 관련된 수백 개의 리포트와 문서들을 참조해 단 30분 만에 분석기사를 내놓은 것이다. 이는 분명히 컴퓨터 과학의 진보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정신노동의 쇠퇴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정신노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작업이 총체적인 인간 이성의 복합적이고 미묘한 작업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컴퓨터 프로그램과 다름없이 일련의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기계적 과정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는 회사 실적 보고서에 대한 기사라는 게 원래 그렇게 정형화되어 있는 자료들을 놓고 정형화되어 있는 정보들을 뽑아내는, 뻔하게 정해진 기사라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문과 여러 미디어에서 그렇지 않은 기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어떨까. 비단 저널리즘뿐만이 아니다. 가장 고단위의 정신노동 산물이라고 할 학술지 논문의 생산 과정과 생산물의 내용은 놀랄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고 이러한 경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핵심 어구와 핵심 논지의 방향을 입력하면 알아서 논문의 초벌을 생산하는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심지어 그렇게 투고된 논문을 심사하는 프로그램까지 존재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각종 소프트웨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매일매일 감가를 겪고 존재가치마저 위협당하는 정신노동의 직종은 그 외에도 무수히 많다. 이른바 제3차 산업혁명의 진전과 그 귀결인 전면적인 자동화(이 또한 오늘날 대단히 고색창연한 용어가 되었다)로 인해 노동이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위협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노동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정신노동이 정형화되고 기계화되는 쇠퇴 과정이 계속된다면, 기자건 교수건 변호사이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지금 존재하는 노동시장, 보상체계, 교육시스템 전반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생각하고 다시 설계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기술 변화의 흐름을 되돌릴 것이 아니라면, 인간도 사회도 이러한 흐름에 적응해 나가면서 기계와 데이터의 흐름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과 육신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찾아나가야만 한다. 

지금 우리가 상당한 숙련이라고 여기는 능력과 기능의 많은 것들은 조만간 거의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능력이 될 수 있으며, 지금까지 분명히 상당한 정신노동이라고 여겨져왔던 많은 것들이 데이터와 소프트웨어의 조작으로 간단하게 대체될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일련의 알고리즘으로 얼마든지 분해가 가능한 정신작용을 기계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며, 그것에 과도한 가치와 보상을 부여할 수도 없게 된다. 


기사 작성 프로그램이 쓸 수 없는, 오직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기사는 어떤 것일까. 임용과 재임용에 혈안이 된 대학의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쏟아놓는 종이 덩어리가 아니라 정말로 집단적인 지식의 증가에 기여할 수 있는 논문과 저서란 어떤 것일까. 기계와 소프트웨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날개로 삼아 이전까지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정신과 생각과 감정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은 어떤 것일까. 기계적 과정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진정 ‘인간적인’ 활동의 영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여기에서 떠오르게 되며, 정신노동의 미래라는 문제는 그 질문이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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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6 12:53 2015/05/26 12:53

나는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을 좋아한다. 그 사람의 글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나는 이대근 논설위원의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명쾌하게 글을 쓰는 글솜씨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대근칼럼]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는 언제 들어도 좋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유승희 최고위원의 ‘봄날은 간다’는 한 편의 공포 영화 같았다. 막말 폭언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그걸 말리는 난장의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처연한 가락이라니. 

그런 부조화를 영화 <블루 벨벳>에서 느낀 적이 있다. 성적 학대가 펼쳐지는 장면을 바비 빈튼의 발라드 ‘블루 벨벳’이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감싼다. 시각과 청각의 충돌, 그 어긋남에 매우 심란했다. 기이한 것과 익숙한 것, 역겨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이 동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이 불편했다. 폭력과 섹스, 정신착란이 뒤섞인 장면에서 로이 오비슨의 감미로운 노래 ‘인 드림스’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흐르며 귓불을 간질이는 몽환적 분위기도 감성에 교란을 일으켰다. <지옥의 묵시록>을 볼 때도 그랬다. 미군이 헬기 부대로 베트남 어촌을 공습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헬기 부대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끔찍한 살육전을 예고하는 긴장된 순간,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광기와 비극이 영웅적 서사처럼 묘사된 것이다. <시계태엽오렌지>도 청소년 폭력배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성폭행하는 장면을, 떠들썩하게 즐기는 한바탕 축제로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 폭력배 대장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다.

이런 불쾌감에도 세 영화가 폭력과 범죄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폭력을 과장된 스펙터클로 드러내는, 흔한 영화적 방법이 오히려 더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드러낸다. 폭력은 쉽게 목격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 예외적 현상이란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은 도처에 존재하는 폭력을 부정하는 폭력이다. 그보다는 아름다운 음악과 폭력의 결합이 빚는 괴기스러움이 오히려 폭력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 감미로운 노래 때문에 더 선명해진 폭력이 폭력을 폭력적이게 한다. 친숙한 것과 섞이고 일상에 스며들어 은폐되고 있어도 드러나고야 마는, 폭력에 내재한 감춰지지 않는 혐오감이야말로 폭력을 제대로 고발한다.

