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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짧은 단상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독립영화에 대한 주제별 리뷰가 담기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독립영화에 대한 비평, 비평에 대한 비평이 시작됩니다.

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14
    <대추리전쟁>을 감상하고....
    독립영화비평
  2. 2007/06/07
    <쇼킹 패밀리>에 대한 리뷰 - 김현선
    독립영화비평
  3. 2007/06/06
    <쇼킹패밀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독립영화비평
  4. 2007/05/31
    <파산의 기술>에대한 질문
    독립영화비평
  5. 2007/05/15
    <더불어 사는 집>에 대한 질문
    독립영화비평
  6. 2007/05/10
    <흡년>, <얼굴들>에 대한 리뷰 - 김현선
    독립영화비평
  7. 2007/04/30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 발제문
    독립영화비평
  8. 2007/04/18
    외국인에게 주홍글자부터 새기고 보는 이 나라의 편협함(2)
    독립영화비평
  9. 2007/04/11
    <빗방울전주곡> 발제문
    독립영화비평
  10. 2007/04/11
    <빗방울 전주곡>의 리뷰를 보고 떠오르는 ?
    독립영화비평

<대추리전쟁>을 감상하고....

 

<대추리전쟁>에 대해서....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대추리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뉴스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접할 수 없었던 대추리 주민들의 치열한 싸움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기에 된 그들의 심정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 할 수 있을까? 그냥 적당한 보상금을 받고 이주해서 피터지게 싸우지 않고 편안하게 살면 될 것 아니냐며 대부분 많은 이들이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아직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땅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은 다시금 전쟁을 위해 농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고 말이다. 

 대추리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그들이 평생 일궈온 농토와 터전을 지켜내고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는 것뿐인데, 정치권력의 힘은 어김없이 그들의 소박한바램과 희망을 묵살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영화가 짧았지만 대추리 주민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느 정도 잘 전달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과연 관객들의 동요내지는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큼 호소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여기에는 구성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면 짧은 분량에 비해 너무나 긴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거나, 보상신청을 한 주민들과의 갈등, 주민들의 촛불시위와 주민회의 모습, 공권력과의 대치와 유혈 사태를 보여주는 것들이 마구 흐트러져 있어서, 주민들의 좀 더 세밀한 실제적인 상황과 심정에 대해서 전달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추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전쟁의 모습이 아직 멀게 느껴지는 것이 개인적인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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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에 대한 리뷰 - 김현선

'패밀리쇼킹함’, 그래서 ?

-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2006), 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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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는 수다스럽다. 수다(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는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고 가볍다. 또한 수다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만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쇼킹 패밀리>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쓸 데 있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쓸데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첨언하자면 <쇼킹 패밀리>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문제를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게’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가벼움은 ‘무거운 주제는 무겁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에 무게(‘가족’의 문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쇼킹 패밀리>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건드리기는 하였으나 고민하지 않으며 ‘그래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소리는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즉,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는 ‘입’들은 너무 많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쇼킹 패밀리>를 보는 일은 2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수다에 참여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외부와 내부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사운드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수다스러움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아줌마들의 노래방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혹은 감독 경순)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며, 이렇게 시작된 감독의 말소리는 영화의 내부에서 외부(내레이션)로 이어진다. 처음 장면에 등장하는 아줌마들은 가족 안에서 ‘패밀리’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금의 사회 현실을 보여주며, 이를 시작으로 영화는 다양한 방식(문자와 소리의 몽타주, 가훈의 의의, ‘패밀리’의 ‘쇼킹’함을 더하는 경순의 친구-엄마 때문에 버린 인간이며, 자기가 잘못하고도 여자가 모든 것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동시에 싫은 소리하는 것은 싫어하는, 공공캠페인 패러디)으로 사회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이 그녀는 이러한 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현재에 있어도 여전히 혹은 여지없이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드리워진다. 즉, 친구처럼 길러온 그녀의 딸 수림이 가족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려 하고 그녀 자신이 ‘쇼킹 패밀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음에도 그녀의 前史에 대해서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2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이혼하여 싱글맘이 된 그녀는 영화 안에서 솔직한 그녀의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그녀가 만들어내고 그 속에 들어갔던 ‘패밀리’의 ‘쇼킹함’에 대해서만은 수다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은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만 수다스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쇼킹 패밀리>는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현재에 다시금 출몰하며 놀라운 자생력을 보이는 ‘가족’과 그렇게 마주하게 되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는 현재에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녀의 과거들을 불러낸다. 즉 싱글맘이 되기 전에 바로 거쳤을 30대의 경은과 좀 더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인 20대의 세영을 불러낸다. 물론 그녀들(경은과 세영)의 이야기는 그녀들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즉 경순의 과거라고도 볼 수 있는 경은과 세영의 삶은 각자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장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세영의 이야기를 통해 <쇼킹 패밀리>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시작한다.


