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 추억이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니까 3

못살던 거 회고하는 게 썩 내키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자꾸 중언부언 하게 되는구먼... 오늘 포스팅으로 그건 끝내기로 하겠다. 아무튼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내부를 계속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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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인지라 쿠데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만 접해본 것이 다다. 그런데 이렇게 '화보'를 보는 건 처음이다. '혁명공약'이야 뭐 여러 문헌으로도 본 거라서 내용은 보니 알겠지만, 그림까지 이래 첨부한 걸 실제로 보는 건 꽤나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이 '혁명공약'을 볼 때마다, 시대를 초월한 공약(公約)의 가벼움이 느껴지는데, 특히 맨 마지막 항,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을 보면 가소로운 생각에 비웃음이 절로 난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라는 건 이 앞의 5개 공약인데, (1) 반공태세 재정비 강화 (2) 유엔헌장 및 국제협약 이행, 자유우방과 유대 강화 (3) 부패와 구악 일소, 민족정기 함양 (4) 민생해결 및 자주경제재건 (5) 반공통일을 위한 실력배양이 그것이다.

잘 보면, 이 5개 공약, 즉 저들이 설정한 "우리의 과업"이 "성취"될 가능성은 당시 상황에서 몇 %나 되었을까? 아닌말로 성취의 기준은 뭐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나? 마찬가지로, 6번 공약에서 밝힌 바,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이 누군지, 그들의 등장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그 기준은 뭐며 그 기준을 정하는 자들은 누군가?

한 마디로 말해 이 공약은 전체가 그냥 "우리들이 꼴리는 대로 알아서 할 테니 니들은 신경을 꺼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쿠데타세력은 바로 이 공약의 정신에 입각해 지들이 정권 잡고 무려 18년을 지들 꼴리는 대로 해먹었으며, 그 잔당들과 후예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토대를 마련해놓았다. 

이런 가공할 내용이 골목마다 붙어 있었다는 거 아닌가? 이후에 유사한 내용들이 골목길 담벼락마다 붙어 있었던 건 뭐 다 기억하는 일이고. 잘 사는 동네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못사는 동네일 수록 저런 포스터가 내내 붙어 있었다. 붙이는 놈은 천진데 떼는 놈은 없어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이게 또 웃기는 게 괜히 오지랖 부려서 떼어냈다가 나중에 무슨 경을 칠지 모르니 붙인 놈이 떼기 전까지는 손대지 않는 게 상책인데, 어렴풋한 기억에 모친과 함께 끌려나간 어떤 반상회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한 번 나온 걸 들은 일이 있다. 오죽했으면 이게 반상회 안건으로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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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여튼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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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좀 사는 집은 이렇게 개별 변소를 가지고 있었다. 출입문이 이렇게 밖으로 나 있는 경우도 있고 집 안 마당쪽에 난 경우도 있는데, 밖으로 난 변소는 대부분 자물통이 달려 있었다. 이 집은 자물통이 없는 걸 보니 집 주인이 화통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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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통 덮개도 이쁘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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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벽에 호총을 걸고 그 안에 옷가지들을 걸어놨었다. 우리 집에 있던 것과 아주 똑같아보인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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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집 공부방이었나보다. 저런 공부방 따로 가진 애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방 참 이쁘다. 그냥 지금이라도 들어가 살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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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집 세간들... 장독대가 꽤 그럴싸한데, 개구진 녀석들이 제법 있는 동네에서는 저렇게 장독 올려놓은 집들 항아리 숱하게 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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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 미니어처 초가집.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난 소감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경험했던 뚝방 판잣촌이나 낙골, 봉천동 달동네라기보다는 우리 시골 옛날 할머니댁과 그 동네 분위기라는 느낌이다. 연탄 아궁이나 물지게를 보면 뚝방이나 다른 판잣촌과 유사하지만 그 외에 다른 부분들은 그냥 옛적 시골 고향마을 분위기랄까.

물값 받던 공동수도나 연탄 아궁이 보면서 조금은 시큰한 느낌에 살짝 울먹하기도 했는데, 전체적인 건 이 박물관 밖에 설치된 초가집 분위기가 더 적절한 듯 하다. 하긴 뭐 못 먹고 못 살았던 걸 자꾸 다시 반추해봐야 암짝에 쓸 일도 없고, 예전에 언젠가 같이 공부하던 동생들과 이런 비스무리한 이야기를 했더니 나랑 기껏해봐야 일고여덜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동생들이, "아니, 형, 지금 무슨 1.4 후퇴때 이야기하는 거요?"라고 해서 난데없는 세대차이를 느끼기도 했었으니, 이젠 이런 이야기 해봐야 알아 듣는 청춘들이 있을라는지 모르겄다.

목동 뚝방 그 안양천 똥물에서 그것도 좋다고 같이 물장구치던 어릴 때 친구넘은 대규모 철거사업이 있은 후에 어찌된 영문인지 바로 그 안양천 배수시설 앞에서 빠져 죽었더랬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때 덩치는 큰데 아주 온순하고 착하고 공부 잘하던 친구는 연탄가스 중독되어 국민학교 졸업도 못하고 죽었다. 대부분 어렵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어른들은 다들 어찌 수명은 제대로 누리셨는지 모르겠다. 고생이 많아 다치고 아픈 분들 많았는데.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 잠깐 덮어놨던 기억들을 꺼내보았다. 혹시라도 또 들릴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이 기억은 다시 덮어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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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9 10:35 2019/01/0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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