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民의 유효기간
근대가 가져온 결정적 장면전환 중의 하나는 신민(臣民)이 시민(市民)으로 그 지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왕정이 민주정으로 변환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통치의 근간이 왕의 존재 자체로 결정되던 전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통치는 인민/민중/국민 자신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민주주의를 통해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는 법을 생산하던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근대 이전에도 법은 존재했다. 그 법 역시 지켜져야 했고, 그 법을 통해 사회체제는 굴러갔다. 왕정에서 법은 왕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기실 이때 만들어진 법은 왕 그 자신의 말이자 힘이었다. 근대가 들어서면서 법은 인민/민중/국민의 이해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어찌보면 당위를 이야기할 뿐인듯 보이지만, 주체의 변경은 법 그 자체의 성격마저 변화시켰다.
체제는 변하였지만 인간의 사고방식까지 변화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숱한 교육과 경험이 동반된다. 교육과 경험을 통하여 사람의 사고방식은 변화하고 신민의 세계를 역사의 한 장면으로 돌리면서 시민의 소양을 몸에 배이게 한다. 통상의 경우,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공간의 사람들은 대개 유사한 사고방식을 지니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시민이 살아가는 시대, 시민으로서의 삶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공간에서 느닷없이 신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박근혜가 파면당한 후 돌아간 집 담벼락 앞에서 엎드려 통곡하며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마"를 부르짖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볼 때의 당혹감이 그런 유형이다. 그 모습을 처음 본 순간의 아찔함과 아득함은 통상의 사고가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다시 그 모습을 볼 때는 헛웃음이 나왔고, 또 다시 그 모습을 보았을 때는 보다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시민의 정체성 선언이 일상에서 외쳐지는 세상에, 엎드려 통곡하며 "마마"를 찾는 신민의 정서가 발견될 때, 과연 그 시대착오적 태도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저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치부하면서 외면할 것인가?
그들의 수가 인구의 10%건 15%건 그건 중요치 않다. 그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현존하고 있으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들을 배제하거나 외면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시민의 정서를 신민이 알 수 없고, 그 반대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시민과 신민은 서로를 적대하고 쟁투해야 하는가?
왕정이 무너진지가 벌써 한 세기가 되었고, 왕이 되고자 했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끝난지 한 세대가 지났다. 그러나 그 옛날 신민으로 강요받아왔던 삶 속에서 신민으로 자신을 정립한 사람들의 관념은 여전히 신민일 수 있겠다. 분명히 같은 교육과 경험을 겪었다고 생각했던 동료 시민들이지만, 교육과 경험의 결과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
그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 그렇다고 단순하게 치부할 수만은 없다.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어찌 보면, 적폐라는 건 이렇게 일상화되어 있다. "마마"를 외치는 통곡은 혈관에 달라붙은 적폐의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적폐인지조차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해져 이제는 오히려 그 적폐가 정의로 여겨질 정도가 된 상황. 신민이 시민이 되기 위한 여정은 아직 진행 중이다. 민주공화국이 되었다고 하여 왕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왕은 지금도 그 혈관 어딘가에 숨어 자신의 유전자를 증식시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