<쇼킹 패밀리>는 이미지 또한 수다스럽다. 영화는 그 자신의 안과 밖(밖: 영화에 참여하는 스텝들의 회의, 안: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스텝들의 대화 혹은 인터뷰)을 오가며 ‘패밀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이와 동시에 그래픽 몽타주, 외부(그녀들이 아닌-가훈, 입양, 대학입시, 호주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에서의 장면들, 그녀가 찍은 사진 혹은 그녀들을 찍은 사진, 그녀와 그녀들의 춤, 세영의 집을 담는 왜곡된 화면 등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의 편집과 조합 또한 가벼움이라는 무게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비단 <쇼킹 패밀리>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물질적 기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변화하고, 이로 인해 영화는 경제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도 쉽게 만들어지고 한편에서는 고민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과잉을 만들어냈다. 즉, 디지털 영화들은 보다 더 일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상의 인상(印象) 혹은 단편적인 시간의 조각들을 펼쳐놓거나 모아놓는 데 그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쇼킹 패밀리>는 디지털 영화가 지니고 있는 한계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쇼킹 패밀리>를 통해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는 수다에 참여했던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웃는 사이 ‘패밀리’의 심각함과 시사성을 망각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 대면하게 되는 것은 ‘패밀리’의 ‘쇼킹함’, 그래서?라는 질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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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패밀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쇼킹 패밀리> (2006, 이경순)에 대한 질문들~~~

- ‘가족’에 대한 솔직 당당함

<쇼킹 패밀리>는 여느 독립영화들과는 달리 산뜻한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그저 유쾌하고 재밌는 내용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 감독과 여성 스텝들의 솔직한 가족이야기와 그들의 인생이야기에서 나의 경험과 고민들이 겹쳐지면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앞으로의 나의 삶과 인생 그리고 미래의 나의 가족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려 보았다. 아니 내가 진정 원하는 가족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가족’에 대해 올바른 정의나 ‘가족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새로운 가족’에 대한 가능성과 사회 인식의 변화와 그 필요성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 제도화된 가족,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한 한국의 가족에 대한 모순들 -입양이나 이혼, 편모(부)가족, 호주제에 대한 문제들- 을 나름의 유쾌한 화법으로 과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일상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곧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문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영화를 보고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가족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방식이든지 가족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더욱이 ‘감독이 말하고 있는 쇼킹 패밀리란 과연 무엇인가?’  결국 ‘가족’의 진정성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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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기술>에대한 질문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파산의 기술>은 과연 ‘파산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의아스럽고 흥미로웠던 지점은 파산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파산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상황을 직접 시각적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인터뷰와 마치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은 경제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일상의 소음들만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면은 감상하는 입장에서 심히 너무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라디오와 같은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들과 중첩시켜서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모습들, 특히 노동자들,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영화 중간 중간에 인용하고 있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파산의 기술’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이미지와 사운드의 무분별한 충돌을 사용함으로써 과연 얼마나 ‘파산의 기술’에 대한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파산하고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과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도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인터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희망인가 좌절인가, 신자본주의에 대한 비아냥인가 아니면 절규인가.

<파산의 기술>은 ‘파산’에 대해서 라기 보다는, 이를 묵과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아이러니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다지 별로 매끄럽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는 지점 또한 간과할 수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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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집>에 대한 질문

<더불어 사는 집>에 대한 질문들                              영상이론과 박소영

 

 

'더불어 사는 이들'의 아이러니....

   먼저 드는 의구심은 '노숙자들의 공동체가 과연 성립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그들은 <더불어 사는 집>이라는 타이틀로 그들만의 공간을 꾸려나간다. 

노숙자라 하면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정상적인 사회체제의 부적응자로 낙 인 찍힌 이들로  익히 알고 있다. 이러한 그들이 그들만의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 작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목표는 잃어버린 생존권을 찾는  '투쟁' 이라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들의 의도에 타당성이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차라리 사회에 정상적으로 복귀하는게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 자신들의 권리를 소중히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노숙자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사회에 민폐를 끼치게 된 그들의 선택에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과 논리가 다소 억지스러워 보여서 이와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노숙자들이 꿈꾸는 -그들이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세상은 어찌되었든지 현실과 심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먼저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무책임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그들에게 닥쳤던 불우한 상황을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려고 했던 자세가 우선시 되었더라면 그들의 입장에 우리가 한발 더 가깝게 다가갈수 있지 않을까?

