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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 발제문

 

<단편영화산책> 발제문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를 중심으로


방송영상과 20041235 도유리


1. 들어가며


1) 이주노동의 역사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이하 <계속된다>)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듯, 1980년대 이전에 ‘이주 노동자’ 라는 단어는 대부분 해외로 나가 일을 하는 한국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동남아시아인들이 주류를 이룬 해외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1) 그렇다면 왜 하필 1980년대 후반이었을까? 영화 <계속된다> 와 <복수의 길>,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편협함과 차별적 민족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이주노동자가 유입되기 시작한 80년대 말 한국은 사회전반의 민주화 진전과 함께 노동시장에서도 대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자 임금의 급격한 상승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대공장(대기업)과 중소공장(영세기업) 간 노동조건의 격차확대를 초래했고, 여기에 내국인들의 육체노동에 대한 인식변화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영세 제조업, 건설업, 광업 등 이른바 3D로 분류되는 업종에 대한 취업기피 현상으로 이어졌다. 국내 중소영세업체의 인력난이 점점 가속화되는 가운데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던 중국, 동남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한국의 높은 임금과 환율차에 기대를 건 한국행 노동이주에 대한 선호가 날로 높아져, 한국으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의 수가 급증하였다.2)


  위 글에서 볼 수 있듯, 외국인 노동자들의 존재는 - <계속된다>에서 한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밝혔듯이 - 한국의 급격한 산업발전과 한국 노동자들의 3D 기피현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사회는 이들을 고마운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에 관해 생각해보기 위해 우선 한국 정부의 ‘산업 연수생 제도’ 와 ‘고용 허가제’ 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2) 산업 연수생 제도 / 고용 허가제


 ① 산업기술연수생 제도


저개발국 외국인에게 기업연수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 개발도상국과 경제협력을 도모하고 기업연수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이다. 1993년 11월 도입되어 국내 3D 산업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하는 창구역할을 해왔다.3)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정부 역시 산업연수생 제도가 국내 3D 산업의 인력해소에 도움이 됨을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더불어 ‘선진 기술을 개발도상국에 이전한다’ 라는 입장을 취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노동자’ 가 아닌 ‘연수생’ 으로 구분 짓는 근거를 마련했다. 실제로 산업 연수생 제도의 가장 큰 폐해는, 이 제도가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이 노동 3권, 최저임금 보장 등의 권리를 전혀 누릴 수 없었다는 부분에 있다.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고강도의 노동, 산업재해 불인정, 강제노동, 폭행, 임금체불 등의 부당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사업장을 이탈해 불법 체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003년부터 고용허가제와 병행 실시되던 이 제도는, 민주노총 등을 비롯한 노동단체의 꾸준한 문제제기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결국 2007년 1월에 완전 폐지되었다.


② 고용 허가제


산업 연수생 제도의 폐지로 새로이 도입된 고용 허가제는, 2003년 8월 16일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 · 공포되면서 도입되었다. 이 법에 따라 2003년 11월부터 약 9개월간의 시범 실시를 거쳐, 2004년 8월 17일부터 정식 시행되고 있다. 고용허가제의 입법은 외국인력제도 개선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고, 국가 간 쌍무협정을 맺어 인력송출업무를 민간이익단체가 아니라 정부기관이 맡도록 하는 등 제도운영의 공공성 확보를 천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함으로써 산업연수제 하에서 발생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와 노동착취를 방지하고자 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시행 2년이 지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허가제는 사업자 이동의 제한이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이주노동자의 인권개선 등 한국의 이주노동정책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의 온상으로 비난받아 온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4) 등 연수추천단체를 이주노동자 모집·선발에서 사후관리에 이르는 고용허가제 운영전반에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이주노동자인권단체를 비롯한 노동·시민단체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5)


  이처럼 고용허가제는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인 한국정부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향상과 노동권 인정을 위한 첫 걸음을 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각종 이권단체의 로비와 정부부처의 이해관계로 인한 파행적 운영 -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가 입국 후 받을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교육과정도 이익집단에게 맡길 계획이며 심지어 고충처리, 재해사고 지원 등 이주노동자의 인권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마저 이권단체에 위탁하겠다고 하고 있다. - 은 산업연수생제도로 회귀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낳고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연 이런 제도적인 개선만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바꿀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 관련 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 이쯤에서의 당연한 의문 -

왜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합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① 국내 노동자와의 차별화 문제


  앞서 살펴봤듯이, 한국의 사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임금이 싸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국내 진출로 한국 근로자들의 임금이 동결되고, 저임금을 견디지 못한 한국 근로자들이 스스로 실업자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 3D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부분에 관해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으며 한국 근로자들 중에서도 3D 업종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수준에 비해 비싼 임금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누가 이런 문제를 제게 묻는다면 대답해줄 수 있어요. ‘자유롭게 들어

오게 해라’ 그럼 브로커 문제가 없어지는 거죠. 그리고 한국노동자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일자리가 없으면 돌아가

는 건 그들이에요. 이주노동자가 계속 있어서 증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장기 체류자 증가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브로커한테 준 돈

을 갚으려면 3,4년이 걸리고, 다시 가족에게 줄 돈을 벌어가려면 3,4

년이 더 걸려요. 장기 체류자가 오히려 더 양산되는 거죠. 입국을 제한

하는 게 오히려 장기 체류자를 양산하는 거에요. 이주노동자가 자리를

덤핑 친다고, 한국노동자 자리를 잠식한다고 그러는데, 한국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에게 똑같이 월급을 줘 봐요. 누가 이주노동자를 채용하겠

어요? 같은 조건을 만들어주면 되죠. 차별 없애라 그러는데. 브로커

문제만 없애면 되죠. 자유롭게 들어오게 하면 되는 거네. 그 차별 조건

만 없애면 다른 부차적인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거죠.1)