그래서 음악은 무죄다. 나는 여전히 블루 벨벳, 발퀴레의 기행을 즐긴다. 유승희에도 불구하고 봄날은 간다 역시 계속 불릴 것이다. 천양희 시인이 계간 ‘시인세계’(2004년 봄)에 산 제비 날던 고향 절골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이 있다. 봄 소풍 때 선생님의 요청에 그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는데 예쁜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무슨 슬픈 사연이 있었을까 생각하다 시집간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는 사랑하던 사람과 맺지 못하고 중매결혼을 했다. 언니는 친정 올 때마다 뒷동산 성황당과 암자를 찾았다. 성황당 돌탑에 돌을 올려놓고는 무언가를 빌었다. 그리고 암자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갈 때 언니의 분홍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앞서 가던 언니는 나지막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이런 추억은 한국인 누구나 공유하는 감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노래를 부른다는 건 한국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몇 해 전 인사동 한 선술집에서 선물로 받은 CD 두 장에는 서른세 개의 봄날은 간다가 담겨 있다. 가수도, 음색도, 리듬도, 장르도, 녹음한 시대도 다른 서른세 곡을 다시 들어본다. 체념한 듯 스산한 목소리의 한영애가 뿜어내는 데카당스. 슬픔을 자극하는 조용필의 비음(鼻音)이 격발하는 주체할 수 없는 한(恨). 너무 섬세해 상처받을 것 같은 심수봉의 여린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리는 작은 떨림의 물결. 남성다움의 과잉으로 아픈 가슴을 감추는 배호의 그 잘난 허세. 깊은 사연을 가슴에 묻고 있는 것 같은 굵은 목소리와 가녀린 정서가 혼성을 이루는 문주란의 미묘함.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장사익의 처절한 절규. 
 

하나의 노래가 서른세 개의 노래로 변주되는 동안 우리들의 삶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삶은 다 다르지만 알뜰한 맹세에, 실없는 기약에, 얄궂은 노래에 봄날이 가듯 어떤 인생도 흘러간다. 누구의 봄도 머물지 않는다. 열아홉 시절이 황혼 속에 슬퍼지는 건 황혼이 되어서야 열아홉이 절정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봄이 왔을 때가 아니라 봄이 갈 때 봄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떠나고, 소중한 것들은 왜 사라지고 마는가? 봄날은 간다는 그 상실을 목 놓아 부르지 않는다. 삶은 봄이 아니라, 봄이 가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걸 노래할 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래가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소멸과정이다. 그러나 소멸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혜와 성찰을 남긴다. 고은의 ‘그 꽃’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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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15:43 2015/05/25 15:43

대학에서 비정규직교수로 강의한지 올해 11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나는 강의를 참 잘 못한다고 생각한다. 학기말 실시하는 강의 평가가 썩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도 내가 강의를 세련되게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의 강의 평가 시스템이 정확하다거나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로 어쩔 수 없이 강의 평가를 한다고 한다. 물론 진지하게 평가에 임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가를 위한 시스템은 엉망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보일 수 있는 평가 문항들은 교수의 강의 전체를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할 뿐 아니라 사실, 엉망이다. 대학의 강의 평가는 그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얼마 전 신문에는 어떤 대학은 계약직 교수의 강의 평가가 4.7 이하일 경우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5.0 만점에 말이다. 나는 그 대학의 평가 시스템과 평가 항목이 궁금해졌다.

하여튼, 내가 강의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분들은 강의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비록 비정규직 교수로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강의가 즐겁다기보다 호구지책이라는 측면이 더 크다. 사실이다. 내가 강의에 이렇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내 강의가 재미있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하다. 학생들은 최근 부쩍 열의를 잃어간다. 나는 최선을 다해 강의를 해도 학생들은 시큰둥한 표정이거나 아예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거나 고개를 꺽고 자거나, 어떤 학생은 그냥 엎드려 자기도 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그런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성인인 학생들에게 그런 잔소리를 한다는 게 나 스스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학기 초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바쁘다. 왜 그런지 매번 생각해 보지만 별 이유 없이 바쁘다. 그래서 종종 강의 준비를 게을리 하게 된다. 강의가 매끄럽게 잘 진행될리 만무하다. 다행인지 학생들도 학기초에는 바쁘다. 여러 가지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도 강의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요즈음 나는 대학을 떠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대학을 떠나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내가 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로나마 남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그냥, 말 그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교양강의를 맡게 되고 그러면서 몇 년이 흘러가고 어느새 나는 대학에 눌러 앉아 대학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학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는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조금 연체를 할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사소한 것들인데, 여자친구는 내게 말한다. 그런게 이유라면 일반 시민으로서도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래 저래 고민이 많은 나이가 된 것이다. 이런 저런 고민들이 마치 내가 넘어야 할 산처럼 쭉 널어서 있다. 이산 저산 산을 오르는 재미는 이미 지났다. 나는 20대 청년이 아닌 것이다. 이제 중년이다. 곧 50이 되리라. 그때 나는 여전히 대학에서 학생들을 마주보고 있을까? 나는 그런 나의 미래가 두렵고 괴롭다. 나는 내 인생의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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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9 16:19 2015/03/29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