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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20011165 연극학과

                                                                                                           김봉재


 우선 이번 영화의 리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던 것인지 말씀드립니다. 독립영화의 정체성, 그들이 그토록 토론하고 쌍욕을 해가며 쟁취하고자하는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단순하게 영상의 동기부여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자기검열에 입각한 것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상원의 중견 교수님들과 유명 감독, 평론가들의 출연으로 독립영화에 대한 그들의 언급과 정의에 동조하면서도, 정작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저는, 앞선 세대의 진보적 행동에 대한 억압과 구속을 일종의 '문화적 저항'의 원천으로 규정하며, 그것이 문화적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독립영화’ 혹은 ‘단편영화’의 정의 앞에 ‘반드시 현실과 투쟁할 것’이라는 전제를 달아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독립(단편)영화는 분명, 현실과의 투쟁에서 오는 정신-물리적 고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고, 그러한 영화의 제작과 상영과정을 지켜보며,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파고들어 그 평범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변모시키고, 그것을 영상으로 옮겨 담는 사람조차 영웅화가 된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마저도 영웅이 될 거라는 착각은, 단순하게 ‘본다’는 의미를 ‘참여’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중심이 된다면 저는 그들의 투쟁을 축하하며 샴페인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기대를 해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차가운 사무실바닥에서 새우잠을 잘 때, 주점에서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며 ‘저항이나 자유’따위를 외칠 뿐이며, 같이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꾸미지도, 어디엔가 제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들이 현실과 계속해서 투쟁해주기를 바라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영화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변방으로 내모는 행위는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어제의 저는 지친 그들에게 ‘변절’이나 ‘배신’ 혹은 ‘타락’등의 단어를 너무나 쉽게 붙였던 것 같습니다.

 변영주 감독의 말처럼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변방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아무도 그들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변방으로 내몰리고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당하게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독립영화가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질러 고행의 길로 인도하더라도 그는 또 다른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도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가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영웅화되었던 출연자와 제작자와 감독과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관객들입니다. 세상이 독립영화를 쫓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립영화는 변방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변방으로 돌진합니다. 그들이 중심이 되는 순간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독립영화의 혁명이 성공한 날이며, 모든 나르시즘이 허물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한발 앞서서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방을 만들어 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이유는 그곳에 결승선이 있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뒤쫓아 오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달리는 도중 결승선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을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들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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