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
㉯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
㉰ 다른 논의들
㉠ 국가조합주의(최장집)
㉡ 기독교 노동운동의 성격(김녕)
② 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 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
㉮ 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
㉯ 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
㉰ 80년대 노동운동 연구가 미비한 이유
㉠ ‘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 - 이 주제가 정치학이 아닌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
㉱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
㉠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
㉢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
ⓐ 최장집 :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
ⓑ 송호근 : ‘새로운 노동운동’은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도 비슷한 한계 공유
ⓐ 김동춘 :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
㉤ 앞선 논의에 대한 비판
ⓐ 노중기 :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 임영일 : 노동운동위기가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활동가운동과 대중적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
ⓒ 김영수 :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화는 70년대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맞물린 노동자계급의 양적 확대, 그들 의식의 점진적 제고 등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조건을 촉진시켰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은 80년대 중반 이후 모색해 왔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적 장애에 직면해 있었다.
① 신군부와 타협한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민중운동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이들의 강한 흡인력에 노출
②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세계사적 변화는 대안체제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민중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운동 내부의 분화를 자극
기존 ㉠급진노동운동그룹들, ㉡자생성에 지배되고 있던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내외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은 이념,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분기되었을 뿐 노동운동의 통일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데 실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90년 전노협 건설을 전후로 조성된 공안정국 아래서 국가와 자본의 전면적 공세로 인해 상대적인 위축을 경험했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운동 위기논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위기논쟁은 80년 518이후 전개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검토했고, 객관적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중심에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위기’의 원인분석을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대부분 ‘경험주의’, ‘실증주의’에 강하게 자극받으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한 성찰적 반성은 개별주체 혹은 ‘집단’으로 호명되는 사회세력들이 특정국면에서 전개한 미시적인 사회정치적 행위에 대한 관심을 넘어 국가권력/자본과의 긴장/대결을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노동운동의 구조와 역사라는 거시영역에 대한 탐구와 그 속에서 발생한 이론과 실천의 긴장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기존 논의의 다음과 같은 한계에 대한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① 기존 논의들이 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여 단순히 재단하고 비판해온 측면이 있다. 급진노동운동에 참여하였던 활동가들의 단편적인 정리나 회고 또한 그들 자신이 과거 특정한 운동 서클이나 정파에 몸담았던 주체였다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 그 가운데 일부는 현재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모순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ex-우리는 200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 있을까?)
②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그 인정여부와 무관하게 당시 정세 속에서 이 운동을 고립시키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이행 국면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해석 및 판단과 연관되어 있어 심각성이 더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계,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기존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라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급진노동운동과 이에 규정되어 온 학문의 흐름이 ‘아카데미즘’을 경시해 왔다는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이들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결과한 것이다.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대부분은 87년 6월항쟁 이후 진척된 ‘정치적 자유화’조치들의 내용과 이완된 정치적 공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급진노동운동을 ‘과잉평가한 후 과잉비판’하는 공통된 양상을 보였다. ‘최대강령주의’를 추구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이 대폭발하는 상황에서 이들에 삼투되었고 이러한 관계구조의 지속이 다시 그 대중들을 이탈시켜 노동운동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 글은 급진노동운동이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볼 때 노동운동 내부에서 ‘대중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행사한 적이 없었음을 밝힌다. 앞선 비판적 논의들이 사회정치세력의 재편성에 끼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업은 80년대 이후 급진노동운동과 이론의 역사, 위상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본론)
이를 위해 기존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기존 논의를 범주화시키면 ①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②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에 대한 연구는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급진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으로 나눠진다. ‘한계’와 ‘오류’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해 평가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 비판적 논의도 당시 노조운동이 영향 받거나 수용한 이념과 이론, 운동에서 드러난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이 가운데 최장집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국가의 성격, 국가의 노동정책에 주목하는 연구를 한다. 최장집은 ‘조합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축적 과정에서 행하는 국가의 역할 및 계급적 성격, 권위주의 국가와 사회계급 사이의 전체적 관계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수입대체공업화의 위기 가운데 파시즘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이 배제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조합주의 등장경로는 한국에 적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노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각 산업화단계를 추동하는 ‘동맹’의 참여자 혹은 배제자로서 하나의 주체로 설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가조합주의는 식민지권력의 성립을 계기로 이미 조성된,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 증폭된 과대성장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은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을 과잉 평가하는 민중주의적 경향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최장집은 당시 노조운동을 지원했던 교회의 노동운동이념 및 그 요구 내용이 국가의 공식정책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보다 기본적으로 그것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급진노동운동의 출현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기독교노동운동과 국가가 공유하는 이러한 동질성,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한계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근거한다.
하지만 최장집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는데 국가조합주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조합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해야 한다. 슈미터는 조합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조합주의는 국가에 의해(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인정되거나 허가된, 그 리더의 선출 그리고 요구와 지지의 접합에 대한 어떤 통제를 준수하는 대신, 그들 각각의 범주 내에서 상당한 독점적 대표성을 부여받는, 그 구성단위들이 한정된 수의 독점적, 의무적,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고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범주들 속에 조직화된 이익 대표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의 경우 한국노총이 군부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접어두더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공식노조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기업별 노조로 원자화된 노동자들은 상급노조를 통해 기존 국가체제에 포섭되어 사회경제적으로 동원되기보다 국가의 억압기제와 이데올로기기제 등을 통해 직접 국가에 포섭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노조 지도자에게 특별히 배타적 반대급부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자대중에게도 경제적 동원 이외에 어떠한 인센티브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비판은 최장집도 과대성장국가론을 국가조합주의 적용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적절해 보인다. 조합주의 또한 계급간의 모순,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 및 대결을 반영하는 제도인 것이고, 과대성장국가론은 해방 직후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패배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조합주의라는 기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확인시켜준다. 최장집은 자신이 수용한 이론틀을 역사와 접합할 때 드러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아 자신의 의미 있는 논의마저 퇴색시키고 있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기독교노동단체들의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다룬 김녕의 논의로부터 일정하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김녕은 국가의 억압행위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정에서 상이 성직자들과 하위 성직자들, 진보적 사제들과 보수적 사제들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갈등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해소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의 실천은 가톨릭교회 내부의 주류가 아니며 오히려 주요한 흐름은 보수적인 세력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진보적 사제들이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자’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하는 ‘성서의 실천’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조직 자체의 보존을 중요시하는 교회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덕목에 준하여 대응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까밀로 또레스(콜롬비아의 신부-게릴라)를 배출해 냈고, 대단히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낳은 제도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산아제한에 반대하고, 여성사제의 임명을 막고 있으며 형식적 위계구조의 변경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녕은 ‘다양성 속의 일치’에서 ‘일치’가 교회의 존립과 관계되는 것이고 지향점이 ‘교회’ 그 자체라는 점을 간과한다. 따라서 교회 내부적으로 사회적 실천세력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기존 교회의 위계체제를 본질적으로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비세속적 도덕성의 상징’인 교회의 이름으로 그 사회적 실천이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적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교회 내의 문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과하며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로부터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분리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조합주의가 주목하는 노동자계급, 교회의 위상과 기능을 둘러싼 논의들이 급진노동운동의 前史에 해당하는 연구로 의미를 지니고, 80년 518을 경험하며 80년대 중반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핵심고리이다.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출발하여 87년 투쟁 이후 등장한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역으로 그것에 조건당하면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을 평가하는 두 가지 입장의 연장선에 있는데, 하나는 ①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하는 것으로 70년대 운동에 대한 ‘민중주의적 평가’에서 이어진다. 이 논의에 의하면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무차별의 대중참여’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 결과 ‘선도적인 정치적 노동운동’은 대중성의 결여일 뿐이고, 이론논쟁은 엘리트들의 ‘자족적이고 무의미한 이론논쟁’으로 평가될 뿐이다. 87년 투쟁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변혁적인 투쟁으로 과잉 규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0년대 급진ㄴ동운동의 출현은 운동의 후퇴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징후는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태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며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평가는 ②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입각한 평가는 한국노동운동이 87년 이전에는 자기형성과정조차 밟지 못했으나, 87년을 고비로 노동자계급운동으로 문턱을 넘어섰다고 파악한다. 이 논의들은 주체형성의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87년 이전에도 급진노동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흐름이 존재했다는 점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독자성을 지닌 노동운동이 대중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점, 특히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및 정치운동이 여전히 의미 있는 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노동운동과 비교할 때 80년대 노동운동은 오히려 연구의 관심대상에서 상당히 소외되었다. 그 이유는
①‘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로 이 주제가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운동의 정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정치를 제도화된 영역으로만 협소하게 규정하는 발상에 의한 것이다.
②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내외의 계기들이 맞물리며 형성된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된 측면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논의는 다음의 한계를 공유한다.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불평등성, 노동기본권의 부재 등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 상황적인 요소로만 취급한다.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한다. 이 논의는 신고전파정치경제학에서처럼 행위자는 합리적 선호에 근거해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해 추동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매는 이미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가정하면서도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여타 전략/전술을 선험적으로 배제하거나 비합리적 행위로 낙인찍는다.
이런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최장집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의 실패 요인에 관한 논의에서 노동운동 쇠퇴의 구조적인 조건보다 확대된 정치공간에서 노동운동이 ‘열려져 있는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행위론적 차원을 주목한다. 최장집은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됐고, 이로 인해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좌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송호근은 노동자대투쟁이 대학생과 재야집단의 지원을 받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던 비공식적, 진보적 노동자집단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계기였고, 이들이 전노협을 출범시켰다고 단정 짓고 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노동운동’은 그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두 논의는 정치적 노동운동(‘외부로부터의 지도’)과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통해 운동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출발은 적절하다.(‘자생성 테제’의 적합성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최대강령주의자들’이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가 그것의 쇠퇴를 가져온 매개요인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빠져있다. 무엇보다 쟁점이 되는 것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일단 분리한 후,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전자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후자의 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했다고 보는 이들 주장의 현실적합성 여부이다.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들은 ‘전략적 선택론’의 한계를 넘어 나가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이런 논의에서도 87년 이전 급진노동운동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주로 노동자대중운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이들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고립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변화 등 노동운동 내부의 관계/노동운동을 둘러싼 미시 거시적인 조건의 변화에 주목한다.