사회와 떨어져 노숙자가 되어버린 그들이 또 다른 사회에 편입하여 현실과 맞서는 장면을 과연 우리는 어떠한 기준과 자세로 판단내지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들을 진정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써 이해하고자 한다면 가벼운 동정심만으로는 안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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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년>, <얼굴들>에 대한 리뷰 - 김현선

 


여성 앞에 놓여진 이름-어머니, ‘어머니’라는 가능성

-<흡년,2004>, <얼굴들,2006>-

1. 차이와 차별


인간을 이해하는 기초적인 범주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성차’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성차적 인식을 흔히 접하게 되고, 이러한 성차가 차이를 넘어서 차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차는 객관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는 과학적 설명으로 인해 공고화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갖는 과학에 대한 견해와 달리 과학 이론은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학은 한시대의 과학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와 패러다임에 부합할 때만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특히 자연을 다루는 어느 분과보다도 성차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사회의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즉 가부장제 내에서 과학적 가설로부터 평가에 이르는 전과정은 남성의 시각에서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차적 인식은 생물학적 이론과 가부장적 가치관에 기반하여 성차별을 공고히 하고 남녀 불평등의 현실적 조건들을 재생산해내는 기제로 작용해왔다. 물론 남성과 여성은 기본적으로 신체와 생식 능력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여성은 남성과 달리 임신과 출산의 가능성을 갖고, 이는 생식 기술의 발달이나 생물학적 조건의 변화로는 달라지지 않는 원천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외의 대부분의 성차적 구분은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하거나 생식에 있어서의 구별된 역할이 그것의 명분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물학적 차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그 이상의 지위를 갖기도 하고, 불필요한 영역에까지 이용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성차가 여성과 남성을 이해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성차인식 이후에 생겨난 ‘사회적 성차’ 또한 차이에 대한 인식만으로 끝나지 않고 차별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이어지거나 그 내부에 이미 이전의 인식이 갖는 한계를 포함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자라서 또는 남자니까’라는 이분법의 출처는 여성과 남성의 몸이 아닌 여성과 남성의 권력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성차는 인간을 설명하는 기본적인 지표를 넘어서 사회적 억압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남녀간의 차이를 밝히는 것을 넘어 차별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기제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 이처럼 견고한 성차 인식은 엄격한 역할 분담을 낳고 그것으로부터 개체의 자유를 빼앗는 데 작용하기도 한다.


2. 차이가 낳은 고정적인 역할, 그것의 차별적 이름-어머니


<흡년>은 여성들의 흡연과 그와 관련된 사회적인 시선에 대해서 ‘발언’하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흡연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그들이 받아야 했던 수많은 비난과 질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 중에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담배를 피우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비난의 많은 부분이 ‘어머니’라는 가능성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난은 남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아기를 낳아야 하는 여성으로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아이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으로 평가된다. 누군가는 일반적인 여성의 흡연에 대해서는 찬성(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무관심)하지만 유독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 또는 자신의 아이의 어머니가 될 여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비흡연을 주장한다. 또는 담배를 피우는 것은 곧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어머니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기도 하며, 이처럼 결혼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는 여자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사는 여자로 평가된다. 그리고 ‘갈보년’, ‘쉬운 여자’와 같은 비난은 그 이면에 ‘어머니’라는 자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욕구(성적인 욕구)를 실현하는 데에만 급급한 여성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으로써의 여성의 몸을 사회적인 관계 내에서만 규정하는 차별적인 시선에 불과하다. 이처럼 가부장적 가치관 하에서 여성으로서 흡연을 하는 것은 기호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머니’라는 사회적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여성에게 그러한 자리 이외에 어떠한 욕구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기혼 여성의 투쟁 기록인 <얼굴들>이다. <얼굴들>은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역할과 함께 노동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기혼 여성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노동자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에게 부여된 사회적인 역할과 이로 인해 강요되고 있는 의무들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자리는 결혼이라는 제도로 인해 부여된 여성의 사회적 자리이며, 이러한 여성들에게 노동을 통한 자기의 실현은 가정 내에서 부여된 자신의 역할을 다한 후에만 가능한 것이 된다. 그녀들은 자신의 복직을 위해 투쟁하는 동시에 가정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이중의 임무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이러한 역할 수행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이 뒤따른다. 이처럼 앞서 언급한 <흡년>과 같이 <얼굴들>이라는 영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에게 부여된 ‘어머니’라는 이름은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이와 동시에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또 다른 다양한 욕구들은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부정당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어머니는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되고, 성적 욕구를 추구해도 안 되며, 노동이나 사회적인 행동들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것 또한 금지된다. 따라서 이로 인해 후자의 욕구를 선택하고자 하는 여성에게는 언제나 ‘어머니’라는 자리는 멀고 먼 이름이 되고 만다. 반면에 <얼굴들>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남성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투쟁할 때에 그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 아버지의 가정에는 여전히 이를 지켜나갈 ‘어머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아버지’들의 투쟁에 힘을 실어주는 가족대책위원회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은 ‘아버지’를 위해서만 존재할 뿐 여성 자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참여나 발언이 아니다. 오직 남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그들을 보완하는 객체로서의 역할만이 주어질 뿐이다. 이와 달리 <얼굴들>에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꾸려지는 가족대책위원회는 그녀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테두리 안에 있는 ‘어머니’ 혹은 나의 ‘아내’이기 때문에 허락하고 승인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머니’의 자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 앞에 놓을 수 있는 다양한 이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여성은 ‘어머니’의 자리와 또 다른 자신의 자리 사이에서 언제나 선택을 강요당하지만 그들에게는 ‘어머니’인 동시에 노동자일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어머니’라는 가능성인 동시에 흡연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따라서 자연적인 성차는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 기능하는 것 이외에 그것을 뛰어넘는 차별에까지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더욱이 그것이 강요와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 철학의 눈으로 읽는 여성, 연효숙 외, 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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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 발제문