 

② 세금, 복지혜택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 고용이 전면 합법화 된다면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한다. 또 한국 정부는 그들에게 의료보험, 고용보험과 같은 제도적 혜택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한국 정부와 외국인 노동자 단체 측이 일정한 협상과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의 결론을 내린다면 이러한 제도 마련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법무부는 계속해서 전면 합법화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외국인 노동자측은 부분 합법화가 아닌 전면 합법화를 주장하면서 외국인 노동자 고용 합법화 문제는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한국 정부나 외국인 노동자 단체 측, 둘 중 어느 하나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제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 역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③ 민족주의의 문제


  스스로를 ‘단일민족’ 이라 여기며 한국 사회 안에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인들, 그리고 그 편협함에서 유일하게 제외되는 것이 백인이라는 점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든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남아시아 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고정된 시각, 그것이 먼저 바뀌지 않는 이상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라는 편견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 문제와 더불어 코시안들의 정체성 문제, (거의 매매혼에 가까운) 결혼을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긴 힘들 것이다. 


4) 최근의 협상 물결


  한국 정부는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의 ‘자진귀국 프로그램 등 일시적 귀국 조치를 통한 합법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6) 하지만 이 역시 부분 합법화일 뿐이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 측이 이 방안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분위기다. 

  실제로 우리가 <계속된다>에서 보았듯 정부의 협상제안이나 합법화 방안 마련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점, 그동안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는 것이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여 일시 귀국 후 재입국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 부분 합법화는 결국 외국인 노동자들을 선별적으로 ‘걸러내는’ 것이므로 또 다른 차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정부의 협상방안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성공회 농성단의 해산을 다룬 <계속된다>의 에피소드가 말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런 문제인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과연 이번에는 변화할지 귀추가 주목되는 것도 그래서다.


2.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


1) 인물선정 방식


  이 다큐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한 두 명의 특정한 ‘주인공’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심이 되는 것은 ‘명동 농성단’ 이라는 집단이며, 집행부를 맡고 있는 인물들 - 투쟁국장 비두, 명동 농성단 대표 샤말과 같은 - 몇몇이 잠시 부각되긴 하지만 그마저도 곧 외국인 노동자라는 집단, 혹은 명동 농성단이라는 집단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이와 같은 인물선정 방식은 이 작품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특별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게 되는 휴먼다큐로서의 형식을 일부러 배제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안타까운 처지나 가난한 생활 등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투쟁하는 모습을 배치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물질적인 도움이나 정신적인 동정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여 힘을 주는 사람들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7)

2) 음악 및 이미지


  크게 두 부분 - 방글라데시로 돌아간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 / 한국에서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투쟁 - 으로 나눌 수 있는 <계속된다> 는, 특히 초반부에서는 이미지를, 후반부에서는 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연을 날리는 외국인 노동자 출신 방글라데시인들의 모습은 자유롭게 날고 싶지만 ‘무언가’에 묶여있는 탓에 그럴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 같아 보이고, 방글라데시 안 어딘가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이미지는 ‘중요한 시기에 타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내 나라도 내 나라가 아닌 것 같다’는 한 노동자의 말과 겹쳐져 더욱 스산하게 느껴진다.

  또한 힘없이 누운 채 그 날 배운 운동가요를 부르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갑작스러운 단속에 의해 무자비하게 연행되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 위로 흐르는 음악은 우리의 분노를 자극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이미지와 음악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은 꽤나 효과적이다.


3) 내레이션


  감독은, 작품의 시작을 본인의 아버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함과 함께 철저히 본인의 입장에서 내레이션을 진행했다. 그것은 감독 자신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연대의 필요성’ 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기도 했다. 생각해보자. 만약 <계속된다> 의 대상이 된 인물 중 한명이 직접 내레이션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것을 보는 ‘우리’는 정말 그들과 같은 ‘우리’ 가 될 수 있었을까?


<계속된다> 는 주체의 문제였어요. 이주노동자의 정체성 문제. 한국사회에서 이주노동자가 운동의 역사 안에서 주체로 서기 힘들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들이 주체로 섰다. ‘난 이주노동자다!’ 라고 말하는 주체. 이걸 얘기한 거였어요. 이제부터는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더 크게 보면 노동자는 연대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을 해보고 싶어요.8)


3. 나오며


  이 작품이 만들어진 후, ‘명동 농성단’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디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그들은 아직도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납득할만한 처우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은 미디액트 등의 미디어교육을 통해 발언의 도구를 얻어가고 있고, 이주노동자를 위한 인터넷 방송을 개설하는 등 스스로를 돕기 위한 활동도 시작하고 있다. 한국의 법, 혹은 그들의 처지나 지위에 상관없이 이제 그들이 엄연한 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1) 1987년 봄 동아일보에 ‘서울 강남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 가정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을 해외 이주 노동자에 대한 첫 번째 공식기록으로 보고 있다.


2) 「한국 이주 노동정책의 현황과 전망 」,최현모(한국 이주 노동자 인권연대 연대협력국장), 『이주연대심포지움자료집』, 2006년


3) 네이버 백과사전


4) 산업연수생 제도 하에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비롯한 수협, 농협, 건설협 등의 민간 이익단체들이 인력도입 및 관리를 담당함에 따라 송출비리와 사후관리를 빙자한 횡포가 만연했던 바 있다.