김동춘은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 그는 경제와 정치를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구조와 행위의 통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최장집, 송호근 등과 차별성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운동 일반은 정치적 변화기를 포함한 그 어떤 시기에도 그의 논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미의 ‘고립’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고립’의 적실성은 87년 노동자대투쟁~90년 전노협 시기 까지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동춘의 논의는 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최대강령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아래 있었다는 최장집 등의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역량은 노동조합원 수나 쟁의의 빈도, 투쟁의 강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판별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운동을 일관되게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계와 이념, 대중과의 결합정도, 연대성 제고 등이 더 효과적인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 90년을 전후로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되어진 노동조합운동은 결코 과거보다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노중기는 김동춘과 대립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들의 한계와 국가의 변화된 노동정책의 파시스트적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소위 ‘민주화이행’ 시기에 기존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지배구조가 온전히 유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전략적 선택지의 다원성’ 그 자체를 문제시 한다.
임영일은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87년 이후 급진노동운동을 포함한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관계,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계 변화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를 살핀다. 그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협상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출신 활동가조직이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이들은 87년 이후 대중조직과의 결합에 실패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임영일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성된 노동운동의 활동공간에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 운동이 전노대로 묶임으로써 경제주의적/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이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대시켜 그것이 위기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 이와 같은 결과는 애초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활동가운동과 87년 이후 대중적 민주노조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최대강량주의에 집착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운동에 대한 헤게모니로부터 노동운동위기를 도출해 내는 경험적이고 인상비평적인 논의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구조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들에 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 - ex/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노동운동을 자본의 하위파트너로 만들었는가?) 하지만 임영일은 ‘전위정당’ 건설을 지향하기조차 한 활동가운동의 위상에 대한 평가를 회피함으로써 급진노동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공과 또한 빠트린다.
김영수는 이를 포착하는데, 그는 노동자정치운동과 조합운동 사이의 관계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임영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넘고자 한다. 그는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기’를 포함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의 분리 및 연대라는 차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는 전노운협의 분화, 민중당 좌절 이후 민주노총 건설을 둘러싼 와중에 있던 노동자정치운동의 상황을 ‘대중적인 노조운동이 주도하며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규정한다. 그 이전시기(87년 이후~민주노총 건설)에 대해서는 양자가 조직적으로 상호주도하면서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보고 있다. 이것은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노동운동위기론’을 매개로 급진노동운동의 위상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관계 등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들이 ‘지체된 민주주의’의 책임을 상당 정도 급진노동운동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의 작업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 그리고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고 그 모순들이 해소, 극복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급진운동을 재구성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① 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
㉯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
㉰ 다른 논의들
㉠ 국가조합주의(최장집)
㉡ 기독교 노동운동의 성격(김녕)
② 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 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
㉮ 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
㉯ 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
㉰ 80년대 노동운동 연구가 미비한 이유
㉠ ‘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 - 이 주제가 정치학이 아닌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
㉱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
㉠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
㉢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
ⓐ 최장집 :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
ⓑ 송호근 : ‘새로운 노동운동’은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도 비슷한 한계 공유
ⓐ 김동춘 :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
㉤ 앞선 논의에 대한 비판
ⓐ 노중기 :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 임영일 : 노동운동위기가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활동가운동과 대중적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
ⓒ 김영수 :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화는 70년대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맞물린 노동자계급의 양적 확대, 그들 의식의 점진적 제고 등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조건을 촉진시켰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은 80년대 중반 이후 모색해 왔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적 장애에 직면해 있었다.
① 신군부와 타협한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민중운동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이들의 강한 흡인력에 노출
②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세계사적 변화는 대안체제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민중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운동 내부의 분화를 자극
기존 ㉠급진노동운동그룹들, ㉡자생성에 지배되고 있던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내외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은 이념,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분기되었을 뿐 노동운동의 통일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데 실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90년 전노협 건설을 전후로 조성된 공안정국 아래서 국가와 자본의 전면적 공세로 인해 상대적인 위축을 경험했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운동 위기논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위기논쟁은 80년 518이후 전개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검토했고, 객관적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중심에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위기’의 원인분석을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대부분 ‘경험주의’, ‘실증주의’에 강하게 자극받으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한 성찰적 반성은 개별주체 혹은 ‘집단’으로 호명되는 사회세력들이 특정국면에서 전개한 미시적인 사회정치적 행위에 대한 관심을 넘어 국가권력/자본과의 긴장/대결을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노동운동의 구조와 역사라는 거시영역에 대한 탐구와 그 속에서 발생한 이론과 실천의 긴장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기존 논의의 다음과 같은 한계에 대한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① 기존 논의들이 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여 단순히 재단하고 비판해온 측면이 있다. 급진노동운동에 참여하였던 활동가들의 단편적인 정리나 회고 또한 그들 자신이 과거 특정한 운동 서클이나 정파에 몸담았던 주체였다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 그 가운데 일부는 현재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모순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ex-우리는 200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 있을까?)
②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그 인정여부와 무관하게 당시 정세 속에서 이 운동을 고립시키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이행 국면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해석 및 판단과 연관되어 있어 심각성이 더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계,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기존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라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급진노동운동과 이에 규정되어 온 학문의 흐름이 ‘아카데미즘’을 경시해 왔다는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이들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결과한 것이다.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대부분은 87년 6월항쟁 이후 진척된 ‘정치적 자유화’조치들의 내용과 이완된 정치적 공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급진노동운동을 ‘과잉평가한 후 과잉비판’하는 공통된 양상을 보였다. ‘최대강령주의’를 추구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이 대폭발하는 상황에서 이들에 삼투되었고 이러한 관계구조의 지속이 다시 그 대중들을 이탈시켜 노동운동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 글은 급진노동운동이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볼 때 노동운동 내부에서 ‘대중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행사한 적이 없었음을 밝힌다. 앞선 비판적 논의들이 사회정치세력의 재편성에 끼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업은 80년대 이후 급진노동운동과 이론의 역사, 위상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본론)
이를 위해 기존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기존 논의를 범주화시키면 ①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②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에 대한 연구는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급진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으로 나눠진다. ‘한계’와 ‘오류’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해 평가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 비판적 논의도 당시 노조운동이 영향 받거나 수용한 이념과 이론, 운동에서 드러난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이 가운데 최장집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국가의 성격, 국가의 노동정책에 주목하는 연구를 한다. 최장집은 ‘조합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축적 과정에서 행하는 국가의 역할 및 계급적 성격, 권위주의 국가와 사회계급 사이의 전체적 관계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수입대체공업화의 위기 가운데 파시즘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이 배제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조합주의 등장경로는 한국에 적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노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각 산업화단계를 추동하는 ‘동맹’의 참여자 혹은 배제자로서 하나의 주체로 설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가조합주의는 식민지권력의 성립을 계기로 이미 조성된,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 증폭된 과대성장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은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을 과잉 평가하는 민중주의적 경향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최장집은 당시 노조운동을 지원했던 교회의 노동운동이념 및 그 요구 내용이 국가의 공식정책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보다 기본적으로 그것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급진노동운동의 출현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기독교노동운동과 국가가 공유하는 이러한 동질성,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한계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근거한다.
하지만 최장집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는데 국가조합주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조합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해야 한다. 슈미터는 조합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조합주의는 국가에 의해(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인정되거나 허가된, 그 리더의 선출 그리고 요구와 지지의 접합에 대한 어떤 통제를 준수하는 대신, 그들 각각의 범주 내에서 상당한 독점적 대표성을 부여받는, 그 구성단위들이 한정된 수의 독점적, 의무적,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고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범주들 속에 조직화된 이익 대표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의 경우 한국노총이 군부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접어두더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공식노조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기업별 노조로 원자화된 노동자들은 상급노조를 통해 기존 국가체제에 포섭되어 사회경제적으로 동원되기보다 국가의 억압기제와 이데올로기기제 등을 통해 직접 국가에 포섭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노조 지도자에게 특별히 배타적 반대급부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자대중에게도 경제적 동원 이외에 어떠한 인센티브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비판은 최장집도 과대성장국가론을 국가조합주의 적용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적절해 보인다. 조합주의 또한 계급간의 모순,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 및 대결을 반영하는 제도인 것이고, 과대성장국가론은 해방 직후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패배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조합주의라는 기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확인시켜준다. 최장집은 자신이 수용한 이론틀을 역사와 접합할 때 드러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아 자신의 의미 있는 논의마저 퇴색시키고 있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기독교노동단체들의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다룬 김녕의 논의로부터 일정하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김녕은 국가의 억압행위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정에서 상이 성직자들과 하위 성직자들, 진보적 사제들과 보수적 사제들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갈등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해소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의 실천은 가톨릭교회 내부의 주류가 아니며 오히려 주요한 흐름은 보수적인 세력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진보적 사제들이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자’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하는 ‘성서의 실천’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조직 자체의 보존을 중요시하는 교회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덕목에 준하여 대응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까밀로 또레스(콜롬비아의 신부-게릴라)를 배출해 냈고, 대단히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낳은 제도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산아제한에 반대하고, 여성사제의 임명을 막고 있으며 형식적 위계구조의 변경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녕은 ‘다양성 속의 일치’에서 ‘일치’가 교회의 존립과 관계되는 것이고 지향점이 ‘교회’ 그 자체라는 점을 간과한다. 따라서 교회 내부적으로 사회적 실천세력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기존 교회의 위계체제를 본질적으로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비세속적 도덕성의 상징’인 교회의 이름으로 그 사회적 실천이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적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교회 내의 문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과하며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로부터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분리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조합주의가 주목하는 노동자계급, 교회의 위상과 기능을 둘러싼 논의들이 급진노동운동의 前史에 해당하는 연구로 의미를 지니고, 80년 518을 경험하며 80년대 중반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핵심고리이다.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출발하여 87년 투쟁 이후 등장한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역으로 그것에 조건당하면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을 평가하는 두 가지 입장의 연장선에 있는데, 하나는 ①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하는 것으로 70년대 운동에 대한 ‘민중주의적 평가’에서 이어진다. 이 논의에 의하면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무차별의 대중참여’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 결과 ‘선도적인 정치적 노동운동’은 대중성의 결여일 뿐이고, 이론논쟁은 엘리트들의 ‘자족적이고 무의미한 이론논쟁’으로 평가될 뿐이다. 87년 투쟁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변혁적인 투쟁으로 과잉 규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0년대 급진ㄴ동운동의 출현은 운동의 후퇴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징후는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태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며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평가는 ②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입각한 평가는 한국노동운동이 87년 이전에는 자기형성과정조차 밟지 못했으나, 87년을 고비로 노동자계급운동으로 문턱을 넘어섰다고 파악한다. 이 논의들은 주체형성의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87년 이전에도 급진노동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흐름이 존재했다는 점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독자성을 지닌 노동운동이 대중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점, 특히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및 정치운동이 여전히 의미 있는 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노동운동과 비교할 때 80년대 노동운동은 오히려 연구의 관심대상에서 상당히 소외되었다. 그 이유는
①‘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로 이 주제가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운동의 정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정치를 제도화된 영역으로만 협소하게 규정하는 발상에 의한 것이다.
