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토지제도(『한국역사』 p184~197)

중세의 토지제도
(『한국역사』 p184~197)

1. 우리나라 봉건적 토지소유의 특징
토지의 소유 여부는 사회계급을 구분하는 지표가 되며, 토지소유를 둘러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사회의 기본모순관계를 표현한다. 중세사회의 농업경영 형태는 다양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소농경영이 기본적인 형태였다. 소농경이란 노동주체인 농민이 자기 가족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노동 전과정을 수행하고 노동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경영형태를 말한다.
중세사회에는 이러한 소농경영을 바탕으로 하여 대토지소유가 발달하였다. 대토지소유자들은 토지소유를 매개로 하여 농민의 소경영을 지배하고 잉여생산물을 지대의 형태로 수취하였다. 대토지소유자와 생산과정에서 개인적 성격을 갖는 소경영 농민 사이에 맺는 관계를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라고 한다. 봉건적 토지소유는 역사발전의 특정 단계에 출현하는 토지소유의 역사적 한 형태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토지에 대한 사적인 소유권이 발달하였다. 토지사유는 어느 신분에게나 개방되어 있어, 대토지소유가 발달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농민들의 소토지소유도 널리 존재하였다.
대토지소유자들이 토지가 부족하거나 없는 소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하는 관계를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줄여서 ‘지주제’라고 한다. 중세 초기의 지주제는 신분제를 비롯한 경제외적 강제를 강하게 받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경제외적 강제는 약화되고 경제적 관계가 강화되었다. 지주제는 본질이 대토지소유자에 의한 소경영 농민의 지배라는 점에서 봉건적 토지소유였다.
지주제에 포섭되지 않는 광범위한 소토지소유 농민이 존재했으나 농민들의 토지소유는 국가에 의해 강한 제약을 받는 형태로 존재했다. 국가는 봉건적인 신분, 수취관계를 통하여 소토지소유 농민들을 지배했고, 봉건지배층에게 일반 토지에서 전조를 거둘 수 있는 권리(수조권)를 지급함으로써도 소토지소유 농민을 지배하였다. 이처럼 수조권을 기초로 형성되는 관계를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라고 한다. 전주 : 수조권을 가진 자, 전객 : 소토지소유 농민
전주의 수조권은 사적 소유지의 소유권과는 성질이 달랐다. 이렇게 봉건지배층은 소유권에 기초하여 소농경영(전호)을 지배할 뿐 아니라 수조권에 기초하여서도 소농경영(전객)을 지배할 수 있었다.
봉건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수조권·전주전객제는 점차 약화 소멸의 과정을 겪었고, 소유권·지주전호제는 점차 발전 확대의 과정을 겪었다. 지주제는 비옥한 농지나 자연재해의 영향을 덜 받는 농지에서 성행하였다. 지주제는 생산력이 발전함에 ᄄᆞ라 확대되었으며, 16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토지지배관계에서는 지주전호제만 남게 되었다.
토지에 대한 수조권분급은 모든 토지는 국왕의 토지라는 관념을 전제하여 이루어졌다.토지의 소유권이 수조권의 강한 제약을 받았다는 점에서 일물일권의 원칙에 기초한 근대적 토지소유와는 구별된다. 지주제가 지배적인 형태였던 점에서 영주적 토지소유가 지배적이었던 서구의 유형과도 구별된다. 서구의 봉건적 토지소유에서는 토지에 대한 지배적 권리는 영주에게 귀속되지만 농노 또한 영구 경작권을 비롯하여 토지에 대한 실제적인 권리를 갖는다. 지주제에서 전호는 토지에 대한 실제적인 권리가 매우 약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봉건적 토지소유가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점에서는 중국과 비슷하나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일본은 영주적인 토지소유가 강력하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2. 중세 토지제도의 성립
우리나라의 중세사회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성립하였는데, 그 과정이 완만하고 장기간에 걸친 것이 특징이다.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신라는 6세기 초 우경이 적극 장려되었다. 수리 관개시설이 많이 만들어져 홍수의 피해를 덜 받는 농경지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이 늘어났고 논농사가 차츰 중시되었다.
경작과정에서 개인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농가의 경제적인 자립도가 높아졌다. 토지는 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생산수단이 되고, 예속 농민을 직접 노예로 부리는 것보다 토지를 빌려주고 대신 생산물의 일부를 받는 방식이 우세하게 되었다. 인두세 중심에서 토지와 인구를 배개로 호별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등급을 매겨 거두는 쪽으로 바뀌었다. 지배층에게 봉호를 지급하던 식읍제가 약화되어 가고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가 자리 잡았다.
7세기 중엽 삼국이 통일되기까지 경제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긴요하였다. 이에 소농민 보호정책을 펴게 되었으며 농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개선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군현제와 관료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국가가 전국의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여 공전과 양민을 확대하였다.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함으로써 토지가 중시되었고 경장과정에서 가호 중심의 농업경영이 자리 잡은 것을 바탕으로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신장되었다.