 

<단편영화산책> 발제문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를 중심으로


방송영상과 20041235 도유리


1. 들어가며


1) 이주노동의 역사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이하 <계속된다>)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듯, 1980년대 이전에 ‘이주 노동자’ 라는 단어는 대부분 해외로 나가 일을 하는 한국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동남아시아인들이 주류를 이룬 해외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1) 그렇다면 왜 하필 1980년대 후반이었을까? 영화 <계속된다> 와 <복수의 길>,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편협함과 차별적 민족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이주노동자가 유입되기 시작한 80년대 말 한국은 사회전반의 민주화 진전과 함께 노동시장에서도 대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자 임금의 급격한 상승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대공장(대기업)과 중소공장(영세기업) 간 노동조건의 격차확대를 초래했고, 여기에 내국인들의 육체노동에 대한 인식변화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영세 제조업, 건설업, 광업 등 이른바 3D로 분류되는 업종에 대한 취업기피 현상으로 이어졌다. 국내 중소영세업체의 인력난이 점점 가속화되는 가운데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던 중국, 동남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한국의 높은 임금과 환율차에 기대를 건 한국행 노동이주에 대한 선호가 날로 높아져, 한국으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의 수가 급증하였다.2)


  위 글에서 볼 수 있듯, 외국인 노동자들의 존재는 - <계속된다>에서 한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밝혔듯이 - 한국의 급격한 산업발전과 한국 노동자들의 3D 기피현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사회는 이들을 고마운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에 관해 생각해보기 위해 우선 한국 정부의 ‘산업 연수생 제도’ 와 ‘고용 허가제’ 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2) 산업 연수생 제도 / 고용 허가제


 ① 산업기술연수생 제도


저개발국 외국인에게 기업연수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 개발도상국과 경제협력을 도모하고 기업연수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이다. 1993년 11월 도입되어 국내 3D 산업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하는 창구역할을 해왔다.3)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정부 역시 산업연수생 제도가 국내 3D 산업의 인력해소에 도움이 됨을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더불어 ‘선진 기술을 개발도상국에 이전한다’ 라는 입장을 취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노동자’ 가 아닌 ‘연수생’ 으로 구분 짓는 근거를 마련했다. 실제로 산업 연수생 제도의 가장 큰 폐해는, 이 제도가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이 노동 3권, 최저임금 보장 등의 권리를 전혀 누릴 수 없었다는 부분에 있다.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고강도의 노동, 산업재해 불인정, 강제노동, 폭행, 임금체불 등의 부당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사업장을 이탈해 불법 체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003년부터 고용허가제와 병행 실시되던 이 제도는, 민주노총 등을 비롯한 노동단체의 꾸준한 문제제기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결국 2007년 1월에 완전 폐지되었다.


② 고용 허가제


산업 연수생 제도의 폐지로 새로이 도입된 고용 허가제는, 2003년 8월 16일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 · 공포되면서 도입되었다. 이 법에 따라 2003년 11월부터 약 9개월간의 시범 실시를 거쳐, 2004년 8월 17일부터 정식 시행되고 있다. 고용허가제의 입법은 외국인력제도 개선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고, 국가 간 쌍무협정을 맺어 인력송출업무를 민간이익단체가 아니라 정부기관이 맡도록 하는 등 제도운영의 공공성 확보를 천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함으로써 산업연수제 하에서 발생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와 노동착취를 방지하고자 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시행 2년이 지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허가제는 사업자 이동의 제한이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이주노동자의 인권개선 등 한국의 이주노동정책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의 온상으로 비난받아 온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4) 등 연수추천단체를 이주노동자 모집·선발에서 사후관리에 이르는 고용허가제 운영전반에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이주노동자인권단체를 비롯한 노동·시민단체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5)


  이처럼 고용허가제는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인 한국정부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향상과 노동권 인정을 위한 첫 걸음을 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각종 이권단체의 로비와 정부부처의 이해관계로 인한 파행적 운영 -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가 입국 후 받을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교육과정도 이익집단에게 맡길 계획이며 심지어 고충처리, 재해사고 지원 등 이주노동자의 인권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마저 이권단체에 위탁하겠다고 하고 있다. - 은 산업연수생제도로 회귀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낳고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연 이런 제도적인 개선만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바꿀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 관련 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 이쯤에서의 당연한 의문 -

왜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합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① 국내 노동자와의 차별화 문제


  앞서 살펴봤듯이, 한국의 사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임금이 싸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국내 진출로 한국 근로자들의 임금이 동결되고, 저임금을 견디지 못한 한국 근로자들이 스스로 실업자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 3D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부분에 관해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으며 한국 근로자들 중에서도 3D 업종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수준에 비해 비싼 임금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누가 이런 문제를 제게 묻는다면 대답해줄 수 있어요. ‘자유롭게 들어

