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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문화로서의 한국 인디씬의 태동과 발전 / 박종윤

하위문화로서의 한국 인디씬의 태동과 발전

- 크라잉넛부터 노브레인까지, 펑크씬에 중점을 두어


 

1. 태동과 발전


1970년대 말, 영국 노동자 계급의 몇몇 청년들은 마치 일종의 선언같은 노래들을 발표한다. “Anarch in the U.K.(영국의 무정부상태)”, “God save the queen(신은 여왕을 보호한다)"라는 제목의, 형편없는 연주력과 직선적인 록 스타일, 거기에 신경질적인 목소리. 그렇게 4인조 Sex Pistols는 펑크락의 원형을 만들었다. 영국의 매스미디어와 부르주아들은 분노했으나 청년들은 열광했다. 공연마다 폭력사태가 일어났고 그 들은 점점 더 유명해져갔다. Sex Pistols를 위시한 초기의 펑크락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허무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며, 무엇보다도 거침없이 직설적이었다. Sex Pistols의 해체는 우발적이며 감정적이었고, 베이시스트였던 Sid Vicious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다. 과히 펑크적인 말로였다.


1990년대 중반, 홍익대 앞에서는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유의미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기존의 우드스탁 류의 락 음악이 있는 술집들과 가게 한 쪽 구석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술집들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고, 그 구석에서 영미권의 얼터너티브락 혹은 모던락을 카피하여 연주하는 밴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Nirvana, Pearl Jam, R.E.M., U2, Duran Duran, Pet shop boys, Clash, Sex Pistols, Velvet Underground, My bloody valentine 등은 이들의 좋은 역할 모델이었다. 이는 이전의 한영애, 한상원 등 신촌 언더그라운드로 대표되는 블루스 진영이나, 80년대 헤비메탈과 쓰레쉬메탈의 늪에서 허우적대고있던 시나위, 블랙홀, 블랙 신드롬 등의 헤비메탈 진영과는 분명 다른 흐름이었다. 지금은 어느새 중견 인디밴드가 된 언니네 이발관, 코코어(당시의 이름은 버거킹), 노브레인, 크라잉넛, 델리 스파이스 등의 밴드들이 DRUG(지금의 스컹크헬 자리)라는 ‘최초’의 클럽에서 연주를 하면서 자작곡을 쓰기 시작했고, 이는 1996년 5월 명동과 홍대에서 열린 ‘스트리트 펑크쇼’로 대중에게 광범히 하게 노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펑크씬 역시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을 필두로 최초의 씬을 형성해가기 시작한다.


한 때 주류 언론에서도 펑크락, 모던락 등 국내의 인디 음악과 홍대의 인디 씬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며 경쟁적으로 취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의 원초적인 속성이랄까, 투자한 만큼의 수익성이 보이지 않았을 때 매스미디어는 어느새 등을 돌렸다. 그 뒤로도 최소한의 관심을 선심쓰듯 던져주었지만 자신들이 상품으로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믿는 많은 인디밴드들은 미디어와 쉽게 친화되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몇몇 밴드(예를 들면 자우림, 윤도현 밴드)들은 자본에 완전히 편입되기도, 또 어떤 밴드들은 공사장에서 막일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언더그라운드의 생활로, 그 중간의 어정쩡한 몇몇 밴드들은 또 그런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전업 음악인으로 살아가던, 생계형 부업과 음악을 병행하던, 혹은 음악을 포기하던지간에 어찌되었건 삶은 계속된다.


2. IMF와 공황, 그리고 크라잉넛


한국에서의 최초의 인디 밴드 히트곡은 노브레인의 ‘바다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것은 최초로서의 의미만이 존재한다. 진정한 히트곡의 정의가 동시대를 같이 한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다는 의미라면 최초의 히트곡은 마땅히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로 돌아가는 것이 순서일 듯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공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맑스의 자본론을 굳이 펴보지 않는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최소한 서민들은) 예상할 수 없었던 공황은 결국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아시아 전지역을 덥친다. 이는 한국 역시 피해갈 수 없었는데, 투기 자본의 비윤리적 태도로 말미암은 공황(원인 중 일부는 재벌기업에게서 촉발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결과론적으로는 외국 투기 자본에게 분명한 책임이 있다.)은 초유의 구조조정 아래서 수많은 실직자, 실업자, 명예퇴직자들을 양산해내었고 사회는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는 불황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필연적으로 사회 전반에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와중 1998년 드디어 크라잉넛의 첫 번째 앨범 ‘말달리자’가 발매된다. 단순한 리듬과 역시 단순한 구조 그리고 위악적인 보컬과 가사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곡은 그 전까지의 많은 대중적인 음악적인 문법들을 무시한 형태였다. 그럼에도 따라 부르기 쉽고 재미있으며 파격적이었던 이 곡은 금새 대중에게 전파되기 시작한다.(같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모던락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 이석원은 대중 음악 웹진 가슴과의 인터뷰에서 ‘말달리자’의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응원가와 비슷한 속성을 논하며 크라잉넛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존경을 드러낸 바 있다.)


근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현실은 복잡하고 강압적이며, 노동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의 소외를 겪게 만드는데, 그런 환경일수록 필연적으로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질 수 밖에 없다.(한국이 90년대 초중반의 초보적인 PC 통신 환경에서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게 된 시기도 우연치 않게 IMF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는 물론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벤처를 육성한 탓도 크긴 하다.) 지금에서야 보면 분노의 ‘목적지’가 불분명한 완성도 높지 않은 가사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대중들의 정서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1998년 1집의 성공과 2집에서의 발전을 거쳐 크라잉넛의 최대 절정기는 2001년의 3집까지 였는데, 그 뒤로 군대가기 전 2002년에 4집,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후 2006년에 5집을 발매했지만 그 판매량과 인기는 초창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 시기는 IMF 구제 금융 시기와 묘하게 겹치는 데 구제 금융 시기가 끝나는 2001년, 크라잉넛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게 된다. 1998년 매스미디어에 의하여 경쟁적으로 보도되던 인디 밴드 관련 기사들이 ‘예전 같지’ 않아진 것 역시 이때 쯤이었다.


크라잉넛이 수많은 펑크 밴드들 중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음악을 규정하는 태도에서의 차이였다. 클럽 DRUG을 중심으로 한 펑크 밴드들이 대부분 무정부주의적이고, 저항적이며, 공격적이고,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이며 위악적인 음악을 하는 와중에 크라잉넛은 활동초창기부터 펑크락으로서는 독보적으로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접근을 시도하였다.(1집의 갈매기, 펑크걸 등의 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씬의 다른 밴드들에 비하여 비교적 덜 저항적이었는데 음악에 아주 심한 욕설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고, 저항적인 면모를 보이되 그 대상은 불분명한 형태를 띄었고(노브레인 등의 밴드가 인디 레이블 문화 사기단을 조직하고 Anti-서태지 운동을 전개한 것이나, 매스미디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정치적으로는 좌파적이었을지 몰라도 정작 음악은 다분히 축제적이었으며 카니발적이었다.(여기서의 카니발은 사회에서 열어놓은 안전한 일탈로 정의한다.) 이러한 크라잉넛의 음악은 경제적으로 힘겨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대중, 그리고 대안적인 방향에서 수익을 창출하되 권력에 강한 위협이 가해지는 것을 꺼려하던 자본 둘 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졌다. 크라잉넛의 의도와는 무관할지 몰라도 대중과 자본은 그들을 적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그 들은 ‘예전 같지’ 않아 졌다.


2002년 군입대 직전 크라잉넛과 아웃사이더에서 가진 인터뷰를 첨부한다.


(전략)


지 - 성격들이 굉장히 낙천적이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음악에서는 젊은이의 절망을 많이 노래하는 것 같은데요, 요즘 세대가 이전 세대에 비해 절망적이라고 보십니까?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한 - 예전 세대는 잘 모르겠구요. 일단 저희 노래예요. 저희 노래를 하면 우리 세대들이 공감을 하는거죠.