통일을 전후하여 왕실, 귀족, 불교사원은 토지소유를 크게 확대하였다. 이를 흔히 전장으로 불렀는데 전장에는 장사를 설치하고 지장 등의 관리인을 파견하여 많은 경우 지주제 경영을 하였다. 전장주가 전호농민을 지배하는 형태는 노비나 하호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던 전시기의 모습과는 달랐다. 전호농민든 간섭을 종전보다 덜 받으면서 개별적으로 경작하게 되었다.
소토지소유 농민들은 가족노동을 바탕으로 소경영을 하였는데 이들은 전호농민보다 더 자율성이 컸다. 국가에서는 정전을 지급하기도 하였는데 농민의 소유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토지에 대한 이러한 사적인 소유를 전제로 하여 수조권분급제가 시행되었으나 아직 관료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서 정연하게 분급하지는 못하였다.
통일신라에서 토지분급은 녹읍과 관료전으로 이루어졌다. 녹읍제는 689년에 혁파되어 세조로 대치되었다가, 757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관료전은 687년에 지급되었다. 관료전과 녹읍은 관료들에게 토지를 떼어주고 거기서 조를 거두도록 한 제도였다.
신라 하대에 농민항쟁이 전개되면서 신라의 사회체제는 급격하게 붕괴되어 갔다. 이 시기 호족들은 지방의 독립된 세력이 되어갔는데, 그들은 국가의 전조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녹읍의 외피를 쓰고 지배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발달하면서 소토지소유 농민이 늘어나고 지주제가 발달하였다. 그 위에서 지배층의 직역봉공職役奉供에 대한 대가로 수조지를 분급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중세토지제도의 특징이 나타났다. 그러나 농민을 노예에 준하는 처지에 두고서 지배하는 형태도 남아있었다. 녹읍은 식읍과 비슷한 점도 남아있었지만, 녹읍민은 식읍민보다는 부담이 헐하였다. 이 시기에는 중세의 토지지배관계가 성립하였으나, 아직 그 특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3. 중세 토지제도의 발전
고려시기는 봉건사회의 발전기로서 봉건적 성격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토지소유관계면에서 소유권과 수조권의 조화·대립이 두드러지고, 토지지배관계와 신분제의 유기적인 관련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고려는 양전을 실시하여 토지소유관계를 조정하고, 노비안검법을 통해 노비를 양인으로 되돌렸다. 이는 국가가 공전을 확대하는 동시에 양인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농민들은 지방 호족들이 자의적으로 수탈하던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고려시기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한층 성장하여, 매매·상속·증여·양도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농민의 대부분은 소토지를 소유하거나 토지가 없는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경지를 넓히기 위해 진전(陳田)이나 산전(山田)을 개간하였다. 고려의 북진정책도 농지의 확대라는 시대적 요청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귀족이나 사원의 대토지는 대개 지주전호제로 경영하였다. 전호는 일반적으로 1/2의 현물지대를 부담하였으나, 국·공유지를 개간하여 경작하는 전호는 수확량의 1/4을 지대로 바쳤다.
지주는 토지 뿐 아니라 농우農牛나 종자와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호는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전호는 지주에게 신분적인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지주제 경영이 일반화되고 개별 소농민들이 영농과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것은 당시 생산력 수준에 따른 것이었다. 평지에서 상경常耕화는 보편화되었고, 세역歲易농법은 주로 산전에서 성행했다.
12세기 이후에는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향약의술의 발달로 유아사망이 현저히 줄어 인구가 크게 늘어나, 집약적인 영농의 확대를 뒷받침하였다.
농장의 예속농민의 경우 강제로 종속되기도 하였지만(壓良爲賤) 용조庸租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탁投托인 경우도 많았다. 이를 배경으로 지주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고려 초기 지방의 호족을 지배층으로 편입하면서 수조지의 분급규정으로 전시과(田柴科)를 마련하였다. 976년에 만들어진 시정전시과에서는 관료집단을 복색에 따라 네 등급으로 구분하여 각각 서로 다른 토지분급 규정을 두었다. 관품(官品) 뿐만 아니라 인품(人品)도 지급기준이었다.(役分田 성격) 그러나 관료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998년에 실시된 개정전시과에서는 관직체계를 기준으로 토지를 분급하였다.
전시과에서는 전지와 시지가 분급되었다. 전지는 수조지였는데 전주는 국가를 대신하여 소출의 1/10을 전조로 징수하였다. 시지는 땔감을 얻는 땅으로서 개경에서 왕복 2일 이내의 지역에 분급되었다.
국가가 전조를 거두고 수조지를 분급할 때는 양전의 결과를 기초로 하였다. 양전을 하여 작성하는 양안에는 매필지마다 전품(田品), 양전척(量田尺), 결수(結數), 사표(四標), 기·진(起 ·陳)여부와 함께 그 토지의 소유권자를 명시하였다.