②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내외의 계기들이 맞물리며 형성된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된 측면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논의는 다음의 한계를 공유한다.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불평등성, 노동기본권의 부재 등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 상황적인 요소로만 취급한다.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한다. 이 논의는 신고전파정치경제학에서처럼 행위자는 합리적 선호에 근거해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해 추동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매는 이미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가정하면서도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여타 전략/전술을 선험적으로 배제하거나 비합리적 행위로 낙인찍는다.
이런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최장집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의 실패 요인에 관한 논의에서 노동운동 쇠퇴의 구조적인 조건보다 확대된 정치공간에서 노동운동이 ‘열려져 있는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행위론적 차원을 주목한다. 최장집은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됐고, 이로 인해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좌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송호근은 노동자대투쟁이 대학생과 재야집단의 지원을 받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던 비공식적, 진보적 노동자집단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계기였고, 이들이 전노협을 출범시켰다고 단정 짓고 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노동운동’은 그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두 논의는 정치적 노동운동(‘외부로부터의 지도’)과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통해 운동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출발은 적절하다.(‘자생성 테제’의 적합성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최대강령주의자들’이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가 그것의 쇠퇴를 가져온 매개요인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빠져있다. 무엇보다 쟁점이 되는 것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일단 분리한 후,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전자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후자의 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했다고 보는 이들 주장의 현실적합성 여부이다.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들은 ‘전략적 선택론’의 한계를 넘어 나가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이런 논의에서도 87년 이전 급진노동운동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주로 노동자대중운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이들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고립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변화 등 노동운동 내부의 관계/노동운동을 둘러싼 미시 거시적인 조건의 변화에 주목한다.
김동춘은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 그는 경제와 정치를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구조와 행위의 통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최장집, 송호근 등과 차별성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운동 일반은 정치적 변화기를 포함한 그 어떤 시기에도 그의 논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미의 ‘고립’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고립’의 적실성은 87년 노동자대투쟁~90년 전노협 시기 까지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동춘의 논의는 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최대강령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아래 있었다는 최장집 등의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역량은 노동조합원 수나 쟁의의 빈도, 투쟁의 강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판별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운동을 일관되게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계와 이념, 대중과의 결합정도, 연대성 제고 등이 더 효과적인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 90년을 전후로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되어진 노동조합운동은 결코 과거보다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노중기는 김동춘과 대립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들의 한계와 국가의 변화된 노동정책의 파시스트적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소위 ‘민주화이행’ 시기에 기존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지배구조가 온전히 유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전략적 선택지의 다원성’ 그 자체를 문제시 한다.
임영일은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87년 이후 급진노동운동을 포함한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관계,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계 변화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를 살핀다. 그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협상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출신 활동가조직이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이들은 87년 이후 대중조직과의 결합에 실패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임영일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성된 노동운동의 활동공간에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 운동이 전노대로 묶임으로써 경제주의적/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이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대시켜 그것이 위기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 이와 같은 결과는 애초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활동가운동과 87년 이후 대중적 민주노조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최대강량주의에 집착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운동에 대한 헤게모니로부터 노동운동위기를 도출해 내는 경험적이고 인상비평적인 논의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구조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들에 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 - ex/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노동운동을 자본의 하위파트너로 만들었는가?) 하지만 임영일은 ‘전위정당’ 건설을 지향하기조차 한 활동가운동의 위상에 대한 평가를 회피함으로써 급진노동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공과 또한 빠트린다.
김영수는 이를 포착하는데, 그는 노동자정치운동과 조합운동 사이의 관계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임영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넘고자 한다. 그는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기’를 포함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의 분리 및 연대라는 차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는 전노운협의 분화, 민중당 좌절 이후 민주노총 건설을 둘러싼 와중에 있던 노동자정치운동의 상황을 ‘대중적인 노조운동이 주도하며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규정한다. 그 이전시기(87년 이후~민주노총 건설)에 대해서는 양자가 조직적으로 상호주도하면서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보고 있다. 이것은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노동운동위기론’을 매개로 급진노동운동의 위상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관계 등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들이 ‘지체된 민주주의’의 책임을 상당 정도 급진노동운동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의 작업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 그리고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고 그 모순들이 해소, 극복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급진운동을 재구성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① 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
㉯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
㉰ 다른 논의들
㉠ 국가조합주의(최장집)
㉡ 기독교 노동운동의 성격(김녕)
② 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 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
㉮ 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
㉯ 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
㉰ 80년대 노동운동 연구가 미비한 이유
㉠ ‘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 - 이 주제가 정치학이 아닌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
㉱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
㉠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
㉢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
ⓐ 최장집 :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
ⓑ 송호근 : ‘새로운 노동운동’은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도 비슷한 한계 공유
ⓐ 김동춘 :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
㉤ 앞선 논의에 대한 비판
ⓐ 노중기 :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 임영일 : 노동운동위기가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활동가운동과 대중적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
ⓒ 김영수 :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화는 70년대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맞물린 노동자계급의 양적 확대, 그들 의식의 점진적 제고 등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조건을 촉진시켰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은 80년대 중반 이후 모색해 왔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적 장애에 직면해 있었다.
① 신군부와 타협한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민중운동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이들의 강한 흡인력에 노출
②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세계사적 변화는 대안체제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민중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운동 내부의 분화를 자극
기존 ㉠급진노동운동그룹들, ㉡자생성에 지배되고 있던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내외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은 이념,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분기되었을 뿐 노동운동의 통일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데 실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90년 전노협 건설을 전후로 조성된 공안정국 아래서 국가와 자본의 전면적 공세로 인해 상대적인 위축을 경험했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운동 위기논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위기논쟁은 80년 518이후 전개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검토했고, 객관적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중심에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위기’의 원인분석을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대부분 ‘경험주의’, ‘실증주의’에 강하게 자극받으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한 성찰적 반성은 개별주체 혹은 ‘집단’으로 호명되는 사회세력들이 특정국면에서 전개한 미시적인 사회정치적 행위에 대한 관심을 넘어 국가권력/자본과의 긴장/대결을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노동운동의 구조와 역사라는 거시영역에 대한 탐구와 그 속에서 발생한 이론과 실천의 긴장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기존 논의의 다음과 같은 한계에 대한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① 기존 논의들이 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여 단순히 재단하고 비판해온 측면이 있다. 급진노동운동에 참여하였던 활동가들의 단편적인 정리나 회고 또한 그들 자신이 과거 특정한 운동 서클이나 정파에 몸담았던 주체였다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 그 가운데 일부는 현재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모순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ex-우리는 200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 있을까?)
②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그 인정여부와 무관하게 당시 정세 속에서 이 운동을 고립시키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이행 국면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해석 및 판단과 연관되어 있어 심각성이 더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계,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기존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라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급진노동운동과 이에 규정되어 온 학문의 흐름이 ‘아카데미즘’을 경시해 왔다는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이들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결과한 것이다.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대부분은 87년 6월항쟁 이후 진척된 ‘정치적 자유화’조치들의 내용과 이완된 정치적 공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급진노동운동을 ‘과잉평가한 후 과잉비판’하는 공통된 양상을 보였다. ‘최대강령주의’를 추구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이 대폭발하는 상황에서 이들에 삼투되었고 이러한 관계구조의 지속이 다시 그 대중들을 이탈시켜 노동운동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 글은 급진노동운동이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볼 때 노동운동 내부에서 ‘대중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행사한 적이 없었음을 밝힌다. 앞선 비판적 논의들이 사회정치세력의 재편성에 끼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업은 80년대 이후 급진노동운동과 이론의 역사, 위상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본론)
이를 위해 기존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기존 논의를 범주화시키면 ①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②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에 대한 연구는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급진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으로 나눠진다. ‘한계’와 ‘오류’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해 평가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 비판적 논의도 당시 노조운동이 영향 받거나 수용한 이념과 이론, 운동에서 드러난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이 가운데 최장집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국가의 성격, 국가의 노동정책에 주목하는 연구를 한다. 최장집은 ‘조합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축적 과정에서 행하는 국가의 역할 및 계급적 성격, 권위주의 국가와 사회계급 사이의 전체적 관계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수입대체공업화의 위기 가운데 파시즘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이 배제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조합주의 등장경로는 한국에 적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노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각 산업화단계를 추동하는 ‘동맹’의 참여자 혹은 배제자로서 하나의 주체로 설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가조합주의는 식민지권력의 성립을 계기로 이미 조성된,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 증폭된 과대성장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은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을 과잉 평가하는 민중주의적 경향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최장집은 당시 노조운동을 지원했던 교회의 노동운동이념 및 그 요구 내용이 국가의 공식정책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보다 기본적으로 그것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급진노동운동의 출현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기독교노동운동과 국가가 공유하는 이러한 동질성,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한계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근거한다.