김 - 예전 세대는 절망할 틈도 없었잖아요.(웃음)

박 - 나름대로 고민이 있지 않겠어요.

지 - 가사를 보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요.

혁 - ‘오늘을 잘 살아가자’는 말이 아닐까요? 사실 저희 모토가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자’.

김 - 오늘 못한 일은 내일로 미루자.

혁 - 나는 오늘 할 일인데.

김 - 덧붙이자면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런거죠.(웃음)

혁 - 저는 ‘내일은 해가 뜬다’ 이런 식보다는 ‘오늘이 있다’가 더 좋아요.

한 - 지금을 열심히 살자는 거죠. 어차피 포기하고 허망해지면 좀 편하거든요.

지 - 좀 짓굳은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란 가사가 많이 나오고, 젊은이들의 절망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크라잉 넛은 음악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성공해나가고 있는데, 절망감에 공감하면서 동질감을 느낀 팬들이 나중에 정서적인 배신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계속 희망이 없는데, 알고 보니까 크라잉 넛은 성공해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요.

혁 - 그렇게 많이 성공 안했는데.

한 - 그래도 저희는 약간은 소외된 사람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싶어요.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잘되는 건 좋은거고, 아픈 사람들을 달래 줄 사람은 필요하잖아요.

혁 - 거짓말 하면서 음악하긴 그렇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쓰는거죠.

한 - 그렇다고 우리가 가사에서 ‘우리는 노동계급이다’라고 한 적도 없고, 그래서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후략)

3. 전향한 펑크락, 노브레인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초기의 노브레인은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등의 모던락 밴드는 물론 같은 펑크 씬의 크라잉넛 등의 밴드들에 비해서도 좀 더 위악적이고, 저항적인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이성우(보컬)과 차승우(기타)를 축으로 노브레인은 비록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음악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달성해나갔다. ‘바다 사나이’와 ‘청춘 98’이라는 명곡 필두로 서서히 씬 내부에서 입지를 굳혀가던 노브레인은 2000년 여름 첫 번째 Full-length 앨범이자 2CD로 제작된 그네들의 최고작 ‘청년폭도맹진가’ 앨범을 내놓게 된다. ‘난투편’과 ‘청춘예찬편’으로 나뉘어진 이 데뷔 앨범에서 저항적인 메타포와 진일보한 확장된 사운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스카, 레게적인 요소를 차용한 것도 그렇지만 주 멤버였던 차승우(기타)가 군대에 갔다옴에 따라 ‘군가’적인 요소가 적절히 차용된 면이 다른 밴드들과의 분명한 구별점이었다. 가장 수직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군 군가의 요소를 음악에 심어놓아 미학적인 역설을 꾀한 것이다.


밴드는 2번째 앨범 'Viva No Brain'을 내놓을 때까지 말 그대로 ‘잘’ 굴러갔다. 일본제국기를 찢는 퍼포먼스 등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마니아에서 마니아로, 노브레인의 음악적 커리어는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갔다. 하지만 변화는 갑자기 일어났다. 노브레인 음악의 거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기타리스트 차승우가 2002년 갑자기 밴드에서 탈퇴한 것이다. 그 다음해 2003년에 나온 노브레인의 앨범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앨범이었다. 이에 대중 음악 웹진 가슴의 음악평론가 김학선씨의 2003년 리뷰를 첨부한다.


(전략)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차승우의 흔적을 노 브레인이라는 이름에서 하루빨리 털어 내고 싶었더라도, 또 그게 당연하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저 한번쯤은 신나게 달려주기를 원했고, Oi!!라는 함성을 한번쯤은 더 들려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들은 차승우의 흔적과 함께 이 모든 것들도 지워버렸다. 이제 이 앨범에서 더 이상 노 브레인만의 것이라 믿었던 분노와 에너지는 들리지 않고, 가슴 벅차던 Oi!!의 함성이 끼어들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건들대던 '동네 노는 애들'은 이제 '반듯한 모범생들'이 되었고, "다 죽여버리겠어"라고 외치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희망'에 대해서 노래한다.


(중략)


물론 이는 이들의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하며 예전의 앨범들을 다시 꺼내 듣고, <청춘구십팔>과 <잡놈패거리>, <어둠 속을 걷다>를 그리워하는 이의 푸념일수도 있고 미련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 브레인은 변했다는 것이고, 나는 이런 식의 변화에는 쉽게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깊은 마음 속의 투혼을 목 터질 듯 불러보리라"던, "이 맘 영원하리라"던 노 브레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슴이 아프다.


분노와 에너지가 거세된 노브레인의 음악에 남아있는 것은 재기발랄함과 전에 없었던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였다. 많은 음악 매니아와 팬덤은 실망했고, 또 떠나갔다. 더 이상 노브레인에게 저항과 분노는 없었다. 그 사이 노브레인은 빠르게 라인업을 정비하고 음악적인 스타일을 바꾼다. 이전의 군가적인 향취, 문어체의 가사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새로운 기타리스트와 함께 마치 80년대 본조비가 그랬듯, Pop metal 혹은 LA metal적인 펑크락을 만들기 시작한다. 3.5집의 첫 곡 제목은 ‘넌 내게 반했어’, 4집의 첫 곡 제목은 '미친 듯 놀자‘ 였다. 기존의 팬덤은 이를 일종의 음악적인 선언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성우(보컬)의 위악적인 보컬은 그대로였지만 이미 노브레인은 이 전과는 전혀 다른 밴드였다. 슬프지만 진실(Sad but true)이랄까, 노브레인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3집의 'Little baby'가 소폭의 히트를 기록한 후였다. 3.5집의 ’넌 내게 반했어‘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끌게 된 노브레인은 이제 노래방에서도 즐겨 불리는 레퍼토리가 되어 가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제 노브레인을 듣지 않는다.


최고작이라고 불리웠던 1집 ’청년폭도맹진가‘가 나왔던 2000년의 겨울, 12월 15일에 웹진 가슴과의 인터뷰를 첨부한다. 2006년 현재의 노브레인을 보며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략)


박준흠 : 앞으로 나올 2집에 대해서 얘기를 해달라.

※ 2집 [viva No Brain]은 2001년에 발매되었다.


차승우 :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마음을 비워 놓고 있는 상태이다.

이성우 : 계속 곡 만들고 그러고 있다. 지금 당장 얘기할만한 건 없다.

차승우 : 많은 걸 해보고 싶다. 물론 지금까지 노브레인의 모습을 견지하긴 하겠지만 점점 변해갈 것이다. 더 정제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박준흠 : 바라건데, 노브레인은 지금 보여주는 '분노'를 삭이지 말았으면 한다. '이 사회(시스템)에 만족하는 노브레인'이란 문구는 생각하기만 해도 너무 실망스럽다.


차승우 : 원단이 다 사회부적응자라 그럴 일은 진짜 없을 것이다.

이성우 : 아마 세계종말이 온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웃음)


박준흠 : 앞으로 노브레인은 세상과 어떻게 맞서 싸울 생각인가?


차승우 : 별로 맞서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웃음), 우리는 그냥 이 병들어버린 사회 안에서 기생하는 기생충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게 계속 기생을 하면서 소소한 독설을 내뱉는 게 우리의 일일 것이다.