5) 「한국 이주 노동정책의 현황과 전망 」, 최현모(한국 이주 노동자 인권연대 연대협력국장), 『이주연대심포지움자료집』, 2006년


6) 법무부는 5월까지 21만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 가운데 우리정부와 인력교류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국가 노동자에 한해 ‘자진귀국 프로그램 등 일시적 귀국조치를 통한 합법화 방안’ 등의 내용이 포함된 대책을 마련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주목되고 있다. (민주노동 참세상, 2007년 3월 30일)


7)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에서 출발해, 이주노동운동의 주체를 세우는 작업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하고 싶었다”. 주현숙 감독 인터뷰 (2004년, 인터넷 신문 프로메테우스)


8) 주현숙 감독 인터뷰 (2004년, 인터넷 신문 프로메테우스)


 

 

 

 

 

발제문 업데이트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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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성은 인정되어야하지만, 그들의 어긋난 욕망까지도 받아들여져선 안됀다.

장애인의 성은 인정되어야하지만, 그들의 어긋난 욕망까지도 받아들여져선 안됀다.

<핑크 팰리스>

김현지

“한번 태어나서 죽으면 언제 다시 태어날지 모르는데, 숫총각으로 죽으면 진짜 억울하다. 억울해!”

핑크 팰리스는 장애인의 성에 대한 얘기이다. 대체로 전신, 혹은 하반신이 마비된 척수 장애인, 언어장애와 경직이 심한 뇌성마비 장애인, 그리고 시각, 청각, 소아마비 등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이 나와 성에 대한 경험과 욕구, 다양한 생각들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주인공 “한번 태어나서 죽으면 언제 다시 태어날지 모르는데, 숫총각으로 죽으면 진짜 억울하다. 억울해!”라는 말을 한 48세의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최동수 아저씨의 얘기가 주를 이룬다. 최동수씨의 평생 소원은 ‘섹스 한 번 해보는 것’ 몇 년 전 청량리 성매매업소를 찾아 한 번 시도했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한다. 그리고 감독은 이런 최동수씨의 욕구를 해소해주기 위해 (소원 한번 풀어주기 위해) 성매매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번째 시도를 돕는다. 감독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잘, 잘못을 떠나서 그들이 느끼는 성에 대해 있는 그대로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욕구가 인정 되어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성욕을 갖고 있는 인간이다.” 결국 우리 모두 동등하게 욕구가 인정 되어져야하고, 받아들여 져야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감독이 이 영화를 감상할 때 제시한 금기를 어겼다. 잘, 잘못을 떠나서라고 감독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바 있으나 왜곡된 성에 대한 시각과 여성의 상품화 등등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함부로 말 할 수 없다. 웃기지만 나는 사지가 멀쩡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결핍이 되면 그것 밖에 안보이게 되는데 하다못해 장애인 남성이 갖는 성욕의 거세됨이 그것 밖에 안보 이는 게 당연 한 것 아닌가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독이 정말 말하고 싶은 부분은 장애인들의 성이 인정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간간히 장애인 부부, 여성, 다양한 층의 남성들이 말하는 성에 대한 얘기는 훈훈하기도 하고, 애틋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최동수씨가 말하는 성에 대해 듣고, 그것을 받아주고 카메라에 담아내는 감독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그 곳에서 또 하나의 차별거리, 또 하나의 타자를 보게 된 기분이여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정상인들은 맘껏 즐기면서 자신은 그렇게 못하게 한다고 성매매 금지법에 대한 분개심을 표출했다. 그런 그의 시각에서 사회적 약자 혹은 희생물이 되는 여성을 바라보며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만들려고 했던 의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최동수씨가 한 성매매 소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끝은 그저 다른 약자를 만들어내는 부당한 욕구 분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핑크 팰리스에서 장애인들만의 성에 대한 잔잔한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독의 의사가 전달되었을 것인데 내게 이런 혐오감을 자아내게까지 정직하게? 끝까지 최동수씨 의 얘기를 담아낸 감독의 의사가 궁금하다. 이럴 수밖에 없는 그를 동정하라는 건가. 핑크팰리 스의 끝은 내게 비겁한 자멸로 여겨졌고, 굉장한 찝찝함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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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속의 약자 이주노동자

<약자 속의 약자 이주노동자들>

김현지

우리 집에는 작은 차별이 있다. 맏이로 태어난 첫째 딸, 여성이라는 이유로 막내아들인 남동생이 받는 대우와는 다른 대우를 어렸을 때부터 받아왔다. 다른 내 성격적 결함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제외하고서라도. 같은 행동도 동생이 했을 때는 받아들여지지만 내가 하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숱한 상황 속에서 내가 원치도 않는 성으로 태어나 그렇게 대우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후 그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 돌아오는 말은 “ 네 성격이 이상해서 그래 ” 단 몇 마디이다. 처음에는 그 말을 사실로만 받아들였다. ‘그래 내가 좀 이상하니까 이렇게 나를 대하는 건당연한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넘기는 것은 쉬웠지만, 계속 되어 쌓여가는 억울함과 불만에 억눌렸던 나의 상한 감정이 비어져 나왔다. 내가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전제로 그렇다면, 그들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이상한 나의 목소리를 한번 내보기 했다.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었다. 부당하다 생각되면 귀찮은 아이 취급받기를 각오하고 조목조목 내 논리를 펴가며 따져가기 시작했다. 이 이상한 환경 속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나를 믿는 나뿐 이었으므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보고 떠오른 내 과거의 잔상이다.