하지만 최장집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는데 국가조합주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조합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해야 한다. 슈미터는 조합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조합주의는 국가에 의해(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인정되거나 허가된, 그 리더의 선출 그리고 요구와 지지의 접합에 대한 어떤 통제를 준수하는 대신, 그들 각각의 범주 내에서 상당한 독점적 대표성을 부여받는, 그 구성단위들이 한정된 수의 독점적, 의무적,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고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범주들 속에 조직화된 이익 대표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의 경우 한국노총이 군부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접어두더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공식노조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기업별 노조로 원자화된 노동자들은 상급노조를 통해 기존 국가체제에 포섭되어 사회경제적으로 동원되기보다 국가의 억압기제와 이데올로기기제 등을 통해 직접 국가에 포섭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노조 지도자에게 특별히 배타적 반대급부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자대중에게도 경제적 동원 이외에 어떠한 인센티브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비판은 최장집도 과대성장국가론을 국가조합주의 적용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적절해 보인다. 조합주의 또한 계급간의 모순,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 및 대결을 반영하는 제도인 것이고, 과대성장국가론은 해방 직후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패배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조합주의라는 기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확인시켜준다. 최장집은 자신이 수용한 이론틀을 역사와 접합할 때 드러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아 자신의 의미 있는 논의마저 퇴색시키고 있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기독교노동단체들의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다룬 김녕의 논의로부터 일정하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김녕은 국가의 억압행위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정에서 상이 성직자들과 하위 성직자들, 진보적 사제들과 보수적 사제들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갈등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해소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의 실천은 가톨릭교회 내부의 주류가 아니며 오히려 주요한 흐름은 보수적인 세력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진보적 사제들이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자’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하는 ‘성서의 실천’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조직 자체의 보존을 중요시하는 교회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덕목에 준하여 대응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까밀로 또레스(콜롬비아의 신부-게릴라)를 배출해 냈고, 대단히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낳은 제도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산아제한에 반대하고, 여성사제의 임명을 막고 있으며 형식적 위계구조의 변경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녕은 ‘다양성 속의 일치’에서 ‘일치’가 교회의 존립과 관계되는 것이고 지향점이 ‘교회’ 그 자체라는 점을 간과한다. 따라서 교회 내부적으로 사회적 실천세력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기존 교회의 위계체제를 본질적으로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비세속적 도덕성의 상징’인 교회의 이름으로 그 사회적 실천이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적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교회 내의 문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과하며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로부터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분리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조합주의가 주목하는 노동자계급, 교회의 위상과 기능을 둘러싼 논의들이 급진노동운동의 前史에 해당하는 연구로 의미를 지니고, 80년 518을 경험하며 80년대 중반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핵심고리이다.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출발하여 87년 투쟁 이후 등장한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역으로 그것에 조건당하면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을 평가하는 두 가지 입장의 연장선에 있는데, 하나는 ①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하는 것으로 70년대 운동에 대한 ‘민중주의적 평가’에서 이어진다. 이 논의에 의하면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무차별의 대중참여’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 결과 ‘선도적인 정치적 노동운동’은 대중성의 결여일 뿐이고, 이론논쟁은 엘리트들의 ‘자족적이고 무의미한 이론논쟁’으로 평가될 뿐이다. 87년 투쟁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변혁적인 투쟁으로 과잉 규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0년대 급진ㄴ동운동의 출현은 운동의 후퇴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징후는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태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며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평가는 ②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입각한 평가는 한국노동운동이 87년 이전에는 자기형성과정조차 밟지 못했으나, 87년을 고비로 노동자계급운동으로 문턱을 넘어섰다고 파악한다. 이 논의들은 주체형성의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87년 이전에도 급진노동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흐름이 존재했다는 점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독자성을 지닌 노동운동이 대중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점, 특히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및 정치운동이 여전히 의미 있는 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노동운동과 비교할 때 80년대 노동운동은 오히려 연구의 관심대상에서 상당히 소외되었다. 그 이유는
①‘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로 이 주제가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운동의 정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정치를 제도화된 영역으로만 협소하게 규정하는 발상에 의한 것이다.
②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내외의 계기들이 맞물리며 형성된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된 측면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논의는 다음의 한계를 공유한다.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불평등성, 노동기본권의 부재 등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 상황적인 요소로만 취급한다.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한다. 이 논의는 신고전파정치경제학에서처럼 행위자는 합리적 선호에 근거해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해 추동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매는 이미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가정하면서도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여타 전략/전술을 선험적으로 배제하거나 비합리적 행위로 낙인찍는다.
이런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최장집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의 실패 요인에 관한 논의에서 노동운동 쇠퇴의 구조적인 조건보다 확대된 정치공간에서 노동운동이 ‘열려져 있는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행위론적 차원을 주목한다. 최장집은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됐고, 이로 인해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좌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송호근은 노동자대투쟁이 대학생과 재야집단의 지원을 받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던 비공식적, 진보적 노동자집단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계기였고, 이들이 전노협을 출범시켰다고 단정 짓고 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노동운동’은 그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두 논의는 정치적 노동운동(‘외부로부터의 지도’)과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통해 운동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출발은 적절하다.(‘자생성 테제’의 적합성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최대강령주의자들’이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가 그것의 쇠퇴를 가져온 매개요인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빠져있다. 무엇보다 쟁점이 되는 것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일단 분리한 후,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전자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후자의 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했다고 보는 이들 주장의 현실적합성 여부이다.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들은 ‘전략적 선택론’의 한계를 넘어 나가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이런 논의에서도 87년 이전 급진노동운동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주로 노동자대중운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이들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고립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변화 등 노동운동 내부의 관계/노동운동을 둘러싼 미시 거시적인 조건의 변화에 주목한다.
김동춘은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 그는 경제와 정치를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구조와 행위의 통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최장집, 송호근 등과 차별성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운동 일반은 정치적 변화기를 포함한 그 어떤 시기에도 그의 논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미의 ‘고립’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고립’의 적실성은 87년 노동자대투쟁~90년 전노협 시기 까지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동춘의 논의는 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최대강령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아래 있었다는 최장집 등의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역량은 노동조합원 수나 쟁의의 빈도, 투쟁의 강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판별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운동을 일관되게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계와 이념, 대중과의 결합정도, 연대성 제고 등이 더 효과적인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 90년을 전후로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되어진 노동조합운동은 결코 과거보다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노중기는 김동춘과 대립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들의 한계와 국가의 변화된 노동정책의 파시스트적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소위 ‘민주화이행’ 시기에 기존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지배구조가 온전히 유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전략적 선택지의 다원성’ 그 자체를 문제시 한다.
임영일은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87년 이후 급진노동운동을 포함한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관계,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계 변화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를 살핀다. 그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협상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출신 활동가조직이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이들은 87년 이후 대중조직과의 결합에 실패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임영일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성된 노동운동의 활동공간에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 운동이 전노대로 묶임으로써 경제주의적/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이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대시켜 그것이 위기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 이와 같은 결과는 애초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활동가운동과 87년 이후 대중적 민주노조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최대강량주의에 집착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운동에 대한 헤게모니로부터 노동운동위기를 도출해 내는 경험적이고 인상비평적인 논의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구조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들에 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 - ex/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노동운동을 자본의 하위파트너로 만들었는가?) 하지만 임영일은 ‘전위정당’ 건설을 지향하기조차 한 활동가운동의 위상에 대한 평가를 회피함으로써 급진노동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공과 또한 빠트린다.
김영수는 이를 포착하는데, 그는 노동자정치운동과 조합운동 사이의 관계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임영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넘고자 한다. 그는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기’를 포함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의 분리 및 연대라는 차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는 전노운협의 분화, 민중당 좌절 이후 민주노총 건설을 둘러싼 와중에 있던 노동자정치운동의 상황을 ‘대중적인 노조운동이 주도하며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규정한다. 그 이전시기(87년 이후~민주노총 건설)에 대해서는 양자가 조직적으로 상호주도하면서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보고 있다. 이것은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노동운동위기론’을 매개로 급진노동운동의 위상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관계 등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들이 ‘지체된 민주주의’의 책임을 상당 정도 급진노동운동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의 작업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 그리고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고 그 모순들이 해소, 극복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급진운동을 재구성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① 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
㉯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
㉰ 다른 논의들
㉠ 국가조합주의(최장집)
㉡ 기독교 노동운동의 성격(김녕)
② 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 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
㉮ 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
㉯ 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
㉰ 80년대 노동운동 연구가 미비한 이유
㉠ ‘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 - 이 주제가 정치학이 아닌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
㉱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
㉠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
㉢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
ⓐ 최장집 :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
ⓑ 송호근 : ‘새로운 노동운동’은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도 비슷한 한계 공유
ⓐ 김동춘 :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
㉤ 앞선 논의에 대한 비판
ⓐ 노중기 :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 임영일 : 노동운동위기가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활동가운동과 대중적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
ⓒ 김영수 :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화는 70년대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맞물린 노동자계급의 양적 확대, 그들 의식의 점진적 제고 등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조건을 촉진시켰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은 80년대 중반 이후 모색해 왔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적 장애에 직면해 있었다.