4. 헤프닝, 1997년 MBC 삐삐 롱스타킹 사건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기본 속성은 최대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다.(최소한의 투자의 효율성보다는 최대한의 효과에 축이 있다.) 그러한 속성으로 인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주류 문화는 기본적으로 親자본적인 속성을 띄게 되지만, 검증된 상업성만 제시가 된다면 叛자본적인 하위 문화 역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하위문화에서도 자본의 발전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할 수 있는 텍스트들은 수용하지 않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는 자본의 중심부로 갈수록 심해지고 반대로 자본의 주변부으로 갈수록 덜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몇몇 사례로 증명된다. 자본에 종속적이지 않은(혹은 종속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하위문화를 가차없이 내친 경우를 우리는 1997년의 MBC 삐삐 롱스타킹 사건, 그리고 2005년의 MBC 카우치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삐삐 롱스타킹은 박현준, 강기영(달파란), 권병준(고구마)로 이루어진 남성 3인조 밴드로서 잘 알려진 삐삐 밴드의 후속격인 밴드이다. 이 중 박현준과 강기영은 H2O 등의 밴드 활동으로 90년대 초를 전후하여 헤비 메탈 계에 몸 담기도 하였다. ‘안녕하세요’, ‘딸기’ 등 진취적인 포스트 펑크 음악과 이윤정의 생짜로 짜내는 듯한 곤혹스러운 발성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삐삐 밴드는 1집 ‘문화 혁명'과 2집 ’불가능한 작전‘을 끝으로 해체한다.(3집 붕어빵은 정규 앨범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어 논외로 한다.) 당시의 삐삐 밴드와 삐삐 롱스타킹이 인디씬에 머물러있었다고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으나 그 후 멤버들 각각의 활동(스타일리스트 활동한다는 이윤정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는 영화음악, 일렉트로니카 등 인디 씬 내에서 다양한 위치를 점하였다.)와 밴드의 키치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당시의 인디 씬의 몇몇 조류와 비교적 맞아떨어졌다는 데에서 인디 씬과의 연계성을 찾을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공교롭게도 삐삐 롱스타킹이 활동을 시작한 후 첫 방송이었다. ‘바보 버스’를 ‘립싱크’하던 박현준이 카메라에 생방송 임에도 불구하고 침을 뱉은 영상이 전국으로 방영되었기에 그 들은 1년간 모든 방송국에 방송 출연을 금지당했다.(방송 출연 금지 기간 1년이 지나기 전에 삐삐 롱스타킹은 해체하였다.) 침을 뱉은 행위 외에도 생방송 무대에 ‘우리는 지금 립싱크 중입니다’라는 현수막을 설치한다던지 마스크를 착용한다던지, 또한 발차기를 하는 등의 행위가 구설수에 올랐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KINO의 1997년 4월호에 실린 삐삐 롱스타킹의 인터뷰는 참조할만한다.


(전략)


KINO : 이번 방송 금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구마 : 우리(달파란과 고구마)는 몰랐는데, 나중에 차타고 집에 가는데 매니저한테 전화가와서 알았어요.

달파란 :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 사람들이 괜히 지나치게 생각해서는... 1년씩이나 못하게 하냐? 참 답답한 사람들이죠, 뭐. 무례하고 불손하고 도대체 이럴수가, 동방예의지국에서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한 것 같아요.

KINO : 박현준 씨는 이에 대해 어떻게 발하나요?

달파란 :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KINO : 박현준 씨, 침은 왜 뱉으셨어요?

박현준 : 그건 잘해보려다가 그런 거예요. (일동 웃음) 멋있게 해보려다가. 비디오에 그런 것들이 나오잖아요? (목소리 톤이 바뀌며) 인기가요 50에서 카메라가 자꾸 얼굴로 와요. 내 얼굴에만 자꾸 가까이 와서 자꾸 그러잖아요. 아, 그러면 뭔가를 해야 되겠구나(웃음), 그래서 침을 뱉은건데...

KINO : ‘가요계에 침을 뱉어라!’로 생각해도 되나요?

박현준 : 가요계에 침을 좀 뱉어야해요. 우리도 가요지만, 꿈이 메말라버린 것 같아요. 지저분한 것 같고, 구질구질하고... 나도 지저분하지만.

KINO : 앞으로는 라이브 위주로 활동하겠네요?

달파란 :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고구마 : 홍보를 하는 것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작업인 것 같아요. 이런 의미도 있다, 저런 의미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꾸 의미 부여가 되는 건데, 어쨌거나 방송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조금 중요한 의미 부여 수단을 잃은 것 같거든요. 그래도 뭐 그다지 그렇지도 않지만, 공연 때 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까 생각을 해봤어요. 1,2,3잡애 비꼬는 것이나 자기 파괴적인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뭘 알고 좋아하나’ 하는 기분이 되나봐요.


(후략)


당시 대중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는데(당시의 대표적인 통신 ‘나우누리’의 갈무리된 웹 문서를 참조), 이는 후의 카우치 사건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분명한 팩트는 삐삐 롱스타킹이 1년간 출연을 정지당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달리 말하면 방송사가 권위를 가진, 성역으로서 기능함을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저항적인 락커의 모습은 미디어에서 줄곧 소비되며 수익을 가져다주는 통로 중 하나로서 기능하지만, 자본 자체를 원천 부정(립싱크에 대한 적극적인 폭로)와 헤게모니 파괴 행위(카메라에 침을 뱉음)에 대해서는 대중적인 노출을 봉쇄하는 자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2005년의 카우치 사건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표상된다.


5. 불행한 시간들, 2005년 MBC 카우치 사건


오버 그라운드에서 다시 인디 씬으로 위치를 이동한 삐삐 롱스타킹의 멤버들과 다르게 럭스(RUX)는 인디 씬의 태동과 함께한 노장 밴드다. 1996년 결성되어 근 10여년간을 이어온 밴드는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본 등 초창기의 펑크 밴드들이 오버 그라운드로 올라간 경우와는 상반되게 자체적으로 제작, 유통 경로(1998년 스컹크 레이블 창립)를 만들고 공연, 생활 공간(2002년 스컹크헬 개장)을 만듬으로서 펑크씬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다.(펑크 씬의 경우 인디와 오버의 경계가 모호하여 크라잉넛, 노브레인의 멤버들이 종종 스컹크헬에 보이곤 한다. 방송을 타느냐, 타지 않느냐의 차이일지도.) 럭스는 음악적으로는 오이 펑크, 정치적으로는 중립 혹은 중도를 지향하는 밴드이다.


사건은 역시 럭스가 첫 방송을 하는 와중에 일어났는데, 그 주체가 럭스가 아닌 (무대에 댄서 자격으로 올라온) 밴드 카우치의 일원 2명이라는 점이 삐삐 롱스타킹의 경우와 다르다. 럭스가 ‘지금부터 끝까지’를 연주하는 와중 무대에 올라와있던 (럭스의 친구들인) 댄서들 중 카우치가 바지를 벗고 하반신을 노출한 것이 사건의 전모이다. 후에 ‘생방송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증언한 카우치는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럭스와 함께 방송이 끝난 직후 연행되었다.


삐삐 롱스타킹 사건이 표현의 자유와 공중파의 신성 불가침에 관한 찬반 토론이 강하게 맞붙는 형국이었다면, 카우치 사건은 이와는 다르게 사회 전반적인 분노와 일부의 안타까움으로 나타났다. 사회의 분노는 각 입장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는데, 가령 페미니즘 진영의 남성 성기의 기호화, 일반 여성들의 성적 수치심, 공중파의 신성 모독 등이었다. 특이하게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인디 밴드들의 비난도 있었다. ‘인디 밴드들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통로를 모두 막아버렸다.’는 힐난이었다. 음악 평론가 박준흠(인디 음악 웹진 가슴 운영)씨는 ‘음악 외적인 부분으로 음악 자체가 평가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의견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한 일부 펑크락 매니아들은 연행 후 대국민 사과를 접한 후 ‘좀 더 뚝심있고 과격하게 밀고 나갔어야 된다.’라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2005년 7월 30일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10월 26일에 인터넷 신문 프로메테우스와 럭스의 리더 원종희 씨와 나누었던 인터뷰의 일부를 가져온다.