 

4. 중세 토지제도의 재편
고려 말에는 전제의 문란으로 인한 토지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여러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수조권을 근거로 한 불법적인 토지 겸병을 없애고 수조권자를 단일하게 하려는 방안과 사전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는 방안이다. 두 주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후자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사전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이들은 새로 양전을 하여 옛 토지문서를 모두 불태워 없앴으며, 1391년 과전법을 공포하여 새로운 토지분급법을 마련하였다.

전시과제도에서는 사전이 외방에도 분급되었으나 과전법에서는 외방의 사전을 혁파하고 기내에 집중하여 재배분하였다. 그 결과 전주의 전객농민지배는 국가에 의해 강한 통제를 받게 되어 자의적인 수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천자문의 순서만으로 전정을 구별하는 자정제가 시행되어 전정에 전주명이 기재되던 방식이 폐지되었다.
과전법 제정 이후에도 정부는 소농민 보호시책을 추진하였다. 조선 초 정부는 토지소유 규모에 제한을 가할 수 없는 형편에서 경영관계에 제약을 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 일시 금지) 세종 말년부터 공법(貢法)을 시행함에 따라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수취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기준과 타당성을 갖게 되었으며, 수취율도 1/20로 경감되었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산지에서도 세역전이 줄어들어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에서는 세역농법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아가 하삼도에서는 보리와 콩의 1년 2작이나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자리잡아 갔다.
농민들은 개간을 통해 경작지를 확대하였다. 정부에서는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면세 조치를 취하였다. 비교적 후진지역이었던 중부 이북지역에서도 개안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농민들이 한층 자율적으로 농업경영을 하게 되면서 지주제도 더욱 발달하였다. 노동지대를 수취하던 지주제 경영형태는 사라져갔으며, 지주가 직영하는 경영형태는 크게 축소되어 갔다. 노비전호보다는 양인전호가 크게 증가하였다. 병작(幷作)은 민간의 상사(常事)로 여겨졌다.
한편 이 시기에 전주전객제는 최종적인 단계에 있었다. 전주가 직접 답험踏驗하던 것이 관 답험으로 바뀌고, 직전법의 시행으로 사전의 영대 점유가 부정된데다 직접 수조가 차단되어 관수관급으로 바뀌었다.
수조권은 중앙과 지방의 국가기관에도 분급되어 각 기관이 독자적으로 수조해왔는데, 1445년 국용전제가 시행되어 국가가 직접 수조하는 것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통일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전주권이 약화되어 전주전객제가 해체됨으로써 15세기 후반 이후 수조권을 매개로 한 토지지배가 무너지고 소유권에 바탕을 둔 지주전호제만이 남게 되었다. 전객으로 파악되던 농민은 명실상부한 소유자가 되었다. 반면 지주전호제도 한층 더 발달하게 되었고, 토지소유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고 토지 집적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토지상실도 심각해졌다.