① 신군부와 타협한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민중운동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이들의 강한 흡인력에 노출
②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세계사적 변화는 대안체제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민중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운동 내부의 분화를 자극
기존 ㉠급진노동운동그룹들, ㉡자생성에 지배되고 있던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내외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은 이념,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분기되었을 뿐 노동운동의 통일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데 실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90년 전노협 건설을 전후로 조성된 공안정국 아래서 국가와 자본의 전면적 공세로 인해 상대적인 위축을 경험했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운동 위기논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위기논쟁은 80년 518이후 전개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검토했고, 객관적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중심에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위기’의 원인분석을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대부분 ‘경험주의’, ‘실증주의’에 강하게 자극받으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한 성찰적 반성은 개별주체 혹은 ‘집단’으로 호명되는 사회세력들이 특정국면에서 전개한 미시적인 사회정치적 행위에 대한 관심을 넘어 국가권력/자본과의 긴장/대결을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노동운동의 구조와 역사라는 거시영역에 대한 탐구와 그 속에서 발생한 이론과 실천의 긴장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기존 논의의 다음과 같은 한계에 대한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① 기존 논의들이 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여 단순히 재단하고 비판해온 측면이 있다. 급진노동운동에 참여하였던 활동가들의 단편적인 정리나 회고 또한 그들 자신이 과거 특정한 운동 서클이나 정파에 몸담았던 주체였다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 그 가운데 일부는 현재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모순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ex-우리는 200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 있을까?)
②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그 인정여부와 무관하게 당시 정세 속에서 이 운동을 고립시키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이행 국면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해석 및 판단과 연관되어 있어 심각성이 더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계,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기존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라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급진노동운동과 이에 규정되어 온 학문의 흐름이 ‘아카데미즘’을 경시해 왔다는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이들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결과한 것이다.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대부분은 87년 6월항쟁 이후 진척된 ‘정치적 자유화’조치들의 내용과 이완된 정치적 공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급진노동운동을 ‘과잉평가한 후 과잉비판’하는 공통된 양상을 보였다. ‘최대강령주의’를 추구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이 대폭발하는 상황에서 이들에 삼투되었고 이러한 관계구조의 지속이 다시 그 대중들을 이탈시켜 노동운동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 글은 급진노동운동이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볼 때 노동운동 내부에서 ‘대중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행사한 적이 없었음을 밝힌다. 앞선 비판적 논의들이 사회정치세력의 재편성에 끼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업은 80년대 이후 급진노동운동과 이론의 역사, 위상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본론)
이를 위해 기존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기존 논의를 범주화시키면 ①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②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에 대한 연구는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급진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으로 나눠진다. ‘한계’와 ‘오류’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해 평가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 비판적 논의도 당시 노조운동이 영향 받거나 수용한 이념과 이론, 운동에서 드러난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이 가운데 최장집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국가의 성격, 국가의 노동정책에 주목하는 연구를 한다. 최장집은 ‘조합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축적 과정에서 행하는 국가의 역할 및 계급적 성격, 권위주의 국가와 사회계급 사이의 전체적 관계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수입대체공업화의 위기 가운데 파시즘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이 배제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조합주의 등장경로는 한국에 적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노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각 산업화단계를 추동하는 ‘동맹’의 참여자 혹은 배제자로서 하나의 주체로 설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가조합주의는 식민지권력의 성립을 계기로 이미 조성된,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 증폭된 과대성장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은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을 과잉 평가하는 민중주의적 경향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최장집은 당시 노조운동을 지원했던 교회의 노동운동이념 및 그 요구 내용이 국가의 공식정책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보다 기본적으로 그것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급진노동운동의 출현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기독교노동운동과 국가가 공유하는 이러한 동질성,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한계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근거한다.
하지만 최장집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는데 국가조합주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조합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해야 한다. 슈미터는 조합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조합주의는 국가에 의해(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인정되거나 허가된, 그 리더의 선출 그리고 요구와 지지의 접합에 대한 어떤 통제를 준수하는 대신, 그들 각각의 범주 내에서 상당한 독점적 대표성을 부여받는, 그 구성단위들이 한정된 수의 독점적, 의무적,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고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범주들 속에 조직화된 이익 대표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의 경우 한국노총이 군부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접어두더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공식노조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기업별 노조로 원자화된 노동자들은 상급노조를 통해 기존 국가체제에 포섭되어 사회경제적으로 동원되기보다 국가의 억압기제와 이데올로기기제 등을 통해 직접 국가에 포섭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노조 지도자에게 특별히 배타적 반대급부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자대중에게도 경제적 동원 이외에 어떠한 인센티브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비판은 최장집도 과대성장국가론을 국가조합주의 적용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적절해 보인다. 조합주의 또한 계급간의 모순,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 및 대결을 반영하는 제도인 것이고, 과대성장국가론은 해방 직후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패배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조합주의라는 기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확인시켜준다. 최장집은 자신이 수용한 이론틀을 역사와 접합할 때 드러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아 자신의 의미 있는 논의마저 퇴색시키고 있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기독교노동단체들의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다룬 김녕의 논의로부터 일정하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김녕은 국가의 억압행위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정에서 상이 성직자들과 하위 성직자들, 진보적 사제들과 보수적 사제들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갈등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해소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의 실천은 가톨릭교회 내부의 주류가 아니며 오히려 주요한 흐름은 보수적인 세력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진보적 사제들이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자’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하는 ‘성서의 실천’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조직 자체의 보존을 중요시하는 교회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덕목에 준하여 대응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까밀로 또레스(콜롬비아의 신부-게릴라)를 배출해 냈고, 대단히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낳은 제도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산아제한에 반대하고, 여성사제의 임명을 막고 있으며 형식적 위계구조의 변경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녕은 ‘다양성 속의 일치’에서 ‘일치’가 교회의 존립과 관계되는 것이고 지향점이 ‘교회’ 그 자체라는 점을 간과한다. 따라서 교회 내부적으로 사회적 실천세력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기존 교회의 위계체제를 본질적으로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비세속적 도덕성의 상징’인 교회의 이름으로 그 사회적 실천이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적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교회 내의 문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과하며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로부터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분리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조합주의가 주목하는 노동자계급, 교회의 위상과 기능을 둘러싼 논의들이 급진노동운동의 前史에 해당하는 연구로 의미를 지니고, 80년 518을 경험하며 80년대 중반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핵심고리이다.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출발하여 87년 투쟁 이후 등장한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역으로 그것에 조건당하면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을 평가하는 두 가지 입장의 연장선에 있는데, 하나는 ①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하는 것으로 70년대 운동에 대한 ‘민중주의적 평가’에서 이어진다. 이 논의에 의하면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무차별의 대중참여’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 결과 ‘선도적인 정치적 노동운동’은 대중성의 결여일 뿐이고, 이론논쟁은 엘리트들의 ‘자족적이고 무의미한 이론논쟁’으로 평가될 뿐이다. 87년 투쟁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변혁적인 투쟁으로 과잉 규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0년대 급진ㄴ동운동의 출현은 운동의 후퇴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징후는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태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며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평가는 ②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입각한 평가는 한국노동운동이 87년 이전에는 자기형성과정조차 밟지 못했으나, 87년을 고비로 노동자계급운동으로 문턱을 넘어섰다고 파악한다. 이 논의들은 주체형성의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87년 이전에도 급진노동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흐름이 존재했다는 점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독자성을 지닌 노동운동이 대중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점, 특히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및 정치운동이 여전히 의미 있는 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노동운동과 비교할 때 80년대 노동운동은 오히려 연구의 관심대상에서 상당히 소외되었다. 그 이유는
①‘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로 이 주제가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운동의 정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정치를 제도화된 영역으로만 협소하게 규정하는 발상에 의한 것이다.
②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내외의 계기들이 맞물리며 형성된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된 측면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논의는 다음의 한계를 공유한다.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불평등성, 노동기본권의 부재 등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 상황적인 요소로만 취급한다.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한다. 이 논의는 신고전파정치경제학에서처럼 행위자는 합리적 선호에 근거해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해 추동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매는 이미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가정하면서도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여타 전략/전술을 선험적으로 배제하거나 비합리적 행위로 낙인찍는다.
이런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최장집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의 실패 요인에 관한 논의에서 노동운동 쇠퇴의 구조적인 조건보다 확대된 정치공간에서 노동운동이 ‘열려져 있는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행위론적 차원을 주목한다. 최장집은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됐고, 이로 인해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좌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송호근은 노동자대투쟁이 대학생과 재야집단의 지원을 받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던 비공식적, 진보적 노동자집단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계기였고, 이들이 전노협을 출범시켰다고 단정 짓고 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노동운동’은 그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두 논의는 정치적 노동운동(‘외부로부터의 지도’)과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통해 운동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출발은 적절하다.(‘자생성 테제’의 적합성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최대강령주의자들’이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가 그것의 쇠퇴를 가져온 매개요인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빠져있다. 무엇보다 쟁점이 되는 것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일단 분리한 후,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전자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후자의 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했다고 보는 이들 주장의 현실적합성 여부이다.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들은 ‘전략적 선택론’의 한계를 넘어 나가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이런 논의에서도 87년 이전 급진노동운동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주로 노동자대중운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이들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고립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변화 등 노동운동 내부의 관계/노동운동을 둘러싼 미시 거시적인 조건의 변화에 주목한다.
김동춘은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 그는 경제와 정치를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구조와 행위의 통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최장집, 송호근 등과 차별성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운동 일반은 정치적 변화기를 포함한 그 어떤 시기에도 그의 논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미의 ‘고립’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고립’의 적실성은 87년 노동자대투쟁~90년 전노협 시기 까지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동춘의 논의는 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최대강령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아래 있었다는 최장집 등의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역량은 노동조합원 수나 쟁의의 빈도, 투쟁의 강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판별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운동을 일관되게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계와 이념, 대중과의 결합정도, 연대성 제고 등이 더 효과적인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 90년을 전후로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되어진 노동조합운동은 결코 과거보다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노중기는 김동춘과 대립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들의 한계와 국가의 변화된 노동정책의 파시스트적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소위 ‘민주화이행’ 시기에 기존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지배구조가 온전히 유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전략적 선택지의 다원성’ 그 자체를 문제시 한다.