(전략)


프로메테우스 : 원종희 씨가 펑크락 뮤지션으로 살아온 10여 년의 세월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한국 땅에서 펑크뮤지션을 살아간다는 것은 ‘난 바보입니다’하고 이마에 새겨놓고 사는 것과 같다.


원종희 : “저도 그냥 한국의 평범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저 놈들이 뭘 알겠어?’ 이런 식이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넌 그런 음악이나 하니까 바보야’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처음에는 ‘난 바보 아니에요’하면서 부정을 하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그래, 나 바보다’하게 되죠. 대부분의 펑크밴드들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음악캠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엉뚱한 이야기를 유포시키면서 몰아붙이는 데는 뭐라 대응해야 할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요. 우린 바보고 아무 생각 없습니다. 머리 비어서 그랬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 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프로메테우스 : 음악캠프사건으로 대화가 진행되자 원종희씨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방송에 임했던 자신들도 문제지만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은 것은 정말 ‘X 같고 화나는 일’이라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원종희씨는 펑크음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아야 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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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 친일 논란에 대한 사학적 접근 / 박종윤

 

청연 친일 논란에 대한 사학적 접근 / 박종윤


1. 들어가며


청연이 개봉하기 바로 전 논란이 되기 시작했던 친일 논쟁의 대중적 관심은 영화 청연이 친일적인 텍스트인가, 혹은 그렇지 아니한가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 논란이 되고 있던(몇가지 의심쩍은 팩트가 있을 뿐, 친일 인사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류 비행사 박경원에 대한 영화라는 것만으로 대중은 흥분했고, 영화 텍스트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보다 민족주의(혹은 nationalism)에 기반한 감정적인 보이콧으로 표출되었다.


위의 사실에서 주목해야 될 점은 청연 보이콧의 시발점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사학계의 많은 이론은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제 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듯, 우리나라 역시도 (개발도상국식) 민족주의적 특성을 띄게 되었다.(이는 서구의 배타적인 nationalism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서구 nationalism의 대표적 악용 케이스는 파시즘, 독일의 나찌, 그리고 일본이다.) 민족주의적 사학은 현재 친일 논쟁에서의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청연의 주인공인 박경원 역시 친일 인사인가, 그렇지 아니한가를 검증하는 작업 중에 있다.


친일 논쟁에 있어서 과거사 청산을 빼놓을 수 없다. 친일 논쟁의 목표는 과거사에 대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의 과거사 청산 기구였던 반민특위는 친미인사이자, 친일적인 기반을 버리지 않은 이승만에게 실질적으로 활동을 제약당하여 친일 인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작업을 끝내지 못하였고, 민주화 투쟁이 전개된 현재는 국민의 정부 이후 다시끔 큰 규모의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이러한 과거사 청산 - 달리 말하여 친일파에 대한 단죄에 대하여 역사적인 해석이나 접근은 분분한 상태이다. 크게 식민지 수탈론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적 관점이 대치되고 있는 순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탈민족, 탈근대주의적인 관점 역시 포함될 수 있겠다. 본 글에서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되어 사학계의 각 입장을 정리하고 청연 친일 논란이 진행되던 당시 대중적으로 그다지 이야기되지 못했던 텍스트 자체에 대한 사학적인 논평을 첨부한다.


2. 민족주의 사학과 근대주의 사학


기본적으로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전 6권으로 출간되었던 논문 모음집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은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적인 텍스트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미군정 시대를 지나 근현대사까지 논하고 있는 이 논문 모음집은 80년대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주세력, 좌파의 당위성에 대한 역사적 근거와 토대를 만들었다. 이 중 청연과 관련되어 주목해야 될 부분은 ‘식민지 수탈론’이다.


식민지 수탈론의 요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 나아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시대별로 조목조목 나누어 비판한 바 있는데, 식민지 시대 말기의 문화 통치 역시도 비판받는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의도했던 바가 한국인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전락시켜 실제로 일본인과 동화되면서 궁극적으로는 군인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세뇌시킨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던 것은 낙성대 연구소의 저작물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다. ‘인식’이 대표적인 좌파 운동의 역사 교과서가 되었던 것과 같이 ‘재인식’은 신보수주의 운동 세력인 뉴라이트의 필독서 중 하나가 되었다. ‘재인식’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는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면서 ‘우리나라에 자본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일본이고, 실제로 식민지 시대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근대화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또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행위범과, 일제 시대의 고위 공직자에 불과했던 당연범은 구분을 하여 처벌해야 됨을 주장한다.


‘재인식’의 등장은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논쟁 포인트를 던졌다. 심지어 ‘인식’의 저자 중 한명이었던 경상대의 장상환 교수는 다시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재인식’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재인식’의 사료들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함과 동시에 ‘식민지 수탈론’을 보다 강화하기도 하였다. ‘인식’의 민족주의적, 민중주의적 관점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재인식’은 그럼에도 몇 가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비판받는 대목은 ‘재인식’ 논문 기저에 깔려있는 근대주의이다. 근대의 우월성을 신봉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서술한 ‘재인식’은 결국 원래의 의도인 중립적인 역사, 또는 탈정치적인 역사를 보여주려는 시도와는 그 태생부터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되어 조금 더 근원적인 물음으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과연 근대화이고, 역사적인 발전인가도 물을 수 있다.


3. 청연의 텍스트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 규정했다. 어떠한 텍스트에서 매체로 매개할 때 원판 텍스트는 본래의 성질에서 전혀 다른 유형의 재구성된 텍스트로 변하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회자되는 ‘재현의 정치학’은 그래서 유효하다. 혹 그 것의 원본 텍스트가 실화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청연이 기본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장르는 전기 영화겠지만, 윤종찬 감독은 그 방법론으로 멜로 영화의 틀을 택한다. 멜로 영화의 틀을 택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가상의 인물인 한지혁과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고, 또한 가상의 조선적색단 사건을 가미한다. 조선적색단 사건이터지면서 비교적 밝은 톤의 성장 영화, 혹은 따듯한 감성으로 일관하던 드라마가 순식간에 급반전하는 것이 과연 성공적인 시도였는가는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그 후의 드라마가 파국으로 치닷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즉, 극화의 과정에서 ‘태생적인 비극성’이 포함되었다는 증거이다.


실제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선적색단 사건과 한지혁의 존재는 영화의 큰 축을 구성한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 자체에 ‘태생적인 비극성’이 부여됨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되는 문제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하여 줄곧 좋게 말하면 중립적인,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모호한 -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박경원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인듯한데, 결국 파멸로 이르는 큰 드라마의 줄기에 따라 자칫 실존적 고민과 시대상의 한계로 인하여 자아의 완성을 위하여는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협조, 혹은 적극적인 협력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어떠한 매체에서 역사(=텍스트)를 재매개하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매체의 특성에 맞게 일정부분 재구성하는 것은 매개의 기본 속성이다. 그와 동일한 선 상에서 역사를 매체화 시킬 때 정치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역시 위에 서술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연결되어 이해될 수 있다. 또한 E.H.Carr의 해석주의 역사관를 인용하여, ‘역사란 사회와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된다.’라는 틀에 기초하여 어떠한 예술적인 결과물(혹은 텍스트)가 ‘누구(어떤 계급,혹은 계층)를 위하여 서술된 텍스트’인지 정치적인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다.


