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고비처, 그리고 정치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관할권을 대통령 직속에서 국회로 이관하는 방침이 나왔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인 자들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일 터이다. 이들이 말이 없는 시체가 되어야만 감출 수 있었던 자신들의 치부. 이 치부를 감추기 위해 죽어간 자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죽은 자의 입이 영원히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비밀은 삼베 바지에 방귀새듯이 언젠가는 그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고, 어느 뒷산 대나무 밭에 메아리로 남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외로운 외침으로 귓전을 떠돌 수도 있다. 죽은 자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으로 대신 소리를 낸다. 죽은 자의 말없음으로 치부를 감추려 했던 어떤 군상들은 살아 남은 사람들의 입에서 자신들의 살인 과정이 재현되는 모습을 본다.

 

이들은 살아 남은 자들의 입마저 막아야만 자신들의 삶이 종신토록 평탄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죽이려다 못 죽인 사람들이 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죽였어야했던 사람들이 있고, 이들의 가족이 있고, 이들의 친구가 있고, 이들의 자식이 있고,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의 참혹한 상처를 확인했던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로부터 줏어들은 사람들이 있고...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리하여 이들은 "살아 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한 음모를 진행시킨다. 끊임 없는 소요의 발생, 정치분란의 조장, 특정인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

 

죽은 자의 억울함을 달래고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해주기 위해 시작되었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은 결국 사실관계의 판단이 아닌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좌초의 위기에 처했다. 대통령 직속기관이기 때문에 역할을 더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회로 관할을 이관하는 이유가 지금보다 역할을 축소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에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부패방지위원회 산하로 만들자는 논의가 씨끌벅적하다. 속칭 '고비처' 논쟁이 그것이다. 고비처에 영장청구권을 비롯한 수사권 일체를 주는 동시에 그 권한의 효력을 위해 기소권까지 주자는 것이 고비처 추진에 열을 올리는 쪽의 이야기다. 그 반대쪽에서는 고비처가 정치보복을 위한 기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현행 형사소송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고비처 설치를 반대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그 주장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주장들이 진정 원칙적인 측면의 고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주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비처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측의 입장 이면에는 검찰권력의 약화라는 목적이 숨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검찰권력은 지금 너무 강하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반적인 법률운용체계의 종합적 검토도 없이 무작정 진행되는 검찰권력 분산이라는 목적의식적 행위가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헌법이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헌법은 명백하게 영장청구권을 검사의 고유권한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법체계는 검사에게 기소독점권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비처에 영장청구권이나 기소권을 주니 마니 하기 이전에 사실은 영장청구권의 행사를 어디까지 확대할 수 있으며, 기소독점주의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살폈어야 한다. 더불어 고비처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역시 살펴보았어야 한다.

 

한 쪽에서는 역사적 진상규명을 수행하는 집단을 와해시키려 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DJ 정부 당시 사라졌던 사직동 팀을 더욱 강력한 형태로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둘 다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다. 이 와중에 민중의 고단한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저들의 법치주의라는 화려한 수사는 민중에게는 귀를 막고 눈을 감으라는 강요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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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29 13:38 2004/07/2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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