차별 속의 차별, 계속 되는 악행, 말도 안돼는 상황. 힘이 힘을 누르고, 악습이 악습을 낳는 상황들. 숨 막히는 상황들 속에서 이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한다. 자유를 노래한다. 드러나는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내용을 담은 <상계동 올림픽>에서 가난하고 집 없는 자가 갖게 되는 설움. <미친 시간>에서 베트남 전에 한국 군인을 향한 증오비를 세울 정도로 그들의 잔인함을 경멸하는 베트남 사람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설움.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커다란 차별이란 고리로 연결 되어 있다. 힘 있는 자의 왜곡된 시각이 만들어 낸 악행. 그 곳에는 싸울수록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하지만 이 억울한 현실에 온 몸을 바쳐 항의하는 약자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계란이 다 터져 나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해 부당함에 항의 하겠다는 생의 의지.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현실이 마음 아플 뿐이다. 받아들이기 싫지만 말도 안돼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 속에서 힘(그것이 돈의 부재이든, 권력의 부재이든지)이 없다는 이유로 가축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대우를 받기 위해 죽기까지 싸운다. 사람으로 태어나 갖게 되는 조건 속에서 사람이상의 대우를 받는 이들과 사람 이하의 취급 받는 이들. 이들 속에 나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EBS에서 특별한 성격의 애니매이션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제목은 <별별 이야기>였는 데, 인권에 대한 문제를 주제로 다룬 영상들이었다. 이것을 보며 내가 현실 속에서 갖고 있는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작가로 살아 갈 때 갖게 될 위치를 생각했다. 작가를 할 때 좋은 점은 생각의 소스가 작업으로 잘 풀어져 나올 때 그자체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정에서 맏딸로 태어나 겪은 차별로 부터 다음 차별의 연결고리를 더듬어가며 하나의 다큐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순환 되는 차별의 고리에 대해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너도 말 할 것 없다."였다. 내가 속한 가정안에서의 차별, 한국 안에서의 차별, 그렇지만 그들 안에서도 있을 차별. 누구를 탓할 수 있는가. 차별은 차별을 낳는다. 나 역시 내가 차별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인식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받는 차별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나의 이기심을 본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받는 차별에 대한 울분이 터져 나오는 기록물을 보고 분개할 수 있지만, 나는 완전히 그들의 입장이 될 수는 없다. 그들 속에서 그들이 되지 않는 한 내가 느끼는 감정은 피상적으로 잠시 분개하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의 한 측면을 바로 이해하고 나의 작업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인식하는 정도가 아직까지의 내 위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주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잘 못된 태도를 비난하기 이전에 차별이 되 물림 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 더욱 좋은 해결책이 마련되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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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별 이야기의 줄거리>

인권애니메이션 프로젝트(이하 인권애니메이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제작한 옴니버스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인권(차별)을 주제로 애니메이션 감독 여섯 명이 참여하였다. 이 영화는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차별의식을 지적하고 차별을 차이와 구별하는 인권감수성 향상을 위해서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제작되었다. 장애인의 현실을 다룬 <낮잠>(유진희 감독), 사회적 소수자 차별이야기 <동물농장>(권오성 감독), 사회에 만연한 고정된 남녀 성역할을 지적한 <그 여자네 집>(5인 프로젝트팀), 외모차별을 다룬 <육다골대녀(肉多骨大女)>(이애림 감독), 이주노동자를 다룬 <자전거 여행>(이성강 감독), 입시위주의 교육문제를 꼬집은 <사람이 되어라>(박재동 감독)로 이루어진 총 여섯 편의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 그 외 <별별 이야기> 참고기사

삐딱한 시선에 대한 6명의 충고, <별별 이야기>

[씨네21 2005-12-23 13:49]

<낮잠>의 유진희 감독

DVD 타이틀의 매력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훌륭하게 복원된 고전영화들과의 만남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외면을 받는 여러 단편 작품들을 모은 것도 빠질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제작한 <별별 이야기>는 우리네 곁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구성원이지만 무관심과 냉대를 받는 소수자의 이야기다. DVD에 수록된 6편의 단편애니메이션은 모두 인권차별을 주제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장애우에 대한 편견과 따가운 시선, 사회적 무관심을 밀도있게 그린 <낮잠>, 양떼들 사이에서 염소가 겪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 <동물농장>, 아이를 가진 직장 여성의 일과를 통해 남녀 성 차별에 접근한 <그 여자네 집>, 큰 몸집을 가지고 태어나 고통받는 여성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가하는 <육다골대녀>, 주인없는 자전거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룬 <자전거 여행>, 고릴라를 의인화해 입시 중심의 교육 환경을 비판한 <사람이 되어라>이다.

이들 작품들은 인권차별이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심각하기만 한 건 아니다. 적절한 유머와 재미를 갖추고 있어 작품에 대한 부담감을 일부분 해소하고 있다. 부록의 하나로 제공되는 인터뷰를 통해 연출자들이 들려주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인권차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스토리보드는 여섯편 가운데 <동물농장> <그 여자네 집> 두편에서만 제공한다. 화질과 음향은 기대 이상으로 좋은 편이다.

(글)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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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밖에서> 리뷰-한국독립 애니메이션

골목 밖에서

유진희/ 1996/ 4분

 

박선영

 

 나는 빵을 좋아한다. 팥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부드러운 빵과 달콤한 팥 앙금에 귀여운 붕어 모양까지 갖춘 붕어빵을 좋아한다. 4개에 천 원 하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동네에 따라 10개에 천 원 하는 곳도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가격이란 말인가. 맛도 없으면서 하나에 천 원 이상을 받는 빵들보다 직접 보는 앞에서 만들어 주는 붕어빵은 따뜻하고 바삭한 것을 바로 먹을 수 있고 믿음이 간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그래서 붕어빵 매니아인 나는 <골목 밖에서>라는 애니메이션이 아무 이유 없이 좋았다. 화려하지도 않고, 대사도 없고, 4분이라는 짧은 애니메이션이라는 것, 이렇게 특별할 건 없지만 잔잔한 감동이 있었다.