같은 기준을 청연에게 적용시켜 청연이 어떠한 텍스트인지, 나아가 청연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용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결과만을 논하자면 청연은 불행히도 그 재현의 방식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근대주의적 사관의 입장을 취하거나, 위의 서술은 하지 않았지만 회색 지대 속에 있는 듯 하다. 나아가 청연의 수용자에게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준다.(이는 포커스 그룹 연구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듯 ‘당시에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일반인의 토론과 답변에서도 잘 드러난다. 청연을 본 토론자 모두 개인의 성취를 위하여 친일을 택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청연은 분명 미학적인 관점에서 잘 짜여진 드라마이고, 한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자아 실현을 멜로의 방법론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구현한 수작이다. 하지만 그 텍스트가 어떠한 정치적 지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다시 한번 고민해보아야 한다. 청연의 텍스트는 일본을 미화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당시의 친일 행위를 일정부분 변호해준다.(이는 실제로 박경원이 개인의 성취를 위하여 일제에 적극적 협력을 시도했다는 혐의와 결부될 때 더욱 의혹을 뿌리치기 힘들어진다.) 감독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지언정, 중립적이거나 회색적인 입장을 취하려던 텍스트가 결국은 근대주의적 사관의 옹호적이 된 부분에 있어서는 최소한의 책임이 있다. 영화의 텍스트를 인지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보이콧은 공정하지 않은 처사였지만, 영화의 텍스트 역시 최소한의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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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자본주의, 예술 / 박종윤

맺음말, 자본주의, 예술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텐데, 그래도 제법 날씨가 선선할 때였다. 그 날 중 하루를 잡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친한 후배와 함께 남산을 올랐다. 산을 워낙에 좋아하는지라 북한산으로 등산을 가자는 후배의 연락에 냉큼 수락을 했는데, 갑자기 쏟아진 비에 결국은 남산이라도 가보자고 했던게다. 그렇게 산 오르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몇 년 째 계기가 없어 등산을 게을리 했었는데 그동안 붙은 살에 겨우 계단 오르면서도 숨차했다. 그러기를 한 30여 분, 짧은 길이라 금방 남산 타워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지고있던 해는 들어가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잠시 남산 타워 안에 들어가 구경하다 나왔을 때 어느새 하늘은 까맣게 물들고 거리에 네온 사인은 반짝였다. 반짝이던 서울은 비록 인공적인 빛이기는 하였으나 황홀했다. 도시의 밤은 불빛으로 시작한다고 누가 말했던가.


 지하철에서 등교를 하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더 많은데,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이리저리 치이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 엉뚱하게도 자동문 위에 있는 광고 때문에 잠시 웃음이 났던 기억이 있다. 공익 광고였는데, 책을 땅바닥에 나이테처럼 말아놓고, ‘책 속에는 지식의 나이테가 있습니다’라는 카피였다. 결국은 책읽기를 권유하는 내용이었지만, 왠지 훈훈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일전에 공익 광고 공모전을 준비하면서도 괜히 다시 한번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모든 이미지가 복제되는 현대의 예술에도 아직 아우라(Aura)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광고 역시 그 예술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대량생산시대가 도래한 이후 광고는 인류가 가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일종으로 자리잡았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마케팅 활동을 부정하지만, 그러기에 이미 우리 곁엔 너무나 많은 광고가 일상적으로 자리잡았다. 영상으로, 사진으로, 음악으로, 이미지로. 그리고 대부분의 광고들은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은연 중에 강화하고, 설파한다. 그래서 가끔은 불쾌하기도, 강요당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가끔은 지친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마음을 비우게 되기도 한다. 이중적일까, 항상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광고를 만나는 것은 묘하게 지루하지가 않다.


 가끔 길을 걷다 지나치는 광고를 주시하라. 그 곳에는 우리 사회의 폭력, 아름다움, 부조리, 성차별,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이 담겨있다. 도시의 밤은 불빛으로 시작한다.

 

 

 

 

 

경희대학교 대학주보 마지막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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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맹신, 마리화나 FTA

이미지의 맹신, 마리화나 FTA


지난 여름, 심난했던 더위가 제 풀에 꺾여 수그러들 때 쯤, 신촌 먹자골목 어딘가에서 노릇노릇 고기를 구우며 우연찮게 마리화나, 곧 ‘대마초’에 관해 지인들과 논할 기회가 있었다. 주제는 대충 두 갈래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는데, ‘대마초는 합법화 되어야하는가?’ 와 그에 부차적으로 ‘대마초는 몸에 해로운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들이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실물적인 증거들이 많았기 때문에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담배보다 몸에 해롭지 않고, 중독성도 강하지 않다, 라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합법화’라는 질문에서는 접합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아니, 담배보다 몸에도 덜 해롭고, 중독성도 약한데, 도대체 왜?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유리한 증거를 내밀어 설득하려 했지만, ‘그런데 난 대마초 마음에 안들어’라는 거칠고 옹색해보이는 논리 하나조차도 깰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논쟁을 모두 부정하는 듯한 그 말은 전혀 타당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힘이 있었는지, 그 날 술자리에서의 실질적 승리는 반대측이 가져갈 수 있었다. 물론 찬성측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 상황 속에서 그저 씁쓸해했을 뿐이다.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해결된다면 무엇이 불평등하겠냐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떠한 믿음, 달리 말하면 ‘전형(=streotype)’들로 뒤덮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만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나름의 ‘전형’을 형성해간다. 국민 대다수에게 ‘대마초=마약’이라는 공식과 ‘마약은 나쁘다’라는 명제가  박혀있는 상태라면 대마초가 얼마나 해로운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된다. 대마초라는 말을 듣으면 자동적으로 마약이 연상되고, 온갖 좋지 않은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전형은 많은 경우 아무도 못 느끼는 새 우리를 쉽게 가치판단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무장 세력이 가장 저급한 권력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전형을 통제하는, 즉 헤게모니를 쥔 세력이 가장 고급스러운 권력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경청할만하다.

 

이러한 헤게모니 작용은 비단 사회적 문제만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기업체의 PR 등 다방면에서 볼 수 있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 기업인 현대 자동차가 이미 90년대 이전부터 주 소비층이 아닌 어린이들을 타겟으로 한 PR을 시도한 점은 이러한 작용의 연쇄지점이라 볼 수 있다. 최근으로 넘어와 국정홍보처에서 시행하고 있는 최근의 FTA에 관련된 일련의 광고 영상들을 보면 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기회다. 영상을 보면, 카메라는 망망대해를 마치 활공하듯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물론 그 끝에는 ‘아름다운’ 미국이 있다. ‘이제 세계 앞에 더 큰 대한민국이 달려갑니다.’라는 나레이션으로 끝나는 이 짧은 CF에서 누가 감히 FTA 반대를 역설할 수 있을까, 우리도 ‘아름다운’ 미국같이 될 수 있다 말하는데. 물론 심지어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의 합리적 판단과 근거는 실종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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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 <서유기 2 선리기연>의 기억 / 박종윤

“난 과거에 사람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소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 여자에게 이 말을 할 거요

사랑하오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서유기 2 선리기연(1995)> 中


주성치, <서유기 2 선리기연>의 기억


박종윤


1. 심심한 추석


유달리 긴 한가위 연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 역시도 일주일 간 주욱주욱- 늘어진 오후의 연속이었다. 친척들과의 즐거운 시간, 송편 만들기, 전 부치기, 그리고 모처럼의 연휴를 만끽하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늘 쫓겨 살아온 탓일까, 긴 휴가는 오히려 날 지치게 만든다. 그렇게 풍성한 한가위가 심심한 추석으로 바뀌어 갈 때쯤, 내 손에 잡히는 것은 추석 특선 영화 편성표가 담겨있는 며칠 전 한겨례 신문 쪼가리. 문득 명절마다 온가족이 앉아보던 특선 영화들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보다 오히려 명절날 보았던 영화들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가족들과 명절만 되면 “명절에는 역시 짱깨영화”라며 이번 추석에는 어떤 영화가 하나 꼼꼼히 살펴본다. 늘 그래왔듯이. 한국 영화가 더욱 많아진 요즈음과는 다르게 어릴 적에는 정말 많은 중국(그리고 홍콩) 영화를 티비에서 볼 수 있었다. 임청하의 <동방불패>, 이소룡의 <정무문>, 장국영과 왕조현의 <천녀유혼> 등 굵직굵직한 영화들이 방영되었지만, 사실 명절 영화의 왕좌는 역시 성룡과 홍금보가 지키고 있었다. 성룡이나 홍금보 둘만 나와도 박장대소하는데 둘이 같이 출연하는 <쾌찬차>같은 작품을 방영할때면 정말 행복했다. 어린 날 티비를 하나놓고 네 가족이 키득대는 모습은 영락없이 명절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간혹 성룡과 홍금보가 나오지 않아도 눈길을 잡아채는 영화가 있었다. 주성치, 그리고 오맹달이 출연한 작품들이 그랬었는데, 영화에 담긴 정서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종종 등장하는 슬랩스틱한 개그들만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뿐, 주성치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 대학 들어온 그 해 여름의 이야기이다.