임영일은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87년 이후 급진노동운동을 포함한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관계,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계 변화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를 살핀다. 그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협상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출신 활동가조직이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이들은 87년 이후 대중조직과의 결합에 실패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임영일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성된 노동운동의 활동공간에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 운동이 전노대로 묶임으로써 경제주의적/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이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대시켜 그것이 위기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 이와 같은 결과는 애초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활동가운동과 87년 이후 대중적 민주노조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최대강량주의에 집착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운동에 대한 헤게모니로부터 노동운동위기를 도출해 내는 경험적이고 인상비평적인 논의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구조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들에 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 - ex/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노동운동을 자본의 하위파트너로 만들었는가?) 하지만 임영일은 ‘전위정당’ 건설을 지향하기조차 한 활동가운동의 위상에 대한 평가를 회피함으로써 급진노동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공과 또한 빠트린다.
김영수는 이를 포착하는데, 그는 노동자정치운동과 조합운동 사이의 관계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임영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넘고자 한다. 그는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기’를 포함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의 분리 및 연대라는 차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는 전노운협의 분화, 민중당 좌절 이후 민주노총 건설을 둘러싼 와중에 있던 노동자정치운동의 상황을 ‘대중적인 노조운동이 주도하며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규정한다. 그 이전시기(87년 이후~민주노총 건설)에 대해서는 양자가 조직적으로 상호주도하면서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보고 있다. 이것은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노동운동위기론’을 매개로 급진노동운동의 위상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관계 등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들이 ‘지체된 민주주의’의 책임을 상당 정도 급진노동운동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의 작업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 그리고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고 그 모순들이 해소, 극복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급진운동을 재구성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① 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
㉯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
㉰ 다른 논의들
㉠ 국가조합주의(최장집)
㉡ 기독교 노동운동의 성격(김녕)
② 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 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
㉮ 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
㉯ 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
㉰ 80년대 노동운동 연구가 미비한 이유
㉠ ‘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 - 이 주제가 정치학이 아닌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
㉱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
㉠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
㉢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
ⓐ 최장집 :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
ⓑ 송호근 : ‘새로운 노동운동’은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도 비슷한 한계 공유
ⓐ 김동춘 :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
㉤ 앞선 논의에 대한 비판
ⓐ 노중기 :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 임영일 : 노동운동위기가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활동가운동과 대중적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
ⓒ 김영수 :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화는 70년대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맞물린 노동자계급의 양적 확대, 그들 의식의 점진적 제고 등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조건을 촉진시켰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은 80년대 중반 이후 모색해 왔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적 장애에 직면해 있었다.
① 신군부와 타협한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민중운동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이들의 강한 흡인력에 노출
②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세계사적 변화는 대안체제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민중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운동 내부의 분화를 자극
기존 ㉠급진노동운동그룹들, ㉡자생성에 지배되고 있던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내외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은 이념,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분기되었을 뿐 노동운동의 통일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데 실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90년 전노협 건설을 전후로 조성된 공안정국 아래서 국가와 자본의 전면적 공세로 인해 상대적인 위축을 경험했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운동 위기논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위기논쟁은 80년 518이후 전개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검토했고, 객관적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중심에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위기’의 원인분석을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대부분 ‘경험주의’, ‘실증주의’에 강하게 자극받으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한 성찰적 반성은 개별주체 혹은 ‘집단’으로 호명되는 사회세력들이 특정국면에서 전개한 미시적인 사회정치적 행위에 대한 관심을 넘어 국가권력/자본과의 긴장/대결을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노동운동의 구조와 역사라는 거시영역에 대한 탐구와 그 속에서 발생한 이론과 실천의 긴장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기존 논의의 다음과 같은 한계에 대한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① 기존 논의들이 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여 단순히 재단하고 비판해온 측면이 있다. 급진노동운동에 참여하였던 활동가들의 단편적인 정리나 회고 또한 그들 자신이 과거 특정한 운동 서클이나 정파에 몸담았던 주체였다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 그 가운데 일부는 현재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모순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ex-우리는 200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 있을까?)
②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그 인정여부와 무관하게 당시 정세 속에서 이 운동을 고립시키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이행 국면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해석 및 판단과 연관되어 있어 심각성이 더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계,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기존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라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급진노동운동과 이에 규정되어 온 학문의 흐름이 ‘아카데미즘’을 경시해 왔다는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이들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결과한 것이다.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대부분은 87년 6월항쟁 이후 진척된 ‘정치적 자유화’조치들의 내용과 이완된 정치적 공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급진노동운동을 ‘과잉평가한 후 과잉비판’하는 공통된 양상을 보였다. ‘최대강령주의’를 추구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이 대폭발하는 상황에서 이들에 삼투되었고 이러한 관계구조의 지속이 다시 그 대중들을 이탈시켜 노동운동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 글은 급진노동운동이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볼 때 노동운동 내부에서 ‘대중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행사한 적이 없었음을 밝힌다. 앞선 비판적 논의들이 사회정치세력의 재편성에 끼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업은 80년대 이후 급진노동운동과 이론의 역사, 위상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본론)
이를 위해 기존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기존 논의를 범주화시키면 ①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②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에 대한 연구는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급진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으로 나눠진다. ‘한계’와 ‘오류’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해 평가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 비판적 논의도 당시 노조운동이 영향 받거나 수용한 이념과 이론, 운동에서 드러난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이 가운데 최장집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국가의 성격, 국가의 노동정책에 주목하는 연구를 한다. 최장집은 ‘조합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축적 과정에서 행하는 국가의 역할 및 계급적 성격, 권위주의 국가와 사회계급 사이의 전체적 관계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수입대체공업화의 위기 가운데 파시즘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이 배제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조합주의 등장경로는 한국에 적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노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각 산업화단계를 추동하는 ‘동맹’의 참여자 혹은 배제자로서 하나의 주체로 설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가조합주의는 식민지권력의 성립을 계기로 이미 조성된,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 증폭된 과대성장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은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을 과잉 평가하는 민중주의적 경향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최장집은 당시 노조운동을 지원했던 교회의 노동운동이념 및 그 요구 내용이 국가의 공식정책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보다 기본적으로 그것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급진노동운동의 출현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기독교노동운동과 국가가 공유하는 이러한 동질성,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한계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근거한다.
하지만 최장집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는데 국가조합주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조합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해야 한다. 슈미터는 조합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조합주의는 국가에 의해(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인정되거나 허가된, 그 리더의 선출 그리고 요구와 지지의 접합에 대한 어떤 통제를 준수하는 대신, 그들 각각의 범주 내에서 상당한 독점적 대표성을 부여받는, 그 구성단위들이 한정된 수의 독점적, 의무적,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고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범주들 속에 조직화된 이익 대표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의 경우 한국노총이 군부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접어두더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공식노조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기업별 노조로 원자화된 노동자들은 상급노조를 통해 기존 국가체제에 포섭되어 사회경제적으로 동원되기보다 국가의 억압기제와 이데올로기기제 등을 통해 직접 국가에 포섭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노조 지도자에게 특별히 배타적 반대급부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자대중에게도 경제적 동원 이외에 어떠한 인센티브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비판은 최장집도 과대성장국가론을 국가조합주의 적용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적절해 보인다. 조합주의 또한 계급간의 모순,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 및 대결을 반영하는 제도인 것이고, 과대성장국가론은 해방 직후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패배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조합주의라는 기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확인시켜준다. 최장집은 자신이 수용한 이론틀을 역사와 접합할 때 드러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아 자신의 의미 있는 논의마저 퇴색시키고 있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기독교노동단체들의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다룬 김녕의 논의로부터 일정하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김녕은 국가의 억압행위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정에서 상이 성직자들과 하위 성직자들, 진보적 사제들과 보수적 사제들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갈등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해소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의 실천은 가톨릭교회 내부의 주류가 아니며 오히려 주요한 흐름은 보수적인 세력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진보적 사제들이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자’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하는 ‘성서의 실천’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조직 자체의 보존을 중요시하는 교회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덕목에 준하여 대응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까밀로 또레스(콜롬비아의 신부-게릴라)를 배출해 냈고, 대단히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낳은 제도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산아제한에 반대하고, 여성사제의 임명을 막고 있으며 형식적 위계구조의 변경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녕은 ‘다양성 속의 일치’에서 ‘일치’가 교회의 존립과 관계되는 것이고 지향점이 ‘교회’ 그 자체라는 점을 간과한다. 따라서 교회 내부적으로 사회적 실천세력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기존 교회의 위계체제를 본질적으로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비세속적 도덕성의 상징’인 교회의 이름으로 그 사회적 실천이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적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교회 내의 문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과하며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로부터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분리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조합주의가 주목하는 노동자계급, 교회의 위상과 기능을 둘러싼 논의들이 급진노동운동의 前史에 해당하는 연구로 의미를 지니고, 80년 518을 경험하며 80년대 중반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핵심고리이다.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출발하여 87년 투쟁 이후 등장한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역으로 그것에 조건당하면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을 평가하는 두 가지 입장의 연장선에 있는데, 하나는 ①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하는 것으로 70년대 운동에 대한 ‘민중주의적 평가’에서 이어진다. 이 논의에 의하면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무차별의 대중참여’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 결과 ‘선도적인 정치적 노동운동’은 대중성의 결여일 뿐이고, 이론논쟁은 엘리트들의 ‘자족적이고 무의미한 이론논쟁’으로 평가될 뿐이다. 87년 투쟁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변혁적인 투쟁으로 과잉 규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0년대 급진ㄴ동운동의 출현은 운동의 후퇴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징후는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태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며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평가는 ②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입각한 평가는 한국노동운동이 87년 이전에는 자기형성과정조차 밟지 못했으나, 87년을 고비로 노동자계급운동으로 문턱을 넘어섰다고 파악한다. 이 논의들은 주체형성의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87년 이전에도 급진노동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흐름이 존재했다는 점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독자성을 지닌 노동운동이 대중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점, 특히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및 정치운동이 여전히 의미 있는 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노동운동과 비교할 때 80년대 노동운동은 오히려 연구의 관심대상에서 상당히 소외되었다. 그 이유는
①‘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로 이 주제가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운동의 정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정치를 제도화된 영역으로만 협소하게 규정하는 발상에 의한 것이다.