 1평 남짓한 천막 아래 공간에서 하루 종일 붕어빵을 굽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말없이 주전자에 담긴 밀가루 반죽을 붕어 모양 불판에 따르고 팥을 넣는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불판을 돌려 또 다시 반죽을 붓는다. 그렇게 할머니의 하루는 지나간다. 그러면 또 다시 똑같은 하루가 돌아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자그마한 가게를 가진 뒤부터 매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붕어빵은 단순한 백 원짜리 빵이 아닌 그녀의 모든 것이 담긴,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리고 그 소중한 붕어빵을 배고픔에 지친 한 소녀가 조용히 삼킨다. 그 소녀에게 역시 그것은 단순한 백 원짜리 빵이 아닌, 허기진 배와 마음을 채워주는, 현재를 버티기 위해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절실함이었다. 그 모습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본다. 그 사이에는 외로움과 따뜻함이 흘렀고,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고 있었다, 말없이.

 나는 이상하게 붕어빵 굽는 모습을 보면 애잔한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 동네 젊은 총각이건, 경희대 앞 50대 부부이건, 주전자 드는 것이 벅차 보이는 밑 동네 할머니이건 말이다. 그 중에서도 배가 부르더라도 꼭 하나라도 사 먹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석관 우체국 앞 붕어빵 아주머니였다. 그 곳의 붕어빵은 10개에 천 원이다. 왜소하고 어딘가 모자란 듯해 보이는 아주머니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한 마리 한 마리 정성을 들여 꿋꿋하게 붕어빵을 찍어냈다. 백 원이란 가치가 무색하게 말이다. 아주머니는 백 원을 내고 한 마리를 사 먹는 나에게 싫은 표정도 한 번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너무나 미안해지면서, 다음번에는 한 마리를 사먹어도 이백 원을 내야지 다짐하곤 한다.

 아주머니의 결과물들은 대부분이 시커멓게 타거나 앙상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더욱 사랑스럽다. 때가 잔뜩 낀 손으로 방긋 웃으며 붕어빵을 전해주는 아주머니의 모습. 나는 그 순간, 백 원을 주고 붕어빵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머니의 마음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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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온갖 내러티브로 가득한 영화만 보다가, 이렇게 이미지들을 적극 활용한 영화를 보게 된 건 일종의 행운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만큼.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화려한 수상경력들이 괜한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뒤따랐다. 정신없이 산만한 이 영화를, 이미지의 과잉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DVD의 한 트랙으로 담겨있는, 어느 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나온 질문들에 답변해주는 윤성호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의 성실함이랄지 가치관이랄지, 그런 것들이 느껴져서 이 영화가 더욱 좋아졌다.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이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에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주고 또 그러한 행위로 인해 다시 상처받는 평범한 한 인간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제목의 그런 의미를 읽고 나니, 재작년 레알판타에서던가, 시각장애를 가진 여자와 청각장애를 가진 남자가 서로 사랑하다가 결국 헤어지자 그들의 장애가 순식간에 없어지더라는 내용을 가진 어떤 단편영화를 봤을 때처럼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길이가 짧다는 숙명적 한계를 안고 있는 단편영화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내러티브를 유지하는 동시에 하고자 하는 말을 담아내는 것일터. 어려운 길을 뚫고 지나가려는 노력도 좋지만, 때로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내기 위해 주변에 늘어서 있는 많은 것들을 적극 이용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통찰력과 관찰력도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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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 주홍글자부터 새기고 보는 이 나라의 편협함

외국인에게 주홍글자부터 새기고 보는 이 나라의 편협함,

버지니아 총격사건에 부쳐

-<계속된다>를 보고

  강 지 혜

 

우선 놀란 점은 네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네팔이라는 나라에 대해 (근처 인도까지만 여행해보았지만) 그들이 이 먼 한국까지 와서 노동자로 일한다는 점에 놀랐다.

 

더듬더듬 한국어를 배워가는 속도보다 참담한 현실을 더 빨리 깨우치게 되는 그들.

 

작년 말에 안산에서 토막살인시체 사건 있었다. 중국인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가자 모두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비슷하게 어제 밝혀진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 범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졌다는 사실도 생각해보자. (교민과 노동자라는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교민 사회가 떠들썩하다고 한다. 그 뉴스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제발 중국인이 범인이길 바랬을 것이고, 한국인이라는 보도에 경악했을 것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너무나 공격적이다. 언론의 태도도 그렇다. 미국은 한국인이라는 점보다는 총기문제에 초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언론은 사건이 일어나면 외국인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불법체류 라는 단어를 부각한다. 가깝게 여수화재사건만 해도 타죽은 외국인에 대한 논의보다는 침착하게 문을 딴 여간수에 대한 놀라움이 더 부각되었던 것 같다. 어이가 없었다.

 

다큐는 보며 느끼는 점은 우리는 이미 그들 자체로 범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기피하고 있고, 또한 엉성한 제도의 틀로 그들을 범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불법체류 라는 이름하에) 한국인들도 현재 미국에서 수십만 명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점은 우리나라는 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마구잡이식 단속을 한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자살 혹은 투쟁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자국도 아닌 ‘타국’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그들이 눈물겹다.

 

우리는 단일, 백의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편협하게 다른 민족을 배척해왔다. 따지고 보면 현재는 같은 민족이라는 북한에 대해서도 사상이라는 이유로 총을 들이대고 있지 않은가. 가깝게는 조선족들을 상대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기행각도 문제가 크다. 문제는 편협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 문제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언론의 역할도 큰 것 같다. 신문보도 한 줄이라도 tv프로그램 하나라도 어떤 의도 없이 만들어진다면 우리들은 조금 열린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딱히 질문보다는 요즘 벌어지는 사건들로 인해 이런 저런 생각만 하게 하네요.