2. 주성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관객이 호평을 하는 영화가 있고, 대부분의 관객이 욕을 하면서 - 가끔은 영화 보는 도중에도 나가는 영화도 있고, 관객들의 호불호가 ‘취향’의 차이에 따라서 끔찍하게도 갈리는 영화들이 있다. 헐리우드의 흠잡을 데 없는 웰메이드 블록버스터가 첫 번째 경우에 속한다면, 두 번째 경우에는 정말 완성도가 낮은, 예로 들기는 미안하지만 조인성이 주연을 했던 <남남북녀> 같은 영화들이 속하지 않을까 한다.(최근작이었던 <비열한 거리에서의 연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마지막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은 작가주의적(이라 편의상 통칭하는) 영화들이 그러한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홍상수,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입김이 깊이 들어간 영화들은 감독의 특정한 정서가 영화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또한 변주되기 마련이다.(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개중 가장 반복과 변주에 천착하지 않나 싶다.)


특정한 정서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까닭에, ‘코드’를 가지지 못하였거나 혹은 맞지 않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감독들의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는 폭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그 나름의 맛을 알게되면 (통상적으로 개봉관이 적기 때문에) 찾아서 보지 않으면 보기 힘든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꼭 인사동 좁은 골목의 허름한 어느 술집 들어가듯 찾아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팬덤이 형성되게 되고, 이 팬덤은 그 크기가 작던 크던 작가주의적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큰 힘이 된다. 그렇게 창작 활동을 하고 또 피드백을 받는 행위를 통해서 그 특정한 정서는 주욱- 유지되기 마련이다. 감독이 (소위) 변절하지 않는 이상은.


주성치가 출연하거나 연출하고 있는 일련의 영화들 역시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주성치는 홍상수, 김기덕 등 감독의 영화들이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 못한 것에 비하면 정말 중국의 대중적인 영화인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마니아적인 특성은 거의 원본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 매력은 살아있다.


기본적으로 주성치는 코미디 배우다. 주성치의 팬 카페(물론 한국 팬 카페지만)에도 가입하여 거의 모든 주성치의 영화 리스트를 섭렵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주성치의 영화는 물론 멜로, 액션, 심지어 스포츠적인 면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극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작용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실상 코미디라는 큰 범주의 장르로 모두 묶어낼 수 있었다. 주성치의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다소간의 슬랩스틱, 엉뚱한 상황 전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패러디에 기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매력을 잘 살린 작품군은 <파괴지왕>, <녹정기>, <식신>등 주성치 코미디의 초중기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주성치가 슬랩스틱, 패러디로만 승부하는 것은 아니다. 주성치 영화의 표면적 매력이 그러한 코미디적 요소에서 나온다면 그 내면의 정서적인 기반에는 ‘힘없고 약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관심, 묘한 동질감과 그러한 약자들이 결국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영웅 신화’의 이데올로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줏어 들은 말이지만 중국에서 주성치의 영화들이 큰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가 약자의 정서에 호소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웃기고 재치있는 주성치 영화의 이면에는 채플린의 영화들이 그랬듯 나름의 페이소스가 있다.(물론 주성치의 영화가 거의 해피엔딩으로 가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순수 희극의 영역을 넘어간 주성치의 영화들은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등 여타 요소들이 강조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중 대표적인 영화가 굉장히 모던한 느낌이었던 <희극지왕>, 그리고 서유기의 주성치적인 재해석, <서유기 1 월광보합(이하 월광보합)> 과 <서유기 2 선리기연(이하 선리기연)>이다.


3. 선리기연


<월광보합>이 주성치가 그 전까지 가져오던 시종일관 웃음짓게 만드는 코미디의 미덕을 서유기의 인물들로 재해석한 1부라면, <선리기연>은 주성치의 코미디적 요소는 대폭 축소된 멜로적 성격이 강한 드라마를 가진 2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선리기연>은 <월광보합>보다 ‘덜’ 웃기지만 결과적으로 정서를 뒤흔드는 파장은 전에 없이 크다. 하지만 주성치식 유머는 슬픈 드라마에도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주성치의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 중 가장 명대사를 뽑으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난 과거에 사람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소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 여자에게 이 말을 할 거요

사랑하오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이라는 무척이나 긴 대사를 뽑을 것이다.(심지어 필자와 같이 외우고 다니는 사람도 종종 있다.)


이 대사는 <선리기연>을 통틀어서 두 번이 나오는데, 첫 번째는 지존보(주성치 분)가 영화에서 자하(주인 분)에게 죽을 위험에 쳐해 있을 때 거짓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지존보가 실지로 자하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우마왕에게 잡혀간 주인을 구하기 위해 손오공으로 환생하면서 속세와 인연을 끊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이 중 주목해야 될 전제는 사실 이 대사의 원 주인이 주성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주성치의 <서유기> 시리즈가 나오기 전해 나온 왕가위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중경삼림>의 대사이다. 금성무의 나레이션으로 처리되는 이 대사는 많은 이들에게 잊지 못할 우울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 진지한 대사를 주성치는 통째로 따다 패러디 해버린다.


자하가 지존보에게 칼 끝을 겨누는 순간, 영화는 순간 스틸컷으로 전환되면서 지존보와 자하, 그리고 겨누고 있는 칼을 연달아 비추며 마치 만화를 읽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명백한 의미에서의 스틸컷이 아닌, 등장인물이 가만히 멈추어 있는 효과로 스틸컷의 효과를 준다. 검이 지존보의 목을 겨누는 순간 장면은 고정되며 지존보의 친절한 나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때 검과 내 목과의 거리는 0.01cm 밖에 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중경삼림의 패러디가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중경삼림의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친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 밖에 안되었다. 난 그녀를 모른다. 여섯 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라는 초반부 대사를 패러디해온 것이다.(“....만년으로 하겠소”라는 대사가 중경삼림의 패러디가 아니고, 우연히 겹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엿보이지만, 그 앞에 자리잡은 이 첫 대사를 본다면 그 것은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스틸컷은 계속된다. 자하의 화난 얼굴이 다시 비추며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검의 주인이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과장된 지존보의 눈망울, 다시 자하의 눈, 과장되어 보이는 지존보의 이빨, 자하의 귀, 지존보의 다리, 자하의 다리가 정지된 상태에서 계속 넘어가면서 “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난 많은 거짓말을 해왔지만 이번이 가장 완벽했다.”라며 나레이션은 계속 흐른다. 지존보의 양손이 한번 클로즈업 될 때 한쪽 손은 Fuck you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자하의 검을 겨누고 있는 손을 비출 때 정지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왼쪽 손으로 오른 손이 간지럽다는 듯이 잠깐 긁고 이내 다시 자세로 돌아간다. 가히 키치적이라 할만한 설정이다.