오게 해라’ 그럼 브로커 문제가 없어지는 거죠. 그리고 한국노동자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일자리가 없으면 돌아가

는 건 그들이에요. 이주노동자가 계속 있어서 증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장기 체류자 증가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브로커한테 준 돈

을 갚으려면 3,4년이 걸리고, 다시 가족에게 줄 돈을 벌어가려면 3,4

년이 더 걸려요. 장기 체류자가 오히려 더 양산되는 거죠. 입국을 제한

하는 게 오히려 장기 체류자를 양산하는 거에요. 이주노동자가 자리를

덤핑 친다고, 한국노동자 자리를 잠식한다고 그러는데, 한국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에게 똑같이 월급을 줘 봐요. 누가 이주노동자를 채용하겠

어요? 같은 조건을 만들어주면 되죠. 차별 없애라 그러는데. 브로커

문제만 없애면 되죠. 자유롭게 들어오게 하면 되는 거네. 그 차별 조건

만 없애면 다른 부차적인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거죠.1)

 

② 세금, 복지혜택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 고용이 전면 합법화 된다면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한다. 또 한국 정부는 그들에게 의료보험, 고용보험과 같은 제도적 혜택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한국 정부와 외국인 노동자 단체 측이 일정한 협상과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의 결론을 내린다면 이러한 제도 마련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법무부는 계속해서 전면 합법화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외국인 노동자측은 부분 합법화가 아닌 전면 합법화를 주장하면서 외국인 노동자 고용 합법화 문제는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한국 정부나 외국인 노동자 단체 측, 둘 중 어느 하나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제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 역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③ 민족주의의 문제


  스스로를 ‘단일민족’ 이라 여기며 한국 사회 안에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인들, 그리고 그 편협함에서 유일하게 제외되는 것이 백인이라는 점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든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남아시아 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고정된 시각, 그것이 먼저 바뀌지 않는 이상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라는 편견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 문제와 더불어 코시안들의 정체성 문제, (거의 매매혼에 가까운) 결혼을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긴 힘들 것이다. 


4) 최근의 협상 물결


  한국 정부는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의 ‘자진귀국 프로그램 등 일시적 귀국 조치를 통한 합법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6) 하지만 이 역시 부분 합법화일 뿐이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 측이 이 방안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분위기다. 

  실제로 우리가 <계속된다>에서 보았듯 정부의 협상제안이나 합법화 방안 마련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점, 그동안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는 것이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여 일시 귀국 후 재입국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 부분 합법화는 결국 외국인 노동자들을 선별적으로 ‘걸러내는’ 것이므로 또 다른 차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정부의 협상방안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성공회 농성단의 해산을 다룬 <계속된다>의 에피소드가 말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런 문제인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과연 이번에는 변화할지 귀추가 주목되는 것도 그래서다.


2.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


1) 인물선정 방식


  이 다큐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한 두 명의 특정한 ‘주인공’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심이 되는 것은 ‘명동 농성단’ 이라는 집단이며, 집행부를 맡고 있는 인물들 - 투쟁국장 비두, 명동 농성단 대표 샤말과 같은 - 몇몇이 잠시 부각되긴 하지만 그마저도 곧 외국인 노동자라는 집단, 혹은 명동 농성단이라는 집단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이와 같은 인물선정 방식은 이 작품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특별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게 되는 휴먼다큐로서의 형식을 일부러 배제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안타까운 처지나 가난한 생활 등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투쟁하는 모습을 배치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물질적인 도움이나 정신적인 동정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여 힘을 주는 사람들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7)

2) 음악 및 이미지


  크게 두 부분 - 방글라데시로 돌아간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 / 한국에서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투쟁 - 으로 나눌 수 있는 <계속된다> 는, 특히 초반부에서는 이미지를, 후반부에서는 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연을 날리는 외국인 노동자 출신 방글라데시인들의 모습은 자유롭게 날고 싶지만 ‘무언가’에 묶여있는 탓에 그럴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 같아 보이고, 방글라데시 안 어딘가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이미지는 ‘중요한 시기에 타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내 나라도 내 나라가 아닌 것 같다’는 한 노동자의 말과 겹쳐져 더욱 스산하게 느껴진다.

  또한 힘없이 누운 채 그 날 배운 운동가요를 부르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갑작스러운 단속에 의해 무자비하게 연행되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 위로 흐르는 음악은 우리의 분노를 자극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이미지와 음악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은 꽤나 효과적이다.


3) 내레이션


  감독은, 작품의 시작을 본인의 아버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함과 함께 철저히 본인의 입장에서 내레이션을 진행했다. 그것은 감독 자신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연대의 필요성’ 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기도 했다. 생각해보자. 만약 <계속된다> 의 대상이 된 인물 중 한명이 직접 내레이션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것을 보는 ‘우리’는 정말 그들과 같은 ‘우리’ 가 될 수 있었을까?