뭐 이런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나 다같이 나눠봄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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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박선영


사람이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사악할 수 있을까?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들은 왜 목숨을 버려야만 했을까?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

공장에서, 공장 화장실에서 목 매달아 자살

강제추방 당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뛰어 내려 실종

쇼크사로 사망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일까?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들. 답은 없었다. 해결책은 없었다. 정답은 있지만 정답이 될 수 없었고, 통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이다. 법이 있지만 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 통하지 않는 곳. 힘으로 우기기만 존재하는 그곳, 대한민국, 우리나라.

 


야, 나 권리 있어.

나 권리 많아.

나 권리 말할 수 있어.

알아? 개새끼들아?

그들이 가장 먼저 배운 말, 부끄러운 말, 천박한 대한민국의 얼굴, 욕. 갓난 아기들이 기역, 니은으로 한글을 알아갈 때, 그들은 개새끼, 씨발놈을 시작으로 한글을 알아갔다.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나쁜 사장님들. 사장님, 나빠요.

 


때리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잡고 서 있던 젊은 청년은 외친다. 그들이 참혹하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면서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제대로 말려 보지도 못한 채, 때리지 마세요 만을 외칠 뿐이다. 그들의 소리를 담아야 했기에 잡고 있던 카메라를 놓을 수 없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그 현실을 알면서도 이해하면서도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기에 앞서 같은 사람으로서 이주노동자들의 편이 되어 방망이를 휘두르는 대한민국 전경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나쁜 전경님들. 전경님들, 나빠요.

 


이주노동자들은 불법체류자라고 타국인 이곳, 대한민국에서 탄압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본국에 돌아가서도 자기나라 욕보인 놈이라고 탄압을 받는다고 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은 어디가서든 탄압 받는 거야, 탄압 받아야해 라며 스스로를 죄인 취급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인정하면 상처를 덜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맑았던 눈망울은 어느새 죄인의 눈처럼 어두워졌다.

 


이제는 돈 많이 벌 생각 없어요. 그냥 이 세상을 바꿔야 겠다는 생각뿐.

샤만은 네팔 사람이다. 그는 40만 이주노동자들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외모로 대표가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미남이다. 나는 그가 배우를 했어도 성공했을 거라 생각해본다. 그런 그가 머리를 삭발해가며 40만 이주노동자들의 강제추방을 막기 위해 투쟁한다. 샤만이 만약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나라에서 평범한 청년으로 평범하게 살았겠지. 아님 티벳 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찾은 한국에서 운동가가 되었다. 20년 간을 평화로운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왔을 그가 잘난 것 하나 없이 오만한, 번잡한 나라 한국에서 투쟁에 앞장서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동지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한국 민중가요를 우리네 젊은이들보다 더 잘 알고, 더 잘 부르게 된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의 힘찬 목소리에서, 굳은 결의에서 슬픔이 밀려온다. 우리의 모습과 꼭 닮은 네팔인의 얼굴에서 서러움을 본다. 그들은 단지 한국말을 잘하지 못할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아예 말 자체를 잘 하지 못하는 것 마냥 여긴다. 그들을 생각 없는,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 취급을 한다. 다만 억울한 그들은, 멍청하지 않은 그들은 자신들 속 안에 가득차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수많은 생각들을 추스르고 추슬러 그들이 내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말로,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것들을 언어라는 것으로 서툴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멍청한 한국인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오히려 멍청한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들인 것이다.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식한 말만 내뱉는 바보들.

 


이주노동자들은 온 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몸따윈 닳아 없어져 버린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투쟁한다. 그들은 외친다. 온 몸 다해, 온 정신을 담아, 낼 수 있는 온 목소리를 다해.

그들의 목소리는 울리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울리지 못하고, 애꿎은 나의 마음만 울린다.

 


나는 이주노동자와 대한민국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술래를 자처하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 힘들게 술래를 치고 들어왔으면 됐지 다시 술래를 피해 술래가 있던 곳을 치고 다시 선 안으로 들어와야 한단다. 그래야 게임을 끝내주겠단다. 그들이 술래가 있던 곳을 다시 치고 와야 한다면 술래 역시 또 한번의 수고를 해야하므로 술래를 치고 도망오는 것으로 끝내면 될 것을. 이겨서 남는 것도 없으면서 꼭 그래야 한다는,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이렇게 귀찮은 놀이이건만, 돈 벌기 위해 어렵게 온 그들, 돈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국으로 갔다가 다시 오면 받아주겠다는 고약한 심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이 얻게 되는 이득은 무엇인가. 대인구 인천공항 이용세? 항공료? 대한민국의 심보를, 심술을 이해할 수 없다. 일개 국민인 나로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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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전주곡> 발제문

<단편영화산책>

 정지원  강지혜

 

<빗방울전주곡> 발제문

 

1. 들어가기 전

 

1. 독립영화와 노동영화

한국 독립영화의 활동현황을 그룹별로 분류하면,

첫째, [노동자뉴스제작단], [푸른영상], [서울영상집단] 등의 다큐멘터리 단체들이나 노동 단체의 영상패,

둘째, 독립영화의 대다수인 단편영화를 만드는 부류.

셋째, 극영화가 아닌 실험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그룹.

넷째, 독립애니메이션 그룹.

 

이들 독립영화는 1980년대 반민주 정권과의 대립과 절대적 생존권의 위협 속에서 충무로영화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항영화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그 배경에는 서울영화집단의 서구와 남미영화를 모델로 한 민중영화, 현장에 뿌리박은 노동농민영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현장주의영화 등의 수용이 있었다.