②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내외의 계기들이 맞물리며 형성된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된 측면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논의는 다음의 한계를 공유한다.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불평등성, 노동기본권의 부재 등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 상황적인 요소로만 취급한다.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한다. 이 논의는 신고전파정치경제학에서처럼 행위자는 합리적 선호에 근거해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해 추동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매는 이미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가정하면서도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여타 전략/전술을 선험적으로 배제하거나 비합리적 행위로 낙인찍는다.
이런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최장집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의 실패 요인에 관한 논의에서 노동운동 쇠퇴의 구조적인 조건보다 확대된 정치공간에서 노동운동이 ‘열려져 있는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행위론적 차원을 주목한다. 최장집은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됐고, 이로 인해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좌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송호근은 노동자대투쟁이 대학생과 재야집단의 지원을 받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던 비공식적, 진보적 노동자집단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계기였고, 이들이 전노협을 출범시켰다고 단정 짓고 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노동운동’은 그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두 논의는 정치적 노동운동(‘외부로부터의 지도’)과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통해 운동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출발은 적절하다.(‘자생성 테제’의 적합성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최대강령주의자들’이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가 그것의 쇠퇴를 가져온 매개요인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빠져있다. 무엇보다 쟁점이 되는 것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일단 분리한 후,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전자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후자의 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했다고 보는 이들 주장의 현실적합성 여부이다.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들은 ‘전략적 선택론’의 한계를 넘어 나가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이런 논의에서도 87년 이전 급진노동운동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주로 노동자대중운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이들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고립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변화 등 노동운동 내부의 관계/노동운동을 둘러싼 미시 거시적인 조건의 변화에 주목한다.
김동춘은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 그는 경제와 정치를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구조와 행위의 통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최장집, 송호근 등과 차별성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운동 일반은 정치적 변화기를 포함한 그 어떤 시기에도 그의 논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미의 ‘고립’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고립’의 적실성은 87년 노동자대투쟁~90년 전노협 시기 까지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동춘의 논의는 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최대강령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아래 있었다는 최장집 등의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역량은 노동조합원 수나 쟁의의 빈도, 투쟁의 강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판별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운동을 일관되게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계와 이념, 대중과의 결합정도, 연대성 제고 등이 더 효과적인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 90년을 전후로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되어진 노동조합운동은 결코 과거보다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노중기는 김동춘과 대립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들의 한계와 국가의 변화된 노동정책의 파시스트적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소위 ‘민주화이행’ 시기에 기존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지배구조가 온전히 유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전략적 선택지의 다원성’ 그 자체를 문제시 한다.
임영일은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87년 이후 급진노동운동을 포함한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관계,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계 변화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를 살핀다. 그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협상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출신 활동가조직이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이들은 87년 이후 대중조직과의 결합에 실패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임영일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성된 노동운동의 활동공간에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 운동이 전노대로 묶임으로써 경제주의적/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이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대시켜 그것이 위기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 이와 같은 결과는 애초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활동가운동과 87년 이후 대중적 민주노조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최대강량주의에 집착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운동에 대한 헤게모니로부터 노동운동위기를 도출해 내는 경험적이고 인상비평적인 논의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구조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들에 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 - ex/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노동운동을 자본의 하위파트너로 만들었는가?) 하지만 임영일은 ‘전위정당’ 건설을 지향하기조차 한 활동가운동의 위상에 대한 평가를 회피함으로써 급진노동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공과 또한 빠트린다.
김영수는 이를 포착하는데, 그는 노동자정치운동과 조합운동 사이의 관계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임영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넘고자 한다. 그는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기’를 포함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의 분리 및 연대라는 차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는 전노운협의 분화, 민중당 좌절 이후 민주노총 건설을 둘러싼 와중에 있던 노동자정치운동의 상황을 ‘대중적인 노조운동이 주도하며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규정한다. 그 이전시기(87년 이후~민주노총 건설)에 대해서는 양자가 조직적으로 상호주도하면서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보고 있다. 이것은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노동운동위기론’을 매개로 급진노동운동의 위상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관계 등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들이 ‘지체된 민주주의’의 책임을 상당 정도 급진노동운동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의 작업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 그리고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고 그 모순들이 해소, 극복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급진운동을 재구성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세미나 발제문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이광일
이 책 참 재밌고, 유익하다. 요즘 세미나하면서 읽고 있는데, 쭉쭉 빨려간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구해근)이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을 추적하고 있다면, 이광일은 '급진노동운동'(활동가운동, 사회주의운동 등등)을 추적한다. 이광일은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운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적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87-90년에 폭발했던 혁명운동이 그 이후 쇠락한 게 아니라, 애초 폭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의식성(급진노동운동)과 자생성(대중운동)은 결코 일치하지 않으며,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이 자생성을 의식성의 아래에 복속시키는 것으로 등치되지는 않는다. 자생성만을 강조하는 논자들은 (의식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생성을 의식성과 무매개적으로 연결시켜, 실천적으로는 다수를 운동에서 배제시켜 버린다. 맞게 읽었다면, 이광일의 질문 중 하나는 의식성이 자생성과 어떻게 융합될(해후이기도 할까?) 것인가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자운동의 융합. (참고로, 최원씨의 4월테제와 맑스주의의 위기
http://marxpino.tistory.com/33)
구해근과 이광일이 만나는 것은 90년대 대중운동의 소실이 활동가운동의 전략 실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80년대 운동 안에 이미 구조화되어 있는 약점 때문이라는 분석에서다. 페미니즘에 대한 맹목, 혹은 운동을 영역별로 나누어 사고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기업별로 조직된 노동조합. 등등
공산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는 과정이고, 인간답다는 것은 기꺼이 운명의 수레바퀴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밑줄과 굵은 글씨는 일관성 없는데, 처음엔 대충 긋다가, 나중에는 원글을 그대로 옮긴 건 따로 표시했는데, 아무튼 뒤죽박죽.
1장 왜 80년대 이후 급진노동운동에 주목해야 하는가
① 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
㉯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
㉰ 다른 논의들
㉠ 국가조합주의(최장집)
㉡ 기독교 노동운동의 성격(김녕)
② 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 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
㉮ 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
㉯ 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
㉰ 80년대 노동운동 연구가 미비한 이유
㉠ ‘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 - 이 주제가 정치학이 아닌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
㉱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
㉠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
㉢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
ⓐ 최장집 :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
ⓑ 송호근 : ‘새로운 노동운동’은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도 비슷한 한계 공유
ⓐ 김동춘 :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
㉤ 앞선 논의에 대한 비판
ⓐ 노중기 :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 임영일 : 노동운동위기가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활동가운동과 대중적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
ⓒ 김영수 :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서론)
한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화는 70년대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맞물린 노동자계급의 양적 확대, 그들 의식의 점진적 제고 등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조건을 촉진시켰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은 80년대 중반 이후 모색해 왔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적 장애에 직면해 있었다.
① 신군부와 타협한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민중운동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이들의 강한 흡인력에 노출
②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세계사적 변화는 대안체제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민중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운동 내부의 분화를 자극
기존 ㉠급진노동운동그룹들, ㉡자생성에 지배되고 있던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내외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은 이념,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분기되었을 뿐 노동운동의 통일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데 실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90년 전노협 건설을 전후로 조성된 공안정국 아래서 국가와 자본의 전면적 공세로 인해 상대적인 위축을 경험했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운동 위기논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위기논쟁은 80년 518이후 전개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검토했고, 객관적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중심에 급진노동운동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위기’의 원인분석을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대부분 ‘경험주의’, ‘실증주의’에 강하게 자극받으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한 성찰적 반성은 개별주체 혹은 ‘집단’으로 호명되는 사회세력들이 특정국면에서 전개한 미시적인 사회정치적 행위에 대한 관심을 넘어 국가권력/자본과의 긴장/대결을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노동운동의 구조와 역사라는 거시영역에 대한 탐구와 그 속에서 발생한 이론과 실천의 긴장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기존 논의의 다음과 같은 한계에 대한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① 기존 논의들이 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여 단순히 재단하고 비판해온 측면이 있다. 급진노동운동에 참여하였던 활동가들의 단편적인 정리나 회고 또한 그들 자신이 과거 특정한 운동 서클이나 정파에 몸담았던 주체였다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 그 가운데 일부는 현재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모순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ex-우리는 200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 있을까?)
②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그 인정여부와 무관하게 당시 정세 속에서 이 운동을 고립시키기 위한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이행 국면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해석 및 판단과 연관되어 있어 심각성이 더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계,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기존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라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급진노동운동과 이에 규정되어 온 학문의 흐름이 ‘아카데미즘’을 경시해 왔다는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이들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결과한 것이다.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대부분은 87년 6월항쟁 이후 진척된 ‘정치적 자유화’조치들의 내용과 이완된 정치적 공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급진노동운동을 ‘과잉평가한 후 과잉비판’하는 공통된 양상을 보였다. ‘최대강령주의’를 추구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이 대폭발하는 상황에서 이들에 삼투되었고 이러한 관계구조의 지속이 다시 그 대중들을 이탈시켜 노동운동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 글은 급진노동운동이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볼 때 노동운동 내부에서 ‘대중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행사한 적이 없었음을 밝힌다. 앞선 비판적 논의들이 사회정치세력의 재편성에 끼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업은 80년대 이후 급진노동운동과 이론의 역사, 위상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본론)
이를 위해 기존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기존 논의를 범주화시키면 ①70년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연구 ②80년 5월 이후 등장한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 ③87년 이후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관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에 대한 연구는 ㉮당시 노동조합운동의 위상을 과잉평가하는 ‘민중주의적 입장’(자유주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합주의적 한계만을 부각시키는 입장(급진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으로 나눠진다. ‘한계’와 ‘오류’를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해 평가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 비판적 논의도 당시 노조운동이 영향 받거나 수용한 이념과 이론, 운동에서 드러난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이 가운데 최장집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국가의 성격, 국가의 노동정책에 주목하는 연구를 한다. 최장집은 ‘조합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축적 과정에서 행하는 국가의 역할 및 계급적 성격, 권위주의 국가와 사회계급 사이의 전체적 관계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수입대체공업화의 위기 가운데 파시즘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이 배제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조합주의 등장경로는 한국에 적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노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각 산업화단계를 추동하는 ‘동맹’의 참여자 혹은 배제자로서 하나의 주체로 설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가조합주의는 식민지권력의 성립을 계기로 이미 조성된,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 증폭된 과대성장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은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을 과잉 평가하는 민중주의적 경향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최장집은 당시 노조운동을 지원했던 교회의 노동운동이념 및 그 요구 내용이 국가의 공식정책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보다 기본적으로 그것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급진노동운동의 출현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 기독교노동운동과 국가가 공유하는 이러한 동질성,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한계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근거한다.