16세기 이후에는 지주층과 전호의 관계에서 신분적인 주종관계가 점차 배제되어 갔다. 지주제에서 경제외적 강제가 퇴색하고 경제적 관계가 크게 부각되었다. 지주경영이 활발해짐에 따라 유통경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농민층은 자신의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서 단위면적당 소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참여함으로써 문제를 타개하려 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어 토지매매도 활발해지는 가운데 양반 작인이나 임노동자가 출현하였다. 지대의 형태도 타조제(打租制)에서 도조제(賭租制)로 변화하였으며 일부지역에서는 화폐지대도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농촌사회가 급속히 분화되는 가운데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던 중세사회는 근본적으로 동요하였다.

 

 

사전 : 수조권이 개인, 사원에게
공전 : 수조권이 국가에게
병작 : 토지를 빌려 경작
답험 : 경작지의 작황을 조사
타조 : 분익소작. 예 - 병작반수제
도조 : 정액소작

직접생산자의 부담 정도
식읍>녹읍>전시과>과전법

2018/11/06 22:50 2018/11/06 22:50

지나간다2018/06/17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4.3항쟁에 대해 너무 피상적으로 접하고 있었다는 걸 새삼 알게됐다. 여독을 잠깐 풀고 이리저리 찾고, 읽고 있다. 마냥 공부해야할 것 투성이다.

-4.3봉기 전, 국경(國警)이 동시 봉기하도록 전술을 세웠으나, 4.3 당일에 국경이 동원되지 않았다. 진상을 파악해보니, 제주도당 프락치 4명 중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있었고, 중앙직속 조직인 문상진 소위를 만났더니, 4.3 투쟁 직전에 고하사관(제주도당 프락치)이 문 소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궐기해야 된다고투쟁 참가를 권유했지만 문 소위는 중앙 지시가 없어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 -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문상길이라는 이름은 박진경 9연대장 암살사건에서 다시 발견했다.
문상길 중위 법정 최후진술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의 선고를 내리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법정의 성격상 당연히 총살형이 선고될 것이며, 우리는 그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 연대장도 장차 노령해지면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북쪽의 평가는, 제주도당/전남도당 독단의 모험주의적 봉기라는 것 같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박헌영) 계를 숙청하면서 공식화된 입장인 것 같다.
"여수의 14연대를 비롯한 국방군대의 혁명조직들의 형편은 아직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역량으로 성장되어 있지 못하였다. ... 박헌영 도당은 이러한 상황에서 처음부터 혁명역량 특히 국방군 내의 혁명역량을 파괴할 목적으로 무모한 폭동을 조직하였고 이런 데로부터 이자들은 다른 지방과의 아무런 연계도 지어주지 않았으며 고립무원한 투쟁에로 병사들을 내몰아 그들을 희생케 하였던 것이다" - <박헌영, 이승엽 등의 공판문헌>, 남로당연구 자료집 / 김동춘,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

-극우세력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침 아래 4.3 봉기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이들은 김달삼은 중앙으로 봐야하고, 전남도당(道黨) 올구가 사실상 제주도당(島黨)을 지도했고, 문상길 소위 역시 봉기를 주장한 강경파였다고 주장한다.), 정부4.3위원회가 제주도당의 단독봉기로 꼬리자르기 했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드러나 있는 자료들로는 남로당 중앙의 지침을 확인할 수 없다. 극우세력(지만원 등)의 글에는 따로 근거자료가 첨부되어 있지 않다.