 

빗방울 전주곡은 첫째, 둘째 모두에 해당되는 것 같다. 우선 첫째에 해당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강한 투쟁의식에 더불어 극영화의 픽션이 잘 어우러져 있다. 1980년 이후, 대체로 독립영화는 갈수록 경계가 모호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 운동은 가장 투쟁의 골이 가장 깊다고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다룬 영화야 말로 가장 독립영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역사

영국의 경우, 탄광노동자들이 1984년에서 85년에 이르는 파업기간동안 영상집단을 직접 꾸려서 많은 영화와 다큐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극영화의 형식을 가진 노동영상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파업전야”가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각종 미디어센터나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영상팀을 직접 만들어 촬영을 하거나, 노동자에게 직접 미디어 교육을 실시하여 좀 더 실제적인 노동영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미에서는 1999년 시에틀 WTO 시위 모습을 담은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이 다큐는 100여명의 미디어 활동가들이 시위 기간 동안 시애틀 전역에서 시위모습을 담아온 것을 Independent Media Center에서 취합하여 한 작품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많은 미디어센터들의 활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2001년 대우노조영상집단이라던가, 노동뉴스제작단, 그리고 미디액트 등 많은 노동자단체나 독립영상단체에서 장기간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활동의 결과물로는 지금도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이 직접 촬영한 <우리는 KTX 승무원입니다>과 2003년에 노뉴단에서 제작된 <이중의 적>등이 있다.

 

3. 특징

현재의 시스템이 얼마나 인간다운 삶과 충돌되는가, 그 시스템에 의해 노동자들이 어떻게 파괴당하고 있고, 이러한 파괴 과정을 어떻게 투쟁의 과정으로 전환시켜내는 가를 드러내는 노동 영화의 핵심 역할을 환기하고자” 이번 영화의 슬로건을 ‘노동영화, 자본에 경고하다’로 정했다고 전했다. 앞의 내용은 제9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주최 측의 인터뷰 내용이다. 노동영화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그 독립의 주체는 노동자라는 명제가 확실하다.

 

영화는 목적이 뚜렷하다. [중략] 그동안 파묻어놨던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듯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말을 꺼낸다. 이제 영화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드러난다. 감독 역시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는 작업은 힘겨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노동단체에서 만들어진 영화들(뉴스클립과 다큐멘터리 포함)은 주류언론에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건을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관객들, 혹은 대중에게 사건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또 다른 대안들과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대우차노조파업의 경우도 그러하다. 주류언론에서 보도되지 않았던 과잉진압과 투쟁은 영상패가 노동자의 눈으로 담아낸 영상들로 인해 대중들에게 폭로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언론에서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KTX 여승무원 정리해고 사태 또한 여승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촬영을 하고 다큐로 제작하고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과 대중들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노동영화로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은 특수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영화 제작과정이 함축하는 현실과 작가와 관객의 긴장관계가 지닌 직관적 혹은 저널리스트적인 재현의 특수성이 지니는 위력이다.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나눌 때 특히 창작자의 의도도 다시금 경계의 단서를 준다. 특히 노동영화는 그 목적이 가장 뚜렷하다. 하지만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괴롭다. 빗방울 전주곡은 노동영화의 강하고 거친 면을 잠시 거슬러 조금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노동영화의 미래

최근 많은 노동자 인권단체나 미디어교육센터에서는 영상전문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노동자들에게 직접 영상교육을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직접 자신들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언론사의 왜곡된 편파적인 시선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노동자들의 눈으로, 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대중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UCC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이러한 노동영화를 파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쉽게 많은 이들에게 노동의 현장을 전할 수 있는 만큼, 제작자들은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빗방울전주곡’ 속으로

 

1. 극영화로써의 장점?

-극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해고 노동자의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정면에서 보여주는 작품

-한편 정리해고 노동자나 해직통고서를 받은 노동자를 다룬 <빗방울 전주곡>(최헌규), <빵과 우유>(원신연) 등 소외된 이들을 조용히 끌어안는 사회드라마들도 눈에 띈다.

 

‘보기 드물다’, ‘사회’라는 수식어로 미뤄보아 빗방울전주곡을 단순 극영화라고 국한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화는 사건으로부터 일 년 후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의 충격적인 사건현장을 넘어 그 여파가 얼마나 계속 한 가족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여기에는 몇 가지 픽션이 첨가되어 있다. 부부의 첫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와 또한 물놀이를 가리라는 결말로 막연히 풍겨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그렇다.

 

충격적인 동영상을 보며 도대체 이런 일이 있었다니! 깜짝 놀라며 분노하게 한다. 더 나아가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 혹은 가족들, 내 자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2. 빗방울전주곡이란? (상드의 일기를 통해)

조르쥬 상드는 저서 ‘나의 생애’에 이렇게 적고 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쇼팽)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도착 하였을 땐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앉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무겁고 얼음장 같은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자신의 가슴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중략]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 속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바뀌어진 빗방울이었던 것이다.

다시 곡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곡은 그저 무심하게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문득 ‘아… 비가 오네’ 하는 느낌. 왼손은 빗방울을 묘사한다지만, 오른손의 멜로디는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특별히 무겁지 않은 상념들. 가끔 가다 그 상념은 왼손의 빗방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오른손의 (13초, 혹은 1분 25초 부분) 음들의 덩어리로 마무리 되고 다시 시작한다.

 

편안했던 상념이 변하기 시작한다. 1분 40초부터 3분 19초까지 똑똑거리며 계속되는 리듬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의 이미지를 주었다면, 3분 19초부터는 환상 속의 공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울먹거리는 연약한 심장이 느껴진다. 감정적 에너지가 고음에서 더 밀도 있게 호소한다. 연약한 감성이 폭발할 것 같다. 작곡가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치열하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불현듯 4분 17, 18초 부분에선 순간적으로 평온한 현실로 돌아온다. (이 모든 묘사는 필자가 연주할 때 느끼는 상태이므로, 개인적 느낌의 묘사로만 받아주시길…).’