나레이션이 시작될 때쯤 정지된 사운드는 나레이션의 끝과 함께 슬픈 음악을 내보낸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 지존보는 “난 죽어 마땅하오, 어서 죽이시오.”라며 저 위의 그 유명한 대사를 읊는다. 자하 역시 대사의 말미 쯤에 가면 같이 울어버린다. 이 곳에서 카메라는 클리셰한 쌍팔년도 멜로드라마같은 방식의 워킹을 보여주는데, 자하와 지존보의 얼굴을 계속 연달아 클로즈업하는 방식이다. 대사 말미에 갈수록 감정이입을 강조하는 듯 점점 더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이 방식은 음악과 더불어 굉장히 저열한 느낌으로 재현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은 모두 울고 있지만 관객은 웃겨 자빠질 지경이다. 촌스런 시퀀스의 마지막에 자하가 칼을 놓치는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찍은 것은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이에 반해 영화가 말미로 향하기 바로 전, 지존보가 자하를 우마왕에게서 구해내기 위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손오공으로 환생하는 장면에서의 패러디는 사뭇 진지하다. 물이 떨어지는 반사동 동굴 앞을 잠시 비추는 것은 지존보가 속세와 인연을 끊는 장소를 보여준다. 동굴 안에는 거대한 여의봉이 세로로 꽃혀있고, 그 밑에는 지존보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다. 지존보 주위로 카메라가 패닝하고 지존보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금강원(손오공의 머리띠)를 앞에 둔 지존보를 비춘다.


그 때, 지존보는 다시 한번 중경삼림의 패러디인 대사를 읊는다. 물론 나오는 음악은 전과 같은 음악이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촬영은 진중한 느낌을 전달하고 ‘돌아올 수 없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슬픈 느낌을 표현한다. 주성치의 수많은 영화 중 가장 슬프지 않을까 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지존보는 금강원을 머리에 쓴다. 금강원을 머리에 쓴 지존보를 앞, 뒤에서 클로즈업하면서 카메라는 다시 우마왕의 거처로 이동한다.


4. 다시 주성치


사실 [선리기연]의 아름다운 장면들은 이 말고도 많다. 우마왕 거처가 태양으로 떨어질 때 자하를 구하려 하지만 금강원이 머리를 조여 결국은 자하의 손을 놓치게 되는 장면, 감옥에 갇힌 삼장법사가 뜬금없이 “only you"를 마음대로 개사해 부르는 장면(극 중간에 뜬금없이 뮤지컬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전개 역시 주성치 영화의 반복 중 하나이다.), 극 에필로그에 잠시 등장하는 석양무사의 드라마 등 <선리기연>은 주성치의 영화의 총체 중 하나다.


최근 주성치의 행보는 종전의 B급적인 정서에서 벗어나 발달된 컴퓨터 그래픽을 애용하는 추세이다. <소림축구>로부터 시작된 기술력의 진보는 <쿵푸 허슬>로 이어지고 있고 어쩌면 이제 주성치의 영화에서 예전같은 허접한 특수효과, 인과관계가 부적절한 전개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름의 정서는 기술력의 진보에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주성치 영화를 사랑하는 한 관객으로서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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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불싸조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잠언 1:26)]

 

 몇 주 전, 우연히 웹진 weiv의 게시판을 기웃거리다 불싸조라는 밴드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물론 이름은 몇몇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언급되었던 밴드였으나 음악을 찾아서 들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불싸조라는 밴드명과는 약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 참 마음에 들어서 조만간 나온다는 2집에 꽤나 기대했습니다.

 결국 며칠 전에 신촌에 들릴 일이 생겨 향뮤직에 갔었는데, 불싸조 2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직원 분에게 물어보니 어떤 앨범을 꺼내주었는데, 불싸조라는 밴드명은 커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습관처럼 그 날 샀던 음반들의 비닐을 찌익찌익 벗기고 커버를 보는데, 불싸조의 음반에는 아무런 음반 소개가 없었습니다. 4p 짜리 거친 질감의 커버 안쪽에는 한두번 봐서는 내용이 감이 잘 안잡히는, 약간 하드하고 불친절한 만화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수록곡의 곡명은 물론 가사는 앨범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음반은 듣기도 전에 이미 불친절합니다. 후에 naver 등에서 검색한 홍보 문구도 '지옥에서 왔다'는 둥 '이성을 시어머니 댁에 둔 것처럼 정신없다'라는 둥, 키치적이고 거칠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하지만 음반은 생각만큼 아주 실험적이거나 거칠지는 않습니다. 물론 기타 톤은 마샬 앰프의 게인을 그냥 바로 녹음한 듯이 날것의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고, 종종 샘플을 사용하며, 드럼은 (특히 빠른 곡에서는) 정신없이 후드리긴 하지만 그 구성은 오히려 클리셰한 기타팝의 정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편입니다.

 첫 세곡, 'ㅁㅁㅁ To Fuck' 연작은 충만한 에너지를 전달해줍니다. 포문을 여는 트랙들로 부족함이 없으며, 불싸조 2집을 규정해주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트랙들이 모두 뛰어나진 않습니다. 몇몇 트랙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거나(이 지루함이 근원은 구체적으로 욜라 탱고등을 너무 많이 우려먹었다는 느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또 너무 전형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몇몇 트랙은 질 좋은 도로를 깜깜한 밤안개 속에서 달리는 느낌을 준달까, 종종 쓰이는 환호 소리 샘플과 함께 충분한 에너지를 줍니다.

 모든 곡은 거친 느낌의 드럼, 그 것보다 더 거칠지만 카랑카랑해서 기분좋은 기타, 평범한 베이스와 약간 작게 믹싱된 보컬이 주를 이룹니다. 이는 잘못하면 모든 곡이 거기서 거기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실지로도 사운드에서 곡들은 그다지 인상적인 차이를 내지도 못하고, 전개들도 기타팝의 공식을 따르기 떄문에 많은 차이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불싸조라는 밴드는 사실 개성을 가지거나, 곡 스타일이 다양해야 된다느니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샘플링이 많다는 사실이 그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앨범을 처음부터 쭈욱- 한번 플레이시키며 집중해들으면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지 않을까 합니다. 혹자는 지루하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은 흠뻑 빠질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사람은 당장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팔아치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싸조라는 밴드는 유추해보건데 그런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제 CD 플레이어에서 불싸조는 당분간 계속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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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연극 포스터 붙이던 사내 / 박종윤

대학로 연극 포스터 붙이던 사내


성균관대 학생도 아닌 것이 대학로에 괜시리 많이 가게 된 것은 아마 대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의 겨울, 대학로 모 처의 술집에서 미팅을 하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소싯적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은 성격은 어느새 문어발식 확장을 계속하여 영화에까지 도달하였고, 1학년 때 운 좋게도 독특한 취향의 벗들을 많이 사귀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작은 영화’라는 것에도 관심을 가질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많이 데리고 갔던, 지금은 작은 영화들을 많이 상영해주는 ‘동숭 아트 홀’에 발을 들여놓게 된 이후 틈만 나면 대학로에 가서 영화를 한편 보고 가까운 후배들과 밥을 먹거나, 잔을 기울였다. 그 것이 2005년도,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그 짧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을 목격했던 것은 아마 그 무렵이지 싶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지날 때였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소극장이 밀집되어 있는 대학로답게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혜화역 쪽으로 쭉 걸어나가면 심심치않게 연극 혹은 뮤지컬 포스터를 볼 수 있다. 수수한 낮의 대학로에서 두 명의 남자가 게시판에 연극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다. 빈자리가 없자 처음 들어온 듯한 사내가 선배로 보이는 사내에게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에는 붙이면 안되지 않나요?” 그러자 선배로 보이는 사내는 말했다. “이 위는 괜찮아.” 남이 애써 붙여놓은 포스터 위에 자기들 연극 공연 포스터를 붙이다니! 라고 혼잣말로 지껄이고 다시 한번 게시판 쪽을 쳐다보았을 때,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문구로 장식된, 당시 잘 나가던 뮤지컬 공연 포스터 위에는 포스터를 덧대고 있는데, 마치 비슷한 사정으로 보이던 투박한 몇몇 연극 포스터 위에는 덧대지 않는 것이었다.