<계속된다> 는 주체의 문제였어요. 이주노동자의 정체성 문제. 한국사회에서 이주노동자가 운동의 역사 안에서 주체로 서기 힘들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들이 주체로 섰다. ‘난 이주노동자다!’ 라고 말하는 주체. 이걸 얘기한 거였어요. 이제부터는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더 크게 보면 노동자는 연대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을 해보고 싶어요.8)


3. 나오며


  이 작품이 만들어진 후, ‘명동 농성단’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디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그들은 아직도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납득할만한 처우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은 미디액트 등의 미디어교육을 통해 발언의 도구를 얻어가고 있고, 이주노동자를 위한 인터넷 방송을 개설하는 등 스스로를 돕기 위한 활동도 시작하고 있다. 한국의 법, 혹은 그들의 처지나 지위에 상관없이 이제 그들이 엄연한 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1) 1987년 봄 동아일보에 ‘서울 강남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 가정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을 해외 이주 노동자에 대한 첫 번째 공식기록으로 보고 있다.


2) 「한국 이주 노동정책의 현황과 전망 」,최현모(한국 이주 노동자 인권연대 연대협력국장), 『이주연대심포지움자료집』, 2006년


3) 네이버 백과사전


4) 산업연수생 제도 하에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비롯한 수협, 농협, 건설협 등의 민간 이익단체들이 인력도입 및 관리를 담당함에 따라 송출비리와 사후관리를 빙자한 횡포가 만연했던 바 있다.


5) 「한국 이주 노동정책의 현황과 전망 」, 최현모(한국 이주 노동자 인권연대 연대협력국장), 『이주연대심포지움자료집』, 2006년


6) 법무부는 5월까지 21만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 가운데 우리정부와 인력교류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국가 노동자에 한해 ‘자진귀국 프로그램 등 일시적 귀국조치를 통한 합법화 방안’ 등의 내용이 포함된 대책을 마련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주목되고 있다. (민주노동 참세상, 2007년 3월 30일)


7)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에서 출발해, 이주노동운동의 주체를 세우는 작업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하고 싶었다”. 주현숙 감독 인터뷰 (2004년, 인터넷 신문 프로메테우스)


8) 주현숙 감독 인터뷰 (2004년, 인터넷 신문 프로메테우스)


 

 

 

 

 

발제문 업데이트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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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 주홍글자부터 새기고 보는 이 나라의 편협함

외국인에게 주홍글자부터 새기고 보는 이 나라의 편협함,

버지니아 총격사건에 부쳐

-<계속된다>를 보고

  강 지 혜

 

우선 놀란 점은 네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네팔이라는 나라에 대해 (근처 인도까지만 여행해보았지만) 그들이 이 먼 한국까지 와서 노동자로 일한다는 점에 놀랐다.

 

더듬더듬 한국어를 배워가는 속도보다 참담한 현실을 더 빨리 깨우치게 되는 그들.

 

작년 말에 안산에서 토막살인시체 사건 있었다. 중국인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가자 모두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비슷하게 어제 밝혀진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 범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졌다는 사실도 생각해보자. (교민과 노동자라는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교민 사회가 떠들썩하다고 한다. 그 뉴스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제발 중국인이 범인이길 바랬을 것이고, 한국인이라는 보도에 경악했을 것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너무나 공격적이다. 언론의 태도도 그렇다. 미국은 한국인이라는 점보다는 총기문제에 초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언론은 사건이 일어나면 외국인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불법체류 라는 단어를 부각한다. 가깝게 여수화재사건만 해도 타죽은 외국인에 대한 논의보다는 침착하게 문을 딴 여간수에 대한 놀라움이 더 부각되었던 것 같다. 어이가 없었다.

 

다큐는 보며 느끼는 점은 우리는 이미 그들 자체로 범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기피하고 있고, 또한 엉성한 제도의 틀로 그들을 범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불법체류 라는 이름하에) 한국인들도 현재 미국에서 수십만 명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점은 우리나라는 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마구잡이식 단속을 한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자살 혹은 투쟁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자국도 아닌 ‘타국’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그들이 눈물겹다.

 

우리는 단일, 백의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편협하게 다른 민족을 배척해왔다. 따지고 보면 현재는 같은 민족이라는 북한에 대해서도 사상이라는 이유로 총을 들이대고 있지 않은가. 가깝게는 조선족들을 상대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기행각도 문제가 크다. 문제는 편협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 문제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언론의 역할도 큰 것 같다. 신문보도 한 줄이라도 tv프로그램 하나라도 어떤 의도 없이 만들어진다면 우리들은 조금 열린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딱히 질문보다는 요즘 벌어지는 사건들로 인해 이런 저런 생각만 하게 하네요.

뭐 이런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나 다같이 나눠봄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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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전주곡> 발제문

<단편영화산책>

 정지원  강지혜

 

<빗방울전주곡> 발제문

 

1. 들어가기 전

 

1. 독립영화와 노동영화

한국 독립영화의 활동현황을 그룹별로 분류하면,

첫째, [노동자뉴스제작단], [푸른영상], [서울영상집단] 등의 다큐멘터리 단체들이나 노동 단체의 영상패,

둘째, 독립영화의 대다수인 단편영화를 만드는 부류.