 

배경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른다. 이사의 풍경이 무심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쁜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쇼윈도의 옷을 보고도 발걸음을 돌리는 모녀. 학원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을 부럽게 보는 딸. 택시 노조 시위에 참여하자고 권유 받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은 여자. 하지만 봇물처럼 막상 비가 쏟아지면서 과거와 조우하는 감성적인 추억들(부부의 첫 만남)이 되새겨진다. 제대 후 막연했던 남자와 일당 3만원에 엑스트라로 전전하던 여자에게 쏟아지는 비처럼 막막하고 구질구질한 게 없겠지만, 복권을 사려다 만난 헤드라이트 불빛이나 흐트러진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머리끈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일 년 후, 삶 속에서는 여전히 궂은비가 오지만 그들에겐 추억이 힘이 되고, 딸 혜안이의 우산이 되고자 묵묵히 비를 견뎌내는 것이다.

 

3. 영화 속 살펴보기 (세부 줄거리에 대한 단상들)

너를 보면 즐거웠고

그랬다가

너를 보면

내가 보여 갑갑했다가

이제는 너를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우리 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글이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혹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우리 지지치 말고 계속 이 작업을 하자! 라고 다짐 하는 듯한 여운이 든다.

플롯은 꽤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우자동차가정아파트에서 이사 나오는 장면이 시작이다. 담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 지하 월세 집으로 이사 오게 된다.

 

대우자동차 시위의 후유증으로 등에 파스를 도배하고 사는 남자는 택시 운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택시연맹소속의 집회로 일 년 만에 또다시 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제 그는 섣불리 예전처럼 덤비질 못한다.

 

남자는 시위가 나가지 않고 혼자 골목에서 우유팩을 찬다. 잠시 대우자동차 노조 동료들과 여럿이서 족구를 하던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넘어져 버리는 현실. 그를 바라보는 딸이 있다. 그는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앞 뒤 젤 것도 없이 등록시켜준다.

 

‘너네아빠는 돈도 없고 힘도 없다’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남자, ‘엑스트라 배우였으니까 너의 아빠와 결혼했지’ 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여자. 그리고 이층 집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설거지를 하며 눈치를 보았던 혜안이. 이쯤 되면 이들은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눈 돌리면 바로 옆에 있는 이웃들이다.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아서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리는 바로 우리들을 보고 부디 분노를 서슴지 않길.

 

 

<각주 부분은 붙여넣기 하기가 까다로운 관계로^^;생략하겠습니다. 목요일 날 발제문에서 모두 확인하실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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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의 리뷰를 보고 떠오르는 ?

영상이론과 김현선

 

하나의 전제

나는 전 시간에 <빗방울 전주곡>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본 내용에 대한 곡해의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의 전제

나는 <<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그러므로 리뷰에 쓰여진 내용에 관한 질문은 가능하다.

 

본론.

헤어나올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있는 부모가 꾸는 꿈은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자신의 딸만은 그들의 삶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꿈은 자신들에게 처해진 현실은 고스란히 남긴 채

이미 누군가가 여유롭게 누리고 있을 또 다른 현실로 자신의 딸을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꿈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한들 문제적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현재 부모의 현실을 이어받는 것이 그들의 피를 가진 딸이 아닐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딸은 여전히 그 현실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대안은 근본을 찾아나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지니는 허망함과 그 이후의 난감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곳'은 저 멀리에 있는 피안(彼岸)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차안(此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혹은 그들의 미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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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영상이론과 김현선

 

뜨거운 게 좋아.

-복잡한 심경을 뚫고 지나가는 단순한 정신의 행로-


일단 ‘독립영화에 대한 독립영화’를 보고 난 나의 소감은 역시 ‘뜨거운 게 좋다’이다. 과거 어느 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던 생각은 인간은 뜨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다른 상황에서 다른 것을 보면서 그 뜨거움을 간절하게 바랐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영화를 보면서, 그러는 내내 울컥하고 목까지 차오르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그렇게 나를 간절하게 했던 ‘뜨거움’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는, 다시 한번, ‘인간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일정 정도의 따뜻함을 유지하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고, 또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해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 안에서 ‘독립영화’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독립영화가 태생부터 정의되어진 것들에 포섭되지 않는 정의되지 않은 것들의 이름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독립영화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독립영화는 ‘(     )에 반하는 영화’라는 정의되지 않는 정의 혹은 부정형의 정의밖에 내릴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비어있는 그 무엇은 무한하게 새로 생겨나고 빠르게 크기을 갖춰 나가며 그와 동시에 그에 걸맞는 힘을 행사하는 모든 유형의 권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독립영화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몇 번이고 자신의 존재를 부르짖지만 그 메아리는 다시 변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영화가 (     )에 반하면서 찾아나가는 또 다른 무엇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잠정적인 결론을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내가 다다르게 한 독립영화의 목적지는 결국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제껏 이 시대의 공간을 겸손하게 점유해 온 하나의 사람이며, 외진 구석이 본래 자신의 자리였으리라 묵묵히 받아들이고 순간을 견뎌온 우직한 사람이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살아있는 사람이며, 이렇게 저렇게 부딪치게 되는 차가운 발길질에 투쟁해 온 뜨거운 사람이다. 그래, 그 사람들은 그 자체가 ‘뜨거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저런 수식이 필요없는 그냥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과 영화와 이들을 바라보는 나는 무엇으로 만날 수 있는가?

그래, 그건 또 ‘뜨거움’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차가운 걸 차갑다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하여 드디어 다다르게 된 나의 목적지.

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잠정적인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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