“이 위는 괜찮아.”라는 말은 뻔뻔함이 아닌 자조였다. 일전에 연극하는 친구와 술한잔 했을 때 들었던 소극장 연극계의 현실은 쉬운 종류의 그 것이 아니었다. 많은 자본이 투하된 공연들이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전회매진! 뮤지컬 ㅇㅇㅇ!“라는 선정적인 카피의 홍보 문구와 보도 자료들을 보고 있자하면 아무리 그 계통에 일자무식인 나라도 눈이 가기 마련이다. 마케팅과 자본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규모와 관객 수의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이 위는 괜찮아.“라는 짧은 구절에는 ”우리가 이런다고 이 밑은 그리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경멸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함께 묻어있었다. 불평등한 현 상황에 대한 작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비슷한 처지의 극단을 생각하는 마음에서였을까, 덧대면 큰일날 것 같은 소규모 공연의 포스터 위에는 자신들의 포스터를 덧대지 않았다. 그 와중의 작은 미소였을까.


1년이나 지난 날의 짧은 일화를 꺼내보다 문득 현 정부의 과업처럼 추진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자본의 차이, 규모의 차이, 불평등한 현 상황... 많은 것들이 머리를 괴롭혔다. 그리고 “덧대면 큰일날 서민과 농민들을 과연 생각하면서 협상이 이뤄지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자유무역협정에서 작은 미소, 작은 관용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걸까? 오늘도 대학로 앞, 조그마한 공연들의 포스터를 보면 마음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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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반복, <NAVER>

두려운 반복,


 ‘반복 학습’의 효과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왜 있지 않은가, 그 유명한 ‘파블로브의 개’. 실험의 요지는 다들 아시다시피 ‘반복이 동물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처음에는 동물에게만 한정했었던 이론을 인간의 영역으로 확장한 이후 반복의 개념은 관점을 막론하고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서 부각되었다.

 

 반복은 양날의 검이라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가져간다. 좋은 면이라 하면 역시 기능성이 높아진다는 면을 들 수 있겠는데, 인간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일을 실행할 때 그 반복하는 횟수가 높아질수록 속도와 정확도가 높아진다. 여담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노동자라 해도 10년, 20년 이상 근속한 노동자에게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에 비하여 나쁜 면 역시 작지는 않은데, 수 많은 나쁜 점들에서  주목해야 될 것 중 하나는 결국 반복이란 행위가 고정관념(streotype)을 양산하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고정관념이란 한번 형성되면 다시 새로운 개념을 주입하는 것이 힘이 듦은 물론, 자신도 모르는 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언제서부터 눈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꽤나 많은 TV 광고 뒤에 짧게 붙었던 토막 광고가 있었다. ‘네이버에서 ☐☐☐를 쳐보세요.’ 특히 제품의 성능과 관련된 광고가 아닌 이미지 광고, 혹은 영화 예고편 등에서 많이 활용된 문구였다. 이는 곧 네이버에 어떠한 상품을 검색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증명이며, 거꾸로 뭐든지 자유로와 보이는 정보의 바다에서 실지로는 네이버가 사실상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구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 순으로 헤게모니가 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인터넷 검색 사이트의 역사에서는 야후에서 네이버로 헤게모니가 이동하였다. 2006년 8월 기준으로 대략 70퍼센트 정도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네이버의 검색 엔진은 현재 독점 혹은 야후, 엠파스 등의 기업들과 함께 과독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굳이 단순화 시키자면 대한민국 사람 10명 중 7명이 네이버를 통해서 정보를 찾아다니고, 네이버 뉴스에서 정치-경제-시사적인 이슈들을 확인하며, 네이버 지식인에서 일상적인 지식을 찾아다닌다는 도식이 그려진다. 즉, 네이버적인 사고방식이 고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고의 편의적인 고정이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을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될 문제다.

 

 현재의 미디어 권력 구조 속에서 네이버가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흐름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나갈 수 있음은 자명하다. 아니, 현재도 그러하고 있다. 검색창의 스폰서 링크, 메인 뉴스의 선정, 인터넷 댓글의 의도적 삭제 등. 황우석 박사의 사태, 평택 대추리 사태 등 여러 사회적 이슈에서 네이버의 음모론이 끝임없이 재기되는 배경에는 네이버가 가지고 있는 미디어 권력의 암울한 이면이 항상 존재해왔다. 하지만 매번 이러한 정당한 문제의식은 금새 휘발되기 마련이다. 어쩌랴, 당신이 좋아하는 저 영화 속 주인공이 말한다. ‘네이버에서 ☐☐☐를 쳐보세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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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활의 중심은 어디에 있나요? <SK telecom> / 박종윤

우리 생활의 중심은 어디에 있나요?


교양 과목인 ‘현대 사회와 광고’ 혹은 전공으로 있는 광고 수업등을 듣다보면 교수님들이 수업 첫머리에 늘 반복하시는 어구가 있는데, 바로 ‘현대 사회에서 살아감에 있어 광고는 사람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번은 2호선 신촌 지하철 역에서 괜히 시간을 죽이며 역사를 주욱 돌아다 본 적이 있다. 신촌역에 도대체 몇 개의 광고가 존재하는 지 세어보려고 했는데 결국은 포기해버렸다. 이미 시작부터 소주독에 빠져있던 바, 잘 될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신촌 역사에 막차 시간 다 되어 분주히 제 갈길 가는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 수만큼이나 많을 것만 같던 광고의 개수를 세기란 어지간한 근성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문득 떠오른 교수님들의 클리세한 경구에 동감을 표하지 않기란 더욱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차고 넘치는 현란한 이미지, 사운드, 그리고 엄청난 정보량에 기죽게 되었는데, 그 때문일까,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되었다. 광고라고 예외는 없다. 수도 없이 많은 광고 중에서 우리의 머릿 속에 남아있는 것은 불과 세 네개? 사실은 그만큼도 못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장안에 화제가 되는’ 광고는 마케팅의 효과 역시 만만치 않겠지만 우리 일반 서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활력소가 된다는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2006년, ‘장안의 화제가 되는’ 마케팅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광고단체연합회에서 뽑는 2006 대한민국광고대상에 광고 대행사 TBWA 코리아가 제작한 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며칠 전 들은 바 있다. 많은 독자 분들이 ‘아하~!’ 하며 무릎을 칠 듯 한데, ‘생활의 중심에 항상 SK 텔레콤이 있다‘라는 짧고 간결한 아이디어에서 좁은 가능성이 아닌, 수만가지 상황에 대입시켜 기존의 광고보다 훨씬 열려있는 스타일로 시리즈를 구성한 것이 높은 점수를 얻었던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의 진정한 자본주의적 미덕은 ‘생활의 중심’ 이라는 어휘에 있다. 분명 계산된 카피, ‘생활의 중심’에 ‘SK 텔레콤’이 있다는 전제는 곧 소비로서  정체성을 표출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 가장 근접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강력한 헤게모니로서 작용한다. 우리 생활의 중심에 인간이 아닌 'SK 텔레콤‘이 있다는, ’기업‘과 ’마케팅‘이 있다는 그 21세기적 전제는 이제는 담담해질 때도 되었지만, 하지만 가끔은 이내 답답해지기도 한다.

 

누구라도 시간이 난다면, 특히 ‘시간이 금이다’라는 자본주의적 경구에 흡집을 내고 싶은 반항아라면, 한번쯤은 신촌 지하철 역사에서 광고가 몇 개 붙어있는 지 세어보자. 적어도 한번이라도 시도해본다면, 혹시나 정말로 그 많은 광고를 다 세어본다면 분명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바보같은 사람이 되어있을테지만,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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