셋째, 극영화가 아닌 실험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그룹.

넷째, 독립애니메이션 그룹.

 

이들 독립영화는 1980년대 반민주 정권과의 대립과 절대적 생존권의 위협 속에서 충무로영화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항영화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그 배경에는 서울영화집단의 서구와 남미영화를 모델로 한 민중영화, 현장에 뿌리박은 노동농민영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현장주의영화 등의 수용이 있었다.

 

빗방울 전주곡은 첫째, 둘째 모두에 해당되는 것 같다. 우선 첫째에 해당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강한 투쟁의식에 더불어 극영화의 픽션이 잘 어우러져 있다. 1980년 이후, 대체로 독립영화는 갈수록 경계가 모호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 운동은 가장 투쟁의 골이 가장 깊다고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다룬 영화야 말로 가장 독립영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역사

영국의 경우, 탄광노동자들이 1984년에서 85년에 이르는 파업기간동안 영상집단을 직접 꾸려서 많은 영화와 다큐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극영화의 형식을 가진 노동영상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파업전야”가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각종 미디어센터나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영상팀을 직접 만들어 촬영을 하거나, 노동자에게 직접 미디어 교육을 실시하여 좀 더 실제적인 노동영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미에서는 1999년 시에틀 WTO 시위 모습을 담은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이 다큐는 100여명의 미디어 활동가들이 시위 기간 동안 시애틀 전역에서 시위모습을 담아온 것을 Independent Media Center에서 취합하여 한 작품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많은 미디어센터들의 활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2001년 대우노조영상집단이라던가, 노동뉴스제작단, 그리고 미디액트 등 많은 노동자단체나 독립영상단체에서 장기간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활동의 결과물로는 지금도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이 직접 촬영한 <우리는 KTX 승무원입니다>과 2003년에 노뉴단에서 제작된 <이중의 적>등이 있다.

 

3. 특징

현재의 시스템이 얼마나 인간다운 삶과 충돌되는가, 그 시스템에 의해 노동자들이 어떻게 파괴당하고 있고, 이러한 파괴 과정을 어떻게 투쟁의 과정으로 전환시켜내는 가를 드러내는 노동 영화의 핵심 역할을 환기하고자” 이번 영화의 슬로건을 ‘노동영화, 자본에 경고하다’로 정했다고 전했다. 앞의 내용은 제9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주최 측의 인터뷰 내용이다. 노동영화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그 독립의 주체는 노동자라는 명제가 확실하다.

 

영화는 목적이 뚜렷하다. [중략] 그동안 파묻어놨던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듯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말을 꺼낸다. 이제 영화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드러난다. 감독 역시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는 작업은 힘겨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노동단체에서 만들어진 영화들(뉴스클립과 다큐멘터리 포함)은 주류언론에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건을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관객들, 혹은 대중에게 사건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또 다른 대안들과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대우차노조파업의 경우도 그러하다. 주류언론에서 보도되지 않았던 과잉진압과 투쟁은 영상패가 노동자의 눈으로 담아낸 영상들로 인해 대중들에게 폭로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언론에서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KTX 여승무원 정리해고 사태 또한 여승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촬영을 하고 다큐로 제작하고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과 대중들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노동영화로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은 특수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영화 제작과정이 함축하는 현실과 작가와 관객의 긴장관계가 지닌 직관적 혹은 저널리스트적인 재현의 특수성이 지니는 위력이다.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나눌 때 특히 창작자의 의도도 다시금 경계의 단서를 준다. 특히 노동영화는 그 목적이 가장 뚜렷하다. 하지만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괴롭다. 빗방울 전주곡은 노동영화의 강하고 거친 면을 잠시 거슬러 조금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노동영화의 미래

최근 많은 노동자 인권단체나 미디어교육센터에서는 영상전문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노동자들에게 직접 영상교육을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직접 자신들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언론사의 왜곡된 편파적인 시선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노동자들의 눈으로, 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대중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UCC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이러한 노동영화를 파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쉽게 많은 이들에게 노동의 현장을 전할 수 있는 만큼, 제작자들은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빗방울전주곡’ 속으로

 

1. 극영화로써의 장점?

-극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해고 노동자의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정면에서 보여주는 작품

-한편 정리해고 노동자나 해직통고서를 받은 노동자를 다룬 <빗방울 전주곡>(최헌규), <빵과 우유>(원신연) 등 소외된 이들을 조용히 끌어안는 사회드라마들도 눈에 띈다.

 

‘보기 드물다’, ‘사회’라는 수식어로 미뤄보아 빗방울전주곡을 단순 극영화라고 국한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화는 사건으로부터 일 년 후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의 충격적인 사건현장을 넘어 그 여파가 얼마나 계속 한 가족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여기에는 몇 가지 픽션이 첨가되어 있다. 부부의 첫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와 또한 물놀이를 가리라는 결말로 막연히 풍겨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그렇다.

