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성당

1987년 겨울과 1988년 초의 어느 시간이었다. 그때는 인천의 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연말에 이래 저래 싱숭생숭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선배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갔던 곳이 답동성당이었다. 그때만해도, 천주교신자였던 행인은 잠깐의 냉담을 회개하면서 답동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입구부터 본당까지 길 사이에 전시되어 있던 사진에 눈길이 돌아갔다. 1987년 대선부정사건, 특히 구로구청 사건의 사진들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였고, 내 친구들과 형들하고 돌아다니던 곳에 있는 구청이었다. 구로공단에 다닐 때, 여차저차한 일로도 갔었고, 집안 일때문에도 몇 차례 갔었고, 그냥 지나가다가 본 것만도 부지기수였던 구로구청이었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전쟁같은 일들을 답동성당에서 알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둔 이후 성당에 갈 일이 없었다. 실은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종교인으로 사는 걸 그만두었다. 당연히 성당이고, 예배당이고, 법당이고 간에 종교행사를 위해 들리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답동성당을 다시 가게 된 것은 1997년 여름이었다. 족보도 없는 꼴통들과 함께 즐겁게 깽판을 치는 일로 세월을 보내던 중 합류하게 된 여름환경현장활동의 정리를 답동성당에서 하게 된 것이다. 성당 근처에는 전경들이 빼곡하게 깔렸고, 사복경찰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학생들을 감시했다. 도로로 진출하려다가 박이 터지고, 공장다닐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신포시장 골목길을 보면서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다.

두 차례의 기억을 더듬어볼 때, 전두환과 노태우가 정권을 교대하던 그 시기에도 그렇고, 김영삼 정부가 말기로 치달을 때도 그랬고, 답동성당은 그 안에 들어왔던 힘겨운 사람, 싸우는 사람들을 꽤 넉넉하게 품어주었던 것 같다. 인천에 있을 당시, 슬프고 괴로울 때는 정신적 도움을 주었던 곳이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많이 들르기도 한 곳이고 여러 추억이 많이 남은 곳 중의 하나가 답동성당이었다. 그랬던 곳에서 사람들이 끌려나가고 쫓겨났다는 뉴스를 보는 건 갑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 오랜만에 찾은 고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삶에서 종교를 떠나보낸지는 꽤 됐지만, 장소로서의 성당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의미가 이렇게 또 한 부분에서 잘려나가는 건 꽤나 견디기 힘들다.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 

천정연, “답동성당은 노조에 사과해야”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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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8 20:24 2016/01/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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