-일도양단으로 설 수 없는 많은 자리들이 있다는 걸 매번 생각한다. 숙연해지면서, 또 아쉽고, 안타깝고, 역사는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되새긴다. 오늘은 글들을 읽다 마음이 문상길이라는 이름에서 멈췄다.

2018/11/06 22:46 2018/11/06 22:46

보는거장미의 땅

2017.06.21.

 

며칠 전, 아~주 우연히, <장미의 땅> 이라는 다큐 영화를 봤다.

영화는 PKK(쿠르디스탄 노동자당)의 여성 게릴라 부대 이야기다. 그동안 나에게 쿠르드족 이야기는, 신문 기사 한 구절 쯤으로 스쳐지나갔던 게 전부였다. 영화를 보고나서야 PKK에 대해서 처음 찾아보게 되었고, 쿠르디스탄의 의미도 알게 되었고, 몰랐던 세계가 이렇게 넓다는 사실에 또 겸손해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꺼내는 이상은 사실 공허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까 조심스럽지만, 어쨋든 난 그렇게 느겼다. 선배 게릴라는 정치학습이 중요하다며, 우리의 투쟁은 단순히 무장투쟁이 아니라 정치투쟁이고 이데올로기 투쟁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 정치투쟁을 위해 꺼내는 내용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신성, 여성의 성이 전리품으로 취급되는 현실 등등인데, 너무 거칠었다. 만들고자 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반면, 제작국가별로 다른 각 총기의 특성, 총기 관리법, 미제 수류탄과 소련제 수류탄의 차이 등 게릴라 투쟁과 관련된 내용들은 굳이 저런 인터뷰를 넣어야하나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아마도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을 것 같다.

게릴라 대원들은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며 자살테터를 하는 IS를 비판하고 적개심을 보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PKK 지도자 아포(압둘라 오잘란, 1999년 이후 수감 중)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종교적 신념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걸까 싶었다. 이것도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요즘 PKK는 터키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터키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영화가 보여준 PKK를 떠올려 볼 때, 저 활동이 테러와도 연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제대로 못하고 입산했다는 대목이 가장 가슴 메였다. 한국의 현대사도 겹쳐 보이고...... PKK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 상황에서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떠오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가 외부의 시선으로 너무 한가하게 재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10년 전 쯤 같은 내용의 영화를 보았다면 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던졌던 질문이다.

군주에게, 제국주의 열강에게 지배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민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이 근대 민족주의의 바탕일 터. 비슷한 맥락에서 러시아혁명도, 중국혁명도 민족국가 구성이 당면 과제였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곳에서 압제에서 벗어나고 민족 독립을 목표로 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민족을 위로부터 내려오는 가상의 보편성이라 쳐도, 그것은 현실에 실재하는 규범이고 현실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민족은 종족주의, 부족주의와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요즘 난, 민족주의를 부족주의 쯤으로 격하시켜 생각(그런데 종족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설파하는 무리가 있던 것도 사실)하면서, 계급과 민족을 대립시키는 도식으로 역사를 재단해왔던 것에 대해 반성을 많이 하고 있다. 부정과 비판의 차이를 잘 몰랐던 것.

뭔가 정리하려는 끄적거림은 아니고, 요지는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 더 깊게 알아봐야겠다는 다짐.

덧. 근래 터키는 IS를 공격하겠다는 구실을 들어 오히려 PKK를 공격하고 있다고 한다. PKK의 보복테러도 있다고 하고. 어쨋든 터키 군부 정권이 나쁜 놈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52Q4WgO-s8

2017/08/10 17:18 2017/08/10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