 

충격적인 동영상을 보며 도대체 이런 일이 있었다니! 깜짝 놀라며 분노하게 한다. 더 나아가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 혹은 가족들, 내 자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2. 빗방울전주곡이란? (상드의 일기를 통해)

조르쥬 상드는 저서 ‘나의 생애’에 이렇게 적고 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쇼팽)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도착 하였을 땐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앉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무겁고 얼음장 같은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자신의 가슴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중략]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 속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바뀌어진 빗방울이었던 것이다.

다시 곡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곡은 그저 무심하게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문득 ‘아… 비가 오네’ 하는 느낌. 왼손은 빗방울을 묘사한다지만, 오른손의 멜로디는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특별히 무겁지 않은 상념들. 가끔 가다 그 상념은 왼손의 빗방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오른손의 (13초, 혹은 1분 25초 부분) 음들의 덩어리로 마무리 되고 다시 시작한다.

 

편안했던 상념이 변하기 시작한다. 1분 40초부터 3분 19초까지 똑똑거리며 계속되는 리듬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의 이미지를 주었다면, 3분 19초부터는 환상 속의 공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울먹거리는 연약한 심장이 느껴진다. 감정적 에너지가 고음에서 더 밀도 있게 호소한다. 연약한 감성이 폭발할 것 같다. 작곡가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치열하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불현듯 4분 17, 18초 부분에선 순간적으로 평온한 현실로 돌아온다. (이 모든 묘사는 필자가 연주할 때 느끼는 상태이므로, 개인적 느낌의 묘사로만 받아주시길…).’

 

배경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른다. 이사의 풍경이 무심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쁜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쇼윈도의 옷을 보고도 발걸음을 돌리는 모녀. 학원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을 부럽게 보는 딸. 택시 노조 시위에 참여하자고 권유 받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은 여자. 하지만 봇물처럼 막상 비가 쏟아지면서 과거와 조우하는 감성적인 추억들(부부의 첫 만남)이 되새겨진다. 제대 후 막연했던 남자와 일당 3만원에 엑스트라로 전전하던 여자에게 쏟아지는 비처럼 막막하고 구질구질한 게 없겠지만, 복권을 사려다 만난 헤드라이트 불빛이나 흐트러진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머리끈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일 년 후, 삶 속에서는 여전히 궂은비가 오지만 그들에겐 추억이 힘이 되고, 딸 혜안이의 우산이 되고자 묵묵히 비를 견뎌내는 것이다.

 

3. 영화 속 살펴보기 (세부 줄거리에 대한 단상들)

너를 보면 즐거웠고

그랬다가

너를 보면

내가 보여 갑갑했다가

이제는 너를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우리 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글이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혹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우리 지지치 말고 계속 이 작업을 하자! 라고 다짐 하는 듯한 여운이 든다.

플롯은 꽤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우자동차가정아파트에서 이사 나오는 장면이 시작이다. 담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 지하 월세 집으로 이사 오게 된다.

 

대우자동차 시위의 후유증으로 등에 파스를 도배하고 사는 남자는 택시 운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택시연맹소속의 집회로 일 년 만에 또다시 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제 그는 섣불리 예전처럼 덤비질 못한다.

 

남자는 시위가 나가지 않고 혼자 골목에서 우유팩을 찬다. 잠시 대우자동차 노조 동료들과 여럿이서 족구를 하던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넘어져 버리는 현실. 그를 바라보는 딸이 있다. 그는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앞 뒤 젤 것도 없이 등록시켜준다.

 

‘너네아빠는 돈도 없고 힘도 없다’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남자, ‘엑스트라 배우였으니까 너의 아빠와 결혼했지’ 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여자. 그리고 이층 집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설거지를 하며 눈치를 보았던 혜안이. 이쯤 되면 이들은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눈 돌리면 바로 옆에 있는 이웃들이다.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아서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리는 바로 우리들을 보고 부디 분노를 서슴지 않길.

 

 

<각주 부분은 붙여넣기 하기가 까다로운 관계로^^;생략하겠습니다. 목요일 날 발제문에서 모두 확인하실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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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의 리뷰를 보고 떠오르는 ?

영상이론과 김현선

 

하나의 전제

나는 전 시간에 <빗방울 전주곡>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본 내용에 대한 곡해의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의 전제

나는 <<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그러므로 리뷰에 쓰여진 내용에 관한 질문은 가능하다.

 

본론.

헤어나올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있는 부모가 꾸는 꿈은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자신의 딸만은 그들의 삶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꿈은 자신들에게 처해진 현실은 고스란히 남긴 채

이미 누군가가 여유롭게 누리고 있을 또 다른 현실로 자신의 딸을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꿈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한들 문제적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현재 부모의 현실을 이어받는 것이 그들의 피를 가진 딸이 아닐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딸은 여전히 그 현실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대안은 근본을 찾아나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지니는 허망함과 그 이후의 난감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곳'은 저 멀리에 있는 피안(彼岸)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차안(此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혹은 그들의 미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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