하지만 최장집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는데 국가조합주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조합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해야 한다. 슈미터는 조합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조합주의는 국가에 의해(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인정되거나 허가된, 그 리더의 선출 그리고 요구와 지지의 접합에 대한 어떤 통제를 준수하는 대신, 그들 각각의 범주 내에서 상당한 독점적 대표성을 부여받는, 그 구성단위들이 한정된 수의 독점적, 의무적,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고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범주들 속에 조직화된 이익 대표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의 경우 한국노총이 군부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접어두더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형식적으로는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공식노조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기업별 노조로 원자화된 노동자들은 상급노조를 통해 기존 국가체제에 포섭되어 사회경제적으로 동원되기보다 국가의 억압기제와 이데올로기기제 등을 통해 직접 국가에 포섭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노조 지도자에게 특별히 배타적 반대급부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자대중에게도 경제적 동원 이외에 어떠한 인센티브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비판은 최장집도 과대성장국가론을 국가조합주의 적용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적절해 보인다. 조합주의 또한 계급간의 모순,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 및 대결을 반영하는 제도인 것이고, 과대성장국가론은 해방 직후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패배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조합주의라는 기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확인시켜준다. 최장집은 자신이 수용한 이론틀을 역사와 접합할 때 드러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아 자신의 의미 있는 논의마저 퇴색시키고 있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기독교노동단체들의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다룬 김녕의 논의로부터 일정하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김녕은 국가의 억압행위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정에서 상이 성직자들과 하위 성직자들, 진보적 사제들과 보수적 사제들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갈등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해소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의 실천은 가톨릭교회 내부의 주류가 아니며 오히려 주요한 흐름은 보수적인 세력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진보적 사제들이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자’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하는 ‘성서의 실천’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조직 자체의 보존을 중요시하는 교회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덕목에 준하여 대응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까밀로 또레스(콜롬비아의 신부-게릴라)를 배출해 냈고, 대단히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낳은 제도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산아제한에 반대하고, 여성사제의 임명을 막고 있으며 형식적 위계구조의 변경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녕은 ‘다양성 속의 일치’에서 ‘일치’가 교회의 존립과 관계되는 것이고 지향점이 ‘교회’ 그 자체라는 점을 간과한다. 따라서 교회 내부적으로 사회적 실천세력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기존 교회의 위계체제를 본질적으로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비세속적 도덕성의 상징’인 교회의 이름으로 그 사회적 실천이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적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교회 내의 문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과하며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로부터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분리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조합주의가 주목하는 노동자계급, 교회의 위상과 기능을 둘러싼 논의들이 급진노동운동의 前史에 해당하는 연구로 의미를 지니고, 80년 518을 경험하며 80년대 중반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핵심고리이다. 급진노동운동은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출발하여 87년 투쟁 이후 등장한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역으로 그것에 조건당하면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70년대 노동조합운동을 평가하는 두 가지 입장의 연장선에 있는데, 하나는 ①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절대시하여 당시 운동을 평가하는 것으로 70년대 운동에 대한 ‘민중주의적 평가’에서 이어진다. 이 논의에 의하면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무차별의 대중참여’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 결과 ‘선도적인 정치적 노동운동’은 대중성의 결여일 뿐이고, 이론논쟁은 엘리트들의 ‘자족적이고 무의미한 이론논쟁’으로 평가될 뿐이다. 87년 투쟁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변혁적인 투쟁으로 과잉 규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0년대 급진ㄴ동운동의 출현은 운동의 후퇴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징후는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태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며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평가는 ②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노동자계급의 이념, 조직의 독자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입각한 평가는 한국노동운동이 87년 이전에는 자기형성과정조차 밟지 못했으나, 87년을 고비로 노동자계급운동으로 문턱을 넘어섰다고 파악한다. 이 논의들은 주체형성의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87년 이전에도 급진노동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흐름이 존재했다는 점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독자성을 지닌 노동운동이 대중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점, 특히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및 정치운동이 여전히 의미 있는 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노동운동과 비교할 때 80년대 노동운동은 오히려 연구의 관심대상에서 상당히 소외되었다. 그 이유는
①‘아카데미즘’ 내적인 문제로 이 주제가 사회학/역사학적인 주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운동의 정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정치를 제도화된 영역으로만 협소하게 규정하는 발상에 의한 것이다.
②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내외의 계기들이 맞물리며 형성된 ‘민주화 이행’ 공간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이들에 의해 급진노동운동이 ‘최대강령주의’로 치부되면서 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된 측면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논의는 ‘전략선택론’, ‘민주화이행론’을 양축으로 하여 노동운동을 평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논의는 다음의 한계를 공유한다.
㉠사회세력들이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상이한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불평등성, 노동기본권의 부재 등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 상황적인 요소로만 취급한다.
㉡특정한 국면속에서 노동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인식한다. 이 논의는 신고전파정치경제학에서처럼 행위자는 합리적 선호에 근거해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해 추동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매는 이미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전략적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가정하면서도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온건파 사이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행’을 가장 바람직한 상으로 미리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여타 전략/전술을 선험적으로 배제하거나 비합리적 행위로 낙인찍는다.
이런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최장집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의 실패 요인에 관한 논의에서 노동운동 쇠퇴의 구조적인 조건보다 확대된 정치공간에서 노동운동이 ‘열려져 있는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행위론적 차원을 주목한다. 최장집은 최대강령주의를 가졌던 노동운동지도부와 노동자대중이 접맥되어 노동대중의 이탈이 초래됐고, 이로 인해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좌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송호근은 노동자대투쟁이 대학생과 재야집단의 지원을 받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던 비공식적, 진보적 노동자집단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계기였고, 이들이 전노협을 출범시켰다고 단정 짓고 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노동운동’은 그 급진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노총 산하의 온건노조들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타협’이라는 합법 경로를 통해 교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두 논의는 정치적 노동운동(‘외부로부터의 지도’)과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통해 운동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출발은 적절하다.(‘자생성 테제’의 적합성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최대강령주의자들’이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가 그것의 쇠퇴를 가져온 매개요인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빠져있다. 무엇보다 쟁점이 되는 것은 ‘혁명적 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일단 분리한 후,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전자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후자의 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했다고 보는 이들 주장의 현실적합성 여부이다.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 행위의 차원을 접목시키고자 한 논의들은 ‘전략적 선택론’의 한계를 넘어 나가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이런 논의에서도 87년 이전 급진노동운동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주로 노동자대중운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이들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고립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변화 등 노동운동 내부의 관계/노동운동을 둘러싼 미시 거시적인 조건의 변화에 주목한다.
김동춘은 87년 이후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을 ‘고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 그는 경제와 정치를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구조와 행위의 통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최장집, 송호근 등과 차별성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운동 일반은 정치적 변화기를 포함한 그 어떤 시기에도 그의 논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미의 ‘고립’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고립’의 적실성은 87년 노동자대투쟁~90년 전노협 시기 까지 중공업노동조합운동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동춘의 논의는 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최대강령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아래 있었다는 최장집 등의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역량은 노동조합원 수나 쟁의의 빈도, 투쟁의 강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판별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운동을 일관되게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계와 이념, 대중과의 결합정도, 연대성 제고 등이 더 효과적인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 90년을 전후로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되어진 노동조합운동은 결코 과거보다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노중기는 김동춘과 대립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급진노동운동세력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들의 한계와 국가의 변화된 노동정책의 파시스트적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소위 ‘민주화이행’ 시기에 기존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지배구조가 온전히 유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전략적 선택지의 다원성’ 그 자체를 문제시 한다.
임영일은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87년 이후 급진노동운동을 포함한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관계,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계 변화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를 살핀다. 그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협상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출신 활동가조직이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이들은 87년 이후 대중조직과의 결합에 실패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임영일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성된 노동운동의 활동공간에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 운동이 전노대로 묶임으로써 경제주의적/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이 활동가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대시켜 그것이 위기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 이와 같은 결과는 애초 파시스트 권력에 의해 강제된 기업별노조체제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활동가운동과 87년 이후 대중적 민주노조 운동이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증폭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최대강량주의에 집착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운동에 대한 헤게모니로부터 노동운동위기를 도출해 내는 경험적이고 인상비평적인 논의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구조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들에 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 - ex/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노동운동을 자본의 하위파트너로 만들었는가?) 하지만 임영일은 ‘전위정당’ 건설을 지향하기조차 한 활동가운동의 위상에 대한 평가를 회피함으로써 급진노동운동의 역사적 위상과 공과 또한 빠트린다.
김영수는 이를 포착하는데, 그는 노동자정치운동과 조합운동 사이의 관계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임영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넘고자 한다. 그는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은 상호 분화와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기’를 포함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의 분리 및 연대라는 차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는 전노운협의 분화, 민중당 좌절 이후 민주노총 건설을 둘러싼 와중에 있던 노동자정치운동의 상황을 ‘대중적인 노조운동이 주도하며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규정한다. 그 이전시기(87년 이후~민주노총 건설)에 대해서는 양자가 조직적으로 상호주도하면서 연대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보고 있다. 이것은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민주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노동운동위기론’을 매개로 급진노동운동의 위상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관계 등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한 급진노동운동이 대중적인 노조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들이 ‘지체된 민주주의’의 책임을 상당 정도 급진노동운동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의 작업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 그리고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고 그 모순들이 해소, 극복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급진운동을 재구성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